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프롬나드 데 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
Promenade des Anglais -
이른바 ‘영국인의 길’에
오늘은 내가 기댄다
언젠가 다른 날이 오면
코리언의 길에
잉글랜드 인들이 와서 기대어도 좋으리라
하나의 길은 다른 길과 서로 기대는 것
오늘은 리비에라 해안의 파도소리를 따라
내 몸이 영국인의 길에 기대어 걸으며
내 안에 깃든 파도소리와
니스의 파도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따로 듣는다
이 물결
저 물결
한데 섞으면 왜 안 되는지 다시 묻는다
프롬나드 데 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는
줄여서 '라 프롬 La Prom'
‘영국인의 산책로’라는 뜻
18세기 후반
니스에 거주하던 영국인 신사들이 나서서
일자리를 잃은 니스의 가여운 빈자들을 위해
시작한 사업으로 등장한 것이
‘Promenade des Anglais’
이른바 오늘날의 저 유명한
‘영국인의 산책로’ 사업의 유래인 것
산책로의 길이는 자꾸 늘어나서
지금은 대략 7킬로미터에 이르는 길
파리로 가는
테제베T·G·V Train à Grande Vitesse의 탑승시간까지는
아직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 있어
나는 한가로이 영국인의 산책로에 내 몸을 담근다
길을 걷는 동안 방금 내가 느끼는
영국인의 체온은 벌써 많이 식었으리라
그러나 세계 도처에서 몰려든 여행자의 발길은
오늘도 사뭇 뜨겁다
어떤 여행자는 바다에 몸을 담그고
한 잔의 포도주로
저녁 식탁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 나라는 드물다
성급한 갈리아인 중에는
해수욕을 하면서도 포도주를 마신다
놀라워라 이 서늘한 가을날
사람이 포도주를 마실까
포도주가 사람을 마실까
술을 가까이하는 취미를 배우지 못한 나는
포도주를 마시는 즐거움보다는
포도주를 바라보는 즐거움이 더 크다
그렇다 해도 오늘밤 꿈에 나는
보르도Bordeaux에 가서 레드와인을 마실까
부르고뉴Bourgogne에 가서 화이트와인을 마실까
혹은 상파뉴Champagne에 가서 샴페인을 마실까
문득 공복이 밀려들자 엉뚱하게도
아까부터 내 마음에 켕기는 게 있다
‘Promenade des Anglais’
‘프롬나드 데 장글레’의 마지막 단어
‘Anglais’는
‘앙글레’가 아니고 왜 ‘장글레’일까
어째서 프랑스 인들은
‘J’를 깜빡 잊고
‘A’만 남겼을까
아니면 꿈속에서 잃어버린 ‘J’를 그리워하느라
지금도 그냥 ‘장글레’라 하는 걸까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누군가 문득 내 어깨를 친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아내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냐고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갑자기
‘Janglais’와 ‘Anglais’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갈리아인의 혀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Janglais’와 ‘Anglais’는 몰래 가슴속에 숨겨둔 채
무안해서 그냥 얼버무린다
고개 들어 보니
바다가 사정없이 푸르다
하늘은 가슴 벅차도록 파랗다
저 지중해의 파도 위에는
갈리아의 햇살도 뛰어내리고
‘라 프롬’에 깃든 영국인의 햇살도 뛰어내리고
코리아에서 데리고 온 나의 햇살도 들어있을 것이다
나는 이 세 개의 햇살을 서로 섞고 싶다
한데 섞어
세 개의 그리움을 하나로 엮고 싶다
다섯 대양이 하나로 섞일 때까지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