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09년은 우리 근현대 민족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해이기도 합니다.
우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지 100주년이 됩니다.
이어 1919년 3월 1일 거족적으로 일어난 ‘3.1만세 독립투쟁’ 90주년이 되는 해이구요,
또 이 해 9월 2일 새로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지고는 이듬해 순국하신,
강우규 의사의 ‘서울역 폭탄투척 의거’ 9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해방 후로 넘어오면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친일경찰들의 습격을 받은 지 60주년이며,
이로부터 20일 뒤인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신 지 60주기이기도 합니다.
앞서 공지한대로 백범 선생 60주기를 맞아 필자는 [백범 60주기] 기획을 시작합니다.
종래의 ‘위인전’ 형식을 과감히 탈피하면서, 그의 인간적 면모까지도 담아내 보려고 합니다.
규모는 주 2회 정도로, 60주기인 6월 26일 전후까지 진행할 계획입니다
각종 사진 등은 <백범김구전집> <백범일지> 등에서 참고한 것입니다.... [필자 주]
***********************************************************************
백범 김구(金九).
우리 현대사의 한 줄기를 장식하는 ‘큰 별’입니다.
그러다보니 백범이라는 큰 별 때문에 주위의 ‘작은 별들’은 모두 묻히고 말았습니다.
백범의 가족 가운데 그나마 알려진 인물은 모친 곽낙원 여사와 차남 김신(87세) 정도입니다.
정작 백범의 반려자인 아내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또 부친을 도와 독립운동을 했던 장남 김인(1945.3.29 작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이번 기획은 그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백범의 가족들 얘기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백범의 아내 최준례(崔遵禮) 여사를 아십니까?
백범 김구에게도 분명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에 대한 얘기는 그간 자주 거론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에 대해 특별히 숨기거나 감출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큰 별'인 그에게 가렸을 뿐이고, 또 일찍 작고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백범 일가와 최준례 여사 묘비.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둘째 신, 백범, 모친 곽낙원 여사, 첫째 인
이 사진 속의 인물들이 ‘백범 일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아내의 얼굴은 안보입니다.
뒷줄 오른쪽, 백범 옆에 선 여성은 부인이 아니라 모친 곽낙원 여사입니다.
그의 아내는 얼굴 대신 묘비로 서 있습니다.
당시 이 사진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4년 2월 18일자 관련기사를 보면,
“이 사진은 항자 보도한 바와 가치 사회를 위하야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맛나서 남이 격지 못한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 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녀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는 상해에 잇는 동포들이 그의 사십 평생의 고적하고 간난한 경우를 불상히 녁이여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여러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대 조선어학자 김두봉(朝鮮語學者 金枓奉) 씨의 지은 순 조선문의 비문으로 짓고 이 빗돌 위에 잇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싀어머니 곽 씨(郭 氏)(六六)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金九)(四九) 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해는 큰 아들 김인(金仁)(五)이요, 왼편에 잇는 아해는 그 두째 아들 김신(金信)(二)이다. 늙은 싀모,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엇지 참아 감기엇스랴 !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히 누은 그에게 이 빗돌만이 쓸쓸한 회포를 더욱 도울 뿐이다.”
그의 아내는 중국 땅에서 폐렴으로 고생하다가 병상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남편 백범은 그런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지켜주지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입원한 병원이 일본 조계지(점령지) 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는 아내를 돌보기 위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쓸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임시정부 내무총장(현 행안부장관)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결혼 이후 두 사람은 떨어져 산 시간이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
남편은 ‘시국사범’으로 감옥살이를 하거나 망명객의 몸으로 떠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0년 아내가 상해로 건너온 후 불과 3~4년이 같이 지낸 것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이 시기를 두고 “재미있는 가정을 꾸렸다”고 썼습니다.
그것마저도 몹쓸 병이 아내를 끝내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한편, 최 여사의 비문은 내용면에서 특기할만 합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남편의 동지이자 한글학자인 김두봉이 썼는데,
최 여사의 출생일과 사망일을 한글 자음으로 표기한 것이 이색적입니다.
ㄹ ㄴ ㄴ ㄴ 해 ㄷ 달 ㅊ ㅈ 날 남
대 한 민 국 ㅂ 해 ㄱ 달 ㄱ 날 죽 음
대체 이걸 어떻게 읽을까요?
알고보면 간단합니다^^^
자음 순서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해서 이해하면 됩니다.
즉, ‘ㄹ’은 아라비아 숫자로 하면 ㄱ-ㄴ-ㄷ에 이어 네 번째이니 ‘4'를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읽어보면, 최 여사의 출생일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며,
사망일은 ‘대한민국 6년’, 즉 1924년 1월 1일인 셈입니다.
(* 참고로 대한민국 원년(1년)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입니다)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고, 나아가 2천만 동포를 지키려 했던 백범,
그러나 자신의 여인 하나조차 지키지 못했던 사나이의 흉중(胸中)이 어떠했을까요.
그나마 주변에서 아내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뤄줘 조금은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
아래는 그가 <백범일지>에 기록한 아내의 '최후'에 관한 대목입니다.
“그간 아내는 신이를 해산한 후 낙상(落傷)으로 인해 폐렴에 걸려 몇 년을 고생하다, 상해 보륭의원(寶隆醫院)에서 진찰을 받고, 역시 서양 시설을 갖춘 홍구(虹口)폐병원에 격리, 입원하게 되었다. 나와는 보륭의원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였고, 민국 6년(1924, 49세) 1월 1일 홍구 폐병원에서 영원의 길을 떠났다. 나는 아내를 불란서 조계[法界] 숭산로(嵩山路) 경찰서[捕房] 후면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나의 본뜻은 우리가 독립운동 기간 중 혼례나 장례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비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이 아내가 나로 인해 무한한 고생을 겪은 것이 곧 나라일에 공헌한 것이라 하여, 나의 주장을 불허하고 각기 연금하여 장의도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그중에 유세관(柳世觀) 인욱(寅旭) 군은 병원 교섭과 묘지 주선에 성력을 다하였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인이도 병이 중하여 공제의원(共濟醫院)에 입원 치료하다가 아내 장례 후 완전히 나아 퇴원하였다. 신이는 겨우 걸음마를 익힐 때요, 아직 젖먹을 때였다. 먹는 것은 우유를 사용하나, 잘 때는 반드시 할머님의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들었다. 차차 말을 배울 때는 단지 할머님만 알고 어머니가 무엇인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