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史
크리스토교(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민족 최초의 대학
숭실의 최초‘진리와 봉사’를 이념으로
크리스토교(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실력 있는 인재의 양성
숭실대학교가 고등교육의 불모지나 진배없는 이 땅에 ‘진리와 봉사’ 를 이념으로 내걸고, 고등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2020년 10월 10일을 기하여 123이 된다.
숭실대학교는 그 긴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시대가 요구하는 고유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 하면서 ‘진리와 봉사’의 사명을 다해왔다.
민족 최초의 대학 숭실이 창설되던 당시
우리나라는 구한말 대한제국의 시대로써 봉건적인 색채와
전근대적인 사유의 틀을 말끔히 벗어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 같은 상황에 처하여 이에 숭실대학교는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봉건적인 구습으로부터 벗어나게하여
나라를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학교의 고유한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
숭실대학교가 크리스토교(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전도활동을 벌이고,
음악, 체육 및 문예활동에 참가하여 국민계도에 앞장 선 것은
그 같은 시대적 상황에 대응한 활동이었다.
1910년 일제의 강앞에 굴복하여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이후
식민지 지배 하의 숭실대학교는 국권의 회복 즉,
나라의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05인 사건을 위시하여 1910년대 국내 최대비밀결사체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고,
3.1독립운동, 광주학생 운동에 참여하여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1938년에는 그 극단적인 행동의 표현으로써
폐교라는 단장의 아픔을 스스로 결단하기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숭실대학교는 계몽활동이나 독립투쟁에서 보여준 과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 것은 크리스토교(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실력있는 인재의 양성이다.
그 같은 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 학교는 이사들과 동문들
그리고 교직원과 학생이 혼연 일체가 되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
숭실대학교가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하기까지
폐교와 같은 극단적인 사태를 포함하여 몇 개의 중대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숭실의 지조‘숭실(崇實)’에서의 ‘숭’은 ‘숭상(崇尙)한다'는 뜻이며
‘실’은 ‘진실’의 실이요, ‘성실’의 실이다.
숭실대학교의 효시는 ‘숭실학당’에서 찾아야 한다. 당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배위량(W. M. Baird, 裵緯良)박사가 1897년 10 월 10일 평양에서 뜻 있는 젊은이들을 그의 사랑방에 모아 중학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그 이름을 숭실학당이라 부른데서 비롯된 것이다. ‘숭실(崇實)’에서의 ‘숭’은 ‘숭상(崇尙)’한다는 뜻이며 ‘실’은 ‘진실’의 실이요, ‘성실’의 실이다.
진실이란 진리의 탐구를 말하며 성실이란 도덕적인 인격의 수련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숭실이란, 이론적인 진리의 탐구와 고결한 인격의 수련을 동시에 수행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이며, 숭실대학교의 교육이념인 ‘진리와 봉사’의 정신에 직결한다고 볼 수 있다.
중학과정의 숭실학당은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3년후인 1900년에는 수업연한 5년 과정의 정식 중학교로 발돋움하고, 1904년에는 첫 졸업생 세 명을 배출하게 된다. 그러나 숭실은 숭실중학 졸업생을 대상으로 대학교육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1906년 9월 15 일 대학부를 설치하며 한국최초로 대학교육을 시작하였고, 1908년에는 대한제국 학부(學部) 로부터 ‘숭실대학’을 인가받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 당시 숭실대학의 운영은 한국에 파견된 선교부 전체의 합의에 의한 연합교육 기관의 성격을 띠었으며 연합기독교대학 (Union Christian College)이라는 명칭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1912년 숭실대학은 일본 총독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았으나, 1925년 일제의 사립대학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공포 된 ‘사립학교규칙’에따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춰 재인가 받을 것을 강요당했다.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강화해 온 일본은 드디어 신사참배라는 야만적인 미신행위를 강요하는 추태를 드러내게 되었고 그에 대한 숭실대학의 태도는 매우 명쾌하고도 단호한 것이었다. 그것은 설사 학교의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신사참배 강요에는 단호히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105인 사건을 위시하여 국민회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고, 3.1독립운동, 광주학생운동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숭실의 선각자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맞서 단장의 아픔을 스스로 결단하기에 이른다.
1938년 3월 4일 숭실대학은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대학과정을 시작한 지 39년만에 폐교라는 역사적인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민족에 대한 성실성의 표현으로서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는 숭실정신의 발로였다.
숭실의 부활1954년 4월15일 설립인가를 얻어 숭실대학의 재건
민족이 염원하던 8.15 해방을 맞아
숭실의 가족들은 숭실부활의 감격을 꿈꾸었으나
남북분단으로 인해 공산치하를 피해 남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의 하늘 아래서 숭실대학 재건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6.25동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숭실대학 재건운동이 본격적으로시작된 것은
휴전으로 서울 환도가 이루어진 이후의 일이었다.
1953년 12월 서울 영락교회에서 숭실대학 재건 기성회가 조직되고
거기에서 숭실대학 재단 이사회를 결성하여 설립인가를 문교부에서 제출하였다.
드디어 1954년 4월 15일 설립인가를 얻어 숭실대학의 재건을 보게 되었으니
스스로는 폐교를 결의한지 만 16년만의 쾌거였으며
그 감격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초대 학장으로 한경직 목사가 취임하였으며
영락교회의 임시건물을 임시교사로 사용하였 다.
처음 설치된 학과는 영어영문학과,사학과, 철학과, 법학과, 경제학과 등이었으며,
뒤이어 경영학과,무역학과, 사회사업학과 등이 설치되었다.
재건 후 임시교사로 사용하던 영락교회 부속건물에서
현재의 상도동 캠퍼스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은
19 57년 6월의 일이었다.
재건 초기에는 재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어려움이 많았고
발전의 속도도 더딘편이었으나
숭실대학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서 발전의 거보를 내딛는 계기를 이룬 것은
고 김형남 장로를 이사장으로 맞이하면서 부터였다.
그의 헌신적이고도 눈부신 활동은 숭실대학을 오늘의 숭실대학교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찬사를 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재건된 숭실대학이 대전대학을 맞아들여 숭전대학교라는
종합대학으로 발전적 통합을 이룩한 사실이다.
설립 목적이 같은 숭실대학과 대전대학은
각기 개별적인 학교 운용의 방식에서 벗어나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하나의 종합대학교로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국내외의 선의의 충고를받아들여서 두 대학의 이사회는
드디어 연합 크리스토교(기독교) 고등교육재단을 구성하여
그 승인을 문교부에서 신청하였다.
1971년 1월 문교부로부터 두 대학의 통합인가를 받은 두 대학은
교명을 숭전대학교로 변경하여 하나의 대학으로서 출범을 시작하였다.
재건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숭실대학은 점차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해
1967년에는 한국기독교박물관을 개관했고
1969년에는 컴퓨터를 도입하여 국내 대학 최초로 컴퓨터교육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