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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천태종사상
1. 삼제원융(三諦圓融)
2. 일심삼관(一心三觀)
3. 일념삼천(一念三千)
4. 원교(圓敎)의 중도설
1) 원교사제(圓敎四諦) 2) 원교사문(圓敎四門) 3) 원돈지관(圓頓止觀)
4) 원교의 십이인연 5) 쌍차쌍조(雙遮雙照) 6) 불이법문(不二法門)
5. 중도실상경계(中道實相境界)
제7장 화엄종사상
1. 진공묘유(眞空妙有)
1) 진공사의(眞空四義) 2) 공유교철(空有交徹)
2. 법계삼관(法界三觀)
1) 진공관(眞空觀) 2)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
3) 주변함용관(周徧含容觀) 4) 이사원융의(理事圓融義)
3. 사문십의(四門十義)
1) 사문(四門) 2) 십의(十義)
4. 제법무애도리(諸法無碍道理)
1) 이문상입의(異門相入義) 2) 이체상즉의(異體相卽義) 3) 체용쌍융의(體用雙融義)
5. 차정(遮情)과 표덕(表德)
1) 차정(遮情) 2) 표덕(表德) 3) 차표원융(遮表圓融)
6. 화엄십종판(華嚴十宗判)
1) 십종교판(十宗敎判) 2) 대승사구(大乘四句)
7. 설청전수(說聽全收)
8. 심요법문(心要法門)
9. 법성게(法性偈)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2) 마조스님 3) 백장스님 4) 대주스님 5) 교외별전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2) 무념무심(無念無心) 3) 오매일여(寤寐一如)
4) 사중득활(死中得活) 5) 대원경지(大圓鏡智) 6) 상적상조(常寂常照) 7) 아난의 득도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2) 돈오점수(頓悟漸修)
(1) 수심결(修心訣) (2) 절요(節要)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제6장 천태종사상
1. 삼제원융(三諦圓融)
2. 일심삼관(一心三觀)
3. 일념삼천(一念三千)
4. 원교(圓敎)의 중도설
1) 원교사제(圓敎四諦) 2) 원교사문(圓敎四門) 3) 원돈지관(圓頓止觀)
4) 원교의 십이인연 5) 쌍차쌍조(雙遮雙照) 6) 불이법문(不二法門)
5. 중도실상경계(中道實相境界)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는 혜문선사(慧文禪師)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주로 선에 대한 관법을 익혔으며,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中論) 및 대지도론(大智度論)을 탐독하여 마침내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요결을 깨달았습니다. 제2조인 혜사(慧思:514~577)선사는 15세에 출가한 이래로 『법화경』을 비롯한 여러 대승경전을 독송하고 사방을 유행하여 선관(禪觀)을 닦았으며, 혜문선사를 찾아가 일심삼관의 요결을 배워 익혀 법화삼매(法華三味)를 증득했습니다. 법화삼매의 본래 의미는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등 철저한 공관(空觀)을 증득하는 것이었지만, 혜사선사가 증득한 법화삼매는 근기가 뛰어난 보살이 방편을 버리고 부처님의 공덕을 닦는 궁극적인 실천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법화경안락행의(法華經安樂行義) 등 여러 권의 저술이 있었고, 지의(智顗)°혜명(慧命) 등 여러 제자가 있었으나 그 법요(法要)를 전한 것은 천태 지의(天台智顗:538~597)입니다.
지의스님은 양(梁)나라 말기의 난세에 부모를 잃고 18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후 대현산(大賢山)에 올라가 법화경(法華經), 무량의경(無量義經), 보현관경(普賢觀經)을 독송하였습니다. 23세 때 대소산(大蘇山)에 가서 혜사선사 밑에서 수행하였는데, 혜사선사는 지의스님과 자신이 옛날 영축산에서 함께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는 것을 들었던 지난날의 인연으로 이제 서로 다시 만났다고 말하며, 지의스님이 법기(法器)임을 알고 간곡히 가르쳐, 드디어 지의스님은 법화삼매를 성취하였습니다. 그 후 지의스님은 대소산을 내려와 금릉의 와관사(瓦官寺)에서 차제선문(次第禪門), 법화문구(法華文句) 등을 개강하고, 38세에 천태산에 들어가 고행을 하였는데 천태대사(天台大師)라는 칭호는 지의스님이 천태산에서 10여 년 간을 머무른 데에 유래합니다. 진(陳)나라가 멸망하고 수(隋)나라가 들어서자 나중에 수 양제가 된 진왕 광(晋王廣)의 초빙에 의하여 그에게 보살계를 주고 지의스님은 지자(智者)라는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나중에 고향인 형주(荊州)로 돌아가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고 거기에서 법화현의(法華玄義), 마하지관(摩訶止觀) 등을 강설하였습니다. 그 후 천태산에서 지내다 진왕 광의 초청에 의하여 다시 하산하다가 도중에서 병을 얻어 입적하였으며, 입적 후에 진왕의 원조를 얻어 천태산에 국청사(國淸寺)가 창건되어 이후 천태종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천태스님이 남긴 많은 저서 가운데, 천태교학의 지침서인 『 법화문구』『법화현의』, 『마하지관』을 천태3대부라 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의 제자인 관정(灌頂)이 수치(修治)한 것입니다. 그 외에 관음현의(觀音玄義), 관음의소(觀音義疏), 금광명현의(金光明玄義)
, 금광명문구(金光明文句), 관경소(觀經疏)의 5소부(五小部)와 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 차제법문(次第法門), 사교의(四敎義) 등이 있습니다.
천태스님의 제자로는 30여 명이 있었으나 그 교학을 후세에 전한 것은 장안 관정(章安灌頂:561~632)이며, 이 계통의 문하에서 천태의 교학이 전승되다가 당나라 때 흥기한 법상종°화엄종°선종의 세력에 압도되어 종세가 약화되고 맙니다. 그 뒤에 당 말기에 활약한 형계 담연(荊溪湛然:711~782)에 의해 천태종이 일시 중흥하였으며, 송(宋)나라 때에는 화엄종의 영향을 받아 천태종 내에서 유심론(唯心論)에 대한 논쟁이 생겨 산가파(山家派)와 산외파(山外派)로 분류되어 산가파의 사명 지례(四明知禮:960~1028) 계통이 번창했습니다.
천태종은 일반적으로 화엄종과 함께 중국불교 교학의 최고 수준으로 불리는데, 그 교학은 교(敎)와 관(觀)의 두 부문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교(敎)는 교판(敎判)과 교리(敎理)로 구성되었습니다. 천태종의 교판(敎判)은 남북조시대에 도생(道生)°혜관(慧觀) 등 소위 남3북7(南三北七)의 열 명이 세운 교판을 연구하여 자기네의 교판을 수립하였는데, 그 교판은 오시팔교(五時八敎)입니다. 오시는 불교의 모든 경전을 부처님이 설한 다섯 시기의 순서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첫 번째가 화엄경을 설한 화엄시(華嚴時)이고, 그 다음은 차례대로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설한 아함시(阿含時) 또는 녹원시(鹿苑時), 그리고 유마경°승만경 등 일반 대승경전을 설한 방등시(方等時), 다음은 여러 가지 반야경을 설한 반야시(般若時)이며, 맨 마지막이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입니다. 팔교는 화의사교(化儀四敎)와 화법사교(化法四敎)를 합한 것입니다. 화의사교는 설법의 방식에 따라서 모든 불교를 돈교(頓敎),점교(漸敎),비밀교(秘密敎),부정교(不定敎)로 나눈 것입니다. 돈교는 청중의 근기를 구별하지 않고 바로 원교의 깊은 뜻을 일시에 널리 설한 법문이며, 점교(漸敎)는 근기를 감안하여 그것에 적합한 방편을 사용해서 점차 성숙시키는 법문입니다. 비밀교는 설명의 형식이 규칙적이지 않으면서도 여래가 몸°입°마음을 비밀히 구사하여 자재하게 중생을 제도하는 법문이며, 부정교는 ꡔ법화경ꡕ 이전의 설법에서 여래의 법문을 듣고 청중이 근기에 따라 각각 달리 이해하는 법문입니다. 화법사교는 설법의 내용에 따라서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로 구분한 것인데, 천태학에서 특히 중시하는 것이 이 화법사교입니다. 장교는 소승교로 소승의 경°율°논 삼장이 여기에 해당하며, 통교는 성문°연각과 보살의 삼승에 공통하는 대승의 첫 단계로 주로 반야경전이 해당합니다. 별교는 오직 보살만이 상응하는 가르침으로 원교와는 달리 차례로 법을 닦으며, 원교는 모든 교설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으로 삼제원융의 실상을 설하는 법화원교의 법문을 말합니다. 이 오시팔교 가운데 화의사교와 화법사교의 팔교를 명확히 한 것은 천태스님의 제자인 관정이라고 합니다. 어찌 됐든 천태종에서는 오시팔교의 교판을 세워서 천태스님 이전의 교판에서는 다소 경시되었던 법화경을 가장 수승한 법문이라고 선언하여 법화경 중심의 사상을 주장한 것입니다.
천태종의 교리(敎理)는 전반적으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법실상이란 중론의 삼제게(三諦偈)에 있는 공(空)°가(假)°중(中)의 삼제에 의하여 표명되는 것으로, 천태종에서는 이 삼제게를 보다 원융적으로 해석합니다. 즉 인연으로 생겨난 일체법이 그대로 공이고 가(假)이고 중(中)이면서, 공 가운데에 가와 중이 있고 가 중에 중과 공이 있는 등 삼제가 즉공(即空)°즉가(即假)°즉중(即中)이 되어 원융삼제(圓融三諦)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융삼제는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그러하여 자연히 갖추어진 것이므로 일경삼제(一境三諦)라고도 합니다. 이 제법실상의 도리를 분명하게 표명하는 천태교학으로 일념삼천(一念三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생각 속에 삼천 가지의 법이 구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삼천이란 대지도론과 화엄경에서 설하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인°성문°연각°보살°부처의 십계(十界)와, 법화경에서 설하는 여시상(如是相)°여시성(如是性)°여시체(如是體)°여시력(如是力)°여시작(如是作)°여시인(如是因)°여시연(如是緣)°여시계(如是界)°여시보(如是報)°여시본말구경(如是本末究竟) 등의 십여시(十如是), 그리고 대지도론에서 논하는 오음세간(五陰世間),중생세간(衆生世間),국토세간(國土世間)의 삼종세간(三種世間)을 곱한 것입니다. 즉 10계(十界)의 각각이 다시 10계를 구비하여 십계호구(十界互具)의 100계가 되고, 1계가 또한 각각 10여시를 구비하여 천(千)이 되며, 이들이 모두 삼종세간을 갖추므로 결국에는 삼천(三千)이 됩니다. 이러한 일념삼천설은 제법이 본래 즉공,즉가,즉중의 묘법이므로 만법이 모두 원융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태종에서는 담연(湛然:711~782)에 이르러서 화엄학의 성기설(性起說)에 영향받아, 하나의 색(色)이나 하나의 향(香)이 모두 본래 선악(善惡)의 삼천 가지 제법을 갖추었다는 성구설(性具說)을 주장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악설(性惡說)까지도 말하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불교 종파에서는 다만 성선(性善)을 설하지만 유독 천태학에서 성악(性惡)을 설한 것입니다. 그 뜻은 설사 지옥 중생일지라도 지옥의 성품은 물론 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인,성문,연각,보살,부처의 덕성을 갖추고 있으며, 부처님이라 하여도 지옥․아귀에서부터 보살°부처까지의 성품을 지니어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고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비록 행위로서의 악은 단절했지만 성품으로서의 악성은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악설은 천태종 내부에서는 물론 화엄종에 의해서도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태종의 성악설이 의도하는 본뜻은, 수도하는 이로 하여금 일체의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원인이 각자가 구비한 덕성에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하려는 현실주의적인 사고에 근거한 교설이라 하겠습니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진여법성(眞如法性)과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순간마다 그 마음속에 부처의 세계가 생기기도 하고 지옥의 세계가 전개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천태종의 교리와 병행하여 거론되는 실천적인 관법(觀法)으로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이 대표적입니다. 일심삼관이란 일심(一心)의 위에서 삼제가 원융함을 관하는 것이니, 곧 일상의 한 마음 가운데 삼천 가지의 제법을 구족하여 즉공즉가·즉중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관법으로서 일심삼관을 관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상을 관하여 마음을 법계에 두고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 아님이 없음을 관하는 것이니 이러한 천태종의 관법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 합니다.
천태종에서는 실천적인 수행도를 지관(止觀)이라 부르는데, 이 지관법에는 점차지관(漸次止觀),부정지관(不定止觀),원돈지관(圓頓止觀)의 세 가지가 있으며, 이것은 혜사선사의 세 가지 지관을 전해 받은 천태스님이 완성한 것입니다. 점차지관은 여러 가지 선관을 처음에는 얕고 나중에는 깊이 닦는 것으로 삼승이 함께 닦는 관법이며, 부정지관은 관법을 행함이 앞뒤가 일정하지 않고 그 행상도 불규칙하니 점교,돈교의 관법을 말한 것입니다. 원돈지관은 법화원교의 관법을 말하는데 이 원돈지관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사종삼매(四種三昧)와 십승관법(十乘觀法)이 있습니다. 사종삼매는 신행(身行)의 구별에 따라 선정의 종류를 상좌삼매(常坐三昧),상행삼매(常行三昧),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의 네 가지로 나눈 것인데, 이 사종삼매는 반야경,반주삼매경 등 법화경 이외의 여러 경전이 설하는 삼매의 법문을 포함합니다. 십승관법은 부사의한 일념삼천의 사상을 의미하는 부사의경(不思議境)을 관하는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을 비롯한 기자비심(起慈悲心),교안지관(巧安止觀) 등의 열 가지 관법입니다. 이들 가운데 최초의 관부사의경 이외에는 모두가 여러 대소승의 경론에서 설한 것이므로 결코 천태지관만의 독특한 관법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십승관법 중에서 처음의 관부사의경이 일념삼천의 도리를 관하는 가장 중요한 관법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이 관법을 완성하기 위한 보조관법이라고 말해집니다. 사종삼매와 십승관법의 구별을 논하자면 사종삼매는 십승관법을 닦기 위한 방편이고 보조연이며, 십승관법은 바로 법화원교의 사상을 관하는 정식 수행입니다.
1. 삼제원융(三諦圓融)
천태종의 교리를 조직하는 근본적인 사상적 기반은 중도실상(中道實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도실상이란 곧 공(空),가(假),중(中)의 삼제가 원융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 사상의 연원은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지은 중론(中論)의 삼제게(三諦偈)에 유래합니다. 만법은 여러 인연으로 인하여 발생하므로 공(空)이라 하는데, 연기하여 생한 제법(諸法)은 고정적인 유(有)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연기한 제법은 비록 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연기하여 존재하므로 결코 무(無)가 아닙니다. 이 뜻을 가(假)로 표현합니다. 연기법은 이렇게 한편으로 공이고 한편으로 가이므로 유와 무를 떠나 중도를 이루는 중(中)이 됩니다.
천태종에서는 이 공·가·중의 삼제가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고 서로 원융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따라가고, 가라 하면 공과 중이 따라가서 언제든지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어서 삼제가 늘 상응하여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렇게 보아야만 연기를 바로 보고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지, 만약 그렇지 못하고 공은 공대로, 가는 가대로, 중은 중대로 되어 버리면 편견이 되어 올바른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삼제는 이름이 공이고 가이고 중일 뿐이지 실제로 이것을 공이라 하고 저것을 가라 하여 어느 한 가지에 집착하면 곧 어긋납니다.
이 삼제원융의 도리는 천태스님의 스승인 혜문(慧文)스님이 중론을 읽다가 그 깊은 뜻을 발견하여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 도리를 참으로 자재하게 활용한 분이 바로 천태 지자(天台智者)스님입니다.
한 생각 마음이 일어남에 즉 공(空)이고 즉 가(假)이고 즉 중(中)이라 함은 근(根)이나 진(塵)이 모두 법계며 모두 필경공(畢竟空)이며 모두 여래장(如來藏)이며 모두 중도이다. 어째서 공이라 하는가.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하니 인연으로 생한즉 주체가 없고 주체가 없은즉 공이니라. 어째서 가라 하는가. 주체가 없이 생하니 곧 이것이 가이니라. 어째서 중이라 하는가. 법성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모두가 다 중이니라. 마땅히 알아라. 한 생각이 즉공, 즉가, 즉중이며 모두 필경공이며 모두 여래장이며 모두 실상이니라. 셋이 아니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셋이 아니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면서 합하고 흩어지며,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으면서 동일하고 다르니라. 비유하면 밝은 거울과 같으니 밝음을 비유함이 즉 공이요, 거울에 나타난 상을 비유함이 즉 가요, 밝은 거울을 비유함이 즉 중이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면서 합하고 흩어짐이 완연하며, 하나, 둘, 셋이 아니면서 둘, 셋이 방해롭지 않느니라. 이 한 생각 마음은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어서 불가사의하니 단지 자기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부처와 중생도 역시 또한 이와 같으니라. 화엄에 말하기를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하니, 마땅히 알아라. 자기의 마음에 일체 불법을 구족하고 있느니라.
一念心起에 即空即假即中者는 若根若塵이 並是法界며 並是畢竟空이며 並是如來藏이며 並是中道니라. 云何即空고 並從緣生緣生 即無主요 無主即空이니라. 云何即假오 無主而生하니 即是假니라. 云何即中고 不出法性하니 並皆即中이니라. 當知하라. 一念이 即空即假即中이며 並畢竟空이며 並如來藏이며 並實相이니라. 非三而三三而不三이요 非合非散而合而散이며 非非合非非散이요 不可一異而一而異니라. 譬如明鏡이니 明喩即空이요 像喩即假요 鏡喩即中이라. 不合不散하며 合散이 宛然하고 不一二三하며 二三無妨하니라. 此一念心은 不縱不橫하여 不可思議하니 非但己爾요 佛及衆生도 亦復如是니라. 華嚴에 云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 하니 當知하라 己心具一切佛法矣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p. 8下~9上]
‘한 생각 마음이 일어남에 즉공, 즉가, 즉중이라 함’은 부사의 해탈경계에서 말하는 것이지 중생의 생멸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수행할 필요도 없고 성불할 필요도 없고 중도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은 반드시 깨달아야지 깨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육근(六根)이나 육진(六塵) 등의 모든 것이 눈감은 사람이 볼 때는 캄캄한 암흑뿐이지만 눈을 뜨고 보면 대광명입니다. 중도를 깨달아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체득한 사람에게는 전체가 다 법계며 필경공이며 여래장이며 중도제일의제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공(空)이라 하는가?” 일체만법이 인연으로부터 생하므로 주체가 없으며, 주체가 없으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없으므로 곧 무아(無我)로서 공이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가(假)라 하는가?” 주체가 없이 생하므로 분명히 무아는 무아인데 연기하여 머무름이 있으므로 곧 가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중(中)이라 하는가?” 법성을 벗어나지 아니하므로 연기라 하든지 공이라 하든지 가라 하든지 이 전체가 다 법성의 표현이며 법성 이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밝은 거울에 비유하면, 밝음이 즉 공이니 환하게 밝기는 밝지만 밝은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공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밝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가운데 사람이나 사물이 분명히 거울에 나타나는데, 이것을 가라고 비유합니다. 그리고 거울 자체는 중이라 비유합니다. 그리하여 광명[明]이라 하든지 모양[像]이라 하든지 가라 하든지 중이라 하든지 이 전체가 밝은 거울 속에 있어 합할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습니다. 밝은 거울 가운데 광명이 있어 모양이 나타나므로 광명이 즉 모양이고 모양이 그대로 밝은 거울입니다. 밝은 거울과 모양과 광명이 서로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 없고, 하나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입니다.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에서 ‘합하지도 않는다’ 함은 광명과 모양과 밝은 거울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광명 이외에 모양이 따로 있고 모양 이외에 밝은 거울이 따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셋은 한 덩어리가 되어 그 한 덩어리 속에 셋이 있고 셋 속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또 합하고 흩어짐이 완연하며, 하나, 둘, 셋이 아니면서 둘, 셋이 방해롭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 한 생각 마음은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면서 불가사의하니 자기 마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부처와 중생이 또한’ 그와 같습니다. 이런 도리는 오직 바로 깨친 사람만이 알 수 있으며, 그 이외는 천 명의 석가, 만 명의 달마가 나와 미래겁이 다하도록 설명을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굳이 설명을 한다는 것은 눈먼 맹인에게 오색단청이나 광명을 이야기하는 격입니다. 화엄경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이 차별이 없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까닭은 자기 마음을 바로 깨달으면 일체 불법을 바로 아는 동시에 공·가·중의 삼제가 원융무애한 사실을 완연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늘 중도 이야기만 하므로 듣기가 다소 지루할지 모르지만 불교의 근본이 다 중도에 서 있느니만큼 혹 표현은 다르다 해도 중도를 제외하고는 불법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 불교를 바로 보는 것이고, 중도를 바로 보지 못하면 절대로 불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계 인연으로부터 나니 체(體)는 다시 유(有)가 아니다. 유가 아니기 때문에 공(空)이요, 공이 아니기 때문에 유다. 공과 유를 얻지 못하되 공과 유를 쌍조하여 삼제가 완연하여 부처의 지견을 갖추느니라.
法界從緣生하니 體復非有라. 非有故空이요 非空故有라. 不得空有로대 雙照空有하여 三諦宛然하여 備佛知見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6上]
공과 유를 완전히 떠나 쌍차(雙遮)하면 거기에서 도리어 공과 유가 쌍조(雙照)되어 원융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삼제가 원융하여 하나가 곧 셋이고, 셋이 곧 하나가 되어 부처의 지견을 갖추게 됩니다.
2. 일심삼관(一心三觀)
일체 제법이 원융한 삼제의 도리를 구비하였다고 하여도, 이것을 바르게 관찰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낱 수고로운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천태교학에서는 이론인 교리(敎理)와 함께 수행인 관법(觀法)을 모두 중시하여 서로 병행하여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은 경계로서의 이법(理法)인 원융삼제(圓融三諦)를 관찰하는 주체적인 면에서 실천적으로 수행하는 관법을 말합니다. 일심삼관은 공(空),가(假),중(中)의 삼제에 의거하여 공관(空觀),가관(假觀),중도관(中道觀)의 삼관을 일심의 세 방면에서 세운 관법이므로 일심삼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심삼관은 엄밀히 말하면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부사의삼관(不思議三觀)이라고도 합니다.
천태종에서는 이 일심삼관을 또한 천태삼관(天台三觀)이라 하여 중도실상을 설하는 법문으로 간주합니다.
일체 모든 가(假)가 실로 모두 공하여 공이 곧 실상인 것을 체득함을 공관에 들어간다[入空觀]고 이름하며, 이 공에 요달했을 때에 보는 것이 중도에 계합하여 능히 세간 생멸의 법상을 알아서 여실하게 봄을 가관에 들어간다[入假觀]고 이름하며, 이러한 공의 지혜가 즉시 중도이어서, 둘이 없고 다름이 없음을 중도관(中道觀)이라 이름하느니라.
體一切諸假가 實皆空하여 空即實相을 名入空觀이요 達此空時에 觀冥中道하여 能知世間生滅法相하여 如實而見을 名入假觀이요 如此空慧가 即是中道라 無二無別을 名中道觀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25中]
중도에서는 공과 가가 다름이 없고 둘이 아닙니다. 앞에서 때때로 많은 법이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묘(妙)라 하든지 부사의(不思議)라 하든지 하며 나아가 이것도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등 여러 말을 했는데, 자칫 잘못하여 이것을 집착하여 불법인 줄 알면 공변(空邊)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중도관에 대하여 아주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면으로도 설명하여 세간 생멸의 모습을 알아 여실하게 보는 것이 입가관(入假觀)이며 또한 중도관(中道觀)이라고 합니다. 부정이 즉 긍정이고 긍정이 즉 부정으로 아무리 부정하여도 거기에 긍정이 있고 아무리 긍정하여도 부정이 있습니다. 긍정과 부정이 조화를 이루어 지극히 원융한 이것이 불법이며 오직 한편으로 부정만 해서는 결코 진정한 불법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의 법(法)이 일체법이면 곧 인연으로 생한 법이니 이것은 거짓 이름으로 가관(假觀)이요, 만약 일체법이 곧 하나의 법이면 나는 이것을 공이라고 설하니 공관(空觀)이요, 만약 하나도 아니고 일체도 아니면 곧 중도관이니라. 하나가 공(空)하여 일체가 공하면 가·중이면서도 공하지 않음이 없으니 다 공관이요, 하나가 가(假)이어서 일체가 가면 공·중이면서도 가이지 않음이 없으니 다 가관이요, 하나가 중(中)이어서 전체가 중이면 공·가이면서도 중이지 않음이 없으니 다 중관이다. 곧 중론(中論)에서 설하는 부사의한 일심삼관(一心三觀)이니 모든 일체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若一法一切法이면 即是因緣所生法이니 是爲假名假觀也요 若一切法이 即一法이면 我說即是空이니 空觀也요 若非一非一切者면 即是中道觀이니라. 一空一切空하면 無假中而不空하니 總空觀也요 一假一切假하면 無空中而不假하니 總假觀也요 一中一切中하면 無空假而不中하니 總中觀也라. 即中論所說의 不思議一心三觀이니 歷一切法亦如是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55中]
공이 있고 가가 있고 중이 있다고 하여 마치 무슨 흙덩이같이 참으로 하나하나 있는 줄 알면 실로 공°가°중을 모르는 것입니다.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거기에 포함되고, 가라 하면 공과 중이 포함되며, 중이라 하면 공과 가가 거기에 포함되어 삼제[空°假°中]가 완전히 원융해집니다. 아무리 각도를 달리하여 잡아도 포착할 수 없는 실제의 참된 부사의한 도리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실로 하나를 들면 전체가 다 따라가고 전체라 하면 그것이 곧 하나로, 전체를 제외하고 하나가 따로 없고 하나를 제외하고 전체가 따로 없습니다. 이를 부사의한 일심삼관이라 하는데 삼관만이 아니라 일체만법이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법(法)과 하나하나의 능(能)과 하나하나의 소(所)에서 모두 즉공(即空)․즉가(即假)․즉중(即中)하여 제(諦)․연(緣)․도(度)를 구족하면, 이것을 통함도 없고 막힘도 없으며 통함과 막힘을 쌍으로 비추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
若於一一法과 一一能一一所에 皆即空即假即中하여 具足諦緣度하면 是名無通無塞 雙照通塞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권, p. 87中]
주체[能]이든지 객체[所]이든지 진진찰찰(塵塵刹刹)에서 공․가․중하여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 팔정도(八正道)를 갖추면 트임도 없고 막힘도 없으면서 서로 통하고 서로 막힙니다.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면서도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완연하다[山山水水各宛然]’는 말입니다. 결국은 쌍차쌍조(雙遮雙照)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중도제일의관(中道第一義觀)이란 먼저 가가 공함을 관하니 이는 생사를 공하고, 뒤에 공이 공함을 관하니 이는 열반을 공하여 두 변을 쌍차하니라. 이것을 두 공관(空觀)이 방편도가 되어서 중도를 아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마음마음이 적멸하여 살바야해에 들어간다고 하느니라. 처음의 관에서 공을 사용하고 뒤의 관에서 가를 사용하니 이것은 쌍으로 존재하는 방편으로 되어 중도에 들어갈 때 능히 이제를 쌍조하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되 마음이 만약 정(定)에 있으면 능히 세간의 생멸하는 법의 모습을 안다고 하니, 앞의 두 관법을 두 종류의 방편으로 삼은 뜻이 여기에 있느니라.
中道第一義觀者는 前觀假空하니 是는 空生死하고 後觀空空하니 是는 空涅槃하여 雙遮二邊이라. 是名二空觀爲方便道하며 得會中道니라. 故言心心寂滅하여 流入薩婆若海하니라. 初觀用空하고 後觀用假하니 是爲雙存方便하여 入中道時에 能雙照二諦니라. 故經에 言호대 心若在定하면 能知世間生滅法相이라 하니 前之兩觀을 爲兩種方便意在此하니라.
생사와 열반은 서로 상대적인 것으로 모두 변견(邊見)입니다. 이 변견을 타파하기 위하여 열반도 공하고 생사도 공하여 생사와 열반을 쌍차하여 완전히 버려야만 합니다.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한 방편으로 필요한 약이 부처인데 병이 다 낫고 보면 부처란 약이 필요 없습니다. 병이 다 나으면 부처란 약이 필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란 약을 집착하게 되면 이 병이 더 큰 병입니다. 사람이 건강하여 약이 필요 없는데도 약을 자꾸 고집하면 이 사람도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불(佛)이니 열반이니 하는 건데, 참으로 병이 나으면 약이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반이고 해탈이고 다 필요 없습니다. 생사는 좋지 못한 것이고 열반은 좋은 것이라 하여 끝까지 취한다면 결국 불을 피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같습니다. 살바야해(薩婆若海)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뜻하므로 살바야해에 들어간다는 말은 곧 성불(成佛)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살바야해에 흘러 들어간다고 하니 중도를 깨쳐서 다시 살바야해에 들어가는 줄로 알면 잘못입니다. 실제로 중도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그대로가 살바야해인 것입니다.
유°무가 쌍조되고 생°멸이 쌍조되면 참으로 원융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집니다. 생멸법상을 바로 바라보면 그것은 중도로서 참으로 적적합니다. 그러나 적적하다고 해서 거기에 취해 있다면 그것은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은 적멸이라 하면 적멸에 빠지고 생멸이라 하면 생멸에 빠지므로 앉아도 병이고 서도 병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몸소 애써 유․무나 공․가의 방편을 활용하여 중도의 법문을 설하는 이것이 부처님의 뜻입니다.
3. 일념삼천(一念三千)
천태학(天台學)에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그 뜻은 한 마음, 한 생각 속에 무려 삼천 가지의 법계가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천태종에서는 법계를 십법계(十法界)로 분류하는데, 그 십법계는 윤회하는 육도(六度)의 세계인 지옥계°아귀계°축생계°아수라계°인간계°천상계와 성인(聖人)의 경지인 성문계°연각계°보살계°불계입니다. 그리고 십계호구(十界互具)라 하여 십법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한 법계 가운데 나머지 구법계가 모두 구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백법계(百法界)가 됩니다. 예를 들면 지옥계에 지옥 외에도 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불의 구계(九界)가 갖추어져 있고, 불계에도 불계 외에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의 구계가 본래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법계의 근본 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법화경의 방편품(方便品)에서 설해지는 십여시(十如是)가 있습니다. 십여시는 여시상(如是相),여시성(如是性),여시체(如是體),여시력(如是力),여시작(如是作),여시인(如是因),여시연(如是緣),여시과(如是果),여시보(如是報),여시본말구경(如是本末究境)입니다. 여시상이란 현상적으로 나타난 모든 형상을 말하고, 여시성이란 모든 법에 구비된 내적인 본성을 말합니다. 여기에 주체가 있는 것을 여시체라 하며, 제법이 역용(力用)을 지닌 것을 여시력이라 합니다. 이 역용이 작용하여 여러 가지 업을 짓는 것을 여시작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근본적 원인이 있고 또 조연(助緣)이 있으며 반드시 어떠한 결과가 따릅니다. 이 근본 원인이 여시인이고, 조연이 여시연이며, 그 결과가 여시과입니다. 여시보는 인과에 따르는 과보를 말합니다. 여시본말구경은 십여시 중에서 처음의 여시상을 본(本), 마지막의 여시보(如是報)를 말(末)이라 하여, 이들이 전체적으로 궁극적인 구경이 되어 동등한 것을 뜻합니다. 이상의 십여시가 백법계 속에 각각 다 구비되어 있으므로 마침내 천법계(千法界)가 됩니다. 그리고 이 천법계에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 오음세간(五陰世間)의 삼종세간(三種世間)을 곱하면 결국 삼천법계(三千法界)가 성립됩니다. 삼종세간 중에서 오음세간은 중생세간과 국토세간을 구성하는 물심(物心)적인 요소이며, 중생세간은 중생의 정보(正報), 국토세간은 의보(依報)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십법계가 서로 구족하여 백법계가 되고, 백법계가 십여시를 갖추어 천법계가 되며, 천법계가 삼종세간을 구비하여 삼천세계, 삼천법계가 성립하는데, 이 삼천세계가 일상생활에서 늘 생각하는 우리들의 한 생각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생각 속에 삼천세계가 존재하므로 여기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게 융화되고 보살과 마구니가 자리를 같이하여 아무리 다르다고 하여도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릇 한 마음이 십법계를 구비하고 한 법계가 또 십법계를 갖추니 백법계며, 한 세계가 삼십 가지 세간을 갖추니 백법계가 곧 삼천 가지 세간을 갖추며, 이 삼천이 한 생각 마음에 있느니라.
夫一心이 具十法界하고 一法界具十法界하니 百法界며 一界具三十種世間하니 百法界即具三千種世間하며 此三千이 在一念心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54上]
십여시에 삼종세간을 곱한 것이 삼십종세간(三十種世間)입니다. 따라서 한 법계가 삼십종세간을 갖추므로 백법계는 곧 삼천종세간을 구비하게 됩니다.
만약 한 생각 번뇌심이 일어나면 십법계, 백법계를 구비하니 서로 방해되지 아니하며, 비록 많다 해도 있는 것이 아니며 비록 하나라도 없는 것이 아니니라. 많다고 쌓이지 아니하고 하나라고 흩어지지 아니하며, 많다고 다르지 아니하고 하나라고 같지 아니하여 많은 것이 곧 하나요, 하나가 곧 많음이니라.
若一念煩惱心起하면 具十法界百法界하니 不相妨碍하며 雖多不有하고 雖一不無라. 多不積一不散하며 多不異一不同하여 多即一이요 一即多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04上]
우리가 성불하여 대원경지의 무애지(無碍智)를 갖추어야만 부처의 성품을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중생심 가운데에도 모든 여래의 지혜덕상이 완전히 구비되어 있어 한 생각 번뇌심 그 자체가 십법계, 백법계, 삼천세계를 다 구비하고 있습니다. 즉 부처의 마음[佛心]이나 중생의 마음[凡心]이나 그 자체는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심이나 범심이 서로 방해되지 아니하여 그 자체가 아무리 많아도 많은 형상을 찾아볼 수 없고, 하나라 해도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어서 적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 자성은 있고 없음을 떠나 있으므로 아무리 형상이 많다 해도 형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나라 해도 찾아볼 수 없는 그것이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광명이 법계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제(眞諦)인 동시에 속제(俗諦)이고 속제인 동시에 진제입니다. 차별이 즉 절대요, 절대가 즉 차별이므로 일°다(一多)가 원융하고 유°무(有無)가 무애하여 모든 것이 원융무애하게 성립됩니다.
마음이 일체법이고 일체법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아니하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극히 묘하고 깊이 단절되어 식(識)으로 알 바가 아니고 말로써 말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부사의경계라고 말한다.
心是一切法이요 一切法是心이라 故非縱非橫이며 非一非異하며 玄妙深絶하여 非識所識이며 非言所言일새 所以稱爲不可思議境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54上]
마음 밖에 일체법이 따로 없고 일체법 밖에 마음이 따로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식은 비단 사량분별뿐만이 아니라 제8 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까지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볼 때에 아뢰야식은 무기식(無記識)으로 분별(分別)이 없는 것 같지만 부처님의 대원경지(大圓鏡智)에서 볼 때는 중생의 분별심과 마찬가지로 망상입니다.
‘식으로 알 바가 아니다’라는 뜻은 하나가 곧 일체[一即一切]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切即一]라는 일심법계(一心法界)의 도리는, 그 이치가 깊고 깊어서 제8 아뢰야식까지도 완전히 뿌리뽑아야 알 수 있으며, 그 이전에는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량분별로써 알 수 없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경지는 오직 깨쳐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하기를 부사의경계라고 하며 묘법(妙法)이라고도 합니다.
세로이며 또한 가로라도 삼천법을 얻을 수 없으며,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라 해도 삼천법을 얻을 수 없으니,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소멸하므로 부사의경계라 이름하느니라. 열반경에 말하되 나고 남[生生]을 설할 수 없으며 나고 나지 않음[生不生]을 설할 수 없으며 나지 않으면서 나는 것[不生生]을 설할 수 없으며 나지 아니하고 나지 아니함[不生不生]을 설할 수 없다고 함이 곧 이 뜻이니라. 마땅히 알아라.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는 한 법도 얻을 수 없거니와 하물며 삼천법이리요.
亦縱亦橫이라도 求三千法不可得이며 非縱非橫이라도 求三千法不可得이니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일새 故名不可思議境이니라. 大經云生生不可說이며 生不生不可說이며 不生生不可說이며 不生不生不可說이라 하니 即此義也라 當知하라. 第一義中에 一法도 不可得이어니와 况三千法이리요. [摩訶止觀;大正藏 46, p. 54中]
‘세로이며 또한 가로다’ 함은 쌍조(雙照)를 말하고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다’ 함은 쌍차(雙遮)를 말합니다. 쌍차쌍조가 된 자리에서는 한 법은 물론 삼천법을 얻을 수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량분별로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하므로 삼천법이 마치 손으로 잡을 수 있듯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말로 표현하자니 삼천법이지 삼천법이란 실로 얻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그 자체는 중생이 깨쳐야 비로소 알기 때문에 부사의 해탈경계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체적으로 논하면 십법계가 모두 인연으로부터 생한 법이니라. 이 인연은 즉공․즉가․즉중이니 즉공은 진제요, 즉가는 속제요, 즉중은 중도제일의제이니라.
若通論하면 十法界가 皆是因所生法이니라. 此因緣이 即空即假即中이니 即空은 是眞諦요 即假는 是俗諦요 即中은 是中道第一義諦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 885上]
이것은 공(空)°가(假)°중(中)의 삼제를 각각 진제(眞諦),속제(俗諦),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에 배대시켜 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연으로 생한 십법계가 공°가°중의 삼제를 갖추고 있으므로, 이로부터 파생한 백법계°천법계 내지 삼천세계 또한 삼제를 그 속성으로 삼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일념삼천의 근본 원리가 바로 삼제원융(三諦圓融)에 기초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일념삼천이라 하므로 한 생각 속에 부처와 중생이 공존할 것이요, 십법계가 서로 포섭하여 백법계가 되므로 여기에도 십법계의 가장 하위인 지옥계에 불계(佛界)가 포함되고 불계에도 지옥계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의 경계는 엄연히 격별한데, 이제 이 일념삼천의 법문에 의거하면 부처님과 중생이 조금도 다르지 않아 서로서로 자리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부처님의 경계와 중생의 경계가 서로 다른 줄 알지만, 근본 자성은 중생의 경계나 부처님의 경계나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지옥중생의 경계라 해서 자성이 더 더럽혀지지 않고 부처님의 경계라 해서 그 자성이 더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근본 자성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청정하고 무구해서 십법계 중생은 지옥중생이나 불계중생이나 다 같습니다. 부처가 지옥중생이고 지옥중생이 그대로 부처이며, 외도와 마구니 어떤 존재할 것 없이 모두가 서로 원융합니다. 그러므로 지옥 하면 거기에 축생으로부터 불․보살이 전부 다 구비되어 있고, 부처 하면 거기에 지옥, 아귀, 축생 등이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부처님 속에 지옥이 들어갈 수 있고 지옥 속에 부처님이 들어갈 수 있나 하며 의심하는 것은 변견(邊見)에 의지해서 보는 것이요, 삼제원융의 사상을 모르는 데서 하는 소리입니다. 일체만법이 다 삼제가 원융한 도리에 서 있는만큼 십법계, 백법계도 원융무애해서, 한 법계 가운데 다른 법계가 다 갖추어져 중생과 부처가 자리를 같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과 부처가 원만하게 융화되고 보살과 마구니가 자리를 함께하여, 아무리 다르다고 하여도 조금도 모순이 없습니다. 일체법이 불법 아님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를 때는 예수교와 유교, 불교가 각각 다르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전체가 다 큰 바닷물의 짠맛 하나뿐입니다. 이것이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인 것입니다. 이것을 천태종에서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하고 화엄종에서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합니다.
4. 원교(圓敎)의 중도설
1) 원교사제(圓敎四諦)
원교(圓敎)는 부처님께서 평생 설법한 중에서 가장 수승한 구경의 법문을 말합니다. 천태스님 이전에는 화엄경(華嚴經)을 원교라 하였으나 천태스님에 이르러서는 법화경(法華經)을 중심한 교학을 원교라 하였습니다.
천태스님은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그 설법의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화법사교(化法四敎)라 하였는데 그 사교(四敎)는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입니다. 이들 사교의 내용은 특히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제(四諦)를 설하는 방법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장교는 소승교(小乘敎)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이승(二乘)인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을 위하여 생멸사제(生滅四諦)를 설합니다. 세간의 인과(因果)인 고․집이나 출세간의 인과인 멸°도의 사제가 모두 변이하여 생멸하므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통교는 대승의 초문(初門)으로 그 가르침이 삼승(三乘)에 모두 통하여, 둔근기(鈍根機)의 보살은 이승과 같고 이근기(利根機)의 보살은 별교나 원교와 같습니다. 통교에서 설하는 사제는 무생사제(無生四諦)라 합니다. 즉 일체공(一切空)의 이치에 따라 고(苦)의 무생(無生)이 고성제(苦聖諦), 집(集)의 화합상(和合相) 없음이 집성제(集聖諦), 제법의 생(生)이 없고 멸(滅)이 없음이 멸성제(滅聖諦), 불이상(不二相)을 관함이 도성제(道聖諦)라는 것입니다. 별교는 이승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오직 보살에게만 적용되는 가르침인데, 별교에서는 고°집°멸°도의 사제에 무량한 모습이 있어 제한이 없다는 무량사제(無量四諦)를 설합니다. 이상의 장교°통교°별교의 삼교는 방편가설이라고 하며, 부처님의 근본 뜻은 중도실상(中道實相)에 있는데, 이것을 바르게 설한 것이 곧 원교이며, 원교만이 부처님의 진정한 설법이고 일승이라고 주장합니다. 원교에서 설하는 사제는 무작사제(無作四諦)인데, 여기에서는 끊어야 할 고제와 집제도 없고 현실을 떠나서 닦아야 할 도제도 없으며, 또 나타낼 열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사가 곧 열반이고 번뇌가 곧 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태스님은 원교를 최상의 이근기(利根機)를 지도 교화하기 위한 법문으로 규정하고, 그 원융함을 교원(敎圓),이원(理圓),지원(智圓),단원(斷圓),행원(行圓),위원(位圓),인원(因圓),과원(果圓)으로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원교는 교리와 관법에서 원융함을 설하며, 특히 삼제원융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기 때문에 원융사상이 철저하게 적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원융사상을 표방한 원교는 유와 무, 선과 악 등 상대법을 차단하고 이들의 원융한 도리를 설파하였기에 또한 중도이기도 합니다. 이 까닭에 원교를 중도라 설하는 것입니다.
원교란 바르게 중도를 나타낸 것이다. 두 변을 차단하여 공(空)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니라. 십법계의 중생을 바라보되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과 같아서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느니라. 필경에 실제는 아니지만 삼제의 도리가 완연히 구족되어 있느니라.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으며 한 마음 속에 있어 하나에 즉하여 셋을 논하고 셋에 즉하여 하나를 논한다. 관하는 지혜가 이미 그러하고 제(諦)의 도리도 또한 그러하여 일제가 삼제에 즉하고 삼제가 일제에 즉하니라.
圓敎者는 此正顯中道니 遮於二邊하여 非空非假며 非內非外니라. 觀十法界호대 如鏡中像水中月하여 不在內不在外하고 不可謂有며 不可謂無라 畢竟非實이나 而三諦之理가 宛然具足하니라. 無前無後하며 在一心中하여 即一而論三하고 即三而論一하니 觀智旣爾에 諦理亦然이라 一諦即三諦요 三諦即一諦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 886中]
원교란 중도를 바르게 나타낸 것으로 양변을 다 차단합니다. 유°무(有無)도 차단하고, 고°락(苦樂)도 차단하며, 선과 악, 생사와 열반, 마구니와 부처 등 상대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차단해 버립니다. 상대적인 어느 한쪽을 집착하게 되면 변견으로서 불법이 아니고, 중도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원교는 중도를 표방한 것인데, 양변을 떠난 동시에 양변에 원융하여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닙니다. 이러한 원교의 중도관에 따르면 십법계의 중생을 보되 거울 속의 모습과 같고 물 속의 달과 같아서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밝은 거울 속의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분명히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아니며, 물 속에 달이 비치어 달이 물 속에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달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도 이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과 마찬가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거울 속의 모습과 물 속의 달은 예로부터 중도를 나타내는 비유로 자주 사용되어 왔습니다. 또한 이 말은 천태스님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화엄종의 청량국사도 황태자가 질문한 심요(心要)에 대하여 대답할 때, 이 거울 속의 모습과 물 속의 달로 비유하여 불법이 중도라는 것을 표명했습니다.
이는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이 결국 실제가 아니면서도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듯이 삼제의 이치가 완연히 드러납니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유가 아니면서 유고, 무가 아니면서 무이므로 묘법(妙法)이라 말합니다.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공°가°중이 원융함을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관하는 지혜’라는 것은 차(遮)면에서는 공(空)이라 하고, 조(照)면에서는 혜(慧)라 하며, 중(中)을 등지(等持)라 합니다. 즉 쌍차면은 공이라 하고 쌍조면은 혜라 하며 쌍차쌍조는 중이라고 합니다. 중도실상은 원융하여 공혜(空慧)라 하든지 등지(等持)라 하든지, 또는 차조니 공°가°중이니 하여 서로 표현하는 것은 달라도 그 내용은 같습니다. 셋이 즉 하나고 하나가 즉 셋이며, 하나 밖에 셋이 따로 없으며 셋 밖에 하나가 따로 없습니다.
‘제의 도리’는 일제(一諦) 내지 삼제(三諦)의 도리로서 정(定)과 혜(慧)를 구족하여 등지가 되면 공°가°중의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체(體)면에서는 공(空)°정(定)이라 하고, 용(用)면에서는 가(假)°혜(慧)라 하는데, 체와 용은 본래 같은 것입니다. 불과 빛이 똑같은 것이어서 불을 제외하고 빛이 없고, 빛을 제외하고 불이 없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삼팔선을 긋듯이 분별지어 놓으면 삼제원융이라 할 수 없고 변견(邊見)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일체만법의 근본 자체가 원융하여 자성이 원래 공한 데에 일체 현상이 나타나고 일체 현상이 나타난 곳에 자성이 공해 있습니다. 연기하는 이대로가 공이고 색이지 색 밖에서 공을 따로 찾고 공 밖에서 색을 따로 찾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주법계의 근본 원리로 이 법은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이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깨치고 바로 알아서 중생에게 소개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불법이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원교라는 것은 중도를 근본으로 삼아 삼제가 원융하여 쌍차쌍조하며 차조동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실제로 천태 지자스님이 주장하는 법화경의 근본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심삼관(一心三觀)이나 일념삼천(一念三千) 같은 불교의 도리들은 실제로 깨쳐야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원교에서의 수행방법을 지관(止觀)이니 선(禪)이니라고 부릅니다만, 결국 화두를 들어서 일심삼관을 실제로 보고 일념삼천을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이 아프도록 밥 이야기를 해보았자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천태스님의 모습을 보면 머리 위에 혹같이 솟은 것이 있습니다. 천태스님이 생전에 얼마나 정진을 열심히 했던지, 졸리면 머리 위에 커다란 물건을 만들어 얹어서 앉아 계시곤 했는데 그 때문에 살이 부풀어올라 육두(肉頭)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를 성취한 뒤에도 평생토록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머리 위에 얹는 것을 가리켜 선진(禪鎭)이라 합니다. 정상적인 육계가 아니고 선진을 올려놓고 정진을 하다 보니 살이 부풀어올라 육두같이 생긴 혹을 가지신 분이 천태스님입니다. 그런데 혜사(慧思)스님은 정말로 정상적인 육계가 솟아 있었습니다. 천태스님이 화엄종과 다른 점은 교리면에서뿐만 아니고 실제 정진하여 깨치는 데 치중한 것입니다. 천태스님은 스스로 자기는 선종이지 교종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정법이 28대를 내려오면서 천태로 계승되고 달마스님이나 육조의 선종은 실제로 선종이 아니고 천태종만이 선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할 만큼 천태종에서는 교리보다 실천적인 선정을 익히는 것이 보다 근본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중도를 관하면 일체 원교를 종횡으로 분명히 보느니라.
觀心中道하면 見一切圓敎 橫竪分明하니라. [維摩經玄疏 5, p. 549中]
양변을 여의는 것이 중도로서 차별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모든 것이 다 융화하여 원융하게 됩니다.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일체만법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 원교인만큼, 중도를 깨쳐서 양변을 여의어 원융자재한 도리를 알면 이에 모든 원교의 도리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단지 원돈교 하나만이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중도로서 바른 관법이니 오직 이것이 실제의 관세음이요 나머지는 모두 방편설이다.
故知하라 但一圓頓之敎가 一切種智中道正觀이니 唯此爲實觀世音이요 餘皆方便說也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 887上]
참으로 성불해야만 불지(佛智)인 일체종지를 얻으며, 이때에 비로소 중도의 정관(正觀)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중도정관은 천태종의 교리에 의하면 오직 원교에서만 가능한데, 원교를 알려면 중도를 알아야 되고 중도를 알려면 원교를 알아야 됩니다. 원교와 중도는 둘이 아니어서, 교리적으로 표현할 때는 원교이지만 그 내용은 중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의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이라 해서 어디 다른 곳에 관세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깨칠 때 그때 관세음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방편설에 불과합니다. 곧 중도만이 실제로 부처님의 바른 사상이며 그 이외는 전부 다 방편적 가설(假說)입니다. 따라서 원융한 중도정관 이외에는 다 방편설인만큼 그 방편설을 실제의 불교인 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일체제불°일체조사°일체보살이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들이고 또 중도를 바로 깨쳐야만 불보살(佛菩薩)을 볼 수 있습니다. 성불하여야만 중도를 안다고 했는데 왜 보살을 들먹이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관세음보살은 과거에 이미 성불하고 난 후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보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현세에 나오신 분입니다. 중도를 깨친 입장에서는 석가불과 똑같습니다. 중도를 깨달으면 보살이라 해도 되고 아라한이라 해도 되고 조사라 해도 무방합니다. 중도만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
오직 원교의 교(敎)와 관(觀)만이 실상법문이다. 능히 십법계와 천가지 성상(性相)에 두루하여 삼제가 일시에 원만하게 통하니 원만하게 통한 중도가 이제를 쌍조하여 홀로 넓은 문[普門]이라 부른다.
唯圓敎敎觀이 實相法門이가 能遍十法界와 千性相하여 三諦一時圓通하니 圓通中道가 雙照二諦하여 獨稱爲普門也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 888上]
일체법을 분류할 때 실상(實相)과 가상(假相)으로 나누는 데서는 실상을 알고 보면 가상이 따로 없습니다. 실상이라고 따로 내세운 까닭은 가상만을 보는 중생, 피상적인 모습만 보는 중생, 즉 만법의 근원을 보지 못하는 중생을 위하여 실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지만 실상을 바로 알면 일체가 실상 아님이 없습니다.
원교의 교와 관은 실상법문으로 제법의 실상은 십법계와 천가지 성상(性相)에 보편적으로 두루하여 삼제가 일시에 원만하게 통해 있으니 한 군데로 치우치거나 막힌 곳이 없습니다. 삼제가 원융하게 통한다는 것은 공이라면 가고, 가라면 중이며, 중이라면 공․가가 다 들어가고, 가라 하면 공․중이 다 들어가서 하나를 들면 나머지가 전부 다 같이 통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한 가지만 집착하게 되면 실제로 중도와 실상을 모르는 것이고 삼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삼제가 원만하게 통하면 이에 따라 원만한 중도가 이제(二諦)를 쌍조(雙照)하며, 나아가 유무를 쌍조하고 선악(善惡)을 쌍조하고 시비(是非)를 쌍조하고 마불(魔佛)을 쌍조하게 됩니다.
‘넓은 문’이라 표현한 것은 시방세계의 미진수 불찰(微盡數佛刹)에 중도가 통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원교의 중도가 곧 실상이니라.
圓敎中道가 即是實相이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 890上]
거듭 원교를 들먹이는 까닭은 중생이 변견으로써 중도를 모르고 자주 오해를 하기에 원융한 원교를 표방하여 중도를 내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전에 연기와 중도를 잘 몰랐을 때에는 불교를 실상 계통과 연기 계통의 두 가지로 나누어, 실상 계통은 법화고 연기 계통은 화엄으로서 실상과 연기를 대립적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중도라는 것을 알고 보면 실상이 곧 연기고 연기가 곧 실상입니다. 그래서 지금에는 실상과 연기를 대립적인 두 가지로 나누지 않습니다.
이 중도는 소승이나 삼승의 교리가 아니고 일승원교라는 것을 말하는데 양변을 여읜 중도사상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후대에 발달된 사상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초전법륜할 때에 말씀하신 중도인 것입니다.
2) 원교사문(圓敎四門)
이것은 원교의 중심사상을 유(有),공(空),역공역유(亦空亦有),비유비무(非有非無)의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인데, 주요 내용은 번뇌가 보리이고 무명이 법성이라는 원융한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네 가지로 분별하여 설하기는 하지만 그 네 가지가 각각 격리되지 않고 서로 원만하게 융화하므로 여기에서 유(有)와 공(空) 등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의 묘(妙)가 은연히 드러납니다.
원교의 네 문은 묘한 이치를 단박 설하여 원융무애하니 차례대로 지내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문인가. 견사(見思)의 가(假)를 관(觀)하니 즉 법계로 일체불법을 구족하고, 또 모든 법이 곧 법성(法性)의 인연이요, 내지 제일의도 역시 인연이다. 열반경에 말씀하시되, 무명을 멸함으로 인하여 타오르는 삼보리(三菩提)의 등(燈)을 얻는다고 하니 이것을 유문(有門)이라 하느니라.
圓敎四門은 妙理頓說하여 圓融無碍하여 異於歷別하니 云何四門고 觀見思假하니 即是法界라 具足佛法이요 又諸法이 即是法性因緣이요 乃至第一義도 亦是因緣이라 大經에 云, 因滅無明하여 即得熾燃三菩提燈이라 하니 是名有門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75上]
‘차례대로 지내는 것과 다르다’ 함은 각 부문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각각 구별되어 나누어져 있지 않고 하나하나의 부문에 나머지 세 부문이 다 구족되어 원융하다는 뜻입니다.
‘견사(見思)의 가(假)를 관하니’에서 견과 사는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말하는데, 견혹은 불교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생기는 후천적인 번뇌이고, 사혹은 습관적으로 사물에 대하여 애착하는 선천적인 번뇌입니다. 이 견혹과 사혹은 삼계 생사윤회의 번뇌로서, 견과 사의 가(假)란 유문(有門)에서 총칭하는 생사의 번뇌를 말합니다. 이 ‘견사의 가가 곧 법계’라 하는 것은 무명 이대로가 불성이라는 말과 같으니, 견(見)․사(思)․가(假) 이대로가 불성이고 열반으로서 일체불법을 다 구족하고 있습니다.
흔히 견°사가 이대로가 법계이고, 무명 이대로가 불성이며 중생 이대로가 부처라 하니, 그러면 우리가 공부할 것도 없고 성불할 것도 없으며 20일, 30일 앉아서 법문 듣는 것이 쓸데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외도의 소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명 이대로가 법계이며 불법인 줄 알려면 실제로 법계와 불성을 장애하는 무명의 구름을 걷어내고 제거해야 합니다. 무명을 멸하기 전에는 무명 이대로가 법계이고 불법인 줄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열반경에 말씀하시길 “무명이 완전히 멸하는 것을 인하여 삼먁삼보리의 등이 타오르는 것을 얻어” 정각을 이룬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유문(有門)이라 하는데 유라 해도 여기에는 무도 포함되어 있고 비유비무(非有非無)와 역유역무(亦有亦無)도 포함되어 있어 나머지 세 부문이 다 따라오는 유(有)입니다.
공문(空門)이란 환화(幻化)의 견과 사 및 일체를 관하니 인(因)에도 있지 아니하고 연(緣)에도 있지 아니하여 자아 및 열반이 둘 다 공하다. 오직 공에 집착하는 공병(空病)이 있지만 공병도 또한 공하니 이것이 곧 삼제가 모두 공함이다.
空門者는 觀幻化見思及一切니 不在因不在緣하여 我及涅槃이 二皆空이라 唯有空病이어나 空病도 亦空하니 此即三諦皆空也라.
‘환화의 견과 사’에서 견과 사는 앞에서 말한 삼계생사의 번뇌인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말합니다. 그런데 견혹과 사혹은 그 본성이 실제로 공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환화의 견사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끝내 생(生)과 멸(滅), 인(因)과 연(緣)이 없으므로 마침내 자아와 열반(涅槃)이 모두 공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오직 일체가 공하다는 공병(空病)만이 남는데, 이 공병이 또한 공하여 공°가°중 삼제가 모두 공해 버립니다.
앞에서 말한 유(有)는 말을 바꾸어 가(假)라 하고 여기서 말한 공(空)은 무(無)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일체만법이 유(有)라면 유(有)고 공(空)이라 하면 공(空)인데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어서 언어와 생각이 다 떨어진 동시에 유라 해도 좋고 공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결국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即是空 空即是色)을 표현을 달리하여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엇을 공문이면서 또한 유문[亦空亦有門]이라 하는가. 환화의 견과 사가 비록 진실은 없으나 거짓 이름을 분별하면 곧 다함이 없으니 마치 한 미진 가운데에 삼천대천의 경권(經卷)이 있는 것과 같느니라. 제일의에서 요동하지 아니하고 능히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며, 또한 대지가 하나이나 능히 여러 가지 싹들을 생기게 함과 같이 이름과 모습이 없는 가운데 거짓으로 이름과 모습을 말하며, 내지 부처도 또한 단지 이름만 있으니 이것이 있으면서 또한 없는 문[亦有亦無門]이니라.
云何亦空亦有門고 幻化見思가 雖無眞實이나 分別假名이면 則不可盡이니 如一微塵中에 有大千經卷이라 於第一義而不動하고 善能分別諸法相하며 亦如大地一이나 能生種種芽하여 無名相中에 假名相說하며 乃至佛도 亦但有名字하니 是爲亦有亦無門이니라.
부처라 해도 부처란 형상을 얻어 볼 수 없으니 무문(無門)이고, 그러면서 부처님이란 존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유문(有門)입니다. 따라서 유가 즉 무고 무가 즉 유이니 역유역무문(亦有亦無門)이 됩니다. 앞에서 공과 유를 말했는데 이 공과 유는 언제든지 역유역무를 포함하는 공과 유지 역유역무를 떠나서 공과 유가 따로 없습니다.
무엇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문[非有非無門]이라 하는가. 환화의 견과 사를 관하니 곧 법성이다. 법성은 불가사의하여 세간의 것이 아니므로 있는 것이 아니요, 출세간의 것이 아니므로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색과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으니 하나가 중이면 일체가 중이어서 비로자나(毘盧遮那)가 일체처에 두루한다. 어찌 견사가 있다고 해서 진실한 법이 아니라 하리오. 이것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문[非有非無門]이라고 한다.
云何非有非無門고 觀幻化見思即是法性이라 法性은 不可思議하여 非世故非有요 非出世故非無라 一色一香이 無非中道니 一中一切中하여 毘盧遮那가 遍一切處니라. 豈有見思라가 而非實法이리오 是名非有非無門이니라.
결국 유를 바로 알게 되면 나머지 셋을 알게 되고, 무를 알게 되어도 나머지 셋을 알게 되어 하나가 곧 넷이고 넷이 곧 하나[一即四四即一]가 되어 전체가 원융무애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무°역유역무°비유비무의 네 문이 원융해서 하나도 막힌 데가 없다 하여 네 문이 따로 없는 줄 알면 이것도 잘못입니다. 네 문이 따로 있으면서 또한 원융한 곳에 우리 불법의 묘(妙)가 있는 것입니다.
3) 원돈지관(圓頓止觀)
천태학에서의 수행법을 지관(止觀)이라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지(止:Śamatha)는 산란한 생각들을 그친다는 뜻이고, 관(觀:vipaśyanā)은 제법의 이치를 관조한다는 뜻입니다.
천태스님은 부처님의 일대교(一代敎)를 설법 내용에 따라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의 사교(四敎)로 교판하였듯이, 수행법인 지관도 사교에 따라 구별하여 장교°통교°별교의 지관을 상대지관(相對止觀)이라 하고, 원교의 지관을 절대지관(絶對止觀) 또는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원돈지관은 원교의 실상을 마음으로 관하여 실증하는 지관을 말합니다. 천태스님의 여러 저술 가운데 특히 ꡔ마하지관(摩訶止觀)ꡕ에서 이 원돈지관을 상술하고 있습니다. 원교의 이론이 전반적으로 원융한 사상과 더불어 중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원교의 실천 관법인 원돈지관도 역시 중도의 실상경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다[一色一香無非中道]’라는 천태종의 유명한 글귀는 결코 이론적인 공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으로 관하여야 할 것입니다.
법의 자성이 항상 적멸한 것이 곧 지(止)의 뜻이요,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는 것이 곧 관(觀)의 뜻이니라.
法性常寂이 即止義요 寂而常照가 即觀義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8下]
지(止)란 정(定)이고 관(觀)이란 혜(慧)인데, 법성 자체의 체(體)면으로 보아서는 지(止)라 하고 용(用)면으로 보아서는 관(觀)이라 할 수 있으므로 결국은 지가 곧 관이고 관이 곧 지입니다.
일체만법이 이렇게 상적(常寂)하면서도 상조(常照), 쌍조(雙照)합니다. 상적을 제외하고 쌍조가 없고 쌍조를 제외하고 상적이 없으니, 불 밖에 빛이 없고 빛 외에 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정(有情)이고 무정(無情)이고 할 것 없이 일체만법이 상적쌍조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 있으며 상적광토를 여의고는 일체만법, 우주법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방편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며 이치의 성품이 항상 적멸함을 이름하여 지(止)라 하고, 적멸하며 항상 비추어 방편이기도 하고 실상이기도 함을 이름하여 관(觀)이라 한다. 관이므로 지혜라 하고 반야라 하며, 지(止)이므로 눈[眼]이라 하고 수능엄이라 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합하지도 아니하고 흩어지지도 아니하여 곧 불가사의한 지와 관이니라.
非權非實이며 理性常寂을 名之爲止요 寂而常照하여 亦權亦實을 名之爲觀이라. 觀故로 稱智稱般若요 止故로 稱眼稱首楞嚴이라. 如是等名은 不二不別하고 不合不散하여 即不可思議之止觀也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34下]
권(權)이란 방편이고 실(實)이란 실상이므로 권실(權實)이란 방편과 실제의 두 상대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관(觀)이란 용(用)으로 보아 지혜라 하고 반야라 하며, 지(止)는 체(體)로 보아 눈[眼]이라 하고 수능엄(首楞嚴)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불과 빛의 관계처럼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아니하여 보통 중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계이니 이것이 중도입니다.
지는 곧 본체의 진실함[體眞]이니 비추면서도 항상 적멸하고, 지는 곧 인연을 따름[隨緣]이니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며, 지는 곧 지(止) 아닌 지(止)이니 쌍차쌍조이다. 지는 곧 부처의 어머니이고 지는 곧 부처의 아버지이며, 또한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지는 곧 부처의 스승이고 부처의 몸이다.
止即體眞이니 照而常寂이요 止即遂緣이니 寂而常照요 止即不止止이니 雙遮雙照라. 止即佛母이고 止即佛父이며 亦即父即母요 止即佛師이고 佛身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58上]
체진(體眞)은 진공(眞空)에 비유하고 수연(隨緣)은 묘유(妙有)에 비유한 것입니다. 지(止) 자체가 이대로 진실인데 진공이라 하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단공(斷空)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대광명이 우주를 비추면서도 항상 적적합니다. 이렇게 지는 진공이면서도 또한 수연(隨緣)이니 지를 전환하여 바로 작용하면 그대로가 수연이며 묘유(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적멸하다 해도 진공 이대로가 묘유이므로 적이상조(寂而常照)하고, 아무리 천만 가지로 변동하고 무한한 활동을 해도 항상 적멸하여 조이상적(照而相寂)합니다. 이와 같이 지는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고 진공이면서도 묘유이므로, 지는 지가 아니면서도 지가 되어[止即不止止] 마침내 쌍차하고 쌍조합니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말씀하실 때는 보통 쌍차만 가지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쌍차 속에 근본적으로 쌍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쌍조를 제외하고 쌍차가 없으며 쌍차를 제외하고 쌍조가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여기에서 지 하나만을 거론한 이유는 지에 관(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어서 관을 따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를 곧 부처님의 어머니요 아버지라 부른 까닭은 일체제불과 천하 선지식이 모두 이 도리를 알고 깨쳤기 때문에 이것은 실제로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부모인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라는 것은 쌍차가 쌍조고 쌍조가 쌍차임을 거듭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양변을 그치는[息二邊] 지는 곧 생사와 열반, 공과 유가 쌍으로 적멸하니라. 이 지에 의지하여 중도의 정을 발생하고, 부처의 눈이 활짝 열려 비추는 것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어 중도삼매를 이루느니라.
若息二邊止는 即生死涅槃空有雙寂하니라. 因於此止하여 發中道定하고 佛眼이 豁開하며 照無不遍하여 中道三昧成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25下]
천태교학에서는 지에 대하여 흔히 체진지(體眞止)°수연지(隨緣止)°식이변지(息二邊止)의 세 가지 지를 거론합니다. 체진지는 지에 의하여 망상을 내지 않고 혜안(慧眼)이 열려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보는 것이며, 수연지는 방편적인 거짓 마음[假心]을 발하여 법안(法眼)을 얻어 속제(俗諦)를 보는 것입니다. 식이변지는 생사와 열반을 모두 멀리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취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것은 곧 생사와 열반의 양변입니다. 그러나 열반에 집착하게 되면 생사에 집착하는 병과 똑같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생사와 열반을 다 버리는 중도의 입장을 취합니다. 이와 같이 생사와 열반, 공과 유의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머무르는 지를 바로 식이변지(息二邊止)라 합니다. 생사와 열반, 공과 유를 다 버리면 쌍적하여 중도의 정(定)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부처의 눈[佛眼]이 활짝 열려 시방법계를 다 비추고도 남음이 있는 대지혜광명이 발현됩니다. 여기에서 중도삼매를 이루어 성불하게 되는데, 이것이 부처님이 정등각한 근본 내용입니다.
중도제일의관은 교묘하게 네 가지 실단[四悉檀]을 사용하여 곧 일체종지의 부처눈[佛眼]을 얻느니라.
中道第一義觀은 巧用四悉檀하여 即得一切種智佛眼也니라. [維摩經玄疏 1;大正藏 38, p. 521下]
‘중도제일의관’이란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관법을 말합니다. 사실단(四悉檀)의 실단(悉檀)이란 siddhānta의 음역으로 종의(宗義)°정설(定說)°성취(成就)라는 뜻인데, 사실단이란 세계실단(世界悉檀)°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대치실단(對治悉檀)°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의 네 가지로써 중생을 교화하여 성숙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눈[佛眼]’이란 시방 미진수 세계를 비추고도 남음이 있는 대혜안(大慧眼)°대법안(大法眼)을 말합니다. 이 불안을 성취하는 것을 정등각이라 하고 견성이라 하고 성불이라 합니다. 즉 원교에서는 이변을 쌍차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지관(止觀)이라 하기도 하고 적조(寂照)라 하기도 하며, 이것을 성취하면 중도삼매(中道三昧)고 성불입니다.
마음이 중도를 반연하여 실상의 지혜에 들어감을 지(止)에 머무르는 뜻이라 하니 실상의 성품은 곧 지(止)도 아니고 지 아님도 아닌 뜻이다. 또 이 일념이 능히 오주(五住)를 뚫어서 실상에 도달하니 실상은 관(觀)도 아니고 관 아님도 아니다. 이런 뜻이 다만 한 생각 마음 가운데 있어서, 진제(眞際)를 움직이지 아니하고도 여러 가지 차별이 있다. 경에 말하기를 능히 모든 법의 모습을 잘 분별하지만 제일의에서는 움직이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비록 많은 이름이 있으나 대개 반야의 한 법이니 부처님이 여러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 이름이 모두 원융하여 모든 뜻도 또한 원융하다. 상대°절대°대대하는 체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하므로 장애가 있지 아니하며, 장애가 있지 아니하므로 구족하여 멸함이 없다. 이것이 원돈의 교상(敎相)으로 지관의 체를 나타낸다.
心緣中道하여 入實相慧를 名停止義니 實相之性은 即非止非不止義니라. 又此一念이 能穿五住하여 達於實相하니 實相은 非觀亦非不觀이니라. 如此等義가 但在一念心中하여 不動眞際하고 而有種種差別하니 經言善能分別諸法相호대 於第一義而不動이라 하니라. 雖多名字나 蓋乃般若之一法이니 佛說種種名이라. 衆名이 皆圓하여 諸義도 亦圓이라. 相對絶對待體가 不可思議하니 不可思議故로 無有障碍하며 無有障碍故로 具足無滅이라. 是圓頓敎相顯止觀體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25下]
‘지(止)에 머무른다’ 함은 모든 것이 다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오주(五住)란 오주지혹(五住地惑)의 준말로서 견혹(見惑)°사혹(思惑)°무명(無明)의 번뇌를 다섯 가지로 가지고 분별한 것인데, 삼계에서 생사에 집착하게 하는 번뇌를 총칭하는 것으로 알면 됩니다. 그리고 일념이 능히 오주지의 번뇌를 다 끊어 버리면 중도에 도달하여 바로 깨닫게 되는데, 도달된 이 실상은 지(止)도 아니고 지 아님도 아니며, 관(觀)도 아니고 관 아님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뜻이 마음 한가운데 있어서 진제(眞諦), 즉 마음의 근본 자성자리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차별이 있으며 또한 아무리 차별되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밝은 거울에 천차만별의 형상이 비치어도 밝은 거울이 요동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중도정관(中道正觀)을 성취하여 진제에 들어가면 아무리 세간의 생멸상을 살피어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동(動)하면서 공(空)하고 공(空)하면서 동(動)하여 동․공이 완전히 상통해집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능히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지만 제일의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쌍차가 쌍조고 쌍조가 쌍차된 곳입니다. 여기서 중도라 하든지 열반이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중생이라 하든지, 이러한 온갖 표현은 다 반야 한 가지의 법을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된 도리의 법계가 이러하므로 이를 표현한 모든 이름이 원융하며 뜻도 또한 원융합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상대와 절대와 서로 상대하는 체가 불가사의하며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으므로 구족하여 멸함이 없으니 이것이 원돈의 교상[圓頓敎相]으로서 지관의 당체를 밝힌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이든지 가든지, 부정이든지 긍정이든지 전체가 원융하여 앉아도 좋고 서도 좋고 누워도 좋은 대자유이며 대자재인 것입니다. 전체가 장애가 없어 부처도 좋고 중생도 좋고 도둑놈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부처도 안 되고 중생도 안 되고 무어라 이름붙여도 안 됩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도리로 이것은 깨치기 전에는 말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즉 장님에게는 앉으나 서나 넘어지는 것뿐이므로 자유가 하나도 없으며 오직 눈뜨고 볼 일입니다.
원돈(圓頓)이란 처음에 실상을 반연하여 경계에 이르러 곧 중도로서 진실 아님이 없다. 인연을 법계에 매고 생각을 법계에 하나로 하여,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으니 자기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도 또한 그러하다. 음(陰)과 입(入)이 모두 그러하니 고(苦)를 가히 버릴 것 없고, 무명의 번뇌가 곧 보리(菩提)니 집(集)을 가히 끊을 것 없으며, 변(邊)과 사(邪)가 모두 한가운데이니 도(道)를 가히 닦을 것 없고, 생사가 곧 열반이니 멸(滅)을 가히 증득할 것 없다. 고와 집이 없으므로 세간이 없고 도와 멸이 없으므로 출세간이 없다. 순일한 실상이니 실상 밖에 다시 다른 법이 없다. 법성이 고요함을 지라 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는 것을 관이라 한다.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 한다.
圓頓者는 初緣實相하여 造境即中하여 無不眞實이라 繫緣法界하고 一念法界하여 一色一香이 無非中道니 己界及佛界와 衆生界亦然하니라. 陰入이 皆如하니 無苦可捨요 無明塵勞가 即是菩提니 無集可斷이요 邊邪皆中正이니 無道可修요 生死即涅槃이니 無滅可證이니라. 無苦無集故로 無世間이며 無道無滅故로 無出世間이라. 純一實相이라. 實相外에 更無別法이라.
法性寂然을 名止요 寂而常照를 名觀이라. 雖言初後나 無二無別하니 是名圓頓止觀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下]
원돈이란 일체만법이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원(圓)이라 하고, 거기에 시간적인 간격이 없으므로 돈(頓)이라 합니다. 하나의 도가 일체의 도로서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원융하고 자재함을 원돈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원돈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실상을 알아 일체 경계가 모두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 아님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인연을 법계에 매어, 즉 법계에 통하게 되어 일념 이대로가 법계로서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상이란 가상(假相) 밖에 실상(實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에게 상이라 하면 가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부득이 실상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중도의 실상은 생멸을 떠나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차만별하는 이 경계 가운데 있어 진진찰찰이 앉으나 서나 중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선과 악, 천당과 지옥 할 것 없이 천경계 만차별이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하여, 일념 이대로가 법계이고,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모두 중도이며 자기의 세계나 부처의 세계나 중생의 세계도 또한 그러합니다. 모두가 원융하며 중도이고 부사의한 해탈경계인 것입니다.
‘음(陰)과 입(入)이 모두 그렇다’에서 음(陰)은 오음(五陰)을 말하고 입(入)은 내육입(內六入)인 육근(六根)이나 외육입(外六入)인 육진(六塵)을 말하는데, 이것이 다 그러하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 불계와 중생계 할 것 없이 모두가 진여(眞如)의 대용(大用)으로서 전부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 천당 할 것 없이 모두가 부사의 해탈경계로서 중도를 이루니 고(苦)는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즉 무명의 번뇌 이대로가 보리이므로 집(集)을 가히 끊을 것이 없습니다.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은 무명 진로 그대로 전체가 보리°열반이며 변견(邊見), 사견(邪見) 이대로가 다 한가운데[中正]로서 도를 가히 닦을 것이 없습니다. 불교를 믿거나 예수교를 믿거나 무슨 교를 믿어도 중도를 깨친 사람에게는 전체가 다 중도이지 중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도는 저 바닷물과 같이 전체가 다 짠맛뿐으로 다른 맛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 이대로가 열반으로서 멸을 가히 증득할 것이 없습니다. 고와 집이 없는 까닭에 세간도 없고, 도와 멸이 없기 때문에 출세간도 없으니, 전체가 다 법계이고 진여이며 순일한 실상으로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으며 한 법도 취할 것이 없습니다. ‘실상 외에 다시 다른 법이 없어’ 쌍차가 되고 ‘법성이 고요하며’ 부동함을 지(止)라 하니 쌍조가 되어 고요한 가운데 항상 대광명이 시방법계를 비추는 것을 관(觀)이라 합니다.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이것은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삼계가 실제로 원융해서 모든 것이 진여법계 아님이 없고 진여대용 아님이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중생이라 해도 좋고 부처라 해도 좋으며 또한 중생이라 해도 안 되고 부처라 해도 안 됩니다. 구슬을 굴리는 것과 같아 거기에는 어떠한 규격이나 걸리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을 삼계가 원융한 중도정관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객담을 하나 하겠습니다. 전에 내가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유점사(楡岾寺)에 예수교의 큰 학자가 한 사람 왔었습니다. 한 스님이 안내를 하면서 하나님이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그것은 어지간히 맞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안내하던 스님이 탑을 가리키면서 저 속에도 하나님이 들어앉았느냐고 반문하자, 그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곤란하단 말입니다. 불교의 탑인데 그 안에 하나님이 들어앉아 있다고 하면 하나님이 망신이 되겠거든요.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아니, 당신이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저기는 하나님이 왜 못 들어갑니까” 하니 그는 그만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가 버렸어요.
실로 예수교는 그런 식입니다. 요즘은 이론이 다소 발달되어서 하나님이 똥덩이 속에도 있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불교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으로서 실제로 정․혜(定慧)가 사라지고 중생과 부처가 완전히 멸한 곳에, 진진찰찰 그 어느 곳이든지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고 안 모신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그럼, 좋다. 우리 가사장삼 다 벗어 버리고 술도 한 잔 하고 소도 잡고 춤도 추어 보자”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경우도 그런 대장부만 나오면 그런대로 괜찮은데 만약 잘못 알고 경계에 집착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외도이며 마구니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체가 원융하다고 말한 것은 그 관점을 근본 무명이 완전히 끊어져 중도실상을 바르게 증득한 데에 두고 하는 말이지 중생의 무명경계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눈뜬 사람은 앉아도 광명이고 서도 광명이고 누워도 광명이지만, 눈감은 사람은 앉아도 서도 누워도 캄캄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고 무명업식에 얽매인 사견을 원융무애한 것으로 집착하면 이 사람은 끝내 지옥 중에서도 아비지옥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이 원융무애함을 바로 알고 바로 수용하려면 가장 빠른 길로 화두를 들어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바로 깨치는 것이 좋습니다. 삼제가 원융한 원돈지관은 ‘이 무엇인가[是甚麽]’를 열심히 참구하면 마침내 알게 될 것이지만,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이론과 말만 따라가면 결국에는 지옥고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옥이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감으면 앉으나 서나 그대로 지옥이고 눈뜨면 앉은 곳 선 곳 그대로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4) 원교의 십이인연
이제부터 해설하는 장교°통교°별교°원교의 사교(四敎)에서 말하는 십이인연설은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 지관(止觀)을 설명하는 가운데 일부입니다. 천태스님은 원교와 장교°통교°별교의 삼교는 그 법의 의미가 같지 않음을 교판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하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앞에서 일부 언급한 사종사제(四種四諦)이며, 여기에서 해설하는 십이인연도 사교의 차이를 분별하여 설한 것입니다.
일체불법의 근본 사상이 십이연기(十二緣起)에 포함된다는 것은 원시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도록 변함 없이 일관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천태스님도 불교를 사교(四敎)로 구분하고 그 사교에서 설하는 십이인연설을 통하여 각 교의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구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교 중에서도 십이인연이 중도라고 설한 것은 바로 원교라고 단정하여 천태교의 우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교의 실상을 해명하는 교설 중의 하나인 십이인연설에서도 중도사상은 뚜렷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들어감이 모두 십이인연에 의한다. 대품반야경에 말하기를, 만약 능히 깊이 십이인연법을 보면 곧 이것이 도량에 앉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량에는 넷이 있다. 만약 십이인연이 생멸함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곧 삼장(三藏)의 부처님이 도량에 앉되 수목의 풀자리[草座]이며, 십이인연이 곧 공함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통교의 부처님이 도량에 앉되 칠보나무의 하늘옷자리(天衣座)이며, 십이인연이 거짓 이름[假名]임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별교의 사나불(舍那佛)이 도량의 칠보자리에 앉으며, 십이인연이 중(中)임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원교의 비로자나불이 도량에 앉되 허공을 자리로 삼는다. 마땅히 알아라. 크고 작은 도량이 모두 십이인연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佛坐道場轉法輪入涅槃이 皆約十二因緣이니라. 大品云若能深觀十二因緣法이면 即是坐道場이라 하니라. 道場有四하니 若觀十二因緣生滅究竟이면 即三藏佛이 坐道場木樹草坐요 若觀十二因緣即空究竟이면 通敎佛이 坐道場七寶樹天衣座요 若觀十二因緣假名究竟이면 別敎舍那佛이 坐道場七寶座요 若觀十二因緣中究竟이면 是圓敎毘盧遮那佛이 坐道場虛空爲坐니라. 當知하라 大小道場이 不出十二因緣觀也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28上․中]
“만약 능히 깊이 십이인연법을 보면 곧 이것이 도량에 앉는 것이니라”에서 ‘도량에 앉는다’는 것은 십이인연을 깊이 관하여 바로 깨치어 보리좌에 앉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이인연을 관하는 방법이 장교․통교․별교․원교의 사교에 따라 각각 다르므로 그 깨달은 경지도 각각 달라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먼저 ‘십이인연이 생멸함을 관함’은 중생이 생멸의 견해로써 십이인연을 본다는 말입니다. 생멸의 견해란 마치 눈병 난 사람이 하얀 구름을 푸르게도 보고 누렇게도 보고 검게도 보아 바로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소승교의 경°율°논의 삼장(三藏)을 통달한 부처님이 나무 밑에 풀을 뜯어 놓고 앉아 있는 격이 되는데, 생멸하는 물건이므로 곧 생멸견해를 비유한 것입니다. 즉 소승 장교(藏敎)의 부처님은 십이인연을 관하되 생멸의 경계에 머무르며 아직 생멸을 떠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두번째로 ‘십이인연이 공함을 관함’에서 통교의 부처님이란 대승 통교의 부처님을 말합니다. 이 부처님이 칠보나무 아래 하늘옷으로 만든 자리에 앉는 것은, 그냥 나무 밑의 풀자리에 앉는 것보다 단수는 높지만 완전히 생멸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아직 십이인연이 공하다는 공병(空病)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십이인연이 거짓 이름임을 관함’에서 십이인연이 거짓 이름임을 본다는 것은 대승 별교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알면 별교의 사나불(舍那佛)의 칠보좌에 앉게 됩니다. 별교의 사나불이란 천 개의 연잎으로 된 대 위에 앉은 보신불을 지칭합니다. 여기서는 아직 광경이 두루 비추는 것이 되지 못하고 상주법계가 되지 못하여 전반적인 불교의 교리에는 통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십이인연이 중임을 관함’에서 십이인연이 중도임을 보면 광명이 두루 비추는 원교의 비로자나불의 지위에 이르게 됩니다. 이 비로자나불이 허공을 자리로 삼는다는 것은, 무변무한한 그것을 허공이라 표현한 것이므로 새파란 저 허공에 앉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십이인연을 중도의 정견으로 보면 구경에 비로자나법신불을 보아 상주법계의 중도연기를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이이연은 중도로 보아야 바로 보는 것이지 변견(邊見)인 생멸(生滅)이나 공(空) 혹은 가(假)로 보면 이것은 십이인연의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소승 ° 대승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도량이 모두 십이인연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불법이 다 십이인연에 집약되어 있으며 십이인연을 제외하고 따로 불법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 근기가 둔한 제자를 위하여 십이인연이 생멸하는 모습을 설할 때, 따로 근기가 예리한 보살이 앉아 있다가 비밀히 십이인연이 생멸하지 않은 모습을 듣고서 곧바로 불성을 깨달아 무생인을 얻으니 이것이 비밀한 뜻이니라.
初爲鈍根弟子하여 說十二因緣生滅相할새 別有利根菩薩하여 在坐하여 密聞十二因緣不生滅相하고 即悟佛性하여 得無生法忍하니 此秘密意也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28中]
부처님이 성문의 제자를 위해서 비록 십이인연의 생멸하는 모습을 설하셨더라도 근기가 수승한 보살은 이에 의해 생멸하는 모습을 버리고 그 이면의 본질적 내용인 생멸하지 않는 모습을 듣고 불성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비밀한 뜻[秘密義]이라고 합니다.
혹은 생멸을 듣고 곧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 비생멸(非生滅)과 비불생멸(非不生滅)을 알아 생멸과 불생멸을 쌍조한다. 하나에 즉하면서 셋이고 셋에 즉하면서 하나로, 법계에 비밀히 상락(常樂)을 구족한다. 복덕인(福德人)이 돌을 집으면 보배가 되고 독을 집으면 약이 되는 것과 같다.
或聞生滅하고 即解生滅解不生滅하며 非生滅非不生滅하여 雙照生滅不生滅하여 即一而三即三而一하여 法界秘密常樂具足하니라. …… 如福德人이 執石成寶하고 執毒成藥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6下]
돌을 집으면 보배가 되고 독을 집으면 약이 된다는 말은 저쪽에서 생멸을 이야기할 때 이쪽에서 생멸을 불생멸 내지 비불생멸로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제나 십이인연이 생멸한다고 설해도 그것을 불생불멸 등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즉 소가 물을 먹으면 젖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며, 뱀의 독은 사람을 죽이지만 소의 젖은 사람을 살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건은 한가지라도 받는 사람에 따라 그 물건의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부처님이 방편으로 생멸을 말씀하시더라도 우리는 일승의 중도를 증득하도록 힘써야지 방편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참고로 근본불교에서 설한 사념처(四念處)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념처란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사념처를 설할 때는 이 몸을 부정하다고 관하고[觀身不淨], 감수를 고통이라고 관하고[觀受是苦], 마음을 무상하다고 관하고[觀心無常], 일체법을 무아라고 관하는 것[觀法無我]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순전히 차별견해인 생멸의 변견에서 하는 말이지 일승의 중도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중도가 있으니 이것이 사념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의지하여 볼 때에 사념처를 중도정견으로 해석해야지 생멸의 변견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또 사전도(四顚倒)라는 것이 있는데, 사념처에서 부정(不淨)을 정(淨)으로, 고(苦)를 낙(樂)으로, 무상(無常)을 상(常)으로, 무아(無我)를 아(我)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전도(四顚倒)란 실제로 변견에 집착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하는 말이며 중도정견을 갖춘 사람이 볼 때는 사전도 이대로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해탈(四解脫)입니다. 물은 물인데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젖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념처의 설법도 변견의 중생이 들으면 사전도요, 중도의 정견으로 들으면 사해탈이 되어 버립니다. 중도정견에 의하면 상락아정(常樂我淨) 이대로가 부사의 해탈경계인 것입니다.
5) 쌍차쌍조(雙遮雙照)
원융사상에 투철한 천태교학의 중도설은 삼제원융(三諦圓融), 일념삼천(一念三千) 등의 대표적인 교리에서도 드러나지만 한편으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도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불교 여러 종파의 중도설을 말하면서 쌍차쌍조가 중도의 근본 내용임을 누차 말하였는데, 이 쌍차쌍조를 누구보다도 능란하게 구사하며 중도를 밝힌 이가 바로 천태 지자스님입니다.
천태스님은 이 차․조(遮照)를 여러 곳에서 설하였지만, 그 차조에 입각한 중도설의 연원은 다른 대승경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대승경전인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서 쌍조이제(雙照二諦)에 따른 중도관을 설하고 있으며, 천태스님도 차․조에 의한 중도설을 논하면서 그 경증(經證)으로 이 『영락경』의 경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쌍차와 쌍조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원교의 중도관을 다양하게 설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밝고 청정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서 쌍으로 이제를 비추니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를 구족하여 줄어듦이 없느니라.
心旣明淨에 雙遮二邊하고 定入中道에 雙照二諦하니 不思議佛之境界를 具足無減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7上]
중도의 내용은 쌍차쌍조로 그것은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이지 보살의 경계는 아닙니다. 위에서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여 바르게 중도에 들어간다’고 하니 혹시 잘못 이해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는 것과 따로 중도가 있는 것같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표현은 구름이 걷히니 해가 드러난다는 식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드러나고 해가 드러나면 구름이 걷히는만큼, 쌍차와 쌍조에는 절대로 간격이나 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언어로써 표현하자니 쌍차쌍조이지, 실상을 알고 나면 쌍차가 곧 쌍조이고 쌍조가 곧 쌍차로서 언제든지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그 둘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알아라. 종일토록 말해도 종일토록 말하지 않은 것이고 종일토록 말하지 않아도 종일토록 말한 것이며 종일토록 쌍차하여도 종일토록 쌍조한 것이다. 깨뜨린 즉 세우는 것이요 세운 즉 깨뜨리는 것이다.
當知하라. 終日說終日不說하고 終日不說終日說하여 終日雙遮終日雙照하니 即破即立이요 即立即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55上]
‘종일토록 말함’은 쌍조이다. 아무리 쌍조하여도 그 자취가 적정하여 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종일토록 말하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또 ‘종일토록 말하지 않음’은 쌍차이다. 종일토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말한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쌍차가 쌍조이고 쌍조가 쌍차가 되니 대광명이 적적한 가운데 미진수의 불찰을 덮고도 남으나 그 자체는 공공적적(空空寂寂)해서 한 가지 상도 볼 수 없습니다.
‘깨뜨리는 것’이란 곧 차며 ‘세우는 것’이란 곧 조(照)입니다. 그러므로 ‘깨뜨린즉 세우는 것이요, 세운즉 깨뜨린 것이다’는 뜻은 아무리 쌍차를 해도 쌍조이고 쌍조를 해도 쌍차라는 말입니다. 차가 즉 조고 조가 즉 차로서 허공을 두 쪽 내면 냈지 이것들은 원융하여 결코 두 쪽을 낼 수 없습니다. 색(色)과 공(空)이 원융하고 선(善)과 악(惡)이 무애하며 시(是)와 비(非)가 원융하고 중생(衆生)과 불(佛)이 무애해서, 끝없는 시방의 허공계를 아무리 둘러봐도 오직 일심법계(一心法界) 이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쌍차쌍조가 근본이 되며 이 쌍차쌍조인 중도를 떠나서는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중도관이라 함은 중(中)은 둘이 아님을 뜻으로 삼고 도(道)는 능통함을 이름하며 하나의 참된 도리[一實諦]를 비추어 공허하게 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을 중도관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앞의 두 가지 관(觀)은 방편도이니 두 공관으로 인하여 중도에 들어가서 이제를 쌍조하고 마음마음이 적멸하여 자연히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간다고 한다.
中道觀者는 中以不二爲義하고 道是能通爲名하니 照一實諦하여 虛通無滯를 名中道觀也라 故로 經云 前二觀은 爲方便道라 因是二空觀하여 得入中道하여 雙照二諦하고 心心寂滅하여 自然流入薩婆若海라 하니라. [維摩經玄疏 1;大正藏 38, p. 525下]
‘중(中)은 둘이 아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원융하다는 말이며, ‘능통하다’라는 것은 일체가 막힌 데 없이 무애하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참된 도리[一實話]’는 자성°법계°법성°진여 등을 말하는데, 무애자재한 중도의 대지혜가 걸림 없이 하나의 참된 도리를 비추는 것을 중도관이라 합니다.
‘이제를 쌍조한다’에서 쌍조는 명°암을 떠난 자리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통 중생이 보는 명암(明暗)을 말하는 것이라거나, 전지로 불빛을 비추듯이 비추는 것으로 알면 참으로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쌍조이제가 되면 대적멸 대적정 삼매를 얻어 자연히 일체지를 구족한 부처님의 바다에 들어가 유희하기 때문입니다.
6) 불이법문(不二法門)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란, 대립하는 두 존재가 본질적으로 볼 때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설한 법문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아닌 것[不二]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곧 중도입니다.
불이법문을 설한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무엇보다도 유마경(維摩經)이 손꼽힙니다. 그러므로 천태스님도 자신이 지은 여러 저서에서 불이법문을 논할 때 특히 ꡔ유마경ꡕ의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나오는 문수(文殊)보살과 유마(維摩)거사의 불이법문을 자주 거론하였습니다.
대열반경에 말하기를 명(明)과 무명(無明)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성품이 곧 중도라 하니라. 중도는 이미 양변이 공하며 이 공도 또한 공하다. 그러므로 공공공이라 이름하며 불가득공이라 이름하니 이것이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감이다. 곧 원교는 공문(空門)에 의하여 넓은 문[普門]이라는 뜻을 밝힌 것이다.
大經에 云 明與無明은 其性不二하니 不二之性이 即是中道라 하니라. 中道는 旣空於二邊하며 此空亦空이라. 故名空空空이며 名不可得空이니 是爲入不二法門이라. 即是圓敎就空門하여 辯普門之意也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 888上]
‘명과 무명의 성품이 둘이 아니다’ 함은 무명 그대로가 실성이고 환화공신 그대로가 법신이란 말입니다. 중생이 변견 때문에 명과 무명을 둘로 보는 것이지 정견으로 보게 되면 그 성품이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이중도(不二中道)로서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며,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중도는 이미 양변에 공(空)하나 이 공도 또한 공(空)하므로 비고, 비고 또 빈 것입니다. 전체가 비었다는 그 병도 다 떨어져야 중도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이름도 얻을 수 없고 모양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공입니다. 이 공은 변견의 공이 아니라 자재무애한 불가득공입니다. 이것은 일승원교가 공문(空門)에 나아가서 십법계를 두루하고도 남는 원리를 설하는 데서 불이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가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또한 양변이 통합니다. 즉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로서 둘이 아니며, 조(照)가 적(寂)이고 적이조(寂而照)하여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둘 아닌 법문이고 일승원교입니다. ꡔ법화경ꡕ의 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이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을 나투어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의 넓은 문[普門]은 실제로 이러한 중도관에 입각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유마경 가운데에 둘이 아닌 문에 들어간다고 설하는 것은, 생사와 열반이 둘이라도 생사와 열반에 의지하지 않음을 둘이 아니라 이름하며, 또한 다시 하나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미 둘을 버리고 다시 하나에 머무른다면 하나는 하나 아님에 대하여 도리어 다시 둘을 이루니 어찌 둘이 아니라 이름하겠는가? 지금 둘에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라고 말하며, 또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라고 이름한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가(假)를 파함이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공을 파함이며,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둘을 파하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하나를 파함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응당 중도에 있으나 이 중도도 또한 공이다.
如淨名中에 說入不二門者는 生死涅槃이 爲二어늘 不依生死不依涅槃을 名爲不二며 亦復非一이라. 何以故오 旣除於二하고 若復在一하면 一對不一이 還復成二이니 豈名不二耶아 今不在二故로 言不一不二며 亦名不有不無라. 不有는 是破假요 不無는 是破空이며 不有는 是破二요 不無는 是破一이라 若爾者인댄 應在中道이나 中道도 亦空이니라. [觀音玄義 下;大正藏 34, p. 888上]
생사와 열반이 비록 상대적이지만 생사도 의지하지 않고 열반도 의지하지 않고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이것이 곧 중도입니다. 이 중도는 둘이 아니고 또한 하나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둘은 내버리고 하나를 다시 취하면, 즉 양변을 여의고 그 뒤에 중도라는 것을 두게 되면 하나에 대하여 다시 하나 아닌 것이 상대가 되어 둘을 이루니 차별의 변견에 떨어집니다. ‘둘이 아니다’ 하는 것은 양변을 여의어 양변 자체도 찾아볼 수 없고 중도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밖에 다시 중도가 서게 되면 이것은 결코 진정한 둘이 아닌 것[不二]이 아닙니다. 열반을 증득했다고 열반에 머무르면 열반이 아니고 성불했다고 부처에 집착하면 부처가 아닙니다.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양변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不有]은 가(假)를 파하는 것’이란 중생들은 색을 집착하나 색이 본래 공해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는 유견(有見)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없지 아니하다는 것[不無]은 공(空)은 파한다는 것’이란 중생들이 색의 자성이 공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공에 집착하므로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공에 집착하는 것을 부수는 것입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둘을 파하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하나를 파함이니, 유(有)도 파하고 무(無)도 파하며 색도 파하고 공도 파하면 거기에 마땅히 중도가 있으나 그러나 그 중도도 또한 공입니다.
늘 말하지만 양변을 완전히 여의는 동시에 중도에 집착하면 그것은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실로 양변을 여의면 불가득공이라 중도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을 위해 억지로 할 수 없이 공이요 중도라고 이름하는 것이지 중도 자체는 실제로 공해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곧 불이법문입니다.
문수(文殊)는 설하되 설하지 않음으로써 불이문(不二門)으로 삼고, 정명(淨名)은 입을 막음으로써 불이문으로 삼는다. 자세히 살피건대 저 경문에는 모두 네 문의 뜻이 있다. 조법사(肇法師)가 주석해 말하기를 모든 보살은 모두 법의 모습을 말하니 곧 유문(有門)이요 문수(文殊)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니 이것은 곧 공문(空門)이다. 사익(思益)에 말하기를 일체법이 바르며 일체법이 삿되다 하니 이것도 역시 넓은 문[普門]의 뜻이다. 마음이 법계에 노닒이 허공과 같으니 이것은 공하면서도 또한 유의 문의요, 정명(淨名)의 말없음은 공도 아니고 유(有) 아닌 문이다.
文殊는 說無說로 爲不二門하고 淨名은 杜口로 爲不二門이라 細尋한대 彼文皆有四門義하니 肇師注云 諸菩薩은 歷言法相하니 即有門이요 文殊는 言於無言하니 此即空門이라 思益에 云一切法正하며 一切法邪라 하니 亦是普門意라 遊心法界如虛空하니 是亦空亦有門이요 淨名黙言은 即非空非有門이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 888上]
‘설하되 설하지 않음’이란 아무리 설해도 설함이 없다는 뜻이니 문수보살은 설하되 설함이 없음으로써 불이법문(不二法門)을 하였습니다. 정명(淨名) 즉 유마힐(維摩詰)은 문수보살이 무엇으로 불이법문을 삼겠느냐고 문수보살이 질문하자 아무 말도 안 하고 침묵을 지키자 이에 참으로 유마거사가 불이법문을 설한다고 칭찬했는데, 이 말은 『유마경』에 나옵니다. ‘두구(杜口)’는 입을 막는다는 것으로 곧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문에 네 가지 문의 뜻이 있다고 했는데 알고 보면 네 가지 문이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변견으로 볼 때는 네 문이 각각 다르지만 아는 사람이 볼 때는 네 문이 무애합니다. 일체법이 바르며 일체법이 삿되다는 것도 변견에 따른 정(正)과 사(邪)가 아니라, 정과 사를 완전히 성취하면 정이 즉 사이고 사가 즉 정이 되어 원융무애를 성취하게 되며, 따라서 넓은 문[普門]의 뜻이 성립됩니다. ‘마음이 법계에 노닒이 허공과 같다’에서 허공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광대불변한 것을 비유하며, ‘법계에 노닌다’는 것은 활동하는 지혜 자체를 말합니다. 허공을 먼 데서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허공이지만 이것은 또한 무한한 활동 능력이 있으므로 공하면서도 또한 있다는 문[亦空亦有門]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하자니 공문(空門) ° 유문(有門) ° 역공역유문(亦空亦有門) ° 비공비유문(非空非有門)이라 구분하는 것이지, 실상 그 내용은 유가 즉 무고 무가 즉 유로서 서로 융통하여 하나를 들면 넷이고 넷을 들면 하나로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무명의 인연을 관하여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면 부사의 해탈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이 경에서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감을 밝히니 곧 이것이 중도이다. 이제(二諦)를 쌍조(雙照)하면 자연히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간다.
若觀無明因緣하여 入不二法門하면 住不思議解脫也라. 故此經에 明入不二法門하니 即是中道라. 雙照二諦하면 自然流入薩婆若海니라. [維摩經玄疏;大正藏 38, p. 534]
‘무명의 인연을 관하여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면 부사의 해탈에 머무른다’라는 것은 중도정관에서 볼 때 하는 말입니다. 무명을 바로 보면 무명 이대로가 법성이고 법계이며 전체가 모두 대광명이 되어 마(魔)°불(佛)을 찾아볼 수 없고, 세간(世間) ° 출세간(出世間)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자리가 곧 부사의 해탈경계인데 부사의 해탈경계라 하여 마치 가제가 굴에 들어앉듯이 머무를 곳이 있는 줄 알면 큰일납니다. 본래 머무를 곳이 없지만 중생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편의상 그렇게 말한 것으로 머무름이 없는 머무름[無住而住]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을 밝혔는데, 이것은 곧 중도를 말합니다. 이제를 쌍조하면 자연히 살바야해(薩婆若海) 즉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에 들어가 중도를 성취하게 됩니다.
5. 중도실상경계(中道實相境界)
마하지관(摩訶止觀)은 오략십광(五略十廣)이라 하여 자세히 분류하면 열 항목이 되고 축약하면 다섯 단원이 되는데, 어느 경우나 발대심(發大心)에서 시작하여 귀대처(歸大處)로 종결됩니다. 여기에 인용한 것은 그 마지막 단원인 귀대처를 설명하는 일부분입니다. 귀대처의 요점은, 법계에 시종(始終)이 없음을 알면 크게 밝아 무애자재하다는 것으로, 그 자세한 내용을 ‘지귀(旨歸)’로써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지귀에 대한 설명은 이하에서 언급할 것이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 아니라 천태종에서 중도실상을 어떻게 취급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지금까지 천태종의 중요한 여러 교리와 관법을 통하여 그 중도설을 어느 정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도의 실상은 참으로 말과 생각을 떠나고 명칭을 잊어서, 달리 할 말이 없어 할 수 없이 중도니 실상이니라고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귀(旨歸)하는 세 덕의 적정함이 이와 같으니 어떠한 명자(名字)가 있어 가히 설해 보일 수 있으리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이름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억지로 중도(中道),실상(實相),법신(法身),지도 아니고 관도 아님[非止非觀] 등이라 하며, 또 다시 억지로 일체종지(一切種智),평등대혜(平等大慧),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관(觀) 등이라고 하며, 또다시 억지로 수능엄정(首楞嚴定),대열반(大涅槃),불가사의해탈(不可思議解脫) 지(止) 등이라 한다. 마땅히 알아라, 여러 가지 모양, 여러 가지 설법, 여러 가지 신통한 힘이 하나하나 모두 비밀장(秘密藏) 가운데 들어가니, 어떤 것들이 지귀이며, 지귀하는 곳은 어디이며, 무엇이 지귀인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가는 곳이 소멸하여 영원히 적정함이 공(空)과 같은 것을 지귀라 이름한다.
旨歸三德이 寂靜若此하니 有何名字하여 而可說示리요 不知何以名之일새 强名中道°實相°法身°非止非觀等하며 亦復强名一切種智,平等大慧,般若波羅蜜,觀等하며 亦復强名首楞嚴定, 大涅槃,不可思議解脫,止等이라 하니라. 當知하라 種種相 種種說 種種神力이 一一皆入秘密藏中하니 何等是旨歸며 旨歸何處며 誰是旨歸오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하여 永寂如空을 是名旨歸니라. [摩訶之觀;大正藏 46, p. 21上°中]
지귀(旨歸)의 의미는 먼저 ‘글의 뜻이 지향하는 바[文旨所趣也]’로서 지(旨)는 자신이 반야,해탈,법신의 세 덕(德)을 향하고, 귀(歸)는 타인을 그 세 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며, 또는 이와 역으로 자신이 세 덕에 들어감을 귀라 하고 타인을 세 덕에 들어가게 함을 지라고도 합니다. ‘세 덕의 적정함이 이와 같다’란, 중도,실상,법신 등을 의미하는 반야°해탈°법신의 세 가지 덕이 원융하여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니며 새롭지도 않고 낡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 중도 하니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고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이 중도의 근본 사상은 언설(言說)과 심행(心行)이 다 끊어져 절대로 언어와 문자로 표현할 수 없고 헤아림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이나 문자로 설할 수 없으며, 일승(一乘)이니 삼제(三諦)니 중도니 삼천이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어라 이름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 “중도(中道),실상(實相),법신(法身),비지비관(非止非觀),일체종지(一切種智),평등대혜(平等大慧),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관(觀),수능엄정(首楞嚴定),대열반(大涅槃),불가사의해탈(不可思議解脫),지(止)” 등입니다. 불가사의해탈이라고 한 것은, 중도라는 것은 단순한 말이지만 그 실상은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묘법이므로 불가사의해탈이라고 이름한 것이지 실제로는 불가득불가설로서 묘한 가운데 묘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비밀장 가운데로 들어가는데 비밀장도 어찌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붙인 것입니다.
“무엇을 지귀라 하는가”에서 지귀(旨歸)한다, 즉 뜻이 돌아간다고 하니 개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이 나아갈 곳이 있는 줄 알면 그 사람은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깨치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중도로 지향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실질적으로 모든 거래와 생멸이 끊어졌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지향할 곳도 없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서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고 깨칠래야 깨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이것은 어느 정도 중도실상에 가깝게 다가선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안 것은 아닙니다. “영원히 적정함이 공과 같다”에서 공은 텅 빈 단공(斷空)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비밀장을 공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실상을 뜻하고 중도를 향하는 지귀(旨歸)라 이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누구든지 물을 마셔야 물맛을 알듯이 오직 투철하게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_()_
감사히 봅니다
()()()이법문은 참으로 진리를 드러낸 것으로 이카페의 보물같은 법문 입니다
이 법문을 사유하여 깊히 이해하고 수행하면 속히 불도를 이루게 됩니다 이법문 보시는 분 모두 성불하십시요 나무 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