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소련은 41년 6월 이후 일본과의 전쟁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초기의 대손해를 견디어내며 두 전선에서 (우리가 동부라고 부르는 서부전선과 극동)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실 사항이지요.
반면, 음..님의 지적과 같이 일본은 소련과의 무력충돌 (노몬한) 이후 자신감을 상실하였고, 소련 육군의 전투능력과 병기의 일본에 대한 우위를 인정하였으므로, 소련을 상대로 한 전쟁을 일으킬 의지가 없었습니다. 특히 소련이 중국공산당을 적극 지원하지도 않고, 중국 국민당과 대일본전선을 형성하지도 않았으므로, 잠재적 적국이기는하나, 적대행위에의 의지가 없는 소련을 상대로 불가침협정을 맺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형편없는 대 핀란드전의 소련군과는 달리 극동군은 소련의 정예 - 투하체프스키 원수가 길러낸 - 입니다.)
일본에게, 남방진출을 정책으로 확립하기 이전에 이미 소련과의 무력충돌은 외교적으로나 전쟁에 투입될 자원면에서나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음... 님이 인용하신 글과는 달리, 제 기억으로는 일본 내에서 대소전을 기획한 것은 소수 그룹에 의한 것이었고, 진지한 국가정책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관동군의 경우, 초기에는 (적어도 일본의 입장에서는) 종이호랑이가 아니었습니다. 전차사단도 있었고, 소련과 재현될지도 모를 무력충돌에 대비한 최정예의 육군부대를 41년 당시 투입하고 있었고, 이 병력들이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경험없고 새로이 편성된 부대들이 그 일부만을 채워나가자 45년의 시점에는 넓은 만주 지역을 방어하기에는 기동력도, 화력도 불충분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음... 님의 견해대로 일본이 소련을 상대로 육상전을 펼쳤다면 그것은 사실 절반 쯤 자살행위이고, 영,미와의 외교관계 재정립을 위해 (석유가 필요함.) 중국에서 손을 떼어야하므로 중일 간의 전쟁에서 중국의 외교적 승리를 안겨주는 셈이 됩니다.
만주의 정예 제2전차사단은 44년 필리핀으로 이동했습니다. (이후의 전차병력이 무엇이 남아있었는지는 책을 뒤져야겠는데, 사무실이므로 불가능하군요.) 하지만, 일본이 아직도 자랑하는, 27전차연대의 쿠릴열도에서의 8월20일까지의 전투가 잘 알려진 것으로보아 관동군의 전차부대는 있었겠지만,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조용진 님은 극동의 소련군이 빠져나가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41년 겨울 서부전선 (독일의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여 반격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투하체프스키가 만들어내고, 39년 쥬코프가 노몬한에서 일본군을 맛이 가게 만든 '시베리아'의 병사들입니다. 관동군을 격파할 당시의 주공은 유럽전선에서 이동해온 부대들로서 현대적으로 편제를 바꾸고 장비를 갱신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부대들이었지, 이전의 주둔병은 아닙니다.
2. 소련의 대일 참전과 미국의 태도;
소련의 대일 참전은 이미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소련은 당시 베를린 코 앞으로 진격중이었고, 이미 유럽의 전쟁은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소련을 태평양으로 끌어들이지 않은 것은, 그렇게 못한 탓도 있지만, 미국은 41년 12월 이전에 비공식적으로 이미 해군의 경우 독일과 교전상태에 있었고, 조용진 님의 지적대로 진주만 이후 전략을 유럽 우선으로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럽에 우선권을 둔 영국의 전략과 일치하고, 독일을 패망시키는데 소련의 인적자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음... 님의 견해와는 달리 미국이 소련을 싫어하건, 좋아하건, 영국에 비해 반공에 대한 확고한 개념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 1차대전 이후의 광풍을 맛본 유럽과, 1차대전이 빚어낸 공업화의 가속에 취한, 그리고 공황을 슬기롭게 극복한 미국은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소련에 대한 불신은 있었지만, 미국인에게 남아있는 것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국민을 선동하여 고취시킨 1차대전 당시의 반독정신 - 당시 독일식 지명은 영국, 프랑스식으로 바뀌었음. - 이지, 반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대한 인식은 크지 않았던 것 같고, 반공이라는 것은 2차대전 이후의 국제정세가 빚어낸 미국의 대내외적 입장으로 보입니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 많은 분의 지적대로 미국은 이미 일본의 강렬한 전투의지에 넋을 잃었고, 본토에 가까와질수록 증대되는 손해에 망연자실하고있었습니다. 미군은 군단급 이상의 대규모 인명손실을 입어본 경험이 거의 없고 (기껏해야 초기 필리핀 정도), 장군의 전사도 거의 없었으므로 오끼나와였던가에서의 해병사단장의 전사도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독일군의 영,미군에 대한 평가는 영국군은 아주 고전적인 전투를 수행하지만 끝까지 공격하고 버틴다는 것이고, 미국군은 조금은 세련되었지만 약간의 반격만 가해도 놀라서는 퇴각해버리고는 추가의 폭격과 포격을 멍하니 기다린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태평양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미군으로서는 본토에서의 육상전투란 끔찍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의 또 다른 문제는 2차대전 당시 국가 간의 전투수행능력인데, 최근의 연구결과들에 의하면 독일을 상대로 한 44년 영,미군의 것과 소련군의 전투를 비교해보면, 압도적 물량에도 불구하고 영,미군의 전투능력이 소련의 것에 비해 크게 낫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본토에서 예상되는 접근전의 능력과 만주에서 예상되는 기동전에 있어서 극동에 투입된 소련의 정예부대들은 45년 당시 미군을 능가했다고 보는 쪽이 옳을 것입니다.
무서운 독일군을 격파한 소련. 베를린 진공이 가능했지만 인적손실을 두려워했던 미국. 결국 미국으로서는 소련군이 흘린 피로 적국을 말살하는 쪽이 남는 장사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정도가 Nibelung님의 입장이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원폭이 없었다면 일본의 북부와 한반도는 당연히 소련에 의해 '해방'되었겠지요.
3. 미국의 번영과 대영제국의 몰락;
미국은 이미 1차대전이 끝나면서 세계 최강의 공업국이 됩니다. 여기에 더해 소련은 스탈린의 무자비한 정책에 의해 농업중심의 빈국에서 자주적인 공업국으로의 탈바꿈을 30년대에 어느 정도 이루게됩니다. 이 두 국가에 비해 영국은 이미 1차대전의 대손실을 메꾸기에 역부족이었고, 제국은 공업능력에 있어 히틀러의 독일에게조차 뒤지기 시작했으며, 식민지에서의 지배능력도 서서히 잠식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강대국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타 식민지역에서 창출된 부를 본국에서 소비하면서였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해상운송의 안전이 필요했고, 따라서 막강한 해군력이 필요했습니다. 즉, 영국은 근대적인 자본주의국가로 가장 먼저 부상했지만, 제국주의적 정책에 안주하면서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조용진 님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지요.
그러나, 인도의 경우 참전에 의해 독립을 보장받은 것은 이미 1차대전 당시 있었던 일입니다 (물론 영국은 지킬 마음 없었음.). 2차대전 당시에는 초기 영국 본토군의 패배를 바라본 인도인에게 그들의 군대가 44년 이후 일본군을 압도하면서 갖게되는 인종적 자신감이 중요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구형의 식민 이데올로기는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이지요. 어차피 한 번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므로 인도인의 참전이 독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던 셈이고, 지식인층에서의 독립에 대한 관념이 2차대전에서의 자신감으로 인해 일반인으로까지 확산된 결과가 48년의 독립이라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영국에 비해 미국은 2차대전 이전에 이미 산업적으로 세계 모든 나라를 압도했고, 군사 강대국이 그 다음 생각할 수 있는 수순이었습니다. 그리고, 음...님의 지적대로 세계에서의 역할에 대한 미국과 영국 간의 세력권 구획은 누가 보아도 잘 이루어져있었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대영제국의 해체를 유도할 이유는 전혀 없고 - 실상 이미 경쟁상대가 되지 않기 시작했음. - 그들은 또 다른 방식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적용해나감으로써 이 분야에서도 전쟁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4. 발칸이냐 서북유럽이냐;
루즈벨트가 처칠의 전략을 따르지 않은 것 - 전후 유럽 내에서의 우위 선점을 위하여 발칸 침공을 하지 않은 것은 처칠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발칸으로의 침공은 1차대전과의 상황이 다르므로 승패 자체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을지 의문입니다.
조용진 님이 말씀하신 처칠의 1차대전 발칸전략의 주장은 전쟁 말기에 실제 이루어졌던 것을 지칭하신 것이 아니고, 투입전력이 많지 않아 실패한 갈리폴리 등의 차라리 양동작전에 가까운 것들에 대한 것 같습니다 (이 경우는 불가리아로의 진격과 터키를 제압하는 두 가지 효과가 있을 수 있었음.).
1차대전 말기 허약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의표를 찌른 성공적인 발칸 작전에 비해, 2차대전의 상황은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중요한 축이 없는 상황이므로 독일로서는 발칸을 상실하더라도 전략적으로 커다란 손실은 아니며, 44년 여름 결과적으로는 소련에 의해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추축국 진영에서 떨어져나가므로 독일과의 전쟁으로 보자면 오히려 전선을 축소시켜 독일에게 이득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특히 산악지형이 많은 곳에서는 이미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상 연합군에게 결코 유리한 전투 - 물량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 가 보장된다고 보기 어렵지요.
즉, 정치적으로는 아마 발칸으로의 상륙이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서방으로의 항복과 그리스의 내정 안정 - 공산주의 세력의 조기 약화 -, 나아가서는 어차피 독일에 의해 진압될 헝가리의 서방으로의 항복까지 이어질 수는 있었겠지만, 전쟁의 흐름에 있어서는 득이 되는 작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상에 의해 처칠은 당연히 남동유럽에서의 자국의 영향을 위해 발칸 상륙을 선호하고, 독일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에 집착한 루즈벨트로서는 소련의 요구대로 프랑스에 상륙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루즈벨트는 빠른 승리를 원했고, 처칠은 전후를 보기는 했습니다.
5. 극동 정세가 바뀌었을 가능성은?;
결국 현재 극동의 정치상황은 2차대전의 산물이고, 그것은 태평양전쟁의 주역이었던 미국과 일본 간의 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중국과 영국은 이미 극동지역에서의 적극적인 발언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미국만이 모든 것을 쟁취할 수 있었지만, 44년 필리핀 이후 보여준 일본인들의 이해하기 힘든 불굴의 정신 - 음... 님의 지적대로 - , 종국에는 미군으로 하여금 존경심마저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그들만의 정신세계가 가져다준 자살적인 전투가 미국으로 하여금 소련의 지원을 요구하게 만들었고, 소련은 독일과의 전투에서 단련된 기동전으로 만주를 휩쓸었습니다.
원폭이 없었다면 미군이 상륙 후 느리게 진격하는 동안 소련은 한반도를 유린하고, 쿠릴열도를 점령한 후에는 홋카이도로 진격했을텐데, 혹독한 전투에 이미 단련이된지라 미군보다 훨씬 쉽게 일본을 제압했을 것입니다.
극동에서의 강자로서의 소련의 복귀, 그것은 결국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결론짓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