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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봄을 구하다>
- 제 1화 -
1. 이봄을 만나다
S.#1
'후두둑'거리던 비가 일순 멈추더니 이젠 '쏴아아'하고 소나기처럼 요란하게 내리는 탓에
창문 바깥으로 긴 물줄기들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게 되고, 버스 안 뒷문 가까이에 다소곳이 앉아서
창 밖만을 내다보던 한 소녀의 눈은 그제서야 그만 거두게 된다지요.
"이번 정류장은 희망고교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안내 멘트를 듣자마자 교복 주머니에서 초록색 명찰을 꺼내어 왼쪽 가슴에 달고
옆에 비스듬히 세워둔 연두빛 우산을 꼭 쥐는 저 여자 아이의 이름은 바로 이봄을이에요.
지금 계절이 봄인만큼 아이의 이름이 유난히도 참 예쁘게 들려지는 것 같네요. 이봄을...
빨간 신호를 받고 잠시 멈춰 서 있는 17번 버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하기만 한 그 버스 안에는 곧 이어 '삐-'하는 버저 소리가 울려진답니다.
하지만 벨을 누른 사람은 봄을이가 아닌 다른 아이였지요.
저기 맨 뒷자리에 까딱거리며 앉아있는 아이말이에요. 하지만 우습게도 저 자세와는 달리
교복이 무척이나 단정하고, 어깨가 넓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 아이네요.
비가와서 그런지 유난히 큰 소리를 내는 버저에 빨갛게 불이 들어온걸 확인한 그 아이는
아까 버스를 타자마자 옆으로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검정색 가방을 대충 오른 어깨에 짊어져요.
그리고는 성큼성큼걸어서, 정확히 네 발자국만에 이봄을 옆자리에 다다라서 내릴 준비를 하지요.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을 빤히쳐다보다가 곧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는 봄을이.
옆에 선 남자아이는 그런 봄을이의 옆 모습을 빤히 주시하다가, 갑작스럽게 대뜸 이렇게 말해요.
"그 우산 이리 내"
봄을이는 그게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줄 모르고 있다가 다시 한번 남자아이가 같은 말을 내뱉으면,
이번엔 자신이 잘못 들은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응?" 하고 놀래 물어요.
"그 우산 나좀 쓰자고"
키가 무척이나 큰, 이 아이는, 봄을이가 꼭 쥐고 있는 연두색 우산을 향해 손까지 내밀며 말하지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입술을 꾹 깨문 이봄을은 남자 아이 손을 가만히 내려만 보다가, 일순
장난같지 않은 이 상황이 우스운 것이었던지 피식하고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를 내요.
때 마침 멈춰있던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결국 그 앙증맞은 입으로 험한 말을 해버리지요.
"그냥 맞고가, 씨발놈아."
S. #2
오늘도 나의 꿈자리는 좋지 않았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엄마가 집에 들어오시지 않은 날이면(그런 날에만) 그 기분나쁜 꿈을 꾼다.
비록 깨어나면 이미 다 잊어버리고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한 가지 확실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분명 같은 꿈을 계속 반복해서 꾸고 있다'는 것이다. 꾸고 나면 기분이 묘한 그런 꿈...
그래서 싫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기억날 것 같으면서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열여덟살 이봄을, 나는, 외동딸이다. 이 사실 또한 싫다.
이름이 이봄을이란 것과 나이가 열여덟살이란 것과 외동 딸이란 사실 모두가 싫다.
하필이면 왜 나 하나만 낳아서 그 쓸데없는 '을'자 돌림을 여자인 내게까지 하는 것이며,
열여덟살은 파릇파릇한 나이로 '즐길 수 있다'던 사람들의 말은 왜 하나도 맞지 않는 것일까.
솔로라서 서럽다. 남친이 없어서 슬프고 외롭다.
나는 아마 이런 생각들을 요새 자주해서 점점 부정적으로 변해가나보다.
즉, 몇일째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 '엄마'라는 사람때문에 그 꿈을 꾸게되어 예민해져만 가는가보다.
"스플, 너 왜 이래? 비 맞고 왔어?"
"짜증나니까 묻지마"
아참, 내 별명은 스플이다.
원래는 영어로 봄을 뜻하는 스프링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줄여진 말인데,
가끔 잘못 들으면 욕 같이 들릴 때도 있다. 그 뭐냐...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욕 말이다.
"방금 나비한테서 빅뉴스 문자 왔는데, 아무래도 나 혼자가야겠네?"
"무슨 소식"
"남자 소식"
"엇! 남자! 야, 가지말고 기다려. 기다리라고 이 가시내야!"
S.#3
봄을이 손을 잡고 층계를 두칸씩 뛰어올라가는 여자아이는 노오란이래요, 노오란.
그리고 지금 막 둘이 향하는 곳은 나비라는 이쁜 외자 이름을 가진 아이의 반이라지요.
우연 같지 않은 세 이름. 그리고 다같이 친한 이쁜이들. 이봄을 노오란 나비.
전교에서 저 세명은 '미녀 삼총사' 혹은 '마녀 삼총사'라고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
'미녀'인 이유는 보나마나 예뻐서 붙여진것이겠고, '마녀'인 이유는 남자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유혹하는 실력이 수준급이라 붙여진 이름이래요. 어쨌거나 둘 다 그다지 나쁜 뜻은 아니죠.
하지만 워낙에 전교를 휘두르고 다니는 '날라리' 학생, 쉽게 말하면 '싸가지 없는' 애들이어서
평범한 학생들이 쉽게 다가가기란 어려운가봐요.
"야, 버터! 그 애 어딨어."
오란이의 우렁찬 목소리에, 거울 앞에서 머리에 실핀을 꼽고 있던 한 여자아이가
"씨발아 내가 왜 버턴데!"
바로 저 아이가 나비에요. 생긴 것 처럼 욕을 무척이나 감칠맛나게 잘하기로 소문난 마녀 1호.
짧은 머리가 너무 잘 어울리는 아이라죠. 방금 꽂은 실핀 옆으로 노란 나비 모양 핀도 꽂혀있네요.
자신의 이름이 나비인것처럼.
"버터플라이 모르냐? 버터바른 파리새끼? 그거 너잖아 이년아"
"또라이. 너 영어 점수 몇점이냐? 나보다 낮지? 20점은 넘어?"
괴팍하고 터프하기로 소문난 마녀 2호 노오란 양. 저 둘이 잠시 티격태격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이미 봄을이는 새로 전학왔다는 그 아이를 발견했대요. 뭐 솔직히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요.
저기 1분단 구석쪽 여자아이들에 의해 빙 둘러 싸여진 한 남자아이를 발견했거든요.
그런데 봄을이 표정이 영 좋아보이질 않네요.
안그래도 저 넓고 질척한 운동장을 우산 하나 없이 비 맞으며 달려온터라,
머리며 교복이며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는데 저렇게 누구 죽일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마치 공포영화 귀신을 보는 듯 하기까지 한걸요. 아침에 보인 그 순수한 눈은 어디로 가고...
"똥 얼려서 만든 쌍쌍바를 콧구멍에 쑤셔놓고 싶을 정도로 치사하고 더러운 새끼야, 죽고싶어?"
엽기적이고 엉뚱하기로 소문난 마지막 맴버 마녀 3호 이봄을. 참 길고 근사한 말을 내뱉습니다.
"우와~"
"입닫어, 똥냄새 나."
"너 말빨 장난 아니다."
"지랄말고 내 우산이나 내 놓으시죠, 도둑님."
"어? 그거 교무실에 두고 왔는데"
S.#4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그냥 맞고 가, 씨발놈아. 라고 했지."
"병신아 그럴게 아니라, 같이 쓰고 가자. 하면서 너의 그 특이한 눈웃음을 보였어야지!"
호랑이 같이- 아니, 맷돼지 같이-무서운 담임 선생님 때문에 조회시간이 늦을까봐 종이 치자마자,
오란이 손을 잡고 미친듯이 뛰어 내려왔지만 (조회시간에 늦으면 각목으로 엉덩이 20대),
다음 시간에 다시 그 놈 찾아가서 '너가 그 우산 가서 찾아와' 라고 당당하게 말할거다.
오란이랑 나비는 이미 그 애한테 푹 빠졌지만(잘생겼다고 난리다) 흥, 난 저런 남자 거저 준다해도 싫어.
@ 1교시 수업후
"미친거 아니야?"
놀랬다. 방금 전 나비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전해듣고 말이다.
"진짜라니까? 울 영자씨가 걜 교탁 옆에 세우고 애들한테 소개해주는데 그 도중에 그랬다구"
"정말로 또라인가보네. 혹시 이거 아냐?"
검지 손가락으로 머리 옆을 휘휘 동그랗게 저으면, 도리어 나비는 "멋있던데?" 라고 되받아친다.
으, 이제보니 너네 둘이 끔찍이도 닮았구나. 멋있었다니...
전학온 그 애가, 내 우산을 뺏어간 그 놈이, 조회 시간에 벌인 황당무계한 그 짓은 바로 이러했다.
나비 담임 선생님 - 우리는 영자씨라 부른다. 이름이 그러해서가 아니고 옆집 아줌마 같이 생겨서 -
께서 반 아이들한테 남자 애를 소개 시켜 주는데, 갑자기 핸드폰 벨이 울렸다더라.
핸드폰이라면 기겁을 하는 학생부주임 영자씨가 "누구 핸드폰이야, 당장 가지고 나와!" 라고 했더니,
범인 바로 그 또라이 새끼였고...
그 놈은 아무렇지 않게 그걸 주머니에서 꺼내 들더니 "여보세요" 하고 받아 들더랬다.
선생님뿐만아니라 반 아이들 모두 기겁하여 쳐다만 보고 있으니, "씨발 뭘 봐" 라는 말까지 했으며,
몇 초도 통화하지 않고 "씨발 기다려" 라는 말과 함께 그냥 그대로 앞 문을 통해 사라졌다 한다.
학생부를 맡는 동안에도 저렇게 뻔뻔한 놈은 처음봤고 (더군다나 전학생이었으니) 그런 일은
처음 당해 본 선생님이셨기에-, 붙잡지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 가만히 서 계시다가,
수업종이 치는 바람에 어쩔수없이 교실을 나가셨는데 그 뒷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고 한다.
영자씨 아무래도 고생많겠어. 나비 저년 하나 감당하기도 힘들어 했는데. 쯧쯧.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어이없으니까 그렇지. 울 영자 고생많겠다? 너같은 놈 하나 더 들어와서..."
"스플. 너가 지금, 마침 비도 오는데 먼지나게 맞고 싶구나? 우리 옥상이나 갈까?"
"음 노노, 사양할게. 그나저나 아무래도 내가 직접 교무실가서 우산 가지고 와야겠다."
"어. 걔 언제 돌아올지 몰라. 영화 마지막 장면의 주인공 남자처럼 멋있게 바람같이 사라졌다고."
"지랄. 걘 영화 엑스트라도 못해 먹을 관상이야."
"꺼져 이년아. 가기전에 머리나 제대로 다시 묶고. 진짜 추해."
S.#5
교무실 앞에 멈춰서서, 하고 있는 작은 귀고리를 빼고 머리를 고쳐 묶고 명찰을 다시 달고 있는
봄을이가 보여요. 짜증나는 기색이 역력하네요.
그리고 문을 열면, 그 문 반대편에서 동시에 열고 있던 남자아이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죠.
순간 봄을이의 두 눈이 커졌다가 얼른 복도 바닥으로 깔리고,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그 남자아이는
안절부절 못하는 봄을이를 잠시 내려다 보더니, 단 한마디의 인사도 없이 그냥 그대로 스쳐가버려요.
아이가 지나가면 그제서야 봄을이의 고개가 다시 들렸는데, 시선은 남자아이의 뒷 모습에 고정되어
코너를 돌아 없어질 때 까지 떼질 못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서있어요.
'씨...'
대체 무슨 영문이길래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건지... 아까보다 더 짜증을 내며 교무실을 들어갑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연두색 우산을 들고는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와 교실로 사라지죠.
그러면 이번엔 아까와는 다른 한 남자아이가 봄을이의 뒷 모습을 주시하구요.
'이봄을 안녕...'
남자아이도 저네 반으로 걸음을 돌리면, 드디어 2교시 시작종이 울리면서 1교시 쉬는 시간은 끝나요.
오늘따라 모두에게 길게만 느껴졌던 1교시 쉬는시간.
아직도 창밖으로는 비가 억쑤같이 쏟아지고 있네요. '후두둑'이 아닌 '쏴아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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