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현리 전투
산 넘고 또 넘는 도주
중공군 5차 2단계 공세의 막바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현리였다. 결과를 본다면, 중공군은 제 의도를 모두 달성하지 못했다. 서쪽으로는 미군 2사단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국군 1군단의 신속한 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럼에도 현리에서의 전투만큼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공세로써 한국군 1개 군단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중공군 전사에 등장하는 오마치 고개 공략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선공 부대는 반나절에 걸쳐 약 30㎞를 종심기동하면서 거의 1시간에 한 차례 이상 국군과 교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은 곧 물러나고 말았던 모양이다.
반나절 동안 30㎞를 이동할 수 있도록 중공군의 진격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내딛는 중공군에게 국군의 저항은 아무런 힘으로 작용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싸우려는 의지를 한 데 묶지 못했던 3군단 예하 각 사단의 조직력이 문제를 드러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듯 느슨하게 묶여 있던 장병들의 의지는 퇴각 때에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국군 장병들은 걸음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풀이 가득한 방태산을 허겁지겁 올랐다. 전체적으로 이들을 이끌 지휘통제력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국군 장병들의 뒤를 중공군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추격했다는 것이다.
방태산을 넘을 경우 닿을 수 있는 곳이 광원리라는 곳이다. 방태산을 넘기 전 3군단 예하 각 장병들은 구두로 “산을 넘어 광원리에 모인다고 한다”는 말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무질서하게 흩어지며 산을 오르는 3군단 장병들에게는 어느덧 광원리가 1차 집결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국군 장병들의 뒤를 좇아 함께 방태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 중공군의 추격은 광원리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국군으로 볼 때는 퇴각의 연속이었다.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로 가는 동안 중공군의 추격이 계속 이어지자 광원리에 도착한 장병들은 역시 무질서하게 창촌 쪽으로 퇴각했다고 <6.25전쟁사>는 적고 있다.
군대가 철수할 때는 최대한 접적(接敵) 상태를 유지하는 게 옳다. 뒤로 물러나면서도 적이 다가서면 교전을 벌이고, 상대에게 최대한의 희생을 강요해야 한다. 그로써 아군은 나름대로 전열(戰列)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벌 수 있다. 상대는 그런 저항에 따라 희생이 발생하면 추격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나마 꺾일 수 있다.
산 넘고 또 넘는 도주
중공군 5차 2단계 공세의 막바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현리였다. 결과를 본다면, 중공군은 제 의도를 모두 달성하지 못했다. 서쪽으로는 미군 2사단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국군 1군단의 신속한 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럼에도 현리에서의 전투만큼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공세로써 한국군 1개 군단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중공군 전사에 등장하는 오마치 고개 공략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선공 부대는 반나절에 걸쳐 약 30㎞를 종심기동하면서 거의 1시간에 한 차례 이상 국군과 교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은 곧 물러나고 말았던 모양이다.
반나절 동안 30㎞를 이동할 수 있도록 중공군의 진격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내딛는 중공군에게 국군의 저항은 아무런 힘으로 작용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싸우려는 의지를 한 데 묶지 못했던 3군단 예하 각 사단의 조직력이 문제를 드러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듯 느슨하게 묶여 있던 장병들의 의지는 퇴각 때에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국군 장병들은 걸음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풀이 가득한 방태산을 허겁지겁 올랐다. 전체적으로 이들을 이끌 지휘통제력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국군 장병들의 뒤를 중공군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추격했다는 것이다.
방태산을 넘을 경우 닿을 수 있는 곳이 광원리라는 곳이다. 방태산을 넘기 전 3군단 예하 각 장병들은 구두로 “산을 넘어 광원리에 모인다고 한다”는 말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무질서하게 흩어지며 산을 오르는 3군단 장병들에게는 어느덧 광원리가 1차 집결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국군 장병들의 뒤를 좇아 함께 방태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 중공군의 추격은 광원리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국군으로 볼 때는 퇴각의 연속이었다.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로 가는 동안 중공군의 추격이 계속 이어지자 광원리에 도착한 장병들은 역시 무질서하게 창촌 쪽으로 퇴각했다고 <6.25전쟁사>는 적고 있다.
군대가 철수할 때는 최대한 접적(接敵) 상태를 유지하는 게 옳다. 뒤로 물러나면서도 적이 다가서면 교전을 벌이고, 상대에게 최대한의 희생을 강요해야 한다. 그로써 아군은 나름대로 전열(戰列)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벌 수 있다. 상대는 그런 저항에 따라 희생이 발생하면 추격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나마 꺾일 수 있다.
- 중공군 5차 2단계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기동 중인 미 2사단 9연대 장병들이다. 미 2사단은 한국군 3군단 서쪽 방어지역에서 중공군 공세를 좌절시켰다.
따라서 등을 보인 뒤에라도 적절한 시점에 대오를 구축해 적을 향해 화력을 사용해야 한다. 한 번 등을 보인 뒤 그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뒤로 내뺄 경우에는 아군은 대오를 전혀 갖추지 못한 분산(分散)의 상황에 접어들어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3군단 전체가 커다란 분산의 상태에 빠졌던 듯하다.
방태산을 넘은 3군단 병력은 광원리까지 중공군의 추격이 펼쳐지자 다시 창촌 방향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오마치 고개를 향해 일찌감치 종심기동을 한 뒤 주변 일대에까지 후속 병력을 배치한 중공군은 창촌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5월 18일 오후 6시쯤 중공군은 이미 창촌 일대에 병력을 진입시키고 말았다. 아쉬운 대목이 또 드러난다. 국방부 <6.25전쟁사>는 3사단 18연대의 경우를 소개하고 있다. 이 부대는 꽤 유명했다. 3군단에서 가장 용맹하기로 이름이 나있던 부대였다고 한다. 그래서 연대 별명이 ‘백골(白骨) 연대’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방태산을 넘어 퇴각하면서도 일정하게 대오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군기(軍紀)가 엄정했고, 정신력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수준의 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면 발길을 돌이켜 뒤를 좇아오는 중공군에게 반격을 가할 수도 있었을 테다. 비참하게 쫓기느니 한 번 정면으로 붙어보자는 각오로 부대 장병들이 중공군에게 덤볐다면 어떤 결과를 얻었을까. 그러나 모두가 무너지고 있던 커다란 소용돌이 속이라면 이런 군기와 조직력을 지닌 백골 연대 또한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방태산을 넘어 창촌에 도착한 뒤 다시 이동하다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2000명 정도로 대오를 갖추고 강력한 전투력까지 지닌 연대마저 무질서한 퇴각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셈이다. <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