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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명당조건을 갖춘 곳을 찾기란 그렇게 쉽지않다.
죽은 자를 위한 음택명당과 산 자의 양택명당 조건을 동시에 갖춘 곳으로 동재기나루와 동재기마을을 꼽는다.
그 기묘하고 신비한 땅 동재기마을 찾는 한강역사탐방은 동작역 3,4번 출구쪽 개찰구 옆 공간에서 만나서 출발한다.
그 옛날 한양도성을 나와 남태령을 넘어 충청 경상 전라도 등으로 가려면 꼭 동재기나루를 건너야 했다.
<춘향가>에서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떠날 때 숭레문을 나와 청파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동작나를 건너
과천 땅에서 쉬어간다는 대목이 나온다.연산군도 사냥을 즐겼다.과천 왕실소유의 사냥터로 가기 위해서 동작나루
배다리를 건너야 했다.한강의 배다리 중 동재기배다리가 최초라고들 말한다.
동작역 서북쪽 건물 모퉁이에 동재기나루(銅雀津址) 푯돌이 있다.
수원 과천 등에서 남태령을 넘어 삼남대로(현재 동작대로)를 따라
도성(都城으로 왕래하던 사람들이 한강을 건널 때 이용하던 나루터
겸재 정선의 그림 <동작진> 속 동작마을과 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 전경은 서달산 꼭대기에서도 볼 수 없다.
동작철교 서쪽 난간다리를 타고 철교 위로 올라가 동작대교 카페 옆 광장에서는 그곳의 전경을 어느정도는 살필 수 있다.
한강과 과천 사이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관악산 지맥으로 179m 봉우리의 공작봉(孔雀峰) 서달산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주산이다.이 서달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뻗은 용맥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힘차다.
마치 공작이 알을 품고있는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의 상서로운 모습이다. 우백호에 해당되는 반포천으로
끝나는 봉우리인 '갯말산'이다.장군이 군사를 거느른 형세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의 동재기마을이다.
공작이 알을 품고있는 모양의 좋은 땅 그 유서 깊은 동재기마을은 1955년 국군묘지에 그 자리를 내주고 사라진다.
공작의 품에 안겨서 바라본 그 명당 동재기는 포근하기만 하다.찾은 이의 마음을 참으로 안정시켜준다.
풍수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 집과 건물의 터를 잡는 풍수를 양택 풍수라고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묘 자리를 잡는 풍수를 음택 풍수라고 한다.양택 풍수와 음택 풍수에서 좋은 자리를 고르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원리는 같다.
집터는 산소의 터보다는 크고, 넓으며 건물의 배치, 집의 형태, 실내구조 등으로 좀더 복잡한 원리가 적용된다.
어려운 이론에 입각하여 정한 좋은 터에 죽은 사람를 위한 유택(幽宅)을 지하(地下)에 마련하면 음택풍수가 되고,
산 사람을 위한 거주 공간을 지상(地上)에 마련하면 양택풍수가 되는 것이다.바로 공작의 품안이 그런 천하의 명당이다.
현충원의 주산 공작봉 서달산이다.바로 해발 179m이다.산자락에는 바위들이 옹기종기 있다.
그 중에 거북이 형상 같은 일명 ‘거북바위’가 돋보인다.한강 너머로 북한산 남산 용마산 인왕산 북악산 등의
모습들이 한 눈에 든다. 공작봉 서달산이 현충원을 뒤에서 살포시 껴안고 있는 형국이다.
묘역 전체가 당장 서달산 아래로 부채처럼 펼쳐진 듯 보인다.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르는 듯하여 하나의 산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으로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서
2019년 11월 14일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호국영령은 183,104명이다.144만m² 44만평에 네 분의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서 18만3천104명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모시고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이다.1957년 7월 국군묘지로 출발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심장부이다.현충문을 들어서면 1967년에 건립한 현충탑을 대한다.그 탑 높이 31m는 3.1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다.
현충탑 하단에 오석판에는 노산 이은상의 그 유명한 비문이 새겨져있다.당시 박정희 대통형이 친필 휘호로 그 비문을 남기었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일반참배객들도 예약없이 현충탑을 찾아 분향을 할 수 있다,예약을 한 참배객들은 의전직원들의 참배안내를 받는다.
예약을 하지 못한 참배객들도 향로 옆 충혼이란 글자가 새겨진 검은 상자 위에 놓은 '셀프참배' 버튼을 누르고 그 안내
방송에 따라 참배를 할 수 있다.참배객 대표는 3번 분향을 한다.이는 동양의 천지인(天地人) 합일(合一)의 사상에서 유래한다.
첫번째 분향은 하늘에 대한 감사 두번째 분향은 땅에 대한 감사,세번째 분향은 사람에 대한 감사를 의미한다.
현충탑 지하에 마련된 위패봉안관이다.1950년 한국전 때 전사자 중 유해를 거두지 못한 10만4천여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현충탑 지하로 가는 입구에는 위패봉안 전사자 명부가 명부함에 비치되어있다.매일 아침 9시 의전과 직원과 의장병이 명부함에서
명부를 꺼내 그날의 전사자 명부를 찾아 명부함 위에 올려 놓는다.이때부터 현충원의 하루는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국가원수묘역에는 네 명의 전직 대통령을 모시고 있다.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잠들어 있다.
독립유공자는 임시정부요인 묘역 애국지사 묘역 무후선열제단에 모셨다.임시정부묘역에는 박은식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이상룡 국무령 양기탁 국무령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등 임시정부에서 주요 직위를 역임한 18위가 잠들어 있다.
애국지사 묘역에는 구한말의 의병을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에 국내외에서 독립투쟁을 펼쳤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셨다.
평민으로 의병을 일으킨 신돌석 의병장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 선생 서울역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등 216위가 잠들어 있다.
무후선열제단은 후손이 없고 유해마저 찾을 길이 없는 순국열사와 애국지사를 위패로 봉안하고 있다.
3.1독립혁명 때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위종 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 이동휘 선생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홍범도 장군 1950년 한국전 때 납북된 위당 정인보 선생 등 131위를 모시고 있다.
국가유공자묘역에는 우리나라 정치 경제 외교 안보 과학 문화분야에서 국가발전과 민족 번영을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
75위를 모셨다.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경제개발정책을 설계 추진한 남덕우 국무총리, 포항제철을
일으킨 박태준 국무총리 등이 모셔져 있다.
장군묘역에는 광복 이후 국군의 창설과 발전은 물론 6.25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군장성 355위가 잠들어 있다.
6.25전쟁 중 경북 안강.기계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대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한신 육군대장 해군 창설의 주역이면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손원일 해군 중장 국무총리 국회의장을 역임한 정일권 장군 등을 모시고 있다.
장병묘역에는 전사 순직한 대령 이하의 국군장병 향토예비군 학도의용군 등 5만4천여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다.
경찰관묘역에는 전사 순직한 경찰관을 모시고 있다.6.25전쟁 당시 영월화력발전소를 사수하다 전사한 김해수 경감
전남 곡성 태안사 전투에서 전사한 주순철 경감 등 823위가 모셔져있다.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은 1980년대 중반 만장되었다.그래서 국립대전현충원을 창설하였다.
유가족들이 수도권 안장을 희망함에 따라 봉안시설 충혼당을 건립하여 2006년 3월부터 안장을 재개했다.
충혼당에는 6.25전쟁 때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모진 학대를 받아오다가 조국으로 돌아온 조창호 중위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승마선수로 출전 중 사망한 김형철 선수 프랑스에서 <직지심체요결>을 발견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임을 밝혀내고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 기여한 박병선 박사 등 14,674위를 모셨다.
선조의 할머니 창빈 안씨의 동작릉이다.
창빈의 아들 덕흥군이 어느날 지관을 만나 천거받은 동작릉이다.
"이곳에서는 10명이상의 왕이 나올 천하의 명당이옵니다!"
그 지관이 장담한 것처럼 창빈 후손 13명이 조선의 왕이 된다.그 전설은 이렇다.
어느날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 이초 집에 한 지관이 찾았다.
-어떤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숙용 안씨의 묘를 이장하셔야 합니다."
덕흥군은 예삿 일이 아니였다. 깜짝 놀라 그 지관에게 호통을 쳤다.
-방자하다. 감히 왕실의 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
"방금 조선 최고의 명당 길지를 보고 왔기에 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길지 운운하며 명당을 이야기하는 건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아니냐?
그 명당이란 곳이 금계포란형을 하고 있다는 게냐?
"금계포란이요? 그건 기껏해야 닭이 아닙니까?"
-그럼 봉황을 보았다는 거냐?
"봉황은 보지 못했으나 공작을 보았습니다."
-공작을 보았다고?
"네, 공작포란의 명당길지를 보았습니다."
이 풍수사가 말하는 공작포란형은 최고의 길지이다.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그 명당을 덕흥군 이초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명당이면 자네의 조상을 모시면 될 일이지 왜 나한테 주겠다는 게냐?
"그런 명당에는 아무나 함부로 쓰면 오히려 화를 당합니다. 임자는 따로 있지요."
-도대체 그곳이 어디냐?
"노들나루 위에 동작나루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왜 그 자리를 동작나루라고 했겠습니까?"
-그 천하의 명당 길지를 어찌 너만 알고 있는 게냐?
"길지는 쉽사리 아무에게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됩니다. 숙용마마의 묘를 이장하는 까닭을 물으면 이렇게 말하세요.
양주의 묘에 물이 차서 흉한 꿈을 자주 꾼다고 하세요. 그 자리는 수십명의 군왕이 나올 길지입니다."
풍수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훌쩍 떠났다. 덕흥군 이초는 멍할 따름이었다.
“나를 파월 장병이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
육군준장 채명신 장군은 죽어서도 더 낮췄다.
장군이 사병묘역에 안장된 것은 현충원 설립 사상 처음이다.
묘지 크기는 일반 사병과 같은 3.3㎡(1평)다. 봉분도 없고 단출한 비석이 하나 세웠다.
그가 갈 수 있었던 장군묘지는 26.4㎡(8평)로 사병묘지보다 8배 넓다.
그에게 주어진 한 평이 대통령의 묘역 80평보다 몇 천 배 더 넓은 것 같다.
현충원 참배객들은 현충탑으로 가면서 꼭 지나게 되는 채명신 장군의 묘소가 되었다.
채명신 장군을 20년 넘게 보좌해온 정재성 보좌관은 "'전우들 곁에 묻히겠다는 얘기를 들은 지 한참 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령관님은 다른 장군과 다르다. 월남사령관을 하면서 많은 장교와 사병들이 전사했다. 5천여 명 넘게 사망했다.
항상 마음 아파하시고 나는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 친구들은 여기에 묻혀있다……. 내가 죽으면 여기 전우들하고
같이 묻혀야 되겠다. 이게 늘 원이 있었다."
채 장군의 부인 문정인 여사도 "(채 장군이) 집(동부이촌동)에서 국립현충원을 바라보며'사랑하는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전역 직후부터 그런 얘길 했고 병상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언급을 했다"고 채장군의 유지를 전하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에 있는 빨간마후라 공군준장 김영환 장군의 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비문이 찾은 이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하늘의 풍운아 김영환 장군 그의 영령을 여기에 모셨습니다.
1921년 1월 8일 역대 무반의 가정에서 태여났으니 충천하는 기백은 고주몽이요
치밀한 작전은 제갈량인데 강한 자 앞에선 성난 독수리이요 약한 자 앞에선 순한 양이었습니다.
부하가 죄 지으면 스스로를 매 때리고 친구가 불행하면 같이 잡고 울었으며 가난한 벗을 보면 주머니를 털어 주었습니다.
장군을 지휘관으로 받든 비행단의 장병들은 철통같이 뭉처서 한 덩어리였습니다.
1954년 3월 5일 장군은 사천기지를 떠나 작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묵호 동방 상공에서 애석하게 34세를 일기로
전사하시었습니다. 그의 예지 그의 기백 그의 재능 못내 그립습니다.
비옵기는 장군의 웅대한 뜻으로 호국의 간성이 되어 길이 조국의 하늘을 지켜 주소서
1963년 12월 18일"
1951년 8월 가야산 일대에서 약 900여 명의 인민군 패잔병들이 해인사로 이동하는 것이 탐지되었다.
유엔군 사령부 쪽에서는 빨치산의 주력을 섬멸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편대장 김영환 대령에게 해인사를 폭격하여 적군을 모조리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전투비행대에 출격명령이 내려졌다.
공비를 토벌하는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4대의 비행기가 사천 비행장을 출발해 지리산으로 향했다.
비행기마다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와 5인치 로케트탄 6개 캘리버 50 기관총 1.800발씩을 장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해인사 마당에 떨어져 하얀 연막을 내고 있었다.
이때 김영환 편대장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내 뒤를 따르되 편대장 지시 없이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사격하라"
잠시 후 정찰기에서 독촉 훈령이 내려왔다.
"해인사를 폭탄으로 공격하라~ 도대체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나?"
편대장의 2차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폭탄 공격을 하지 말라~"
4대의 비행기는 해인사를 지나쳐 뒷산 능선 너머에서 폭탄과 로케트탄을 빨치산들에게 퍼부었다.
그날 저녁, 미 공군 고문단의 한 소령이 편대장실에 나타났다.
그는 김영환 대장에게 물었다.
"아까 목표를 알리는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셨습니까?"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곳을 공격하더군요"
"소령께서는 경찰의 요청에 따라 목표를 지정했지만 그 곳은 사찰이었습니다"
"사찰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공비보다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세계적인 국보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미군도 2차대전 때 귀중한 문화재가 많은 교토시를 폭격 대상에서 제외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1953년 3월에 김영환 대령은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새로이 창설된 공군 제10전투비행단의 초대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종전후인 이듬해 3월 5일 공군 제10전투비행단 창설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F-51기를 타고 사천기지를 이륙하여
강릉기지로 가던 도중,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인하여 동해안 묵호상공에서 실종되고 만다. 그때 34살 아까운 그의 나이였다.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든 호국영령들을 위한 호국지장사다.
호국지장사는 신라시대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갈궁사(葛弓寺)에서 기원한 천년고찰이다.
도선국사가 북쪽으로 만행을 하다 한강 언덕에 이르러 둘러보니 상서러운 기운이 퍼져 나오는 곳이 있어
가보니 칡넝쿨이 엉켜 있고 약물이 샘솟는 명당이 있어 토굴을 짓고 갈궁사라고 칭했다고 전해져 온다.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한 갈궁사를 고려 공민왕 때 보인스님이 화장암(華藏庵)으로 중창했다.
한국전쟁 직후 사찰 땅 36만평(119만㎡)을 국군묘지 부지로 내어준다.43만평 규모의 국군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가
조성되는데 일조했다.여기에는 유명한 철불좌상을 모시고 있다.그 전설은 이렇다.
옛날 한강에 사는 한 어부가 꿈에 불상이 나타나 빛을 보게 해 달라고 하며, 그의 꿈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혹시나 하여 가봤더니, 녹슨 불상이 그곳에 있었다.
어부는 깨끗이 닦아 집에 모셨으나, 그후론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거듭 생겨서
어부는 화장사로 이 불상을 옮겼다고 전한다. 불상이 자기 거할 곳을 어부 손을 거쳐 정해간 모양이다..
"만일 절집이 아니라면 내가 이곳에 묻히고 싶은 땅이다."
일찍이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 들렀다가 감탄한 말이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것이다.
조선 중기 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소년시절 머물면서 공부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호국지장사에서 기도하거나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하거나 각종 고시에 합격했다는 일화가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1960년대에는 해마다 2~3명씩 사법시험 합격자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고시생 합격 수기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에도
호국지장사에서 공부한 뒤 사법시험에 합격한 한 은행원의 일화가 담겨져 있을 정도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이 그린 '동작진(銅雀津)'이다.
앞에는 동작강이 흐르고 있다. 이 일대 한강은 동작강(銅雀江) 동호(銅湖)라고 불렀다.
오른쪽 야트막한 산세가 좌청룡으로 힘차게 뻗어내리고 있다.왼쪽에는 울퉁불퉁 높은 봉우리가 우백호로 내닫으면서
가운데 분지 동작마을(銅雀忖)을 지켜주고 있다.그 마을 뒷편에는 서달산 동작봉이 주산으로 받쳐주고 있고 이어서
청계산과 관악산이 든든하게 수호하고 있다.
그 마을 앞에는 각종 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강 가운데는 여객을 실은 배가 강 건너 백사장으로 노를 저어 가고 있다.
강가 모래사장에는 시종을 거느린 양반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의 강(京江) 나루 가운데는 가장 분주하고 활기찬 동작나루로
그리고 있다.이 동작나루(銅雀津)는 줄여서 동진(銅津)이라고도 했다.
강북산남(江北山南)의 땅이 양지바른 명당(明堂)으로 꼽힌다.동작마을은 강남산북(江南山北)의 그늘진 땅 음지(陰地)다
주위의 이수천과 반포천이 각각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역수(逆水)로 작용해 그 음지 동작마을의 부족한 기(氣)를 보완한다.
음(陰)의 속성을 지닌 땅 동작마을이다.두 내(川)의 비보(裨補) 기능 탓인지 내노라하는 세도가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이 동작마을에 별서들을 다투어 지어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산 사람의 양택(陽宅)명당으로 관심을 끌었다.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는 한 가운데 둥근 분지에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유난히 기와집이 많다.
강변 풍광이 수려한 산자락 분지에 사대부가의 별서촌 ‘동작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이 그린 '동작진(銅雀津)'이다.
앞에는 동작강이 흐르고 있다. 이 일대 한강은 동작강(銅雀江) 동호(銅湖)라고 불렀다.
오른쪽 야트막한 산세가 좌청룡으로 힘차게 뻗어내리고 있다.왼쪽에는 울퉁불퉁 높은 봉우리가 우백호로 내닫으면서
가운데 분지 동작마을(銅雀忖)을 지켜주고 있다.그 마을 뒷편에는 서달산 동작봉이 주산으로 받쳐주고 있고 이어서
청계산과 관악산이 든든하게 수호하고 있다.
그 마을 앞에는 각종 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강 가운데는 여객을 실은 배가 강 건너 백사장으로 노를 저어 가고 있다.
강가 모래사장에는 시종을 거느린 양반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의 강(京江) 나루 가운데는 가장 분주하고
활기찬 동작나루로 그리고 있다.이 동작나루(銅雀津)는 줄여서 동진(銅津)이라고도 했다.
강북산남(江北山南)의 땅이 양지바른 명당(明堂)으로 꼽힌다.동작마을은 강남산북(江南山北)의 그늘진 땅 음지(陰地)다
주위의 이수천과 반포천이 각각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역수(逆水)로 작용해 그 음지 동작마을의 부족한 기(氣)를 보완한다.
음(陰)의 속성을 지닌 땅 동작마을이다.두 내(川)의 비보(裨補) 기능 탓인지 내노라하는 세도가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이 동작마을에 별서들을 다투어 지어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산 사람의 양택(陽宅)명당으로 관심을 끌었다.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는 한 가운데 둥근 분지에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유난히 기와집이 많다.
강변 풍광이 수려한 산자락 분지에 사대부가의 별서촌 ‘동작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동작마을은 1957년 국군묘지에 밀려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