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1997. 10.6일자 문화특집
최부의 표해록〈4〉
시 한수로 위기를 면하다
최부 일행이 도적떼에게 털린 센옌리부터 선인의 고행의 길을 찾아 나섰다.
서남쪽으로 5km지점의 푸펑리(蒲峰里), 흙먼지를 뒤집어 쓴 허름한 민가 10여채가 흩어져 있다.
최부는 여기서 왜구로 오인하고 출동한 명나라 관군과 부딪쳤다.
지휘관은 하이먼웨이(海門衛)군관구 예하 타오주수어(도저소)의 일선기지인 탄터우자이(당두채)의 대장 부천호(副千戶) 쉬칭(許淸). 최부가 드디어 명의 법과 질서의 집행자와 조우한 것이다.
긴박한 상황이 그것으로 끝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부가 상륙한 곳의 관할인 스즈자이(사자채)대장은 왜선 14척이 침공해 왔다고 상부에 과장 보고했다.
전공을 세울 욕심에 전원을 죽이려고 현장으로 말을 몰았다.
일행은 최부의 현명한 판단으로 이미 내륙 깊숙히 이동,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종종 일어나는 비극이지만 일단 지휘관의 독단과 오판으로 처참한 집단학살이 이루어질 뻔했다.
푸펑리 노상에서 긴급심문이 벌어졌다.
최부는 조선관원 신분과 표류상황을 설명해 보호와 선처를 호소했다.
물론 필담이었다.
43명의 목숨이 달린 긴박한 시간이 흘렀다.
쉬칭은 일단 최부의 주장을 수용했다.
사색으로 물든 일행의 얼굴에는 얼핏 안도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초췌했지만 최부의 인품과 명문이 즉결처분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다.
최부는 쉬칭의 요청으로 시까지 지었다.
쉬칭의 교묘한 테스트였다.
쉬칭의 직속상관은 천화(陳華), 그 위에 하이먼웨이의 사령관인 파총송문등처비왜지휘동지(把總松門等處備倭指揮同知) 류저(劉澤)가 있다.
최부는 타오주수어에서 류저의 심문을 받는다.
왜구냐 조선관원이냐, 그 판가름으로 생사가 좌우되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의 해상방위 체제에서 류저의 심문은 제1심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심리였다.
류저의 심문은 윤 1월21일, 22일 이틀동안 철저하게 진행됐다.
현지 군사령관의 사실심리는 상급기관과 중앙정부에 책임지는 기본심리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심문은 군기관 특유의 고압적인 분위기였으나 내용은 포괄적이면서 치밀했다.
먼저 국경침범죄로 군법으로 처형할 수도 있었지만 정상을 참작, 사실심리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어 인정신문으로 최부와 일행의 이름, 가족관계, 경력, 현직 등 인적사항과 표류경유 등에 대해 심도있게 조사했다.
왜구가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집요하게 추궁당했으나
최부는 끝내 조선관원 신분과 표류에 의한 국경침범의 비고의성을 낱낱이 해명했다.
최부의 인품과 중국인도 놀랄만한 탁월한 한문문장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부가 지닌 물건이 증거로 인정됐다.
관인, 마패, 한복, 각종 공문서, 방목(과거시험 합격증), 서적 등.
무기로는 활 1개, 환도 한 자루(관원의 표지물)뿐, 사실상 비무장이나 다름없어 사태수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류저는 조선의 국가제도, 문물, 지리, 산물, 그밖의 군사정보 등을 캐물었다.
최부는 군사정보만은 답변을 회피했다.
철저한 공인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부일행은 마침내 왜구의 혐의가 풀렸다.
사지에서 벗어나 조선의 표류민으로(게다가 조선국왕 특파관원의 자격)명의 법규와 관례에 따라 본국송환이 결정된 것이다. " '당신들이 혐의를 벗었으니 나는 예의로 대접하겠소. 모두들 안심하고 걱정하지 마오. 북경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니 빨리 짐을 챙겨 서두르시오' 라고 한 다음 다과를 대접한다.
고마워서 사시(謝詩) 한 수를 짓고 절했더니 절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다시 절하자 그는 일어서 맞절을 했다." 류저의 사람됨이 잘 묘사된 최부의 기록이다.
푸펑리에서 타오주수어로 가는 길은 준령을 구비구비 도는 험로이다.
타오주수어에 도착한 때는 해질 무렵, 멀리 텐타이(天台)산맥의 주홍빛 노을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타오주수어는 500여년 전 최부일행의 체취를 간직한 채 옛모습 그대로 서 있다.
성내부에는 수백호의 인가가 밀집해 있고
때마침 저녁이라 거미줄처럼 엉킨 수로에서 찬거리를 다듬고 집집마다 저녁준비가 한창이다.
성이 유적이 아니라 삶의 터로 숨쉬고 있다.
성북쪽에 자리잡은 명나라 항왜명장(抗倭名將) 치지관(戚繼光)기념관을 찾았다.
1561년 타이주 일대를 휩쓴 왜구와의 전쟁에서 그는 찬란한 승리를 거두었다.
조촐한 사당 정문의 대련(對聯)이 눈길을 끈다.
회고하수유적벽 어모수불억도저(懷古何須遊赤壁 御侮誰不憶桃渚:역사를 찾아 왜 적벽에만 가는가, 원수를 물리친 도저를 그 뉘가 잊으리. 가슴뭉클한 명문이다.(중국 타오주수어, 도저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