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해파랑 길과 건봉사
(2016. 6. 4∼5)
瓦也 정유순
하얀 초롱꽃의 인사를 받으며 새벽부터 바쁘게 서둘렀지만 강원도 고성으로 가는 길은 녹녹치 않다. 비몽사몽간에 들른 가평휴게소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자동차로 가득하다. 현충일 연휴를 맞이하여 서울의 모든 자동차가 이곳으로 몰려든 것 같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기어가다 고성 화진포에 도착한 것은 서울을 출발하여 다섯 시간 반이 지난 열두시 반이 넘어 도착한다.
<초롱 꽃>
바로 거진항으로 이동하여 각자 점심을 하고 당초 계획을 바꾸어 역(逆)으로 거진항에서부터 화진포로 걷기를 시작한다. 거진항은 한 오백여년 전에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선비가 이곳의 산세를 둘러보더니 지형이 ‘클 거(巨)자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큰 나루(巨津)로 불렀다는 전설이 뒷받침하듯 백두대간의 정기가 에워싸고 있는 천혜의 어항으로 발전한 곳이다. 한때는 명태의 집산지로 파시(波市)를 이루었고, 지금은 오징어가 대신한다.
<거진 해맞이봉 입구>
북쪽의 방파제를 지나 좌로 조금 굽어져 가는 길목에는 인공암벽장이 손님을 기다리고 거진해맞이봉 입구를 지나친다. 해안으로는 해변의 접근을 막은 굵은 철조망이 접근을 못하게 하고 그 철조망은 산을 반으로 나눠 북으로 길게 뻗어 고개를 넘는다. 도로를 따라 오르막길을 가다보면 우측으로 공군부대가 나오고, 그 옆길로 응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응봉(122m)은 옛날부터 화진포(花津浦)호수 동쪽에 위치한 산이 매가 앉은 형상과 같다고 하여 매 응(鷹)자를 써서 ‘응봉’으로 불렀다고 한다.
<동해안 철책선>
<응봉>
응봉에 올라서면 북으로 화진포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 쪽으로 화진포성 끝자락에는 한국전쟁을 일으켜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온 북한의 김일성별장이 자리하고, 화진포호 중앙의 섬에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한국전쟁 때 야반도주하고 한강다리를 폭파하여 무고한 생명을 수장시킨 이승만별장이 있다. 그리고 김일성별장 아래 가까운 곳에는 이승만정권에 빌붙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1960년 3∙15부정선거를 자행하여 4∙19혁명을 유발시키고 결국은 아들의 손으로 가족이 집단자살한 부통령 이기붕이 사용한 별장이 있다.
<화진포호 전경>
화진포호는 동해안에 잘 발달된 대표적인 석호(潟湖)이다. 석호는 원래 육지 안으로 쑥 들어온 바다였으나 조류(潮流)작용 등에 의하여 모래 둑이 쌓이어 호수가 된 곳으로, 둑 밑으로 바닷물이 드나들어 바다 생물과 육지생물이 공존하는 특이한 구조다. 프랑크톤 등 조류(藻類)가 풍부하고, 봄이면 숭어 등 바다어류들이 산란(産卵)을 위해 모여든다. 경포호, 송지호, 영랑호, 청초호 등 18개의 석호가 있으나, 화진포호만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고 있다.
<응봉에서>
화진포 주변은 호수와 바다와 노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원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이곳에 별장촌을 만들어 휴양하던 곳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민족과 조국을 분단시킨 주인공들이 별장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화진포 앞 바다의 거북이 형상의 ‘금구도’가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밝혀졌으며, 이곳 화진포 구두쇠 부자 이화진의 쇠똥시주와 착한 며느리에 얽힌 유명한 전설을 뒤로하고 건봉사로 이동한다.
<화진포성 숲속의 김일성별장>
건봉사는 금강산을 주산으로 하여 ‘금강산건봉사(金剛山乾鳳寺)’라고 하는데, 금강산 자락은 미시령 북쪽에 있는 신선봉이 남단자락으로 감로봉과 향로봉을 이어 단발령까지가 휴전선 이남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봉사는 감로봉 아래에 있다. 그리고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에 아도(阿道)가 창건할 때는 원각사(圓覺寺)였는데, 758년(경덕왕17)에 발징(發徵)이 중건하여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우리나라 최초로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도선이 중수하여 서봉사(西鳳寺), 나옹이 재중수하여 지금의 건봉사가 되었다.
<금강산건봉사>
절 입구에 있는 만해의 시비 “사랑하는 까닭”을 읊어보고 6∙25 한국전쟁 때에도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범종각을 둘러보고 옛날 642칸의 위용을 자랑하던 절터를 발걸음으로 세어가며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간다. 임진왜란 때 당시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왜병(倭兵)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의승병(義僧兵)을 일으킨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일본에서 찾아와 봉안한 곳이 건봉사적멸보궁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비>
<불이문>
<범종각>
<건봉사 터>
<적멸보궁 진신사리 부도탑>
적멸보궁은 “번뇌의 불꽃이 꺼져 아주 고요한 상태<寂滅>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곳<寶宮>”으로 해석되며, 이것은 ‘육신은 부단히 움직여 게으름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생각도 많이 하여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적멸이 아닌 가 나 스스로 생각해 보며 아래로 내려와 능파교를 건너 대웅전으로 간다.
<건봉사 적멸보궁>
건봉사 능파교는 1708년(숙종34년)에 건립되어 1749년(영조25년)과 1880년(고종17년)에 중수(重修)된 것으로 대웅전지역과 극락전지역을 연결하는 홍교(虹橋, 무지개다리)로 비교적 규모도 크고 보존이 잘된 상태이다. 대웅전은 여느 사찰과 비슷하고 대웅전 밑 측면에 있는 만일염불원(萬日念佛院)에 마련된 ‘석가세존 진신치아사리 친견장’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 치아사리를 친견하고 나온다.
<건봉사 대웅전>
<건봉사 만일 염불원-진신치아사리 친견장>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가 처음 시작한 건봉사에는 ‘등공대(騰空臺)’란 곳이 있다. 민통선 철조망 안에 있어서 자유로이 가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안내자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다. 우리는 ‘고성군 문화관광 해설사’이며 ‘꽃내마루 약초방’ 최점석원장의 안내로 ‘해탈의 길’을 따라 등공대로 발을 옮긴다. 주의사항은 첫째 정해진 길 외로 이탈하지 말 것. 둘째 길가는 도중에 함부로 사진을 찍지 말 것. 셋째 안내자 앞으로 앞서 가지 말 것 등을 신신당부하며 첫 번째 철조망 출입문을 열쇠로 열고 통과한다.
<해탈의 길 등공대 철책문>
한 오리쯤 소나무가 우거진 오르막길을 걸어오니 부도탑 비슷한 원통형의 돌탑이 나온다. 측면에 “三十一人謄高 遺蹟紀念之塔(삼십일인등고 유적기념지탑)”이라고 음각된 탑이 서있는 곳이 등고대다. 등고대는 747년에 발징화상께서 정신 양순 등 수행승 31인과 신도 1,820명의 참여로 아미타만일염불회를 결성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念誦)하며 만일동안 신행을 닦았는데, 29년이 지난 776념(병진년) 7월 17일 아미타불께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나타나서 수행승 31인을 극락세계로 이끌었던 자리에 건립되었다.
<건봉사 등공대>
<탑에 새겨진 글씨-三十一人謄高 遺蹟紀念之塔>
바로 옆에는 나무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멀리는 산 위로 남북을 갈라놓은 철조망이 선명하다. 가깝게는 녹음이 우거진 숲들이 유월을 실감케 한다. 저 우거진 숲속에서는 사람 때문에 놀란 짐승들이 숨죽이며 우리들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있을 것이고, 낯선 이방인을 신기하게 관찰하는 녀석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때문에 불편을 겪어야 했던 이웃들에게 속으로 미안한 마음 전하며 되돌아서는데, 허리에 천년 인고의 풍상을 동여 맨 소나무 하나가 눈길을 끈다. 생김새가 꼭 근육이 잘 발달된 아가씨 엉덩이 같다.
<등고대에서 바라본 산과 숲>
<엉덩이 모양의 엉거주춤 소나무>
주의사항을 되새기면서 내려올 때는 ‘지뢰조심’팻말이 자주 보이고, 중간지점에는 지뢰 견본을 진열해 놓았다. 되돌아 나올 때도 열쇠로 철조망 문을 열고 나온다. 절 밖으로 나와 햇빛은 옆으로 누워 그림자를 길게 드리울 때, 소나무 두 그루는 낯익은 풍경을 연출한다. 영락없이 국보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와 비슷하다. 건봉사를 떠나 금강산 콘도에서 첫날을 마감하고 또 내일을 기약한다.
<지뢰 견본>
<건봉사 앞 소나무>
황홀한 동해의 일출을 기대하고 새벽잠에서 깨어 해변으로 나간다. 그런데 하늘은 비오기 직전 모습이다. 혹시나 두껍게 낀 구름사이로 실낱같은 햇빛 한줄기라도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며 기다리는데 이것도 허사다. 숙소 바다 건너에 있는 작은 섬은 수반(水盤)에 나무꽂이를 한 모양으로 소나무가 가득하다. 여러 번 보았어도 아직까지 이름을 몰라 ‘솔섬’으로 명명해 본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꿀맛 같은 잠을 짧게 잔다.
<솔섬(?)>
전에는 ‘통일전망대출입신고소’에 가서 신고를 하고, 안보교육을 받은 후 자동차를 타고 가야 했던 곳을 오늘은 해파랑 길 50구간이 완전히 개통되어 최북단 ‘통일전망대’까지 걸어서 가는 날이다. 황태해장국으로 속 풀이를 하고 열을 맞춰 이동한다. 신고소에서 소정의 절차를 밟은 후 처음으로 걸어보는 땅으로 걸어간다. 원래 명파리 해변까지는 걸어 갈 수는 있었으나 통일전망대로 갈 때에는 다시 돌아 나와 수속을 밟아야 했고, 재진검문소 1㎞전방부터 통일전망대까지는 걸어서 들어가지 못하던 곳이었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산길을 오르내리며 해파랑 길 50구간을 본격적으로 트래킹한다. 처얼썩 처얼썩 파도치는 소리만 들릴 뿐 숲에 가려 동해바다는 보이지 않고 작년 가을 길을 잘못 들어 고생했던 숲길이 그나마 아는 척하는 것 같다. 산속의 뽕나무는 오디가 주렁주렁 열렸고, 조금 이른 산딸기도 빨간 얼굴을 내민다.
<싸리 꽃>
매서운 겨울을 잘 이겨낸다고 이름이 붙은 인동초(忍冬草)는 유난히 많이 보이는데, 혹독한 겨울이 와도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들의 간절함을 말하리라. 인동초는 하얀 꽃으로 피었다가 수분(受粉)이 되면 노란색으로 변하여 노란 꽃과 하얀 꽃이 섞여 있어 금은화(金銀花)로도 불린다.
<인동초-금은화>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명파리 해변이 기다린다. 해변은 철조망으로 막혀 들어 갈 수 가 없고, 주변에는 승마장이 있어 손님을 기다린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행군을 계속한다. 출렁다리를 건너 조금 북으로 올라가니 민통선 구간이 나온다. 초계근무하는 군인이 나와서 오와 열을 맞춰 인원을 파악한 다음 주의사항을 당부한다. 첫째 2열 또는 1열종대로 줄을 맞춰 가되 절대로 줄을 이탈하지 말 것, 둘째 군사지역이므로 어떠한 사진도 찍지 말 것, 셋째 주변이 지뢰매설지역이기 때문에 길 외에 다른 곳으로 들어가지 말 것 등이다. 그러나 해당화 향기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해당화>
막 출발하여 누군간가 군가를 부르자고 하니까 선창에 맞춰 군가 “진짜사나이”가 행군대열에서 메아리 쳐 동해바다와 휴전선 넘어 북녘 땅으로 뻗어 나간다. 출입허가를 받은 농부들이 논과 밭에서 농사에 열중하고, 파도는 시원한 바람을 실어와 이들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준다. 금계국이 활짝 핀 지역에는 번식력이 강한 개망초도 쪽을 못 쓴다.
<금계국>
새로 7호선 국도가 휴전선전망대까지 확장 개통이 되어서 우리가 걷고 있는 구 국도는 교통량이 적은 편이다. 가끔 군용차들이 도반들의 안전을 위해선지 가끔 지나다니고, 교통량이 조금 번잡하거나 취약지점에서는 초병이 있고, 국군장병들이 교통수신호로 안전을 도모한다. 통일전망대 초입에 있는 DMZ박물관 앞에서 부터는 통일전망대로 진입하는 차량이 많아 정체가 매우 심하다. 오히려 걷는 우리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부산에 시작되어 함경북도 옹성까지 이어지는 7호선 국도가 그냥 북한으로 쭉 뻗어 원산, 함흥, 청진을 거쳐 두만강 너머 러시아의 연해주로 향했으면 좋겠다.
<확장 개통한 7호선 국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에 소재한 통일전망대는 DMZ와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해발 70m의 높이에 위치하여 금강산의 구산봉과 해금강이 지척에 보인다. 그리고 맑은 날에는 전방 10시 방향으로 신선대, 옥녀봉, 채하봉, 일출봉, 집선봉 등 천하절경 금강산이 잘 보인다는데 오늘은 날씨가 흐려 보이질 않고, 전망대에 비치된 모형을 보면서 금강산, 해금강, 낙타바위, GP,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갈 수 없는 우리 땅이 여기에 있음을 실감한다. 내려오는 계단 옆에 서 있는 부처님 상과 성모마리아 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우리의 통일을 염원하는 것 같다.
<해금강 낙타봉>
<부처님 상>
<성모님 상>
통일전망대를 빠져나와 인근의 DMZ박물관으로 이동한다. DMZ박물관은 남∙북한의 평화와 안전을 바라는 전 국민의 염원을 담아 2009년 8월 14일에 문을 열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의 상징인 DMZ(Demilitarized Zone)를 통해 한국전쟁 발발 전후의 모습과 휴전협정으로 탄생한 휴전선이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 동족 간 이산의 아픔, 지속적인 군사적인 충돌 그리고 60년 이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생태계 등을 ‘축복받지 못한 탄생’, ‘냉전의 유산이 이어지다’, ‘그러나 DMZ는 살아 있다’, ‘다시 꿈꾸는 땅 DMZ’ 등 4개관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DMZ박물관 전경>
<DMZ 설치미술>
<대북선전용 확성기>
<통일을 염원하는 종이 쪽지들>
우리는 왜 여기에 오면 마음이 개운치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손만 뻗으면 금방 잡힐 것 같은 우리 땅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설령 가더라도 제3국을 통해 가야만 한다. 그리고 실수로 북녘을 향해 윙크만 해도 ‘종북’으로 몰리는 이상한 나라임에 분명하다. 그저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철새들이 전해주는 안부나 주고받는 처량한 신세가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야외 바람개비 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