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에 자비와 관용을 보여주었던 선량왕, 레오폴드 2세
벨기에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벨기에는 원래 네덜란드와 함께 플랑드르 지방에 속했으며, 오랫동안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부르고뉴 공국에는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계승자인 마리 공주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을 하며 플랑드르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이후 카를 5세가 죽으며 무적함대로 유명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플랑드르를 상속받게 되지요. 펠리페 2세에 대항해 네덜란드는 독립전쟁을 시작했고, 70여년에 걸친 싸움 끝에 독립한 부분이 네덜란드, 그러지 못한 부분이 벨기에가 됩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회의의 결정에 의해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되지만, 현지 귀족이 왕좌에 오르기를 바라지 않았던 강대국의 결정으로 독일 귀족인 레오폴드 1세를 왕으로 모셔와야 했습니다.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부터 시작해 거의 5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강대국의 지배아래 있었던 벨기에인 만큼 피지배민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그러릴가요.
당시 불어닥친 제국주의 열풍에 편승해 벨기에는 식민지 확장에 나서게 되고, 아프리카의 콩고의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제압해 식민지화하게 됩니다. 콩고인들은 당시 수요가 높았던 고무를 생산하기 위해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벨기에는 후발주자로 나선 만큼 콩고인들을 더더욱 잔학하게 수탈했습니다.
레오폴드 1세가 죽고 레오폴드 2세가 왕위에 즉위했을 때, 이미 많은 콩고인들이 부랑자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고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벌어지는 비극은 제국주의의 시대에는 일상이기도 했기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었습니다. 레오폴드 2세가 즉위하기 전까지는요. 레오폴드 2세는 즉위하자마자 더 이상의 식민지 확장 계획을 중단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는 브뤼셀에서 열린 지리학 회담을 개최하며 영토를 더 늘릴 필요가 없다는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여러분들을 브뤼셀로 초대한 것은 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도는 애초부터 전혀 없습니다. 제 나라 벨기에는 자그마한 나라이지만 동시에 행복한 나라이며 저에게 많은 면에서 만족을 안겨주는 나라입니다."
1876년, 아프리카 협회가 만들어졌고 레오폴드 2세는 그 회장이 되어 아프리카의 낙후한 생활을 끌어올리고 아프리카인들이 격는 고통에 인도주의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런 그의 반제국주의 행보는 많은 지식인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레오폴드 2세의 식민지 수탈을 반대하는 연설은 기립박수를 받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인들이 식민지배당하며 맺은 불평등 조약들을 하나하나 고쳐나가 그들의 삶을 바꾸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레오폴드 2세는 자산을 털어넣는 것도 모자라 벨기에 정부에 지원을 요청받아 1889년에는 철도를 깔았고 1890년에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반노예 회의를 연달아 주최하며 강대국 사이에서도 꿋꿋하게 목소리를 냈습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는 벨기에 내에서도 심한 반대에 부딪쳐 좌초되었습니다.
많은 콩고인들이 이전에 고무를 채집하기 위해 일을 하다가 사고로 손목과 팔을 잃어버렸기에, 레오폴드 2세는 그들을 위해 목제 손과 팔을 자비로 제작해 배포했습니다. 레오폴드 2세의 명령으로 그동안 수탈을 목적으로 활동하던 벨기에의 군인들은 현지인들을 돕는 여러 일에 투입되었습니다. 위험한 지역 대신 인부들을 멀리 보내서라도 안전을 추구했고, 그들의 가족들을 군인들이 모아 대신 지켜주기도 했습니다.
레오폴드 2세는 아프리카 흑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핍박받는 이들에게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매년 요트를 타고 영국 런던의 매음굴에 몰래 가서 10살~15살 사이의 강제로 팔려온 소녀들을 돈을 주고 구입하고, 다른 유럽국가에 가서 몰래 돈을 쥐어주고 풀어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구제를 받은 소녀들의 수만 해도 수백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1891년 레오폴드 2세는 유럽 전체에 충격을 주는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레오폴드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한 백인 농장주가 흑인 노예를 말을 안 듣는다고 잔인하게 괴롭히다가 어린아이를 포함한 일가족을 통째로 죽여버린 사건이 일어났던 겁니다. 노예를 주인이 어떻게 하든 자유였음에도, 레오폴드 2세는 백인 농장주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하지만 이는 유럽 내에서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레오폴드 2세는 사형 대신 다른 농장주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농장주의 손목을 절단하는 절충안을 집행했고, 그럼에도 주변국에서는 흑인을 죽인 것 때문에 백인을 벌한다며 비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손목 한쪽을 절단당한 농장주 역시 복수심에 풀려나자마자 다른 백인 농장주들과 힘을 합쳐 무고한 흑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죽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잡혀온 농장주에게 레오폴드 2세는 팔을 절단하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농장주는 풀려나자마자 수십 명의 흑인들을 또 죽이고, 이에 레오폴드 2세는 농장주를 사형시켜 버렸습니다.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거의 50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흑인들이 죽었음에도 차례로 손목절단형, 팔 절단형이라는 잔인한 형벌을 백인에게 시행했다는 이유만으로 벨기에 의회마저도 왕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라이벌인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평소 레오폴드 2세가 지식인들에게 '선량왕'이라 불리는 것을 비꼬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놈이 인간이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결국 레오폴드 2세는 의회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팔아야 했고, 흑인들은 다시 선왕때처럼 잔혹한 수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885년 800만명이었던 콩고의 인구는 고작 8년만인 1893년 3천만으로 불어날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보였지만, 벨기에에 의해 콩고가 국유화 된 이후로는 다시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자연적으로 인구가 그렇게 불어났을리는 없고, 어찌 보면 그 전의 학정에 집을 잃거나 도망쳐나온 인구가 레오폴드2세의 선정에 돌아오면서 호구조사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8년동안 무려 2200만명이 다시 삶을 찾았던 거에요.
레오폴드 2세는 이후 의회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무기력하게 살다가 노환으로 별세합니다.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자국민에게 무시무시한 형벌을 집행할 배짱을 가지고 있었지만, 항상 약자에게 관대했고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레오폴드 2세의 8년 동안의 행보는 안타깝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편입니다. 다만 콩고에서만큼은 잊혀지지 않아 위대한 성자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기득권의 최고층이었던 왕의 입장에서 가장 밑바닥의 신분이었던 노예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레오폴드 2세의 생각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고귀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