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에서 창조로
비너스 또는 올랭피아의 역사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1530년경부터 티치아노의 양식에 변화가 생겼다.
이전의 활기 넘치는 표현은 좀 더 억제된 명상적인 색조로 달라졌다. 티치아노는 적색과 청색처럼 강렬하게 대조되는 색채를 배열하는 대신, 황색이나 어둡고 차분한 색조들을 사용하였다.
구도에서도 과거와 같은 대담함은 사라졌다. 요정, 사티로스, 사냥꾼이 있는 전원 풍경을 묘사한 <쥬피터와 안티오페(프라도의 비너스)>194에서는 화면이 대조적으로 균형 잡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격한 운동을 표현한 부분은 거의 없다.
티치아노는 이 작품을 가리켜서 “풍경과 사티로스를 배경으로 한 벌거벗은 여인”이라고 했다.
이것을 ‘프라도 비너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작품이 오랫동안 프라도 궁전에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누드를 비너스라고 부른 것이다.
실제로는 사티로스의 형상을 한 주피터가 왕의 딸 안티오페에게 다가가는 장면이다.
1530년대에 티치아노의 명성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1530년에 처음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만났으며 3년 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화가 자이제네거의 작품을 기초로 하여 황제의 초상을 그리게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 화가인 자이제네거는 1532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실물 크기의 전신 초상화를 그렸다.
티치아노는 자이제네거가 그린 초상화를 약간 변형함으로써 황제의 위엄이 나타나게 했는데, 그 결과 카를 5세로부터 칭찬을 듣고 궁정 화가에 임명되었으며 기사 작위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 제후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 우르비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와 그의 부인의 초상을 그렸다.
프란체스코는 추기경을 맨손으로 때려죽인 적이 있을 정도로 성격이 매우 거칠고 급했지만 회화를 매우 좋아했다.
베니스에 궁전을 갖고 있었던 그는 1538년 10월에 독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티치아노는 공작의 아들 귀도발도 델라 로베레의 주문으로 <우르비노의 비너스>195를 그렸는데, 누드 인물은 조르조네의 <풍경 속의 잠자는 비너스>187와 거의 동일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현실 세계와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조르조네의 전원시적인 분위기는 좀 더 직접적인 관능 면에서의 호소력으로 대체되었다.
티치아노의 이상화된 여체의 묘사와 자세는 변함없으나, 다만 비너스가 깨어 있는 모습으로 궁전의 커다란 방에 놓인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풍경 속의 잠자는 비너스〉와 〈우르비노의 비너스〉 모두 비길 데 없이 빼어난 형태미를 보여준다.
티치아노는 이 관능적인 주제를 평생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절제와 운치 있게 그렸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그릴 때 귀도발도의 나이는 25살이었고 티치아노는 그의 나이에 두 배가량 되었다.
귀도발도는 이 작품이 자신의 애인을 그린 것이라서 소중하게 보관했다고 알려지기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티치아노가 자신의 애인을 그린 것이라도 하는데, 19세기에는 그림의 모델이 귀도발도의 어머니 엘레오노라는 루머가 떠돌았는데, 티치아노가 그린 그녀의 초상과 닮았으므로 그 루머는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 가지 설 모두 증명되지는 않았다.
귀도발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574년 타계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회화를 주문했다.
앵그르는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영감을 얻어 <그랑드 오달리스크>197를 그렸고. 피카소는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모사했다.199
오달리스크는 터키어로 ‘후궁’이라는 뜻이다.
앵그르는 이 오리엔탈 비너스의 사지를 꽃잎처럼 부드럽고 눈부시게 표현했다.
그는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지만 그곳을 여행한 유럽인들이 쓴 기행문이나 책자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는 피상적인 지식으로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해서 후궁의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런 이국적 주제의 그림은 낭만주의 회화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마네는 1863년에 <올랭피아>198를 그려 1865년 살롱전을 통해 소개한 후 문제작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 그림을 “고양이와 함께 한 비너스”라고 불렀다.
마네는 1856년 이탈리아를 두 번째 여행할 때 우피치 미술관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사했다.
마네는 티치아노의 주제를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여신을 상징하는 비너스 대신에 벌거벗은 모델을 침대에 누이고 옆에는 흑인 하녀를 세웠다.
모델은 그가 선호하는 빅토린 뫼랑이고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당시 화류계에서 흔한 이름이다.
올랭피아란 이름의 인물 중 올랭피아 말다치니 팜필리가 있는데, 마네가 이 그림을 그릴 때 특별히 이 여인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동생의 미망인이었던 이 여인은 교황의 애인이 되어 권력을 행사했다.
벨라스케스가 로마에서 <인노켄티우스 10세>180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이 여인의 초상도 그렸다.
마네는 그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교황과 올랭피아와의 관계는 오늘날보다 훨씬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마네의 <올랭피아>에는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196 그리고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의 요소도 혼용되어 있다.
드가의 말대로 마네는 다양한 데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 요소들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사용했다.
<올랭피아>는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보들레르는 마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세잔이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하여 <현대판 올랭피아>200를 그렸는데,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르 샤리바리』에서 혹평했다.
자네는 이런 시간에 나더러 <현대판 올랭피아>에 관해 말하라는 건가?
쪼그리고 누운 추악한 여자의 몸에서 흑인 하녀가 베일을 걷어내는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저 한심한 친구!
혹시 자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억하는가?
그 작품은 세잔이란 자의 작품에 비하면 데생, 정확도, 마무리 등이 탁월한 걸작이지.
(1874년 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