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지난주, 서울에 사는 딸아이가 순천에서 학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사무국장 일을 맡은 터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했다. 다섯 살배기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결국 아이를 데리고 내려왔다. 그러면서 “엄마,아빠가
좀 봐줄 수 있지?” 하는 부탁에 나와 아내는 서둘러 순천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언니도 함께 내려와 아이들이 서로 어울
려 노는 동안, 딸아이는 무사히 학회를 치를 수 있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딸아이도 대학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우지만, 맡길 곳이 없어
영어학원에 보내고 있다. 다섯 살 아이가 영어를 얼마나 배우겠는가. 사실상 어린이집 대신 ‘맡기는 곳’일 뿐이다.
그런데도 월급의 3분의 1이 학원비로 나간다고 하니, ‘울며 겨자 먹기’란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외손주 녀석이 처음엔 가기 싫어하던 학원에 이젠 제법 잘 다닌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영어 선생님
(외국인)에게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가 “No”라는 대답을 듣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집에 와서 그 이야기
를 들으며 웃음이 났다. 그 외국인 선생님의 단호한 한 마디, “No.”
문득 일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일본 사람들은 웬만해선 ‘No’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한번 생각해 보겠다”는 식으로 돌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No’와 같은 뜻이다. 단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표현일 뿐이다.
나 역시 한때 그런 ‘돌려 말하기’의 함정에 빠진 적이 있다. 대학에 있을 때, 베네수엘라 특파원으로 있던 동생이 귀국하며 선물
로 준 컴퓨터가 있었다. 전공 교수 한 분이 그걸 분해해 보겠다고 하시니, 거절을 못하고 선뜻 허락했더랬다. 결과는? 다시 조립
했지만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속으로는 아까웠지만, 아는 사이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그릇과 연장은 밖으
로 내돌리지 말라’는 옛말은 단순한 생활의 지혜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진리라는 것을.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No’라고 말하지 못했던 내 자신이 떠오른다. 그때 단호하게 “안 됩니다”라고 했다면, 관계가 조금 어색해
졌을지는 몰라도 내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예스맨’을 미덕처럼 여기곤 한다. 거절하지 않고, 상대의 부탁을 다 들어주는 사람이 좋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스스로를 잃고, 원치 않는 일에 휘말리며, 결국 불편한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진정한 용기는 ‘싫다’고 말할 수 있는 데 있다. ‘No’는 무례함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지키는 선이다.
외손주가 선생님의 “No”를 듣고 울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No”라고 말하고 나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거절은 상대를 밀어내는 말이 아니라,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나를 지키고,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며, 진심으로 ‘Yes’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