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상북도 산과 물이 빼어난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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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03:12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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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물이 빼어난 경주
『삼국사기』에는 당나라의 태종이 말하기를 경주는 “진실로 군자의 나라로다”라고 하였으며, 『수서(隋書)』에는 경주에 대해 “의복의 빛깔은 흰색을 숭상하며, 부인들은 머리털을 땋아 늘여 머리에 두르고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 꾸민다”라고 실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래 신라의 옛 수도였다. 한나라 오봉(五鳳) 원년에 신라 시조 혁거세가 나라를 열고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고 하였으며(그 뒤부터는 방언으로 왕경을 서야벌이라고 통칭) 또는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다가 뒤에 신라라 일컬었다. 탈해왕 때 시림(始林)에 괴이한 닭의 일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것을 나라의 이름으로 하였는데, 기림왕이 다시 신라로 고쳤다.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 김부가 와서 항복하니 나라는 없어지고 경주라 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야 경주라는 이름을 얻은 이곳을 형가(刑家)에서는 회룡고조(回龍顧祖)형이라고 하였다. 즉 용이 돌아서서 조상을 돌아본다는 뜻으로, 본산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가 휘돌아서 본 산과 마주 대하는 산세를 일컫는 지형이다. 경주 시내를 형산강(兄山江)이 흐르는데, 형산강은 경상남도 울산시 두서면에서 발원하여 경주를 지나 동쪽으로 흐르면서 큰 강이 되어 포항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남산 마애불
안압지
계림
경주를 형가(刑家)에서는 용이 돌아서서 조상을 돌아본다는 뜻의 회룡고조(回龍顧祖)형이라고 한다. 본 산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가 휘돌아서 본 산과 마주 대하는 산세를 일컫는 지형이다.
경주에 대하여 이첨은 그의 「기(記)」에서 “토지는 비옥하고 풍속은 순박하며, 백성들은 예절과 겸양을 안다”라고 하였고, 정인지는 “번화하고 아름답고 고움이 남쪽 지방의 으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수서』에는 “땅은 산이 험한 데가 많다”라고 쓰여 있고, 서거정은 “산과 물이 빼어나고 기이하다”라고 하였다.
경주의 진산은 남산인데, 신라 사영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하며 가뭄이 심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남산을 비롯한 경주에 원효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요석궁이다. 다음은 『여지도서』에 실린 글이다.
신라의 승려 원효가 일찍이 말하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터인가, 하늘 고일 기둥을 내가 깎아주겠네”라고 하였다.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하기를 “이는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말이다. 나라에 큰 어진 이가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로움은 없다”라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왕실의 과부가 있었다. 임금이 요석궁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게 하였더니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유교(楡橋)를 지나다가 요석궁 관리와 마주쳤다. 거짓으로 물속에 빠지니, 그 관리가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대로 묵게 하였다. 과연 과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아들이 바로 설총이다. 요석궁 터는 향교 남쪽에 있고, 유교는 궁터의 남쪽에 있다.
포석정
신라는 불국사와 토함산의 석굴암을 비롯하여 반월성, 포석정, 괘릉 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위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를 행하던 포석정.
이견대
경주 감은사지 앞에 있는 이견대(利見臺)는 신라 문무왕의 무덤인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지금의 누각은 1970년 건물터 발견 이후에 새로 건립되었다.
불국사와 토함산의 석굴암을 비롯하여 반월성, 포석정, 괘릉(掛陵) 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신라는 대소 가야국을 다 차지한 뒤 당나라와 연합 작전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멸한 뒤 삼국을 통일하였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 잠시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혔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신분층이 진골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6두품 이하에서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방에서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실력자들은 자신의 처지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만큼 국가에 더 이상 애착을 가질 수가 없었다.
불국사 대웅전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불국사는 신라의 불교문화, 나아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그런 가운데 중앙의 귀족들은 지방에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화려한 생활을 누렸고, 급기야 왕위 쟁탈전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통일 이후의 안정기가 150여 년을 넘기지 못하고 반란이 빈발하면서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갔다. 지방에서는 현지의 유력자들이 성장하여 권력 욕구를 키우고 있었으나 골품제가 유지되는 한 이들의 욕구는 충족될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진흥왕 때 설계두라는 사람이 “신라에서는 사람을 쓸 때 골품을 따지므로 정해진 신분이 아니면 비록 큰 공을 세워도 한계가 있다” 하며 신라를 등지고 당나라로 떠나버렸을까.
그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신라를 등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남산 자락에 있었던 남산사지(南山寺址)에 남겨진 이야기 한 편이 흥미롭다.
대세라는 신라 사람은 세속을 초월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평왕 9년인 587년에 담수라는 승려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의 이 산골짜기 사이에서 한평생을 마친다면 연못 속의 물고기나 새장 안의 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다녀서 오나라, 월나라와 같은 먼 나라에서 가서 이름난 스승을 따라 이름난 산에 들어가 도를 닦으려 합니다. 만약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신선으로 바뀔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다면 광활한 하늘 너머로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니, 이는 천하의 기이한 유람으로 웅장한 구경거리일 것입니다. 그대는 나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담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세가 그 자리에서 물러 나오다가 구칠이라는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는 굳세고 절개가 빼어났다. 드디어 그와 함께 남산사에서 노닐었는데, 별안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낙엽이 뜰에 괸 물에 떴다. 그것을 본 대세가 구칠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노닐러 가고 싶은 뜻이 있습니다. 각각 나뭇잎 한 개씩을 취하여 배로 삼아서, 그것이 떠내려가는 차례를 가지고 우리가 떠나가는 순서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잠시 뒤에 그들은 나뭇잎에 올랐고, 대세의 나뭇잎이 앞서 떠나기 시작하자 대세가 웃으며 구칠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곳으로 갑니다.”
그 말을 들은 구칠이 성을 발끈 내며 말하였다.
“나도 남자인데, 어찌 나만 남아 있으란 말입니까?”
마침내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어 남해 바다에서 배를 타고 떠나갔다. 그 뒤로는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마음이 가면 몸도 간다’라는 옛말처럼 마음으로 나뭇잎을 움직여 다른 나라로 떠났다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그 뒤로도 수없이 나타나 신라를 떠났다. 결국 신라는 9세기 말부터 지방 세력의 반란에 의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진성여왕은 그러한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채 호색(好色)에 빠져 있었고, 여왕의 총애를 받는 몇몇 가신들의 횡포로 정치의 기강은 극도로 문란했다.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그 틈에 지방 호족들은 나라 곳곳을 점령하여 반(半)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국가와 호족 그리고 연이어 계속되는 자연재해라는 3중의 수탈에 시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진성여왕이 즉위한 후 2년째인 888년 5월에는 큰 가뭄이 들었다. 농사를 망친 농민들은 그다음 해에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았다. 결국 농민들이 세금을 못 내자 국고가 텅텅 비고 나라 살림이 어려워졌다. 농민층의 몰락은 국가 재정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나라 안의 여러 주군(州郡)에서 공부를 나르지 않으니 부고(府庫)가 비어버리고 나라의 쓰임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납세를) 독촉하였지만 이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도적이 벌 떼같이 일어났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도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搭記)」에 그 무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굶주려 죽은 시체와 전쟁터에서 죽은 시체는 들판에 별처럼 즐비하였다. ······ 하늘과 땅은 온통 어지러워지고 들판은 전쟁터가 되니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행동은 짐승과 같았다. 나라가 기울어지려고 한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 잠시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혔다. 통일 이후의 안정기가 150여 년을 넘기지 못하고 반란이 빈발하면서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갔다. 결국 신라는 9세기 말부터 지방 세력의 반란에 의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농민들은 국가와 호족 그리고 연이어 계속되는 자연재해라는 3중의 수탈에 시달렸고, 이는 국가 재정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과 물이 빼어난 경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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