파리 외방 전교회는 아시아의 비 그리스도교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성당을 세우고 성직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1658년 창설되어 1664년 교황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대신학교에서 오늘날까지 아시아로 4,000명 이상의 선교사가 파견되었고, 현재 우리나라의 서울, 대전, 안동을 비롯한 6개 교구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이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은 편지를 보내 선교사 성인 정하상 바오로는 북경을 10여 차례 왕래 하였으며, 이 편지를 받은 교황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조선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선의 쇄국 정책으로 말미암아 입국하기 힘들고 다른 곳에 급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 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샴(태국) 교구의 방콕에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것은 이유가 안된다며 외방 전교회 본부와 교황청 포교성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편지를 띄우니, 이것이 교황청으로 하여금 조선 교구를 창설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1831년 9월 9일,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교구장으로 임명한다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그 후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이 조선에서 선교하였다. 이곳 전시실에서는 이런 순교자의 유품과 박해의 도구,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그림 등을 볼 수 있으며 특히 한국의 순교자들의 유품은 따로 보관되어 있는데, 김대건 신부의 편지도 있다. 회원 중 한국에서 순교한 10명의 복자의 이름도 새겨져 있는데, 이 분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의 뒷 정원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그 당시 신학생들이 선배 선교사들의 순교 소리를 듣고 떼 데움(Te Deum 감사가)을 소리 높여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성인들
성 엥베르 라우렌시오 (1796~1839)
성 모방 베드로 (1804~1839)
성 샤스땅 야고보 (1804~1839)
성 베르뇌 시메온 (1814~1866)
성 랑페르 드브레트니에르 유스또 (1838~1866)
성 도리 헨리꼬 (1839~1866)
성 다불뤼 안또니오 (1817~1866)
성 볼례 루도비꼬 (1840~1866)
성 위앵 루가 (1836~1866)
성 오메뜨르 베드로 (1837~1866)

위의 한국순교자현양비는 명동본당 신자들이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목하다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및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증한 것이다. 비석 뒷면에는 '한국의 순교자들'(Martyrs de Corée)이란 제목아래 10명의 외방전교회 소속 순교 성인과 한국 순교 성인의 두 대표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정하상 바오로 외 91명의 순교자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또 1866년 순교했지만 시복 대상에서 제외된 가경자 뿌르티에, 쁘띠니꼴라 신부의 이름도 함께 새겨 놓았다.


순교자 전시실에 들어서면 중앙에 아래 왼쪽 그림과 같은 사다리 같은 이상한 모양의 전시물을 보게 되는데 이는 베드로 보리 신부의 목에 채워졌던 칼이다. 이 칼을 축으로 하여 벽을 빙 둘러 게시된 베트남 순교화도 볼 수 있다.
기념물은 주로 순교자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성해는 지하 성당의 순교자 제단 아래와 지하 성당에서 순교자 기념관으로 이어지는 두 계단 옆에 있는 유해함에 모셔져 있다. 한국 순교 성인에 관계되는 유해는 순교자 기념실에서 지하 성당으로 올라가는 좌측 계단의 중간 부분에 놓여잇다.

■ 기적의 메달 성당
1830년 7월 18일 파리의 뤼 뒤 바크에 있는 카리따스 수녀원의 수련수녀 카타리나 라부레에게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있었다. 그 후 11월 27일 과 12월말에도 발현하셨다. 카타리나 수녀는 수호천사의 인도로 성모 마리아를 만났는데, 성모 마리아가 카타리나 수녀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신 곳은 수녀원 성당의 제대 위였다. 머리에는 부드럽고 흰 베일을 쓰셨고, 발 밑에는 지구의가 놓여 있었으며, 손에는 작은 십자가가 꽂힌 지구의를 들고 계셨다. 성모님은 말씀하셨다.
"이 공은 지구의 모형이다. 나는 이것을 위하여, 또 이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다. 이 빛은 내게 청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주는 은총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은총을 알지 못하리니 그것은 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 카타리나 수녀는 성모 마리아를 둘러싸고 있는 타원형의 빛을 보았다. 타원형의 빛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 겨져 있었다.
"오! 원죄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여, 당신께 날아드는 우리를 위해 받으소서."
그 때 카타리나 수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똑똑히 들었다.
"이 모습 그대로 패를 주조하라. 이 패는 은총의 패로서 이것을 갖고 다니는 사람은 누구든지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패의 뒷면이 나타나는데 M자 위에 십자가가 있고, M자 밑에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을 상징하는 심장이 있었으며 예수 성심은 가시관으로, 성모성심은 칼에 찔려 있었다. 잠시 후 성모 마리아는 서서히 사라지셨다. 그 후 퀠렌 대주교의 허락으로 1832년 6월 30일에 나온 최초의 패가 바로 성모 마리아의 '기적의 패'이다. 영광의 계시를 받았던 카타리나 수녀는 영원한 비밀을 간직한 채 침묵 속에 살았다. 1876년 연초에 "이해가 나에게는 마지막 해가 될 것이다"고 예언하더니, 그해 12월 31일, "우리가 원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이 지당하오니 로사리오 기도를 성심껏 드리자"는 유언을 끝으로 오후 6시에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70세였다.

성 빈첸시오 바오로에 의해 세워진 "자비의 수녀회"에 소속된 이 소성당은 불란서 파리의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라브레 수녀는1806년 5월2일 불란서의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에 11남매중 아홉번째로 태어나서 1830년 24세의 나이로 "자비 수녀회"에 입회 하였다. 본원에서 수련생활 중 라브레 수녀는 2번의 성모 발현을 지켜 본 것이다.

성당내부 제대 위편 벽에는 성모의 첫번째 발현 장면이 그려져있고 우측에는 두번째 발현 모습을 조각으로 장식하였으며 그 밑에는 성모 발현을 체험한 "라부레"수녀의 시신이 모셔저 있다.

첫번째 발현이 있은 후 4개월이 지난 1830년 11월 27일 오후 5시30분 대림 첫주일 전인 토요일에 2번째 발현이 있었다. 발현후 제작된것이 기적의 메달이다. 기적의 메달은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져 있다. 성모님을 중심으로 새겨진 글씨는 <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을 의지하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라는 기도문이다.
뒷면의 M자 위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가로지른 막대기가 있으며 그 밑에는 예수성심과 성모 성심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타원형 주위에 금빛으로 새겨진 12개의 별은 12사도를 상징한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메달을 만드세요, 메달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믿는자에게는 은총이 충만할 것입니다.

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일일이 기적의 메달을 나누어 주는 것이 인상적으로 보였다.
■ 파리
파리는 세느 강에 떠 있는 시테 섬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BC 7∼5세기에서부터 시테섬은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중세에 이르러 도로를 정비하고 상수도를 설치하면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수 차례의 종교전쟁 이후 루이 14세의 절대 정권에 의한 화려한 궁중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이에 대항하여 혁명이 일어나 파리가 황폐해 졌지만 이것을 나폴레옹 3세의 거리와 하수도 정비를 통하여 오늘의 파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파리는 여전히 온 세계의 문화, 예술의 중심 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 노틀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
노트르담이란 '우리의 어머니'란 뜻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칭인데, 성모 공경의 기운이 고조되던 12세 이후에 쓰이기 시작하였다. 유럽에는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의 성당이 여러 곳에 있으며, 그 규모가 다를 뿐 건축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이 대성당은 파리를 성모님께 봉헌한 기념으로 봉헌되었고, 파리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라는데 그 뜻이 있다. 13세기의 화려한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 특히 둥근 장미 창으로 스며드는 빛의 조화는 성당 안에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1793년 혁명기에 외벽을 장식한 조각군이 대파되어 혁명의 상처를 지녀오다가 19세기에 수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쪽 출입문에 있는 성모자상은 혁명 때에도 유일하게 파손되지 않고 흠 없이 보존되어 오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을 끌고 성모님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워준다. 현재 이 대성당은 9,000명을 수용 하고 미사를 올릴 수 있으며, 세느강과 시테섬을 배경으로 한 그 모습 은 신비롭고도 아름다워, 순례자로 하여금 카메라나 화폭에 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에 족하다.


노틀담 대성당의 정문인 고딕의 이 3개의 정문(대략 1220년)은 상과 상 사이에 간격이 있고, 소재 형태는 섬세하고 부드러워 자연을 보는 눈이 솔직하고 설명적이다. 중앙 정문은 고딕 예술 중에서도 보다 주제가 높다고 생각되는 최후의 심판이 대표된다. 문을 나누는 기둥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고, 한쪽 정문과 쪽문 사이 부분에는, 악한 화신과 역천사와 순교자들이 있다. 아치형 주위를 정교하게 천국과 지옥의 그림으로 천상의 뜰을 상징하고 있다. 반월형 속의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상과 가로의 마돈나 그리고 성 죠반니, 그리스도 수난의 상징과 천사들 3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쪽으로 구제의 기교로 얻은 지복의 그림과, 최후의 처벌로 굳어져서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사람들의 그림이다.
오른쪽 정문인 성 안나는 1160년부터 1170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거기에 있는 부조상은 12세기부터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5세기 파리 사제 성 마루셀 부조상은 기둥이 있고 그 기둥은 정문을 나누고 있다. 반월형이 있는 곳에는 2사람의 천사를 양쪽에서 지지하는 사제 모리스드 쉴리와 루이 7세 왕이다. 3번째의 좌정문은, 성처녀라 불리는 각조높은 서사시와 같이, 건축상 웅대하게 엄숙하고, 3개의 문중에서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기둥의 성모마리아 상은 신선하고, 상부 반월형에는 성처녀의 생애의 그림이 있고, 죽음과 무궁의 지복 및 승천을 각조 높게 표현하고 있다. 정문의 주위는 매달의 업무를 표현하고 한편 정문과 쪽문 사이의 부분은 성자들과 천사들이다.

양끝의 장미창에는 13세기 호화로운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워 넣어져 있고, 특히 대략 1250년에 만들어진 북측의 장미창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 중앙에는 성모마리아상이 그려져 있고, 찬란하고 훌륭한 푸른 색조로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남쪽의 장미창은 1200년대 것이지만, 18세기에 수복된 것이다. 중앙에 12사도, 순교자, 현명한 여자, 어리석은 여자 등으로 둘러싸여 축복을 주고 있는 그리스도상이있다. 풍부한 색채와 광채, 정확한 유리조각의 배분은 우리들에게 눈부시게 빛나는 별이 갑자기 깨어져서 흩어 날아가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균형있는 아름다움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들어가는 길은 130미터, 폭 50미터, 높이 35미터로 9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직경 5미터의 원기둥은 성당을 5개의 복도로 나누고 있고, 외진과 내진을 둘러싼 이중의 복도 구조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열리는 창이 있는 후진은 또 그 둥근 천정 위에 부드러운 빛이 들어오는 큰 창문이 딸려 있다. 1600년부터 1700년대의 미술품이 많이 보이는 성당의 주복도를 따라서 율동적으로 이어져서 마지막으로 외진을 가로 지르는 딸린 복도와 만나고 있다.
외진에서 내진으로 옮겨지는 입구에 있는 그림의 기둥 중 오른쪽은 14세기 유명한 노틀담 드 파리의 조형상이 있지만, 이것은 성 에냔의 성당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조각이 설치된 나무 성가대는 18세기 것으로 중간 내진을 둘러싸고 있다. 그 중앙 제단에는 니콜라 쿠스토우 피에타상이 놓여 있다. 측면에는 교 쿠스도우 작품, 루이 13세의 초상과 코이세보 작품, 루이 14세 상이 있다. 마지막으로 방사상으로 되어있는 성당 복도에는 많은 묘가 있다.우측의 산 도니 성당과 생트 마들레느 성당 사이에는 순교자 유물과 은제품이 넣어져 있는 보물관 입구가 있다. 성 유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단편과, 가시관, 거룩한 못이다. 성당 안에서 정면 입구를 뒤돌아보고, 18세기의오르간이 윗쪽에 있다. 황도대와 달과 악덕, 미덕을 나타내는 커다란 장미창에 가슴 찡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몽마르뜨 예수 성심 성당(Sacre Coeur de Montmarte)
몽마르트는 파리 북동쪽에 있는 높이 130m정도의 언덕이다. 19세기초에는 몽마르트는 포도밭으로 꽉 차고 풍차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가 1824년경 농가를 개조한 댄스홀이 문을 열면서 예술가들이 모이기 시작 하였고 루소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지금은 테르트르 광장 주변의 골목에 무명 화가들이 모여 관광객을 상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 예전의 예술의 이미지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예수 성심 대성당은 몽마르트 언덕에 솟아 있는 로마네스크 비잔틴 양식의 하얀 성당으로 전쟁의 패배로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프랑스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가톨릭의 숭고한 신앙심을 호소할 목적으로 이처럼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세워졌다.
1876년에 기공하여 1910년에 준공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항복시킨 후에야 비로소 봉헌식을 올렸다는 데에서 프랑스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다. 전면에 구국의 성녀 요한나 아르크(잔 다르크)가 말 위에서 검을 빼들고 호령하는 상을 세운 것도 같은 의도에서 온 것이다. 비잔틴 양식의 흰 돔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파리 시가에서 올려다 보면 매우 아름 답다. 80m의 높이를 자랑하는 대성당의 돔은 왼쪽 밑에서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아래층까지 탁 트인 성당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밖의 회랑으로 나서면 파리 시가를 한 눈에 전망할 수 있다. 대성당 앞 테라스에서 왼쪽에 있는 구획 뒤로 돌아가면 데르트르의 광장(Place du Tertre)이 있다.


◆ 세느강

◆ 샹젤리제 거리
샹젤리제(Champs-Elvsees)는 개선문과 콩코드 광장을 연결하는 폭 70m, 길이 2km의 대로 중앙의 롱포앙을 경계로 동쪽 반은 공원, 서쪽 반은 상점가로서 특히 리도쇼(Lido Show)로 유명한 카바레와 식당/카페/극장 등이 줄지어 서 있는 파리 제일의 번화가이다. 옛날에는 왕족들의 산책 장소였고 10년 전 도로가 확장됐으며, 왕궁 정원사가 꾸미기 시작했다.

◆ 개선문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기공되어 그의 사후 준공된 세계 최대의 개선문이다. 높이 50m, 개선문(凱旋門)의 바로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사철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헌화가 시드는 일이 없다.
비문 : 자기 조국을 위해 한 불란서 군인 쉬고 있네
◆ 에펠탑(Eiffel)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프랑스 기사(技師) 규스타브 에펠이 세운 높이 300m의 철탑. 이 에펠(Eiffel)탑은 파리의 상징처럼 되어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274m까지 오를 수 있다. 89년간에 걸쳐 건조된 철탑 건조물이다.

■ 벨라뎃다 생가
성모 마리아는 1858년 2월부터 7월까지 18회에 걸쳐 벨라뎃다 수비루(14세)에게 발현 하셨다. 연약한 양치기 소녀 벨라뎃다가 친구 및 동생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들로 나가 개울을 건너려고 양말을 벗을 때였다. 아주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부인이 저만치 서 계시는 것이었다. 별 말씀 없이 부인은 아기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결함 그리고 모성의 부드러움을 지닌 채 푸른 띠를 나부끼며 정성스레 합장한 손으로 묵주알을 굴리고 계셨다.

당시 프랑스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물결의 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발현에 대해 말하는 벨라뎃다는 정부 당국과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발현 장소에 가는 것마저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의 발현 때 '나는 원죄없는 잉태'라 하심으로써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선포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교의를 확인하신 마리아는 기적의 샘을 솟게 하셨다. 즉 벨라뎃다로 하여금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이 귀한 그 지방의 마사비엘 동굴에 샘을 파게하시고, 그 물로 불치의 병자들을 속속 치유하기 시작하셨다.
동정 마리아의 루르드 발현은 1862년 공인되었고, 잡목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동굴 속에 '원죄없는 잉태'의 성모상이 1864년 최대의 성황리에 안치되었다.

벨라뎃다의 부모는 너무 가난하여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양육할 형편도 못되었다. 소유하고 있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던 방앗간마저 빚 때문에 저당 잡혀서 그야말로 끼니도 잇기 어려울 정도의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서 벨라뎃다는 이웃 마을의 아기를 잃은 집에 얹혀서 15개월이나 살다가 온 적도 있었다. 벨라뎃다는 그런 집의 맏딸이었다.
◆ 벨라뎃다의 생가
1844년 벨라뎃다 성녀는 이 집에서 태어나 10살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물레방앗간 이었는데 벨라뎃다의 가정은 처음에는 제법 잘 살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하나 밖에 없는 방앗간이라 동네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사람이 워낙 무골호인이라 품싻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냥 공짜로 일을 해주고 외상으로 해준 일은 떼이기가 다반사였다한다. 그래서 결국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방앗간은 마침네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날씨는 추운데 식구는 많고 딱한 사정을 가엽게 여겨 마을 이장이 비어있는 마을 감방서 살도록 주선을 해 주었다. 아래의 까쇼가 벨라뎃다와 그 가족들이 살던 감방인데. 원래의 방앗간은 지금 기념품 가게로 변했다. 그러나 옛날의 방앗간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지금도 옛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옛 감방 - 까쇼 (Le Cachot)
프랑스어로 꺄쇼라고 부르는 감방인데 어린 시절 벨라뎃다는 너무나 가난하여 가족들이 이 곳에서 살았으며 벨라뎃다가 성모님을 만난 것은 이곳에서 살 때였다. 원래 죄수들의 감방이었던 이 곳을 사람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감옥을 옮기면서 이 낡은 건물을 벨라뎃다의 친척이 불하 받았다고 한다.
물레방앗간을 하던 벨라뎃다의 아버지가 망해서 갈 곳이 없자 친척이 감방 하나를 빌려주었다. 벨라뎃다 4남매와 부모 등 6식구가 이 단칸 감방에서 생활했다. 4-5평 정도의 작은 방이 북쪽 방이라 어둡고 추우며 공기가 잘 안통해 천식을 앓던 약한 벨라뎃다에게는 더 없이 고통스러운 거처였다.

이곳은 산중이라 몹씨 춥다. 그래도 우리나라 겨울 처럼 매섭지는 않은데 습도가 높아 으스스하게 춥다. 이런 추위가 몸을 더 상하게 한다. 냉방을 덥히고자 2월 11일 벨라뎃다는 동생과 친구와 함께 땔감 나뭇가지를 주으러 가던 길에 마사비엘 동굴에서 성모님을 만난 것이다. 지금 이 건물은 수녀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벨라뎃다가 어릴 적 살던 모습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 바트레스(Bartres) 마을
벨라뎃다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루르드에서 오리 정도 떨어진 이웃 마을 유모집에서 잠시 살았다. 마을 어귀 오른 쪽 언덕에 양우리가 있다. 벨라뎃다는 갖난 아기 때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 친구인 양모에게 와서 자랐다. 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어릴 때의 신세를 갚으라고 다시 양모 집에 보내어 벨라뎃다는 농사 일을 거들고 양을 치다가 첫 영성체를 준비하기 위하여 루르드로 돌아 왔을 때 성모 발현을 보았다. 마을에는 양모의 집과 벨라뎃다가 다니던 성당이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양 우리 앞 언덕배기에 걸터 앉아 마을을 내려다 보면 벨라뎃다가 자연 속에서 누렷을 법한 평화로움을 지금도 맛 볼 수 있다.

아래 사진들은 유모의 집이 있던 조그마한 마을의 평화로운 정경으로. 전형적인 프랑스의 시골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을 한 가운데 성당이 있고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 성당의 자그마한 마당은 이 마을 신자들의 공동묘지이다. 한 집에 무덤이 하나씩이다. 집집마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 뚜껑을 열고 순서대로 관을 넣는다. 가족들은 성당에 올 때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산이와 죽은이가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간다. 성당 앞에는 찻집이 있는데 이 집에서 직접 굽는 쿠키와 향기 좋은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루르드에 좀 여유를 가지고 순례하는 사람들은 이 곳까지 산책을 할 만하다. 유모의 집은 지금 선물가게를 하고 있는데, 벨라뎃다가 살던 방은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벨라뎃다는 1866년 루르드를 떠나 수녀가 되었으며, 35세를 일기로 1879년 선종하였고 1933년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