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일발(一衣一鉢)
一衣又一鉢 出入趙州門 踏盡千山雪 歸來臥白雲
일의우일발 출입조주문 답진천산설 귀래와백운
<벽송지엄(碧松智嚴)>
한 벌의 옷과 한 벌의 발우로
조주의 문을 드나들었네.
산에 산에 쌓인 눈을 다 밟은 뒤에
이제는 돌아와 흰 구름 위에 누워있다네.
해설 ; 이 글의 주인공인 벽송 지엄(碧松智嚴;1464-1534)스님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속성은 송씨다. 법명은 지엄이며 당호는 벽송이다. 어느 날 어머니 꿈에 한 인도스님이 예를 올리고 자고 간 뒤에 잉태하여 낳았다고 한다.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으로 들어가 조징(祖澄)대사 밑에서 출가하고 직지사에서 벽계정심(碧溪淨心)선사의 법을 이었다.
조선 중기의 스님들의 생활 일면과 전형적인 세속을 등지고 오로지 화두 하나에만 매달리며 살아 온 수행자의 삶을 엿보는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출가 수행자의 정형이기도 하다.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하다.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모름지기 이와 같아야 한다. 생활이나 마음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절제와 깨끗함의 아름다운 선의(禪意)가 물씬 묻어난다. 간결하고 소박하고 고고하고 유현하다. 그야말로 선천선지(禪天禪地)에 선산선수(禪山禪水)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로지 옷 한 벌 발우 하나뿐이다. 마음에 담아 둔 것이라곤 조주(趙州,778-897)스님의 무(無)자 화두 하나뿐이다. 이 화두 하나로 얼마나 여러 번 조주스님의 문턱을 드나들었던가.
출가수행자가 행자 시절에 맨 처음 배우는 자경문(自警文)이라는 글 십 조목 중 그 여덟 번째에 이런 말이 있다.
“세속과 서로 사귀고 통하여 다른 수행자들로 하여금 미움을 사지 말라. 마음 가운데 애착을 떠난 것을 사문(沙門)이라 하고 세속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출가(出家)라 한다.(중략) 인정이 농후하면 도를 닦는 마음이 멀어지나니 인정을 차갑게 하여 길이 돌아보지 말라. 만일 출가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자 할진대 모름지기 명산을 향해 깊고 미묘한 진리를 궁구하되 한 벌의 옷과 한 벌의 발우로 인정을 끊어버리고 주리고 배부름에 무심하면 도가 저절로 높아지리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출가 수행자의 본색이다. 그래서 한국의 선불교를 중흥한 경허(鏡虛,1849-1912)선사는 이러한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서 평생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독송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외적 모습만 충실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니다. 글의 후반에 “산에 산에 쌓인 눈을 다 밟은 뒤에 이제는 돌아와 흰 구름 위에 누워있다네.”라고 하였다. 얼마나 발이 시리고 무릎이 아팠던가. 피나는 난행고행(難行苦行)의 용맹정진을 뜻하는 말이다. 용맹정진을 통해서 무수겁동안 쌓고 쌓은 온갖 번뇌와 인간적 삶들을 일일이 헤집으며 이제는 다 날려버린 것이다. 더 이상 일이 없다. 비로소 두 다리를 뻗고 한잠 늘어지게 잠을 자도 좋다. 그것도 흰 구름위에서 잠을 자니 얼마나 가볍고 편안한가. 여름 날 흰 구름은 쳐다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다. 구름위로 올라가서 손오공처럼 두둥실 어디론가 떠가는 착각을 한다. 그런데 벽송스님은 실제로 구름위에 누워서 잠을 자고 계시다.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의미도 있으려니와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의가 그 핵심이다. 달리 표현하면 대사각활(大死却活)을 나타낸 말이다. 선불교에서는 이 죽음이라는 말을 높이 산다. 죽더라도 아주 크게 죽어야 한다. 크게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 크게 죽은 뒤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본다. 그것을 부처의 삶이라고도 하고 보살의 삶이라고도 하고 도인의 삶이라고도 한다. 기존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던져버리고 당당하게 모든 인생을 다 바쳐 진정 최고의 가치를 위하여 스스로의 의지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연소시키며 회향할 줄 아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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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잘 가져갑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회향하는 삶~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