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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8호 박팽년선생 유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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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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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3월 6일)은 조선 단종 때 사육신 중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박팽년의 유허지를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박팽년은 태종 17년 (1417년)은 회덕현 흥농촌 회덕현 흥농촌 왕대벌에서 박중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현재의 동구 가양동 더퍼리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남간정사로부터 300~4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지요.
유허는 우암사적공원 건너편 주택가 한 가운데 있습니다. 유허의 솟을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 갑니다. 비각은 왼쪽 담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좁은 비각 안에 비석이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서자 '평양 박선생 유허비"라고 새겨진 글씨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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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허비 앞면과 뒷면. 우암 송시열 선생이 글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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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그리하여 이 유지가 황폐되고 파묻혀서 거의 식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주부자(朱夫子)의 "소(沼)가 메워지고 대(臺)가 기울어져서 잡목이 무성하매 나무하는 아이와 소치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매 뛰논다"는 탄식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골 사람들이 슬프게 여기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니,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고을의 기로(耆老)와 장보(長甫)들이, 더욱 오래되매 더욱 그곳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조그마한 돌을 세워 묘지를 해놓았으니, 혹 다행스럽게 훗날에 성고(聖考)의 뜻이 과단성있게 행해지고 막힘이 없다면 어찌 꾸지나무와 산뽕나무를 베어버리고 문정(門亭)을 일으켜 세워서 그 옛터를 회복하는 일이 없겠는가?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 자료 인용
박팽년 선생의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랍니다. 평소 가야금 타기를 좋아해서 스스로 호를 취금헌으로 지었다고 하지만 그의 생애는 그가 한가로이 가야금이나 탄주하면서 한가롭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세종 16년(1434)에 알성문과에 합격하였고 단종 복위운동이 탄로나 세조 2년(1456)에 처형되었으니 겨우 사십년도 살지 못했던 짧은 생애였습니다. 1691년(숙종 17)에야 명예가 회복된 후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로 추서되었지만 그의 원혼이 충분히 위무받았을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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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자료 제2호 창계 숭절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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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유허지를 나와서 내킨 김에 그의 사당이 있는 안영동 창계 숭절사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비룡 I.C에서 남부순환고속도로를 타고가다 안영 I.C 로 빠져 나오면 거기 맞은 편 산 아래 숭절사는 있습니다. 그냥 숭절사가 아니라 창계숭절사랍니다. 물 맑은 시내(창계. 유등천)에 세워진 사당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남부순환고속도로에 가로막혀 유등천은 보이지 않습니다.
청재 박심문(1408~1456) 선생과 박팽년 선생을 모시는 사우인 숭절사의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일 먼저 상의당이라는 건물이 객을 맞습니다. 강당과 회의실로 쓰는 건물이지요.
박심문 선생은 23세때인 세종13년(143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육진 개척 때 김종서를 따라가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세조가 즉위하자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의주에 이르러서 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내가 육신으로 더불어 죽기를 맹세하였는데 내 어찌 차마 혼자서만 살 수 있으리오?"하며 음독 순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적은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조정에 알려져 비로소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습니다. 후손들이 선생의 정절을 추모하기 위해 1923년에 사우를 세웠는데 퇴락하여 1977년에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박팽년 선생은 본디 동구 가양동에 있었던 정절서원에서 모시고 제향을 받들어 왔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말미암아 서원이 없어지자 이곳 숭절사로 옮겨와 함께 모셔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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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계 숭절사의 강당겸 회의실인 상의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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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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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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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
| 밤이 어두울수록 달은 더 밝게 빛난다
안타깝게도 사당으로 향하는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얕으막한 담 너머로 살짝 넘겨다 본 사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의 건물이었습니다.
사당을 돌아 나와 잠시 생각에 잠겨 봅니다. 단조의 복위운동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고, 시신마저 갈기갈기 찢겨져야 했던 충정공 박팽년 선생. 자신만의 죽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의 아들 여덟 명과 아버지 그리고 동생 대년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야야 했던 그의 삶을 생각합니다.
춥다고 해서 피기를 머뭇거리거나 필 시기를 저울질하는 꽃이 아니라 때가 되었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꽃을 피우고야 마는 매화. 아마도 그의 삶은 꽃샘추위 속에서도 기어이 꽃을 피우고야 마는 매화와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모든 가치가 전도돼고 아노미 현상에 빠진 우리 사회에서 그의 생애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모든 가치가 허물어지고 무너진다 해도 어두운 시대의 밤을 밝히던 야광명월 같은 박팽년 선생의 삶이 빛을 잃을 리야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