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머리 깎고 절로 간 까닭 / 이순희
그는 글 동냥하며 근근이 살았다
언어에 굶주려 극심한 눌변에도 시달렸다
어쩌다 곳간이 찼다 싶어 열어보면
가득 들어찬 망상과 허상들.
어느 새벽 그는 길을 떠났다
詩는 말과 절이 합쳐졌으니
말의 신전으로 가서 두 눈으로 직접 말씀을 확인해 보리라 작정했다
험준한 산길 올라 들어선 산사에는
아무리 찾아도 말은 보이지 않고 풍경소리만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처마 끝 바람 고요해지자
가부좌 틀고 면벽한 말씀의 뒷모습,
묵언 수행 중인 듯 말줄임 알로 염주를 굴리고 있다
그 염주 다 닳아 한 점으로 남게 될 때까지
결코 일어서지 않을 듯 꼿꼿하다
- <착각의 시학> 2022년 봄호
* 이순희 시인
단국대 한문교육과.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기독교상담학과 졸업.
2002년 《심상》 등단.
가곡 독집 「어디로 가는 가」와 「그냥」「산 그림자」「바람의 소리」등 다수의 시를 가곡으로 발표.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
동국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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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희 시인의 [말이 머리 깎고 절로 간 까닭]은 말의 한계에 대한 처절한 절망 속에서
말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말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어떠한 말이 아름다운 말이고, 어떠한 말이 더러운 말인가?
그는 글 동냥하며 근근히 살았고, 언어에 굶주려 극심한 눌변에도 시달렸다.
동냥이란 자기 자신의 글을 쓰지 못하고 타인의 글을 빌어다가 썼다는 것을 말하고,
눌변이란 능수능란한 능변과는 달리 매우 서툰 말솜씨를 말한다.
망상이란 잘못된 생각들을 말하고, 허상이란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헛된 생각들을 말한다.
“어쩌다 곳간이 찼다 싶어 열어보면/ 가득 들어찬 망상과 허상들” 뿐----. 동냥과 눌변의 소산인
망상과 허상의 쓰디쓴 결과를 안고, 어느 새벽 길을 떠났고, 그토록 어렵고 험준한 산길을 올라
말의 신전을 찾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말의 신전에는 “아무리 찾아도 말은 보이지 않고 풍경소리만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처마 끝 바람 고요해지자/ 가부좌 틀고 면벽한 말씀”은 “묵언 수행 중인 듯 말줄임 알로
염주를 굴리고 있었”고, “그 염주 다 닳아 한 점으로 남게 될 때까지/ 결코 일어서지 않을 듯
꼿꼿”하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노자의 말을 적용하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시는 시가 아니고, 언어로 기록할 수 있는 시는 시가 아니다.
진실한 말도 없고, 거짓의 말도 없다. 아름다운 말도 없고, 추한 말도 없다.
진실과 거짓의 싸움 속에 진실한 말이 있고, 아름다운 말과 추한 말의 싸움 속에 아름다운 말이 있다.
시는 시쓰기의 과정 속에 있고, 시가 완성되면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고, 행복이 찾아오면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는 망상이고 허상이며, 이것이 [말이 머리 깎고 절로 간 까닭]인 것이다.
묵언 수행 중인 말, 말줄임 알로 염주를 굴리고 있는 말, 그 염주 알 다 닳을 때까지
자기 자신의 온몸의 정열을 다 불 태우고 있는 말----.
너무나도 경건하고 너무나도 엄숙한 순수함의 극치----.
이 구도자의 정신-시인 정신이 아름다움의 진수로 나타났다가 망상인 듯, 허상인 듯
‘말줄임표의 황홀함’ 속으로 사라져 간다.
요컨대 [말이 머리 깎고 절로 간 까닭]은 이순희 시인의 초상이고, 그 진면목이기도 한 것이다.
- 반경환 (평론가) 명시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