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에 대한 새로운 논의는 소위 “사악한” “비이성적” “도피적인” “추한”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낭만주의 문학은 70년대 이후 새로운 해석의 전환을 맞게 되는데, 주된 질문은 과연 낭만주의 문학이 계몽적 유토피아적 사유와의 극단적 단절인지 아니면 연장인지로 요약된다. 대체로 후자의 입장이 관철되었다.
최근의 특이한 점으로 니체와 보들레르가 부각되고 있다. 니체의 경우 그 철학이 계몽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고찰해줄 수 있는 새로운 계기냐, 아니면 이성과 합리성에 갇힐 수 없는 탈현대적 혁신성까지를 제공해주느냐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보들레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주된 경향은 보들레르를 더 이상 반계몽적 시인으로 파악하지 않는 시각이다(벤야민, 아도르노). 그로 인해 보들레르 문학을 상징주의, 유미주의, 예술지상주의 등으로 분류하면서 현실 도피적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던 과거의 경향은 극복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보들레르는 현대성을 “추의 미학”을 통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자 했던 작가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보들레르 문학을 탈현대적(해체론적)인 맥락에서 파악한 입장도 있다. 데리다, 폴 드 만이 그 예다.
여기서는 계몽과 반계몽, 현대성과 탈현대성의 논의보다는 보들레르 문학, 혹은 “데카당스” 문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되짚고자 한다. 사실 보들레르 뒤에는 에드거 앨런 포가, 그 뒤로는 낭만주의 작가 호프만이, 또 그 뒤로는 초기 낭만주의자 슐레겔과 노발리스가 자리잡고 있다. 즉 보들레르 문학은 ‘낭만주의→유미주의→아방가르드’로 이어지는 흐름에 위치한다.
과거의 지배 담론은 낭만주의 예술과 문학을 척결하기 위해서 아이러니, 위트 같은 사악하고도 장난스런 기법을 절제해야 하고, 기존 도덕을 해치지 않는 건전한 서술을 취해야 하며,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해야 하고, 암울한 삶을 “투명하게” 비판해주며, 대안적인 유토피아를 제공해줘야 한다고 말해왔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문학은 “사악하고 어두운” 문학으로 폄하되었다.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비판의 중심엔 헤겔이 있었다. 그는 심미적 주관성에 의해 성취된 낭만주의가 사회적 진지함(현실, 본질, 이념 등)을 결여했고, 낭만주의의 핵심 이론인 아이러니, 위트, 알레고리가 잘못된 주관성에서 나온 일종의 가상 혹은 유희라고 비판한다. 그의 견해는 이후 현대의 좌, 우파 문학 양쪽에 모두 수용되었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를 막론하고 소위 “어두운” 혹은 “데카당스한” 문학을 비판했다. 좌파적 시각에서는 낭만주의 문학이 새로운 상징성(내지는 알레고리)과 형식미에 지나치게 젖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러한 가운데 다행히 보들레르 문학에 대한 30년대 벤야민의 천착, 그리고 로트레아몽을 새롭게 해석한 70년대 크리스테바의 작업이 있었고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예술 작품의 특성을 “수수께끼”로 규정한 아도르노의 <미학이론>도 난해하고 비밀스런 예술 작품을 부정적으로 치부해왔던 과거의 관행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보들레르 문학은 소위 1848년 혁명의 주도 세력이었던 부르주아(시민계급)가 다시금 보수적인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역사의 진보”와 “자본주의의 발전”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당시 부르주아는 발전론과 낙관론을 거부하는 문학에 적대적이었으며, 이때부터 “반현대적인” 문학은 곧 “데카당스” 개념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항하고자 보들레르는 의도적으로 “데카당스”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파국, 몰락, 소멸 등에 대한 심미적 현상은 낭만주의 이후 보들레르를 거쳐 20세기 현대 문학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한 예로 벤야민은 진보란 곧 절망 내지 “파국”이며, 여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구원은 “순간”에 있다고 말한다. 즉 문학적 “파국”은 결코 파국 자체에 대한 심미적 예찬이 아니라, 역사의 낙관적 발전론에 숨어 있는 억압적 측면을 직시하도록 유도하는 계기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벤야민 이후의 주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데카당스”라는 개념은 더 이상 “퇴폐적” 내지 “현실 도피적”이란 평가로 폄하될 수 없고 오히려 중요한 개념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제는 슐레겔, 랭보, 하이네, 보들레르, 로트레아몽, 아폴리네르, 브르통으로 이어지는 “데카당스적” 전통의 현대 문학을 부정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
2) 이데올로기 비판과 보들레르
“주체에 의해 사회적인 힘이 증가할수록 서정시의 상황은 더욱 불안해진다. 이 점을 보들레르의 작품은 최초로 기록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대성 자체를 반서정적인 것으로 비난하면서 문학적 섬광을 발산했던 것이다.” 이는 아도르노가 <서정시와 사회에 대한 강연>에서 제시한 보들레르 문학의 특성이다. 보들레르에 대한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열려야 한다. 보들레르 문학을 시인의 주관적 탐닉에 국한시키거나 혹은 “악마주의” 차원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그의 문학이 가진 전복적이고 “현대적인” 의미는 다시금 왜곡과 오해에 빠지고 만다.
보들레르에 더욱 섬세하게 접근한 이는 벤야민이다(<보들레르에서의 제2제정 시대의 파리>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중앙공원>). 그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보들레르 시의 “여성”은 관능적인 탐욕, 증오, 성적 대상이 아니라 “죽음을 의미하는 삶”의 알레고리이고, “매음”은 바로 “대중과의 신비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시적 범주이며, “배회자”는 “역사의 진보”를 외치는 자본주의 시장을 감시하는 자의 비판적 인식과 관련된다. 따라서 <악의 꽃>에 실려 있는 <살인자의 술>이나 <넝마주의들의 술> 등은 그저 부랑자를 묘사한 시가 아니라 이미 자본의 힘이 득세했던 “대도시 파리 자체의 문학”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부랑자 문학”을 보들레르만의 새로운 양식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또한 벤야민은 노동과 도박, 그 양자에서 어떤 동질적인 지각 특성을 발견하면서 보들레르 문학이 어떤 측면에서 현대 사회에 비판적인 암시를 제공했는지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17~18세기에 소수 귀족만이 즐겼던 도박은 19세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 마찬가지로 보편화된다. 이를 참고삼을 때 <노름>에 나타난 도박꾼들의 모습은 과거와는 차단된 채 현재적 삶만을 살아가는, 그래서 “허무보다는 지옥을 택하게 되고 마는” 이들이며, 이들을 시샘하는 화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험을 기만당한 사람, 즉 한 사람의 현대인”이다. 이처럼 보들레르 문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내장하고 있다. 이를 외면한 채 “현실성의 결여”라는 척도로 보들레르를 특정해선 곤란할 것이다.
3) 자연과 인공성
전통적인 문학과 비교할 때 보들레르 문학은 하나의 “충격”이다. 1850년 이전의 문학이 저속하고 일상적 소재를 배제했다면, 보들레르는 그 같은 일상적 소재에서 새로운 문학적 형상화의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아방가르드적 의미를 지니는 보들레르 문학은 도덕적인 “선”과 예술적인 “미”의 결합에서 탈피하여 악(추)와 미를 새롭게 결합시켰다. 기존의 “미” 개념을 확장시켜준 것이다. 게다가 그는 추하고 악한 현실을 미메시스적으로 그려낸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저속하고 관능적인 소재를 정신(상상력)의 언어를 통해 예술미의 인위적 공간 속으로 전이시킨다. 그 결과 일상의 추한 소재는 탈일상화된다. 대도시를 그려낸 듯 보이지만 사실 보들레르 문학은 실제의 대도시가 존재하지 않는 대도시 문학인 것이다.
일상의 탈일상화, 추의 미 등으로 표현되는 보들레르 문학의 독특한 출발점은 자연 개념과 결별하고 인공성 내지 인위적 미를 추구한 데 있다. 이를 통해 보들레르 문학은 전원과도 같은 이상적인 자연 상태를 그려냈던 과거의 작가들과는 현격하게 구분된다. <파리의 꿈>에 나타난 풍경은 상상적이고 인위적인 풍경이며 수수께끼 같은 초현실성을 자아낸다. 그의 시는 철저히 “초자연적”이다.
그렇다면 보들레르는 인공적인 산업화와 문명화의 당시 자본주의 사회를 예술적으로 옹호한 것일까? 야우스는 보들레르가 동시대 부르주아의 진보 이데올로기 및 낙관적 역사 발전론을 비판하고 있다고 말한다. 야우스에 의하면 그의 문학은 당시 부르주아 사회에 편승한 듯 하면서도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한다. 이상적인 자연을 거부한 채 도시화, 문명화, 인공적인 문화를 다루고 있지만 실은 문명에 대한 자기 비판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자연으로부터 이탈해서 문명 혹은 인공성으로 전환하는 “초자연주의”를 자신의 문학적 입장으로 천명한 바 있는데, 이 같은 태도는 곧 인공성 자체보다는 인공성에 의해 초래된 “자연 억압”의 측면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해준다.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과 회의, 즉 “이상”과 “우울” 혹은 “의미의 약속과 거부”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 보들레르 문학의 특징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우스의 해석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미와 시대적인 의식이 공존하고 있는 보들레르의 시에서 후자 쪽만을 강조한 한계를 가진다. 사실 당시의 산업 사회에 대한 비판은 보들레르 문학의 “절반”에 해당할 뿐이다. 시 <교감>에는 소리, 색깔, 향기 같은 “마술적인 언어”를 통해 시적 세계를 구성해보려는 열정이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즉 보들레르 문학은 초현실적인 세계를 통해 현재 세계의 문명화 과정을 비판할 뿐 아니라 미학적 차원에서도 일종의 실험성을 지닌 언어 예술 작품의 창작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런데 야우스의 해석은 후자의 측면, 즉 ‘시 전체는 곧 수수께끼 같은 새로운 언어적 실험에 의해 구축된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인식을 간과하고 있다.
4) 현대성, 멜랑콜리, 댄디
<현대적 삶의 화가>에서 보들레르는 예술이 일시성(현대성)과 영원성, 즉 자신이 처한 시대 현실(혹은 유행)과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예술미를 취한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 정의를 통해 그가 무엇을 꾀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보들레르는 문학의 육체성(일시성)을 새롭게 강조하면서도 예술이란 시대를 초월하는 영혼의 특성을 지닌다고도 말한다. 영혼과 육체, 영원성과 시대성, 그 양자의 관계는 “디오니소스적” 예술 충동과 “아폴론적” 예술 충동 같은 니체의 이분법에도 부합하지 않고,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형성하지도 않는다. 다만 하버마스는 보들레르 문학의 현실적이고도 시대적인 의식을 강조한 바 있다. 즉 보들레르에게서 “현대성”은 “일시적인 것” “사라지는 것” “우연적인 것”, 요컨대 “유행”으로 파악되는데, 보들레르는 이 예술의 “현대성”을 더욱 강조했다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순간”으로까지도 축소될 수 있는 현재적인 시대 의식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작품은 철저하게 생성의 순간에 사로잡혀 있다. 진정한 작품은 현재성 안에서 소진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진부한 통속성의 물결을 멈추게 할 수 있고 정상성을 타파할 수 있다(하버마스).”
반면에 보러는 하버마스의 견해를 비판한다. “보들레르의 변증법적 형상은 결코 ‘현재’의 이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술의 이론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보들레르가 언급한 ‘일시성’이라는 현재 의식은 단지 “아름다운 것에 명상적으로 집중하는 일을 위해 기능적으로만 주어진” 것, 즉 예술미를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보러와 하버마스의 시각은 서로 배치된다.
그렇다면 예술의 영원한 아름다움과 자신이 속한 시대에의 의식을 하나로 파악했던 보들레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대적 삶의 화가>에 제시된 “댄디”를 살피면서 풀어보자. 그 글에서 댄디는 열정과 독립성을 소유한 것처럼 언급되고, “한가롭고” “귀족적”이며, “풍요로운” 듯한, 그럼에도 “차가운 표정과 자세”를 지닌 그는 “대립적이고 혁명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귀족적인 댄디는 이제 “몰락의 시기에 출현하는 영웅성의 최후의 폭발”과도 같으며 “지는 해” “지는 성좌처럼 찬연하지만 열정도 없고 우수에 차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한가로움”은 자본과 노동을 강조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항하는 은유다. “귀족적인” 자세 또한 왕정 체제로의 복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시민사회를 비판하는 정신에 대한 은유다. 또 “권태”는 “멜랑코리”와 동일한 듯 보이지만 사실 다르다. “멜랑콜리는 부르주아 계급이 취한 방식이다. 반면 권태는 결코 부르주아적이 아니다. 권태는 귀족주의자들과 아웃사이더들에게 적합하다(볼프 레페니즈).” 즉 멜랑콜리가 부르주아적이라면 “권태”는 오히려 반부르주아적이다. 그리고 “귀족적”이란 개념은 왕정 체제의 귀족 사회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부르주아 내에서 배척당한, 그 부르주아 자체를 비판하는 자의 인식과 관련된 것이다. “영웅” 또한 신화적 영웅이나 독재적이고 자만심으로 가득 찬 현대적 영웅을 지칭하지 않는다. 영웅은 현대적 삶에서의 아웃사이더, 대도시에서 고독하게 죽어가는 자다. 이처럼 귀족적인 댄디 혹은 현대적 영웅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의해 억압된 자이면서 동시에 그 사회를 비판하는 자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댄디나 귀족 같은 개념은 “미학적 범주”로도 작용한다. 댄디는 시대적 자의식을 지닌 자일 뿐만 아니라 심미적이고 냉철한 예술 작품 자체의 내적 세계를 뜻한다. 예술에 적대적이었던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자신의 내적 세계를 지키려 했던, 그럼으로써 싸늘한 부정의 카테고리에 내맡겨지게 되는 예술 작품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댄디 혹은 댄디즘은 보들레르 문학 자체에 대한 은유다.
일시성과 영원성, 시대적 현실과 절대적 예술미의 동시성은, 그 양자가 수단과 목적,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경우, 분명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불협화음적인 패러독스이기도 하다(아도르노). 이 패러독스로 인해 보들레르 문학은 “참여적 히로이즘”과 “예술적 히로이즘”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문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통과 매혹, 몰락(죽음, 해체)과 쾌락, 전율과 도취 같은 다양한 형태의 양면성을 띤다. 보들레르 문학은 일시성과 영원성의 모순을 지니며, 영원한 예술성뿐만 아니라 죽음, 관능, 부패(저열하고 부조리한 것)와 관련된 시대적 의의를 동시에 포함한다. (단 이 이중적인 모순 짝들을 수단과 목적의 관계 내지 변증법적 종합 등의 시각으로 해석하려 해선 곤란할 것이다.)
5) 알레고리와 전복성
보들레르 문학의 또 다른 주요 특성은 “알레고리”다. 보들레르 문학이 상징의 문학인가, 알레고리의 문학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알레고리에 주목해보자.
벤야민은 상징이 초역사적이고 총체적 특성을, 알레고리는 역사적이고 파편화된 특성을 띤다고 말한 바 있다. 주위의 일상적 사물이 알레고리로 변한다는 것, 이는 알레고리적으로 표현된 사물이 곧 그 사물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음을 뜻한다. 알레고리는 기존 사물과의 연관성을 파괴하고 새 문맥 속으로 전이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알레고리적 의도에 의해 포착된 사물은 삶의 연관성으로부터 분리된다. 즉 그것은 파괴되고 동시에 저장된다. 알레고리는 파편 조각에 붙어 있다. 알레고리는 응결된 불안의 상을 제공한다.” “사물을 그것의 일반적인 연관성으로부터 떼어놓은 것이 보들레르의 매우 독특한 방식이다. 그것은 알레고리적 의도에 내재해 있는 유기체적인 연관성의 파괴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벤야민 <중앙공원>)
보들레르의 알레고리 작품들은 인간 보들레르의 실제 삶과 분리된다. 좁은 의미에서 볼 때 작품에서 묘사된 장면은 실제 일상의 구체적 연관성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에서 나왔지만 그 일상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알레고리가 미적 유희의 세계만을 구축하는 것은 아니다. 알레고리는 자신이 태어난 그 일상적인 세계에 대항하는 의미를 획득한다. “저속한 일상성에서 얻어진 형상들은 서정적 변주를 통해 그 ‘저속한 일상성’에 대항하는 저항 수단으로 변한다(후고 프리드리히).”
그의 알레고리적 작품들은 파리에서 자신이 체험했던 장면이나 일상의 한 장면을 미메시스 차원에서 재현한 것이 아니다. 욀러는 <마주친 여인에게>에 나타난 남녀간의 에로틱하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일상적 문맥이 아니라 정치적 혁명에 대한 보들레르의 알레고리로 파악한다. 보들레르 시는 연애시나 혹은 관능적 탐닉 정도로 읽혀질 수 없다. 그 시를 혁명과 여인의 알레고리 차원에서 해석할 경우 우리는 보들레르 문학이 어떤 점에서 급진적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 알레고리적 방식은 일련의 문학적 전통을 형성하고 있다. 알레고리는 근본적으로 일상적인 연관성의 파괴, 그로 인한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 방식에 그 특징을 둔다. 알레고리는 일종의 불일치의 미학에서 나온 현대적인 방식이며 동시에 상이한 해석을 유발시킨다. 보들레르 문학이 여전히 매력을 간직한 까닭은 그의 텍스트가 특정한 삶의 연관성에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알레고리는 현대의 심미적 사유에서는 부조화, 파편, 불일치, 부정성 외에 다른 방식이 없음을 말해준다. 조화, 재현, 일치 등은 이미 부르주아의 미학적 정치적 방식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6) “사악한” 아이러니
보들레르가 공격했던 시민적(부르주아적) 세계는 조화로운 현실이나 이상을 추구하는 세계였다. 형제애, 인간성, 도덕성 같은 서구 계몽주의의 이념은 체제 유지를 위해 타자를 억압하는 부르주아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부르주아 이념들은 보들레르에겐 추상적이고 허위적인 환상으로 비춰진다. 부르주아적 도덕의 허위에 저항하고자 보들레르는 갑작스러운 단절의 상상력을 들이댄다. 보들레르 문학의 도발성은 기존 도덕의 기대감을 파괴하는 곳에, 또 그 어떤 새로운 도덕이나 긍정의 이념을 설파하지 않는 곳에 위치한다.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서는 “사악한 아이러니”가 작동된다. 이 시집의 시편들에는 서술된 것과 서술하는 자 사이에 차이 내지 간극이 놓여있다. 따라서 독자는 씌어진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불쾌한 유리장수>를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 화자는 가난한 유리 장수를 향해 화분을 내던진다. 그로 인해 유리 장수가 가진 유리 제품은 다 깨지고 만다. 이 화자의 행위를 두고 “도덕적 패착성” 혹은 “악마 같은” 행동으로 평가해도 좋을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이 작품은 보들레르 특유의 아이러니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정치적 미학적 텍스트이다.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아이러니는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이것이 보들레르 문학의 특성이다. 유리 장수가 가지고 있던 유리 제품들이 “깨지는 소리”는 “벼락을 당한 수정 궁정이 폭발하는 소리”로 비유된다. “수정궁”은 “새로운 파리라는 소위 아름다운 세계의 훌륭한 건축물” 또는 당시의 “화려한 거리나 혹은 국제박람회에서 경탄을 불러일으켰던 소비의 성전”이다(욀러). 따라서 이 시에서 아이러니의 공격 대상은 거대한 자본과 현란한 소비 사회다. 화자는 유리 장수를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유리”, 즉 “수정궁”에 빌붙어 사는 “불쾌한” 현대인으로 여긴 것이다. 즉 이 시는 “파리를 미화시키거나 혹은 자본가들에게 삶을 달콤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미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삶을 아름답게! 삶을 아름답게!”라는 화자의 외침은 삶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당시의 문학 경향에 대한 비판적인 아이러니다. 또한 유리가 깨지는 소리는 자본과 소비에 끌려가는 현실을 파괴하려는 정치성과 동시에 삶의 심미화를 거부하는 파괴적인 문학성 자체를 뜻한다. 보들레르 텍스트는 일종의 정치적 미학적 “실천”인 셈이다.
<가난뱅이들의 눈>에서 화려한 카페 안에서 연인과 함께 있던 화자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카페 밖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느끼고 자신의 연인도 동일한 연민의 감정을 갖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연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충격적이며 독설에 가깝다. 이를 두고 보들레르가 인류애적인 남성과 편협한 여성 같은 이분법을 설파한 것으로 단순 오인해선 곤란하다. 이 작품은 “긍정”과 “이성적인 교환”의 이데올로기를 “예기치 않게” 부정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철학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언어와 이성 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했던 계몽주의적 사유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심을 주고받는 의사소통에서조차 성공하지 못하는 남녀를 통해 인류 전체의 이성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를 부르짖는 행위가 얼마나 공허하고 허위인지를 아이러니컬하게 암시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보들레르 텍스트는 소위 추상적인 도덕과 인륜성을 내세운 형이상학적 사유에 비판적인 아이러니의 화살을 당긴다.
<파리의 우울> 속의 또 다른 시를 살펴보자. <위조 화폐>에는 “사악한 유머”가 나온다. 화자는 자신의 친구가 거지에게 돈을 주는 행동에 흐뭇해한다. 그러자 그 친구는 놀랍게도 거지에게 “위조 화폐”를 주었다고 말한다. 화자는 친구가 거지에게 놀라움 자체를 주려 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자비심과 좋은 거래를 꾀하려 했다”는 것, 즉 “자비로운 인간이라는 면허장을 거저 얻으려 했다”는 것을 알고는 분개하고 만다. 여기서 이 친구의 행위를 놓고 어러 저러한 의미를 끄집어낼 수 있겠다. 하지만 거지에게 위조 화폐를 주었다는 친구의 말은 보들레르 특유의 수법, 즉 일상의 기대를 부수는 문학적 언술 행위이다. 그런데 친구의 말은 진짜 화폐를 주고 천연덕스럽게 내던진 제스처일 수도 있다. 실제로 화자는 친구의 의도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한다. 이 같은 위조 화폐와 진짜 화폐의 공존 가능성은 텍스트의 특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데리다). “글(ecriture)”이란, 데리다가 지적하듯,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 서술자와 서술된 것의 불일치, 실제와 의미의 불일치를 바탕으로 “유희의 유희”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동시에 “독서의 현기증”(폴 드 만)을 야기한다. 데리다는 “위조 화폐”를 허위 내지 픽션의 의미를 지닌 텍스트 혹은 “문학” 자체의 특성을 가리키는 “이중적인 언어 기호”로 해석한다. “바로 ‘그 자체 문학으로서 이야기는 (아마도) 위조 화폐, 즉 픽션이다’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데리다의 해석은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위조 화폐가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양하게 추측하는 화자의 행위는 곧 픽션과도 같은 텍스트에 대해 다양한 의미를 모색해보는 우리의 독서 행위와 인접한 데가 있다.
실제로 보들레르는 독자가 능동적인 힘으로 자신의 텍스트에 다가오기를 기다린 작가였다(욀러). 또 다른 산문시 <가난뱅이를 때려라!>의 위악적 장면은 독자(비렁뱅이 노인)와 텍스트(혹은 그 생산자)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암시해준다. 텍스트로부터 실컷 두들겨(아이러니, 위트 등)맞은 독자가 불현듯 그 작가의 텍스트를 다시금 두들겨줄 수 있을 때 “당신은 나와 동등하오”에 합당한 새로운 동등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7) 새로운 독서를 기다리며
정리해보자. 독일에서의 보들레르 연구 동향은 관능적 탐닉과 도취에 집중한 듯한 보들레르가 실은 어떤 이데올로기 비판을 행사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벤야민, 욀러). 이들은 일시성과 영원성, 시대적 현실과 영원한 예술미가 모순으로 어우러지는 보들레르 시를 지나치게 수단(영원성)과 목적(일시성)의 관계로 읽어냈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럼에도 보들레르 문학의 새로운 의미 지평을 열어주었단 점에서 진일보한 시각으로 평가된다.
이와 달리 최근에는 보들레르 문학의 미학적이고 유희적인 측면을 읽어내려는 시각들(보러, 데리다)이 부각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순수성, 절대성, 자율성’만을 보들레르 문학의 핵심으로 파악했던 전통적 논의(프루스트, 발레리)로 회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의 시각은 보들레르의 또 다른 잠재력을 조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