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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의 저의 삶은 한마디로 놀라움과 신비와 기적으로 점철된 삶이요 사역 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 이후 삶이 비참했을 때를 지나며 희망이 보이지 않던 어린 시절 미래의 꿈을 꿀 수조차 없었던 혼란과 절망기를 지나다 19세에 서울의 성결교회의 부흥집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은 저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새로운 차원의 인생으로 도약하는 사건 이었고 그 이후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삶의 의미요 목적과 목표였고 그러다보니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며 모든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유용하고 보람있게 사는 길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선포하며 저 자신이 체험한 은혜와 축복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길이요 그 길은 곧 목사가 되는 것임을 결론짖고 신학대학을 지원하게됐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한국이 너무 가난한 때요 먹구사는 일 자체가 힘든 때라 저는 헌신의 결정을 하는 순간부터 나의 지혜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과업에 부디치며 고뇌의 길 이었는데,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별로 눈에 띄지 않고 무력감 절망감이요 그러면서 저는 사도 바울이 내가 약할 그때가 오히려 강하다는 고백을 상기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었고 늘 기도하는 삶 밖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형편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적으로 매달려 기도 생활을 하는데, 그때 성령께서 강력하게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고 잠시도 기도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간절함으로 깨어있는 전 시간을 하나님만 바라보고 틈만 있으면 완전히 맡기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나의 삶 전체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계신것을 확신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목사가 되어도 많은 공부를 하고 미국 유학을하고 실력과 영력을 함께 갖춘 목회 자가 되어야겠다는 결단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파고들 뿐 아니라 영어를 마스터 해야 하는 일은 나의 필수 과목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만큼 영어에 총력을 기울이며 신학 대학의 훈련이 출범했습니다. 그런데 서울 신학 대학 입학후 3개월 만에 소집 영장을받았습니다. 논산 훈련소로 달려가면서 나의 주머니에는 두개의 책 포켓 용 영어 성경과 영어 사전 이었습니다. 군대 생활 3년을 그냥 낭비하기 보다는 집중해서 성경과 영어를 공부 할 시간은 없겠지만, 군대 생활의 얽매임 속에도 때때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영어로 익히고 사전을 펴 영어 단어를 암기하며 신학교 교육과 미국 유학의 꿈을 실현 할 계기로 삼는 것이 논산 훈련소를 향하는 저의 계획 이었습니다. 논산 훈련소와 영천의헌병학교를 마치고 서울 남산 기슭의 필동 수도 경비 사령부 헌병 대에서 군인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영어 성경과 사전 중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읽고 외우곤 했고, 그러던 중 한 번은 필동의 수도 경비 사 주위 보초를 서며 영어 성경을 꺼내어 읽으면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순찰을 돌던 헌병 장교에게 발각이 되면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경비사 52 중대 헌병대 뿐만 아니라 전 부대에 윤 일병은 신학교를 다녔고 영어를 잘하는 사병으로 유명 해 져 가던 중 하루는 52 헌병 중대 장이 나를 호출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무슨 추가 처벌 사항이라도 있나 하여 긴장하며 중대 장 실로 들어 갔는데 의외로 중대 장은 너무나 친절하게 나를 대하며 자기가 헌병 장교로써 미국의 헌병 학교에 가서 훈련을 받을 계획을 얘기하며 나를 자기의 영어 선생이 되어 달라는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때의 나의 영어 실력은 바닥 이었고 단지 영어를 공부하고 싶은 열정 만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헌병 대장은 내가 영어 박사라도 된 것으로 취급하며 나를 영어 교사로 발탁을 하고 모든 헌병의 보직에서 나를 면제시키고 영어 선생 이란 새로운 보직을 나에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때 나는 “혹시 중대 장의 영어 실력이 나보다 나으면 어떡하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테스트를 해 보니 그는 완전 바닥 이고 나보다 훨씬 밑 자리여서 자신있게 그의 영어 선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나의 군대 보직이다 보니 나는 매일 영어를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러면서 2년 반 동안 나는 영어를 거의 완공 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계산이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초월적인 인도요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나의 미국 유학 생활 10년 간 Talbot Seminary탈봇 신학교, Claremont School of Theology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3개의 학위를 얻고 미국 호주 캐나다 3개 국에서 각 십 여년 씩의 이민 사역의 밑거름이 된 영어와 사역의 훈련 이었습니다. Amazing Grace 였습니다.
31개월 간의 군대 생활 중 나의 아버님께서는 중풍으로 누워 계시고 가세는 완전히 기울어져 먹고 살 길이 막연한 때에 제대를 하고 귀가 했을 때 나의 유일의 꿈은 신학교로 복귀하여 목사가 될 훈련을 계속 하는 것이었지만 먹고 살기조차 힘들고 가난한 형편에서 그것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나는 예수를 믿고 부터는 불가능한 상황이 부디쳐 올 때마다 이상하게 더욱 내적으로 솟구치는 힘과 용기가 있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하는 한 염려할 필요가 없고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고 때로 나의 바램과는 달리 일이 전개 될 때에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고 승리케 할 것이라는 확신은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를 하는 날부터 매일 새벽마다 교회로 달려가 기도를 하는데 이상하게도 더욱더 기도를 하고 싶은 충동이 속에서 끓어 오르며 매일 밤 자정이 지나 한 시 경 교회로 달려갑니다. 매일 밤을 기도하며 얍복 강의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을 하는데 나는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달콤한 일 인지를 맛 보게 되었고 새벽 5시가 되어 새벽 기도 가 시작되면 참여하고 끝나면 계속 기도하다 보면 7시가 넘어 교회를 걸어 나오는데 그때보다도 하루가 상쾌하고 희망에 넘치는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까지 기도를 마치고 교회를 나오려는데 여 전도사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 나에게 닥아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보며 문득 나는 기도의 응답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은 나에게 “윤 선생님, 혹시 무슨 일 자리라도 구하시는것 아니세요?” 물으신다. “ 네, 저는 저의 미래를 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위해 매일 기도 드리고 있어요.” 전도 사님이 말을 이으신다. “어느 명사의 집으로 부터 부탁을 받았는데 ‘혹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으세요?”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던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기도 밖에 없었고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내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신비로운 인도였습니다. 명사의 집의 초등하교 4학년 짜리아들을 가르치기 시작 하는데 너무 공부를 못하여 집안의 두통 거리가 된 아들이며 가정교사를 여러 번 기용하여 가르쳐보았는데 별로 다 신통치 못하여 고민하던 중 교회에서 인내력을 가지고 성실히 지도할 수 있는 선생님을 구하던 가정 이었습니다. 가장은 이해랑 선생이며 당시 예총 회장 직을 맡고 있던 명사였으며 아들의 이름 석주 였는데 나는 이 석두임을 즉시 알 수있 었고 놀라웁게도 제가 맡아서 가르치며 아이가 안정되고 공부를 제대로 할 수있게 만들었습니다. 정말힘든 과업이었지만 매일 적어도 대 여섯시간 이상을 기도하며 모든 일과를 수행하다보니 가정교사직 까지도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그 집의 부모님들은 골치거리 아들을 잘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 준다고 나에게 약정 된 봉급을 몇 배로 올려 지불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기대 이외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많은 돈을 받으면서 새로운 희망이 용 솟음 쳐 오르고 잘하면 집안 살림을 도와 드릴 뿐 아니라 신학교로 복학하는 일이 가능 해졌습니다. Amazing Grace.
서울 신학 대학 복학;
기도 응답으로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가 마련되자 신학교 복교를 하고 공부하는데 그때처럼 믿음의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운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계산과 상상을 초월해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푹 젖어 공부하며 목사가 될 준비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끝이 없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신학 대학 교과목에도 매일 많은 영어 클래스가 있었습니다. 3-40명의 Classmate들 모두가 영어를 하느라고 진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 수준의 영어는 나에게는 너무나 기초적인 것이라 클래스를 위해 공부를 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많은 동료 학생들을 도와주기가 너무 바뻤습니다. 쉬게 좋은 성적을 올릴 뿐 아니라 모든 신학 생들이 영어 공부 하느라 고투할때 나는 모든 다른 과목에 많은 시간을 집중하다 보니 좋은 성적을 올릴 수가 있었고 학점이 평균 90점 이상인 학생은 수업료 면제의 특전이 있었는데 학년을 마치면서 “귀 학생은 평점이 90이상이라 학비 면제”라는 판정을 받게 도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시 23편의 약속대로 나를 끊임 없이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해 주심에 감사하며 신학 훈련을 마쳐 갈 무렵 이었습니다. 이제 신학 대학을 마치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할것인가를 생각하며 미국 유학의 꿈을 이루어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여권을 받는 일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 였고 유학을 하려면 먼저 문교 부에서 시행하는 외국 유학 자격 시험에 합격을 해야 했습니다. 과목은 한국 역사와 영어였고 미국 대학에서 요구하는
TOEFL과Michigan Test 였습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시험을 합격 할 수가 있었고 오늘 한국 교회 사회에 너무 널리 알려지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탈봇 신학교 Talbot Seminary the
Graduate School of Biola University, California에서 입학 허가서 I-20 Form을 받아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Amazing Grace. 그러나 유학은 꿈의 실현이 아닌 새로운 단계의 Challenge였고 더욱 더 치열한 공룡과의 전투였습니다. 입학허가는 받았지만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표 값이 없는데 어떻게 미국 대학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합니까? 그리고 앓고 계신 부친과 어머니와 동생들을 그냥 두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유학이 아니라 도망으로 느껴지곤 했습니다. Dilemma after Dilemma after Dilemma그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뿐 이었습니다. I was hooked on Prayer. 나의 믿음 생활의 패턴은 끊임 없는 기도 그리고 나의 전 의식을 기도 화하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기도만 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의사인 매형과 함께 미국 Florida주에 살고 있던 누님이 비행 기값을 꾸어 주어California에 도착했습니다. 정해진 입학 날자를 훨씬 지나 도착하다 보니 그 다음 학기에 등록 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몇 개월 간의 여유있는 시간을 가지게 됐습니다. 유학생 비자로 입국을 했으니까 직업을 구할 수도 없고 학비 마련을 위해 할 수 있던 일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Talbot신학교 안의 기숙사에 살면서 매일 Campus안의 Rose Sharon Chapel이란 아름다운 기도실이 있었는데 나의 일과는 매일 기도 실로의 출근 이었습니다. 몇 시간 씩을 하나님과 교통하며 나의 삶을 나누는데 하루는 Talbot신학교 교무실에서 저를 만나자는 쪽지를 전달 받았습니다. 학교에서는 Layne Founndation이란 장학기관에 저를 추천하여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 해주었습니다. 이제 학비 걱정 없이 맘 놓고 맘껏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4년 걸려 미국 신학교의 정규 목사 코스인 Master of Divinity 학위를 끝 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미국 공부에 자신감도 생기고 더욱 재미가 있어 그 다음 단계의 학위 Master of Theology 코스에 등록을하고 Layne Foundation에 장학금을 계속 지불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문의 했더니 계속 승락이 되었습니다. 2-3년 더 걸려서 Talbot에서 두번 째의 학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공부하는 동안 신학생 전도사 Youth Pastor로 계속 Los Angeles에 있는 한인 교회를 봉사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공부를 계속 했습니다. 두 번 째 학위를 끝 내고 이번에는 미국 서부에 Harvard 로 알려진 Claremont대학 신학 부에 박사 학위 과정에 지원을 했더니 합격 통지가 왔습니다. 나는 다시 Layne Foudation 재단에 계속 장학금 지원을 신청했습니다. 세 번 째도 역시 기꺼이 승락을 해 주어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박사 학위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일전 한푼 없이 비행 기표 값까지 빌려서 출발한 미국 신학대학 유학은 나에게 오병 이어의 기적이었고 한 Penny도 지불 않고 미국 대학의 10년 간의 신학 훈련과 3 개의 학위를 끝 내는 기상 천외의 사건 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 하시는 하나님 께서는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엡 3:20
Orange County Korean Church (California) 첫 이민 교회 개척 : 세번 째 학위를 마치기 약 2년 전입니다. Youth Pastor 청년 지도 전도사로 봉사하던 Riverside 한인 교회 목사님이 한번은 주일 예배 후 나에게 닥아 오시더니“윤 전도사님, 다은 주일에는 윤 전도사님이 대 예배 설교를 해 주세요.” 갑작스런 담임 목회 자인 오 인수 목사 님으로 부터 부탁을 받고는 긴장하며 한 주간 초 긴장 상태에서 말씀을 준비하여 대 예배에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배 후 인사들을 나누는데 여러 명의 성도들이 나에게 달려와 “전도사님 너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전도사님께서 말씀하시는것을 필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정도 였습니다. 그던데 전도사님 왜 교회를 개척하지 않고 이렇게 협력 사역만 하고 계시는 겁니까? 교회를 개척하세요. 저희들이 함께 동역하겠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저들의 권면을 듣고는 나는“집사님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대학에서 학위 공부하느라고 여념이 없잖아요. 더 기도 해 보겠습니다.”라고 하며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의 저는 학위 공부하느라 정신 없을 때 였지만 두 집사님의 집요한 권면과 강권은 저를 만날 때 마다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계속적인저들의 끈질긴 권면에 못 이기며 기도하던 중 혹시 하나님께서 저들을 통해 나를 개척의 길로 떠 미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기도 하던 중 저는 확신을 얻게 됐습니다. 두 집사님들을 만나 개척 결심을 나누었더니 저들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이민 교회 개척의 출발점은 예배 장소 확보였습니다. LA 남쪽 Disney Land로 유명한 오렌지 카운티 Anaheim 지역에서 현지 교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교회 담임 목사 님들을 만나 한인 교회 개척의 포부를 나누며 예배 처소를 빌려 달라고 수많은 교회를 방문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의 얘기를 들은 모든 분들이 “당신 말고도 여러 명의 한인 목회 자들이 이미 방문하고 같은 부탁들을 하고 돌아 갔다.”고 하며 교회를 빌려 주려면 자기들 교회의 제직회 당회 건축 위원회등 기관을 거쳐 상의하고 허락 결정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반응들 이었습니다. 너무 실망스럽고 맥 빠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굽히지 않고 예배실 확보를 위해 노력 하는데 집사 님들은 만날 때 마다 무슨 진전이 있느냐고 묻는데 희망적인 대답을 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은 계속 되었습니다. 비죤은 살아 있지만 실현 가망 성이 희박하게 여겨지는 고뇌를 안고 나는 이번에도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짖고 계속 기도 하던 중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네가 교회를 개척하며 교회가 너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망하고 있냐?” 그때 나의 대답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면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순종하겠나이다.” 이런 대화를 하나님과 나누며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다며 마치 주제 넘게 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 처럼 너무 걱정을 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용서하소서. 하나님만 바라고 무조건 당장 개척 전투를 벌리겠습니다.” 다짐을 하고는 두 집사 님에게 통보 했습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 개척 예배를 드립시다. 교회 건물은 확보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으시겠어요? 다음 주일 정오에 Anaheim 동북 쪽에 Yorba Linda라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데 큰 나무 그늘에 모여 우리 개척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두 집사 님들이 너무나 멋진 생각이라고 반응을 보이고 흥분하며 개척 예배 준비에 들어 갔습니다. 각자 점심을 준비하고 오전 11시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집사 님들이 자기들의 가족과 친구들 합하여 십여명이 모였습니다. 교회 건물도 없고 악기도 반주 자도 없었지만 그 대신에 공원 공중을 날며 혹은 주위의 나무에 앉아 노래하는 새 소리에 맞추어 찬양을 하며 하늘을 지붕 삼고 온 세상을 예배 실로 하며 예배를 드릴 때의 감격은 4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너무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개척된 교회를 4년 동안 목회하는 동안 예상 외로 힘차게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고 저의 후임 목회 자들의 신실한 봉사와 헌신으로 몇 천명 규모의 대 교회로 그리고 한인 이민 사회의 주역을 담당하는 교회로 계속 성장하고 있음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첫 이민 교회를 개척하며 교회가 계속 성장하다 보니 모든 제직들이 나에게 전도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으셔야 한다고 재촉을 합니다. 당시 안수 받은 종이 되기에는 너무 부족한 맘으로 전도사로 계속 목회를 하려는데 성도들이 교회가 성장하려면 안수를 받으라고 계속 강권을 하여 개척한지 몇 개월만에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받고 나니까 성도들이 권뭔한대로 나도 의젓한 목사 신분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은 교회가 성장 발전하는데 필수 요건이었던 것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척을 하고 2년 후 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박사 학위 를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미국 도착 십 년을 지나면서 목표 하던 10년 공부를 마쳤고 개척한 교회도 성장을 하여 미국의 풍요를 만끽하며 California 주저 앉아 미국 생활을 얼마든지 향유할 수있는 조건이 다 갖주어 진 것이었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역 자들과 친구들이 부러워하고 얼마나 감사한 조건 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의 맘에는 미국에 그렇게 안주하기에는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힘들고 불 가능한 가운데도 나를 인도하셔서 미국 유학까지 보내 주신 하나님의 한 없는 은혜를 생각하면 그냥 미국에 안주하며 행복과 성공을 구가하기에는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 이었습니다. 고국에 돌아가 봉사하던가 선교 지로 나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며 모색 하던 중 미국의 한국 크리스쳔 신문에 시드니의 한 교회가 담임 목사를 구하는 광고를 보고는 흥미를 느끼며 이력서와 설교 테이프 몇 개를 보내드렸습니다. 물론 개척하여 4년간 섬겨온 Orange County 한인 교회를 사임 한다는 것은 현실 감이 없는 일이고 단지 흥미 충족을 위해 그리고 시드니 교회의 반응을 테스트해 보는 가벼운 처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시드니의 한인 장로교회는 나를 담임 목사로 선정을 하고 몇달 내로 시드니로 부임하라는 권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4년 간 혼신을 다해 개척하고 성장시킨 교회, 당시의 한인 목회는 미국 이민 초기 정착기 모든 성도들의 삶의 모든 문제가 목사의 목회영역이었고저들의 완전한 손 발 역할을 다 하던 때라 영어를 필요로 하는 모든 업무마다 쫓아 다니며 통역을 해 드리며 돕고 특히 의사를 보고 병원을 방문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목회의 한 부분 이었고 이런 일들은 성도들의 영혼의 문제는 아니지만 저들과 수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친구가 되고 영적으로 저들을 양육 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들 이었습니다. 년 노한 부모 님들은 자기의 자녀들 보다 목사와 더 친근해지고 더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는 나의 가족이 되었고 나의 형제 자매들이요 나의 자녀들이요 나의 부모처럼 섬기며 목양을 하던 중에 갑자기 제가 사임을하고 시드니로 떠난다는 소식을 교회에서 발표했을 때 온 교우가 고함을 치며 견딜 수 없어하며 통곡하던 모습은 지금까지 한번도 나의 뇌리에서 희미해진 적이 없었습니다.
한편 시드니로 이주를 준비 하면서 시드니 교회의 상황과 필요한 여러가지일들을확인하고 주선하고 있었습니다. 호주 영주권을 신청하고 부임 할 교회의 현황등을 확인하는데 신문 광고에 나온 것과는 다른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광고에 실린 내용은 교회는 호주 장로 교단 교회이며 성도수는 3백 여명 교회 사택과 차량등 몇 가지 였는데 부임을 결정하고 준비하는데 확인하다 보니 엄청난 과대 광고였음을 발견했습니다. 성도 3백 여명의 교회가 아니라 3십 여명 이었습니다. Petersham의 한인교회 였는데 교회의 분란으로 담임 목사님이 3백 여 명의 성도들을 모 두 데리고 떠나고 잔류 교인 2-30명의 교회 였습니다. 부임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목회하던 교회를 계속 할까 망설이기도 하다 심각히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부름은 때로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신비한 방법으로 부르시고 그런 중에도 자신의 종들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드니 교회로 부임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고난을 각오한 결정 이었고 독특한 부름에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려는 대 결단이었습니다. 그런 과대 광고를 신문에 실을 정도의 영성을 확인 했지만 저들을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특수 사명으로 받아들이며 시드니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여 작은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강력한 멧세지를 준비하여 선포하고 온갖 노력을 경주하는데 몇 달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주위에서 들리는 소문은 ‘윤 목사가 교회를 잘 못 선택했다. 윤 목사님은 시드니에 잘 못 오셨습니다”라는 소문만 번져 나가고 있고 “그 교회 사람들과는 윤 목사 님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판결만 무성하고 있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목회의 대 장벽에 부디치며 모든 집사들 여덟 부부를 소집하여 목회의 현황을 논하며 어떻게 헀으면 좋겠느냐고 나의 고뇌를 털어 놓았습니다. 한참 고민하던 집사들 여덟 가정 전체가 모두 사표를 기록하여 제출하면서 아무런 직분 없이 모든 것을 저에게 맡기고 물러 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표수리 가부를 결정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제직 회가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삽시간에 이 소문은 시드니 한인 사회에 번져나갔고 이어서 “그렇게 안 보였는데 윤 목사님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고 그 힘든 골치 거리 사람들을 모두 Sack 탈직 시켜 버리고 새로운 교회를 만드셨다는 소문이 번져 나가며 곧 이어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기 시작 했습니다. 교회는 성장 무드로 진입하게 되고 30명에서 40명, 50명, 60명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어떤 집사 님으로 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2-30 가정의 성도들이 시드니 연합 교회에서 불만을 품고 이탈하여 새로운 교회를 창립하는데 윤 목사 님께서 자기들 교회에도 매주 오후에 오셔서 설교를 하며 목회를 해 달라는 부탁 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감격하며 추가 사역의 기회를 받아 들였고 매주 두 교회를 뛰며 사역하는 분주한 목회 자가 되었습니다. 몇 달동안을 땀 흘리며 두 교회를 뛰다 보니 두 교회 모두에서 성도들이 웅성 거립니다. “ 윤 목사님이 아마 새 교회를 맡고 우리 교회를 떠나실 것 같아.” 또 다른 교회 에서는 “한 목사 님을 두고 두 교회가 서로 긴장 할 것이 아니라 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하며 의견이 분분하다 두 교회 모든 성도들이 통합 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시드니의 한인 신문에 항상 분열만 하던 한인 교회 풍토에서 교회가 통합하는 역사적 사건 이라고 대서 특필로 보도가 되었고 교회는 계속 성장하며 100명 넘어 곧 150명 이어서 200명 그러면서 3-400명에 이르는 교회가 되고 나는 절망적이던 교회를 이렇게 까지 축복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목회 중 놀랍게도 성도들 중에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그들 중 목회의 길로 진출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저 하는 청년들이 여러 명이 있어서 추천하여 시드니 영어 권 신학 대학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모두 호주 신학교에서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따라 가지를 못하고 비명을 올리며 저를 찾아 왔습니다.
나는 저들을 위해 걱정을 하다 저들의 신학교를 방문하고 교수진과 학장을 만나 대화하며 교제를 나누던 중 나의 목회 경력과 미국의 학력등을 보면서 그 신학교의 교수가 되어 동역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좋은 사역의 기회입니까? 나는 기쁨으로 수락하고 호주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 지면서 더 많은 한인 학생들이 신학교로 몰려오고 중국과 대만 Philippine 그리고Africa학생들 까지 학교에 들끓으며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운영을 힘들어 하다가 하루는 학장 님이 저를 부르더니 “윤 목사님, 당신이 별도로 신학 대학을 창립하여 여러 외국 학생과 한국인들을 함께 훈련 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선교의 기회 입니까? 나는 호주Baptist College의 권면과 협조를 힘 입으며 신학 대학을 세워 저들의 선교 훈련을 시키다 보니 학생 수가 날마다 증가하며 200명을 넘었었고 목회와 신학 훈련을 겸하며 16년을 사역하다 너무 지쳐서 쉼을 얻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것이 1996년도였습니다. 그때 저의 신학교의 학생 중 대부분이 시드니와 호주 각처에서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고 그 중에 한 학생이 새순 교회를 개척한 이 규현 목사님 이셨습니다. Amazing Grace 북 미주로 다시 돌아가 Los Angeles근처의 Campus Crusade for Christ 미국인 신학교의 박사학위 과정 책임 교수로 3년을 근무하던 중 나는 미국의 한국 신문에 캐나다 Montreal에서 목회자를 찾고 있는 몇 가정의 한인들의 광고를 보며 지원 했더니 저를 선정하여 담임 목사로 초빙하여 Montreal 성결 교회를 개척하면서 캐나다의 사역이 시작 되었고 교회가 성장하며 안정되면 하나님은 나를 또 새로운 곳으로 옮겨 개척을 시키셨습니다. 미국과 호주 그리고 캐나다 세 나라 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영어 권의 나라에서 교회 목회를 하며 나의 언제나의 사역 관심의 하나는 현지 영어 권 사람들을 선교하는일이었습니다. 저들의 세계 한 복판에 살면서 저들에게 선교하는 일은 하나님이 한인 이민 교회에 내려주신 독특한 선교 기회 이었습니다. 여러 현지 교회와 사역자들과 친교를 나누고 지난 몇 십년 동안의 한국 교회의 부흥과 새벽 기도등 우리의 기도의 열정을 나누며 복음을 선포 할 때마다 너무나 놀라운 반응을 목격하며 보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저 혼자 이 사명을 다 할 것이 아니라 지상 명령은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일 뿐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엄청난 약속이 곁들인 주님의 분부 아닙니까? 많은 성도를 영어 권 선교사로 훈련시키는 일도 나의 주요한 사명의 한 부분 이어왔습니다. 미국 Detroit 근처의 Lansing이란 도시 주위에서 미국 사람들의 교회를 담임하다 Toronto에서 한인들에게 영어와 영어 성경과 선교 전략 훈련을 시키며 이민 정착을 도웁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가진 한인들을 도우며 전도하고 있을 때 캐나다의 동해안 곧 대서양에 접한 Halifax란 도시에 정착하고 있던 부부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각 기관을 함께 방문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 깨끗하게 해결 해 드리고 기도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 돌려 보냈습니다. 이들은 너무 감격을 하며 저에게 왕복 비행기 표를 보내 주며 한 일 주일 간을 Halifax (미국 동부 Boston 위쪽의 캐나다 도시)로 휴가를 오라는 초청 이었습니다. 감격하며 월요일 오전에 Halifax공항에 도착 했고 저들은 Five Star 수준으로 대우를 하며 명승 지를 구경 시켜주고는 저녁이 되니까 몇 명의 성도들이 모여 저들이 부탁하는대로 기도회를 인도 했습니다. 모인 너 덧 가정이 은혜를 받고는 다음 날도 지역 관광이 끝난 다음에 예배를 인도 해 달라고 하여 열심히 설교하며 축복을 해드렸습니다. 둘째날은 첫 날의 두배 정도는 뫃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니까 저들끼리 한참 웅성 거리더니 나에게 닥아와 “윤 목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내일은 더욱 많은 사람이 몰려 올것 같아서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전해 주십시요.” 나는 일 주일 동안 저들의 감사 초청 휴가를 즐기러 간 여행이 부흥 집회로 둔갑을 하게 되어 이어서 목요일 금요일 저녁까지 교회에서 5일 간의 즉흥 부흥 집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집회의 마지막 날 설교를 마친 후 저들이 한참 서로 웅성 거리며 떠들더니 나에게 닥아 와 ‘목사님 Halifax 로 오십시요. 이곳에 교회가 필요합니다. 윤 목사님께서 담임 목사가 되시고 우리 교회를 개척 하십시다.’ 너무나 갑작 스럽고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나는 다시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다시 나에게 교회를 개척하게 하시는 것을 확신 하면서 기쁨으로 수락을 하고 Halifax의 Nova Scotia 한인 교회를 개척하게 됐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교회는 목사인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이 인도하시고 주님의 지혜와 방법으로 주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세워지는 교회임을 확신하며 목양을 하다보니 주님이 세우시고 자라게 하시는 주의 몸임을 깨달으며 감사하며 주를 섬겼습니다. 교회가 개척되고 성장하며 자립되고 즐겁게 목양하며 3년 쯤 됐을 무렵 입니다. 호주와 마찬가지로 이민의 나라인 캐나다는 한인들에게 최고의 인기의 나라이고 연방 이민 과 곁들여 각 주별 지명 이민 프로그램이 있고 연방 프로그램보다 수월하여 많은 한인이 Nova Scotia 바로 옆의 주인 New Brunswick의 여러 도시로 흩어져 있는데 한인 교회가 없었습니다. 각 지역 마다 교회를 개척 해 달라고 아우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Halifax로 전해오면서 New Brunswick의 교회 개척이 나의 Halifax교회의 Issue로 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 세워진 Halifax 교회는 어느 목사님 이라도 부임할 수 있지만 개척의 고뇌를 감당 할 수 있는 인물은 윤 목사 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결론과 더불어 나는 New Brunswick주의 수도
Fredericton 에서 다시 개척을 했습니다. 수 많은 믿음의 벗들을 만들며 저들에게 말씀 선포하며 저들의 손발이 되어 10년 간을 섬기다 2016년에 다시 Australia로 돌아왔습니다.
Sydney/Melbourne 영어 병원 English Hospital
형통을 기원합니다. 저는 반세기를 넘어 이민 사역을 해 왔습니다. 미국,호주 그리고 Canada 세 나라에서 교회 사역을 하며 가장 큰 과업 하나는 영어 전쟁이었습니다. 고국에서의 목회와 다른 점은 새 땅에 정착하며 목회자가 성도들의 날마다의 실 생활의 적응과정을 도와 안정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수 많은 한인들을 인도하며 영어와의 전투를 벌려왔습니다. 얼마 전 Canada에서 목회를 하며 경험한 일입니다. 교인 중 이 집사님은 고국의 유명한 명성교회 성도로 노동비자로 카나다에 도착하여 교회의 다른 성도가 경영하는 일식 집에서 일하다2년이 지나 영주권을 신청 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불행히도 영어실력이 없어 이민관의 질문을 못 알아듣고 대답을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다 인터뷰 장을 나오며 실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2년간 영어권 학교와 캐나다 생활을 즐기던 10살 12살의 딸과 아들은 한국으로 돌아 가야만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충 격을 받아 밥을 못 먹고 잠을 못자고, 토하기도 하며 피부에 온갖 종기가 돛고 심한 두통으로 병원엘 가 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이 더욱 상태가 악화하여 그대로 두면 무슨 큰 일이 벌어 질 상태였습니다. 고등학교 출신인 가장 그리고 중학교 교육밖에 못 받은 아내 저들은 슬퍼 통곡을 하고 비명을 지르는 길 밖에는 다른 아무 일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들 이민의 꿈이 산산 조각이 되 버린 비극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저들이 저의 사택으로 찾아 왔습니다. 문을 열어 주자 마자 저들 온 가족의 통곡이 터졌습니다. 계속해서 울고있는 저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저들을 무슨 말로 위로하고 어떻게 가이드를 해야 할지 목회자로써 최대의 고뇌를 안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들을 위로하고 믿음을 북돋아 주고 격려하며 기도 해 주며 보내는 길 밖에 목회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 가족이 목을 놓아 통곡을 계속하고 있는 정황에서 그것은 별 효력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나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지난 수 십년 간 이민 목회하며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오지 않았느냐? 네가 가르쳐 구출하면 되지 않겠냐? “
나는 저들에게 영어훈련을 시켜 기적을 창조해야 되겠다고 대 결심을 했습니다. 물론 저들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상상도 하지를 못하고, 나는 막상 저들을 가르치려니 저 학력에 무 기초인 저들에게 두 번 째 인터뷰를 통과할 정도로 영어 훈련 시킨다는 것은 누가 봐도 절대 불가능한 경우 였습니다. 그런 중 저의 머리를 스쳐가는 한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을 것을 다짐하며 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고 기도 해 드리며 영어훈련과 두번 째 인터뷰 준비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본인들은 물론 “그건 불 가능한 일”이라고 완전 절망을 하고 엄두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미국 Boston 윗쪽의 대서양 연안 도시 Fredericton 영하 30 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나라 Canada의 겨울에 매일 눈사태와 전쟁을 치뤄야 하는 곳입니다. 일년에 몇 번 씩은 폭설로 세상이 마비 될뿐 아니라 가끔 주일 예배를 취소해야 하는 지역입니다. 저들은 낮에는 출근을 해야 함으로 매일 새벽 5시 전에 차를 운전하여 저들 가정을 찾아가 두어 시간 씩 저들의 수준에 걸 맞게 영어 훈련을 시키고, 하루 종일 듣고 외울 문장을 녹음하여 숙제로 주고 그 다음 날 시험을 보고 훈련을 시키며 가이드 해 주다 보니 저들이 조금 씩 눈을 뜨고 귀가 열리는 것을 볼 수가 있었고 한달 이상 매일 새벽 제가 찾아 가 가르치다 보니 저들이 정신이 들면서 너무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기들이 매일 새벽 저의 사택으로 찾아 오겠다 하여 그 후 5개월을 계속 신병 훈련 스타일의 영어 전투를 계속 하다 보니 놀랍게도 저들은 자신을 얻고 매일 달라지는 것을 보고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인터뷰 전 두어 달은 수 많은 인터뷰 예상 질문과 대답까지 준비하여 듣기 말하기 발음 태도 그리고 약간 머뭇거릴 때 공간을 메 꿀 간단한 표현까지 준비시켜 주어 모두 암기시키고 얼굴 표정까지 연습을 시키고 최종 몇 주간은 제가 이민관이 되어 여러 차례 모의 Interview 까지 하여 준비를 시켜 드디어 2차 Interview장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저들을 들여 보내고 한 시간 근처 Coffee Shop 에서 기다리는데 나에게 그 때처럼 초조하고 긴장된 순간은 없었습니다. 간절히 저들의 성공을 위해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 시간쯤 후에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저들 모습을 보는데 6살 짜리 아들을 포함 전 가족 5명이 햇빛보다 밝은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즐겁게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저들이 합격한 것을 직감 할 수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기적은 일어났고 첫 번 Interview에 빵점을 받고 완전 절망에 빠져 지옥 길을 헤메던 저들이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100점 만점을 받고 이어서 Boston 윗쪽 미국과 캐나다 국경지대 이민 국으로 가서Canada 영주권을 받고 나니까 절망과 비관으로 병들어 쓰러져 가던 자녀들은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온 가족이 저에게 평생토록 어찌 목사님을 잊겠느냐며 감격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 기적이었습니다. 이민 목회 생활에 많은 보람을 느끼지만 저는 이런 특수 영어사역을 계속 해 왔습니다. 지난 반 세기 간 이런 종류의 이민목회 스토리를 글로 쓰면 수 백 페이지는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독특히 저에게 베풀어 주신 특수 달란트와 사명감에 감사를 드리며 이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더욱 많은 한인 고민 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새로운 길을 열어드리며 이민생활을 Upgrade하고 호주 생활의 모든 기회를 활용 하며 이민자 최대의 보람을 누리며 살도록 영어 병원을 열고 한인을 초청합니다. 누구라도 품위 있는 영어를 구사하며 전 세계 모든 민족이 인종 도가니를 이루고 살고 있는 호주 땅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자유로히 의사소통하며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부끄럼 없는 Smart Korean으로 승화 시켜 드리는 무료 영어 병원
입니다 . 크리스챤들은 영어 성경과 전도 설교 선교등 전 분야를 자유로히 영어로 할 수 있도록 훈련합니다. 큰 꿈을 품고 이민을 와서 살며 몇 년 견디다 보면 영어가 되는 줄 착각 하고 살아온 분들을 융단 폭격 형 영어 특수 훈련으로 치료하고 꿈을 이루어 드리는 병원입니다. 호주를 살며 영어 때문에 한숨 짖고 사는 모든 한인의 운명을 바꿔드립니다. 필요한 사람을 보내시기만 하면 됩니다. Tell your friends. God Bless.
윤 수한 목사 드림
Rev. Dr. Soo Han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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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61467659283 (0467 659 283 in Australia)
44 / 28-32 Jeffcott Street, West Melbourne, Victoria 3003, Australia
윤 목사 영어 – Internet 교재. http://cafe.daum.net/NBchurch 로 들어 가 “영어 공부” English Time 을 클릭하시면 240 페이지의 렛슨 을 보실 수 있고 영어의 ABC부터 고급 영어에 이르기까지 누구라도 활용하여 영어의 체계가 완전히 머리에 입력이 되고 꾸준히 계속하면 누구라도 영어를 완전히 정복 할 수 있는 Online 코스입니다
활용하시고 친구들 에게도 전하세요. 그리고 보다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긴급히 완성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Class 로 오시면 환영합니다. 5000 개의 문장을 미국 호주 카나다의 원어민 녹음까지 곁들여 있는 완벽한 영어교재입니다.
Phone : 0467 659 283 (03)9024 0342 www.lfkpc.ca/sermon/70098 www.youtube.com/shypastor whysoohan@hotmail.com rev.shy@hotmail.com
This is My Story I am writing this to share what I have in my heart and to make friends in the Lord and then to be together used of Him for the expansion of His kingdom. I have lived quite an interesting and a very gracious life. I was born in China to Korean parents when Korea was occupied by Japan. My family came down to South Korea as Korea was liberated with the end of the World War II. I was raised and educated in Seoul until I left Korea in 1971 to study at the Talbot School of Theology(Graduate School of Biola University in California). I finished basic ministerial training(Bachelor of Theology) in Korea and two degrees(Master of Divinity and Master of Theology) at Talbot Seminary(Biola University, California) and another one(Doctor of Ministry) at the Claremont School of Theology in Los Angeles. I planted Korean immigrant churches in Orange County( California), Sydney(Australia), Montreal, Quebec and Halifax, Nova Scotia and another Korean church in Fredericton, New Brunswick, Canada.
I am what I am by the grace of God. During my adolescent days I was not a very exemplary boy. I was rather a headache to my parents. I enjoyed my life to the fullest extent. I was one of the typical wayward children. I really broke my parents’ heart especially because I was more interested in hanging out with my “bad boy” high school friends than studying. I loved playing billiard that was played with two red balls and two white ones. I loved it and became superstar billiard player. This was the major cause of my low academic standing in High School. But I was free to do whatever I wanted to do following graduation from high school. I spent the next year preparing myself for the University Entrance Examination. I tended to spend more time in the billiard room than in the library and soon became very popular in town because of my billiard skills. One of my play-mates was a Christian. We often went to a bar or restaurant together after the games. One day, instead of going to a bar, he took me to a church. The church, at that time, was having an evangelistic crusade. I thought it was interesting. The revivalist was a great man. That was my first church attendance as an adult. I was touched by the message on the first evening but not quite ready to give my life to the Lord because I was somewhat skeptical. I went to church with him a few more times. They met three times a day; 5:00 AM, 10:00 AM and 7:00 PM. for four days. At last I was convinced that there was God and Christ was the Savior and the Lord for me. I made the decision to give myself to Christ and to follow Him.
Having lived through the war and post war devastation in Korea I had been dreaming of becoming a billionaire, president of the country, military general or actor. But my salvation experience made all these dreams meaningless. The only thing I wanted to pursue was the glory of God. I was twenty years old at that time. I enrolled at Seoul Theological College to prepare for the full time ministry. I wanted to be like the preacher who converted me. I was excited with the dream of serving my Lord through my life. But how would I pay the expenses of school and daily living? Even providing for the daily essentials of life was a very difficult and often impossible task at that time in Korea. But I thanked the Lord a lot because I knew He was my Father who was almighty, loving and living God. Instead of being disappointed I was just trusting in the Lord.
I really loved praying and started living on my knees all the time. I took I Thessalonians 5:17 literally and was urged to get down on my knees always. I could not figure out any other possible way to tackle the problems and difficulties I was facing in every aspect of my life as a young man during the post war devastation. My life was a total commitment itself. I felt as if I had been Moses at the Red Sea and Daniel being thrown into the Lion’s den. What a joy and blessing that was! I am thankful to the Lord because I have been a Korean with continual trials, tragedies and tribulations including the wars and poverty, starvation, persecution, social unrest and political chaos. All these difficulties have rather drawn Korean souls much closer to God. I thank God for all these.
When the first missionary Pastor Thomas tried to land in Korea He was martyred by the Korean authorities in the Daedong River(now in North Korea). Korea was a closed country and Pastor Thomas was considered to be a symbol of weird Western influence. He pleaded with God that wherever his blood flowed, the Gospel of Christ would flow along with it when he was martyred. The Korean Christianity nowadays is the result of the missionary prayers of Pastor Thomas and many others who followed in his steps to reach out to Korean souls. God answered those prayers and those of Korean converts.
In the early days of Korean church, being a Christian means inviting either a persecution or even martyrdom. Satan was working through a variety of means; the government, existing religions, all kinds of superstitions, the Japanese invasion, and North Korean attack and so forth. The only way for believers to gather was by secret meetings at night and early morning. These gave birth to the Early Morning Prayer Meetings which have been continuing in that land well over a century. The prayer meetings start at 4 or 5 O’clock every morning 365 days a year. As I started walking with God, I started going to the prayer meeting every morning. As I was loaded with uncountable insolvable problems, I started pouring my heart out to God. I was given real peace in my heart. I was so excited to be in His presence. I communed with Him continually not just to have my prayers answered but because I loved communing with Him.
When I was training at the Korean seminary, my Spirit-led prayer was “Make me vulnerable or restless unless/until I am in tune with you.” I wouldn’t pray that prayer with my rational mind but was urged by the Holy Spirit. God has been so thoroughly answering this prayer of mine always. My life has been continual trials and tribulations. I often cried out to God “No More, No More My Lord.” But His answer has always been otherwise. I still praise the Lord and I, deep in my heart, thank Him for who He is and what He has been doing in my life. The greatest blessing I received from the Lord has been that He forced me to get down on my knees. I was attending the early morning prayer meeting everyday and had great time with the Lord. But I was still hungering for more. The more time I spend with my sweetheart, the deeper our love grows - it is like that with God. Because I was not quite satisfied attending the regular early morning prayer meeting every day, I started running down to the church at 2 or 3 AM to have my quiet time for hours until the regular formal prayer meeting got started. I was stuck on God. I was hooked on prayer. I was a single man at that time and free to do whatever I wanted to do.
There is nothing more important for any true believer than communing with God in prayer. This is the pattern of many Korean Christians and I am humbly thanking God for placing me in the land of continual trials and tribulations and keeping me lot closer to Himself. I was drafted and joined the Korea army a few months after I enrolled at the Bible college. The Korea army at that time was so barbaric that I was beaten a lot during the training in addition to the ridiculously unendurable, inhumane hard training. But I prayed through the training and the tenor of my prayer happened to be the Gethsemane prayer of our Lord; ‘Not my will but thy will.’
When I was preparing for the ministry, one of my friends who was lot more mature than I spiritually, encouraged me to master English first if I wanted to receive training of good quality and to be better equipped for the ministry. As a very close friend he knew my heart. I appreciated his advice and started devoting myself to English language training in addition to the general ministerial training. By the way for the Asians, mastering English language is the greatest hurdle to overcome. Many give it a try and give up half-way through. I was determined to master English to serve the Lord more efficiently. When I joined the army I had two books in my pocket; the English New Testament(KJV) and a concise English dictionary. I decided to conquer these two books during my military service. When I was through the basic training at the camp I was placed into the military police training camp which was far worse than the basic training. I regarded it as the answered prayer and continued with thankful heart to the Lord. The training at the Military Police school was very difficult. All the trainees had to run all day fully equipped without enough food and water. It was literally a hell. But I thanked God because I never forgot any moment that I was in His presence. Once I was standing guard around the camp I took my English Bible out and was reading portion of it. I was caught by the patrolling officer and got punished for it. I was even beaten for that. It was a common way of disciplining the soldiers. A few weeks after this horrible experience I was summoned to the office of the commander. I was scared to death to see him because trainees are brought to his office usually for some disciplining. To my surprise, the commander was so kind and smiling to me and asked me if I could be his English teacher. Because I was disciplined due to the fact that I read the English Bible. He thought I spoke English very well. But that was not the case. My English at that time was so basic and I was afraid that it might be an impossible task. The commander was planning to go to the US military police school at Fort Gordon in America and needed to study English. Right then I was assured that it was an answer to my prayer regarding preparation for ministerial training in America. I had to say ‘Yes’ to my commander. Teaching is the best way of learning. I could not help but devote myself to English training in order to be able to teach my commander. Fortunately the commander’s English was really basic and I was a bit ahead of him and had no problem teaching him. My military service of two and a half years was a God given English training which eventually enabled me to pass all the examinations for study abroad given by the Korean government and even the TOEFL(Test of English as Foreign Language). ” How great Thou Art.”
I was discharged from the military service and wanted to go back to the Bible college. But my family was in a bad shape economically. My father became sick and paralyzed while I was still in the army. How can I earn all the college expenses? I rather had to get a job to support my parents giving up all my plan to go back to the seminary training. There was no social security system at all. When you do not have food to eat you go hungry. That was the life there at that time. It was a real challenge. I was just looking to the Lord for His leading in the crisis. Here again the only strategy available to me was that of the prayer. From the first day at home, I totally devoted myself to the Lord in prayer. I was praying to the Lord in all waking moment of my life and going to the church at one O’clock every morning to pray and to wrestle with the Lord till 5:00 AM prayer meeting that lasted about an hour and then continued praying till 8:00 AM. Pastors in Korea have to deliver a sermon every morning leading the prayer meeting. As I continued this pattern of my life for a few months, I was being noticed by all the pastoral staff of my church. Usually by the time I was getting out of the church, I was the only person in prayer in the whole church. One day, however, as I was walking out of the church one Bible woman(lady pastoral staff) was waiting for me greeted me saying ‘Great to see you every morning.’ I had never expected to see any one at that late hour of the morning. She continued saying “I am wondering if you are looking for a job. One wealthy family of our church asked me to find a good tutor for their children. I am wondering if you are interested.’ At that moment I was assured that it was an answered prayer and said ‘yes.’ I started tutoring two children(son and daughter) of the family. The father of the family was a famous man in the country. Tutoring the school children after three years of military service was a real challenge. I faced the challenge continuing in early morning prayer daily being empowered by the Holy Spirit. The son of the family was very slow in learning and was a headache to the family. They had hired some tutors but failed to improve the situation. In the midst of the family trouble stood Soo Han Yoon with the well-nigh impossible task to bring him back to the normal state. When a task is given to you by our Lord, I was assured that nothing was impossible. I reminded myself of Philippians 4:13 ‘I can do all thing in Christ who strengthens me.’ and was encouraged to take on the challenge with my Lord on my side. The family got surprised and excited to see their son getting better day by day with me tutoring him. I was being paid
double the set amount
of the wages by his parents appreciating my work so much that enabled me to go
back to the Bible college.
When I arrived in California I was literally broke and enrolled at the seminary. It was just a faith walk trusting in the God of Jehovah-jireh(Gen. 22:14). One of the blessings I
have experienced so greatly has been that I live without any plan. I just throw myself into the hands of my Father who makes all the plans for me and implements them. I still live like this. I was in the crossroad. I had to decide to give up my training and consequently my ministerial call while I was stranded in a foreign land of California or to stick with my vision struggling with all the financial crisis. I continued with the prayer strategy “Not my will but your will” I was spending a few hours daily in the prayer chapel of the Talbot School of Theology as usual. Here again I was not expecting the Lord to answer my prayer bringing all the solutions to my problems. I was just deep in communion with our Lord. I was happy because I totally committed myself to Him. I was assured that no matter what the direction He would lead me into, I would be in His hand and I would be relaxed and happy with my Father. This is the core of my belief and Christian walk with my God. I had the absolute peace in my heart. Here again my prayer was an answered prayer already “Not my will but yours, I was assured that He was with me. One day the seminary office wanted me and I got there. The school referred me to a foundation that offered some scholarship funds to appropriate candidates. The Layne Foundation started to grant me full scholarship fund. I could finish my first American degree Master of Divinity at Talbot and after that I asked the Foundation if they would be willing to continue giving me the scholarship. They said ‘yes’ and I could finish the second degree the Master of Theology at Talbot. Then I enrolled at Claremont School of Theology for Doctor of Ministry degree course and asked the foundation again and they said ‘yes.’ It was three years full time program at that time. I completed three graduate degrees at American schools for ten years without paying a penny. I would rather say that my Father paid it all off.
While I was still in training, I was serving a Korean Baptist church as a youth pastor near Los Angeles. One Sunday the pastor asked me to preach the following Sunday for the main worship service. I did and after the worship a couple of gentlemen came up to me saying. “We’ve been touched by your message. Why don’t you plant a church in Orange County. We will be very happy to work together with you.” They were so persistent challenging me to plant a Korean church. One man was a medical doctor and the second one was a CPA. I was somewhat hesitant and was not feeling quite ready. I prayed over the matter continually and got assured that the Lord was leading me into the church planting ministry. This was how I started my first immigrant church in the USA. At last I answered to those two gentlemen ‘Yes’ and they were excited.
The first step to take was to secure a place for the worship service like I have done in Fredericton with the First Wesleyan Church. Orange County is about thirty miles South of Los Angeles and the Korean immigrant community was growing fast there. I began to visit the American churches to ask them to allow me to use a room for the Korean worship. To my surprise it was almost impossible to get one. The American pastors I met were saying that there had been many other Korean pastors with the same requests and it would take a long time to get the approval from the church session and building committee and so forth. It was a quite a disappointing experience and I could not start the church. The two gentlemen were continually pushing me to go ahead with the new ministry. I was always deep in prayer for the guidance of the Spirit. As I was totally committing myself to the Lord, He was speaking to me in a whispering voice ‘I am the Lord your God. Does it make sense to you not to be able to start your ministry because you don’t have a place for the worship service. Don’t you know that the whole world is mine? Are you going to keep on hesitating until you get hold of a building in your hand?’ ‘Oh no.’ did I reply in prayer. ‘Forgive my inactivity oh Lord.’ I was inspired and enabled by the Spirit to go ahead with the new church planting and told the two men that I was ready and to start the worship service and shared my vision with them. ‘Since we haven’t got any place of worship secured and it is not guaranteed that we would have one in the near future, we are going to worship anywhere in the whole world of our Father’s. Come to the Yorba Linda Park in Orange County for the worship service with your family and friends if you can.’ They were all excited with my challenge and we had our pioneering worship service for the Orange County Korean Church in the shade under a big tree in the park. There were about fifteen precious Korean souls praising God to the singing of all kinds of flying birds all around, with the sky as the roof of our new church. I was feeling as if I had been the richest in the whole world with the almighty Father in me.
It was the first Sunday of August, in the year of 1978. It was the worship service I can never forget throughout my life. My endeavor to find a proper site for worship service continued day after day. I went back to one of the churches I had visited just to say hello to the pastor. The pastor was asking me how I was doing and I responded sharing the agony of having no place of worship and the excitement of the first worship service under a tree in the park. The pastor got moved and stunned and became speechless. After a while he opened his mouth ‘Brother, bring your group in our church from next Lord’s day. I will let you use one nice room for your worship.’ I was surprised as I heard what he said and asked him worried. I responded to him, ‘What about your kirk session and the building committee and so on? How are you going to handle that?
He answered, ‘Don’t worry. Leave it to me. I am the pastor in charge of this church.’
That is how I got the place of worship secured for my first church planting ministry in America. I was an excitement itself and fully devoting myself to the ministry not only caring for the little flock of the new church but also trying to reach out to every Korean soul around. I was seeking all the Korean last names such as Kim, Lee, Park, Choi, Cho, Chun, Chung, Yoo, Yoon, Chang and so on in the Orange County white page and phoned them or knocked on their doors. Many, of course, were uninterested or very cold or were going to other churches already. But some responded very positively and started coming to my church and the church was growing steadily. I was continuing the door-knocking evangelism. On one weekend I was knocking on the door with one of the two starting members. His name was also Dr. Yoon. As we introduced ourselves to the man of the house he was so excited and ushered us in the house. I ministered to them and they got touched and confessed that he was going to church in Los Angeles, and was disappointed with the church and quit coming to the church. His name was Chang Hoon Han. He promised us to come to our church and was also saying that he had many friends with same experience and would be willing to bring all his friends to my church. Following Sunday he came to our church with a few of his friends and families and the Sunday after Sunday they were bringing more families to the church. What a joy of the ministry! We often feel that the Lord’s work in these days is very difficult or impossible, but I am assured that as long as we have assurance we do not have to be dismayed. God is there, the almighty God who sends us mission possible and He is working in and through us. As I was devoting myself to the virgin ministry of my first church the sermon preparation was well- nigh impossible task. I was so thankful to the Lord for all the abundant blessings I had received. But the delivering the message to the people, the communicating the Gospel of Christ in a way that really touches and impacts the souls are two different matters though I had all the required training and so many degrees in Korea and America. I had often stayed up all night struggling and preparing the messages I had to deliver week after week. One of the privileges I enjoyed was that I was based very close to my alma mater Talbot Seminary the Graduate School of Biola University. I always feel indebted to the seminary so much and even after I finished the degrees there I was spending so many hours in the seminary library. I always wanted to live close to the library throughout my life and ministry. I always had a strong desire for the books for my own spiritual enrichment and for the preparation of the messages. I wished I had the seminary library with me in possession.
As I am writing this I am reminded of incessant matters to be thankful to the Lord. When His children wish deep in their heart thinking of our Lord and trying to glorify His name I am sure that even our thinking and wish or any expression are the prayers of ourselves’. Because He is our Father, the omniscient God He often surprises us by meeting ournneed at the right and perfect time. One day I was invited to visit one of the saints of my church. I delivered an appropriate message for the family and blessed the family of H R Kim with prayer. He said to me that he would like to do something for myself personally apart from the church. ‘Tell me whatever you want to have regardless of the cost. I am ready to buy it for you.’ I had never had such an offer from my parishioner. Actually I had about everything I needed as the pastor of the church including the house and cars. Considering prayerfully a few minutes I told him that I badly needed more books especially for more effective ministry. We went to the Christian bookstore and he told me “Pastor, you can choose any book and as many as you want. You can pick up a truck load of books if you want.” I picked up a ton of books including the multi-volume reference works on the Scripture, theology and church history and any fields that are required of the parish minister, not quite a truck-load though. That has been one of the most precious assets for my ministerial life.
The church grew steadily and is now one of the leading Korean churches in the area. I enjoyed the ministry very much and praised the Lord for the growth and fruit of the ministry. My original plan of my ministry, however, was not with the ministry in the USA, but either going back to my country or going out to the mission field. One day I saw an advertisement in a Korean newspaper of a Korean church in Sydney, Australia wanting a pastor. I got interested in it because I thought Australia was a challenging country in the South Pacific and I felt that I could launch some meaningful missionary task in the world down under. I sent my resume and a few sermon tapes I had preached at the Orange County Korean Church. To my surprise the Sydney church chose me and wanted me to be there in Sydney within a couple of months. I was stunned and did not know what to do. It was the most agonizing moment of my ministry. I was pouring my heart in the ministry of the Orange County Korean Church. The whole congregation was my family. I was a real servant of each of them. Most of them did not understand English and their life was so inconvenient that I was serving most of them as their mouthpiece and driver and an errand boy. By the way that has been one of the major areas of my ministry not only in Orange County, but also everywhere I went to minister to the Korean souls including in Sydney, Montreal, Toronto, Halifax and in Fredericton where I pastored till I left Canada. I was going everywhere they had to go as they were trying to settle in a new land including to doctors, the hospital, Social Security Department, Immigration Department, police, lawyers, law court and schools. I went to any place where they needed to communicate in English. Over the past four decades I have visited doctor’s and hospitals a few thousand times. For some older folks with chronic illness I had to take them to the doctors so frequently and for a long period of time since their children went to work. All the old folks in my church were my parents and all the middle aged people my brothers and sisters and all the children my own. When I had to announce my resignation to move to Sydney, the whole congregation burst in tears wailing so aloud like a house in mourning. That is something I can never forget throughout my ministry and life.
The Orange County Korean Church has grown to be one of the leading churches in the area(South of Los Angeles). I serve the Lord and His church because I love Him and His body the souls(I’ve got so much more to write if space is allowed. I am preparing to write a devotional autobiography when time allows me to do so.) In a similar fashion I went down to Sydney, Australia where I spent 16 years ministering to the Korean souls there. And then I continued the same type of church planting ministry in Montreal, Toronto, and Halifax and now in Fredericton, New Brunswick. My ministerial life is ; so far I just love my Lord and want to serve Him with all my heart without my own plan. My Father knows me better than I do. How great Thou art My Father and my eternal God. I thank and praise You.
I got back to Sydney Australia in the year of 2016 and am ready to capitalize on all my experience and gifts to the glory of God. In Christ.
Pastor Soo Han Yoon, www.youtube.com/shypastor “Church 365” whysoohan@hotmail.com 200 Glenrock Pde. Koolewong, NSW 2256 Australia. Phone 0467 659 283 (03)9024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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