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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묵상글 ( 연중 제4주간 월요일. - 집착과 애착의 더러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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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집착과 애착의 더러움
마르코복음에서는 드물게 게라사의 더러운 영들 얘기를 오늘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만큼 마르코복음이 이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들여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저도 이 얘기를 중요시하여 자주 강의와 강론 때 다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번 강의와 강론을 했음에도
더러운 영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얘기했을 뿐
더러운 영들이 돼지와 함께 물에 빠진 뒤 어떻게 됐을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돼지와 함께 물에 빠진 더러운 영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돼지와 같이 죽었을까요?
돼지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그렇게라도 게라사 지방을 떠나지 않으려고 한 거지요.
그러니 세상을 그리고 자기가 살던 곳을 더럽게 집착하는 영이 더러운 영이잖아요?
그리고 더러운 영이란 죽었어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려 하지 않고
세상과 자기 살던 곳을 맴도는 존재이잖습니까?
우리 민속 신앙에서 이런 영들은 극락왕생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고도 하는데
하느님 나라에도 가지 못하고 자기 지역에서도 쫓겨났으니 구천을 떠돌까요?
저도 이런 영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영적인 존재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죽은 사람의 영은 훌훌 날아서 하느님께 가는 것이 최선이고,
하느님께 아직 갈 수 없다면 연옥이나 지옥에 머물든지 해야 하는데
더러운 영은 이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지구에서도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고
교회의 공식 가르침도 저의 주장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추측을 하는 근거는 게라사의 더러운 영들이
돼지 속에서라도 자기 지방에 남게 해달라고 한 점이지요.
저는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인데
제 친구가 서른셋에 죽고 허무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2년 정도 지난 어느 날 꿈에 친구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밝아서 꿈에서 깼을 때 저는 친구가
하느님께 갔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저는 그때 친구를 떠나보냈습니다.
더 이상 제 친구로 붙잡고 있지 않게 되었고,
하느님의 아들로 보내준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 꿈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꿈에라도 어머니 얼굴 보고 싶은데 보여주시지 않으니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지만, 영적으로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들처럼 이 세상이나 저의 곁을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신 표시라고 생각되어 위안을 삼습니다.
사실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그리고 보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를 내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의 딸로 보내드리자고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러면서도 인간적으로는 아직도 보고 싶은 애착이 남아있습니다.
떠나지 못하고 떠나보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집착과 애착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이고,
이런 면에서 나도 더러운 영의 존재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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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인데,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돌풍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다.”(마르 5,2)
그러나 이제 그에게서 영들의 군대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은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고 이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는 것,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고 저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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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 주기를 바랐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만큼 우리도 기도할 때 제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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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世上)에서 중요(重要)한 3가지‘금(金)’이 있는데 돈을 상징(象徵)하는 “황금(黃金)”과 음식(飮食)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時間)을 상징하는 “지금(只今)”이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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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시간 정도의 거리는 쉬지 않고 운전하지만 5시간을 넘으면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 운전하면 차에도 무리가 오고, 운전하는 사람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2023년 1월의 끝자락입니다. 이스라엘과 과달루페를 방문하는 성지순례도 2번 있었고, 한국에서 온 신부님과 모임도 있었고, 앨파소에 있는 후배 신부님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정이었습니다. 일정의 중간에 몸살이 왔습니다. 며칠 쉬면서 지내니 몸살은 떠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무 무리한 일정을 만들지 말라는 뜻으로 제게 몸살을 주신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시면 그 집을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라.’는 성경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의욕과 과욕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모든 악보는 쉼표가 있습니다. 2023년 1월 한 달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께 의탁하면서 마무리 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에 아인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성모님과 관련된 성화가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구원의 중재자임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과 요한 사도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학자들과 성모님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서 화관을 쓰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배와 성모님과 군인이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였던 군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호칭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게 더 큰 감동을 준 건 성당 마당에 있던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나는 조각상입니다. 그 만남에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시 마리아여!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마리아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룰 구하신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시작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삼라만상 온 우주가 하느님 나라에 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학과 교리의 예수님을 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식을 보고 화를 내셨습니다. 백인대장, 소경, 나병환자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나자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퍼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칭찬하셨습니다. 성지순례는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겁니다. 연민과 사랑으로 모든 이를 품어주셨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께서 지고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겁니다.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던 주님께서는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셨듯이, 세상이라는 우물에 머물고 있는 우리에게 구원의 샘물을 주시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겁니다.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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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사람이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직장의 한 동료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스트레스가 벌써 1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신부님을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1년 동안 그분과 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군요. 그런데 참지 않고 복수해도 그 지긋지긋한 관계는 멈출 수 없을 텐데요.”
복수한다고 상대방이 무서워서 피할까요? 아마 또 다른 방향으로 복수할 것입니다.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됩니다. 따라서 이런 악순환은 누가 되든 상관없이 빨리 끊는 것이 제일 유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 좁은 생각은 속 좁은 반응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넓은 생각, 긍정적인 마음은 마찬가지로 넓고 긍정적인 좋은 반응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이 악연의 고리를 끊는 것이 유익하겠습니까? ‘나는 안 해!’라고 말하지만, 내가 안 될 것은 또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뻔한 것이라고 하셨지요. 사회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더 인정받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사는 남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특별한 사람이 더 인정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떠실 것 같습니까? 주님 역시 남들처럼 사는 삶이 아닌, 당신이 말씀하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을 더 좋아하시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서,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지요. 그래서 나가긴 하겠지만, 산 쪽에 놓아 기르는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청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돼지 떼는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맙니다.
한 명의 사람이 더러운 영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모두 함께 기뻐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은 속 좁은 생각에 잡혀 있습니다. 한 명의 구원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 아닌, 자기들의 물질적인 손해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사랑보다 작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속 좁은 마음으로는 주님과 절대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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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인내해야 하며, 우리 주 하느님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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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선택, 훈련, 습관-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시편31,25)
요즘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선택-훈련-습관’의 중요성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좋은 선택-훈련-습관은 이를수록 좋습니다. 요즘 들어 주변에서 세상 떠나는 이들의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어제도 산행을 하다가 빙벽에서 떨어져 실족사로 추정되는 어느 사제에 관한 비보도 들었고 한 자매로부터는 시아버지의 죽음 소식도 들었습니다.
불쌍한 노년에 불쌍한 죽음이 너무 많습니다. 잘 늙어가기가, 잘 죽기가 얼마나 힘든지 너무 많이 목격합니다. 부부가정생활 역시 똑같습니다. 끝까지 좋은 부부관계에 좋은 가정을 유지하는 것 역시 참 어렵습니다. 저는 이들을 보면 무조건 성인聖人이라 격찬激讚합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 면담성사때 주고 받은 말중 마음에 와닿은 내용입니다. 오빠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나이는 70을 넘었어도 인내, 절제의 훈련이 전혀 안되었기에 그 나이에도 너무 감정의 기복이 크다는 것입니다. 새삼 삶의 훈련, 덕의 훈련을 생각하며 어제 강론을 나눴습니다.
진복팔단을 근거로 성덕 계산 점수를 함께 산출해봤습니다. 어제는 성사를 본 60대 초반의 두 자매의 성덕 점수였습니다. 최대한 각 항목별로 스스로 후하게 주도록 한후 100점 만점에 기본점수 20점에 8개 항목 합산후 예수님이 10점을 더 보너스로 준다하며 계산해 봤더니 무려 한 자매는 90점, 또 한 자매는 93점이었습니다.
“성녀입니다. 90점을 넘었으니 정말 성녀입니다. 성덕도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앞으로도 성덕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로 성녀로 사시기 바랍니다.”
유쾌하게 웃으며 나눈 덕담입니다. 매일 일과표에 따른 수도생활, 그대로 기도와 노동, 공부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영성훈련으로 습관화를 목표로 합니다. 이런 선택과 훈련, 습관이 있어 늘 거기 그 자리에서의 평화롭고 안정된 정주의 삶도 이뤄집니다.
누구도 노년을, 죽음을 뜻대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일찍부터 좋은 선택에 의식적 훈련, 습관화하는 것이, 심신心身을 단련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선택-훈련-습관 역시 은총과 노력의 결정체입니다. 정말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면 아름답고 건강한 노년에 선종의 죽음의 은총일 것입니다. 정말 시종여일, 한결같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다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죽음을 맞이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도대체 훈련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수행을 사랑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정주도 훈련이고 사랑도 침묵도 경청도 회개도 겸손도 순종도 훈련이고 독서도 공부도 노동도 운동도 인내도 절제도 훈련이고 습관입니다. 이런 모든 수행의 선택-훈련-습관이 목표하는 바 하느님 중심의 삶, 구체적으로 예수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성덕의 훈련입니다. 사실 이런 선택-훈련-습관이 안되었을 때 세상 유혹에 본능대로의 육적 삶을 살다보면 괴물이나 폐인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죽기까지 존엄한 품위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단 하나의 길은 좋은 선택-훈련-습관화의 길뿐임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 말씀과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우리는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선택-훈련-습관에 유리한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때 안정과 평화에 참행복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살 때 두려움과 불안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새삼 행복기도중 “주님” 호칭다음에 곧장 이어지는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고백이 정말 너무 잘됐다 싶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의 미친 사람을 고치신 일화입니다. 게라사의 미친 사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상들이나 악령들의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이때 미치는 것입니다. 아무도 통제 불가능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자, 미친 자에 대한 다음 묘사가 너무 실감납니다. 삶의 중심이 없는 완전히 고립단절된 혼자의 삶입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참으로 구제불능의 자해 인간, 미친 사람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함부로 막 살았을 때,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잃었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마침내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마귀들은 축출되고 미친 자는 제정신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새로운 파스카의 삶, 부활의 삶이 펼쳐지게 된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본래의 삶의 자리로 복귀시킵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더러운 영에 들렸던 이가 복음 선포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자 반전인지요! 그러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 중심의 삶의 선택-훈련-습관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삶,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예방이자 영혼을 튼튼히 하는 첩경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다음 고백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희망,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믿음이라 다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묘사되는 불쌍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파스카 예수님을 모신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깨닫습니다. 믿음으로 산다 하지만 오늘 히브리서에서 묘사되는 이들의 모습은 복음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를 때 일입니다. 믿음에도 공부가 훈련이 필요합니다. 광신狂信과 맹신盲信의 잘못된 무지의 눈먼 믿음도 있으며 이런 경우는 약도 없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밝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지 못할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들의 무지한 믿음입니다.
성덕의 수련에, 올바른 믿음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선택-훈련-습관”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파스카 예수님을 모시고 날마다 올바른 신망애의 삶을 살게 하는,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깊이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사람들 보는데서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시편31,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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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던 이를 구해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나?”라고 물으시자 그는 “군대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잠시 우리 내면을 살펴볼까요? 우리 안에 ‘군대’는 무엇인지요?
탐욕, 무기력, 시기, 분노, 독선, 이기심….
이러한 우리 내면의 군대와 우리 자신은 맞서야 합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맞서야 할까요?
우리의 무기는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한 권의 성경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 내면의 군대를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세례 후 유혹받으실 때 광야에서 만났던 악마에게 성경으로 맞서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떠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싸워야 합니다. 내적 투쟁을 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군대를 향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투쟁의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 끝에서 우리가 읽었듯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알려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투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선하심을 알리십시오.
촉촉하게 감싸주기
저는 거의 매일 설거지를 합니다. 아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무엇인가를 만들어 먹기 때문입니다.
시작이 있다면 마무리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난 후 마무리는 설거지입니다.
그래서 설거지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다음에 또 무엇인가를 먹으려면해야 하는 것이 설거지인 것을….
어느 날 보니 손이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피부가 허옇게 까지기도 하였습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것이 주부습진이란 말인가….
그때부터 핸드크림을 잘 발라줍니다. 고생하는 손을 위해 잘 발라줍니다. 아니, 어쩌면 고생을 해야 하니 발라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촉촉함이라는 선물을 제 손에 전해줍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고생하는 우리 마음에도 촉촉함을 전해주세요. 고생한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에 격려를 보태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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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러운 영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께 전혀 관심이 없으니
저와 제가 하는 일에
아무 관심도 갖지 마시고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그저 당신의 길을 가십시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더러운 영아,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괴롭히는 더러운 영아,
나는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살리는 참 사람이라
내 마음은 늘 사람을 품고
내 삶은 늘 사람과 함께 하거늘
어찌 사람과 상관이 없느냐.
사람을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빚으신
하느님의 이름마저 더럽히는
더러운 영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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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13).
이것은 정당한 일인가?
한 영혼이 구원되도록 돼지 이천 마리가 목숨을 잃는 것이 정당한 일이었습니까? 순수한 마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마귀 군대나 짐승이 지닌 천부의 권한에 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독자들은 각자 자기 영혼과 자기 삶의 방식과 또 참된 미덕이 왜 그리 드문지에 관하여 성찰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와서 온 유대아 땅을 정복했을 때, 수천 명이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2역대 36,20 참조). 예레미야는 홀로 남아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진흙투성이 저수 동굴에 던져 버렸습니다(예레 38,6 참조).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운명을 위해서는 이 한 사람의 영혼이 남아 있는 모든 사람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27. 어린이의 벗 예수
어린이처럼 하늘나라를 받아들인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꿈에 나타나는 어린이는 거짓 없는 마음 본연의 것, 우리 안에 생성되는 새로운 것을 상징한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 자신 안에 하느님께서 계실 곳을 마련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우리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품에 안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어린이를 보살펴야 한다. 우리 안에는 방치되고 매 맞고 기가 질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어린이가 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창조성과 생명력의 샘, 순수와 진실의 샘인하느님 닮은 어린이가 있다. 우리가 상처 입은 이 아이를 품에 안으면 그 아이는 슬픔을 거두고 우리 삶을 방해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아이는 그 모습 그대로 상처 입고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버려진 채 있어도 된다. 상처 입은 그 아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늘 우리 안에 있으면서 우리가 온갖 위험에 처하고 상처받을 때마다 헤치고 나아갈 길을 알려 주는 하느님 닮은 어린이를 발견한다.(136)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오랫동안 묵상합니까?
묵상의 첫 단계는 성당이나 여러분의 방에서 아주 편안한 몸의 자세를 취하는 데 있다. 먼저 허리를 곧곧하게 펴고 손을 모으고 편안하게 앉아라. 묵상을 위해 적당하게 몸의 자세를 유지하고 난 뒤에 호흡에 여러분의 의식을 집중하기 바란다. 호흡은 몸과 정신을 연결해 주는 중재자이다. 여러분의 호흡이 거칠면 여러분의 생각도 거칠어 질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게 된다면 그 호흡은 금방 고요해지고 늘여지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분의 생각도 고요해지고 여러분은 몸과 마음에 안정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 비로서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모든 관심을 한 점에 집중시킬 수 있다.
서서히 호흡에 대한 의식에서 내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소리에로 여러분의 의식을 열어 놓아라. 여러분의 의식을 열어 주위에 들리는 모든 소리에 민감하게 있어라. 그 우주의 소리와 하나가 되어라. 어떠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라. 이제 여러분의 의식을 서서히 여러분이 현존하고 있음으로 돌려라. 내가 살아 존재
하고 있음을 느껴라.
그냥 나 있음에 머물러라. 나 있음의 현존 체험은 바로 하느님의 현존체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감각 안에 있을 수 있다면 그러한 시간을 계속 늘여가기 바란다. 그러나 이런 감각을 발견할 수 없다면 차선의 방법을 선택해야만 한다. 너무 욕심을 내지 말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라. 하느님은 내가 알아채지 못해도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세 가지 선택적 대안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단순하게 간절하게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다. 호흡에 맞추어 하느님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르는 것은 굉장히 도움이 된다.
둘째로, 가장 자기가 좋아하는 하느님의 상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마음에 다가오는 예수님의 상을 갖고 있다면 마음속에(가슴부위) 예수님의 상을 그리도록 하라. 그리고 그 상에 나의 모든 관심을 쏟아 붙는 것이다. 그 상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 상이 없어지지 않도록 집중하라. 상이 없어지면 즉시 깨닫고 다시 그 상을 떠 올려라. 여러분이 그 상에 여러분의 정신을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그 상은 더욱 선명하게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를 것이다. 한 번 상을 선택했으면 다른 상으로 바꾸지 말라. 우리의 정신(mind)은 원숭이처럼 늘 움직이고 그 대상을 바꾸려고 한다. 묵상 혹은 명상이란 여러분의 정신을 길고 깊게 한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묵상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관상의 상태로 들어가는 데 관상이란 더 길고 깊은 집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상의 상태에서 더 나아간다면 깊은 하느님의 체험이 일어난다.
세 번째의 방법은 성서 혹은 복음을 묵상하는 것이다. 성서 혹은 복음 묵상은 아침에 하는 것이 좋다. 먼저 편안하게 앉고, 호흡을 주시하고, 외부소리와 하나가 되고, 자신의 현존의 느낌 속에 2~3분 머물고 나서 1~2분 자신의 호흡을 의식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음을 느끼면서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러고 아주 천천히 주의 깊게 그날의 성서(복음)의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나서 다시 호흡에 의식을 주고 외부의 소리와 하나 됨을 느끼면서 복음의 말씀의 세계로 들어간다. 마음에 와 닿은 복음 말씀 한 단어 혹은 아주 짧은 문장을 마음속에 떠올린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 말씀에 대하여 주석을 달 생각을 피하라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하고 그 이유를 찾거나 생각하거나 하지 말라. 그냥 계속해서 그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말씀 그 자체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아마 어느 순간 우리의 생각은 다시 나타나 자신을 괴롭힐 수 있다. 그러나 그 생각들과 싸우지 말아야 한다. 그냥 ‘아! 생각이 나타났구나! 하고 알아채면 즉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되돌아 오면 된다. 묵상 속에 있다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자신의 호흡을 1~2분 의식하라.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면 된다. 그리고 미사에 참여하고 하루를 사는 동안 틈틈이 그날 묵상 속에서 마음에 새긴 하느님의 말씀을 떠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자기 전에 그 말씀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나 체험 등을 짧게라도 일기처럼 써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의 삶을 여러분이 반복하여 훈련한다면 여러분은 아주 엄청난 하느님 말씀의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다른 교우들에게 그 묵상한 바를 나눈다면, 그 나눔은 그 어떤 설교보다도 힘 있는 설교가 될 것이다. 또한 여러분은 여러분의 나눔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 나눔 안에 함께 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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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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