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CEO들의 성공철학
The world's leading CEOs,
their success stories
끊임없는 학습과 냉철한 리더십으로 승부 마이크로 소프트사 빌게이츠 회장
1974년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립한 빌 게이츠 2명이 운영하던 회사에서
2만 500명 이상 되는 직원을 거느리며 연간 88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최고 재벌기업으로 성장한 비결을 묻는다면 빌 게이츠식 기업경영을 들수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가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중 하나는 바로 빌게이트가 기술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곧 일어날 것이다'는 모토 하에 그들은 혁명이 일어날 때를 대비하여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었다.
빌케이츠는 IBM사와의 거래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이 개인용 PC의 역사를 바꿔 놓을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곧 찾아올 기회와 행운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6개월 이상을 쉬지 않고 일했다.
여기에 기술적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 냉철함으로 컴퓨터 업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찾아내어 채용했다.
'높은 IQ를 지닌 사람들'은 우수한 인재들을 가리키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용어가 되었고
이는 최고의 자질을 지닌 사람들을 회사로 유인하기 위한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세심한 전략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빌 게이츠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비난하지만 그는 지적 자본을 진정으로 이해한 최초의 기업가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어느 정도의 행운도 뒤따랐다고 할 수 있지만
성공과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학습하는 자세와 막대한 부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혀 긴장을 풀지 않는 경영 방식이
그를 전 세계 이들이 존경하는 CEO이자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로 지목된이유다.
관료주의를 최소화하여 생산성 향상 GE사 잭웰치 사장
잭 웰치는 1960년 제너럴일렉트릭(GE>에 입사해 독특하면서도 뛰어난 경영방식으로 승진을 거듭하면서 1981년 최연소로 GE회장이 되었다.
그는 GE의 상태를 전검한 후 상당히 세밀한 검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기업 개혁을 맹세한 그는 우선적으로 사업부를 매각하고 10만명 이상의 직원들을 해고했다.
그리고 경영자직급의 층을 줄이고 '고쳐라, 매각하라, 아니면 폐쇄하라'는 새로운 경영전략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언론으로부터 '중성자탄잭'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후 '6시그마.e비즈니스, '세계화'등의 전력으로 GE를 혁신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관료주의 조직을 창의적 조직으로 개편 얼트디즈니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
월터 디즈니사의 최고 경영자인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은 디즈니를 10년 만에 6배 규모의 초 일류 회사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다.
1984년 그가 취임할 당시 월트 디즈니는 수렁에서 헤매고 있었다
회사의 이익은 3년 연속 내리막길을 걸었고,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경영부실과 내부갈등으로 수익률과 브랜드 가치가 추락하고 부채덩어리가 된 디즈니는 랜덤사의 밀켄등에 의해 매수대상으로까지 전락해 있었다
매수의 위기 속에서 아이즈너는 '창의적경영'을 무기로 적극적인 설득전략을 펼쳐, 마침내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아이즈너는 우선 관료적으로 굳어버린 조직을 창의적조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최고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연봉구조를 획기적으로 뜯어고쳤다. 그는 파격적 연봉을 내세원 유능한 간부들을 영입했으며
스톡옵션제도를 제시하고 성과에 따른 보너스제도를 도입해 조직원들의 동기를 자극했다.
그는 의사결정구조를 '하의 상달식'으로 바꾸었고 직원들의 제안에 대한 피드백도 활성화해
직원들로하여금 '내 아이디어가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도록 노력했다.
참석자들의 참여를 윧하기 위해 좋지 않은 아이디어를 제시할 경우
종소리를 크게 울리게 하는 아이디어 회의인 '공쇼'는 그가 일군 창조적 조직문화의 대표적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 영화사업과 테마파크 중심의 다각화를 실시하면서 기업확대의 시동을 걸었다.
또한 5년주기로 재개봉하던 기존의 영화전략을 폐기하고 창고에서 잠자던 필름들을 꺼내 홈비디오 시장에 출시했으며
, 미녀와 야수, 라이언킹, 토이스토리 등으로 이어지는 흥행질주를 과시했다.
디즈니라는 브랜드 파원를 기반으로 전세계600여곳에 캐릭터 매장을 열었으며 캐릭터사업의 성공으로 얻어진 지명도는
다시 비디오 판매증가와 테마파크 이벤트로 이어지면서 시너지경영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아이즈너는 캐피털시티 및 ABC방송과 합병을 성사시킴으로써,
순식간에 디즈니사를 세계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제국으로 변모시켰다.
이런 성공으로 아이즈너는 두 차례나 세계 최고연봉을 기록하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CEO로 등극했다.
절약과 실용성을 모토로한 솔선수범 리더십 IKEA잉그바르 캄프라드 회장
세계 가구 브랜드 1위 업체, '이케아' 창업주 잉그바르캄프라드 회장은 '구두쇠 회장님'으로 유명하다.
그는 5살때부터 집앞 마당에 가게를 차려놓고 시계나 펜 등의 잡동사니를 팔았고,
조금 자라서는 스톡홀름에서 성냥을 싸게 팔면서 '박리다매'의 노하우를 깨우쳤다.
17세 때는 학교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아버지로부터 받은 약간의 '상금'으로 가구업체 '이케아'를 창업해 어려서부터 '타고난 장사꾼'의 면모를 엿보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평범한일반시민들의 삶을 그대로 따라하려고 노력했고, 스스로를소시민중 한명이라고 여겼다.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지역 사람들은 외형보다는 내실을 꾀하는 실사구시형으로 협동정신과 장인 정신을 더 중시하는데
, 그의 검소한 이미지는 '저렴한 가격' '실용성과 합리성'을 내세운 이케아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져 세간에 많은 화제를 뿌렸다.
이케아의 주요철하4은 대중이 쉽게 살 수 있고 잘 디자인된 가구를 만들어 파는 것.
자사 인터넷사이트엔 "여러분은 여러분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역할을 맡읍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 돈을 아낄 수 있어요"라고 써놓았다.
그는 생활만 검소한게 아니라 권위주의나 엘리티시즘을 타파해 지구언들까지도 고용인이 아닌 동료로서격의 없이 대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또한 부모가 쇼핑하는 동안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 시설을 도입하는 등 고객들 눈높이를 맞춘 매장 경영으로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이케아를 선택하도록만들었다.
이같은 실용주의 정신을 혁신으로 이어졌고 이케아를 세계적인 부자 기업으로 올려놓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기초적인 윤리관과 도덕성의 경영철학 '교세라'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다.
윤리경영의 선구자로서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벌여온 그는 마쓰시타 전기그룹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쓰케'와 혼다 자동차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와 더불어 일본의 3대 기업가로 손꼽힌다.
현재 정보통신 그룹으로 분류되는 교세라는 반도체, 태양에너지, 바이오, 공구, 보석, 전자부품, IT, 통신, 광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총 159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 그룹이다
교세라의 성공신화는 능력, 노력, 태도의 3박자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탄생된 '이나모리즘'과 '아메바 경영'으로 요약되는데,
여기에는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의 확고한 기업이념과 철학, 그리고 미래를 읽는 능력, 결단력이 배어있다.
아메바 경영이란 회사의 조직을 소규모 집단으로 쪼개는 경영관리 방법으로 평균 인원은 7~8명, 때에 따라
소집단을 더 작은 집단으로 쪼개기도 하고 통합하기도 한다.
분할 통합이 쉽다는 의미에서 '아메바'란 이름을 붙였다.
아메바의 목표는 '매출최대, 비용최소, 이기때문에 전원이 항상 채산성을 의식해야만 한다.
또 달마다 연간 계획 대비 현재 성취율을 공표하기 때문에 실적이 뒤지는 아메바에선 머리 를 맞대고 아이디어를짜내야한다.
일만 많이 한다고 시간당 이익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혁신'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경영진은 독특한 아메바 시스템 때문에 사내에서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각각 아메바들의 성과가 매월 5일이면 통계로 나와 경영진 입장에선 어느 부분이 문제가 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교세라의 실적 향상에 고무된 일본 기업들이 앞 다퉈 아메바 조직을 도입해 이미 300개 기업이 아메바 조직을 실무에서 활용중이다.
아메바 조직은 소규모로 신속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21세기형 조직모델'이란 평가까지 받고 있으며
높은 매출대비 순익률로 이뤄낸 교세라의 튼튼한 재무수조는 일본 기업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교세라의 높은 순익률은 다케다약품, 캐논, 닛산자동차, 도요타자동차에 이어 일본 기업중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친절해서는 큰 싸움에 이길 수 없다' '폴크스바겐' 페르디난트 피에히 회장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1962년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를 졸업한 뒤 외할아버지 회사인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포르셰에서
8년동안 일하면서 8기통 경주용 차인 포르셰804, 포르셰917을 개발해 기술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1972년부터 20년동안 독일 자동차회사 아우디에서 기술담당 사장까지 오르면서 5기통 엔진을 개발해 전륜구동 콰트로를 내놓아 자동차 업계에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1993년 폴크스바겐으로 옮긴 그는 2002년까지 최고경영자와 이사회의장을 맡아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놓았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2002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자동차 왕국 건설에 대한 집념은 벌릴 수 없었다
그는 폴크스바겐의 경영가독외원회 의장과 폴크스 바겐이 28.7%의 지분을 소유한 독일트럭제조회사 만(MAN)의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가 포르세가 폴크스바겐 주식 50%를 매입하는 결의를 막후 조종을 통해 성사시킴으로써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는 '핏속에 휘발유가 섞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경영에 있어서 매우 냉혹했다.
그는 '친절해서는 큰 싸움에 이길 수 없다' '조화를 유지하면서 회사를 정상에 올려놓을 수 없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실적이 미진하면 가차없이 CEO의 목을 잘랐다.
2006년 신문 인터뷰를 통해 간접 해고 통보를 받았던 베른트페세트리더 전 폴크스바겐 회장이 대표적 사례다.
성공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온 그이지만 쓴 고배를 마셨던 적도 허다하다.
1993년 침체 일로의 폴크스바겐 경영을 맡아 품질 향상과 경비 절감을 통해 이 회사를 유럽 자동차 업계의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는 좋은 자동차를 개발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아 실패도 잦았다. 고급 승용차 페이튼은 폴크스바겐에 엄청난 고비용 출혈을 안겨 줬던 것.
하지만 그는 언제나 실패를 딛고 자동차 메이커 경영인으로서의 성공신화를 새로 써 왔다.
외할아버지보다 더 큰 회사를 육성하는 꿈을 지니고 맹진해오던 그는 현재 칠순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새로운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CEO '애플사' 스티븐잡스 회장
애플사의 CEO로 복귀한지 1년만에[ 쓰러져가던 애플사를 흑자로 돌려놓은 신화의 주인공, 스티브잡스, 자신이 만든 꿈의 기업 애플을 자신이 직접 다시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연봉을 단 1달러만 받을 것을 선언하고,
애플사의 CEO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PC인 아이맥을 내놓아 주가를 9배로 끌어올렸다.
저렴한 가격, 오렌지와 불루베리등 톡톡 튀는 신세대 노트북에 대중들은 여로강하여 1년 만에 200만 대나 팔려나가는 신기록을 세웠다.
연이어 픽사의 두번째 작품인 <벅스라이프>도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과거 애플사에서 쫓겨난 수모를 깨끗이 설욕하고 역전의 명수로 거듭났다
어마어마한 적자로 허우적대던 애플사를 성공적으로 부활시킨 스티븐잡스는 자기만의 경영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 첫번째가 기존 질서와 '철저히다르게' 하는 것 메일프레임 컴퓨터가 지배했던 70년대에 그는 이미 '다른 컴퓨터'인 개인용 PC를 생각했다.
둘째,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성고응로 이끄는 것,
실리콘 밸리차고에서 일궈낸 애플 컴퓨터의 기적이 그 예이다.
셋째, 새로운 것에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초기 픽사 영화사는 막대한 투자에도 전혀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애물단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ㅐㅇ니메이션이라는 새 장르에 관심을 갖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그의 재기에 디딤돌이 되었다
넷째는 겸손한 경영자가 되는 것으로 넥스트사의 실패를 거울삼아 소비자들을 위압적으로 대하던 태도를 버리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겸손한 경영을 일구어 나가는 것, 이러한 경영 철학이 있었기에 애플은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에디터_정호정(2008 September La Vie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