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와인 값이 비싼' 나라다. 똑 같은 브랜드와 빈티지의 와인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2~3배 비싸니 그럴 만도 하다.
미국 나파밸리의 유명 와이너리 오퍼스원은 방문객을 대상으로 와인을 병당 200달러(약 21만원) 내외에 판매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매가가 50만원 대다. 프랑스 론 지방의 일명 '교황의 와인' 샤또네프 뒤 빠쁘는 자국에서는 2만원 정도, 바다 건너 미국 대형 마트에서도 운 좋으면 40달러 선에 산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7만원을 호가한다. 파리에는 품질 괜찮은 6000원짜리 부르고뉴 피노누아 와인이 널렸는데 우리나라는 이 정도 되면 3만원 이상 지출을 각오해야 한다.
그 이유는 수입가격의 70%에 달하는 각종 세금에 2~3단계에 걸쳐 유통 마진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와인 소매가는 수입가의 3배라는 등식이 성립했었다.
그런 와인 가격체계에 변화가 일 조짐이다. 유통업계의 대세로 자리잡은 가격파괴가 와인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정부가 와인 가격을 낮출 요량으로 주류 수입업자가 직접 소비자에게 와인을 팔 수 있도록 허용한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와인 소비자들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로 인해 시장 판도는 크게 변했다. 와인 시장도 거대 자본이 이끄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것.
영세 수입업자는 소비자에게 직접 와인을 팔 유통망이 없다. 결국 소매상이나 레스토랑에 공급하거나 이마트 롯데마트 등 대형 마트에 납품해야 한다. 문제는 대형 마트들이 모두 국내 굴지의 그룹 계열사고 이들은 대부분 와인 수입업체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다. 수입가에 약간의 이윤만 붙여도 남는 장사니 유리한 위치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잘 팔리는 와인은 모두가 그룹 계열사가 수입한 저가 품목들이다. 신세계L&B가 수입하고 이마트가 판매하는 칠레 와인 'G7'이 대표적인 예다. 올해는 판매량 면에서 1등으로 등극한다는 예상이다.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은 2만원 미만의 제품들로 바뀌었다. 굳이 고급을 찾지도 않는다. 판매 부진의 영향으로 고급 와인도 가격 파괴 대열에 동참했다. 7~8년 전 10만원을 넘던 와인 다수가 '할인 행사'라는 명분 아래 7만원 미만에 팔린다.
때문에 중소 와인 수입상은 생존할 방법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레스토랑도 와인 판매가 급감했다. 소비자들도 레스토랑에 가 비싼 와인을 마시느니 마트에서 싼 와인과 함께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입에 맞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와인과 매칭해 즐긴다. 다양한 맛의 와인에 음식을 맞추는 것을 '마리아주'라고 하고 이는 주로 소믈리에의 영역이었으나 이제 웬만한 와인 마니아들은 어떤 와인에는 어떤 음식이 좋다는 정도는 다 알고 스스로 선택하는 추세다.
와인 가격의 파괴로 인한 변화는 하루가 다르다. 대체로 건전한 방향이지만 와인까지 대기업이 과점하는 구조로 고착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