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50
9월16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2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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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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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12 사도 만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일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공동체의 이런저런 필요를 채워주던 협조자,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 완전매료되어,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뒤 따라다니던 추종자들까지 합하면 엄청난 사람이 무리를 지어 다녔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이지 엄청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알량한 권력이지만 쥐고 있었던 헤로데를 비롯한 권세가들의 우려도 컸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설교하는 회당은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엄청난 수효의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기 질투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특별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복음 8장 2~3절)
참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개방적인 예수님을 태도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여성들이 당하던 차별대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평범한 여성들이 아니라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치유받은 여성들, 그 어디에서도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여성들까지도 당신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허용하셨습니다.
피정집을 운영하면서 새삼 느끼는 바가 큽니다. 피정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양질의 프로그램도 중요합니다. 시의적절한 명강의도 필요합니다. 쾌적한 환경과 숙소도 요구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더군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갈진 식사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 식사 준비는 남자인 제가 아무리 백방으로 노력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머니의 정성스런 손맛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하던 복음 선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 뒷전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헌신하던 여성들의 손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여성들이 자신들의 재산마저 팔아가며 공동체를 뒷바라지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큰 매력과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세상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활짝 열려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와서 기쁘게 헌신하고 봉사하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매력을 갖춘 우리 공동체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든든한 기초요 기반으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에 깊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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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루카 8장 1-3절)
<(2)그 뜨거운 사랑 체험>
극단적 자기중심주의, 피를 말리는 경쟁 체제, 외형적 실적주의 사회 속에서도 정말이지 자신을 잊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기인’처럼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야말로 ‘바보’가 따로 없습니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신비입니다.
기부문화에 앞장서는 정말이지 특별한 분들을 보면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될 정도입니다. 뼈 빠지게 벌은 돈입니다. 목돈이 생길 때 마다, 우리 사회 어디가 가장 어두운 곳인가, 이번에 누구를 도와줄까, 그게 늘 고민꺼리입니다. 자신의 삶은 도통 돌아보지 않습니다. 오로지 관심사는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입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예가 성직자 수도자들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느님, 교회, 가난한 이웃뿐입니다. 교회를 위해 전적으로 투신합니다.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합니다.
평신도들 가운데서도 그런 분들 많습니다. 자신의 시간, 돈, 체력, 가진 모든 것을 소진해가며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많이 받습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 좋은 것, 누리고 싶은 것, 재미꺼리들 저리도 많은데 다 마다합니다. 그저 희생과 봉사, 이웃 사랑의 실천에 목숨을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갈까요? 그들의 유전인자가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일까요? 그들은 타고난 것일까요?그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이유 한 가지는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찐한’ 하느님 체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이 그들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사랑의 체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 체험이 그들의 생애 어느 지점에서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체험이 있었기에 그들은 이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특별한 만남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뜨였으며, 그로 인해 삶이 180도 전환되는 은총 체험이 있었기에 그리도 철저한 자기포기, 투철한 예수님 추종이 가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 예수님 뒤를 언제나 조용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그 일행의 필요성에 최선을 다해 보필한 여인들의 삶이 또한 그랬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루카 복음사가에 의해 거명된 여인들의 면면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당시 사회 안에서 소외 계층의 대명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살아갔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악령에 들리거나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로부터도 소외당한 채 죽을 고생을 하면서 하루하루 모진 삶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큰 행운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너무나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는 한 평생 괴롭혀왔던 병으로부터 그녀들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것만도 충분한데 예수님께서는 플러스알파로 자신들의 가치, 고귀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는 존귀하다, 너는 사랑스럽다, 너는 특별하다며, 그녀들의 삶에 의미를 되찾아주셨습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하느님 체험, 뜨거운 사랑 체험이 그녀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주변인에서 당당하게도 주인공으로, 악령의 지배를 받던 여인에서 예수님의 사도로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은혜로운 체험, 그 뜨거운 체험,
그 감동, 그 감미로운 하느님 사랑 체험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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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zaIAXpf8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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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회는 신자들을 위해서 돈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일까?>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엔 감동적인 동영상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아버지에게 차를 선물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 ‘가족을 위해 73년식 포르쉐 포기했던 새아빠’란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친아빠도 아닌 새아빠를 위해 차를 선물한 것입니다. 새아빠는 엄마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는 73년식 포르쉐를 팔아야만 했습니다. 딸은 새아빠에게 그 차를 되찾아주기 위해 돈을 아껴서 그 차를 깨끗이 수리한 다음에 깜짝 선물을 합니다. 아빠는 딸을 안고 웁니다.
딸이 이렇게 새아빠가 가장 아꼈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것을 선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새아빠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땀과 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 마음 안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정을 주지 않습니다.
중국 한 초등학교에서는 그들의 부모님이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자녀를 위해 뼈가 으스러지게 일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에 아이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보다 더 큰 교육이 있을까요? 부모들이 나중에 힘이 없어지고 자녀들이 성장하여 돈을 벌 수 있을 때 이 부모들은 절대 가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포크포크'엔 또 ‘2년째 엄마 차 얻어타던 아버지께 새 트럭 사드렸더니 반응’이란 동영상도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잔디관리 사업을 하며 고생하여 자신을 키운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2년 전 트럭이 고장 나서 직장에 엄마 차를 얻어타고 출근하는 것도 압니다. 이에 아들은 돈을 아끼고 아껴서 아버지에게 트럭을 선물해드립니다. 아버지는 울면서 뛸 듯이 기뻐합니다.
노년에 풍족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피를 흘려서 자녀들의 마음 안에서 이기심을 몰아내고 어떻게든 보답할 수 있는 자녀들로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세계 1위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고생을 알면서도 거의 보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녀들 안에서 악한 영을 빼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경쟁시켜서 자녀들 마음 안에 악이 성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여인들이 나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2-3)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였고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이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영적인 은총을 받았고 이에 물적으로 보답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이들 중 굶어 죽은 이는 지금까지 한 명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를 바치는 사람에게 성체가 유효하듯 영적인 선물을 주는 교회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줄어든 이들이 많아지기에 가난할 수 없습니다. 항상 보답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가난하고 돈이 없다면 그 교회는 사람들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거나 병을 고쳐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일곱 마귀란 성령의 일곱 은사와 반대되는 죄를 의미하는데 교회에서는 이를 ‘칠죄종’이라 하고 칠죄종은 ‘삼구’로 모입니다. 칠죄종은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고, 삼구는 “세속(돈), 육신(성욕), 마귀(교만)”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이것들을 없애야 하고 동시에 육체적인 질병도 고쳐주는 일이 행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보답으로 절대 재정적으로 가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영을 빼내고 건강한 육체를 회복시켜 줄 힘을 지닌 것은 부모의 희생밖에 없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고는 절대 반찬 투정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과 같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 안에서 자신들의 피로 악령을 쫓아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악령을 쫓아내시기 위해 당신 피를 쏟으셨습니다. 이것이 매 미사 때 우리가 영하는 성체와 성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수난 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쉬운 물질적 보상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일 미사 때도 성체의 가치에 보답하기 위해 다만 천 원이라도 봉헌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십일조 이야기가 사라진 가톨릭이 재정적으로 더 부유할까요, 아니면 개신교가 더 부유할까요? 개신교의 웬만한 대형 교회는 가톨릭 한 교구의 재정을 훌쩍 넘어섭니다. 그래도 그들은 행복하고 부유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도 재정적인 회개를 하도록 촉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교회 자신부터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피 흘림과 같습니다. 이렇게 흘려주면 신자들은 또 고마워서 더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넉넉해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말라키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말라 3,10)
부모가 자녀로부터 나쁜 영을 자신들의 피로 몰아내어 자녀들의 감사를 받게 되는 것이나 교회가 가진 모든 것으로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나쁜 영을 몰아내어 그들의 보답을 받아 넉넉해지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때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2코린 8,14)
하지만 요즘 교회 안에서 돈을 봉헌하는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교회가 자비로워졌다기보다는 돈이 행복이라는 믿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돈이 행복이라 믿기에 돈을 내라고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을 내는 것이 행복임을 믿었다면 돈을 많이 봉헌하라는 강론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베푼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당당하게 돈을 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야지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에덴동산은 참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가장 중요하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일이었습니다. 돈을 봉헌하는 게 행복입니다. 오늘 자신들의 재산으로 교회를 도왔던 여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행복하기 위해 재산을 포기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루카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도 그렇고 이렇게 교회를 위해 돈을 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아낌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그 피 흘림이 신자들의 마음에서 나쁜 영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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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루가 8,1-3)
Mary, called Magdalene, from whom seven demons had gone out, Joanna, the wife of Herod’s steward Chuza, Susanna, and many others who provided for them out of their resources.
<(2)예루살렘 부인들!>
오늘 복음엔 소위 ‘예루살렘 부인들’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부인들이란 예수님께서 골고타를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눈물 흘리며 통곡하던 여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녀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를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신분을 알 수 없는 수산나라고 하는 여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신 여인입니다. 유명한 죄인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안나는 헤로데의 집사였습니다. 권력층이었다는 뜻입니다. 수산나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라는 것을 보면 모두 재력이 어느 정도는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제들에게도 예루살렘 부인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여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도움’이 되라고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 도움은 나중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움인 척하면서 오히려 방해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안 좋은 부류가 “안 돼”, “틀렸어”, “못 해”, “그걸 하겠다고? 교만하네”라고 말하며 기를 꺾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도움을 주는 듯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만들려는 위선자들입니다. 이들을 가까이하면 이용만 당할 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올바른 길을 갈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스승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 부류는 “내가 도와줄게”, “내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도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제를 다른 사제와 비교하며 자신이 도와주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은 그 사제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도움이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모두가 사제를 칭찬해주니까 사제가 교만해지고 권위적으로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처럼 사제들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들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없어도 됩니다. 사람은 비난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뀝니다.
참다운 도움은 ‘예루살렘 부인들’입니다. 조건 없는 신뢰와 도움을 주는 이들입니다. 그녀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실 때, “그러길래, 내 말을 좀 듣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확신과 어머니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협력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주는 것은 물질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무조건 믿어주니까 덕분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조건 믿어주다가 사제가 교만해지고, 잘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많은 여자가 그저 “예수님의 일행”이라고 하여 시중을 들었다고 하지, 가려가며 시중들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어머니 모니카는 무조건 아들을 믿고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그것 자체가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은 비뚤어졌어도 올바른 길을 찾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돕는 여인들이 참으로 예루살렘 여인들입니다.
제가 영성관에 온 지도 벌써 5년째가 되어갑니다. 처음 올 때는 재정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못했습니다. 워낙 시골에 있어서 교통편이 좋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잘 운영해도 적자 안 날 정도로 빠듯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식복사’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정을 줄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식복사 한 분을 고용하면 일 년에 2천만 원 정도는 나가야 하는데, 빠듯한 상황 속에서 사제 한 명을 위해 그런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자매님 3분을 일주일에 하루만 함께 와서 좀 도와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성지순례 갈 때 저희 부모님에게 아주 잘했던 분들이어서 그렇게 청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한 분은 청소, 한 분을 빨래, 한 분은 맛있는 집밥을 먹게 해 주셨습니다. 5년 가까이 매주 빠지지 않고 와서 도와주셨습니다.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정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민이 있으면 이야기도 하고 하나의 공동체로서 미사도 함께 봉헌하였습니다. 이분들은 제가 하는 일을 모두 긍정해주시지 어떤 방향을 제시하거나 삶을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당신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일을 다 하고 나서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아마 그 여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따듯함을 느끼고 힘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재산으로만 제자들을 도왔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자들이 줄 수 없는 무언가가 여인들에게 분명히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무조건적 사랑과 신뢰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여인들의 그러한 도움을 받았다면 지금의 사목자들도 그런 도움이 필요할 것은 분명합니다.
주교님도 도와주시고 동료 사제들도 당연히 제가 여기 있는 동안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이런저런 정보와 충고를 주신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큰 사고 없이 영성관 생활이 마무리된다면 저는 그 공로를 무엇보다 사제관에서 봉사하신 이 세 분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처럼 믿고 사랑해주고 도와주신 많은 예루살렘 형제자매들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골고타로 올라가실 때는 도망가버린 제자들에 비해 그 여인들에게서 더 큰 힘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도움으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예루살렘 부인들은 제자들과 버금가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필수적인 도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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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한국은 아직까지는 입국하기 위해서는 ‘코로나테스트’를 했었습니다. 검사결과 음성이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지만, 양성이 나오면 음성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가벼운 감기 증상이 있었던 동창 신부님은 코로나테스트를 받은 후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양성이 나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동창 신부님은 음성이 나와서 다른 동창신부님들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였습니다. 미국은 ‘코로나테스트’를 입국의 조건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With Corona’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입국의 조건으로, 비행기 탑승 조건으로 ‘코로나테스트’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혹시 코로나 증상이 있더라도 입국해서 치료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입국해서 격리하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집에 오는 가족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빨리 와서 치료받으라고 할 것입니다. 정부의 결정으로 혹시 코로나 증상이 있더라도 입국해서 치료를 받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죄인이라고 비난받던 세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여자들도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 형제님이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질문을 받으면서 ‘부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고백했던 것처럼 신앙 안에서, 신앙의 신비로 우리는 모두 죽지만 언젠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부활의 또 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메마른 땅에 봄이 오면 파란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어서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땅에서 꽃이 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활은 이렇게 다시 일어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걱정과 근심에서 용기와 담대함으로 일어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일어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일으켜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일어서는 것이 부활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헤로데도, 빌라도도 모두 그대로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도, 바리사이도 그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두려워서 숨어있던 다락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제는 박해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모두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언젠가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일어서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활은 나의 삶이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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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8,1-3: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헌신 봉사하며 따랐던 여자들이 나온다. 그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 수산나, 요안나라는 여인이다. 이 여자들과 수산나는 복음에 그 이름이 전해질만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도운 여자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자가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도 시키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복음 전파를 도운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주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구체적으로 아무 사심 없이 주님과 사도들을 도왔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여성이 헌신적으로 주님의 사업을 도와왔고 지금도 여성들이 그러한 열성을 보이는 것은 또한 주님의 부르심이다. 이들은 주님의 사업을 돕는데 그들 사이에 어떤 시기나 질투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런 것이 있었다면 예수께서 그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이 여인들과 같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봉사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실천을 하고 있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하면, ‘그건 네가 시작한 일이니 잘 해봐!’라고 하면서 협조도 하지 않고 골탕 먹기를 바라고 있는 자세는 없었는지, 그래서 그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속으로 손뼉을 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사실상 여자들의 수가 더 많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이 여인들의 봉사로 교회가 살아있을 수도 죽어갈 수도 있다.
우리의 역할은 이렇듯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님 앞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려운 가운데 서로가 깊이 일치한 이 여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역사의 인물 속에서나 지금에도 그러한 역할, 그러한 도움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러한 봉사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도움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한 부르심에 따라 자기 소임을 잘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 큰 영예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묵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봉사를 통해 주님께 항상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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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여제자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이 이야기는 열두 사도뿐만 아니라 ‘여자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녔음을 전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함께 다녔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의 일을 기록해 놓은 이야기를 보면, 여자들의 명단이 다시 나옵니다.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마태 27,55-56)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루카 23,49)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여자들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을 따랐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입니다. (여기서 ‘끝까지’는 그들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입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남자 사도들 경우에는 예수님 수난 때에 달아나기도 했지만, 여자들 경우에는 흔들림 없이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이며 첫 증인이라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믿음’은 신앙생활의 출발점이고, 신앙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이유이고, 신앙생활을 완성시키는 힘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예수님을 잘 따라도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한참 동안 예수님과 함께 걸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아직 부활신앙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과 함께 걸은 것은 ‘예수님을 따른 일’도 아니고,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우연히 낯선 나그네와 동행한 일, 즉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고 두 제자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난 일을 증언했는데, 겉으로만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일은 예수님 없이 그들만 움직인 일로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간 일, 즉 예수님을 따라간 일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니었지만,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믿음을 증언하러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자들 이야기를 보면, 여자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시중을 들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고, 믿었으니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시중든 일은,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을 뿐이고, ‘따름’을 실천하는 방식이었을 뿐입니다. (‘시중’보다 ‘믿음’과 ‘따름’이 더 중요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혹시라도 “여자라서 시중을 들었고 남자들은 시중을 받았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라서 시중을 든 것이 아니라, 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입니다. 또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시중을 든 것으로 ‘보은’을 했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단순한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은 ‘보은’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여자들의 시중은 자기들 나름대로 응답한 방식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 말씀과 여자들이 시중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시중드는 여자들이 있었으니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는 아니었던 것이 아닌가?” 여자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해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호의호식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시는 예수님의 삶에 여자들도 동참했다.”라고, 즉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여자들도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을 들었다.”라는 표현만 보고서 부유한 여자들이 예수님의 의식주를 모두 해결해 드린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예수님과 사도들의 생활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실제 상황을 잘 모르지만, 복음서의 전체 내용을 생각하면, 예수님과 사도들이 여자들 덕분에 풍족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난한 생활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루카 9,23)
복음서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여자들은 사도들보다 더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고, 모든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신앙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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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전도 여행을 다니셨다는 기록은 복음서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유독 오늘 복음은 그 일행 가운데 여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더 집중합니다. 이 여인들은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는데, ‘시중들다’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식탁에서의 봉사’를 뜻합니다(루카 10,40; 17,8 참조). 이 여인들은 주님과 사도들과 동행하며, 개인 재산을 털어 음식을 대접하고 생계를 도왔던 재정적 후원자요 복음 선포의 숨은 공신들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상에서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에 자주 관심을 보이는데(12,15.16-21.33-34; 16,9-12; 19,8), 이 여인들은 가장 훌륭한 예표입니다. 시중을 들면 보수를 받는 것이 이치인데, 오히려 이들이 개인 재산을 들여 주님 일행을 시중든 것은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구원을 몸소 체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자기 재물을 아낌없이 이웃과 나누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오롯이 깨닫고 감사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최근 들어 자신이 자선과 봉헌에 무심하였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해 주셨는지 알아듣고 감사를 드리는 데 무뎌졌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자선과 봉헌으로 주님을 동행하였던 이 여인들은 뒷날 주님의 죽음을 곁에서 지켰고, 빈 무덤의 첫 증인이 되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현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 때문에’(제1독서 참조) 그분 곁에 머무르며 작은 봉헌과 자선을 정성껏 이어 간다면,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기쁨이 충만한 일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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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인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라삐를 따라다닐 수 있는, 그래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될 수 있는 자리에 ‘여인들’의 몫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 차별은 사회 문제였고, 오늘날 성차별에 대한 의식의 정도는 그 사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자주 표현합니다. 그러한 관심은 실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도 루카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 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순교자들을 존경하며 따르고자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약자들이 많고, 자신이 왜 약자인지조차 모르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 점점 더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지, 또 갈수록 양질의 일자리보다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있는지 ……. 제 자식이 비정규직이면 정규직이 되는 것에 그리 애가 타고 부유한 이들의 부정과 편법 상속에 분노하면서도, 대개는 이러한 사회 현상의 근본 원인과 개선을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버리는 문화’로 표현되는 사회 경제 논리만으로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기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모든 사람은 회개와 참회를 통하여 더 정의롭고 연대하는 세상의 증인이자 예언자가” 되어야 하며, “복음은 이상향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돈과 권력』 추천사 참조)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우리는 사회의식을 제거하는 경우가 많지요. 세상일과 신앙의 가치를 분리한 채, 마치 복음 읽기와 묵상을 먼 나라 이웃 나라 기행문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신앙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여인과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회의 문제아셨습니다. 차별받고 학대받는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하며 욕먹을 각오로 세상을 살아 내는 것, 그것이 복음 묵상의 열매입니다.
제발 부탁하건대, 누군가 피 흘려 이룬 신앙을 제 한 몸 평온하려는 도구로 타락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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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현욱 베네딕토 신부님]
저희 삼계성당 관할 구역 안에는 ‘동남병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병원은 정신지체 장애우들을 위한 병원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이 병원에 있는 신자들에게 봉성체를 해 주기 위해서 찾아갑니다. 갈 때마다 매번 똑같지는 않지만 10여명의 신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 저를 기다립니다. 물론 직원들을 위한 봉성체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있는 환자들을 위한 봉성체입니다.
제가 처음 그곳을 찾아간 것은 작년 11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강당에는 40여 명의 환자가 모여서 매주 수요일에 그곳을 방문하는 봉사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 그곳을 방문하면서 많은 것에 놀랐습니다.
그곳에 있는 환자들을 마치 친형제 자매처럼 대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너무나도 기쁘게 전하고 있는 봉사자 자매들에게 놀랐고, 또 많은 환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서를 필사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특히 그중에 한 청년 환자는 아직 한글을 깨치지 못했는데도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한자 한자 성서를 적어나가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비록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서 하느님 나라가 계속해서 커져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자 자매들을 통해서 열심히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었기에 오는 10월에 10여 명의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봉사자들을 통해서 1년 넘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왔고, 또 비록 병원 안에서지만,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열심히 실천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봉사자 자매들이었습니다. 그 자매들의 사랑과 노력으로 병원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전해졌고 또 점점 커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활동에 큰 힘이 되었던 여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 이들은 자신의 재산을 바쳐가며 예수님의 일행을 도왔던 여인들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 시대에는 철저한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에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무시당하고 사회적 활동은 물론 인간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그 여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여인들 역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아주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성서에서 보았던 여인들처럼, 또 동남병원에서 봉사하는 자매들처럼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확장시켜 나가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복지단체를 찾아가 봉사하는 사람들, 이웃의 독거노인들이나 소년 소녀 가장을 돌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사람들, 모두가 피하려고 하는 궂은일을 마치 자기일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여러분들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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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여정에서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일행을 돌보는 여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인 약자이자 소외 계층이었던 당시 여성의 지위를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여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을 들었다고 전합니다.
여인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와 용서를 체험한 이들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화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지닌 영적 감각과 헌신은 세상의 재화가 결코 행복의 조건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앙인이 빠질 수 있는 유혹들을 실감 나게 나열합니다. 영적 교만은 논쟁과 설전, 시기와 분쟁, 중상과 못된 의심을 일으키고, 알력 다툼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까지 삼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인생의 성공을 재화와 돈으로 환산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닥칠 수 있는 파멸과 멸망의 유혹의 경고는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이고, 돈 때문에 믿음을 잃고 방황하며 아픔을 겪는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시대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듯싶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욕망이 삶을 충동하는 에너지로 잘 활용되려면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성공이 적자생존과 승자 독식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에서 ‘더불어 행복한 세상’은 없습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는 길이야말로 함께 행복해지는 예수님의 길임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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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의 로마 황제였습니다. 옥타비우스로도 잘 알려진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의 뜻인 ‘존엄자’라는 칭호를 쓰면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장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76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에 아우구스테움을 짓습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유골을 영원히 안장하기 위해 지은 영광스러운 능입니다. 자기를 비롯하여 후손들까지 세상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의 능이 폐허가 되고 도굴까지 당할 것을 또 그 능이 포도밭이 되고, 르네상스 정원, 투우장, 화약 창고, 콘서트홀로 계속 바뀌게 될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소위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영광이 과연 영원할까요? 끊임없는 격동과 변화의 물결 속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그 자리에 계실 뿐입니다. 과거 유다인들은 율법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부녀자들과 함께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부녀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교 활동에서 식생활과 기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일들을 시중 들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필수 요원으로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고 복음을 전해 줍니다.
당시의 유다 공동체는 부녀자들을 포함하지 않았고, 율법을 익히는데 부적당한 사람으로 여겨 공동체 모임에 참석할 의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는 부녀자들이 그 창설자 중의 중요한 요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 난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는 율법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이며 사랑 중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율법 중심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또 예수님과 함께했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녀자들과 다른 제자들을 통해 율법 중심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중심, 그리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고 직접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던 사랑 중심의 삶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고 있나요? 영원하지 않은 것에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두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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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영억_라파엘_신부님
<은혜를 돌판에 새겨>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그에 걸맞은 응답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해야 합니다. 감사를 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제자들과 막달라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님과의 만남이 더 깊어졌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카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카24,10).
여인들은 주님을 만남으로서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겼습니다.” 재산은 이웃과 나눌 때 비로소 가치를 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1티모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자 되었다 해도, 그 가산이 늘었다 해도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죽을 때면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으며, 영화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시편49).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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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쁜 소식>
루카 8,1-3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기쁜 소식>
기쁨이신
분을 만나
기쁜 소식을
듣고
기쁨이 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전하신
기쁨이신
분에게
기쁨이
되어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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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8,3)
<예루살렘 부인들!>
오늘 복음(루카8,1-3)을 보면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열두 제자와 함께 여자 제자들도 많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여자들,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마리아 등, 예수님으로부터 큰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던 여인들, 예수님을 만나 부활체험을 한 여자들이었고, 그들이 바로 '예루살렘 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열두 제자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 우리 시대나 할 것 없이 여자들이 하느님 구원 사업에 큰 몫(희생과 봉사)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자매님들이 없는 교회의 모습은 이제 상상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신앙공동체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많은 자매님들에게 큰 격려와 박수를 보내드립시다!
오늘은 로마 박해 시대 때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던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그를 열심히 도왔던 '성 치프리아노 주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독서(1코린15,12-20)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3)
죽음을 이기시고 되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믿는 이들에게 전해지는 '케리그마(kerygma)', 곧 '믿음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우리도 이 케리그마를 굳게 믿으면서, 여자 제자들처럼 끝까지 충실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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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jiPkgVc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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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 3)
최고의 정성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이시다.
참다운 삶은
예수님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정성어린 우리들
삶이다.
어떻게 참여하고
어떻게
봉사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을 위한
지원과 동참이
참으로 필요하다.
와서 보시오!
말씀하신
예수님이시다.
진리를 바라보는
눈이 어두워지면
올바른 실천은
멀어진다.
신앙의 눈이
없는 사람은
진리의 빛을
결코
볼 수 없다.
마음과 시간을
내는만큼
더 깊어지는
것이 우리들
신앙이다.
정성을 들여
시중을 들었던
초대교회의
봉사자들같이
진정한 봉사는
정성스럽게
실천하는 것이다.
정성어린 마음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다.
하느님의
정성어린 사랑이
우리들 삶에
들어오는
살아있는
오늘이다.
우리들 삶도
정성이
빠져버리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멀어진다.
정성이
진정성 있는
우리들 삶이다.
현재의 삶에
깨어있는 것이
정성어린 우리들
삶이다.
최고의 사랑
최고의 정성으로
가을 꽃들이
피어난다.
두말할 나위 없이
믿음은 정성이다.
우리의 오늘도
가장 좋은
정성의 오늘이길
기도드린다.
최고의 정성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오늘을 살 수 있는
우리들임을 기억한다.
정성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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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 3)
하느님보다
커져버린
우리의 삶이다.
하느님 중심이
되는 삶이 바로
시중드는 삶이다.
시간을 바치는
시중이다.
모순된 삶을
바로잡아 주는
봉사이다.
되살아나는
기쁨이며
되살아나는
믿음이다.
시중드는
봉사가 사람을
아름답게한다.
결국 나를
살리는
봉사이다.
기도의 삶은
시중드는
봉사의 삶으로
드러난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계산하지 않는
진실된 나눔이
참으로 그립다.
요란한 소리의
봉사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진실된 봉사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은 봉사의
시간이다,
마음을 바치고
시간을 드리는
봉사로 성장한다.
교회의 역사는
봉사의 역사였다.
봉사를 통해
성장하고
기도를 통해
우리는
봉사한다.
시중드는
이들을 통해
교회는 빛난다.
분주한 봉사보다
하느님께 집중되는
봉사로 우리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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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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