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X5wSycnsUE?si=ey6J8KMSLFzYxiw1
1. 군대의 국가반란을 감시하는 보안사의 책임자가 전두환인데 그 사람이 군사반란을 주도했고 (그 반란계획 실행에 대한)보안을 철저히 하여 계엄사령관, 국방장관, 대통령(최규하)까지 모를 수 밖에 없었다.
2.제가 저녁식사에 유인돼서 왔을 때가 12월 12일 저녁 6시 30분. 이미 95%이상 반란 성공이 예약된 상태였다고 생각함.
3.어느 순간에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가? - 부대에 들어가 참모장에 보고를 들으니 수경사 주력부대인 30, 33경비단장, 헌병단장 들이 경복궁 30단에 이미 가담했고 수도권에 가장가까운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국방차관보 유학성, 정병주 장군 휘하 4개 공수단장 중에 3개가 가담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유명한 MBC 드라마 5공화국 장면 '야이 반란군~~' 할 때 이미 진압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판단한 것으로 보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4.10.26 직후 거의 한 달 넘게 준비를 한 것 같다고 추측.
5.누가 가장 원망스러운가? - 저 자신.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면 26사단과 수도 기계화 2개 사단 이었는데 이 요청이 즉각 승인조치 (주체는 육본 혹은 대통령 인듯) 되었다면 추가병력(3개 공수단)이 들어오기 전에 경복궁에 있던 4개여단을 포위 가능하지 않았을까..
6.우리 국민들이 1212와 같은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그 역사와 진상을 알고 거기에 대한 교훈을 알기를 희망합니다.
7.그러한 뜻에서, 예방적 차원에서 감히 당시 대통령(최규하)에 대한 불경인 줄 알면서 말씀을 드린다면 '장관께서 사정이 있어서 대통령께 즉각적인 상황보고를 못하고 또 제가 요청했던 그러한 진압부대를 조치 못하셨다 하더라도 국가의 궁극적인 반란 진압의 책임, 이건 헌법상 대통령의 책임입니다. 그럼 대통령께서 장관의 그러한 보고가 즉시 없더라도 반란이라고 생각되면 그 누구에게라도 '이 반란 진압해' 하시면 그 말 한마디로 끝장입니다.'
8.체포 이후 전두환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 - 정승화 계엄사령관에 대한 이야기, '(전두환)부하들이 장선배를 (1212실행전 인듯)연금하자고 했지만 내가(전두환) 혼쭐을 냈습니다. 그런데 장선배가 온통 부대에 돌아다니면서 뭐 병력을 동원한다 때려죽인다 난리를 쳐서 서울이 뒤집어 졌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경제가 어렵다는 말을 꺼내고 금 한돈 가격을 운운하길래 그 순간 아, 이 사람들이 군권장악을 넘어서 청와대를 장악하려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9.1212반란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들이 감금당하자 식사를 끊고 자식보다 먼저 죽을 수 없다고 하며 4개월동안 막걸리만 드시다가 사망.
10.서울대생 아들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 그렇다. 2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 간다는 말을 하고 나갔는데 한달 동안 소식이 없더니 왜관, 낙동강변 야산에 얼어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얼어서 일그러져 있는 아들의 얼굴을 잇김으로 침으로 녹이면서...
11.사모님 증언(고 이병호 여사) - '옳은 일을 하고도 왜 이렇게 불행하게 집이 이렇게 되어서 세상이 원망스럽고 이 세상이 폭발해서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12.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죽음에 대하여- 1212 진상을 국민들에게 공개할 때 까지 건강에 유의하자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89년 10월 가출하기 3일전에도 저와 대작을 했다. 4개월 후 송추 계곡 탄약고 철조망 안에 목을 맨체로 발견.(시신은 별로 부패하거나 상처가 없었다.) 그 사인에 대해 의문이고 더구나 그 분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는데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13.1212 이후 내가 전두환 인사들을 국가반란죄로 고발했더니 개인, 집단으로 7번 역고소도 당했고 검찰에서 조사도 받았따. 어떤이는 그들에게 내가 욕을 했다고 하극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내가 병력동원을 요청했으니 오히려 반란죄를 지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14.본인이 생각하는 참군인상은? - 국가가 요구할 때 생명을 바치는 것. 생명을 바치는 기회가 없을 때에는 자기에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해서 충실하는 것.
15.1212이후 고 장태완 사령관은 소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 후 강제 예편. 명예회복 이후 재향군인회장, 국회의원등을 지내다 2010년 78세로 사망. 부인인 이병호 여사도 2년 후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
첫댓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일들을 알 수 있었던 인터뷰였습니다. (듣고 요약한 것이니 혹 잘못된 것이 있다면 수정하겠습니다.) 수경사 직속 상관인 장태완 사령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주력부대의 부하들이 30경비단에 가담했으니 그냥 고립무원이었군요. 대세가 기운 것을 알면서도 군인으로서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셨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26사단과 수도기계화 사단 출동이 승인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극적인 가족들의 죽음에 숙연해지네요. 그야말로 안중근 의사가 남기신 글씨인 "위국헌신 군인본분" 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최근 탄핵정국 때 기무사 쿠데타 문건을 다시 안 떠올릴 수 가 없네요.
김종서도 명에서 막 돌아온 수양대군집에서 철퇴 맞을 줄은 몰랐지.. 박정희가 전두환이랑 아다리 맞아 이미 보위세력 키우고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