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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말씀은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이지만 막상 질문하면 답변이 애매하지요. 그만큼 한국 교회에는 많은 오해가 있고 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구원이기도 합니다. 이 성경적 구원론을 나누려면 3박 4일도 모자라겠지만 오늘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핵심적 내용만 압축해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여수에 있는 구원파에 초청받은 적이 있어요. 거기서 이 구원 문제로 밤늦도록 논쟁한 적이 있는데요, 같은 성경책을 펴놓고 같은 말씀을 읽는데도 구원에 관한 이해가 서로 달라요.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죠. 창세 전입니다.
그런데 구원파에 계신 분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압니다. 그걸 이야기하지 않으면 같은 교회로 인정을 못 받아요. 그들은 자신의 깨달음이나 체험 같은 것으로 구원의 확신을 삼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중심의 확신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말했죠. 저한테 한 번 물어봐 주시라고. 언제 구원받았는지를. 그리고 말했죠. 저는 창세 전에 구원받았다고. 그랬더니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 근거가 뭐냐고. 그래서 제가 ‘나는 나를 믿지 않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했어요. 나라는 인간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는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있기도 전에, 어떤 행위가 있기도 전에, 창세 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었단 말이에요.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행위나 자격과 상관없이 자기 약속으로만 자기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이에요. 이게 참 중요합니다.
그럼, 그 약속부터 확인하고 가죠.
(엡 1장)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있기도 전, 창세 전에, 그러니까 우리의 어떤 행위가 있기도 전에 죄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속량, 구원이 나온단 말이에요. 저나 여러분들이나 창세 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이 말씀은 모두 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성도는 이미 묵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지금 이 역사 속에서 그 아들들이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게 에베소서 2장 20절부터 나오는 그 말씀이거든요. 그리고 미래에 반드시 그렇게 완성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예정 작정 그 자체로 완성이에요. 하나님께는 시간이나 과정이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하나님을 사람 수준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 약속이 이 세상 역사 속에서도 반드시 실행되게 하시려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시작하신 거예요. 바꾸어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티끌이고 없음인 우리를 하나님적인 생명으로 진짜 있음이 되게 하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거예요.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그거예요. 그게 첫 창조입니다. 우리 구원이 어떤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이었는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세상 역사와 만물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물이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 말은 너희들의 구원까지도 너희를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구원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거든요. 그걸 안 보신다는 뜻이에요.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인본에 찌든 세상 교회가, 오늘날 기독교가 인간을 위한 하나님,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 십자가로 변개하고 왜곡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에요. 흔히들 그러잖아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이 이런 말씀에는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나 믿음이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다는 게 문제예요. 그렇게 다들 나 여기 있음에서부터 성경도 보고 설교도 듣고 찬송도 하고 하니까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에베소서 1장의 창세 전 약속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겁니다. 성경에 그런 게 있었나?.. 설사 읽는다고 해도 그 내용을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왜 우리가 있기도 전에 그리스도의 피가 나오는지, 십자가가 나오는지를 알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냥 구원받고 천국 가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하는 그런 것에 아멘 하지 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인지, 왜 우리가 죄로부터 구속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구원론은 세상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어디나 다 있습니다. 불교에도 이슬람에도 다 있어요. 그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가치와 가능성을 긍정해 주고 모든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예요. 심지어 가톨릭에는 연옥설도 있죠. 불교에도 윤회설이 있고. 이런 패자부활전까지 고안해 내는 게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로부터 개혁했다고 하는 개신교마저도 지금은 다시 다 그리로 돌아가 버렸어요. 요즈음 세상 신학교, 우리나라에는 그런 게 별로 없다고 합니다만 외국에 보면 신학교에서 거의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칩니다. 만인 구원설, 차등상급론, 인간 행위가 보태져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는 알미니안 주의, 거기에 기복, 신비.. 이게 온통 인간중심, 자기 구원 중심이에요. 그런 신학, 설교가 세상 교회를 장악한 지 오래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구원파의 구원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을 사유화 하려는 욕심 그건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탐심이에요 생명나무에 손을 뻗치는 탐심이란 말입니다.
로마서 14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혹시 여기에 이렇게 사시는 분 계십니까? 이런 말씀은 그냥 귀로 한 번 듣고 흘리는 정도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니까요.
이 말씀처럼 정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면 우리 구원은 누구를 위한 구원입니까? 주를 위한 구원이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결과물로서 구원이란 말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있었던 약속이 성취된 게 구원이고 그 약속의 일부분으로서 우리의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따로 내 것으로 챙겨 가질 수 있는 내 구원이란 건 없는 겁니다. 서둘러 결론까지 왔는데요.
이같이 성경의 진리는 보편적 인간들에게 참 불편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한 진리를 사랑하고 이 불편한 진리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들만 구원을 아는 거예요. 그들만 우리 몸이 부활해서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그날을 소망하는 그 소망으로 산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다가 8장에서 우리가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요. 그 소망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그 일이 이 세상 속에서도 말씀을 통해서 확인되는 인생을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음 안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는 말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우리 영혼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거든요.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붙들려서 약속이 이끄는 삶, 그렇게 약속의 목적지로 끌려가는 상태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는 그런 구원이 아니고 여러분들은 지금 그 구원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게 참 아픈 거예요. 인간은 언제 젤 행복한 줄 아세요? 자기가 계획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그 결과물도 내 손에 쥐었을 때를 행복이라고 하고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게 불가능해요. 우리 인생의 원인과 결과도 모두 하나님께 있어요. 그걸 우리의 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말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하는 그 믿음이 우리를 지금 그 믿음의 목적지로 데려가고 있어요. 요한복음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너희를 띠 띠어서 원치않는 길로 데리고 가고 있다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 ‘믿음으로’. 아벨, 에녹, 노아, 모세, 다윗.. 그들 앞에 붙는 말이 믿음으로입니다. 주어가 믿음으로예요. 바꾸어 말하면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에 붙들려서 약속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겁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오실 그리스도. 그래서 그들 모두가 그 약속으로 구원받았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세요. 마치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이 되지 않기로 하는 것처럼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엡 1장)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 이 말은 교회가 아니면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하지 않기로 하셨다는 뜻입니다. 놀랍죠? 그것을 성경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랑 아니에요.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하시고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는 분이신데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 곧 여러분이 아니면 스스로 충만치 않기로 하신 그것 그 사랑이에요.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된 거예요. 그 사랑으로부터 창조가 시작되고 그 죽음 같은 사랑 안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분과 영원을 살게 된 것입니다. 아니 지금부터 그 영원을 살고있는 여러분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런 큰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래서 성경은 오직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들만 아까 말씀드린 그 구원에 대해서 ‘아멘’ 하게 된다고 하는 거에요. 내가 아닌 주를 위한 구원에 우리가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그 구원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읽은 에베소서 1장의 핵심 내용은 창세 전, 즉 인간이 있기도 전에 확정된 하나님의 약속에 피조물인 인간이 끼어들 여지가 1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우리가 요청한 적도 없고 협조한 적도 없는 그런 창세 전 약속으로서의 구원이에요. 우리 구원의 확신은 그 약속에 있다는 겁니다. 이보다 더 틀림없는 건 없습니다. 결코 변하지 않는 약속 이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확신은 없단 말이에요.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으로서 내가 예수를 믿게 되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게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란 말이에요. 자 보세요.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으면 구원의 주체가 누구예요? 나잖아요. 그건 믿음이 아니고 행위예요. 오후 예배에 목사님이 야고보서를 하신다고 하는데, 야고보서에 기록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에요.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의 행하심에 의해서 그 십자가로 격발되어 나오는 그 믿음, 그 행함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의 그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자유주의 신학의 원조죠. 그 슈바이처는 신학 박사 학위까지 있는데 죽을 때까지도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셨다는 그 주되심을 안 믿었단 말이에요. 예수는 인간들을 가르치고 교훈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지 않으면 어떤 신학 지식을 가지고, 어떤 선행을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늘날도 보면 아는 분들은 참 많아요. 십자가도 알고 예수도 알고 복음도 알고 십자가도 아는데, 믿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참 힘들어요. 그래서 구원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의 구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오직 은혜라는 말은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의 괴수에게만 오직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끝까지 갚을 수 없어야 은혜로 남습니다. 부흥사들 흔히 하는 말 있죠? 은혜 받아놓고 입 싹 닦고 있다고. 왜 헌금 안 하냐고. 니들은 다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하나님의 집은 이렇게 낡았는데도 건축헌금 안 하는 놈들, 은혜 안 갚는 나쁜 놈들이라고 사기를 쳐요. 그런데 그 사람 은혜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런 소리 못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신 그 은혜를 대체 무엇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서울에 있는 큰 교회 이천 억짜리 예배당 지으면 은혜 갚는 건가요? 어떤 신부처럼 아프리카에 가서 빈민들 돕다가 암에 걸려 죽으면 그게 은혜 갚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도 모욕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그랬잖아요. 이제도 내가 눈물로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이게 종교인들의 한계예요. 열심히 교회 다니고 예수도 믿고 복음도 안다고 하는데, 그들이 전부 그 은혜를 더럽히고 있단 말입니다. 은혜는 끝까지 은혜로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인간 행위의 열심이나 어떤 종교적 기술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믿음이 등장한다는 건 먼저 너희의 행위는 아니라는 뜻이에요. 너희의 어떤 행위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믿음이에요. 그래서 이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믿음이에요. 한 마디로 내가 예수 믿고 싶다고 해서, 절에 안 가고 성당 안 가고 장로 교회 나왔다고 해서 믿어지는 예수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주 되신 분과의 관계로서의 믿음이에요. 여기서 주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신 한분을 말합니다. 그분과의 관계로서 믿음이에요. 그리고 그 관계는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게 참 중요한 거예요. 내가 열심히 예수 믿어주고 교회 나오고 헌금 많이 하고 열심히 충성 봉사하면 그분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그게 아니거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거 참 불편한 진실입니다. 오직 그분의 선택이고 또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들만 그 관계를 가진단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게 우리의 구원이에요.
(엡 2장)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분명하죠? 이렇게 성경에서는 은혜와 믿음이 동의어로 쓰입니다. 발음은 달라도 같은 뜻이에요. 그런데 이 성경의 언어들이 교회 안에서조차도 오해되고 변질되어 유통되다 보니까 평생 교회 다니고 성경을 백독을 해도 예수를 모르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는, 진리는 감추어져 있어요. 세상은 반드시 오해해야 정상입니다.
이 성경의 예수, 이 땅에 피를 남기고 가신 그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가 믿고 싶은 예수를 믿는 그것을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우상이에요. 이렇게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진리를 믿지 못하고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것을 성경은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보편적 인간들은 진리보다 불의, 즉 비 진리를 더 좋아해요.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이지요. 이렇게 구원받지 못할 자는 끝까지 구원받지 못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자 그런데 세상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받겠다고 온갖 방법론을 연구하고 구도의 길을 찾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한 마디로 인간들의 손을 떠나 있습니다. 이걸 인정해야 해요. 어떤 방법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쫓아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천사와 화염검으로 막으셨어요. 그런데도 인간들은 그 길을 끝없이 찾으려고 합니다. 그게 인류 역사에 나타난 종교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인간의 손을 떠난 구원입니다. 어떤 가능성도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게 이 땅에 오신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나는 아니오. 십자가 지신 당신이 하나님 맞습니다.’ 이런 무릎 꿇음을 빌립보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영광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끊임없이 생명나무에 손을 뻗치려고 합니다.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 본성이에요. 로마서에서는 그것을 탐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탐심을 죄라고 해요. 그렇게 교회 다니면서 죄짓고 예배드리면서 죄짓고 성경을 읽으면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에게서 난 종교인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구원에 대해서 이해하기에 앞서서 먼저 알아야 하는 게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과연 죄란 무엇인가?’ ‘왜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인가?’ 그냥 하나님이 누구 말대로 성령부터 보내셔서 우리를 성화시켜서 데려가시면 되는데 왜 굳이 죄로부터 구원인가?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우리는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해서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죄는 단순히 윤리 도덕적 죄, 사회법을 범한 죄가 아닙니다. 물론 그 죄도 죄에요 그러나 본질은 예수를 안 믿는 게 죄예요. 예수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죄입니다. 보편적 인간,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된 인간은 절대 이 땅에 오신 예수 앞에 무릎 꿇을 수가 없어요. 우리 몸이 그런 몸이에요. 그렇다 보니 교회 나온 사람들도 다들 자기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요. 이렇게 자기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그 자체가 죄란 말예요.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는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는 다른 죄입니다. 그럼, 성도에게 있어서의 죄는 무엇입니까? 그건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기 위해서 허락하신 죄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죄이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 죄를 거룩한 죄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일반적 죄와 성도의 죄는 그 용도가 다릅니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의 죄를 아예 보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자기 등 뒤로 던지셨다고 합니다. 또 로마서 3장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간과하셨다고 해요. 그렇게 ‘우리 죄를 간과하시므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이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죄도 사망도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한 구원이다.. 내가 따로 챙겨서 사유할 수 있는 구원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을 죄로부터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정하신 우리의 구원이 어떤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전능하심인지, 어떻게 성도들에게 실행되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5장)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여기서 말한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 처음 자리를 이탈한 아담이에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생명력만으로 존재하는 그 처음 자리를 이탈한 아담입니다. 하마르티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나와 하나님이라는 개별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한 몸, 하나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자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서늘한 날에 아담을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는데 아담이 나무 뒤로 숨어버려요. 나무 뒤라고 하는 자기 공간을 따로 만들어 버렸어요. 이게 죄의 증상이에요. 처음 자리 이탈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죄는 소위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아담의 자유 의지가 아니에요. 성경에는 원래 자유 의지라는 말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오실 자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기 위해서 선악과도 있어야 했고 뱀도 있어야 했고 아담의 처음 자리 이탈도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게 로마서 5장에서 사도가 밝히는 구원의 비밀이에요.
그런데 이 말씀의 진의를 잘 모르니까 ‘왜 하나님은 에덴에 선악과를 두셨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참 많거든요. ‘왜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할 때 막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걸 아셨을까 모르셨을까?’ ‘하나님은 왜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방치하셨는가?’ 이게 참 쉬운 내용 같지만, 이천 년 교회신학이 아직도 풀지 못해요. 그래서 만들어낸 게 아담의 자유 의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려고 기특한(?) 종교인들이 자유의지란 말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러나 그 아담에게는 노예 의지밖에 없다는 것이 복음 전도자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십니다. 인간들이 정의한 죄와 의에 가둘 수 없는 하나님이세요. 이사야의 말대로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시며 평안도 짓고 환난(악)도 창조하십니다. 여기서 환난으로 번역된 ‘라아’는 악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죄도 악도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선이에요. 그래서 에덴동산 중앙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를 두실 수도 있고, 로마서의 말씀대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하게 하실 자를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을 인간의 윤리 도덕이나 인간의 신학이 제한할 수 없단 말입니다. 피조물 주제에 "하나님, 그러시면 안 되잖아요. 왜 그러시는데요.." 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 교회가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그런 인간들을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롬 11장)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놀랍죠? 성령 받는 사도가 우리 인간들에게 꼭꼭 감추어놓고 있는 죄성, 그 종교성을 알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기록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에게서 원인과 결과를 챙겨 가지려고 합니다. 인과응보,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그렇게 우리는 동등한 존재로 하나님을 대할 수 없어요.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계시고..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에요. 그분의 생명력으로만 존재 가능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많은 인생의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의 구원을 말하기 전에 먼저 범죄한 죄인, 하나님이 불순종에 가두어 두신 그 죄인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죄인, 죄인 말은 잘하고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말은 잘하는데, 정말 죄인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실감하지 못해요. 익제씨 성경에 저주가 가장 먼저 기록된 게 어딥니까? 창세기 2장이죠.
(창 2장)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정녕 죽으리라. 이 말은 죽고 또 죽으리라는 뜻이거든요. 무트 타 무트, 범죄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이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현실은 딱 하나예요. 죽음입니다. 죽음만 현실이에요. 죄의 삯으로서 죽음. 그래서 이 죽음, 이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구원도 알지 못합니다. 구원은 그 저주로부터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주어지는 구원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문제, 하나님의 저주를 이 세상에 직접 보여주러 오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저주가 예수님에게 실행된 사건이 십자가예요. 이천 년 전 골고다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십자가로 실행된 것입니다. 세상 어느 인간도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저주를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에서 받으셨어요.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사람, 유일하게 생명이 있는 그 분이 받으신 하나님의 저주로서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만 진짜 죽음이에요. 창세 전에 약속된 언약의 죽음, 진리의 죽음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담에게서 난 우리들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에요. 죽음 안에서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죽은 자들의 죽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런 우리에게 진짜 죽음과 진짜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사건으로서 죽음이고 유일한 현장으로서 십자가예요. 그래서 구원은 그 십자가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모르면 구원도 모르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 그 죽음을 죽은 자들, 그 언약의 죽음이 나누어진 자들에게만 그 생명도 나누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연합이라고 해요. Union Christ.
그렇게 말은 잘하면서도 그 죽음은 싫어합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에는 금기어들이 참 많습니다. 목사부터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해요. 죽음, 심판, 지옥, 저주 등의 말은 하지 못하게 합니다. 교인들은 지금 잘 살고 있는 내가 더 잘 살 수 있는 그런 복음을 이야기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참 죄송하게도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도 저주했던, 하늘의 천사라도 저주받으라고 했던 다른 복음이란 말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정상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을 좋게 하는 그 다른 복음이 온통 세상 교회를 덮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복음을 이야기하면 교회가 안 되니까요. 있던 사람도 다 떠나버린단 말입니다. 이렇게 종교인들은 진리엔 관심이 없어요 교회에 관심이 있지...그 교회가 나니까 그렇습니다.
이천 년간 계속 있어 온 전쟁이 있습니다. ‘십자가냐 교회냐’의 전쟁이에요. 참 아이러니하죠? 십자가를 택할 것인가 교회를 택할 것인가의 이 전쟁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주 대놓고 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이 그 말씀이에요.
(갈 2장)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입니다.
(갈 3장)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렇게 십자가는 비밀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성경을 백독 해도 십자가를 모를 수 있어요. 그래서 성령을 십자가의 영이라고도 하고 아들의 영이라고도 하는 겁니다. 그 영이 아니면 십자가는 감추어져 있어요.
십자가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의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의 현장성은 성도들의 전 인생에 작동하는 현실로서의 십자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자석처럼 자기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십자가입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은 그 십자가에 언제 못 박혔습니까? 아까 읽었잖아요.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근처에도 가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가 못 박힌 십자가에 대해서 비밀로 감추어진 것을 기록해 놓았어요. 창세 전에 묵시 안에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현실, 영원 전에 죽임당한 어린양. 그렇게 십자가는 창세 전에 이미 세워진 십자가이고 그 어린양의 피 뿌림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세상 속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겨 전부 하나님께 함께 드려졌습니다. 그 영단번의 제사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의 구원은 완료된 것입니다. 더 보탤 게 없어요.
그 구원을 우리 인생을 통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시간은 완료된 미래로부터 오는 시간입니다, 세상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고난이에요. 묵시와 역사를 겹쳐서 살아내는 고난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구원이고 약속을 위한 구원이며 약속을 성취하신 한 분 주를 위한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영원 전 약속이라는 묵시의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가 있습니다. 거기에만 생명이 있어요. 다른 데 아무리 찾아도 길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그 십자가 안에만 그 길이 있어요. 그래서 십자가는 그 영원의 세계가 열리는 문이고 그 문을 여신 분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여신 그 문으로 들어갈 자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 가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계 21장)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고 들어가리라
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이런 말씀을 보면 막 설레지 않습니까? 빨리 가고 싶죠? 아닌가?
이렇게 십자가를 안다는 건 단순히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영원의 세계, 이미 이루어진 언약의 세계와의 만남이에요. 영원한 생명과의 조우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새 언약은 그거예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에 주신 모든 율법과 성전, 제사 그리고 선지자들까지가 옛 언약인데, 그 옛 언약은 전부 오실 그리스도와 그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가리키고 모형 하는 것들로서 옛 언약이에요. 또한 그 옛 언약들은 저주 아래 있는 인간들의 구원 불가능을 드러내는 용도로서 옛 언약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모든 저주를 다 끌어안고 죽으시므로 해서 새 언약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단 말입니다. 율법을 옺전케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문, 그 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묵시 안에 이루어진 그것이 다시 한번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앞에서 말씀드린 에베소서 1장의 그 경륜이에요.
(엡 1장)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가 하나님의 경륜을 뭐라고 합니까? 비밀이라고 한다니까요. 무스테리온. 세상에는 감추어진 비밀, 알면 안 되는 비밀, 하나님의 사람인 교회에만 열어 보여주시는 비밀.
자 그러면 이제 그 구원의 비밀을 조금 더 알아봅시다. 말씀 안에서 우리 함께 열어보겠습니다. 앞에서 읽었던 로마서 다시 보겠습니다.
(롬 5장)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2절에는 ‘말미암아’가 연속 나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의 διά (디아) 라는 전치사를 번역한 거예요. 원문에 보면 디아 뒤에 나오는 단어들이 모두 소유격이에요. 헬라어 문법에는 전치사 디아 다음에 여격, 대격이 나오게 되면 ‘무엇을 통해서’ 혹은 ‘무엇에 의해서’로 해석되는데 소유격이 오면 방법, 수단, 도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니까 어떤 주체에 의해서 사용되는 피동적 방법으로서 수단, 도구가 된다는 말이에요.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이렇게 디아 라는 전치사 뒤에 소유격으로 오는 단어들이 뭡니까? 한 사람 아담, 죄, 사망이란 말이에요. 이게 디아 다음에 소유격으로 붙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주체에 의해서 완료된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 아담도 그렇고 죄도 그렇고 사망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오실 마지막 아담까지도. 그러니까 이건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담긴 법적 장치입니다. 죄를 세상에 들여온 아담이나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지배하게 된 죄와 사망,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 오게 되는 마지막 아담까지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성취된 약속,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들이라는 뜻이에요.
그것을 여기 로마서 5장에서는 표상이라고 해요.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었다, 모형이었다. 이 말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같은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참 놀랍죠? 예수님과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같은 역할을 했다. 단순히 아담이 우발적으로 선악과 범죄를 저질러서 하나님이 아들을 부랴부랴 보내어 범죄한 인간들을 구원하는 그런 신파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오늘날 신학자들이 예수는 구원받는 성도들을 대표해서 십자가를 졌다고 합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해서 죄를 지은 것처럼 예수님도 그런 대표성의 원리로 십자가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거 아니에요. 본문의 표상이라는 단어는 그런 유사성 정도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각자 다른 존재가 어떤 주체에 의해서 정확하게 같은 역할을 했다는 말이에요. 한 마디로 아담에게서 희미하게 그림자로 보여졌던 일이 예수님에 의해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저지른 죄를 예수님이 오셔서 그냥 십자가로 해결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같은 일을 했다 는 말입니다. 좀 전에 읽었던 에베소서 1장 10절의 그 일이에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통일되게 하려함이라’는 그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첫 창조.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첫 단어인 태초, 베레시트, 시공간의 시작. 그러니까 내가 성전의 머리로, 성전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유한한 존재들에게 묵시에 완료된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겠다는 선언이 바로 창세기 1장 1절이에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창조를 배경으로 해서, 무대로 해서 하나님의 경륜이 펼쳐진단 말입니다.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 이 때가 찬 경륜이 펼쳐지는 모든 것으로서 이 세상 역사, 그리고 저와 여러분, 교회, 죄와 사망, 천사와 타락한 천사까지 그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여 자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성도들은 이 보이는 현실이 아닌,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세상 밖에서, 자기 밖에서 이 세상과 자기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말씀이라고 하세요. 말씀이 여러분들을 새롭게 창조하면서, 여러분 안에 말씀이 쌓이면서 결국 그 말씀이 되어서, 진리가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과 역사 모두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서 자기 역할을 다 하고 있어요. 우리 구원은 한 부분으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완료된 그것,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우리가 불리어 나왔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심이라”.. 이 영광의 찬송, 이 새 노래를 배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어요. 죄와 사망, 그리고 이 세상 신의 권세까지도.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이 찬송을 계시록 5장에 보면 일찍이 죽임당한 어린 양, 창세 전에 죽임당한 어린 양 앞에서 부르는 새 노래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은 그 새 노래를 배우는 기간입니다. 영원토록 부르게 될 그 찬송입니다. 이 새 노래가 계시록 14장에 다시 나옵니다.
(계 14장)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이렇게 우리가 죄로부터 속량을 받는 목적이 바로 이 새 노래입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부르게 되는 그 찬송을 배우기 위해서 잠시 죄와 사망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어요. 그래서 바울도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죠. 우리 산 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우는 것은 우리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로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노래 우리 인생의 목적이에요.
방금 읽은 구원받은 성도 십사만 사천 그들만 이 노래를 배우게 됩니다. 그들에게만 죄가 죄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간다고 해요.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떠날 준비의 날들을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떠날 준비의 날들. 저와 여러분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사는 게 아니고 항상 떠날 준비의 날들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만 이 세상에 갇히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감당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렇게 떠날 준비의 날들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아직 세상에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어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 되심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그거예요. 다시 말하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의 인생, 우리들의 남은 인생에는 분명한 목적과 목적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 만물은 다 여러분 거예요. 세상 만물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에요. 다른 말로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자 이렇게 여러분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작되고, 그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 죽음 같은 사랑으로 완성된 구원입니다. 모든 건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죄로 오염된 우리는 그 사랑을 사랑으로 담아내지를 못해요. 우리가 원하는 사랑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그 사랑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새롭게 창조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요? 자기 죽음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그 죽음 같은 사랑 안에서 새롭게 잉태되는 아들들, 긍휼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궁 안에서 태어나는 그 아들들과 하나님은 영원을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고 다른 말로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 사랑이 아니면, 죽음 같은 그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것, 그 사랑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대사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다 계획이 있으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죄의 삯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진리의 죽음을 죽어서 첫째 부활에 참여된 거예요. 첫째 부활이 뭐예요?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 안에서 거듭남, 아노텐 위로부터 남. 그것을 이미 첫째 부활에 참여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에요. 이제 여러분의 삶은 오직 한 분을 위한 삶뿐이에요. 아까 로마서에서 그랬잖아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어요. 내 인생 내가 살지 않아도 되는 자유와 평안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그러잖아요.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라. 그가 여러분을 돌보고 계심이라. 우리의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는 주님, 실감하십니까? 그것을 체감시켜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이 원치 않는 일이 여러분 인생에 자꾸 발생하는 거예요. 고난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원하고 정말 사랑하고 붙들고 싶은 그것들을 부득불 하나둘씩 놓아갈 때 그때 내 옆에 계신 주님의 체온이 느껴진단 말입니다. 그렇게 사망의 골짜기를 동행하면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주님이에요.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척박한 광야를 지나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반석으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수로 오늘도 지친 다리를 끌면서 저 멀리 뵈는 시온성, 우리 아버지 집으로 향하는 주성교회가 되시길 빕니다. 그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누리고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끝으로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17절을 함께 읽고 오늘 강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후 5장)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이 행복을 이 짧은 인생 동안 가르치시고 또 한몸의 교회로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땅을 다녀가신 우리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이 우리 구원이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져서 마침내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자로 새롭게 지어져 가는 것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그 아픈 사랑이 날마다 넘쳐나는 우리의 소망이 되게 하시고 그 소망으로 구원받는 거룩한 아들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