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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워필드의 창조론
Benjamin B. Warfield’s Doctrine of Creation
I. 들어가며
II. 리빙스턴과 놀의 주장
III. 자스펠의 반론
IV. 직접 창조, 간접 창조, 진화
V. 비판적 평가
VI. 결론
1. 들어가며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는 핫지 부자, 즉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와 아키발트 알렉산더 핫지(A. A. Hodge, 1823-86)와 함께 우리나라 보수적인 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인 이른바 구프린스턴 신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워필드는 남부 켄터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68년에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였으며 1871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유럽을 여행하던 중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였으며 1873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876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짧은 기간 켄터키의 장로교회에서 설교하였고 1876년 말에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독일에 유학하여 라이프치히에서 프란츠 델리취(Franz Delitzsch, 1813-1890)등에게 배웠는데 유학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워필드의 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평생 워필드는 아내를 돌보아야 했다.
워필드는 독일에서 귀국 후 지금의 피츠버그 신학교인 웨스턴 신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1879년 워필드는 안수를 받았으며, 1881년 A. A. 하지와 함께 성경 영감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이후 워필드는 성경 무오에 대한 강력한 변호자가 되었다. 1887년 워필드는 피츠버그 신학교를 떠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는데 1886년에서 1902년까지 4대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1929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분립하기 전 1921년 워필드는 사망하였다. 워필드는 이른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이어받기를 원하였던 구프린스턴 신학의 마지막 대표자였다고 할 수 있다.
1874년 찰스 핫지는 <다윈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란 단행본을 발간하여 당시 새롭게 등장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비판을 개진하였다. 이 책에서 핫지는 다윈주의가 설계 개념에 반하는 것이기에 명백하게 무신론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핫지의 견해는 1878년 핫지가 죽을 때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의 진화론에 대한 태도를 결정지었다. 비록 핫지는 모든 진화론적인 생각이 기독교 신앙과 갈등관계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기본전제에 있어서 명백하게 무신론적인 성향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완전히 별개의 기관이었던 프린스턴 대학(당시는 뉴저지 대학)의 존 맥클린(John Maclean Jr., 1800-1886, 재임 1854-68) 학장 또한 다윈의 진화론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1868년 맥클린 학장이 은퇴하고 철학자 제임스 맥코쉬(James McCosh, 1811-94, 재임 1868-88)가 학장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맥코쉬는 다윈주의의 많은 부분이 건전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즉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 대신에 둘 사이의 화해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맥코쉬에게 진화론은 무신론적인 것이거나 성경과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국의 장로교인들은 둘 다 프린스턴에 기반을 둔 진화에 대한 두 학파의 견해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핫지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축출당한 1929년까지 핫지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프린스턴 대학은 진화생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과학의 세계적인 본부가 되었다.
진화론에 대한 핫지의 확고한 반대와 거부는 워필드에 의해 일정부분 수정이 된다.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이나 마크 놀(Mark Knoll, 1946- )과 같은 학자들은 워필드가 이른바 유신론적 진화론을 수용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최근에 프레드 자스펠(Fred G. Zaspel) 같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워필드가 진화론에 대해 긍정하는 듯한 표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신진화론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워필드는 때때로 (조심스럽게 정의된) 진화의 가능성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확정적으로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다. 도리어 워필드는 30살 어간의 어느 시점에 진화의 가능성을 거부하였으며 이후에는 진화에 설득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리빙스턴과 놀의 논지는 이 증거를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진화론자로 워필드를 이해하는 지배적인 견해는 거부되어야만 한다.
2010년 자스펠의 주장이 등장한 이래로 브라이언 오커, 그리고 마크 존스는 워필드가 젊은 시절에는 진화를 긍정하였지만 생애 후반부에는 진화를 거부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필자에게 가용한 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다. 브렌트 렘펠(Brent Rempel)의 “Natural Science and Supernatural Authority: Scriptural Infallibility and Evolutionary Theory in the Writings of Benjamin B. Warfield (1851-1921)”이라는 논문은 2016년 발표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리빙스턴과 놀의 견해와 같은 입장이다. 자스펠의 단행본 <한 권으로 읽는 워필드 신학>의 9장 “인간론과 죄론”과 “B. B. Warfield on Creation and Evolution” 그리고 10권으로 된 워필드 전집이 또한 필자에게 가용한 자료인데, 워필드 전집 가운데 5권이 번역되어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5권 가운데 “칼빈의 창조론”이라고 하는 논문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누락이 된 점이다.
데이빗 리빙스턴과 마크 놀은 워필드가 자신의 학적인 경력 내내 진화를 인정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리빙스턴과 놀은 워필드의 글 가운데 이 문제와 관련한 글들을 모아 Evolution, Science, and Scripture: Selected Writings라는 책을 2000년에 펴내기도 하였다. 이런 자료들은 필자에게 가용하지 않아 리빙스턴과 마크 놀의 견해는 자스펠의 글을 통해 이차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큰 맥락에서 리빙스턴이나 놀의 견해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왜냐하면 워필드의 자료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너무나 명백하게 진화에 대해 언급하고 때문이다.
과연 워필드가 현재적 의미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창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진화라고 하는 말이 지니고 있는 복잡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직접 창조와 간접 창조 그리고 진화를 구분하고 있는 워필드의 견해와 양승훈 교수의 “진화의 세 가지 층위”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워필드가 직접 창조와 간접 창조에 더하여 진화의 가능성까지 언급한 것을 보면 증거의 추는 놀과 리빙스턴의 논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어느 정도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해 토론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는 프랜시스 쉐퍼와 점진적 창조론을 주장하고 있는 밀라드 에릭슨의 입장이 워필드의 입장과 가까워보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결론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가용한 자료들을 보다 면밀히 살핀 더 좋은 논문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II. 리빙스턴과 놀의 주장
1986년 리빙스턴은 자신의 논문에서 워필드가 “적어도 프린스턴 학생 시절부터 진화론의 주된 옹호자”였으며 유신진화론자인 맥코쉬가 프린스턴의 총장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미 ‘순수 다윈주의자’였으며 생애 내내 진화론의 주된 옹호자였다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리빙스턴과 마크 놀이 함께 작업한 저술에서는 워필드가 진화론을 계속해서 고수했다는 주장이 다소 약화된 것 같기도 하지만, 마크 놀과 리빙스턴은 워필드가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론을 다시금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장로교회사 저널>에 실린 놀과 리빙스턴의 “진화론자이면서 동시에 성경 무오론자인 B. B. 워필드(1851-1921)”라는 논문은 다음과 같은 대담한 진술로 시작한다. “미국 지성사의 기막힌 신비 가운데 하나는, 성경무오라는 신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교리에 대한 현대의 최고 옹호자인 B. B. 워필드가 진화론자였다는 사실이다.” 놀과 리빙스턴은 진화와 성경적 칼빈주의의 조화가 프린스턴 시절 내내 워필드의 ‘한결같은 목표’(constant goal)였다고 말한다.
놀과 리빙스턴은 워필드가 기독교 안에 진화의 ‘가능성’을, 진화와 기독교의 양립 가능성을 허용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워필드에게 있어서는 하와 창조 이야기를 제외하면, 성경과 진화 사이에 필연적 충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워필드는 진화의 가능성을 인정했고 하와 창조 기사를 진화에 반하는 장애물로 보았다.
놀과 리빙스턴의 이런 확신은 다음 두 가지 고려 사항에서 기인한 것이다.
첫째, 워필드는 제임스 오르(James Orr, 1844-1913)의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God’s Image in Man)에 대한 1906년 서평에서 심신은 함께 가야지 별개로 따로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인간의 몸은 동물로부터 진화되고 인간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번에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모순이라는 오르의 주장을 언급했다. 그리고 워필드는 사람이 몸과 영혼의 통일체라는 오르의 이해를 지지하면서, 이 이해가 ‘성경적 인간론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워필드는 오르의 주장은 비약을 통한(per saltum) 진화(여기서는 하나님의 관리 감독하시는 손길 아래서 인간의 몸이 어떤 동물 조상으로부터 비약적으로 번식되어 나오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그 몸에 해당하는 인간 영혼을 창조해 주신다) 이론에 대한 반박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경우 하나님은 기존 생물 안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이 산출되게 기존 생물을 단순히 관리 감독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화를 관리 감독하시면서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신다. 워필드는 이 대안에 헌신하지 않는다. 여기서 워필드는 “인간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진화와 창조의 결합을 다시 제안”했고, “인간 몸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의 신학적 정당함을 명백히 인정했다”고 놀과 리빙스턴은 주장하고 있다.
둘째, 워필드가 진화론자라는 놀과 리빙스턴의 확신은, “칼빈의 창조론”에 대한 워필드의 1915년 논문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기서 워필드는 하나님은 2차 원인을 사용해 창조하신다는 칼빈의 주장을 검토했다. 하나님은 맨 처음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나(어떤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그 후로는 이미 창조된 기존의 것에서 “내라”(예를 들어, 창 1:11)고 명령하셨다. 워필드에 따르면, 칼빈은 간접적 창조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하나님이 맨 처음 무로부터 창조하신 이후에는 이미 창조된 우주적 물질에서 그다음 사물이 생겨나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여기에는 칼빈의 고등한 섭리 교리인 협력(concursus) 교리가 반영되어 있다. “워필드는 ”칼빈의 창조론이... 인간 영혼을 제외한 모든 것에 진화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은 어떤 진화론도 갖지 않았지만, 진화를 가르쳤다.... 무에서 생겨나지 않은 모든 것이 사실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된 것이다.” 워필드에 따르면 칼빈의 이 교리는 그냥 진화가 아니라 ‘순수 진화론’(a very pure evolutionary scheme)이었다. 이런 ‘순수 진화론’이라는 표현은 발전(development)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군트라흐는 워필드가 언젠가 진화가 사실로 증명되리라 기대하며, 정통 칼빈주의 한계 내에 진화를 자리매김하기 원한 것일지 모른다고 제안하고 있다. 놀은 이것을 ‘진화에 대한 워필드의 가장 강한 긍정’으로 묘사했다.
워필드가 진화를 지지하는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 같은 또 다른 언급들이 있다. 스코틀랜드 신학자 제임스 이베라흐(James Iverach)가 쓴 <기독교와 진화>(Christianity and Evolution)에 대한 서평에서, 워필드는 이베라흐가 진화는 너무 중시하고 하나님은 너무 경시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이베라흐에게 동의하여, “그리스도가” 진화에 “중대한 예외임이 틀림없”다고 말한 후에, 그렇다고 “그리스도가 유일한 예외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진화’를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공식인 양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어떤 경우도 진화를 넘어 더 높은 공식인 ‘하나님’(진화 가운데 일하실 뿐만 아니라 진화 없이도 일하시는, 진화 이상의 존재)께로 가야 한다.” 이 진술은 마치 워필드가 진화를 하나의 합의점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놀과 리빙스턴은 1888년 수업에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워필드의 “진화 또는 발전”이 진화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던 때의 워필드를 보여 준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이 글에서 워필드는 진화론을 ‘아주 개연성이 낮은’ 이론으로 간주했다. 놀과 리빙스턴의 주장에 따르면, 워필드는 이런 아주 비판적 입장에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진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리빙스턴은 “워필드는 이 점을 1888년에 ‘미결 문제’로 내버려 두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론을 갈수록 더 받아들이게 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자신있게 주장한다.
몇몇 기독교 신학자들은, 심지어 소수의 아주 보수적인 학자들조차도,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일컬어지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과정의 시초에 직접적인 방식으로 창조하셨고, 그 후로는 진화를 통하여 안으로부터 사역하셨다. 이 견해는 과학적인 자료들을 아주 잘 다룰 수 있지만, 성경의 창조 기사에 대해서는 약간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 1926- )는 성경의 무오성에 관해 토론하면서 북미에서의 복음주의자들이 모든 형태의 생물학적인 진화론은 성경과 상반된다는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유보적인 입장임을 피력하고 있다:
나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또 그러한 내용을 글로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경학적으로 볼 때,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이나, 그 밖의 부분에서 성경이 생물학적 진화론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는 비과학자의 처지에서 그 이론 자체에 대하여, 전문가들의 논쟁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지만, 비 비 워필드(B. B. Warfield)가 유신론적 진화론자(theistic evolutionist)였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만일 이러한 점 때문에 내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도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제시하였던 리빙스턴과 놀의 주장과 같이 패커는 워필드를 대표적인 유신진화론자로 지칭하고 있고 워필드의 입장을 따라 자신도 유신진화론자임을 자임하고 있다.
III. 자스펠의 반론
워필드가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는 보수적인 신학자였음에도 진화론을 수용한 사람이라는 놀과 리빙스턴의 견해에 대해 자스펠은 동의하지 않는다. 자스펠도 워필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부분 긍정적으로 진화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스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워필드가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놀과 리빙스턴은 대체 어떤 근거로 워필드가 진화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자신있게 주장하는가? 워필드는 자신의 경력 내내 기독교 유신론이 몇몇 진화론과 필연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님을 거듭 인정했다. 그러나 진화 가설을 사실에 대한 참된 설명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면서 자스펠은 워필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어쩌면’ 참이라고 말하는 바다. 포괄적인 확신을 결코 가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길 원한다. 우리는 증거에 뒤처지기도 원하지 않고 증거에 앞서기도 원하지 않는다.”
리빙스턴과 놀의 주장에 대하여 프레드 자스펠은 리빙스턴과 놀이 진화에 대한 워필드의 견해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추론하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워필드가 실제로 그 자신 진화론에 헌신하였다는 주장은 비록 워필드가 [진화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하였다는 다소간의 암시가 있기는 하지만 워필드는 결코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확증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자스펠은 리빙스턴이나 놀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워필드가 진화론을 받아들였다는 주장은 불가능한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워필드가 진화 개념을 고려하고 허용했다는 증거는 있을지라도 자신이 진화를 받아들인다고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런 주장은 힘든 주장임에 분명하다고 자스펠은 주장하고 있다.
자스펠은 워필드가 생애 전체에 걸쳐서 진화론을 수용했던 사람이라는 리빙스턴과 놀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며 워필드가 젊은 시절 한때 진화론을 받아들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30대 초반에 진화론을 버리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워필드는 “비록 진화에 열린 태도를 견지했을지라도 진화를 자기 입장으로 받아들이기를 계속 거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자스펠은 주장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자스펠은 워필드가 진화론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는 “분명한 불가지론”의 입장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자스펠은 “수 년에 걸친 여러 서평에서, 1888년의 강연을 개작한 보다 깊이 있는 1895년 논문.... 그리고 1901년과 1903년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워필드가 진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라는 것이다.
줄곧 워필드는 만약 진화가 사실로 증명된다면, 이럴 경우에 한해서만 진화를 수용할 수 있다고(아직 증명되지 못했음을 강조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진화론자는 마치 시간이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주는 요술 지팡이인 양 거의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조롱했다. 그리고 여러 진화 이론이 과학계 안에서조차 타당성을 갈수록 더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1916년 워필드는 자신의 프린스턴 대학 시절을 회고하면서 30세 미만의 생물학자는 모두 진화론자라고 주장하였던 맥코쉬 학장과의 대화를 공개했다. “내가 30세가 되기 전에 진화론에서 탈피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기이하게 생각하는 최후의 1인이라고 답한 내 의도를 맥코쉬 교수는 이해했을까 전혀 확신이 안 섰다.” 자스펠이 제시하고 있는 이런 글들을 보면 워필드는 이미 1880년대 초에 진화론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건대 워필드가 이른 시기 자신이 견지한 진화론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비록 진화에 열린 태도를 견지했을지라도 진화를 자기 입장으로 받아들이기를 계속 거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자스펠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화에 대한 워필드의 견해는 무엇인가? 이 부분에 대해 자스펠은 워필드가 진화에 대해 시종일관 유보적인 입장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워필드는 그리스도인이 “진화가 하나님의 섭리 방법에 대한 하나의 제안된 설명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지킬 때, 진화와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신학적이고 과학적인 가능성으로 허용하기는 했지만, 과학적 사실로 분명하게 승인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워필드는 몇몇 진화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지만, 진화를 명백하게 받아들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진화에 무척 관심을 가지고 진화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발언도 했지만, 워필드 자신은 언제나 유보적이다.”
그러면 워필드가 진화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부분에 대해 자스펠은 “놀과 리빙스턴이 인정한 대로 ‘성서주의자’인 워필드가 글자 그대로 이해된 하와 창조 기사가 진화와 상충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영혼의 기원이나 죽음 같은 여러 내용”도 여전히 워필드에게는 진화의 장애물이었을 것이라고 자스펠은 보고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워필드는 이따금 진화를 허용하긴 했으나 진화가 사실이라거나 자신이 진화에 동의한다고 분명하게 말한 적은 없다는 점이다. 분명하게 밝힌 것은, 자신은 30세 쯤 진화론을 버렸고 여전히 진화론에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놀과 리빙스턴 그리고 자스펠은 동일한 한 사람 워필드의 서로 다른 자료들을 해석하여 각기 다른 결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워필드 자신의 모호한 입장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때로는 상반되는 듯하기까지 한 워필드의 모호한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IV. 직접 창조와 간접 창조 그리고 진화
자스펠이 워필드의 창조론과 관련하여 제시하고 있는 자료 가운데 직접 창조와 간접 창조 그리고 진화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나름의 빛을 던져줄 수 있는 내용으로 사료된다. 워필드는 이 세 가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라고 자스펠은 주장하고 있다. 직접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진화와 다르다. 직접 창조는 우주를 무에서 생겨나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적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창조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 수단 없이 직접 작용한 것이라는 사실은 창조 개념상 당연하다.” 반면에 간접 창조는 하나님이 기존 물질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기적적으로 생겨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간접 창조는 직접 창조와 다를 뿐만 아니라 진화와도 다르다. 간접 창조는 진화 그 이상의 것이다. 진화는 하나님이 기존의 옛 형태 안에 잠재되어 있던 것이 새로운 형태로 발출되는 발전 과정이다. 그야말로 진화는 단순한 변화요 섭리적 인도라고 할 수 있다. 간접 창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간접 창조는 진화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다. 워필드에게 있어서 간접 창조는 “이 복잡한 자연 안에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아무리 지혜롭고 강력하게 발전 과정을 이끌고 주장할지라도, 기존 자연에 있는 것으로는 산출하기 힘든 어떤 것)을 투입하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간접 창조는 어떤 것이 산출되려면 “직접적이고 ‘능력 있는 의지의 섬광’이 필요한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투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진정한 창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자스펠은 워필드가 하나님께서 무로부터의 창조인 직접 창조, 간접 창조, 그리고 진화라고 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질서 있는 세상을 생겨나게 하셨다라고 주장하였다고 보고 있다.
워필드가 직접 창조와 간접 창조를 구별하고 있는 것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전임자였던 찰스 핫지와 동일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창조는 즉각적이라면 이차적이고 간접적인 창조는 점진적이다. “전자는 어떤 선재적 본체와 협동에 관한 개념을 배제하고, 후자는 양자를 인정하고 함축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핫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 27절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하는 창세기 2장 7절을 비교하면서 “이처럼 선재하는 물질로부터의 창조가 성경적 창조 개념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핫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무로부터의 직접적‧즉각적 창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제2원인들과의 연합 속에서 역사하는 간접적‧점진적 창조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워필드는 찰스 핫지와 달리 직접 창조와 간접 창조, 또는 일차적 창조와 이차적 창조에 더하여 진화를 병기하여 비교 설명하고 있다. 워필드가 찰스 핫지와 달리 진화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점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양승훈 교수는 지난 2019년 2월에 개최된 제24회 창조론오픈포럼 발표 논문에서 “진화의 세 가지 층위”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논문에서 양 교수는 진화라고 하는 개념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혼란에 대해 잘 정리해 주고 있다. 관찰 사실로서의 진화(evolution as a observed fact)와 논리적 추론으로서의 진화(evolution as a rational inference), 그리고 이데올로기로서의 진화(evolution as an ideology)가 바로 그것이다. 이른바 소진화는 관찰 사실로서의 진화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종간의 진화를 의미하는 대진화는 일종의 논리적 추론에 해당하는 것이지 관찰 사실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진화는 대진화를 넘어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워필드가 주장하였다는 직접 창조와 간접 창조, 그리고 진화에 대한 설명과 이런 진화의 층위에 대한 양승훈 교수의 설명을 가미하면 어떤 의미에서 워필드가 진화를 긍정하고 어떤 의미에서 진화를 부정하고 있는지 나름의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상태로는 이것이 필자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잠정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결론을 제시하려면 놀과 리빙스턴이 살펴본 자료와 자스펠이 제시하고 있는 자료들을 직접 살펴보고 나서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을 쓰면서 필자로서는 국내의 여러 가지 학적인 연구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에 가지 않고도 여러 자료들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운신의 폭은 너무나 작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치열한 학적인 탐구의 부족에 대한 나름의 핑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워필드의 진화에 대한 생각을 지금의 유신진화론과 바로 연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살펴보아야할 주제라고 할 수 있다.
V. 비판적 평가
지금까지 워필드의 진화에 대한 견해에 대해 기본적으로 워필드는 유신진화론자로 보는 놀과 리빙스턴의 논지와 워필드가 진화를 일부 허용하긴 하였지만 진화론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자스펠의 반대논지를 살펴보았다. 일단 전반적인 토론의 방향은 어쨌거나 상당부분 워필드가 진화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만을 하는 입장은 아니었다는 면에서는 이론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진화에 대한 맹목적인 반대가 존재한다. 이런 자세는 지양되어야 할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꽤나 인기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 한국교회의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만 가이슬러와 윌리암 로취는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 1950- )가 2007년에 설립한 바이오로고스(BioLogos)가 가지고 있는 진화에 대한 자세 때문에 그 단체를 비판하고 있다: “멤버들은 유신 진화론에 불가피하게 헌신되어 있으며 그렇게 해서 성경 무오성에 서 있는 역사적 기독교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이 보기에 진화론의 유신론적 형태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거절하는 것과 유사하다. 젊은 지구론자인 켄 함(Ken Ham)은 진화론에 대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간단하다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전체 문제는 우리가 거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냐 아니면 (뭐라고 단서를 달든 상관없이) 거기에 있지 않았던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을 믿을 것이냐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해석과 동일시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알렌 미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류가 창조된 것은 진화와 화해할 수 없다”라고 쓰고 있다.
이런 자세는 적어도 워필드의 견해와는 합치할 수 없는 입장이다. 워필드는 찰스 다윈의 종교적 견해에 대하여 연구하였고 글을 썼다. “다윈의 종교적 삶”에 대한 논문에서 워필드는 다윈의 진화론은 직접적으로 다윈의 기독교 신앙을 앗아갔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한번 충심으로 그[다윈]에 의해 받아들여진 진화론은 점차적으로 그의 신앙을 무너지게 하여 전체 기독교를 증명되지 않은 망상으로 내버리게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워필드는 진화가 그러한 신앙의 거부를 요청하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찰스 다윈의 생애와 편지”라는 책에 대한 논평에서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신론자요 기독교인인 많은 진화론자들이 있다.”
브렌트 렘펠은 진화를 인정하는 것과 성경의 권위를 포기하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적절한지 물으면서 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접근에 반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학은 그 영역 또는 그 영향의 범위에 제한되기만 하면 교회를 적극적으로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자연의 영역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계시적 통로이다”라고 말하면서 대표적으로 <벨기에 신앙고백>(1561년)을 언급하고 있다.
렘펠은 과학적 발견이 성경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도리어 과학과 신학은 생산적인 관계로 존재해야 하는데, 워필드는 성경의 진실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진화론의 유신론적 형태를 인정했던 하나의 실례가 된다라고 렘펠은 주장하고 있다. “워필드는 과학적 증거가 성경적 교리의 형성과 성경 본문의 재해석을 정당화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진화가 성경적 증거 그 자체에 부합하였기 때문에 이 입장을 취하였다. 진화는 물리 세계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적인 활동을 드러내주는 설명적인 원리로서 기능하였다.” 렘펠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비록 워필드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다양한 정도로 자신의 학문적인 경력 내내 진화론의 유신론적 형태를 긍정하였다.”
워필드의 원자료와 이에 대한 놀과 리빙스턴의 주장, 그리고 이에 대한 자스펠의 반론, 그리고 최근의 렘펠의 주장까지를 살펴보고 필자에게 드는 생각은 워필드를 유신진화론자로 안보기는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다. 분명 일정 부분 진화론에 대해 유보적인 자세가 워필드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필드는 진화론 자체에 매우 열려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 혹자는 물을지 모른다. 유신진화론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무엇이냐? 현재 필자는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1912-84)의 입장이 필자의 현재적인 입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느 정도 여지를 열어놓고 유신진화론에 대해서도 살펴보자는 것이다. “성경에 의해 수립되는 우주론의 자유와 한계”를 논하면서 쉐퍼는 결론적으로 두 가지 요점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요점의 내용은 진화론에 대한 비판이다: “첫째로, 비록 내가 이전의 나처럼 아직도 불가지론자라고 하더라도, 나는 소립자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연속적인 진화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원리로서 처음에 등장한 다윈주의와 신다윈주의는 철학적 문제뿐 아니라 방법론적 및 통계학적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환원주의를 기초로 최후의 해명을 시도하는 것은 이제 크게 사라지고 있다. 시간과 우연의 기초 위에서 소립자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과정으로의 연속적 진화 개념은 현대의 합리주의적 인간에 의해 견지된 신념적 입장에 불과하다고 내게는 생각된다.”
두 번째 요점으로 쉐퍼는 “나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개념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장하신 것에 고개를 숙인다면, 우주론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논의할 만한 자유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쉐퍼의 견해와 워필드의 견해가 일치하는지 여부는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선다. 필자가 받아들이고 있는 밀라드 에릭슨(Millard Erickson, 1932- )의 “점진적 창조론”이 워필드의 견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에릭슨은 소진화에 대해 인정하고 대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이른바 “창조 내에서의 발전”을 인정하지만 “그 종류를 따라”라고 하는 창세기 1장의 말씀에 따라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발전의 양에 어떤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VI. 결론
찰스 핫지와는 달리 워필드는 진화에 대해 단일한 저술을 쓰지도 않았고 진화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지도 않았다. 이 논문에서 명확하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자연주의에 대해서는 워필드가 단호하게 반대하였지만 여러 부분에 있어 진화를 인정하는 듯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놀과 리빙스턴과 같이 일반적으로 워필드가 보수적인 신학자이면서도 이례적으로 진화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신학자로 제시되곤 하였다. 그리고 그런 해석은 자스펠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자스펠은 그럼에도 워필드는 30대 어간에 진화론을 버린 이후로 평생 진화론을 자신의 견해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하여 워필드는 일종의 유보적인 입장이었다고 자스펠은 보고 있다. 이런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쪽이 제시하고 있는 자료만을 살펴서는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직접 창조와 간접 창조 그리고 진화에 대한 워필드의 주장과 양승훈 교수의 진화의 층위에 대한 주장들을 적용하여 보다 면밀하게 살필 때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분명한 것은 진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는데 이는 워필드의 견해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보다 여유를 가지고 이 부분에 대해 접근해보려는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박찬호 박사/백석대학교(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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