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에 지하철을 탔다. 오랜만에 친한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내 딴에는 멋을 부린다고 개량한복 위에 두루마기를 점잖게 걸쳐 입었다. 승객이 많아 손잡이를 붙잡고 서있었는데 갑자기 내 앞에 앉아 있던 젊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르신, 여기 앉으세요.”하지 않은가? 내가 극구 사양을 했는데도 그 젊은이가 내가 앉을 때까지 줄곧 서있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 나이 이제 예순 여덟 밖에 아닌데 벌써 어르신 소리를 듣고, 자리를 양보 받다니....... 그저 옷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자위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씁쓸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지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이 들어감은 자연의 섭리이니 결코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온갖 병들이 하나 둘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나만 해도 협심증, 당뇨병, 녹내장, 폐기종 등 가히 종합병원 수준의 각종 병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리고 불치에 가까운 병들이 나를 괴롭힐수록 어쩐지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 같아 마음이 우울하고 슬퍼진다.
5년 전에 하마터면 저승으로 갈 뻔했다. 협심증의 주증상인 흉통이 거의 없어 안심하고 지내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폐렴 때문에 호흡기 내과에서 가슴 CT를 찍었는데 거기에서 심장의 관상동맥이 세군데 다 거의 막혀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5군데의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 만약 모른 체 지나쳤다면 혈관이 막혀 사망할 수도 있었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나이 들어 병들면 얼마나 서글프고 위험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哀)
한편 나이가 들면 흔히들 노욕이 생긴다고 한다. 아마도 앞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이 지나온 날들 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더 그런 모양이다. 욕심은 충족이 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좋지 않은 악업을 짓게 한다.
나는 아내의 권유로 40대부터 불교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배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탐, 진, 치 3독(毒)이다. 여기에서 진이란 성냄을 말하는데, 우리를 망치는 세 가지 독 중 하나가 바로 성냄인 것이다. 불가에서는 마음에서 성냄이 일어나면 그 일어남을 보고, 그것을 알아차린 후에는 가만히 내려놓으라고 한다.
젊은 시절의 나는 성격이 예민하고, 욱하고 성질을 잘 냈으며, 타인의 잘못에 관대하지 못했다. 언젠가 몸이 좋지 않아 한의원에 갔더니 의사가 화병이라고 할 정도로 화가 많았다. 그러다 수행을 하면서부터 차츰 좋아지더니 나이가 든 요즘에는 거의 화를 내지 않는다. 스스로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분노는 곧 사라지게 마련이다. (怒)
그럼 나이 들어 맛보는 기쁨이란 무엇일까? 그전에, 통틀어 69년을 사는 동안 가장 기뻤던 때는 바로 큰아들을 낳았을 때였다. 장손을 안아보고 싶어 하시던 아버지께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겨드린 것이다. 아버지의 기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그 아이가 성장해서 40대 중반의 의사 선생님이 되었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힘도 약해지고, 새로운 기술에도 뒤떨어져 자주 큰애의 힘을 빌리게 된다. 나는 큰애가 내가 던진 과제를 척척 처리할 때 마다 젊은 시절의 나를 생각하게 된다. 나도 젊었을 때는 제법 유능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는 진짜 할배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다재다능한 큰애가 가까이에 있어 참으로 마음이 든든한데 아쉽게도 아직 미혼이라 손자가 없다. (喜)
끝으로 나이 들수록 즐거운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무엇보다 가정의 평화일 것이다. 아내와 나는 동갑내기라 토닥토닥 다투기를 잘했다. 젊은 시절 거의 매일 다투었는데 이 역시 수행을 통해 많이 좋아졌다. 거기에다 나도 나이 들고, 아내도 나이 들고, 아이들도 나이가 드니 평화로운 가정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노력을 하게 되었다. 우선 나 스스로도 비록 뒤늦긴 하였지만 아내에게 더욱 잘해주고 싶다. 그야말로 언제 갈 줄 모르는 인생이니만큼 살아있는 동안 사랑을 듬뿍 베풀고 싶다. 아내는 내가 당뇨를 앓고 있으므로 먹는 것 한 가지 한 가지를 꼼꼼하게 챙겨준다. 나는 그런 아내가 더없이 고마울 수가 없다.
두 번째는 규칙적인 내 생활을 즐긴다. 전날 저녁 7시에 잠들고 다음날 새벽 2시에 눈을 뜨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내 누이의 말에 의하면 나이 들어 제2외국어를 하면 치매예방이 된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공부하면 그 자체로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고 나서는 아침 산책을 하고 저녁 전 까지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니 참으로 보람 있고 즐겁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즐거운 것은 친한 친구들과의 만남이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일곱 명의 내 친구는 중 고등학교 때부터의 벗이니 반백년이 넘게 사귀어온 셈이다. 만나면 함께 식사하고 차 한 잔하면서 그동안 못한 이야기를 서로 나눈다. 그리고 내가 써서 친구들의 이메일로 보낸 내 글들에 대해 품평을 하는데 친구들의 지적이 대단히 날카로워 내가 글을 다듬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친구들은 귀찮다하지 않고 기꺼이 내 글을 읽어주어 참 고맙다. (樂)
태양은 떠오를 때가 아니라 서편에 질 때가 가장 아름답고 장엄하다고 한다. 우리네 인생도 그와 같지 않을까? 삶의 끝맺음을 기쁘고 즐겁게 맺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끝)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나이가 드는 것도 즐겁게 맞이하고 있으며
저도 60 중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려놓기에 많이 익숙해지다 보니 살아가는데
한결 편안합니다.
늘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욕심을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군요
계속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야겠지요
노년에 부딪히는 희노애락은 모두 비슷한 거 같아요.
청춘에 참지 못했던 감정들이 적당히 섞여가면서
기쁨도 노여움도 슬픔도 즐거움도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살면 좋겠습니다.
윤슬 선생님의 좋으신 말씀 감사합니다.
탐 진 치 3독을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 또 노력!
나도 몇 년 전까지는 자리 양보 받는 게 멋쩍었는데 이제 경로석을 먼저 기웃거려요. ^^
몸은 종합병원인데 의사들 말 무시하고 그냥 먹고 마시죠. 이거 저거 빼고 나면 무슨 맛으로 살겠어요.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하더군요.
그래도 건강은 늘 챙기셔야죠.
그래야 저희들이 존경하는 선생님을 오래토록 뵐 수 있잖아요?
그리고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