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건ㆍ진보적 성향의 고려말 개혁정치가 李春富(이춘부)
◉ 正史에 기록된 양성부원군 문하시중 諱 春富
이춘부(李春富) ?~1371(공민왕 20년)
고려조 충정왕(忠定王)․공민왕(恭愍王) 때의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관직은 충근절의벽상삼한 동덕찬화공신 특진삼중대광문하시중 판선부사 영효사관사 양성부원군 동북면도원수(忠勤節義壁上三韓 同德贊化功臣 特進三重大匡門下侍中 判選部事 領孝思觀事 陽城府院君 東北面都元帥),
公은 고려의 광정대부 도첨의평리 판밀직사사 상호군 양성군 수방(守邦 : 일명 那海)과 정경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의흥군(義興君) 자흥(子興)의 따님≫의 장남으로 송경(松京-개성)에서 태어났다.
고려 충정왕(忠定王)때 지신사(知申事).우대언(右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등을 역임하고,1358년(공민왕 7년)서강 병마사(西江兵馬使)로서 왜구의 침입을 격퇴했다.
이듬해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오르고
1360년(공민왕 9년) 동강도병마사(東江都兵馬使)를 거쳐
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王都 開城이 함락되었을 때 전라도도순검겸병마사(全羅道都巡檢兼兵馬使)로 이를 물리쳐 수성보절일등공신(輸誠保節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거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후
1367년(공민왕 16년)충근절의 동덕찬화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功臣)으로 양성부원군(陽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삼중대광 도첨의 시중(三重大匡都僉議侍中)에 올랐다.
배위는 정경부인 양천허씨 (陽川許氏)≪찬성사 선(僐)의 따님, 대사성 부령 김승인(扶寧 金承印)의 외손≫,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옥(沃)은 좌상시,강릉도절제사,차남 빈(斌)은 진주목사, 3남 예(裔)는 대사간, 4남 한(澣)은 판사복시사, 5남 징(澂)은 삼사우윤 판군기시사. 외동딸은 인재공 한산 이종학(韓山 李種學)에게 출가하다.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왕조사, 고려시대사, 용재총화, 인명대사전, 국사대사전, 양성이씨 대동보 및 명현록.
◉ 각종 사료를 통해 분석해 본 李春富
격동기인 고려말 정치상황을 이야기 할 때 侍中 李春富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인터넷에서 이춘부를 직접 검색하지 않고 공민왕 또는 신돈을 검색해도 이춘부에 대한 대략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이춘부는 공민왕, 신돈과 함께 고려말 政治地圖에서 중심부에 위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高麗國은 크게 前半期와 後半期로 나누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광종의 왕권안정을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에 이어 제6대 성종의 유학 진흥과 교육개혁을 통한 중앙집권화, 그리고 제11대 문종의 태평성대와 제14대 숙종의 철권통치를 정점으로 점차 安樂에 빠져 18대 의종대에 이르러 결국 武臣亂을 당해 왕권을 잃고 만다.
그후 왕들은 있으나 마나 한 신세가 되고 무신난을 평정한 최충이 60여년간을 집권하는 사이 「징키스칸-테무진」이 開國한 몽고가 유라시아를 정복하고 중국 宋나라까지 멸망시키며 元나라를 세운다.
최씨의 무신정권은 삼별초로 까지 分派되며 끝까지 대몽항쟁에 나섰으나 결국 제25대 충렬왕 부터는 元의 부마국으로 전락하며 앞에 충(忠)이란 글자가 붙는 수모를 겪는다.
6代에 걸친 忠자 돌림의 왕에 종지부를 찍은 임금이 바로 제31대 공민왕인데 이 때는 이미 元나라도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중원 땅엔 새로운 왕국인 明나라가 태동하는 격변기였다.
형과 어린 조카들이 왕위에 오르며 원나라에 불려갔던 강릉대군(공민왕)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고려왕국을 다시 부흥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강력한 개혁정치를 구상하게 된다.
어린 조카들의 뒤를 이어 22세에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우선 기철을 위시한 부원세력을 몰아내고 고려가 자주국가임을 선포한다.
즉, 元순제의 연호인 至正을 쓰지 않기로 하고 선왕에게 올리는 시호와 국가의 제사의식을 원래대로 회복한다고 공포한 것이다(1356년 공민왕 5)
이 때 내린 교명 가운데 내정에 관련된 사항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서 인사권을 행사하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둘째, 권문세가들이 자행한 토지 점탈의 비리를 척결하였다.
셋째, 조세 부정과 불법을 제거하는 조치를 내렸다.
넷째, 낭비 등 일반적인 비리를 없애고 누에치기와 삼 재배를 장려하였다.
다섯째, 군사제도를 개선하였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 부원세력들의 끈질긴 저항, 조일신과 김용의 亂 등을 겪으며 개혁드라이브 정책에 제동이 걸린 공민왕은 사랑하는 노국공주까지 잃게 되자 한 때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승려 「신돈」인 것이다. [동사강목] 공민왕 편에 보면
세신대족(世臣大族)은 일가 친척이 뿌리를 뻗어 서로 가리고 덮어주고 초야의 新進은 실상을 속이고 행실을 꾸며서 명망을 취하여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顯官이 되면 대족과 혼인하여 그 처음의 뜻을 깡그리 버리고 儒生은 나약하여 굳셈이 적고 게다가 門生이니 座主니 同年이니 하면서 서로 부르며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사사로운 정리에 따른다.
이 세 部類를 모두 쓸 만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세상을 떠나 우뚝 서 있는 사람을 얻어 인습으로 굳어진 폐단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즈음 신돈을 보고 나서 그는 道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한 출신인데다 일가친척이 없으므로 일을 맡기면 마음 내키는대로 하여 눈치를 살피거나 거리낄 것이 없으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신돈에게 중책을 맡기려 했는데 신돈은 덮석 공민왕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뒷날을 위해 다짐을 받는다.
“일찌기 듣건대 임금께서는 참소하고 이간하는 말을 많이 믿는다 하니 삼가서 이와같이 하지 말아야 世間을 복되게 하고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공민왕은 손수 맹세의 말을 썼다.
“스승은 나를 救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여 사생을 두고 맹세하오. 이것으로 남의 말에 迷惑됨이 없을 것을 부처님과 하늘에 증명하오” 하였다.
이로서 공민왕은 신돈에게 全卷을 맡기면서 그 後援者로 비록 권문세가에 속하지만 나라를 구할 의지와 곧은 성품의 소유자인 이춘부와 이색, 이인임 등을 추천했다.
이춘부는 이미 공민왕이 즉위하기 이전, 정3품 벼슬인 지신사, 우대언, 밀직부사 등을 역임하고 공민왕 7년 서강병마사로서 왜구를 격퇴한 바 있고 공민왕 9년에는 동강도병마사를 거쳐 그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했을 때 전라도도순검겸병마사로 이를 물리쳐 수성보절 일등공신에 책록된 文武 겸비한 나라의 큰 일꾼이였다.
그리고 李穡은 공민왕과 비슷한 연령대로 원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한 보기드믄 유학자로 역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곧은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신돈에게 가해질 유학자들의 압력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즉, 권문세가이지만 위 세 부류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들로 신돈을 후원하게 하고 신돈을 앞세워 강력한 개혁드라이브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약 7년간 강력하고도 다각적인 개혁정책을 펼친 신돈 정권은 그러나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충숙왕의 妃-공원왕후 홍씨)와 그의 인척인 김원명, 김속명 형제 그리고 기득권을 잃은 보수파 권문세족들의 집단적 반발과 공민왕의 개혁의지 상실과 겹쳐 결국 역모죄로 몰아 수원으로 유배시켜 목숨을 빼앗았다.
그리고 한 때 공민왕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얻었었고 신돈의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후원했던 이춘부 등도 마침내 제거하기에 이른다.
올곧은 관료들을 대거 제거한 공민왕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고 과거 元나라에 있을 때 본 라마교를 흉내 내며 변태적인 행동까지 서슴없이 하였다.
젊고 여자처럼 생긴 귀족 아들들을 뽑아 곁에 두고 왕비를 강간하게 하는 등 변태적인 행동을 일삼다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만일 신돈의 개혁정책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더 강력하게 밀어 부쳤거나 권문세족 가운데 신망이 두터웠던 이춘부 등을 신돈과 함께 제거하지 않고 계속 중용했다면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을 것이고 고려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自主的이고 남녀 차별 없이 自由가 많이 보장되었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왕국도 신돈과 이춘부 등을 앞세운 공민왕의 마지막 개혁정책의 실패로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된다.
고려말 강력한 개혁 정치가의 一員인 李春富는 제거된 그 이듬해 장남인 李沃이 강릉 일대에 침입한 왜적을 섬멸한 功으로 얼마 후 역적의 누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춘부가 태어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인 1349년 이미 종3품~정3품 벼슬인 지신사, 우대언, 밀직부사, 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했고 1360년 동강도병마사로서 서강병마사인 이자춘 보다 벼슬이 조금 앞선 것으로 분석해 볼 때 1315년을 전후한 시기가 아닌가 유추해 볼 수 있다.
첫댓글 춘부할아버님부터 1시중파가 시작된거지요
상서공파도 실제로는 춘字부字 할아버지 자손입니다.
상서공파는 원자 부자 할아버지부터 시작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