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1)-<아비정전>
1. 1990년 왕가위 영화의 시작을 알렸던 작품이다. 바람둥이지만 매력적인 아비(장국영)을 중심으로 홍콩의 허름한 아파트와 거리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사랑, 이별, 고독, 방랑, 허무를 그려내고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중심축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무엇도 완성시키지 못하는 불임의 형태로 진행된다. 누구도 서로를 소유하지 못한 채, 서로가 서로를 향해 빗나간 사랑의 구애에 집착한다. 여성들을 매혹시켜 유혹한 후 관계를 끝내려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 아비 또한 자신이 진정 얻고 싶은 사랑에는 실패한다. 어렸을 적 입양된 아비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친부모를 찾아 떠나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돌아서야 한다. 모두가 사랑에 목마르고 사랑을 갈구하지만 자신을 향한 사랑에는 거부의 몸짓으로 돌아선다. 내면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독’은 결국 스스로가 만들어낸 집착과 거부의 결과이다.
2. 모두가 사랑을 원하지만 그 방식에는 남녀의 차이가 분명하다. 일종의 기질적 차이인지, 아직까지 남아있던 사회적 편견의 반영인지 몰라도 영화 속 여인들은 남자가 던진 유혹의 ‘언어’가 지닌 허상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것은 거짓이라도 위로를 받고 싶은 오래된 고독이 가져온 무력증이었는지 모른다. 짧은 육체적 쾌락의 시기가 지난 후 남자는 떠나려 하지만 여자들은 떠날 수 없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그녀들은 그와의 추억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인’, 현재의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불쾌하게 여기는 종속적이고 무력한 여자의 형상이다.
3. 반면, 남자들의 사랑도 집착적이지만 그 형태는 조금 따뜻하다. 경찰관인 한 남자(유덕화)는 사랑에 배신당한 수리진(장만옥)의 주위를 돌며 그녀를 위로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용기를 부여한다. 남자는 사랑의 상처를 일시적으로 위로받으려는 이기적 태도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그에게 사랑은 여자의 상처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기다림의 사랑’이다. 또 다른 남자 아비의 친구(장학우)는 ‘아비’를 잊지 못한 루루(유가령)에게 돈을 건넨다. 사랑을 고백했지만 거부당한 남자는 아비의 그늘 속에서 고통을 받은 여인에게 기회를 준다. 그러면서도 사랑에 실패했을 때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이 또한 ‘기다림의 사랑’이다. 영화 속 남자들은 극단적 두 가지 타입의 남자들만 존재한다. 여자를 유혹하며 여자들의 시선을 독점하는 남자, 여자들을 위로하면서 여자들의 사랑을 기다리는 남자, 어떤 모습이든 결과적으로는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
4.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상처’을 가진 존재들이다. 상처 입은 존재들은 주변의 사물들과 대상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철저하게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느낌에 의존한 채 바라볼 뿐이다. 그들에게 외부는 자신을 위협하는 불합리한 체계이다. 고통의 근원이 자신에게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집착이 대상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때론 나에 대한 불만에서 나를 잃어버리려 시도하는 자해일 수도 있다. 다만 유덕화가 분한 역할은 좀 더 이성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아비의 치기어린 방랑과 허무를 공격한다. 날 수도 없으면서 ‘새’라고 떠벌이는 아비에게 ‘날아보라고’ 채근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경찰관 직업을 택한 그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 원래의 꿈대로 ‘선원’이 되어 세상을 방랑한다. 하지만 그의 방랑은 아비의 방랑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비의 방랑이 세상과 상대에 대한 모욕과 희생을 댓가로 하지만 유덕화의 방랑은 내면의 고독과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아비’는 결국 위험한 시도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된다. 그 옆에서 마지막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유덕화이다.
5. 영화 속 정서는 아프도록 쓸쓸하다. 그것은 80년대 나의 정서와 너무도 비슷하다. 어쩌면 80년대가 가졌던 정서가 그러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삶은 항상 쓸쓸함과 허무의 연속이었다. 그때 ‘사랑’은 분명 그러한 감정을 일시적으로 중지시켜주는 진정제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성취가 ‘아비’의 고독과 허무 그리고 방랑을 멈출 수 없었듯이 내면의 변화가 없는 ‘사랑’은 일시적인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집착도, 사랑의 상실도, 사랑의 획득도, 나로부터의 탈출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모두가 똑같은 감정적 소비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변화의 힘을 얻으려는 시도는 결국 또 다른 허무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완성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의 버림에서 시작되어야 할지 모른다.
6. 영화 속 인물들은 이후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가능하게 한 배우들을 통해 창조되었다. 이들의 매력적인 젊음은 그들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이기적인 모습이든, 집착하는 모습이든, 고독 속에서 무너져 버리든, 삶의 어느 순간을 연기하더라도 그들의 특별한 매력이 삶이 갖고 있는 원래의 성격을 왜곡시켜 버린다. 여자를 유혹하고 버리는 바람둥이일지라도 그의 달달한 고백을 듣고 싶고, 찌질한 삶 속에서 파괴된 여인의 독기 앞에서도 기꺼이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영화의 힘인지 모른다. 세상의 넘쳐나는 허접스러운 것들에 새로운 색깔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영화적 재생의 힘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 또한 새로운 허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한동안 영화적 허무의 힘은 현실의 허무를 잠재울 힘을 지녔다고 믿었었다.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을 과장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과장’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한지도 생각하게 된다. 영화가 철저하게 오락적 영역으로 변모한 지금, 영화 속의 삶은 여전히 나에게 현실적 삶의 ‘의미’를 질문하는 혼란스러운 세계이다.
첫댓글 ㅡ 세상의 넘쳐나는 허접스러운 것들에 새로운 색깔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영화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