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mond-10】
레비에프와 푸틴의 관계는 1992년에 시작됐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이었던 푸틴은 시장이 주저하던 유대교 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레비에프는 학교 설립자금을 지원했다.
푸틴과 앙골라의 두스산토스 대통령은 매우 끈끈한 관계였다.
레비에프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앙골라는 다이아몬드가 평화를 위협한 지역으로서는 최초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곳이다.
1990년대 중반 앙골라 내전 당시 다이아몬드 광산을 장악하고 있던 반군으로부터 12억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밀반출시킨 드비어스에 대한 앙골라 정부의 반감이 높았다.
레비에프에게는 다이아몬드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이아몬드는 앙골라의 유일한 수출 품목이었다.
레비에프는 6천만 달러를 투자해 1996년 현지 최대 다이아몬드 광산의 지분 16%를 받아냈다.
이로써 연간 8억 5천만 달러에 이르는 다이아몬드 마케팅 독점계약을 맺게 되었다.
앙골라 콩고 시에라리온 같은 아프리카 중서부의 이른바 ‘Blood diamond’국가들은 정치 안정만 되면 캐나다, 러시아를 능가할 만큼의 잠재성이 무궁한 나라들이다.
레비에프가 이들 나라 대통령에게 환심을 사는 방법은 ‘일자리 창출과 다이아몬드 산업 부흥’이다.
그는 “원석을 캐내자마자 영국으로 가져가 그곳에서 비밀리에 거래하는 드비어스의 사업방식은 원산지 국가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라며 각국 정부를 설득했다.
레비에프가 이슈화한 이 문제는 먹혀들었고 나미비아, 앙골라, 보츠와나, 남아공 등에 첨단 기술 연마공장들이 그에 의해 설립됐다.
이 공장들은 다이아몬드 연마 산업이 투자 유치를 통해 정부의 보조금 없이도 아프리카에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각 정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공공연히 만일 보츠와나가 원석을 자신에게 준다면 그는 보츠와나에 수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일자리와 부가가치를 안겨주었다.
또 러시아에선 푸틴과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며 알로사 민영화에 참여해 대주주가 되었다.
이제 러시아의 다이아몬드는 굳이 드비어스의 유통 시스템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앙골라에서는 반군에게 다이아몬드를 구입해줌으로써 반군의 자금줄이 됐던 드비어스가 쫓겨났다.
드비어스 대신 레비에프가 앙골라에 안착했다.
그는 푸틴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해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외교 관계 강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스라엘 최대 비즈니스맨 중 한 명이다.
드비어스 입장에선 러시아의 배신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호주의 아가일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리오 틴토(Rio Tinto)는 레비에프가 드비어스와 맞서는 데 자극받았다.
1996년 틴토는 사상 처음으로 다이아몬드 4200만 캐럿을 드비어스를 거치지 않고 앤트워프에 있는 한 세공업체에 직접 판매했다.
대규모 중저가 다이아몬드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던 아가일 광산이 직접 판매를 선언한 것이다.
최근에는 호주가 전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40%를 차지해 최대 생산지로 등극했다.
호주는 연간 4천만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한다.
그러나 전체 생산량의 90%가 공업용에 속하고 나머지 10%의 80%마저 낮은 품질의 갈색 다이아몬드들이기 때문에 가치 면에서는 전 세계 생산의 약 3~5%에 불과하다.
하지만 드비어스를 제치고 직거래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질서를 재정립한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캐나다 등지에서도 연달아 드비어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됐다.
드비어스의 위기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반독점법 규제와 맞물려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또 아프리카의 내전이 대부분 마약과 다이아몬드가 그 원인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이아몬드 산업 자체에 큰 부담을 안기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드비어스의 시장 지배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