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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12 - 바르샤바에서 문화과학궁전의 전망대에 올라 폴란드 역사를 생각하다!
2022년 5월 10일 바르샤바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에 도착해 바르비칸
과 크라쿠프 중앙시장광장에다가.... 프란체스카 성당과 바벨 성 wawel castle 을 구경
하고 15시 08분에 기차를 타고 17시 40분에 바르샤바 중앙역 Warszawa Centralna 애 도착합니다.
신시가지인 기차역 앞에 주요 건축물은 하늘 높이 치솟은 러시아식 문화과학궁전 Pałac Kultury i
Nauki(PKiN.) 이고 옆에는 의류 매장과 카페들이 들어선 대형쇼핑몰 Złote Tarasy 가 있습니다.
문화과학궁전 Pałac Kultury i Nauki(PKiN.) 은 바르샤바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건축물은 잊고 싶은 44년
동안의 공산국가 시절 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니 바르샤바 시민들에게는 오만가지 감정을 품게 하는데
1952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 인민의 선물' 로 지은 높이 237m 의 건물로 3,300개의 방이 있습니다.
1953년 모스크바 대학교를 지었던 소련 건축가 레프 루드네프가 모스크바 '일곱 자매' 들을 본따
스탈린 양식으로 지었는데..... 영화관, 극장, 자연사박물관, 서점, 스케이트장,
농구장, 수영장, 헬스장, 30층 전망대 와 방송수신탑에 코엑스처럼 전시행사나 콘서트가 열립니다.
20즈위티 입장료를 내고 엘리베이터로 해서 30층 전망대 로 올라가서는 바르샤바 시가지
를 내려다 보는데..... 옛날에 이집트와 요르단을 일주하고 암만에서 육로로
예루살렘에 다녀와 두바이로 가서 세계최고 높이 부르즈 칼리파 빌딩 전망대가 떠오릅니다.
100 디르함(4만원) 입장료를 내고 삼성건설이 지은 부르즈 칼리파 에 들어가니, 810미터 160층
인데 전망대는 최상층부에 있는게 아니라 중상층부인 124층 에 있는게 의아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 높으면 지상이 멀어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인가 본데 오늘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폴란드인들이 엄청 비싼 돈을 들여 건축한 소련의 선물인 여기 문화과학궁전
이 별로 달갑지 않은 이유는 한국과 일본 처럼 끈질긴 악연 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기사 동서고금 인류 5천년 역사에서 "이웃 나라는 99% 철천지 원수지간" 이지요?
폴란드는 이민족이자 이교도인 이웃 리투아니아 와 원수 처럼 싸우다가.... 생각을 180도 바꾸어
적국과 혼인동맹 을 맺으니, 리투아니아와 한 나라 가 된 후에는 폴란드는 동쪽으로 진출해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를 지배 했으니 율부린너가 출연한 영화 위대한 카자크에 잘 나옵니다!
리투아니아는 노르만(바이킹) 발트신화 신앙을 믿던 비기독교 왕국 이었는데 가톨릭 국가 폴란드의
후계자인 공주 야기에우워(요가일라) 는 1386년 2월 리투아니아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와 결혼
했고, 이교도인 리투아니아인이 폴란드왕 에 올랐으니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상상 조차 힙듭니다?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까지 지배해 400년간 번영 을 구가하던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 이 쇠퇴하니
러시아 페트르대제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크게 성장해 강대국이 된 후에 1773년 동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나누어서 차지 했으며..... 남은 영토도 1793년 2차 분할과
1795년 3차 분할로 폴란드 라는 나라 이름이 지도에서 없어졌는데 쇼팽이 프랑스로 망명한 무렵입니다.
이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동진하니 프랑스 혁명 정부와 협력했던 폴란드 군단의
공로로 폴란드 분할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병합한 영토를 토해내게
하고 그 자리에 바르샤바 공국 을 세운 기간 동안은 잠시 괴뢰국으로나마 독립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회의의 결과 바르샤바 공국은 또 다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에게 분할 되어 지도에서 사라졌으며..... 그후 폴란드인들은 11월 봉기, 1월 봉기,
크라쿠프 봉기, 포즈난 봉기등 수많은 봉기를 일으키며 삼국의 폴란드 지배에 저항했으나 실패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시 독일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압승을 거두면서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던 폴란드 동부
영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니 1916년 괴뢰국인 폴란드 섭정왕국 이 수립되었지만.... 전쟁이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면서 괴뢰국은 와해되자 폴란드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니 폴란드 제2공화국 입니다.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피우수트스키 는 폴란드 임시정부와 임시의회에게서 폴란드군의 지휘권을 넘겨
받은 뒤 최고지도자에 취임했으며 옝제이 모라체프스키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내각 및 헌법을 창설
했으며.... 독립운동가인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Gabriel Józef Narutowicz) 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웃 다섯나라와 국경분쟁 을 벌였는데, 동부 갈리치아는 수적으로 우크라이나
계가 과반을 차지했으니 1918년 11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이 건국되자
현지 폴란드계는 지배를 거부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폴란드와 서우크라이나는 전쟁 이 발발합니다.
1919년 7월까지 벌어진 전쟁은 폴란드의 승리로 끝났으며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과 공식적으로 통합 되었으니....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1920년 4월 폴란드와 공식적으로 동맹을 체결해서는, 대소전쟁 에서 폴란드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폴란드의 동부 갈리치아 영유권을 인정했는데 결국 폴란드에 통합된 것입니다.
협상국 최고위원회는 3차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의 국경선을 폴란드의
동쪽 국경선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지만.... 폴란드는 동부 갈리치아 일대를 원했고
이데올로기 대립 까지 맞물리면서 폴란드와 볼셰비키 간에는 잦은 무력 분쟁 이 발생했습니다.
볼셰비키는 서유럽으로의 사회주의 혁명 수출 을 기도하였기에 폴란드는 공포에 떨수 밖에 없었으니
소련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위협했으니... 벨라루스는
1919년 1월 5일 수도 민스크가 함락되어 망하니 폴란드는 볼셰비키와 일전 을 벌이기로 마음먹습니다.
결국에는 1919년 2월 14일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 이 발발했으니 폴란드는 초기 북부 전선에서
빌뉴스와 민스크를 점령 했으며....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해, 2월 5일 수도
키이우를 함락시키자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동맹 을 맺은후 연합군은 5월 키예프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명장 미하일 투하쳅스키 와 세묜 부됸니가 이끄는 볼셰비키의 대대적 반격에 밀려 키예프, 민스크
빌뉴스 등을 모두 내주고 수도 바르샤바 근처까지 밀렸으니..... 절대절명의 순간에 폴란드는
바르샤바에서 극적인 대승 을 거두어 (바르샤바 전투, 일명 비스와강의 기적) 전세를 다시 역전시킵니다.
폴란드군은 동부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벨라루스의 절반을 재점령 하기에 이르렀으니 군사적
으로 완전히 밀린데다가 경제도 거덜난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폴란드와 강화 를 맺고자
하니.... 1920년 10월 정전에 합의하는데, 1921년 3월 리가 조약을 통하여 폴란드는 동부
갈리치아를 지켜낼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250km 가량을 이동한 국경선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볼셰비키도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방지하는 등 전쟁에서 얻은 것은 있었으니, 이 때 폴란드가
얻은 영토는 2차대전 이후 동부 갈리치아와 함께 다시 소련에게 빼앗겼으며 한편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은 남부 전선에서 다시 공세를 펼쳐 나라를 되찾으려고 했지만 격퇴당합니다.
폴란드는 독일과도 영토 분쟁 을 벌였으니 폴란드계가 다수인 실롱스크(슐레지엔) 와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이 폴란드 측에 편입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면에 독일은 역사적
경계와 그 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이유로 이 지역이 독일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 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폴란드 회랑은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였고 남부 폴란드
회랑은 폴란드계가 다수였기에 별 탈 없이 폴란드에 넘어갔으나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 북부 (서프로이센)
는 상부 실롱스크와는 정반대로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였음에도..... 당시 주민 대부분이 독일인 이었습니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에서 폴란드에게 바다로의 출구를 약속한다는 조항에 따라 폴란드 회랑은
폴란드 영토 로, 단치히는 독일에서 분리되어 국제연맹 감독 하의 단치히 자유시 가
되었으니 주민 투표가 시행되어 슐레지엔은 투표 결과 68%는 독일에 잔류,
32%는 폴란드에 귀속 되었으며..... 동프로이센 남부는 전역이 독일 잔류가 확정되었습니다.
슐레지엔 에서는 폴란드 편입을 목적으로 한 폴란드인들의 봉기가 3번에 걸쳐 일어났으니 봉기는 독일계
가 폴란드계를 잔인하게 학살하거나 탄압한 것이 발단이었으며, 특히 1차 봉기 진압 직후
보복조치로 2,500여 명의 폴란드계가 학살 당했고 2차 봉기 이후에는 주민투표를 통해
귀속을 결정하기로 하였고, 3차 봉기 이후에는 상부 실롱스크를 분할해 각각 독일과 폴란드 영토가 됩니다.
리투아니아 는 1918년 2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독일 제국이 패전하니 볼셰비키와의 분쟁 에 휩싸였고
그 와중인 1919년 6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분할선을 그었지만, 폴란드가
무시하고 진격해 리투아니아 전체를 편입 하려고 하자 결국 리투아니아는 볼셰비키와 손을 잡습니다.
1920년 중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에서 폴란드가 밀리자 수바우키 지역을 수복했지만 폴란드와 전쟁을
벌여 대패, 10월에는 수도였던 빌뉴스를 점령당하고 말았으니 당시 빌뉴스는 주민 구성에서
폴란드계가 50%, 유대계가 44% 가량을 차지했는데..... 이에 대해서 '폴란드인들이
대다수니 폴란드 땅' 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며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든후 병합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의 테셴지방 과 야보리나, 토르스테냐등 슬로바키아 국경지대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테셴은 폴란드, 독일,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사이 여러번 주인이 바뀌다가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의 일부
가 되었지만.... 4개 구 중 서부의 프리데크를 제외한 나머지는 역사적으로 폴란드계가 다수인 지역이었습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소멸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테셴 전 영역을 병합 하기
위해 1919년 1월 23일 폴란드를 침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승리 로 끝났고,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대소전쟁을 치루던 폴란드의 물자반입을 거부 하면서 폴란드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결국 1920년 7월의 스파 협정에 따라 전쟁은 테셴을 올자(Olza) 강을 경계선으로 재분할 했는데 이때의 원한
으로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으며 폴란드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이웃 나라는 독립전쟁 기간
동안 지원을 받은 라트비아, 반소 감정이 강했던 루마니아 왕국 에 성향이 반공 반소인 헝가리 왕국 입니다.
폴란드는 1939년에 독일과 소련에 거의 동시에 침공을 받아 분할 점령 되었으니 독일 점령
지역에는 총독부가 들어섰으며, 소련 점령 지역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 분할
합병되었으니...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양측에 저항 했고, 이로 인해 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소련은 폴란드 민족을 말살 하기 위해 지식인들과 장교들을 학살 하였고, 독일도 폴란드를 무자비하게
탄압 하였으며 뒤이어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수도인
바르샤바는 1944년 8월 봉기때 독일군이 도시를 다 쓸어버려 아무것도 안 남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전쟁 동안 폴란드 정부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가 독일의 프랑스 침공 때는 프랑스 서부의 앙제 시, 그 다음
에는 런던으로 옮겨가서 망명정부 를 구성하고 소련에 억류된 폴란드인과 망명 폴란드인들을 모아서
자유 폴란드군 을 조직해서는 연합군과 함께 이탈리아, 노르망디, 네덜란드 등지에서 참혹하게 싸웠습니다.
연합군 내에서 나라도 없는 폴란드군 이 네다섯번째로 큰 군대 였는데 하지만 망명정부는 소련군
이, 독일군이 주둔한 바르샤바를 점령하기 전에 자력으로 탈환코자 1944년 8월 무리한 봉기를
시도하여 대패 했고, 폴란드 국내군도 큰 피해를 입고 뒤따라온 소련군에게 박해 받아야 했습니다.
전쟁 이야기를 하다보니 문득 역사학자인 임용한 씨가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 에 올린...... “첩보전과 국가의 운명”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손자병법 13편 용간(用間) 은 스파이 운용법, 나아가 첩보전 의 방법을 다룬 글이다. 병서에 스파이
활용법이 좀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전쟁사를 보아도 스파이를 운용하지 않고 명장이
되는 경우는 없다. 스파이를 운용한 기록이 잘 보이지 않는 명장도 있지만, 그건 스파이를
운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잘 사용해서 전혀 노출을 시키지 않은 경우일 가능성이 더 높다.
람세스 2세는 카데시 전투 에서 가짜 투항병이 넘긴 정보에 속아 패망할 뻔했다. 소국 그리스
가 페르시아 제국을 꺾은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도 그리스
스파이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 은 동시대 어떤 경쟁자들보다 첩보전의 명수였다.
첩보전의 관건은 첩보를 얻는게 아니라 정확히 분석해 진실을 찾아내는데 있다. 노르망디 상륙을 준비하면서
연합군은 상륙 예상 지점으로 역정보를 흘렸다. 이때 중대한 실수를 할뻔했는데, 노르망디라는 첩보
는 철저히 단속을 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독일 정보부에 진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연합군
측에서는...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던 독일 스파이에게 노르망디라는 첩보 를 흘렸다.
독일도 그 스파이의 정체가 노출된 것을 알고 있었고, 영국이 흘리는 역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이 사실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를 통해 상륙 지점이 노르망디라는 첩보 가 들어오자 독일 정보부는 이를
속임수로 파악하고 노르망디를 제외했다. 하지만 이것이 연합군의 진짜 노림수였다.
연합군은 독일이 스파이의 정체를 영국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 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첩보전은 첩보의 수집, 분석과 사실 판단, 기만 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이 중 어느 하나가
부실해도 첩보전에서 승리할 수 없고, 한순간에 국가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정보 조직은 철저하게 전문적이며, 정치와 무관 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사실 어느 나라
에서나 정보 조직과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그래도 해야 고, 최대한의 선을 지켜야 한다.
그러고는 바르샤바역을 뒤로 하고는 남쪽으로 20분 가량을 걸어서.... 우리 호텔인 Radisson
Blu Sobieski 로 돌아와서는 하룻밤을 자는데 내일은 바르샤바 구시가지 로 가서 왕궁과
교회에 쇼팽과 마리 퀴리 기념관을 구경할 생각입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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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갑습니다
22일간 유럽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자주 다녔건만......
이번 여행도 시행착오의 연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