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에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보통 '상한 마음의 치유'라고 할 때 떠오르는 그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감정이나 심정도 아니고, 평소에 제가 '생각'이라고 하는 헬라어 누스(nous)를 말씀드리는 것인데 평소에 우리가 쓰는 말로는 아마도 마음과 생각 그 중간쯤이라고 하면 좋겠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그 ‘뜻’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제가 '마음(mind)'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바, 말의 정의가 제대로 전달됐다고 생각하고 계속 말씀을 드리자면, 사람들이 보통 '마음(heart)'이라고 할 때 묘사하는 '감정'은 상당히 복잡한 것입니다. (보통 마음heart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그 본질은 자신들의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기를 힘들어하며 어린 시절의 이해되지 않고 해소되지 않은 감정까지 현시점에서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내적 치유라고 할 때는 mind의 변화라기 보다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형성된 '감정'을 처리하는 사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적 치유를 수없이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생각이 전혀 새롭게 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의 감정을 치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과 동반되지 않으면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입니다.
'상담'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서 제 말이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상담도 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담으로 한 사람의 상한 마음과 정신을 고치고자 할 때, 그 근거, 즉 내과적인 용어로 '약'의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만 치유가 됩니다. 만일 정신의학이라는 학문에 근거한 것일 경우, 그냥 증상만 완화될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치료가 될 수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정신과 의사들의 자살율이 매우 높다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설명을 듣게 되어, 이러한 저의 생각은 더 강해졌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마음(mind)은 언제 변하며 상한 감정은 언제 치유될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또 저의 경험에 근거해서 볼 때, 한 사람의 마음(mind)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때 변화됩니다(롬 2:4). 그전에는 절대로 변할 수가 없습니다. 변한다는 것은 A에서 B가 되는 것인데 B가 뭔지 모른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을 만났는데 감정적으로 불편하고 그 사람들이 미운 생각이 들었다고 해 봅시다. 마음mind이 변화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제 마음(감정적 마음)에 미운 생각이 들고 불편한 마음(감정적 마음)이 들었을까요? 저는 이런 감정을 원치 않습니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이것을 해결하고 싶습니다."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과 수술과도 같은 것이라 시간, 노력, 에너지 등등, 내 쪽에서 대단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을 하는 사람은 마음(mind)이 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에 변화를 받으라는 그 명령이 결국은 나를 위한 것, 나의 기쁨과 행복을 위한 것이란 사실을 진심으로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또 그 과정이 힘든 과정이지만 함께 해 주시는 성령께서 나를 향해 좋은 뜻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알기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지만 대부분 깊이 없는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 도대체 왜 저래? 저 사람이 저렇게 하니까 내가 이런 마음이 들지."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모든 걸 전가합니다. 위에서 제가 외과적 수술과 같다고 표현한 저 과정을 함께 하기에 하나님이 안전한 분인지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을 시키진 않을까',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염려가 마음 깊이,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벽돌이 쌓이듯 한 칸 더 위로 올라가, 마음의 장벽으로 변해 버리고 다음번에 부딪혔을 때에는 한층 더 어려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견고한 진입니다.)
변화된 마음으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만난 저 사람, 정말 불쾌한 말과 행동을 하네. 그런데 왜 그럴까?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나? 두려움에 경계를 하나? 안전한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려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사람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자신의 필요가 온전히 채워졌기 때문에 상대방의 필요를 생각해 볼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변화된 마음(mind)를 소유했다고 해도 원치 않는 감정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혼뿐만 아니라 몸의 상태로부터 영향도 받고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날씨 때문에 우울한 감정이 드는 것은 몸의 상태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고 뭘 잘못 봐서 깜짝 놀라는 경우, 그것이 바로 잘못된 판단 때문에 감정이 영향을 받는 간단한 예라 하겠습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오해해서 겪는 감정도 느낄 필요가 없었던 불필요한 감정이고요.
게다가 어린 시절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까지 쌓여있다 보니 마음(mind)의 진정한 변화를 겪었다고 해도 때때로 감정의 불균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감정이란 너무나 복잡하고 감정의 변화가 실제로는 감정 그 자체에서 기인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이 감정에 따라 결정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별로 출근하고 싶지 않은 마음(감정)이 들어도 우리는 그 마음을 무시하고 출근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감정 위에 말씀의 원리를 올려놓아 생각을 전개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셨다면 더 깊이 있는 것 하나 더 다루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에 여러분이 혼란스럽지 않길 바랍니다만, 출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는 사실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하나는 가벼운 마음, 하나는 깊은 마음이라고 해 보겠습니다. 그냥 좀 더 자고 싶고 일하기 싫어서 가고 싶지 않은 것은 가벼운 마음이라고 한다면, 깊은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911 사태 당일 날, 회사에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아무 이유 없이 가지 않아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것은 그냥 아침에 일어나 보니 회사 가기 싫은 그런 마음과는 다릅니다. 제가 위에 예를 든 것처럼 어떤 사람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든다면, 감정을 뛰어넘어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뭔가 내 안에 해결되어야 하는 감정의 상처가 있거나,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정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거나, 혹은 내가 기도하고 있던 기도 제목의 응답으로써 그 감정의 원인을 해결해야만 다음 단계로 내 기도가 응답된다는 하나님의 싸인이거나, 등등 매우 중대한 사안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것이며 처리되지 않았을 때 우리 인생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반드시 반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하나님과 함께하려면 이미 변화된 마음(mind)의 소유자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모험을 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이 아닌 오직 말씀에 근거해서 의지하고 나를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를 매번 더 높은 다음 단계로 인도해 주시는 아버지를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것은 (좋은 의미로) 모험을 감수할 마음을 항상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면 자잘한 자신의 문제에서 해방되고 오히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전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전에 몰랐던 차원이 다른 기쁨이 있습니다. '자아(육신)'에서 자유 할 때, 진정으로 자유케 됩니다. 나보다 남을 더 먼저 생각하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라는 것도 아니요, 상대방의 기분에 좌지우지되라는 말도 아닙니다. 나의 모든 필요가 아버지 하나님의 아가페로 인해 채워졌기 때문에 사랑에 있어서는 더 우월한 입장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긴급구호 팀원의 심정 아닐까요? 긴급구호 하러 가서 '나는 왜 아무도 안 도와줘?' 이러고 있을 사람이 없겠지요. 자신의 필요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위험에 처한 그 사람들의 필요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은 봉사는 남을 위해 했는데 기쁨은 자신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모두 다 우리를 위한 것이며 그 계명을 따를 때, 오히려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시며 평안을 주시려는 좋은 분이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