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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소년 “돈도라지” 작사자(?)의
한양 사랑기
19회 전기과 김 용 규
(19회동창회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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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기도 문산읍 당동리 168번지에서 태어나서 문산 북중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해서 축구부 주장을 했었다. 그러나 시골학교 축구부는 동내축구 수준이었기에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축구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았다. 그 시절은 TV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특히 내가 애청했던 프로는 축구중계였었다. 그 중에서도 고등학교 축구 결승전이 가끔 방송되었는데 어김없이 결승전에는 한양공고가 나왔다. 그 당시에는 한양공고가 1년에 반이상은 우승을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나는 한양공고 편은 아니었다. 나는 문산 북중학교에서 한반 60명중 15등 정도의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축구가 좋아서 또한 농촌에서 가난하게 살기보다는 공고 졸업후 취직하여 부모님의 수고를 덜어드리려고 공고로 진학하기로 결심을 하였으니 자연스레 축구명문인 한양공고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시골출신인 나는 단 한번 중학교2학년때 창경원 소풍을 간 것이 처음이었을 뿐 한양공고가 서울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었다. 그런데 운좋게도 경순이라는 친구 작은 아버지댁이 시구문 밖에 있었고 덕분에 경순이의 누나 뒤를 졸졸 따라가서 한양공고 원서를 가져올 수 있었다. 날아갈 듯한 기쁜 마음으로 담임선생님께 원서를 써달라고 제출했더니 내 실력으로는 힘들거라며 지역에 있는 다른학교로 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던 나는 몇일간 시종일관 한양공고 원서를 써 달라고 선생님께 졸랐었다.
그 당시 문산북중에서는 5명이 한양공고에 원서를 접수했는데 나와 경순이는 전기과에 박조원 등은 기계과에 접수를 하였다. 원서 접수 당일 한양공고 정문을 들어가려는데 한양중학교 본교학생들 몇명이 정문에 몰려 있다가 내가 정문을 통과할 때 나를 불렀다. 그때만 해도 촌티가 줄줄 흐르다 보니 모르는 사람들의 부름에 겁을 잔뜩 먹으며 다가가니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문산에서 왔다고 하니 시골에서 왜왔냐고 하면서 비율이 높아진다고 약간 겁을 주면서 본교기득권을 주장했었다. 그 당시 친구누나와 같이 들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시비는 없었고 그냥 보내 주었지만 임흥환, 이태경, 최영원, 인학 등의 친구들을 미리 알았었다면 어깨에 힘을 주고 교문을 들어 갔을텐데 ㅎㅎㅎ
원서 접수를 마치고 문산 집으로 돌아오니 오기가 생겼다. 그래 열심히 공부해서 꼭 한양공고에 합격해 보자. 그러나 원서접수 결과는 4.5대1... 학교실력보다는 신문과 라디오에 많이 나오는 학교다 보니 나처럼 시골출신들이 한양공고에 많이 지원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서울이 40% 시골이 60% 정도였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아무튼 남은 기간은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막상 시험볼 때는 내가 무슨 정신이었는지 지금도 생각이 희미하다, 그 후 초조하게 기다리던 날들은 지나고 합격자 발표날은 왔다. 나는 겁없이 1지망에 전기과를 지망하였는데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 석자가 있었다. 정말 뛸 듯이 기뻤는데 안타깝게도 경순이 친구는 전기과에 지망을 했다가 떨어졌다. 원서 접수부터 합격자 발표까지 많은 신세를 졌는데 막상 경순이는 떨어 진 것이다. 결국 5명중 3명이 떨어지고 나와 자동차과 박조원이가 겨우 합격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단둘이 합격했던 자동차과 박조원친구도 이미 내 곁에 없다. 몇 해전 장례식장에 문기섭 친구가 자동차과를 대표해서 문산에 와서 한잔하면서 눈물을 같이 훌렸었지~~~ 그 밤은 먼길을 찾아 온 기섭친구와 문산친구 8명(균명고 순진/ 용산공고 한철, 광수/ 대동상고 건복/ 고명고 찬영/ 북고 진수 등)이 밤을 새우며 술을 마셨는데 새벽까지 멀쩡한 친구는 문기섭 친구 뿐이었다. 그 덕에 그 후론 고향친구들을 만나면 문기섭 친구가 떠오르곤 했었다.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 중학교 졸업식장에 가보니 내 양어깨에는 힘이 들어갔고 시골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은 눈에 잘 보이지 조차 않았다. 참 그때 내가 얼마나 거들먹거렸는지 지금도 그 모습만 생각해 보면...후후후 그 후 어머니가 배추 팔고 고추 팔고해서 겨우 입학금을 준비하셨는데 어린 생각에도 꽤나 큰 돈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어머니가 어렵게 준비하신 입학금을 납부하려고 서울로 갈 때는 소매치기가 판을 칠 때였으므로 바쁜 형님과 같이 갔었는데 돈은 형님의 군용 워카에 넣어가지고 한양공고 옆에 있는 은행에 가서 납부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같으면 인터넷으로 송금하면 되었을 것을~~~ 한양공고 모표와 뱃지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무슨 어사귀향이라도 하듯 온동네가 온통 잔치분위기였었다. 동네 친구들과 어른신들께서도 많은 축하를 해 주셨다. 그 당시 시골 에는 거의 농업학교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수업 중에도 밭에 가서 풀도 베고 고추도 가꾸고 했었던 기억들이 난다. 나는 그 당시 농사가 싫어서 서울유학을 결심하였었는데 아무튼 한양공고 모표를 달은 교복을 입고 작은집, 큰집, 이모집, 고모집 등 온 동네를 순회하고 시계와 그밖에 선물들도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한양공고에서 직접 축구구경과 응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즐거웠었다. 학교 입학 후에는 이종사촌동생과 공덕동 산기슭에서 자취를 하였는데 사촌동생은 경서중학교 2학년이었다. 등하교 때는 길을 잃을까봐 꼭 을지로6가 - 마포행 전차를 탔었고 다른 길은 생각지도 못했던 순박하고 공부밖에 모르던 그 시절이었는데 시간이 조금씩 흐르며 친구도 사귀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기억나는 것은 김응환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경기전문학교 밑 아현동에 살고 있는 세련된 서울사람이었다. 그 친구 덕에 나는 야간여학생이 하교하는 시간에 마포종점까지 가서 만나고 또 다음날 서울역 빵집에서 만나자고 약속도 했었던 순진하고 가슴 설레던 사춘기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 외 시간은 거의 공부만 하다보니 1학기 성적은 꽤 좋았었는데 특히 화학, 영어, 수학도 매우 재미 있었다. 전공은 전기기계, 전기통론을 배웠는데 학교에서 배운 얕은 지식으로 동생과 청개천에 나가서 바리콘과 동조코일을 사가지고 와서 광석 라디오를 꾸미는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지금 생각하면 신세계를 살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2학기때는 자취할 형편이 안되어 문산에서 경의선 열차통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문산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은 용산공고, 성동공고, 대동상고, 균명고, 남산공전, 광운공고생 등이었다. 그러다보니 나와 조원이가 다니는 한양공고가 가장 좋은 학교였다. 그 당시 다른 학교는 입학원서만 내면 다닐수 있는 학교였었다고 통학생들끼리 말을 하곤 했다. 아침에는 문산에서 통학열차를 타고 금촌, 능곡, 일산, 화전, 수색 경유 서울역까지 약1시간이 걸렸고 다시 서울역에서 천호동, 뚝섬행 버스를 타고 신당동에서 하차하여 등교를 했다. 다른 경로는 거의 없다보니 새벽에 일어나 그 통근열차를 타야만 했었는데 다들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통학열차에서의 선배들의 횡포를 몸으로 느끼며 - 빠따 맞고 담배피고 술마시고 등등 - 등하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기억으로 금촌역 통학생 완투클럽이 경의선 열차에서 가장 센조직이었는데 어쩌다 문산역 통학선배들이 패싸움에서 지는 바람에 우리 후배들도 숨을 죽이며 통학을 해야만 했었다. 그 다음 서열은 수색역 통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수색은 서울이기 때문에 열차에서 다른 패거리와 싸우다 져도 버스가 있기때문에 우리처럼 절박하지는 안다.
고1때 입학기년 단체사진[담임 유동열 선생님(생물) 고2때 다른학교로 발령받아 가셨어요]
맨위 왼쪽에서 9번째 본인, 참고로 고2때 담임은 전명복 선생님(국어),고3때 단임은 한용순선생님(사회)
한번은 수색역 통학생들에 심하게 맞고 몇 일동안 보복결심을 하고 만반에 준비를 하였는데 하필이면 그날 따라 얄밉게도 그 패거리들은 기차에 타지 않고 유유히 버스를 탔으니 보복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니 2학년때까지는 공포의 금촌역, 수색역을 경유하며 학교를 다녔으니 몸고생,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었다고 생각이 된다. 그 순간에도 오직 한양공고 졸업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참으며 힘들게 힘들게 등하교를 했었다. 그러다 3학년이 되고나니 우리친구들이 제법 힘을 쓰게 되었다. 주로 학교들이 균명고, 광운고, 남산공전, 대동상고, 인천 선인고 등등이니 공부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금촌 완투클럽도 잡고 수색패거리까지도 잡아 2년동안의 서러움을 다 풀 수가 있었다. 그 덕에 우리 문산 통학후배들까지 어깨를 펴고 통학을 할 수가 있었다. 후후후
순진한 시골학생이 통학을 하다보니 서서히 시골 때가 벗겨져서 고1때 흡연도 하고 학교가기 싫으면 땡땡이도 치고 통학하는 즐거움도 느끼기 시작했다. 가아끔은 통학열차가 신촌을 출발하여 서울역근처를 지날 때면 학교가기 싫은 친구가 땡땡이 모집을 한다. 한명 두명 찬성하여 7~8명이 되면 일단 서울역에 도착하여 남대문 명콤비 당구장으로 가서 당구 한게임하고 옆의 중국집 계단밑 종업원이 사용하는 방에 가방을 맡겨놓고 용돈을 모은다. 그러나 시골 유학생 용돈이 뻔했으니 제일 좋은 시계를 전당포에 맡겨 자금을 마련하고 장소를 선택했다. 주로 덕수궁, 창경원, 남산 등 각각 취미가 같은 친구끼리 팀을 짜서 돈을 분배하여 놀러 다니다가 저녁 통근열차시간 1시간전인 오후 4시경에 중국집에 모여 남은 돈으로 짜짱한 그릇씩 먹고 승차하여 문산에 도착을 하면 저녁6시 그후 터벅터벅 시골길을 30여분 걸어 집에 도착하면 벌써 해는 서산을 넘고 있었다. 그래도 “학교에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저녁을 먹으면 어머님께서는 힘들게 공부(?)하는 아들을 보며 얼마나 흡족해 하셨을까...? 다시한번 이 자리를 빌어 부모님께 사과를 드립니다.
[고3때 마지막 가을소풍 용문산] 전라도 정읍에서 한양공고에 유학온 짝꿍 정양명 친구]
그 후 전당포에 맡긴 시계를 찾으려면 각자 분담금을 내야 하는데 용돈이 있을리 없고 결국 할수 없이 청계천6가 헌책방에서 책 중에서 제일 비싼 이성현(저) 기하책을 팔아서 충당했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통학하면서 여자 친구들과의 추억도 생각이 난다. 용산공고를 다니던 이한철친구는 고2때 화전에서 경의선 통학하는 한양여고 2학년 경애라는 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그런데 수색에서 한양여고 1학년 방선묵이란 여고생이 경의선 통학을 하게 되어 둘은 선후배 사이로 자연스레 언니, 동생으로 함께 통학을 하게 되었다. 나는 경애에게 후배를 소개해달라고 졸라서 드디어 몇 일후 하교시간에 덕수궁입구에서 만나게 되었다. 통학을 하면서 서로 인사정도는 하는 사이라 경애없이도 만날 수가 있었는데 덕수궁을 한바퀴 돌고나니 저녁이 되었고 돈이 별로 없는 통학생은 북창동에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을 시켜 먹었는데 그때만 해도 초면에 여자 앞에서 입술에 시커먼 짜장을 뭏히면서 식사를 한다는게 실례인 줄은 몰랐었다. 결국 통근열차 때문에 서둘러 집으로 향했지만...
선묵이는 화전에서 방앗간을 운영하고 또 대규모 딸기밭도 경작하는 부잣집 큰딸이었는데
다음에 만나보니 순진한 선묵이도 그날 늦게 집에 가는 바람에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1년 통학경험을 가진 내가 코치(?)를 해서 그 뒤부터는 학교에서 합창단 연습, 연극반 연습 등으로 둘러대는 바람에 호랑이아버지의 야단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순수한 촌여학생을 세련된 서울여학생으로 조련시킨건가...? 후후후
(※ 위 내용은 내처에게 여러번 이야기하여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러나 여자 자존심이 있으니 그냥 읽어만 주시고 사랑하는 울 마님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후에는 땡땡이를 치고 중국집에서 짜장면 점심을 먹고 나면 우리들의 물주인 선묵이와 경애가 와서 짜짱면 값을 계산하곤 했었다. 선묵이는 등교시간에 항상 방앗간에 들려 돈통에서 얼마씩 용돈을 가져오는 부자였고 경애는 오빠가 철도 공무원이라 용돈을 항상 많이 받는 부자였기에 우리들은 신세를 질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도 남자인데 체면이 있지 매번 얻어먹을 수는 없고 그러나 시골에서는 고추농사, 호박, 참외 팔아서 한양공고에 유학을 보냈으니 용돈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 결국 용돈을 장만하려고 부모님을 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은 3개월 월사금이 고3때 2,500원 정도였는데 대동상고에 다니는 이건복친구가 글씨를 잘써서 잘아는 교회에 가서 가리방으로 3,000원짜리 고지서를 만들어 500백원을 용돈을 썼던 기억도 있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 다시한번 무릎꿇어 사죄를 올립니다.나는 시골이 싫어서 한양을 선택했지만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축구를 좋아해서 한양공고로 진학하게 되었다는게 더 맞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한양공고와 동북고가 고교축구계를 양분했었는데 한양이 60% 동북이 40% 정도 우승을 했던 것 같다. 진학 후 라디오로만 듣던 축구경기를 서울운동장에서 직접 보게 되었는데 우리학교 경기가 있던 날은 저녁통근열차를 놓치고서라도 끝까지 구경을 하고 저녁9시 막차로 집으로 갔던 기억도 새롭다.
그런데 우리학교는 응원을 가면 교가, 응원가 등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날엔가 문산북중학교 시절 운동회때 불렀었던 흥겨운 “돈도라지”가 생각이 나서 밴드부 선생님(장시형 선생님이셨던가...?)을 찾아가 “돈도라지”를 응원할 때 부르면 어떻겠냐고 말씀을 드렸는데 의외로 선생님이 오히려 반기면서 한번 불러 보라고 하셨다. 실은 선생님도 곡은 알고 있었는데 가사를 몰랐던 것이다. “돈도라지”는 원래 해군에서 응원가고 불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부터 “돈도라지”가 한양공고 축구응원가로 되었고 한동안은 내가 작사자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실은 옛날부터 부르던 노래를 추천했던 것인데... 아무튼 그 후로는 응원가보다도 운동장에서 힘차게 불렀던 한양의 대표 애창곡이 되었던 것이었다. 얼마나 축구를 좋아했고 응원을 좋아했으면 “돈도라지”를 응원가로 추천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한것 같다. 그 당시 우리 한양축구부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골문을 지켰던 17회 이세연선배가 있었고 또 동기로는 최재모, 박상철, 백기면 등이 있었는데 국가대표, 청소년 대표로 한양의 이름을 전국에 떨쳤던 동문들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양공고와 동북고가 최상급이었고 그 아래로 배재고, 영등포공고, 진주공고 등이 가아끔 결승에 오르던 팀으로 생각이 난다. 우리 학교는거의 결승전에 진출하는 팀으로 알았고 또 우승을 하면 행진하는 밴드부를 따라 우승컵을 들고 학교정문을 통과하던 모습이 지금도 가아끔 떠오르는 젊은 날의 가장 소중한 추억들의 한조각들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사회생활을 하며 세파에 시달리다보니 한양공고의 축구우승 소식은 날이 갈수록 들을 수가 없었고 또 “돈도라지”를 부를 기회도 자꾸 줄어 들어버렸다. 이대로 “돈도라지”는 그냥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그런데 올해는 주말리그에서 조2위를 하여 고교왕중왕전 준결승전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또 서울시협회장기 대회에도 준결승에 올랐었다고 하니 내년에는 효창운동장에서 동문들이 목소리를 높여 “돈도라지”를 부를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내년에는 우리 한양축구부가 한일교환경기 대표, 전국체전 서울대표 등으로도 출전을 한다하니 자다가도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빙그레 웃어본다.
한양 파이팅, 한양공고 축구부 파이팅~~~
첫댓글 에전이나,, 우리때나,, 경쟁-비율은 무척,, 높았네요 !!!,,, 아무튼 덕분에 돈도라지가 한양-명성을 높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