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 상량문을 보면 동남서북상하 順으로 써있다. 일반적으로 동서남북상하 順으로 써야 하기에 고쳤다. 그리고 宋明欽(1705년~ 1768년)은 고조부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고 증조부가 송광식(宋光栻), 조부가 송병익(宋炳翼), 아버지가 송요좌(宋堯佐)다.
증조부 송광식(宋光栻)의 차녀(次女)가 민유중(閔維重)과 결혼해서 민진후(閔鎭厚), 민진원(閔鎭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낳았다. 송명흠은 사후(死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고 저서로는『역천집(櫟泉集)』이 있다.
[崇禎紀元后 歲在庚子 春三上澣 恩津后人吏曹判書 宋明欽 撰]이라고 나오는데, 1720년(송명흠 16세)이 경자년(庚子年)에 해당하고 1780년 송명흠이 죽은지 12년후가 경자년(庚子年)이 된다. 사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므로 사후 쓴 것이 되는데, 이는 말이 안된다.
스승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일이 조선시대에 있었으므로 송명흠의 제자나 송명흠의 이름을 빌려 누군가 썼다고 봐야 한다. 아니면 경자년(庚子)은 잘못된 간지(干支)가 된다. 그리고 박효인은 송명흠과 동시대 사람이거나 이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부분을 밝혀볼 생각이다.
송명흠의 『역천집(櫟泉集)』이 한국고전번역원에 원문이 올려져 있고 번역되어 시중에 나왔다. 문체를 비교하면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다고 본다.
<원문>
額版文
孝子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商山朴公諱孝仁字自實之門
孝婦淑夫人原州元氏之門
聖上二十一年甲申 二月 上旬 改刊
序文
夫上孝行而表旌其閭 聖朝之美政人百行之中 孝爲其源 程夫子揭訓曰 人子之身所能爲者皆所當爲 無過分之事之曾聞古世家興孝悌士修倫綱迄于中古人鮮能焉 在孔子立門以孝著稱者曾閔二者也 是故世有孝行之人則以郡縣必擧朝家必賞 或以貤貺之典 或以表旌之閭 此皆聖朝孝理之盛興也 我朝數百年以來所以扶綱樹敎靡不用極曷不休哉 自近世文勝爲弊
名或浮實 豈可以微信於今與後哉 惟我朴公孝仁之卓行 牛肝奉養世所稀有而冬剝紅棗(대추 棗의 異體字로 써있다)以獻親瘠畫夜禱天時時嘗糞裂指泣血 幸得
甦數十日則可見其懿行之非誣而鄕堂咸服士林闡揚有微無間矣 古人之氷鯉竹筍何以加此所噫 世篤忠孝其七代祖貞肅公諱安信之忠節 昭于日月 炳宇宙則其褒典有爽也 公先趾其美竟蒙旌閭異天
何以鍾公一家耶呂東萊曰君子有孝行不竭之語
當遇朴公之門而誦之也 惟其事實槩見於僉章甫
信筆故略書所感云
兒郎偉拋梁東
月峰朝朝日出紅
不泯此心皦如此
孝恩有則永無窮
兒郎偉拋梁西
滿郊雲捲夕烟低
上有松楸濡函露
精靈應亦愴凄凄
兒郎偉拋梁南
古洞桑楴捲夕嵐
櫟稧煌煌材用足
簷前献賀鷰初南
兒郎偉拋梁北
國望山高參斗極
血指遑遑和樂餘
中宵露禱天翁識
兒郎偉拋梁上
靑天白日光照郞
須將此心如斯矣
一樂吾人無愧仰
兒郎偉拋梁下
馨德垂今庇里社
從古泉醴自有源
分流去水繼公者
伏願上梁之後
家風復振 福祿自臻如竹苞而松茂
世德重華 孝悌相守庶父傳而子承
崇禎紀元后 歲在庚子 春三上澣 恩津后人吏曹判書 宋明欽 撰
高宗二十二年 歲在乙酉 夏五月初四日 七代孫 忠性設旌
崇禎紀元後 歲在乙酉 四春三月上旬 八代孫 周寅重修
檀紀四二八六年 歲在癸巳 春三月中旬 九代孫 種協重修
<교정ㆍ표점>
孝子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商山朴公諱孝仁字自實之門,
孝婦淑夫人原州元氏之門。
聖上二十一年甲申二月上旬改刊。
夫士有孝行,而表旌其閭,聖朝之美政也。
百行之中,孝爲其源。
程夫子揚訓曰:
「人子之身,所能爲者,皆所當爲,無過分之事也。」
曾聞古世,家興孝悌,士修倫綱。
迄于中古,人鮮能焉。
在孔子之門,以孝稱者,曾、閔二者也。
是故,世有孝行之人,則郡縣必擧,朝家必賞。
或錫貺之典,或表旌之閭。
此皆聖朝孝理之盛典也。
我朝數百年以來,所以扶綱樹敎,靡不用極,曷不休哉!
自近世文勝爲弊,名或浮實,豈可以微信於今,而興淑哉?
般惟我朴公孝仁之卓行,
牛肝奉養,世所稀有。
而冬剝紅棗以獻親,
親瘠,晝夜禱天,
時時嘗糞,裂指泣血。
幸得甦,數十日,則可見其懿行之非誣。
而鄕黨咸服,士林闡揚,無微無間矣。
古人之冰鯉、竹筍,何以加此?
噫!
世篤忠孝。
其七代祖貞肅公諱安信之忠節,昭于日月,炳炳宇宙。
則其褒典,有爽也?
公先趾其美,竟蒙旌閭之典。
異哉!
何以鍾公一家?
呂東萊曰:
「君子有孝行,不竭。」
當遇朴公之門,而誦之也。
雄其事實,槩見於僉章甫信筆,
故略書所感云。
兒郎偉, 拋梁東。
月峰朝朝,日出紅。
不泯此心,皦如此;
孝恩有則,永無窮。
兒郎偉, 拋梁西。
滿郊雲捲,夕烟低。
上有松楸,濡函露;
精靈應亦,愴凄凄。
兒郎偉, 拋梁南。
古洞桑楴,捲夕嵐。
櫟稧煌煌,材用足;
簷前獻賀,鷰初南。
兒郎偉, 拋梁北。
國望山高,參斗極。
血指遑遑,和樂餘;
中宵露禱,天翁識。
兒郎偉, 拋梁上。
靑天白日,光照郞。
須將此心,如斯矣;
一樂吾人,無愧仰。
兒郎偉, 拋梁下。
馨德垂今,庇里社。
從古泉醴,自有源;
分流去水,繼公者。
伏願上梁之後,
家風復振,
福祿自臻,如竹苞而松茂;
世德重華,
孝悌相守,庶父傳而子承。
崇禎紀元后, 歲在庚子, 春三上澣, 恩津后人吏曹判書 宋明欽(1705년~ 1768년)撰。
高宗二十二年, 歲在乙酉, 夏五月初四日, 七代孫 忠性設旌。
崇禎紀元後, 歲在乙酉, 四春三月上旬, 八代孫 周寅重修
檀紀四二八六年, 歲在癸巳, 春三月中旬 九代孫 種協重修
<번역>
효자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상산 박공 휘 효인(孝仁), 자 자유(自實)의 정려문.
효부 숙부인 원주 원씨의 정려문.
성상(임금) 21년 갑신(甲申) 2월 상순에 다시 새기다.
서문
대저 효행을 높이 기려 그 마을을 정려하는 것은 성스러운 조정의 훌륭한 정치이다. 사람의 온갖 행실 가운데 효는 모든 덕의 근원이 된다.
정자(程子)는 "자식 된 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분수를 넘는 일은 없다."고 가르쳤다.
예로부터 집안이 흥성한 것은 효도와 우애 때문이었고, 선비가 인륜과 기강을 닦아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공자의 문하에서 효행으로 이름난 이는 증자와 민자건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효행을 실천한 사람이 있으면 고을에서는 반드시 천거하고 조정에서는 반드시 포상하였다. 혹은 은전을 더하고, 혹은 정려를 내려 그 행실을 드러내었으니, 이는 모두 성조가 효로써 나라를 다스린 훌륭한 정치였다.
우리 왕조 또한 수백 년 동안 윤리를 바로 세우고 교화를 펼치는 데 힘을 다하였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근세에 와서는 문식만 숭상하는 폐단이 생겨 이름이 실제를 앞서는 경우도 있으니, 어찌 후세까지 믿을 만하겠는가.
오직 박공 효인의 뛰어난 효행은 세상에서도 드문 것이었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쇠간을 구해 올렸고, 겨울에는 붉은 대추를 구하여 부모께 올렸다. 부모의 병환이 위독하자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하고, 때때로 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며, 손가락을 찢어 피를 흘리며 슬피 울었다. 마침내 부모가 다시 살아나 수십 일을 더 사셨으니, 그의 아름다운 효행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향리 사람들은 모두 감복하였고, 유림 또한 널리 칭송하여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옛사람의 빙어를 얻은 효행이나 겨울 죽순을 구한 효행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더욱이 그 집안은 대대로 충성과 효를 독실히 실천하였다. 7대조 정숙공 안신의 충절은 해와 달처럼 밝고 우주에 빛났으니, 조정의 포상이 조금도 지나침이 없었다.
공은 선조의 아름다운 자취를 이어 마침내 정려의 은전을 받았으니, 하늘은 어찌 이처럼 한 집안에 복을 모아 주었는가.
여동래가 말하기를, "군자의 효행은 다함이 없다." 하였으니, 이 말을 박공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외워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은 여러 유생들의 기록에 이미 대략 나타나 있으므로, 나는 붓 가는 대로 느낀 바를 간략히 적을 뿐이다.
아랑위, 들보를 동으로 올리세.
월봉에는 아침마다 붉은 해가 떠오른다.
이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저 햇빛처럼 밝으니,
효의 은혜에는 본받을 법도가 있어 길이 다함이 없으리라.
아랑위, 들보를 서로 올리세.
들판 가득 구름은 걷히고 저녁 안개는 낮게 깔린다.
위로는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이슬에 촉촉이 젖어 있고,
선인의 혼령 또한 처연한 마음으로 굽어보실 것이다.
아랑위, 들보를 남으로 올리세.
옛 골짜기의 뽕나무 숲에는 저녁 산안개가 감돌고,
참나무 숲은 무성하여 재목으로 쓰기에 넉넉하다.
처마 앞에는 제비가 날아와 새집을 틀며 경사를 축하한다.
아랑위, 들보를 북으로 올리세.
국망산은 높이 솟아 북두칠성과 맞닿은 듯하고,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며 애태워 효성을 다한 정성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한밤중 이슬을 맞으며 올린 기도는 하늘님께서 모두 알고 계신다.
아랑위, 들보를 위로 올리세.
푸른 하늘과 밝은 해가 이 집을 환히 비춘다.
모름지기 이 마음을 언제나 이와 같이 간직한다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즐거워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아랑위, 들보를 아래로 올리세.
향기로운 덕은 오늘날까지 마을을 두루 보살피고,
예로부터 단 샘물에는 근원이 있듯이,
그 물줄기가 흘러가듯 공의 뒤를 잇는 이들도 끊이지 않으리라.
원하건대 상량을 마친 뒤에는 집안의 가풍이 다시 떨쳐 일어나고, 복과 녹이 저절로 이르러 대나무가 무성하고 소나무가 푸르듯 번창하기를 바란다.
또한 대대로 쌓아 온 덕이 더욱 빛나고, 효도와 우애를 서로 지키며, 아버지가 전하고 아들이 이어받아 길이 계승되기를 바란다.
숭정기원 후 경자년 봄 3월 상순에 은진 후인 이조판서 송명흠이 짓다.
고종 22년 을유년 여름 5월 초4일, 7대손 충성이 정려를 다시 세우다.
숭정기원 후 을유년 봄 3월 상순, 8대손 주인이 중수하다.
단기 4286년 계사년 봄 3월 중순, 9대손 종협이 중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