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조승우의 얼굴은 유난히 낯익게 느껴진다. 연초부터 여자친구와의 결별설이 나돌면서 쑥덕방아에 오르내리던 그는 4월 바로 그 구설의 주인공 강혜정과 함께 출연한 <도마뱀>을 통해 관객과 만났고, 3월에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한류의 물결을 다시금 출렁이게 했으며, 8월에는 국립극장 무대에서 다시 지킬과 하이드의 열정적인 변신극을 보여줬다. 그리고 9월 하순에는 영화 <타짜>를 통해 영화 관객 앞에 등장하게 되니, 그는 데뷔 이래 가장 숨찬 한해를 달리고 있다.
허영만 작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타짜>에서 조승우는 주인공 고니를 연기한다. 고니는 한때 순박한 청년이었으나 노름의 세계에 탐닉하게 된 뒤 도박판의 선수요, 화투판의 전사인 ‘타짜’로 변신하고, 이후 평경장(백윤식), 정 마담(김혜수), 고광렬(유해진) 등 ‘돈 놓고 돈 먹는’ 이 세계의 총총한 별들과 만나면서 서서히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화투장 한번 만져본 적 없다는 ‘신세대’ 조승우가 한순간에 달이 휘영청 떠 있는 팔광을 ‘사쿠라’가 만발한 삼광으로 척척 바꿔낼 수 있는 타짜의 손놀림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었을까.
“초반에는 화투를 섞지도 못했어요. 밑의 것을 빼서 위로 올리는 건지 반대로 하는 건지… 난감했죠. 최동훈 감독님은 처음에 CG로 처리해줄 거라고 했지만 다 뻥이었죠. (웃음) 전문가인 장병윤 선생님이 일대일로 달라붙어서 지도해주셨고, 매일같이 화투를 붙들고 살았던 덕에 겨우겨우 필요한 장면은 처리했는데, 사실 저보다는 언제든 대타로 연기하시겠다며 연습하신 감독님, 촬영감독님, 조명감독님이 더 잘했어요. 최 감독님은 그 어렵다는 밑장빼기 선순데요 뭐. (웃음)”
화투에 있어서 극초보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도마뱀> <말아톤> <클래식> <후아유> 등을 통해 순수하고 나긋나긋하며 말랑말랑한 남성의 이미지를 굳혀온 조승우에게 <타짜>는 다소 의외의 선택으로 보인다. <타짜> 속에서 고니는 일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을지라도 그닥 순정한 내면을 갖고 있다고 보긴 힘든 인물이다. ‘남자로 태어나서 나도 인생에서 ‘악셀’ 한번 세게 밟아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이 껄렁한 놈이 바로 조승우라니.
“제가 고니 역을 맡은 뒤 미스캐스팅이란 말이 많았잖아요. 사실 <지킬 앤 하이드> 때도 마찬가지 반응이었거든요. 거기서 제 나름의 것을 불어넣으려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내가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껏 해보려 했어요. 이미지 변신? 아뇨. 여러 가지 역할을 해본다는 차원이죠. 사실 저는 연기를 하면서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거기에서 리액션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것을 다 빼버리고 재치있고 빠르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여 <타짜> 속 조승우는 낯익은 ‘순수청년’과는 동떨어진 모습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가 연기하는 고니는 자신의 화투 스승의 죽음에도 비분강개하거나 오열하기보다 다소 냉정한 모습으로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려 할 뿐이고, 숙명의 화투판에서도 비장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기보다는 “의리 때문에 온 줄 알아? 돈 따러 왔지”라는 실없는 말만 내뱉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승우 자신은 자신의 캐릭터뿐 아니라 영화 모두 한 단어로 수렴된다고 이야기한다. 그건 바로 ‘쿨’(cool)이다. 도박이 삶을 망가뜨리는 메시지를 품고 있지만 뭔가를 훈계하거나 주장하려는 영화가 아닌데다가 자신이 연기하는 고니 캐릭터 또한 신파적인 감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지금 조승우는 ‘쿨에이지’를 맞은 것이다.
“<헤드윅>은 뭔가 달라지게 했어요. 이렇게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제 안의 신파적인 요소들을 연출가인 이지나 선생님이 다 깨버렸어요. ‘넌 예전부터 그랬어, 막 광분하고 오열하고 사랑에 미쳐. 이런 것 하지마! 쿨한 것 해! 쿨한 것!’하며 저를 밀어붙였죠. 그래서 <헤드윅>은 이것이 작품이다, 연기다,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건 쇼다, 라고 받아들였어요. 쇼라고 하면 천박한 것을 떠올릴지 모르겠는데 내가 최선을 다해서 표현했다면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모든 작품을 이렇게 할 순 없겠지만 이 영향을 <타짜>에서 좀 받았어요.”
이런 쿨한 감성의 연기는 그동안 그를 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무장해제시켰다. 그건 조승우만의 생각이 아니다. 뭔가 답답해 보였던 그의 인상은 많이 풀어졌고, 보는 이마저 뭔가에 짓눌리게 하는 알 수 없는 부담감도 많이 가셨다. 1999년 <춘향뎐> 오디션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별명은 ‘애늙은이’였다. 스무살, 그리고 그 얼마 뒤까지 일상생활에서 양복정장 차림을 했을 정도로 그는 겉늙어버린 청년이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늙은 연기’를 하려 한다는 지적 또한 많이 들었던 게 그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집의 가장은 나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런데 나이도 먹고… (웃음) 작품도 여러 편 하고, 사람도 많이 만나면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겉으로는 늙어가는데 속으로는 어려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의 모습은 딱 스물일곱 같다는 생각이에요. 서른이 되면 회춘할 것 같아요. (웃음)”
2006년 하반기, 그의 스케줄표는 의외로 빈 채로 남아 있다. 한동안 너무 바삐 움직였던 데에 대한 반작용도 있겠지만, 그보다 일정의 무리가 만들어낸 육체의 무리 때문이다. <지킬 앤 하이드> 일본 공연 뒤 성대결절 판정을 받았던 그는 8월 막을 내린 <지킬 앤 하이드> 공연 때는 사소한 실수로 허리 디스크까지 걸렸다. <하류인생>을 할 때만 해도 웬만한 스턴트맨과 맞장을 뜰 정도로 펄펄 날았던 그는 <타짜> 촬영 때는 넘어지고 찢어지고 삐고 접질리는 나날을 거듭했다. 이제 그에게도 한 회차의 휴식이 필요한 모양이다. 물론, 그의 ‘휴식 선언’에는 단서조항이 달려 있다.
“그런데 배우라는 게 오래 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예 유학을 간다거나 1년 예정으로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다면, 남는 시간 때문에 심심해 미칠 거예요. 한달 정도 지나면 눈이 아주 퀭해서 근질근질해지죠. 현장 나가고 싶어서. 그러니까 쉬겠다는 말 앞에는 한 구절이 빠져 있는 거죠. ‘좋은 작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이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