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카페 ⓒ 미모링
어느 의상디자이너 이야기
박봉. 자존감을 잃게 하는 암적인 존재.
대학교때 교수한테 애들이 질문한적이 있다.
"디자이너 나중에 되면 연봉얼마나 되요?"
- "응 우리는 박봉이야~"
박봉
바보같았던, 철없던 나는 그 '박봉'의 의미를 몰랐다.
그냥 아껴쓰고 사치 안하고 하면 되는 줄 알았지.
의상디자이너 외에도 디자인쪽 계통은 대부분 쉽게들
"그 직업은 박봉이라더라."
"그건 야근이 많고 힘들다더라"
이렇게 말해서 듣고 이해하는것과 직접 경험하는것은 완전히 다르다는걸 몰랐다.
박봉인 나는, 마음이 작아졌다.
친구, 연인과 맛있는 밥 한끼를 먹어도 가격걱정과 통장 잔고, 카드값 걱정을 했다.
그래도 명색이 "직장인"에 남들이 보기에 멋져보이는 "의상디자이너"인데, 이번에는 내가 계산해야겠다
아 그런데 계산을 하면 이번달에 @@@원밖에 안남네. 그래도 어쩔수없지. 하는 생각을 수도없이 하게 된다.
한창 뜨던 SNS는 내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남들이 먹는 맛있는 음식. 해외여행. 꼭 해외여행이 아니라도 국내여행이라도.
퇴근후 무언가 활동이라도 하는것을 보게되는 SNS는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도 퇴근후에 거기 가보고싶은데, 나에겐 시간도 돈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슬프고 화가났던 일화가 있다.
나에게는 라이벌같은 존재의 남자사촌들이 있는데, 한명은 나와 동갑이고 다른 한명은 나보다 한살이 많았다.
그들은 외삼촌 아들들이었는데, 아무래도 외삼촌이 외아들이다보니 집에서 다른 딸들에 비해 지원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아예 등한시한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차별이 있었던것은 사실이다.
우리 엄마는 여고 1등으로 입학할정도로 공부를 잘 했는데도 대학에 안가고 할머니의 장사를 도왔으며,
그렇게 할머니와 장사를 해서 외삼촌 유학도 보내고 대학원도 보냈다.
나중에 우리집이 고생해서 외갓댁에서 많이 도와주신건 맞아서 (보증금 등등) 차별을 받았을 지언정 그래도 그런점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릴적부터 우리집보다 잘 살았던 외삼촌집이기에 조금 열등감은 갖고 있었고 특히 어릴때 내가 가지지 못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고, 그래도 서울사는 걔네들이 참 부럽고 열등감의 존재였다.
내가 피아노 사달라고 엄마한테 조를때 그 집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고,
'슈퍼마리오 게임'을 집에서 하고싶은데 엄마한테 사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그 집에는 게임기도 있었다.
그리고 "너희집에는 이런거 없지" 하고 나를 놀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내가 할머니 생신날에 깽판(?)을 친적도 있다.
쩃든 어릴적부터 나는 그런 마음을 먹고 자랐다.
걔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난 10살이 되기도 전부터 걔네한테 열등감을 가졌다.
대학도 서로 비슷하게 갔는데, 서울상위권에 간 걔네들, 서울 하위권에 간 나.
취업을 해도 대기업에 간 걔네, 중견기업에 간 나.
설날이었다.
사실 외갓집에 가면 성인이후(대학생)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용돈을 주셨다.
모든 손주들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미리 준비하고 계신다.
나와, 걔네둘이 세배를 했고 세뱃돈을 주셨다.
그런데..
걔네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다...
내 앞에서..
얼마가 들었는진 모르겠다. 옆에 있는 내가 너무 부끄럽고 한심스럽게 느껴지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제 저희들이 용돈 드려야죠...^^"
하는 애들을 당장에라도 멱살잡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었다.
왜 나 보는 앞에서 용돈을 드린거야?
난 할머니 할아버지는 커녕 부모님 용돈도 드릴 수 없는 처지라고.
근데 왜 하필이면 내가 보는 앞에서, 옆에있는사람 민망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냐고.
아무도 나에게 "넌 왜 용돈 안드렸니"같은 말을 한건 아니지만 들은것처럼 부끄러웠다.
박봉은 그냥 흘릴 단어가 절대 아니다.
되고싶은 직업이 "박봉"이라면, "야근"을 많이한다면 그건,
고마운 분들에게 용돈한번 쉽게 드리지 못한다는 것.
저녁밥은 회사에서 매일 먹는다는 것.
저녁이 없는 삶이라는 것.
삶의 질이 아주 떨어진다는것.
나는 10만원짜리 티셔츠를 만들지만 만원짜리 티셔츠를 고민한다는것.
피부로 느껴봐야 깨닫는 바보같은 나자신인것을 누굴 탓하겠나 싶었다.
- 퇴사
집 화장실에서 변을 봤는데 깜짝 놀랐다. 변기 물이 투명한 물이 아닌 그냥 핏물 그 자체였다.
아예 쌔 빨간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병원에 가보니 항문쪽에 문제가 생겨 염증이 났고 간단한 치료를 할지, 수술을 할지 결정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래도 간단한 치료와 약으로 끝나게 되엇지만, 몇달간은 빨간 물을 계속해서 봐야했다.
배가 아픈것도 아니고 항문이 아픈것도 아니고 아무런 증상이 없고 피만 쏟아져 나오니 당시에는 너무 무서웠다.
오랜시간 야근하며 배달음식만 먹으니 몸 상태가 썩어간 듯 싶었다.
그리고 더이상 몸이 망가지기 전에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난 고1때부터 디자이너가 되기위해 입시미술을 했다.
고1 고2 고3 재수, 대1, 대2, 대3, 대4,
8년을 공부했고 그 쓰레기같은 인턴도 견뎠는데 더이상 디자이너를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이제까지 뭘 한건가 싶었다.
그리고 그게 아깝다고 견디기엔 제 명에 못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실제로 내가 디자이너였을때 모 대기업 인턴 디자이너가 직장 내 왕따로 인해 사망한 사건도 있으며,
모 기업의 기술자 선생님도 쓰러진 적이 있다. 쉬쉬하기도 하고 대기업이라 아마 기사도 안뜰지도 모르겠다.
정말 많은 고민을 했고 나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그만두기로 했다.
-퇴직금 500만원.
4년을 한 회사를 다닌 나지만 그만둘때까지도 200만원을 못받았다.
내 예상 공채사원은 입사하자마자 200이 넘을텐데 말이다.
나는 그렇게 썩어가며 일했는데도. 그렇게 야근을 했는데도 200만원이 안됐다.
언제 200넘어보나 했는데 내 월급 최종은 192정도에서 멈추었다.
100만원이나 160만원을 받을때보단 물론 나은 삶이었지만, 최소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딱 깨달은 순간은 30대인 디자이너들도 "본인 차"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나 이렇게 있다가는 집은커녕 차도 못사고 그래도 의상디자이너라고 살아왔는데 비싼가방 하나 없는 인간이구나 싶었다.
퇴직금이 4년 다녔는데도 적은 이유는 1인가 2편에 썼듯이 인턴 기간이 ㅈ같이 길었기 때문이다.
인턴은 퇴직금 기간에 포함되지 않았다.
해외여행 티켓도 끊고 나는 그 돈을 들고 아빠에게는 K2 겨울 점퍼를, 엄마에게는 페라가모 백을 사줬다.
백화점에서는 못사고 엄마 아빠 같이 서울외곽 아울렛에 가서 엄마한테 고르라고 했는데, 엄마는 담담한 척 하면서도
매우 심도있게(?) 가방을 구경하고 골랐다.
지금도 그 가방을 고양이가 스크래치 낼까봐 보물처럼 모시고 장농 안에 넣어놨고 중요한 약속 있을때만 꺼내서 쓴다.
엄마가 이렇게 좋아하는거 알았으면 진작 사줬을텐데 ( 아 , 사줄능력 없지 참) 싶기도 하고.
저렇게 엄마가 좋아하는데 .
나 돈 많이 드는 미술시킨다고, 미대보낸다고 본인들은 좋은물건 가져보지도 못하게 한 불효자식.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처음으로 가져본 목돈을 그렇게 썼지만 후회는 전혀 없다.
지금 하는 장사 열심히 하면 다음에 또 사줄 일이 오겠지
내가 퇴사할때"후회해도 네 결정이고 책임이다"하고 진심어린 이야기를 해준 선배부터,
"얼마나 잘 될 지는 모르지만" 따위의 말을 지껄인 사람도 있는데
쨋든 나는 퇴사한것에 매우 만족한다.
+ 해외취업
해외취업은 내가 안해서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엄친 딸이 있었는데,
나와 학교 레벨도 비슷하고 둘 다 디자이너를 희망했다.
나는 쨋든 어거지라도 피팅이 되기도 헀고 대충 눈을 낮추어 국내 기업으로 취업이 되었고,
엄친딸은 피팅이 아예 안되서 1년인지 2년인지를 계속 취준생으로 있었는데, 결국에는 중국의 악세사리 회사에 들어갔고
월 300이상 받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것도 방법이겠다 싶었..지만 외국어가 안되므로 나는 갈 수 없던 길이었다.
(끝으로)
이 글을 쓰면서 요즘은 어떤가 싶어 의상디자이너 연봉, 장래희망, 등등 검색해보니
"박봉이라고 해도 능력마다 나름이다. 팀장실장은 연봉 많다. 1년만 고생하면 된다" 하는 글들이 많았다.
이 글을 10대가 볼지 모르겠지만, 그 글쓴사람이 운이 좋아서 별로 고생 안하고 쓴 사람일수도 있다.
나처럼 쓰레기 회사 만날 수 있고 공주 실장 만나서 무수리 짓 해야할 수 도 있다.
4년 회사 다녀도 200만원도 못받는 그런 삶 말이다.
과거의 내가 만약, 지금 내가 쓴글 같은걸 봤다면 난 디자이너란 직업 별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꿈을 밟는것이 아닌, 정말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도 백화점이나 옷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나지만, 그때 썼던 글이나 블로그 포스팅 등을 보면 다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는 내 꿈을 포기했지만 지금도 열심히 열정을 가진 디자이너들을 보면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난 내가 이렇게 중간에 그만두는 1인이 될지 꿈에도 몰랐으니까..
외국에서의 "디자이너"는 어떤 삶을 사는진 모르겠지만,
난 업무에 있어서 일러스트로 옷을 그리고 생각하고 디자인할땐 너무 재미있었다.
어느정도였냐면, 월요일부터 출근해서 디자인을 해도 되는데 빨리 하고싶어서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서 커피마시면서 회사분위기 아닌 곳에서,
그림을 그리니 능률도 좋고 즐겁고 보람까지 있었다.
그런데 회사안에서의 디자인 활동은 극히 일부분이었고 너무도 비생산적인 야근이라던가,
회의, 임원에게 보여주기위한 쇼잉 행정 등으로
"디자이너답지 않은 업무"의 비율이 많기 떄문에 그만두었다.
의류 기업은 "오너의 입김"이 강하기 때문에 오너의 한마디로 이랫다 저랫다 일이 뒤집어졌다 하기 때문에 더욱 피곤하다.
"의상디자이너"가 꿈이라면... 꼭 이러한..조건도 꼭 보면서 입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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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상디자인관데 모든 의욕 다 잃고 갑니다..
진짜 홀린듯이 봤다 .. 글 가져와줘서 고마워 ㅠ 곧 취준생이라 남얘기가아니네
와..
잘읽었어ㅠㅠ
나 개현타오는데.. 미대가려고 재수하고 학원다니고 공부하고 쓴 돈이 얼만데 저렇게 사는거야? 진짜 아 현타오짐
삼년전으로 돌아가고싶다
우리과 나와서 취업한사람들말이랑 비슷하네ㅠ 글쓰신분 이제는 장사잘되셨으면 좋겠다ㅠ
이거 최근의이야기인가..ㅜㅠ 의류학과인데 암울하다
대학 울면서 그림그리면서 왔고 반수준비하는데 현타온다
마음 아프다
하아 ㅠㅠㅠ 고마워 잘읽었어 !!
하 올여름방학때 스타일리스트 현장실습가는데ㅜ막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