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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천재’라고 하면 어느 한 분야에 특출한 사람을 말한다. 서양의 17세기는 천재들의 향연장이었다. 그중 라이프니츠는 천재의 완결판이다. 보통 라이프니츠 하면 바로 대륙의 합리론 철학자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철학자로만 정의하기엔 연구 결과물들이 너무 다양하다. 후대에 러시아의 학문군주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대제도 ‘라이프니츠는 대학 그 자체이다’ 라고 평했을 정도이다. 천재형 호모 컨버전스 라이프니츠를 소개한다.
미적분법은 발견이 아닌 발명이라고 한다. 초등 단계에 있던 수학을 고등 단계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적분이 없었다면 현재의 과학은 뉴턴을 넘어설 수 없었다. 처음 발견한 사람은 뉴턴이다. 동시대에 다른 공간에서 그들은 미적분학을 연구한 셈이다. 또한 그 둘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연구를 독려하기도 했다. 뉴턴은 편지에 써서 보낸 자신의 아이디어를 라이프니츠가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이 싸움은 ‘영국 대 대륙’으로 확대되며 수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적재산권 다툼으로 변하게 된다. 결국 현재는 두 사람의 독립적 발견으로 공인돼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뉴턴의 미적분이었던 유율법은 시간(t)에 대한 변화에 한정됐던 반면 라이프니츠는 일반 변수(x)에 대한 변화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간단한 기호로 표현하는 능력도 탁월해서 현재 고등학교 수학책에서 보는 ‘dy/dx’와 ‘∫’ 같은 미적분학 용어도 거의 라이프니츠가 만들었다. 위상분석의 기초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위상수학은 20세기에 들어오며 공간의 위치관계와 가까움을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수학 분야이다.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진법을 이론화시켜 후세에 영향을 줬다. 이진법은 현재 디지털 세계를 가능하게 한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포물선, 쌍곡선 등 곡선의 방정식을 찾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라이프니츠는 한 귀족 가문의 왕족임을 증명하는 역사를 집필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한마디로 족보 집필 임무인 것이다. 그는 왕가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가문의 발원지인 이탈리아까지를 거슬러 추적하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역사기행이었던 셈이다.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귀족가문의 자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역사를 공부하게 된다. 결국 지구의 기원까지 파고 들어갔다. 갔다. 그리하여 지구가 용해상태였다는 가설을 최초로 제시하게 된다. 라이프니츠가 현재 지질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유이다. 그는 유적과 언어학을 이용해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연구했다. 나아가 과학·윤리학·정치학의 출현과 발전과정도 조사했다. 게르만 민족의 근원에 대해서도 썼고 언어비교 연구도 했다. 그의 연구 성과물은 오늘날 인도-게르만의 언어가족에 대한 연구 입장과도 일치한다. 몇 가지 주요 개념들을 명료하게 규정했다. 당시 데카르트는 운동량 보존 법칙을 제시했지만 자신의 개념을 정확히 설명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그 결함들을 명확히 꿰뚫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운동량 개념도 명확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이 두 문제를 운동량 보존이 아닌 에너지 보존으로 한방에 해결했다. 이 개념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에너지 보존 법칙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발명가이기도 했다. 나침반이나 특별한 관찰 기구 없이 배의 위치를 개산하는 장치, 하나의 관측 지점으로부터 대상까지의 거리를 산출하는 방법, 탈것이나 발사체를 추진시키는 압축 공기 엔진, 아네로이드 기압계, 렌즈의 디자인을 개선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생각해냈다. 군주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하르츠 은광의 기술자였을 때 수력압착기·풍차로 작동하는 물 펌프·철강제련법을 고안해내는 아이디어 뱅크였다. 계산기도 발명했는데 당시에 파스칼이 발명한 계산기로 덧셈과 뺄셈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계산기는 사칙연산이 가능했다. 한다는 판단하에 라이프니츠는 장서 목록을 만들어 여러 차례 유럽의 주요 도서관에 제안했다. 또한 새로운 발견들의 중앙 집중적 등록을 위해 도서검색 체계를 고안하기도 했다. ‘사서의 정수’라고 부르는 이 틀에는 모든 새로운 학술 출판물의 요약문이 등재됐다. 이 고안물을 특허를 내려고 했지만 도서 상거래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위협이 되고 있었다.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라이프니츠는 프랑스의 관심을 돌릴 미끼로 ‘이집트 침공’을 제안했다. 그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져 외교관이 돼 프랑스를 방문하게 되지만 루이 14세에게 계획을 제안할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실패한 그의 아이디어는 200년 후에 나폴레옹에 의해 현실화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