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에 피씨방에 뛰듯 도착하면, 손님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컴퓨터도 잘 모르는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말도 참 많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껐다 키면 해결되는 일입니다.
손님으로 피씨방에 들렀을 땐 몰랐는데,
바닥 쓸고 닦으랴, 손님 나가실 때마다 재떨이며 먹은 거며 치우랴, 손님 들어올 때마다 야쿠르트 나르느라, 네 시간 넘게 게임 하신 손님마다 남자분은 캔커피 여자분은 델몬트쥬스 서비스 나가랴, 공짜 커피 자판기 커피 채우고 컵 채우랴, 카드 바코드 찍느랴, 머리로 돈 계산하랴, 갈구는 손님 깎는 손님 처리하랴, 앳되신 분들 민증 확인하랴, 사가시는 물건 돈 계산해드리고, 실수한 거 있으면 사장님께 혼나면서도 손님이 시키는 건 시키는대로 하고, 돈 안 틀리게 정산해서 적고, 물건들 창고에서 날라다가 유통기한 지난 게 먼저 팔리게 구석에서부터 채우랴, 재떨이 씻어서 휴지 깔고 물 뿌리랴, 제어 안되는 컴퓨터들 끄느라, 서비스 나갈 야쿠르트에 빨대 꽂느라, 빨대 뜯어서 꽂기 쉽게 나두느라, 나무젓가락 손님들 집어가시기 쉽게 하나하나 뜯어놓느라, 손님분들 사발면 물 넣어서 가져다 드리느라, 월드오브워크래프트며 카운터스트라이크며 되는 자리 안 되는 자리 구분해드려야 하고, 금연석에서 담배 피우는 분께 피우지 말라고 하랴 피씨방 알바 참 바쁩니다.
도저히 손님 많이 계실 땐 머리 하나 가지고 일 못하겠습니다. 수첩에다 해야할 일을 적어두던가 해야지, 일 하나 하고 나서 다음에 해야할 일을 까먹습니다. 새벽 일 배고프고 졸린데 밥도 안 사주고 너무 부려먹습니다.
2800원 시급 받고 이런 일 하는 것도 경험 쌓아서 더 좋은 알바 할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믄 이런 거에 익숙해져야죠.
그래도 가출을 하니까, 쓰레기 종량제의 원리도 알게 되구, 돈 계산도 좀 빨라지고,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고, 수세식 화장실도 쓰고, 매일 샤워도 할 수 있고, 나름대로 저 하고 싶은 거 계획도 세울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제 밥그릇 하나 설겆이하고, 제 빨래만 돌려서 널고, 제 공간만 저 치우고싶은 만큼 치우고 저 정리하고싶은 만큼 정리하면 되니까 너무 좋습니다. 뗄감 가져다가 허리 아플 때까지 쪼개서 철난로에 넣고, 그 나뭇조각들 20분 안에 다 타서 없어질 때쯤 또 넣는 방식의 난방 안 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개밥 비벼서 따뜻하게 데워서 추운 겨울날 비에 젖은 쓰레빠 신고 개 주러 갈 일 없어서 너무 좋습니다. 올 봄, 올 여름엔 밭농사 지을 일 없겠지요. 감자, 쪽파, 부추 볼 일 없어서 느무느무 좋습니다. 나 잘될라고 글 연습하고, 그림 연습하고, 노래 연습하고,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맨날 '부엌 옆에 매일 세수하기 위해 장판을 잘라 시멘트를 드러내놓고 물 내려갈 구멍 뚫어놓은 곳'에서 어머니랑 여동생 바지 내리고 세숫대야로 주요 부위만 가린채 오줌 누는 꼴 볼 일 없어서 참 좋습니다. 허리 굽히고 찬 물로, 혹은 나뭇재가 둥둥 떠다니는 약간의 뜨건 물로 머리 감을 일 없어서 좋습니다. 이제 돈만 좀 벌면, 저도 학원가 거리의 보통 스무살처럼 입고 다녀도 '비싼 거 샀다.'는 말 들을 일 없으니 졸라 좋습니다. 멋부리는 거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라도 하고 다닐려고 해도, '여자 생겼냐.'는 말 들을 리 없으니 너무 좋습니다. 근육 사라진, 늙어서 힘 다 빠지신 우리 아버지 제 학비 때문에 노가다하시느라 힘드시다고 주물러 달라시는 거 가슴 아프게 주물러드릴 일 없으니 너무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제 목표로 한 대학 똑바로 가서 장학금도 받고 공부해야' 할 일, 그렇게 부담스런 일 하지 않아도 되니 너무너무너무 좋아 죽겠습니다. 여동생, 저,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넷이서 찰싹 달라붙어서 좁은 전기 장판 위에서 떨어질까봐 불편하게 잘 일 없으니 진짜 좋아서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이미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근데, 의리 때문에 제 친구에게서까지 가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녀석이 너무 아파합니다. 제가 버리면 가족이야 오히려 편하지만, 녀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명 겨우 누울 고시원 방에 녀석을 재우면서, 그 코고는 소리가 옆방까지 진동하는 것도 다 들어주면서, 그 아픈 이야기 다 들어주면서, 같이 있어주면서, 같이 걸어 다니면서, 장난스런 주먹은 맞아주면서, 로또에 녀석의 스물 한 살 인생의 마지막 기대를 같이 걸면서, 녀석이 종합병원같은 몸을 이끌고 독립문에 있는 인력소에 5만원 일당의 일이라도 있길 기대하면서 나가는 데 '일이 있을 거'라고 확신 없는 말을 뱉으면서, 그 약한 녀석이 살리고자 하는 그 녀석의 여자친구 인생도 제대로 살리길 바라면서, 그나마 웃음을 쥐어줄 수 있길 바라면서도, 내가 입는 피해에 가슴 아파하면서, 그 때문에 녀석을 아프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짜아식, 겉모습은 탱크같으면서 약해 빠진 소리는. 설마 네 인생이 아무리 개같기로서니, 그 누구의 저주를 받았기로서니, 이 정도면 받을만큼 받았다. 나도 네 인생 때문에 토할 것 같다. 그러니까 제발 네 인생 개라. 개같이라도 개어서 햇볕 쨍쨍해라. 네 인생 개같다. 그래 네 인생 개갔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제발 잘 되라. 주전자로 쪼르르 운동장에 물 뿌리면 햇볕에 순식간에 증발해버리는 그런 날씨, 네 인생 날씨에 딱 한 글자 '갬'을 써놓거라. 네 인생 개갔다. 그러면 내 인생도 개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