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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던 아버지가 “그건 안 되겠다”며 딱 잘라 답했다고 한다. “서로에게 좋은 제안인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는 북측 대표의 질문에 아버지는 “북쪽은 8만 명을 줄여도 호루라기 한 번 불면 간단하게 다시 모이지만, 남쪽은 그렇지 않다. 남쪽에서는 호루라기를 부르고 꽹과리를 친다고 해서 쉽게 다시 수를 늘릴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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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다녀온 이후 나는 남북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진심을 바탕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야만 발전적인 협상과 약속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북의 눈치를 살피거나 정치적 계산에 밀려 신뢰를 쌓지 못한다면, 만난 횟수나 대화 시간은 무의미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식의 만남이 많아질수록 양측이 신뢰를 쌓을 가능성은 적어질 것이다.
■전문■
“의원님, 북측에서 북한에 한번 방문하시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한국미래연합 창당 준비를 하던 즈음이었다. 내가 이사로 재임 중이던 유럽-코리아재단으로부터 3박4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하지 않겠느냐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주한 EU상공회의소 산하 재단인 유럽-코리아재단은 북한 어린이들에게 축구공과 의약품을 보내는 등 꾸준한 지원활동을 펼쳤고, 유럽과 북한의 경협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제안을 해온 단체였다. 북한에서도 유럽-코리아재단의 활동에 깊은 관심을 표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어 하던 차에 나를 포함한 재단 이사진을 초청한 것이다.
나는 전부터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로부터 북한에서 나를 초청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직접적인 제안이었다.
북한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어머니가 북의 사주를 받은 총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기습하기 위해 북에서 보낸 특수부대가 청와대 바로 앞까지 왔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북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던 모습을 보아왔다. 그런 내가 북한에 간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과거의 아픔과 기억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아픔을 겪은 나이기에 남북관계를 가장 잘 풀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북한에 가기로 결심했다.
“정말 박근혜 여사가 공화국에 오는 겁니까?”
내가 북한에 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오히려 북측에서 놀란 것 같았다. 정말 방북하겠다는 확인서를 하나 써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왔다. 나는 분명히 간다고 확인해주었다.
출발하기 전, 나는 남북관계에 관한 한 그동안 정부 차원에서 추진해야 했지만 진전이 없었던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국군포로 문제와 당시 붕괴 위험이 높다는 보도가 나와 남북관계를 긴장으로 몰아간 금강산댐 공동조사,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오래전부터 꿈꿔온 남북 횡단철도 연결, 남북통일축구 개최 등 꼭 협의하고 싶은 몇 가지 사항이 있었다. 나는 이런 사항들을 통일부에 알렸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북측에 제안하고자 하는 현안들에 대해 얘기했다.
2002년 5월 10일 오후 1시, 나는 인천공항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오고 가던 많은 사람이 나의 평양 방문 소식을 알고 “잘 다녀오세요”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 중에서 일흔일곱 살의 할아버지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 쪽지 한 장을 손에 쥐어주며 두 손을 꼭 잡았다. 북한에 있는 이산가족의 신상명세가 담긴 쪽지였다. 가족을 꼭 찾아 달라는 할아버지의 간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분들의 평생의 한을 하루빨리 풀어드려야 할 텐데···’
베이징 도착 이튿날, 고려항공여객기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공항 대기실에 머무르는 중, 일행 한 명이 급하게 들어오며 소식을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특별기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걸 타고 오시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오전 11시 50분, 우리 일행 네 명만을 태운 특별기가 베이징공항에서 평양으로 향했다. 특별기는 오후 2시 30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환영 인파로 넘쳐났다. 북측 취재단과 노동당 중앙 위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도 마중을 나와 있었다. 평양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만감이 교차하는 동시에 강한 사명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평양 시내는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승용차와 사람이 별로 없어 한적했고,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서울의 한강처럼 대동강이 도도히 흘렀다. 숙소인 백화원영빈관을 들어서니 김용순 노동당 중앙위 비서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 비서는 내가 사용할 방이 2000년도 김대중 대통령이 머문 곳이라며 안내를 해주었다.
잠시 후 방 안에 혼자 남겨지자 드디어 평양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5시30분, 잠에서 깼다. 긴장을 하고 있던 탓인지 몸이 풀리지 않아 단전호흡을 한 뒤 천천히 정원을 산책했다. 조금씩 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단비였다. 오면서 본 북녘의 산하는 계속되는 가뭄으로 메말랐는데 비가 6월에 모를 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오고가던 숙소 직원들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남쪽에서 반가운 비를 몰고 오신 것 같습니다”
아침식사 뒤 김용순 비서와 만나 한 시간 정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김 비서는 금강산댐 문제를 언급하며 남북회담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만나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을 남한이 부실 덩어리라고 보도했다고 섭섭해하면서 남북회담을 취소한 이유를 얘기했다.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섭섭한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담 약속을 했으면 북측에서도 지켜야 합니다. 약속한 것은 지켜져야 상호 신뢰를 쌓을 수 있습니다.”
5월 13일, 나는 평양의 여러 시설들을 돌아보았다. 그중 북한에서 제일 큰 산부인과인 평양산원에 가장 관심이 갔다. 의료진들과 함께 병원시설을 둘러보며 이야기하던 중 의료기구과의 한 의사가 고충을 털어놓았다.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이희호 여사가 방문하면서 초음파 검사기기를 전달했는데 고장이 난 뒤 부품이 없어 고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필요한 부품이 무엇인지 묻고 기록했다.
5월 13일 저녁 공식일정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중,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곧이어 김정일 위원장이 내가 머물고 있는 백화원영빈관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화원영빈관 내 별도의 회의실에서 한 시간 동안 단독 면담을 할 것이라고 했다.
속기사 한 명이 배석한 상태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마주 앉았다. 그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간단하게 인사말을 주고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불쑥 19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했던 사태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당시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질렀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다 응분의 벌을 받았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화법과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남과 북이 교류를 강화하면서 조금씩 서로 맞춰나가야 자연스레 평화통일로 가는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운을 떼자 김정일 위원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산가족 문제나 6.25전쟁 때 행방불명된 국군과 민간인의 생사 확인 문제는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가슴에 피맺힌 슬픔을 안고 평생을 살아오신 분들이 생전에 잃어버린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를 하루빨리 설치했으면 합니다.”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는 굉장히 필요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라서 북한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은 이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의 대화는 금세 속도가 붙었다. 나는 금강산댐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부실공사라는 지적에 대해 북측이 매우 언짢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북이 공동조사단을 구성해서 함께 조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칠 데가 있으면 고치고, 사실이 아니라면 정확히 발표를 해야 북한도 억울함을 벗고 남쪽 사람들도 안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북남의 전문가들로 조사단을 만들어서 조사해봅시다.”
김정일 위원장은 특히 남북한 철도 연결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남북한 철도 연결을 통해 한반도를 국제 물류기지로 만들어 남북 모두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자는 나의 제안에 강한 긍정의 뜻을 보였다. 우리는 남북한 동해선 연결을 통해 시베리아철도까지 연결하는 방안을 실천하기 위한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눴다.
한 시간가량의 대화를 통해 김정일 위원장과 나는 많은 약속을 했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남북축구대회 등 스포츠 교류를 통해 서로 화합의 장을 열자는 약속도 얻어냈다.
나는 마지막으로 “답방을 하기로 했으니까 그 약속을 지키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적당한 기회에 가겠다고 말하면서, 방문하면 박 대통령의 묘소에도 참배하겠다고 했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모든 대화 내용을 언론에 투명하게 밝히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알아서 하세요”라며 신뢰감을 나타냈다.
단독 면담 뒤에는 김정일 위원장과 김용순 비서, 장성택 노동당 조직부 제1부부장, 림동욱 제1부부장 등과 우리 일행이 모여 두 시간 정도 만찬을 나눴다. 마지막 만찬 시간에 나는 거듭 남북한 신뢰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나와의 면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북측 참석자들에게 전하며 “그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만찬 중 김정일 위원장은 선친에 얽힌 비사를 소개했다. 7•4공동성명 발표 직전 남북간 교섭 과정에서 북한 측 대표가 “남과 북이 함께 몇만 명의 군대를 줄이자”는 이야기를 하자, 가만히 듣던 아버지가 “그건 안 되겠다”며 딱 잘라 답했다고 한다. “서로에게 좋은 제안인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는 북측 대표의 질문에 아버지는 “북쪽은 8만 명을 줄여도 호루라기 한 번 불면 간단하게 다시 모이지만, 남쪽은 그렇지 않다. 남쪽에서는 호루라기를 부르고 꽹과리를 친다고 해서 쉽게 다시 수를 늘릴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만찬이 끝나갈 때쯤 김정일 위원장이 어떤 경로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베이징을 통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라고 답했다.
“굳이 먼 길로 돌아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판문점을 통해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제의였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요.”
3박4일의 일정을 마치고 남한으로 돌아가는 날, 우리를 태운 차는 평양에서 개성을 지나 판문점으로 향했다. 평양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일직선으로 쭉 뻗었고, 도로 양편에는 아카시아 꽃이 만발했다. 열어둔 창문으로 아카시아 향기가 몰려들었다. 나는 가는 길에 잠시 개성 유적지를 찾았다. 사진으로만 접하던 선죽교를 눈앞에서 보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지금은 고려박물관이 된 성균관 입구에는 몇백 년 된 느티나무 몇 그루가 유유히 흐르는 역사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같은 민족으로 태어나 휴전선이라는 높은 장벽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분단 현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특히 판문점을 넘어 귀환하면서 ‘남과 북이 이렇게 가까운데 먼 길을 애둘러서 오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해졌다.
북한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금강산댐 공동조사 이행에 대해 묻는 북측의 연락을 받았다. 나는 방북 때 합의한 약속들이 실현되려면 정부와 정부 간에 투명한 절차를 거쳐야 하니, 앞으로 남한 정부와 상의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항을 통일부에 알렸다.
그 뒤로 기쁜 소식이 하나씩 들려왔다. 9월에 열린 적십자회담에서는 그동안 국군포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북한이 전쟁 당시 실종된 군인을 찾자고 먼저 제의를 해 우리 측 회담 실무진들을 놀라게 했다. 북쪽 대표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쟁 중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생사와 주소 확인을 직접 지시했다면서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북한의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공항에서 일흔일곱 살 고령의 할아버지가 이산가족을 찾아 달라며 나에게 준 가족의 신상명세를 적은 쪽지를 북측에 전달했는데, 그쪽 담당자가 통일부를 통해 할아버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해준 것을 추후에 알고는 너무나 기뻤다. 그리고 평양산원에서 초음파 검사기기를 비롯해 고장이 난 뒤 부품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던 기기 등의 물품이 통일부를 통해 전달되었다는 보고를 들어 더없이 좋았다.
남북통일축구가 12년 만에 재개되면서 단절되었던 스포츠 교류도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남북 단일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서로 마음을 열고 이끌어낸 약속들을 가능한 한 모두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에 다녀온 이후 나는 남북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진심을 바탕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야만 발전적인 협상과 약속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북의 눈치를 살피거나 정치적 계산에 밀려 신뢰를 쌓지 못한다면, 만난 횟수나 대화 시간은 무의미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식의 만남이 많아질수록 양측이 신뢰를 쌓을 가능성은 적어질 것이다.
그런데 왜 정부 대 정부끼리 만나면 약속이 안 지켜지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그동안 뭔가 투명하지 않은 것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북측과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면 그들도 약속한 부분에 대해 지킬 것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나는 북한 방문을 통해 이런 확신을 얻었다.
첫댓글 하늘님~ 오늘도 수고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햇삐데이요~😘😍🌼
감사해요 ♡
보면 볼수록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루빨리 자유의 몸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하늘님
고맙습니다. 💓
자세한 방북 내용을 처음 듣는데
정말 대단하신분입니다
박근혜대통령님 무죄석방과 즉각복귀 ^^
나같은 소인배는 영원히 안보고 북쪽을 향해 이를 뽀드득 갈텐데..우리 대통령님은 역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