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다음은 월주신라가 당시 같은 지역에 있었던 오나라와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한 이재환님의 글입니다. 프리챌 역사마을 http://www.freechal.com/ComService/Management/CsMngHtml/CsHsViewHtml.asp?url=/barosa/home%2Fsecondmun%2Ffreechal%2Dtrit%2Ehtm 에 있는 글을 제가 읽기 쉽게 약간 정리하였습니다. 제가 다른 분의 글을 올릴 때는 꼭 내용에 동의해서는 아닙니다. 이 글에도 제 생각과 다른 곳이 몇군데 있으나 월주신라의 이해에 참조가 된다고 판단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프리챌의 역사마을에 직접 가셔서 이재환님의 신라인 이야기 시리즈를 읽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먼저 양자강 하구의 신라인 거주지부터. 서기 1세기 후반에 반고가 쓴 『한서』「지리지」에는 "회계 바다 밖 동제인들이 20여國으로 나뉘어져 있고 해마다 (漢에 ― 옮긴이) 공물을 바친다"는 기록이 나온다.
회계는 명주(: 절강성 동북쪽)고 그 앞 바다에는 주산군도(群島 : 여러 섬이 모여있는 곳, 제도諸島)가 있으므로, "동제인"은 주산군도에 살던 이민족을 일컫는 말이었을 것이다(김성호 박사). 아울러 동녘 東자에 메기 '제'자를 써서 동제라고 적은 점으로 보아 '동제'는 한족이 ― 주산군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보다 더 동쪽에 있는 곳에서 '메기처럼' 물을 끼고 사는 모습을 보고 ― 붙인 이름이며, 당시 주산군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동제'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중국 역사서는 이민족이 중국과 교역한 사실을 "공물을 바친다" 혹은 "조공했다"고 적기 때문에, 이들이 "해마다" 漢나라에 와서 "공물을 바친다"는 기록은 주산군도 사람들이 절강성에 자주 건너와 한족과 거래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 봐도 어색하지 않다. 그럼 '동제인'은 (우리가 찾는) 양자강 하구의 신라인과 어떤 관계일까? 석탈해 이사금의 신라 건국시기와 『한서』가 쓰여진 시기(그리고『한서』가 다루는 내용)를 보면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잡힌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신라는 서기 57년 석탈해 이사금이 세운 나라다. 이때는 아직 마한의 제후국들이 남아있었고 백제는 남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진 못하고 있었다. 침미다례(제주도)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또 『한서』는 반고(그는 서기 92년까지 살았다)가 정리했고 그가 죽은 뒤 동생인 반소가 완성했으므로(서기 100년경)「지리지」에 나오는 '동제인'은 전한시대나 서기 100년 이전에 주산군도로 옮겨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57년에 세워진 신라와 서기 100년경(또는 그 이전)에 주산군도에서 활약한 '동제인', 서기 1∼2세기에는 아직 남해안까지 내려오진 못한 백제(<새로 쓰는 '동쪽나라 이야기'> ― 이하 <이야기> ― [10]편 참고), 신라와 친하게 지닌 침미다례(제주도) 왕국. 이들 사이에는 우연이라고 보기 힘든 연결고리가 있다.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서기 1996년 '맑은소리'에서 펴냄)을 쓴 김성호 박사는 동제인을 "백제인"으로 보고 있으나 ―『삼국사기』와『일본서기』의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 서기 3세기에야 경상도에 세력을 뻗치고 제주도를 속국으로 만든 백제가 그보다 더 먼 곳에 있는 주산군도를 차지할 만한 힘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동제는 '동제인'이 스스로를 부른 이름이 아니라 한족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동제를 백제로 보긴 힘들다.
따라서 '동제'인은 신라인이나 침미다례 사람이라고 봐야 하며, 우리는 신라가 세워진 지 44년 만에 신라인이 주산군도를 차지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침미다례[:탐라]는 ― 기록과 전설에도 나타나듯이 ― 동쪽에 있는 일본열도의 선주민[?]과 접촉했지, 서쪽으로 간 적은 없다. 설령『삼국지』나『후한서』의「한전」에 나오는 주호국州胡國이 침미다례라 하더라도, 그들은 ― 한漢이 아닌 ― 한韓과 거래했다고 적혀 있기 때문에 동제인을 제주도 사람으로 볼 순 없다. 이 글에서는 일단 동제인이 신라인이라고 단정하고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이들은 서기 1세기에 주산군도를 차지한 뒤 2세기 중반에는 영역을 절강성 동부까지 확장한 듯하다.『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내해 이사금이 "나라의 서쪽 지방"을 위문하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서기 198년에 일어난 일이므로, 신라인들은 그 전에 절강성 동부에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인은 전한 말부터 후한 초기까지는 漢나라와 사이가 좋았고, 후한이 공식 무역로를 바꾼 뒤에도(서기 83년) 쇠퇴하지 않고 "무역을 오히려 독점하게 되었을 것이다."(김성호 박사) 110여년 뒤인 후한 말까지 이렇다 할 전투나 대립이 나타나지 않고 '해적'이 나타났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후한이 흔들리는 2세기 말부터 절강성 항주만 일대(주산군도가 있는 곳)와 전당강 유역에 해적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경기가 나빠져 무역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자강이 절강성 동부를 휩쓸어 농사까지 망치자 주위의 절강성 사람들과 함께 노략질(!)을 한 신라인인 듯하다(본국이 감세[:세금을 깎음] 정책을 펼쳐 신라 본국과 식민지가 뭉칠 수 있었지만, 감세정책이 재정난을 푸는 데는 별 효과가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전당강의 해적을 소탕해 남경 일대의 민심을 얻은 뒤 절강성과 주산군도의 신라인들에게 해적질을 그만두고 오(吳)나라에 협력하자고 회유했을 것이다.(그의 아들인 손책과 손책의 동생인 손권도 이런 정책을 계승했다) 손견이 권력을 쥔 뒤 절강성 일대에서 해적질이 깨끗이 사라지고 오나라가 위나라에 비해 배를 이용한 해상작전을 활발하게 펼쳤다고 적고 있는『삼국지』의 기록은 이후 신라와 오나라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음을 암시하고 있고 ― . (신라도 '약탈하는 오랑캐'라는 누명을 벗을 수 있어서 좋고, 바로 옆에 있는 강한 나라와 원수가 되느니 차라리 협력해 안전을 보장받자고 생각해 오나라와 손을 잡지 않았을까?)
적어도 손권의 부하였던 여몽이 촉에게서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붙잡을 때(219년)까지는 두 나라의 관계가 좋았음을 알 수 있다(『삼국지』에는 여몽이 "白衣로 하여금 노를 젓게 하여" 오나라의 군사를 몰래 나른 뒤 촉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형주를 쳤다고 적고 있음. 김성호 박사는『삼국지』「부여전」의 "흰색 (옷)을 즐겨 입는다(衣尙白. 의상백)."는 구절과『수서』「신라전」의 "빛깔이 흰옷을 좋아한다(服色尙素)."는 구절을 들어 이 기록이 "백의민족"이 오나라에 협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2년이 흐른 뒤에는 두 나라 사이가 뒤틀어진 듯하다. (손권의 명령을 받은) 오나라 장군 위온과 제갈직이 "甲士 만 명(『삼국지』)"을 이끌고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쳤기 때문이다(230년).
이주(夷州)는 말 그대로 '오랑캐의 땅'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吳군이 한족의 땅이 아닌 이민족의 땅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주와 단주"를 쳤다고 적으면서도 단주만 "바다에 있다"고 따로 설명한 점으로 보아, "이주"는 뭍(육지)이고 "단주"는 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단주는 어디일까?『삼국지』에 나오는 기록대로라면 제주도와 대만을 후보지로 들어야 할 것이다.『삼국지』에 "단주는 바다에 있다"고 적혀 있고 "그곳은 매우 멀어 졸지에 갈 수 없다"고 덧붙이기 때문이다. 오나라가 칠 수 있는 섬은 대만, 주산군도, 제주도밖에 없다는 점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당시 바다를 다니는 배를 만들지 못하던 한족이(적벽대전은 양자강 중류에서 일어난 싸움이며, ― 선박 전문가나 해양학자들의 말을 따른다면 ― 바다를 다니는 배로는 강을 건널 수 있어도 강을 건너는 배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덧붙이자면 한족이 배를 타고 널리 퍼져나간 때는 훨씬 후대인 명나라 말기이다) 대만이나 제주도처럼 먼바다 건너에 있는 섬을 치러 갈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며(중국의 역사기록도 한족이 대만에 건너오기 시작한 시기를 명말청초라고 적고 있다), 손권처럼 병법을 잘 아는 임금이 부하들에게 실패할 게 뻔한 침공을 명령하진 않았을 것이므로 단주를 제주도나 대만으로 보긴 힘들다.
따라서 남은 후보지인 주산군도가 '단주'가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는데, 중국 절강성의 지리지들은 이 생각에 날개를 달아준다.『가정영파부지』(이하『영파부지』)는 "단주산(亶州山)은 현에서 동북쪽으로 35리 되는 곳에 있다."고 적고 있고 (영파부寧波府는 오늘날의 절강성 영파寧波시)『태평환우기』명주 무현 조(條)에는 "단주산(亶州山)은 현(무현 ― 옮긴이) 근처의 동북쪽 바닷가에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이다.
"명주 무현은 오늘날의 절강성 영파시이므로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35리'이면 자연히 주산군도의 어느 섬일 수밖에 없다."(김성호 박사) 주산군도에 있는 섬 보타도는 영파시에서 - 동북쪽으로 - 대략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동북쪽으로 35리"정도 떨어져 있다는『영파부지』의 기록이 정확함을 알 수 있다. (덧붙이자면『보타기승』이라는 기록에는 "보타도 서북쪽에 당두산塘頭山이 있다"고 적혀 있어 이곳이 '단주'의 중심지였으리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당塘은 중국어로는 단亶처럼 '탄'이라고 읽으며, 두頭는 '두목, 머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손권이 왜 '단주'를 치라고 명령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단주'가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나 대만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주산군도였기에, 손권은 오나라 군사들이 해상전에 익숙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쉽게 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 위온과 제갈직을 보냈으리라. 예상대로라면 吳軍은 주산군도의 '오랑캐'들을 깨뜨리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어야 했다(손권의 계산대로라면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였다. 오군은 단주를 깨지 못하고(『삼국지』에 "다만 이주에서 수천 명을 데려왔다."고 적혀 있는 점, 단주와 이주를 똑같이 쳤는데도 단주 출신 포로가 안 적혀 있다는 점이 오군의 공격이 실패했음을 암시한다) 이주만 친 뒤 돌아왔기 때문이다. '동제인(「단주」人)'들이 "수많은 섬들 사이를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해상 게릴라전으로 맞섬에 따라, 위온과 제갈직이 비록 만 명의 甲士를 동원했더라도 적수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김성호 박사)
단주를 친 지 1년 만에(231년) 손권이 위온과 제갈직을 "모두 조칙(황제가 내리는 명령 ― 옮긴이)을 어기고「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옥에 넣은 뒤 베어 죽였다."(『삼국지』에서.「 」는 옮긴이가 강조하려고 붙인 부호임)는 기록도 단주 공격이 실패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주산군도에는 신라인이 살고 있었고 백제는 4년 전에야 겨우 가야 연맹과 침미다례국을 쳐 속국으로 만들었으므로(〈이야기〉 10편 참고) 이 승리는 백제인의 승리가 아닌 신라인의 승리인 것이다. 이 무렵 본국은 백제의 공격을 막기에(〈이야기〉 9편과 10편 참고) 급급해 식민지를 도와주지 못했을 것이며 신라인들은 스스로 오나라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물론 신라가 일방적으로 이긴 싸움은 아니었다. 단주(주산군도)의 신라인은 오군과 싸워 이겼지만, 이주에 살던 사람들은 오군에게 짓밟히고 "수천 명"이 잡혀갔기 때문이다. ============================================
▶ 보충설명 :
夷州는 ― 북송 학자가 쓴『태평어람』에 인용된 책(따라서 송나라 이전에 쓰여진 것이다)『임해수토지』에 따르면 ― "임해현 동남쪽 2천리"에 있기 때문에 중국학자들은 이주가 절강성 대주(임해현)의 동남쪽에 있는 대만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대만은 임해현의 동남쪽에 있기 때문에『삼국지』에 나오는 '이주'도 대만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 '단주'의 위치를 살펴보는 기존 학설과 마찬가지로 ― 이 설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당시 뛰어난 해양민족이 아니었던 한족이(위에서도 말했듯이) 어떻게 대만까지 갈 수 있었느냐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삼국지』에는 오나라가 "갑옷 입은 군사 만명"을 "바다로 보내어" 이주와 단주를 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단주에만 "바다에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지 "이주는 '해중(海中)'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김성호 박사) 따라서 설령『임해수토지』의 "이주"가 대만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이주'가 『삼국지』의 '이주'라고 말할 근거는 없으며,『삼국지』에 나오는 이주는 (오나라 군사들이 "바다"로 간 사실로 미루어볼 때) 육지는 육지이되 바다와 가까운 육지, 즉 바닷가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절강성의 동쪽 바닷가에는 신라오산(新羅奧山), 신라산(新羅山), 신라서(新羅嶼), 신라부산(新羅浮山) 같은 신라계 땅 이름이 많으며, 이들은 주산군도보다 남쪽에 있으면서 강 하구이자 바닷가인 곳에 남아있는 땅 이름이기 때문에, 만약 절강성 동부를 '이주'로 볼 경우 오나라 군사들은 이주를 치러 "바다"와 가까운 땅으로 가야 한다(그리고 단주와 가까우므로 오나라가 둘을 한꺼번에 칠 수 있다).
이것이 김성호 박사가『삼국지』에 나오는 '이주'를 절강성 동부에 있던 신라인의 주거지로 여기는 까닭이며, 이 글을 쓰는 사람도 동의해 '이주'가 신라인의 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신라 식민지의 중심지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 식민지를 다스리던 신라왕(본국의 이사금에게 충성하는 제후)이 누구였는지는 앞으로 자세히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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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軍은 해전에 익숙하지 못한 대신 땅이나 강, 호수에서는 잘 싸웠기 때문에, 단주에서 패배한 대신 절강성에서는 손쉽게 신라인 수천명을 사로잡은 듯하다. 그래도 오군이 입은 피해는 커서 이주에서 이긴 일이 단주에서 진 사실을 '보상'할 만큼 대단하진 못했던 모양이다. 이는 손권이 두 장군을 (이주에서 이기고 돌아왔는데도)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며 사형에 처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오군은 괜히 동맹자를 건드렸다가 호되게 당하고 물러간 셈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나라가 신라의 식민지를 적으로 돌린 일은 오나라에게도 결코 이로울 순 없었다. 북쪽에는 막강한 위나라가 오를 위협하고 있었고 서쪽인 사천성에는 촉이 자리잡고 있었다. 비록 촉이 오와 동맹을 맺고 위를 함께 막고 있다고는 하나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몰랐다. 이제 건업(남경) 동쪽에 있는 신라까지 적으로 돌리면 오나라는 세 방향에서 적을 맞아 싸워야 하며, 신라가 배를 몰고 강을 거슬러올라가 건업을 치거나 오나라를 약탈하는 달갑지 않은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짓밟힌 신라와 화해하지 않고 계속 원수로 남으면 오나라에 반발한 신라가 위와 손을 잡고 오를 치거나, 배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 오가 신라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손권은 나름대로 이런 상황을 계산한 뒤 신라와 화해하기로 한 듯하다. 아마 위온과 제갈직을 사형에 처한 사실을 신라에 알린 뒤, 자신은 침략을 말렸는데 이들이 멋대로 신라를 짓밟고 사람을 잡아갔다고 둘러대고 둘을 죽여 '응징'했으니 이만 화해하자고 요청하지 않았을까? 잡아간 신라인 "수천명"도 그때(서기 231년경?) 돌려보냈을 것이다.
신라도 서쪽의 강대국인 오나라와, 바다 건너 동북쪽에서 (본국에 드나들 수 있는 물길에 자리잡은) 침미다례(탐라)를 차지한 백제 사이에 끼여 짓눌리는 상황에 처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오와 화해해 동맹관계를 회복하고 부담을 덜려고 했을 것이다. 두 나라의 계산이 맞아떨어져, 결국 신라는 서기 231년(또는 232년) 오나라와 화해한 듯하다. 손권은 위온과 제갈직은 사형에 처한 뒤, 그전보다 더 자주 바다에 배를 띄웠기 때문이다.
『삼국지』에는 손권이 주하(周賀)를 "요동"에 보낸 사실(232년)과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서로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236년)이 적혀 있는데, 당시 요동으로 가는 육로는 위나라 땅이어서 오나라가 요동에 가려면 뱃길로 가야 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하며 이 점은 오나라에서 고구려로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두 기사는 손권이 동쪽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뱃길 ― 절강성에서 출발해 황해를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절강성 일대와 上海시 앞바다(주산 군도)가 오나라의 땅이 되었거나, 절강성에 자리잡은 세력이 오나라를 적대하지 않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두 기사가 모두 '이주'와 '단주'를 친 오나라 장군들을 사형에 처한 뒤 일어난 일을 적었으므로(또 '신라현'이 설치되고 신라인이 강제로 복건성에 정착하게 되는 때는 서진 초기니까) 두 나라(신라와 오나라)가 화해한 뒤 오나라가 다시 뱃길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고 짚어보는 것이다.
신라 식민지는 오나라에 협력하기로 한 대가로 서쪽 국경지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으며, 이후 50년 동안 마음껏 장사하고 ― 제주도를 거치는 항로가 아닌 다른 항로로 ― 본국과 왕래할 수 있었다. - 단, 식민지는 오나라가 海南島('하이난' 섬. 광동성 남쪽에 있다. 원래 말레이계 민족이 살던 곳이다)를 [:군사 3만명으로] 칠 때(233년)와 교지(오늘날의 베트남 하노이 市)를 침공할 때(269년) 배와 뱃사공을 빌려주어, 역사에 '침략자의 앞잡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남기고 말았다 ―
한편, 오나라는 신라 식민지의 영향를 받은 자기네 백성들이 농토를 버리고 장사꾼이 되는 현실과 맞닥뜨린 뒤부터 '동맹세력'인 신라를 점점 안 좋게 볼 수밖에 없었다. 북쪽에는 강적인 위나라가 버티고 있어 나라의 힘을 키우고 백성을 통제해야 할 판에, 정작 백성들은 (한 곳에 눌러 살며 좀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으므로 묶어두기 쉬운) 농업 대신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사고 팔기 때문에 왕실이 사람들을 '관리'하기 힘든 상업을 택해 지배체제 자체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손권의 뒤를 이어받은 손량이 몸소 백성들이 "본업[:농업 ― 옮긴이]을 어기고 장강[:양자강] 유역에 배를 띄워 장삿속으로 오르내리니" 통탄할 지경이라고 말한 기록을 보면, 이 문제는 지배층이 심각하게 여길 정도로 컸음을 알 수 있다)
후한 초에 나타난 신라 식민지는 후한 말부터 吳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해적질을 해서 미움을 샀고, 오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해상 무역과 농업을 겸해 그런대로 평온을 누리다가, 이제 '상업'이라는 생존방식 때문에 오나라와 사이가 틀어진 셈이다. 그래도 위나라라는 강적과 대립하던 오나라는 ― 적을 또 만들고 싶진 않았으므로 ― 신라를 내버려 둔 듯하지만(231년 이후에는 오나라가 ― 이주건 단주건 ― 신라와 싸운 기록이 없다) 서진이 오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280년)한 뒤부터는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중국을 통일한) 서진의 건국자 사마염은 오나라를 무너뜨리자마자 "강곡에 (있는) 배를 부수고, … 경작지를 모두 백성들이 갖게 해야 한다."(『진서』)고 선언해 농본주의(농업을 중요시하고 상업이나 공업을 억누르는 경제정책. 조선도 행한 정책이다) 체제를 꾸려나간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고, 신라가 사신을 보내(280년) 진의 중국 통일을 축하했음에도 불구하고(『진서』에는 "辰韓"이 사신을 보냈다고 적혀있으나 이 무렵 옛 진한 땅[:경상북도]은 거의 다 신라가 손에 넣었으므로 이 기록이 옛 진한 세력이 서진에 사신을 보낸 일을 적은 것이라고 보긴 힘들다. "진한"은 옛 진한 땅에 자리잡은 신라 본국으로 봐야 한다) 3년 후에는 신라 식민지를 치고 사로잡은 많은 신라인을 진안군(晉安郡. 복건성 남부)으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진서』에는 진안군에 "新羅"현이 있다고 적혀 있음. 진안군은 서기 282년 세워졌다. 진안군은 내륙이며 "신라현"은 서진이 둔 縣의 이름이므로 신라인이 스스로 복건성에 가 눌러앉지 않고 끌려가 억지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강제이주는 주로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난 뒤 나타난다) ― 사마염은 신라인을 물가가 아닌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 배를 버리고 농사를 짓게 강요함으로써 농본주의 체제를 더욱 굳히고, 서진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인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한 듯하다. 이후 사마염은 신라 본국이 사신을 보내 서진이 신라 식민지를 치고 절강성의 대부분을 차지한 일과, 많은 신라인을 잡아간 사실을 따졌을 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진서』에는 286년 "진한"이 서진에 사신을 보냈다고 적혀 있음. 위와 마찬가지로 진한을 신라로 봐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신라 사신이 오기 4년 전에 오왕 손권이 세운 조선소를 없애(283년) 신라인과 오나라 사람들이 상업·해군력을 바탕으로 들고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데에 많은 신경을 쏟았고, 신라가 백제보다 약했기 때문에(또 한나라 말기부터 한족과 부딪히며 문제를 일으켰던 신라가 못마땅해서) 특별히 신라의 항의를 받아들일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강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도 사마염이 신라의 항의를 무시한 이유가 되었으리라. 또 오나라와는 달리 서진은 신라와 손잡고 함께 칠 적국이 없었다)
이제 신라 식민지의 마지막을 지켜보자. … 사마염의 침공이라는 재앙을 맞은 신라 식민지는 절강성의 대부분을 잃고 주산군도와 양자강 하구, 절강성 동쪽 바닷가의 일부분만 차지한 작은 세력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미 많은 신라인이 서진군에 붙잡혀 내륙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백성이 줄어들었고, 절강성에 있던 농토를 빼앗겨 생산량도 줄어들었다. 사마염은 계속 농본주의 정책을 밀어붙여 신라의 무역 자체가 위협받았다. 더욱이 수십 년 전부터 제주도를 정복해 남해를 손에 넣은 백제는 신라 식민지가 본국과 왕래하지 못하게 물길을 막아버렸다.
그래도 신라 식민지는 남해 대신 [주산군도 → 대만 북부 → 유구(류큐) 제도(:오늘날의 오키나와) → 일본열도 서부 → 경상북도 영일만]으로 가는 새 뱃길을 개척해 제주도 대신 대만과 유구 제도, 일본열도 서부를 징검다리 삼아 본국과 왕래했고, 힘이 줄어들긴 했어도 백제나 서진에게 무릎꿇진 않았다.
이는 (1)『삼국사기』「신라본기」에 '4월(양력 5월)'에 홍수가 일어나고 태풍이 불었다고 적혀있는 점(사마염이 신라현을 둔 지 9년 후인 서기 290년에 일어난 일이다), (2) 北 중국의 역사기록에서 백제가 "진(晉)"나라 때부터 "강좌(江左. 강소성[:산동반도와 절강성 사이에 끼여있는 중국의 성省]과 절강성을 일컫는 말)"에 웅거했다고 적혀있는 점, (3)『삼국사기』「백제본기」에 백제가 서기 304년부터 중국 군현을 적극적으로 치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는 점, (4) 일본 서부에 지금도 신라인을 시조로 모시는 신사가 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신라 식민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서진은 사마염이 죽은 뒤(291년) 사마씨들이 서로 자기가 황제가 되겠다고 외치며 내전을 일으켰고(8왕의 난. 서기 291년 ∼ 306년), 서진은 '남쪽 촌구석'일 뿐인 절강성 바닷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식민지는 서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쪽에서 새로운 위협이 들이닥쳤다. 서기 298년까지 서진의 침입을 막아내기에 바빴던(『삼국사기』「백제본기」책계왕조에 이 사실이 적혀있다) 백제가 7년 뒤에는 제주도를 넘어 주산군도와 절강성에 쳐들어온 것이다(304년?). 신라 본국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번에는 오나라 처럼 손잡고 함께 싸울 수 있는 세력도 없었다. 게다가 75년 전(:오왕 손권이 신라 식민지를 친 때)에 제주도를 정복한 백제는 이미 그동안 정복지에 단단한 기반을 마련해 놓았다.
신라 식민지는 서진과 싸우느라 힘을 다 쓴 상태였고 농본주의를 주장하며 자기들의 땅과 배를 빼앗고 신라인을 붙잡아 강제로 끌고 간 서진에 대한 반감이 높았다. 결국 신라 식민지의 왕은 백제에 항복하고 식민지를 바치기로 했다. 백제는 항복을 받아들인 뒤 주산군도와 절강성 동부를 담로로 삼았고, 절강성은 서기 391년까지 백제가 다스리게 된다. 신라의 식민지는 백제가 광개토태왕의 공격으로 뿌리까지 뒤흔들렸을 때 잠시 독립한 듯하나,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자세히 다뤄야 하는 문제이므로 이 글은 일단 백제가 절강성을 차지하고 신라 식민지가 백제에 항복해 담로가 되는 순간까지 다루고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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