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의 54개국 중 충남에는 15개국이 있었는데, 연기군과 인접한 곳에는 월지국(月支國 혹은 目支國-직산)·신운신국(臣雲新國-천안)·불운국(不雲國-공주 서부)이다. 이 중 연기군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이들에 흡수되어 행정력을 행사하는 영역에 속한 것은 사실이다.
백제시대 연기군은 백제의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긴 475년을 전후하여 연씨(燕氏)와 백제말기 전씨(全氏)가 활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훗날 두잉지현이 연기현으로, 구지현이 금지현으로 변했다가 전의현으로 불리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연기는 연씨들 즉 웅진초기에 활약했던 연신(燕信)과 연돌(燕突)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근거지로 추측할 수 있다. 연신과 연돌은 벼슬이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이르러 오늘날 국방장관에 올랐다. 비암사에서 출토된 백제말기 유물인 석불비상(石佛碑像)에 전씨가 주동이 되어 제작되었음이 명기되었고, 이는 계유년(673)에 제작된 것으로 백제유민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과 그곳의 지명이 전의?전동이란 것으로 보아 전씨 근거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지금의 전의(全義)는 서원경(西原京)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대록군(大麓郡, 지금의 천안)의 영현(領縣)이었다. 대록군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한 것이다. 대록군의 영현으로는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순치현(馴雉縣)으로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을 경덕왕때 개명한 곳이며 지금의 천안지방에 해당한다. 또 하나의 영현은 금지현(金池縣)으로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을 경덕왕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전의(全義)에 해당한다.
연기(燕岐)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이었다. 연산군은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한 것이다. 연산군의 영현은 두 개 현인데, 하나는 연기현으로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을 경덕왕때 연기현으로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연기에 해당하며, 다른 하나는 매곡현(昧谷縣)을 경덕왕 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회인(懷仁) 지방에 해당된다. 지금의 금남지역은 웅천주(熊川州)였는데, 757년(경덕왕 16) 웅주(熊州)로 개명하였다. 웅주는 오늘의 공주를 지칭하는 것이며, 금남은 그 일부이다.
연기군은 성종때 10도제가 실시되었을 때는 중원도(中原道), 지금의 충청북도에 속하였다. 5도양계(五道兩界)의 제도가 실시되면서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와 충청)에 속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연기군은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청주(淸州)의 속현이었다.
연기현은 고려 현종(縣宗) 9년에 청주의 속현이 되었고 명종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뒤에는 목천(木川) 감무가 겸하였다. 전의현은 신라 경덕왕때 금지현(金池縣)으로 개명한 것을 고려 때 전의로 고친 것이다. 금남은 통일신라시대 웅주(熊州)였다가 고려시대 공주(公州)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공주의 동쪽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연기군은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금남지역은 공주로 연기군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연기현(燕岐縣)은 태종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태종 14년(1414년) 전의에 합쳐져서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다시 태종 16년(1416년) 연기현으로 복설(復設)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전의현은 태조 4년에 감무를 두었고 태종 13년에 현감을 두었으며 다음해에는 연기현을 합하여 전기현이 되었다가 태종 16년(1416년)에 연기현이 복설(復設)되면서 전의현이 되어서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금남지역은 공주의 일부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공주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의 지방제도는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종래의 8도를 23부의 행정구역으로 개편하였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의 개편은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한성부(漢城府) 이외의 지역을 13도로 개편하고 그 밑에 7부(府), 1목(牧), 231군(郡)을 두었다. 이와 같은 제도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일합병 후에 일제는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행정·군사·입법·사법권을 행사하였다. 중앙행정조직의 개편과 아울러 지방행정조직도 개편하였는데, 지방은 다음의 표와 같이 3단계로 조직되었다.
즉 전국을 13도로 나누었으며, 도(道)에는 지사(知事), 부(府)에는 부윤(府尹), 군(郡)에는 군수(郡守), 도(島)에는 도사(島司)가 도장관(道長官)의 지도 감독 아래 행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부(府)·군(郡)·도(島)의 행정기구도 도(道)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구성되었다.
또한 도(道)와 부(府)에는 도회(道會)와 부회(府會) 등의 의결기관이 있었으나, 이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서 형식상 내세운 어용의 지방자치 기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의장은 지사(知事)와 부윤(府尹)이 맡고 있었고, 이들은 총독에 예속되어 행정, 일부의 사법권, 그리고 일본군의 지방분견대장(地方分遣隊長)에게 요청하여 한국인을 탄압하기 위한 분대(分隊)를 사용할 수 있는 등의 막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읍과 면은 1940년에 전국에 76읍, 2262면이 있었다. 이때에 일본인은 대부분 부(府)에 거주하였던데 반하여 한국인은 읍?면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였다. 그리고 읍장(邑長)은 대부분 일본인이 맡았으며, 면장(面長)은 대부분 한국인이 맡았다. 읍과 면에도 도회 및 부회와 같은 읍회(邑會)와 면협의회(面協議會)를 두었으나 이 기구 역시 어용단체였다.
[조치원읍]
조치원읍(鳥致院邑)은 연기군의 중심도시로, 일제시대 경부선 철로의 개통과 더불어 이곳에 역이 들어서고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면서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조치원은 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이곳에 살면서 시장을 개설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생긴 곳이라 하나 이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백제시대 연기군은 구지현(仇知縣 : 전의)과 두잉지현(豆仍只縣 : 연기)으로 불리었는데, 당시 조치원은 연기와 전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면서 청주지역과 경계를 이룬 곳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던 벌판이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이다.
조선시대 조치원은 연기현의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북일면(北一面) 지역이었는데, 당시 연기현감으로 부임해온 허만석(許萬石)은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는 이곳을 보고 보를 쌓아 물길을 잡도록 하여 많은 농토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동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으며, 둑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처음에는 둑내동이라 부르다 죽안동, 죽림동으로 변하여 불리었다.그래서 조치원을“새내”라 불렸는데 갈대, 억새풀과 새들이 많은 냇가라는 뜻이다.
그러니 구전으로 전해오는 최치원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다만 최치원이란 이름이 나오게 된 동기는 일본인이 조천원을 조치원으로 개명 할 때 이곳에 살고있는 조선사람들이 반대할 것을 두려워하여 조선사람이 존경하고 좋아하는 신라학자 최치원 선생을 끌어들여 전설을 만들어 퍼트린 후 조치원이라 개명한 것이다.
그래서 조치원이란 말은 일제시대 초에 쓰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조치원리(鳥致院里)라 부르다가 1917년 10월 조치원면(鳥致院面)이 신설되고 1931년 4월1일 조치원읍(鳥致院邑)으로 승격되었다. 1940년 리(里)를 정(町)으로 고쳤다가 1947년 동(洞)으로 고쳤으며, 1988년 다시 리(里)로 고쳤다. 조치원이 읍으로 승격된 것은 70여 년 전으로 당시 같이 읍으로 승격하였던 대전은 광역시로 엄청난 발전을 보였지만, 조치원은 아직도 그대로 조치원읍이다.
이 때문에 조치원이 새 조(鳥)자를 써서 새처럼 새가 먹이를 배불리 먹으면 날아간다는 것처럼 연기군에서 돈을 많이 벌면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오히려 연기군을 상징하는 제비는 겨울을 나기 위해 따듯한 강남으로 갔다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고향을 찾아오는 길조이다. 그리고 제비는 복을 가지고 들어오는 새이므로 제비의 상징인 연기군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과거 일제는 조치원읍 침산리에 신사를 건립하였다. 일제가 물러나자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 바친 애국지사와 6.25 전쟁 때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신 곳이 바로 충령탑이다.
조치원은 교육의 중심도시이기도 하다. 고려대학교와 홍익대학교가 있으며 조치원고등학교, 조치원여자고등학교, 조치원중학교, 조치원여자중학교 등 초등교육에서 대학교까지 많은 학교가 있으며 이들은 근대에 신설된 것이다. 그러기에 반면 오래된 문화 유적은 적다. 이는 과거 이 지역의 여건 때문이다. 실제로 조치원의 경우 조선시대 향교, 서원이 없고 봉산리에 있는 강화 최씨 최용소의 영당인 봉산영당(鳳山影堂)과 정려 두 개가 전부이다.
봉산동은 오봉산 아래 자리한 마을로 오래 전부터 강화최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강화 최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인 봉산 향나무가 있고, 아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지 않으면 이 바위에 올라 종아리를 때리면서 가르쳤다는 ‘자교암(恣敎岩)’이 있다.
조치원읍지명유래
조선말엽엔 충북(忠北) 청주군(淸州郡) 서강외(西江外) 일하면(一下面)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다. 그래서 '벌말' 또는'평리'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북면에 편입되어 조치원리가 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1940년에 '소화정'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평동(平洞)으로 고쳐, 조치원읍 평리(平里)가 되었다.
조치원읍 앞들에 있는 보를 '곤두기보'라고 부른다. 일명'보은덕보'라고도 부르는데 이 보는 조선 초에 허만석(許萬石)이 연기현감이 되어 큰 내에 둑을 막고 보를 내어 전답(田畓) 천 여(千餘)마지기에 물을 대게 하는데 그때 둑을 쌓을 때 그 보가 청주 땅에 있다하여 청주 사람들이 수 천명 몰려들어 허만석이 친히 감독하는 걸상을 부수므로 허만석이 크게 노하여 활을 당기어 쏘려고 하니, 청주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서 감히 범하지 못하므로 그 보를 완성하여 농민들에게 크게 도움을 줌으로 그 지방 사람들이 허만석의 은덕(恩德)을 갚겠다는 뜻으로 보은덕비(報恩德碑)를 평리 앞에 세웠으므로, '보은덕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곤두기보'가 되었는데 그 수 백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비석이 전복되어 땅에 묻혔으므로 현재 묻힌 비(碑)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 벌말'앞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이 방아의 다리와 같이 되었다 해서 '방아다리'라 부른다.
'방아다리'에 묻혀 있는 비를 '묻힌 비'라 한다. 조치원의 사적을 적은 비(碑)인데, 이 비(碑)가 나오면 조치원이 망한다는 설(說)이 있다 한다.
평리에 있는 옛 장터마을을 지칭한다.
저수지로서, 평리에 있는 조치원읍의 상수도의 수원지로서 1935년에 시설되었다.예전에는 주변이 커다란 나무가 있고 늪지대였는데 지금은 흙을 메워 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평리를 예전에는 뒷말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빈촌으로 거의 초가집이었다.
수원지가 예전에는 뽕나무밭이었다. 연기도서관 뒤쪽으로 애장골이 있어, 죽은 아이들을 나무에 걸쳐놓았다고 해 무서워서 이곳을 지나기를 꺼려하였다.
평리와 원리, 상리, 교리 사이의 경계지점에 나무전이 있었다 .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방아미산'이 있으므로 '방아미' 또는'침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신대리' 백관리' 내창리' 평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침산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1940년 왜식동명(倭式洞名) 변경에 따라 일인(日人)의 신궁 아래에 있다하여 궁하정 이라 했다가 해방 후 다시'침산리'로 고쳐졌다.
마을회관 앞에 연자방앗간이 있었는데 방앗간이 있어서 방아미라 했다.일제시대 때 미야시다조 라고도 했다. 집궁(宮), 아래하자를 써서 궁하(下) 라고도 했으며 신사 아래에 있었다고 해서 궁하라 했다.
최치원이라는 분이 침산리 윗산이 일야통곡지지라고 했는데 침산리의 강둑이 터져서 하룻밤만에 통곡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동일면(東一面)의 지역으로서'조천'뚝 안쪽에 있으므로 '둑안'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죽안'또는 '죽내'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죽내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읍에 편입되어 '죽림정(竹林町)'이라 하다가 1947년에 해방과 더불어 '죽림리'라 하였다.
'분퇴머리'에 있는 옛 무덤이다. 그 무덤 속에서 무늬 없는 토기와 동띠 모양의 청동띠 갈구리가 나왔다.
'분퇴거리'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솥 공장이 있었다 하여 '솥전거리'라 부른다.
'솥전거리'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산기슭에다 막을 짓고 살다가, 마을이 되었다. 옛날에 이곳에 산막이 많았다 하여 '산막'?이라 부른다.
죽림리의 '죽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분퇴머리에 있는 마을을 지칭하는 것이다.
솥전거리에 있는 마을을 지칭한다.
죽내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 무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도장말, 원마루 라고도 한다 . 죽림리 서쪽 끝 부분으로 황새가 많아서 황새울이라 불렀다. 예전에 그곳에 주막이 있었다.
황새울 밑에 위치하며, 안동네 바로 위에 있다 하여 윗뜸 이라고 한다.
안동네 남쪽마을로 볕이 들지 않고 음지이므로 음지짝 이라고 불렀다. 겨울에는 다른 곳보다 유난히 추운 곳이다.
죽림리 마을의 중앙으로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다. 사람도 제일 많이 살았으며 현재 죽림동 12반 자리이다. 대나무 밭이 있는 안동네라 하여 죽안 이라고도 불렀다.
안동네 북쪽에 위치한다. 이곳에 연자방아가 있었다. 이 연자방아는 일제시대 때까지 사용하였으며 6·25 이후 발동기가 나오고 나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새로 생긴 마을을 칭한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이전해 온 마을이다. 안동네 하고 음지짝 가운데에 위치한다.
기독교학교로서 죽림리 병막에 위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를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다녔으며, 일제시대 창고를 이용하여 운영을 했다. 이 학교 선생님들은 봉급을 받지 않고 가르쳤다고 하며, 6?25사변이후 생겼다가 20여년 만인 1970년대에 사라졌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北一面)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치원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에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역이 생기면서부터 이 지방(地方)이 번창해지자 1940년 왜식 이름으로 '영정'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정리(貞里)'로 고쳤다.
일제시대 때 정리를 영정이라 불렀는데 다른 곳보다 번화하였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지금의 고추전서는 곳이 예전에 싸전거리라 하였다. 이곳에서 쌀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지금 서는 마늘전 있는 곳이 예전부터 마늘을 사고 파는 마늘전 이었다. 장터 안에 있는 새우젓 가게이다.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새우젓 가게로 이곳에 어물전이 형성되어 있었다.
시장농협 뒷골목으로 유기그릇도 만들고 놋쇠그릇을 팔던 골목이다.
축협 있는 곳에서 가구거리 쪽의 골목을 말하며 그 골목에 예전에 포목점들이 있었다.
지금의 순대골목이 예전에는 체소전 이었다.
지금의 시장농협 자리가 일제시대 때 국옥(기꾸노야)이라는 일본사람이 운영했던 큰 술집이었다. 해방이 된 후, 우리나라 사람이 인수하여 상춘관이라는 술집을 하다가, 6?25이후에는 경찰서, 천주교회였다가, 농협으로 바뀐 것이다.
마늘전에 중국학교가 있다가 현 남리(영락교회 자리)로 이전한 후, 중국인들을 가르치던 중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였다. 그리고 이곳에 소 서방이라는 사람이 약방을 하였고 중국영사였다.
원리와 정리사이의 길로 건어물, 수산물 등 어물가게가 많아 어물전이라고 하며 1960년경 대운상회가 이곳에서 크게 어물장사를 해 돈을 많이 벌었다. 처음 주인은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이 운영한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에 속했었다. 벌판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조치원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갑자기 번창하여짐에 따라 1940년에 왜인들이 많이 살게 됨으로 '본정이정목(本町二丁目)'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원리(元里)로 고쳤다.
장터에 있는 둠벙을 오구미둠벙 이라고 부른다. 둠벙의 면적이 3,000여 평이나 되었는데 둠벙 가운데 중교 다리가 있었으며 낚시터로도 유명한 둠벙이었다.
곤디기보 밑에 있는 보를 지칭한다. 교리, 남리 일대의 논에 물 대기를 위한 보이다.
오구미둠병 가운데에 놓은 다리로서 조치원에서 청주시로 통하는 길이다.
청과상회 골목의 주력상품은 복숭아와 참외였다.청과상회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 지역은 벌판에 역이 있고, 역 주변에 식당만 몇 곳 있었다.이 곳에 상가들이 하나 둘씩 본격적으로 모인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예전에는 이 곳에 목재소가 있었는데, 이곳 역시 1960년대 즈음에 가게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장이 선지는 아주 오래되었고, 4일과 9일 장이다.1950년대쯤에 가게가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 한 것이 본격적인 상설시장을 이루었으며, 중앙시장이라는 간판을 붙인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예전에는 상리 주변으로 해서 장이 섰는데, 현재는 원리를 중심으로 장이 서고 있으며, 이 장에는 육전, 채소전, 생선전, 쌀전, 고추전등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큰 장이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조치원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이 지방이 역의 신설에 따라 갑자기 번성해지자 1940년 신흥정(新興町)이라 하고 1947년엔 해방과 더불어 신흥리가 되면서 연기군 조치원읍에 편입되었다.
'새터'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홉 갈래의 길이 있다해서 '아홉거리'라 부르며 '구거리'라고도 부른다. 지금의 연기체육관 앞길 근방의 길이다.
신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처음에는 외딴 곳에다 새터를 잡았는데 지금은 큰 마을이 되었다. 새로 이룩된 마을이라 해서 '새터'라 부른다. 또한 '큰말’ '외딴말' '신대(新垈)'라고도 부른다.
새터 서남쪽에 있는 큰 마을이다. 옛날에 벼슬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해서'백관'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지금의 아홉거리 남쪽이다.
백관 위쪽의 동네를 말한다.
지금 군청이 있는 곳으로 마을 앞의 산이라 하여 안산이라 하였다.
1차 주공아파트 있는 곳을 큰배미라 불렀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큰샘 앞의 논이어서 큰배미라 불렀다.
안산 밑에 있던 샘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겼던 샘이다. 칠월 칠석에 샘 청소도 하고 풍장을 치며 고사도 지냈다. 이 샘은 물의 양도 많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서 유명한 샘이다.
새터에 있는 나무로 몇 백년 정도 된 것이라 추정하며 단오날 그네도 뛰었다.
아홉 거리 꼭대기로 체육관 있는 쪽의 산을 말하는데 위쪽에 있다하여 상봉이라 한다.
체육관 옆으로 내려가면 있는 골로 이곳에 풍년이 들면 다른 곳도 풍년이 들어 물가 시세를 알 수 있는 골이라 하여 시개골 이라 한다.
문예회관에서 봉산리로 넘어가는 길 중간으로(새태고개) 이곳에 화장터가 있었는데 한국인 화장터와 일본인 화장터가 있었다. 일제시대 때의 놀음은 큰 죄였는데 그때 이곳 화장터에서 놀음을 벌여 화장터를 뒷말로 놀음터 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면 불빛이 새어나와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귀신이 있다고 했다는 말도 있다. 또 이곳 고개를 마지막고개라고 했는데 사람이 죽어 마지막으로 온다 해서 마지막고개라고 한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北一面의) 지역이었다. 숲이 무성하므로 '섶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석골' 또는 '신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충북 청원군 서강외 일하면의 옥동'정중리'장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동리'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을 신설함에 따라 조치원면이 되었다가 1931년 읍으로 편입되어 '신동'과 '안터'의 이름을 따서 '신안정'이라 하였다가 해방 후 현재까지 신안리라 부른다.
숲이 무성한 그 안에 마을이 있는데, 옛날에는 여기 마을 사람들이 숯을 구우러 산 속에 들어가곤 하였다 하여 숯을 싸놓은 마을이라 해서 섭골(薪洞)이라 불렀다. 섭골, 석골 이라고도 부른다.
섭골 북서쪽 안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내가 흐르고 그 냇물 안으로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다 하여 안골 또는 안대(安垈)라 부른다.
300여m의 높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은덕산 이라 부른다. 산에 올라가면 집채만한 바위가 덩그렇게 솟아 있는데 이 바위를 ?은덕바위?라 부른다. 매년 정월 보름날이나, 사월 초파일 또는 팔월 보름 때 마을 아낙들이 제가끔 떡시루를 이고 와서, 이 바위 위에 놓고 충원을 하면 반드시 은혜가 온다고 하여 지금도 명절날이면 아낙네들이 모여들곤 하는 산이다.
'석곡(石谷)' 마을 뒤편을 '서당골'이라 부른다. 옛날 분묘(墳墓)가 없었을 때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나무에 걸어놓고 할 때, 여기에 시체를 놓은 자리로서 '시(屍)당골'이라 부르던 곳인데 변하여 '서당골'이 되었다.
마지산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말을 탄 군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여기서 쉬어 갔다 하며 마을 뒷산 모양이 말굽과 같다 해서 머지미, 마정리(馬廷里)라 부른다.
'구락말'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엔 이 마을에 돌이 많음으로 석곡(石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성이씨(固城李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머지미 동남 편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뒷산이 높아서 옛날에 적이 쳐들어 올 때에도 많이 적을 무찌른 곳으로 '톡골'또는 '토옥동(土玉洞)' '옥동'이라 부른다. 또한 여기는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된다 해서 '토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톡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톡골 뒤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300m로 그 모양이 노적가리 같다.
현 마을회관에서 마을로 가로질러 가는 길로 국도로 연결되었으며 그곳에 고성이씨 정문이 있었으며 정문이 있었다 해서 정문거리이며 현재는 집들이 생겼고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른다.
구렁말 가는 곳(언덕)에 있었는데 홍대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사창(社倉)이 있었으므로 '내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서곡리 낙은리 일부와 충북 청원군 서강외 일하면리'장대리'평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내창리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을 신설할 때 서면(西面)에 편입되고 1936년 조치원읍 확정에 의하여 조치원읍에 편입되어 '서곡' 과 '내창'의 이름을 따서 '서창정(西倉町)'이라 하였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왜식(倭式) 동명(洞名) 변경에 따라 서창리(瑞倉里)가 되었다.
서창리 261, 즉 돌마리 뒷산 기슭에 있는 바위를 '장춘바위'라 부른다. 좁은 바위 면에다 '장춘장(藏春場)'이라고 석자를 새겼는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며 숙종(肅宗)때의 경성판윤(鏡城判尹) 최훤(崔煊)의 집터자리이다.
'모가나무골'에서 봉산동을 가다가 봉산 영당 사이에 새 길이 있는데 그 길로 올라가면 산기슭에 빙고(氷庫)가 옛날에 있었다 하여 '빙고개'라 부른다.
'내창리' 남동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주막이 생겨서 길가는 행인들이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새주막거리'라 부른다.
'내창'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시대 때 행인의 편리를 도와주는'원(院)'이 있었다 하여'원마루'라 부른다.
'돌마루'옆 동북쪽에 있는 옛 옥(獄)터를 '옥터골'이라 부른다. 토흥부곡(土興部曲)의 옥(獄)이 있었다 하며, 또는 숙종때 경성판윤(京城判尹) 최훤(崔煊)이 돌마루에 살면서 근처의 죄인을 가두던 터라고도 한다.
'내창'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모과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모과나뭇골'이라 부르며 서곡(瑞谷)이라고도 한다.
'내창리'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 백호부리에 돌이 박혀 있다는데 내창리 서쪽에 있다 해서 석우(石隅) 또는 돌마루 라 부른다.
지금의 서창 2리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곡식을 이 장소에 두었다 하여 그때부터 내창이라 불렀다.
내창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고대 올라가는 쪽에 있으며 가마같이 생겨서 가마바위라 부른다.이곳은 아낙들이 치성을 드리고, 남자들이 산제를 지내던 곳이다.
가마바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초상상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다. 이 초상상봉에 묘를 쓰면 서창리가 가물고 벼농사가 안 된다고 해서 묘 쓰는 것을 반대했다
조선 태종 때엔 전기현(全岐縣)에서 다시 연기현에 속했고 본래(本來)가 토흥부곡(土興部曲)의 소재지였다. 이 곳은 '둥이' '둥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저촌리'낙원리'은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동리(東里)'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고, 1917년 조치원면 신설에 따라 서면(西面)에 편입되고, 1931년 조치원읍 확정됨에 따라 조치원읍에 편입되어 오봉산(五鳳山)의 이름을 따서 봉산정(鳳山町)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봉산동으로 고쳤다.
조치원읍·서면·전동면에 있는 산이다. 산의 높이는 262m인데 산이 다섯 봉우리로 되어 있어서 오봉산이라 했으며, 산봉(山峯)에 기우제단(祈雨祭壇)과 산제당(山祭堂)이 있어서 영험한 산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일선원이 있으며 강화최씨 숭모단이 있다.
'둥이'뒤에 있는 골짜기를 '참샛골'이라 부른다. 찬샘이 있어 '천곡(泉谷)'이라 부르고 또 숙종때 효자(孝子) 최진원(崔進源)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봉산동 빙고개 밑 아주 낮은 위치에 고랑으로 이룩된 밭이 있는데 이 밭을 희밭 이라고 부른다. 옛날 여기에서 희를 구었었고 최송경(崔松景) 묘비(墓碑)가 있는 산모퉁이가 또한 희밭 이었다 한다.
'둥이'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띠가 많은 재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띠재골'이라 불렀다 한다. ‘저촌(苧村)'이라고도 불렀다.
'둥이'에서 서창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도장고개'라 한다. 토향부곡시대(土鄕部曲時代)에 도장을 열었던 곳이다.
둥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전에 방죽이 있었다.
봉산리에 있는 태종(太宗)때 형조판서 최용소(崔龍蘇)의 영당이다.
봉산리 128번지에 있는 향나무로서 명종 때 효자 최중용(崔重龍)이 심었는데, 몸이 용 틀림으로 올라가서 위가 우산처럼 퍼졌으며, 봉산향(鳳山香)나무라고도 한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이었다. 뒷산에 반석이 있으므로 번암(磻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번암리라 하여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 신설에 따라 서면(西面)에 편입되고 1939년 12월에 조치원읍에 편입되어 번암정 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번암동이 되었고, 현재는 번암리(磻岩里)라 부른다.
'번암리'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상절'이란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번암리'에 있는 마을이다. 일제시대 양(羊)을 많이 기르던 마을이라 해서 '양뜸'이라 부른다.
'산정말' 옆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한양(漢陽)을 오고 갈 때 행인들이 여기를 지나가는데 여기에 주막이 있어서 쉬어 가곤 하였다.
번암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산지기 집이 있었다 하여 '산직말'이라 부르는데 '산정말' '산정촌(山頂村)'이라고도 부른다.
번암 뒷산에 있는 바위가 번암 이라 부르는 바위다. 큰 바위가 판판하여 반석으로 되어 있어서 번암 이라 부른다.
세거(世居)하는 최씨문중(崔氏門中)에서 대과급제(大科及第)하는 자가 배출(輩出)되었는데 서울에서 희보(喜報)가 오거나 당자(當者)가 집에 도달 또는 임관부임(任官赴任)할 때 그 소식을 부근(附近)에 알리기 위하여 긴 쇠장대를 꽂고 북과 징을 달아 난타(亂打)하였다 하여 재 이름을 쇠때백이라 불렀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이었다. 벌판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조치원리라 하여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읍에 편입되고 1940년 해방과 더불어 위쪽에 있다 해서 상리(上里)가 되었다.
상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는 이 지대가 벌판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이 뗏집으로 움막같이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뗏집거리'라 부른다.
조천에 놓은 다리로서 조치원에서 충북으로 통하는 다리이다.
상리를 포함하는 사거리에 나무전이 있었다.이곳에는 나무를 쌓은 지게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나무 한 지게를 팔면 쌀 한 되도 못 샀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北一面)의 지역으로서 벌판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조치원리가 되어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철도 개설에 따라 역(驛)이 생기면서부터 갑자기 번창하자 왜식(倭式)으로 바뀌어 욱정(旭町)이라고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명리(明里)라 하였는데, 여기에 빛을 주는 발전소가 있으므로 '명리(明里)'라 부르게 되었다.
' 명리' 동쪽에 새로 된 마을을 '새뜸'이라 한다.
명리와 상리 경계부근에 있던 양조장으로 조치원에 처음 들어선 양조장이었다. 이것이 조치원 양조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0년쯤 없어졌다.
현 명동초등학교 남쪽 제방 밑으로 일제시대 때 변전소가 생겼고, 이 변전소가 생기면서 전기가 들어왔다. 6·25이후에 이 변전소가 서면으로 옮겨갔다.
조치원에서 처음 들어온 방앗간이 명리에 있었다. 처음에 조석환 씨가 하다가 주인이 바뀌었고 지금은 없어지고 집을 지었으며, 1973년쯤 없어졌다.
학교가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송탄유를 뽑았던 곳이었으며 해방 후 송탄유 뽑던 곳을 싸이클 경기장으로 사용했다. 이 싸이클 경기장은 컸기 때문에 국제적인 경기장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기석이라는 유명한 싸이클 선수가 나왔다. 이 싸이클장이 사라지고 일제시대 때 명동초등학교가 생겼으며 처음 생길 당시에는 4급 학교로 영창학원 또는 청년학교로 불린 간이학교였다.
일제시대 때부터 거리가 있었으며 1960년경에 소전이었다가 소전이 남리로 이전을 하였고 이곳에는 어물도매상이 크게 있었는데 그 자리를 가구상점으로 바꾸고 돈을 벌자 가구상점이 많이 들어섰다.또 장날이 되면 이곳에서 가축을 많이 팔았는데 닭이 많아 닭전이라고도 했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조치원리가 되어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갑자기 번창하여 1917년 면이 되었고 왜식(倭式)으로 적송정(赤松町)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조치원 남쪽에 위치함으로 '남리(南里)'라 부르게 되었다.
조치원읍에 남리 남동쪽에 있는 경부선 철로의 다리로 미호천 하류에 있는데 다리가 스물 네개가 있다 하여 '스물네강다리'라 부른다.
명리(군수관사 옆, 현 복지회관)에 우시장이 성시를 이루었는데 주택이 들어서며 남리 사거리 근방으로 이전하였다가 구획 정리 후 없어졌다.
조선말엽에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다.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조치원리가 되어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어 갑자기 번창하여짐에 따라 1940년에 조치원을 잘라서 '길야정'이라 하였다가 1947년 학교의 중심지이므로 '교리(校里)'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시대 때 불리던 이름으로 길야학교가 있어 길야동으로 불렀다.현 교동초등학교를 전에는 일인(日人)만 교육하는 길야국민학교라 불렀다.
지금의 군민회관 가는 코너 쪽에 있었다.이곳은 일본사람이 운영하던 극장으로 다다미방이었다.해방 후 우리나라 사람이 인수해서 했는데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아서 보았으며 추운 겨울이면 극장 앞에서 화로를 팔아 이 화로를 사서 앞에 두고 앉아 보았다. 상영물들은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이었다.그런데, 6·25때 이 극장이 폭격을 맞아 없어지고 후에 왕성극장이 되었다가 몇 년 전쯤 없어졌다.
현재 원리에 새로 크게 지어진 여관자리로 옛날 이곳에 크게 웅덩이가 있었다. 또 이 탬비툼벙을 도깨비툼벙이라고도 했는데, 이유는 물이 많을 때 낚시를 하면 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물을 품어내고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거의 없어 도깨비가 잡아갔다고 도깨비툼벙이라고 했다.
[동면]
동면은 연기군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치원 남면간에는 미호천을 중심으로, 금남면과는 금강을 중심으로, 충북과는 아미산을 중심으로 경계를 이룬다. 송용리에 고인돌이 있었는데 도로공사 중 파손되어 없어졌다. 그곳에서는 토기와 돌칼, 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동면에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백제 때에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연기현(燕岐縣)이 되어 연산군(燕山郡)의 영현(領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 연기현이라 불렀고 조선시대 1414년에는 연기와 전의현이 합하여 전기현이라 불렀으며 1416년 다시 환원되어 연기현이 되었을 때 동면은 연기현의 동진나루 건너편에 있었다. 조선말엽 연기군과 전의군이 신설되었을 때는 연기군의 동이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일면을 병합하여 연기군 동면이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호(號)를 회헌(晦軒)이라 하는데, 이는 그가 말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菴)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다. 그는 국학생(國學生)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하여 조성된 일종의 장학기금인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는 등 고려말기 유학진흥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가 죽자 왕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원나라 화가에게 명하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그 초상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1716년(숙종 42) 에 후손들이 합강리에 영당을 창건하여 그의 영정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사지내다 순조 때 후손과 유림들이 서원으로 창건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합호사(合湖祠)를 건립하고 안향의 영정만 봉안해오다 1949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하나 동면입구인 예양리에는 오충신정려(五忠臣旌閭)가 있다. 정려의 주인공은 밀양박씨 박천붕과 그의 네 아들들이다. 박천붕은 연기군 서면에서 태어나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헌 선생의 격문을 보고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는 싸움에 임하기 전에 사당에 고하고 아들들을 불러 “오늘날 신하된 자는 적을 토벌하여 나라에 보답하되 싸움터에서 죽어서 돌아옴이 절의를 떳떳이 지키는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가정을 보호하여 추하고 더러운 적의 무리로 하여금 가정을 범하지 못하게 힘을 쓰라!”고 훈계하고 전장으로 떠났다.
조헌은 운집한 의병을 거느리고 7월 4일 하늘에 제사를 드린 후 8월 1일 드디어 청주성 탈환을 위하여 진군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이 전력을 다하여 싸운 결과 청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박천붕은 장렬히 싸우다 적이 쏜 화살에 맞아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박천붕의 네 아들인 원겸, 인겸, 예겸, 의겸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의병으로써 죽산산성 전투에 참여하여 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나라에서는 이 오부자의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충신정려를 내렸고 이 정문은 현재 예양리 산 21번지에 건립되어 있다.
동면에는 유난히 정려가 많이 있다. 용호리에는 아버지의 병에 산삼이 특효라는 이야기를 듣고 엄동설한에 산을 뒤져 산삼을 구해다 아버지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또 돌아가신 후에는 3년 간 시묘살이를 한 효자 임양문의 정려가 있다. 내판 2리에는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가 곶감이 먹고 싶다고 하여 이를 구해다 드리자 차도가 있어 병이 완쾌되었다는 효자 김백열 정려가 있으며, 동면 송용리에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붙잡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녀 장응헌처 언양김씨 정려가 있다. 또 응암리 노곡마을에는 열녀 박기정처 광산 김씨 정려가 있고, 노송리에는 효열부 장이상처 한양조씨 정문이 있으며, 내판 3리에는 고부간인 열녀 김기철 처 밀양손씨와 김성흠 처 창녕성씨의 양세 정려가 있다.
동면>각지명유래
조선말엽엔 충북(忠北) 청주군(淸州郡) 서강외(西江外) 일하면(一下面)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다. 그래서 '벌말' 또는'평리'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북면에 편입되어 조치원리가 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1940년에 '소화정'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평동(平洞)으로 고쳐, 조치원읍 평리(平里)가 되었다.
'거름뜸'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쇠줄'이라 부른다. '소지울' '소지'라고도 부르는데 농사짓는데 필요한 소를 키우기가 으뜸인 마을이라 해서 '소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쇠줄''소지울'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소지(沼地)가 있는데 연꽃이 만발한 소지였다 한다.
'거랑뜸'에 있는 서원이다. 주자학을 들여온 '회헌'안유(安裕)선생의 서원이다.
'보습골'너머에 있는 골짜기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황룡사(黃龍寺)라는 유명한 절이 있는 골짜기 부근의 마을이라 해서 없어진 절 부근에 마을이 있다해서 '잿절'이라고 한다
'합강(合江)'의 원마을이다.
소지울 앞산 너머의 마을이다. 생(生)지초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생지울이라 했다.
소지울 북쪽에 있는 산으로 용호리에서 봤을 때 동쪽에서 동이 튼다하여 출동산이라 하였다.
소지울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 누런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서 황우산이라 부른다.
보속골 이라고도 불리우며 봉이 날아든다 하여 봉수동이라 이름지어졌다.
보수골에 있는 샘 이름으로 정월 14일(음력 1월 14일)에 제를 지냈다.
조선 말엽엔 연기군 동일면(東一面)의 지역이었다. 매바위가 있고 매가 많이 서식하는가 하면 큰바위가 많이 있으므로 매바위, 응암(鷹岩)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서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응암리'라 하고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매바위'서남쪽에 있는 마을을 '가마골'이라 부른다. 마을이 마치 가마의 치알처럼 서방(西方)의 야산(野山)으로 둘러싸고 있어'가마골'이라 부른다 하며 또한 '부동(釜洞)''산수(山水)'라고도 부른다.
'높은정이' 남쪽에 있는 마을을 '매바위'라 부른다.
' 매바위'북쪽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이라 고정(高亭) 또는 '높은정이'라 부른다. 예전엔 노목(老木)이 울창하게 있어서 노수정(老樹亭)이라 하였다가 노목이 모두 없어지자 '고정(高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동이면(東二面)의 지역이었다. 옛부터 충신(忠臣)이 많이 배출되고 오부자(五父子)가 충신이었던 박천붕(朴天鵬)과 그 아들들의 충신문(忠臣門)이 있어 예(禮)를 기르고 배우는 곳이라 하여 예양리(禮養里)라 하였다 한다. 서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때 인근의 마을과 청원군(淸原郡)의 일부(一部)를 병합하여 예양리라 하고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하였다.
'양골'북쪽 산 속에 있는 마을이다. 아늑한 곳에 자리한 마을로 예전엔 출세를 등진 사람들이 많이 은거했던 마을이다. 마을 뒤편에 해평윤씨의 오래된 산소가 있어 일명 산소골, 산소동이라 부른다.
예양리의 중심 마을이다. 덕(德)을 기르고 배우는 곳이라 하여 '양곡(養谷)''인동(仁洞)''양골''예양'이라고도 부른다. 하루 종일 볕이 든다하여 양동(陽洞)이라 했는데 변하여 양인동(養仁洞)이라고도 했다. 선조(宣祖)때의 충신 박천붕(朴天鵬)과 그 아들들의 거룩한 가(家)를 모신 곳이기도 하다.
충신문(忠臣門)이 있어 '정문(正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곳에서 어진 이, 글 많은 이를 길러냈다 한다.'양인(養仁)'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엔 주로 밀양박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또한 아미산의 끝자락이란 뜻에서 미꾸지라 불렀다.
미호진 재 예양리전(美湖津 在 禮養里前) 이것이 미꾸지 나루로서 예양리의 미꾸지 앞에서 미호천을 건너 조치원으로 가던 나루이다.
'미꾸리내'옆에 있는 마을이다. 8.15 해방과 더불어 생긴 마을로 만주에 이주 같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이룩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동진평야(東津平野)를 끼고 뒤에는 미호천(美湖川) 금강(錦江) 줄기가 흐르고 있어 강(江) 옆에 위치한 부락이라 하여 강촌(江村)이라 부른다.
양골에서 아미산 쪽의 깊은 곳을 지칭한다. 이곳의 논에 벼를 심으면 가재눈처럼 잘 영근다하여 붙여진 가재가 많은 곳이다.
양골에서 절골 가는 고개이다. 예전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를 방아다리라 부른데서 연유하여 방아달 고개라 한다.
예양리에서 송용리 가는 커브지역을 지칭한다. 들판이 낮은 지역이라 비만 오면 물이 흥건하게 고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동이면(東二面)의 지역이었다. 지금의 미호천(美湖川)이 강줄기를 돌리기 전에 이 지역 앞을 흐르는 강(江)줄기가 '갈'자(字)로 흐르고 있어 많은 늪과 연못을 형성(形成)하고 있어서 이곳에서 많은 이무기가 서식하며 승천(昇天)했다 하여 용에 대한 신앙(信仰)이 두터운 지역이며 뒷산에 많은 노송(老松)이 있어 그 인연(因緣)을 따서 송용리(松龍里)라 하였다. 1914년에 행정개혁때 이웃마을 송산리와 용곡리를 병합하여 송용리로서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송용리(松龍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솔이 무성하다 하여 송용(松龍)이라 불렀다 한다. 옛날 여기엔 이랑청이란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송산'옆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地形)이 도룡과 같이 생겼다 하여 '도룡골'이라 부른다. 결성장씨(結城張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도룡골'옆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오래된 석불(石佛)이 있어서 '석가동(石加洞)'이라고 불렸다 한다. 마을 지형(地形)이 꼭 나비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나비마을'이라 부르다가 '나븐마을?이 되었다 한다.'나동(羅洞)'이라고도 부른다.
동면 송용리(松龍里)에 있는 석불이다. 석불의 높이는 190cm, 폭은 110cm로서 고려 때의 석불이다.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옮겨왔다. 예전에 이 석불은 온전했었는데 어느 날 구렁이가 머리 있는 곳까지 오르자 번개가 쳐서 구렁이를 죽이고 조금 깨졌다고 한다.
결성장씨의 서당이다. 장훈(張訓) 3형제가 약 300년 전에 건립한 것이라며 처음의 건립지는 서당말의 서당자리(송용리 254-1)였다고 한다. 1876년에 지금의 장소로 이건하여 그 동안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장씨 일문에서만도 6진사를 배출하였다. 1921년에 기성학교(期宬學校)를 개설하여 초중교의 과정을 교육하다 1926년에 연동 공립보통학교가 창립되면서 학생들을 인도하고 폐교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결성장씨 문중에서 서당계를 조직 운영하고 있으며 약간의 전답과 건물이 남아있다.
송용리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팔봉산(八峰山)의 내맥이다.
조선말엽엔 연기군(燕岐郡) 동이면(東二面)에 속했었다. 내판(內板)들의 모든 물이 이 지역 앞을 지나가고 이곳의 산이 문설주처럼 되어 있다 해서 '문주(文舟)'라 하였고, 미호천(美湖川)이 마을 앞을 청초하게 흐름으로 마치 문관(文官)이 배를 타고 떠나듯 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하여 ‘문주’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문주리(文舟里)로서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갈말'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산다 하여 널리 알려졌던 마을이다.
곡촌(谷村)이라고도 부른다. '갈말'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깊은 골에 마을이 위치한다 해서'골말''곡촌(谷村)'이라 부른다.
갈말 뒤에 있는 산이다. 이곳엔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해서 당산(堂山)이라 부른다.
'갈말'서쪽 강가에 있는 산부리를 '용머리'라 부른다. 산부리가 용의 머리 또는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머리'또는 '누에머리'라 부르는데 이곳 사람들이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머리이다.
'갈말'뒤에 있는 당산 중허리에 있는 바위를 치마바위라 부른다. 모양이 치마를 두른 것 같은 형태인데 이곳에 와서 홀아비가 백일(百日)동안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면 홀아비를 면한다 한다
문주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예전엔 갈대가 앞에 많아서 '갈말'이라 불렀던 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여기엔 연기의 태산(太山)이 있는데 태산서원(太山書院)이 있는가 하면 선비들의 상징(象徵)인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形局)이며 학이 많이 서식하며 알을 낳는 지대라 하여 '명학(鳴鶴)'이라 불렀다 한다. 본래(本來)는 조선말엽엔 연기군 동일면(東一面)의 지역이나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신촌리,내대리를 병합하여 명학리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동면(東面)에 편입되었다.
집둥바위 아래에 있는 소(沼)를 '용당'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금강(錦江)물이 질러서 흘러 여기에 소(沼)가 생겼는데 소(沼)의 깊이가 수 십길이나 되어 이무기가 승천(昇天)하는 소(沼)로 불려졌었다. 지금은 모래가 점점 밀려들어 소(沼)가 없어졌다.
'용암'위에 있는 바위다. 큰 바위가 집채처럼 생겼다 하여 '집둥바위'라 부른다. 이 바위에서 그 해 비가 오지 않고 가물 때는 이 곳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 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용당(龍塘)'과 '집둥바위'근방에 세워진 정자(亭子)이다. 지금은 철거해서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모여서 글을 짓고 그 글을 현판(縣板)에 새겨서 보관하기도 하였다. 부강(芙江)에 사는 부자(富者) 김학현이 세운 정자인데 황우치(黃牛峙)를 와우형(臥牛形)의 명당(名堂)으로 정자를 황소의 머리부분에 세웠기 때문에 가운(家運)이 기울었다 하여 정자를 철거하였는데 여기에서 철거한 목재(木材)는 절을 짓는데 희사하였다.
황우산(黃牛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황우산이 와우형(臥牛形)과 황우도강형(黃牛渡江形)의 명당이 있어 만대향(萬代香) 화문지(火文地)로 풍수(風水)풀이를 하는 명당이 있어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증손인 황접(黃蝶)이가 이곳에 부강(芙江)에서 이사와서 처음 살기 시작하였다 하는데 지금까지 600년 가까이 자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황우산 아래에 있다 해서 마을을 황우치(黃牛峙)로 부른다.
명학리 황우치 고개에 성황당(城惶堂)이 있고 이 성황당에선 매년 성황제(城?祭)를 지냈다.
'용당'부근에 있는 주막이다.
'황우치'바깥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소정이'에서 '부암'으로 가는 낮은 고개를 '진고개'라고 부른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우리나라 군사들이 왜병(倭兵)과 싸우다가 싸움에 진 곳이라 하여 '진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이현(梨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호리(龍湖里) 중앙(中央)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중용이라 부른다. 용의 허리 부분을 차지해서 언젠가는 용호리에서 으뜸 되는 일을 많이 하는 인물이 나올 마을이란 풍수적(風水的)인 해석을 하는 마을인데, 부안임씨(扶安林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금 아파트가 있는 곳으로 예전에는 황우재라 하였는데 그곳에 사신 분들이 잘 되어서 훌륭한 사람들이 살아 왕촌이라 하였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동일면(東一面)에 속했었다. 마을을 끼고 있는 산세(山勢)가 호수 속에서 용이 노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용호리라 하고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마을뒷산의 형국이 용(龍)과 같이 생겼고 그 용산(龍山)을 미호천이 감싸고 있어 호수호(湖)자를 넣어 용호(龍湖)라 하였다.
구대라고도 한다. 용호리에서 가장 먼저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사람들이 떠나자 예전에 큰 마을이었는데 현재는 비어있다 라는 뜻이다.
날은터를 양지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날은터 뒷산을 벼락산, 벼락골이라 부른다.
날은터에서 문주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언고개라 한다.
벼락산 건너 동쪽의 산을 백수봉이라 한다. 백수산발형(하얀 머리를 풀어헤친 형국)의 명당이라 한다.
하룡 마을 남쪽 산 중턱을 가리킨다.
예전에는 소를 잡아서 제물로 쓰다가 돼지(교미하지 않은 검은 수퇘지)로 바꿔 지내다가 요즈음에는 소머리를 쓴다.
용호(龍湖)의 맨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호리(龍湖里)는 지형(地形)이 하나의 용형(龍形)이라 하는데 실지로 용(龍)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용의 머리 부분에 마을이 있다 하여 '상용(上龍)'이라 부른다. 진주강씨(姜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중용(中龍)뒤에 있는 산을 '물봉재'라 부른다. 이 재는 모양이 꼭 용과 같다 해서 '미리재''미리峯'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지금은'물봉재'라 부른다.
노적산(露積山)동쪽에 있는 마을을 불암(佛岩)이라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부안임씨(扶安林氏) 임장군의 8대손(代孫)인 한 사람이 이 곳 노적산 아래에 적산(積山) 산봉(山峰)에 있고 여기를 불암(佛岩)이라 부른다 한다. 그 아래 마을이라 해서 '불암(佛岩)'이라 부른다. '부래미'라고도 부르며 진주강씨(姜氏), 부안임씨(林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용호(龍湖) 서쪽에 있는 나루를 동진(東津)나루라 부른다.
중용에 있는 비로 모양은 호패형이다. 1731년(영조7년) 임광후가 세웠다.
이곳을 부암이라고도 부른다. 부자가 많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부래미 북서쪽 마을 뒤에 있는 산이다.
예전부터 노송(老松)이 많아서 조선시대에는 '놀뫼'로 부르기도 하였다가 일제 때에 '노산(老山)'이라 고쳐 부르기도 한 지역이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동이면(東二面)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시 노산리,상송리,웅동,송담리,송리 일부를 병합하여 노송리(老松里)라 하여 동면(東面)에 편입하였다.
'민마루'들 남쪽에 있는 들이다. 들에 물이 많아서 비가 오면 진구렁이 된다 하여 '진구렁'이라 부른다. 임진왜란때 왜병(倭兵)들이 이 곳에서 몰사하였다는 곳이다.
조선초엽 이곳에 마을이 없을 때 사람들이 여기로 옮겨와서 처음 움막을 짓고 살았다 하는데 그 후 마을이 형성(形成)되었다 한다. 처음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다 하여 움골 또는 웅동(雄洞) 이라 부른다.
마근터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장산''노루미''노산리(老山里)'라고도 부르는데 노산(老山) 앞에 있으며 마을 뒷산의 모양이 노루와 같다하여 노루미, 당산 이라 부른다. 노루미가 변해서'노리미'라 부른다.
마을동쪽 옻샘 위골을 지칭한다. 임진왜란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 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옻샘과 웅동에서 충북 사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한다.
웅동의 옻샘이 있는 곳으로 예전에 이곳의 샘물이 널리 알려졌을 때 가마를 타고 와서 마시고 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 남쪽으로 큰길가를 지칭한다. 예전에 이곳에 나무장승이 양쪽에 세워져 있었다. 6.25사변과 1960년대까지 세워져 있었는데 장승제를 중단하면서 세우지 않았다.
노리미에서 충북의 당곡리 경계지역 삼거리를 지칭한다.
'노루미'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서당(書堂)이 있어 '강당(講堂)'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여기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근처 약수터 부근에 사는 과부들이 옛날 남편과 살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슬픈 세월을 뼈아프게 생각한다 하여 강당을 아주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이다.
노송리(老松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 앞에 못을 파고 소나무를 심어서 마을 밖에서 보이지 않게 한 신선의 마을이다.
강당에서 아미산 쪽 도솔사 뒤편 골짜기에 있는 샘이다. 예전에 피부병 환자가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하면 나았다고 한다.
'너더리'안쪽이 되므로 '안너더리'또는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는 곳이라 하여 판교(板橋), 내판(內板) 이라 불렀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의 상판리'외판리'외송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판리(內板里)'라 하였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동이면(東二面)의 지역이었으나 '내판리'가 되면서부터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하게 되었다.
'새말'동쪽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연못이 있었다 하여 '연못골'이라 부른다.
내판리 상판(上板)에 있는 동산이다. 예전에 이곳은 군 부자(君富者)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약 300평 건평(建坪)에 남향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지금으로부터 70년전만 해도 흑색(黑色)황새가 날아와서 수 백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 부자집의 대대(代代)가 망하고 동산의 노송(老松)이 베어지자 어디론가 흑색 황새들은 날아갔다 한다. 황새 놀던 동산이라 하여 황새미골이라 부른다.
내판리와 명학리 사이에 있는 철로의 터널을 수청굴이라 부른다. 1908년 경부선 철도를 놓을 때 완성한 굴로서 굴속에서 맑은 물이 나온다 한다.
'너더리'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가장골'앞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중심에 조그만 내가 있었는데, 달이 이 내를 따라서 뜨고 짐으로 달이 밝은 곳이라 하여 '달박골'이라 부른다 한다.
가장골 옆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내판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예전에 마을 앞에 나무로 된 넓고 좋은 다리가 있었다 하여 '너더리'라 부른다.
내판(內板)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웃너더리로 너더리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회관 뒤편에 보이는 산을 말하는데 예전에 볏단으로 만들어 묶어 털었는데 그때 나락을 모아서 쌓아 놓은 모습이 묘 같다 하여 묘쌀미 또는 모살미라고 불렀다.
여자의 기가 세었는지 불행히도 남편과 계속 사별하고 또 사별해서 9번씩이나 시집을 갔다 한다.
[서면]
서면은 연기군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제때에는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연기현(燕岐縣)이라 하여 연산군(燕山郡)의 영현(領縣)에 속했다.
1414년에는 연기와 전의를 합하여 전기현이라 하였다가 1416년 다시 환원하여 연기현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연기군의 서면이 되었고 1917년 조치원면이 신설될 때 북면의 9개 리를 편입하여 18개 리를 관할 하다가 1939년 조치원읍이 생기면서 5개 리를 넘겨주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이유는 위양의 위(渭)자가 ‘밭(田)이 물(水)에 잠기니 그 속에 달(月)이 뜬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저수지가 생긴다는 뜻이란다. 실제로 1983년에 이곳에다 저수지를 만들었으니 지금의 고복저수지이다. 고복저수지에는 연기대첩공원이 있다.
연기대첩은 1291년 원나라에 반기를 든 몽고 합단적이 고려로 침입한 것을 무찌른 것으로 원 전투지는 서면 쌍전리이다. 합단적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이들이 지나간 마을은 폐허로 변하는데 집은 불지르고 짐승은 양식으로 약탈하여가고 어린이와 노인은 살해하고 아녀자는 강간을 한 후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다. 당시 충렬왕은 합단적이 쳐들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며 합단적은 결국 연기군 서면 쌍전리에까지 쳐들어 왔다.
그때 우리나라 삼장군인 한희유, 김흔이 선봉이 되어 목천에서 한밤중에 출발하여 정좌산 앞 대박산에서 군대를 정비한 후 동이 틀 무렵 기습공격을 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합단군은 십만이 넘는 병사이고 고려군은 삼만이 전투를 벌이니 처음에는 고려군사가 밀리자 김흔 장군이 칼을 빼들고 후퇴하는 자는 뒤에서 목을 베겠다고 하자 모두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죽은 시체가 공주금강까지 30리간 널려있어 전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후에 윤기가 쓴 시를 보면 그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서면 쌍전리 부근에는 큰창고개, 작은창고개, 군량골, 승적골, 전당골 등 전투와 관련지은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서면 와촌리에는 예전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많았었다 한다. 이곳을 와촌(瓦村)이라 부른 연유가 바로 기와를 굽는 곳이 많았기 때문인데, 1998년도에 고려시대 기와를 구웠던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여러 기의 가마터가 발굴되었고 명문기와도 출토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우수한 기와를 구웠던 곳으로 학계에 주목받기도 하였다.
서면에도 도자기를 구웠던 도요지 또한 많은 곳이다. 청라리는 고려말기 청자를 구웠기에 청자의 청(靑)자를 넣고 나주라씨들이 살다나갔다 하여 나발터라 부른 글자를 합하여 청라리(靑羅里)라 불렸다.
청라리에는 불당골, 병목안, 뒤죽골, 양대 등에 분청사기 도요지가 다섯 군데 있고 백자 도요지도 있다. 특히 연기향토사료관이 설립되어 있는 곳도 조선시대 우수한 분청사기를 구웠던 곳으로 박물관이 설립된 동기 또한 이들 도요지를 연구하다 모은 유물로 박물관이 설립된 것이다. 신대리 불당골 에서는 김(金)자와 천(天)자의 도공이름이 쓰여진 분청사기가 출토되었고 기룡리 진상동에서는 우수한 분청사기가 출토되어 지명처럼 임금에게 진상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 외로 용암리에도 분청사기요지가 두 군데 있다. 서면 쌍류리에 송암사란 절이 있다. 이곳 스님은 매일 돌탑을 쌓아 현재 5백여 개의 돌탑이 쌓아져 있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燕岐郡)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이 곳은 지형(地形)이 나발 같다 하여 '나발터'또는 '청라(靑羅)'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시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청라리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편입되었다.
예전에 나주나씨(羅州羅氏)의 거주지로 처음에는 나발지(羅發址)라 불리웠다. 나씨(羅氏)들이 떠난 마을이란 뜻에서 '나발(羅發)터'라 부른다.
'나발터'양달쪽에 있는 마을이다. 은행(銀杏)나무가 크게 서 있는 마을이다. '양진(良津)터''행정(杏亭)'이라고도 부르는데 좋은 밭과 기름진 옥답(玉沓)이 많아 양지바른 곳에서 살기가 좋은 곳이라 '양대(良垈)'라 부른다. 전의이씨(全義李氏)들의 거주지로 알려져 있다.
양진터 맞은 편 응달쪽에 있는 마을이다. 음진터 라고도 부르는데 북쪽이 트여서 환히 들여다 보인다 한다. 원 마을명은 북향촌(北向村)으로 '망북(望北)'이라 불렀다 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효자(孝子)인 홍우구(洪禹九)가 이 곳에 살면서 촌속(村俗)에 익숙하고 예의(禮義)가 뚜렷해서 이웃사람들이 그 곳이 배울만한 분이 거주(居住)하는 곳이라고 '헌대(獻垈)'라고 불렀다.
헌터 뒤에 있는 산이다. 청라 1리 나발터 앞산의 줄기이다.
예전에 청자를 구워 청(靑)자를 쓰고, 나주나(羅)씨가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청(靑)자와 나(羅)자를 합해 청라리(靑羅里)라고 부른다.
마을입구에 있는 정자로 연기에서 숨어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기은정 주위의 느티나무가 8개라서 팔고이정이라 하였다.
마을입구에 위치한 강릉김씨 김련의 효자문이다.
마을 뒤 우측 연기향토박물관 뒤에 있는 산으로 왕이 나올 곳이라 하여 왕재라 하는 말이 있고 이 산에는 전의이씨 묘가 많이 있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예전에 월하방이 있었으므로 '가레리'또는 '월하''월동'이라 하였다.조선말엽에 정치에 환멸을 느낀 민씨(閔氏)중의 한 세도가(勢道家)인 민후건(閔候騫)이 한양을 버리고 초야(草野)에 묻히기 위해 이 곳에 내려와 마을을 만들고 풍류(風流)를 벗삼아 살았다 하여 세월 좋은 마을이란 뜻에서 '월동(月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민후건의 호가 월하(月河)이다.
월하리에 있는 인조(仁祖)때의 효자 민후건(閔後蹇)의 정문(旌門)이다.
창고개 위쪽에 있는 마을을 '전동(典洞)'이라 부른다. 조선 인조(仁祖)때 인조가 이괄의 난(亂)을 피하여 공주(公州)로 피난할 때에 난을 피해 피난 온다는 말을 듣고 마을사람들이 공주 금강(錦江)까지 가서 왕(王)을 영접(迎接)하였었다.여기 사람들이 자기를 환대하여 주는 것에 놀란 인조는 여기 사는 사람들이 예전(禮典)에 바른 사람들이라 하여 그들의 마을을 '전동(典洞)'이라 부를 수 있게 하사하셨다.'작은 창고개''새터말'이라고도 부른다.
'월하'아랫편을 월계라 부른다. 마을 앞에 시냇물이 흐르고 예전에 서원(書院)이 있었던 마을이다.예전에는 장이 서는 청거리 시장이었는데 조치원 시장이 번성함에 따라 자연 여기 시장은 없어졌다. 예전에 서원이 있었던 마을이라 해서 '구서원'이라고도 부른다.창녕조씨(昌寧曺氏)의 집거지(集居地)이기도 하다.
월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부곡사(富谷寺)라는 절이 있었다.
'월계(月溪)'동쪽 냇가에 있는 모퉁이를 베루뱅이 라 부른다.
전동 서쪽에 떨어진 마을이다.
밀양박씨 박천붕의 오충신 정문으로 1900년도에 자손들이 이곳에서 살다 동면 예양리로 이전하여 살면서 이곳의 정려를 예양리로 이전했다.
가리란, 병아리를 가두어 놓는 싸릿대로 엮어서 만든 것인데 월하 3리의 모양이 가리와 비슷하고 뒤의 매봉산이 있으므로 매가 채가지 못하게 병아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리를 친 형상이다.발음을 편안하게 하다보니, '가래터'라 부르기도 하며, '닭계'자를 써서 월계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금당산(金唐山)에 용거(龍居)하는 설산(雪山)이 있고 용바위가 있으므로 용암(龍岩)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용암리(龍岩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위양골 서쪽에 있는 굴이다. 바위에 굴이 뚫렸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옛날에 용(龍)이 여기에서 승천(昇天)하였다 하여 큰 가뭄이 있으면 여기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한다. 용(龍)이 나온 굴이라 하여 용굴이라 부른다.
용암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때 '위양역(渭陽驛)'이 있었던 곳으로 역졸(驛卒)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그래서 '역말'이라고도 부른다.
용암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의 마을이름은 금당(琴堂)이었다 한다.
강다리는 집집마다 짚단을 세단씩 걷어서 모아놓고 마을사람들이 모여 동아줄을 꼬았다. 동아줄을 길게 해서 강다리(줄다리기)를 했다. 여자가 이겨야지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여자편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 온 1,000명이 살았다하여 ‘생천’이라 한다.
위양골 북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西面)에 속했었다. 이 지역엔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기와집이 많은 곳으로 와촌(瓦村)이라 불렀다 하는데 또한 기와를 굽던 곳이기도 하다.1914년 행정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와촌리(瓦村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전당골 앞들 가운데 있던 작은 산을 통뫼라 부른다.
효방동(孝坊洞)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대실(大室)의 부가(富家)와 함께 기와집이 많이 섰던 마을이라 해서 '기와말'이라 불렀다.기와말이 변해서 지와말로 부르게 되었다. 세조(世祖)때 화를 입은 충신 성삼문(忠臣 成三門)의 성씨(成氏)들이 숨어살기 위해 이곳에 정착하였다는데 지금은 16대(代)에 이른다.성삼문은 우계 자손(파)이고 이곳 성씨(成氏)는 동고 자손(파)인데 성삼문이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죽는 바람에 손(孫)을 잇기 위해 동고 파에서 양자를 보내 대를 이었다.지와말은 기와를 굽는 마을에서 연유하였다. 고려시대 이곳은 기와를 굽는 가마터였다.
호랑이가 살고 있었다. 밤이나 낮이나 마을을 바라보고 울었다 하는데, 호랑이가 궁해서 우는 고을이라 하여 마을을 '궁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욧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바위의 한 부분이 불쑥불쑥 튀어 나와 있어 바위가 전체를 숨기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은암(隱岩)'이라 부른다.
지아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400여년 전 창녕성씨 가문의 정착지로서 성씨의 종가(宗家)이며 부자로 살았다해서 대실(大室)이라 부르고 서계(西溪)라는 학자가 살았다.
와촌 1리 5반이며 대실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장수바위가 마을 북쪽 저수지위에 있다 해서 번암터(磻岩垈)라 부른다. 조선 초에는 흥덕장씨(興德張氏)들이 살기 시작하여 지금은 장씨촌(張氏村)으로 되었다.
대실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밤나무가 많다 해서 밤나무골이라 부르고 진원박씨(辰原朴氏)들이 5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이 곳은 산세(山勢)가 수려(秀麗)해서 마치 중국(中國)에서 경치(景致)가 으뜸인 전당(錢唐)과 흡사하다 하여 '전당(錢唐)'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쌍괴리, 전당리를 병합하여 쌍전리(雙錢里)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서면에 편입되었다.
전성말 서쪽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을 '전당골'이라 부른다.마을 뒤에 있는 정좌산(正左山)에서 고려와 원나라 장수가 몽고족 합단을 무찔러 섬멸하였다 하여 이곳을 진선동(鎭善洞)이라 불렀었다. 그 후 서기 1400년경 남양홍씨(南陽洪氏)와 강(康).유(兪)씨가 이 곳에 정착(定着)하여 산명(山明)이 수려(水麗)한 것이 중국의 전당(錢唐)과 흡사하다 하여 마을을 '전당(錢唐)'이라 부르고 '전당(錢唐)''전당골'로 불리운다.
전당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쌍괴'라 부른다. 마을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고개와 전당골 사이에 있는 마을로 상고(上古)때 군량을 쌓아 두었었다 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의 지역이 되었다. 초당산(草堂山)을 중간에 두고 양계곡(兩溪谷)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마을 아래서 합하므로 쌍류(雙流)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쌍류리(雙流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권텃골 뒷산에 있는 바위를 '일곱길바위'라고 부른다. 일명 장수바위라고도 부르는데, 바위길이가 일곱길 이나 된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
쌍류리에서 전동면 송정리로 넘어 가는 고개를 '솔티'라 하고 그 아래 마을도 솔티라 부른다.솔티 고개는 소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고 솔티 마을엔 예전에는 송현원(松峴院)을 두어서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마을이었다.
벌말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는 원래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재실(齋室)이 있는 곳이라 '송재실(宋齋室)'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전판서(前判書) 이승순(李承純)이 이 마을로 낙향(落鄕)한 후 부터는 그의 호(號) 월정(月亭)을 따서 그대로 '월정'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월정(月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권터골 뒤에 있는 골짜기를 성당(聖堂)절터라 부른다. 예전에 성당사(聖堂寺)란 절이 있었다 하여 '성당(聖堂)절터?'라 부른다.
벌말 북쪽 큰 산 속에 있는 마을이다. 큰 길가이면서도 피난처로 알려져 있다.임진왜란 때 이 곳에 천명이 피난하여 무사했다 한다. 그래서 천명의 목숨이 살아났다 하여 '생천(生千)'이라 부른다. 주거 성씨(姓氏)는 이(李), 서(徐)씨이다.
쌍류리 앞 벌판에 있는 마을을 벌말이라 부른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80여년 전에 가선홍씨(嘉善洪氏)가 여기에 정착(定着)하면서 새터를 잡아 홍씨(洪氏)들 40여호(戶)가 마을을 이루면서 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1914년 행정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행정구역상 신대리(新垈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불당골 서쪽 큰 골짜기 입구에 있는 마을을 '강골'또는 강동리(江東里)라 부른다.마을이 강의 동쪽에 위치한다 해서 그리 부른다.
신대리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300년간이나 남양홍씨(南陽洪氏)들의 집거지(集居地)였고 또한 그 후 거유(巨儒)박당 정용몽 등이 학자들을 영입(迎入)하여 송정(松亭)을 설립하고 유(兪),홍(洪) 양대성(兩大姓)의 젊은이들을 훈도(訓導)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마을 앞에 소나무 정자가 있다해서 송정(松亭)이라 부른다.
새터말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살구나무가 많아서 '살구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새터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울 뒤의 산을 지칭한다. 전씨네 산이라서 전주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말도 있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 뒷산이 성(城)처럼 되어 있으므로 '성재'또는 '성작골'그리고 '도맥(道脈)'이라고도 불려왔는데 남양홍씨(南陽洪氏)의 학자가 당호(堂號)를 성제(性劑)라 한 이가 있어 '성재'로 많이 불려 왔었다.1914년 행정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성제리(性劑里)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에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연기군 서면(西面)에 편입되었다.
과성(菓城) 앞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효종(孝宗)때 공판(工判) 홍우표(洪禹杓) 부자(父子)와 세문당(歲文堂) 홍우채(洪禹采)가 서당을 짓고 서생(書生)을 가르친 곳이라 하여 '서당골'이라 부른다
고려 충렬왕 17년 원나라에 반기를 들은 합단이 쳐들어오자 고려와 원나라 장수의 연합으로 크게 승리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제리에 있는 마을이다. 명거(名巨) 홍이경(洪履慶)의 손자(孫子)인 홍우(洪禹)가 그 당시 명유(名儒)로서 호(號)가 성제(性齊)였으므로 그가 있던 이 마을을 원성제(原性齊)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남양홍씨(南陽洪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군내면(郡內面)의 지역이었다. 예전에 기와를 구웠던 자리가 있다하여 '가마골''부동(釜洞)'으로 불려지던 곳으로 1914년에 행정개혁 때 치암리와 서면의 오룡리, 산숫골, 방죽안, 홍촉골을 병합하여 '부동리'라 하고 서면(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부동(釜洞)의 원 마을이다. 부동리에서 가장 빨리 마을이 형성(形成)되었던 곳으로 가마솥과 인연이 있는 원마을이라 해서 '원부동'이라 부른다. 가마자리 라는 곳이 밭 가운데에 있었는데 겨울에 눈이 아무리 많이 와도 눈이 쌓이지 않고 녹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가 집터가 좋다고 해 집을 지어서 없어졌다.
부동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꿩처럼 생긴 꿩바위가 있다해서 마을을'치암'또는 '꿩바위'라 부른다.
부동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충렬왕 17년에 쌍전리(雙錢里) 정좌산(正左山) 전투에서 고려와 원나라에 반기를 들은 합단을 무찌르기 위해 큰 가마를 설치하고 군병(軍兵)에게 식사(食事)를 먹였다 하는데 그 때 큰 가마를 설치(設置)했던 마을이라 하여 '가마골''부동(釜洞)'이라 부른다.
꿩바위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부근에 오룡주형(五龍珠形)의 명당(名堂)이 있고 지형(地形)이 오룡(五龍)처럼 되어 있다하여 '오룡동'또는'오룡골'이라 부른다.
오룡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서면(西面) 북쪽에 관불산(冠佛山)이 있고 봉산(峰山)이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미호천(美湖川) 동강(桐江)이 유유히 흐르고 산수(山水)가 수려(秀麗)한 환경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동네라 하여 산수동(山水洞)이라 부른다.옛 산소(山所)가 있다하여 산숫골, 산덕(山德)이라고도 부르며 200여년 전부터 기계유씨들이 거주하던 터전이다.
가마골 너머 동북쪽 산을 말하는데 동그랗게 함박같이 생겼다 하여 함박산이라 한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봉(鳳)바위가 있어서 '봉(鳳)바위''부엉바위''봉암(鳳岩)'이라 불렀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군내면의 봉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봉암리라 하여 연기군 서면에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상고시대의 구리칼(銅劍), 구리창(銅戈)이 나왔으며, 마을이 매우 번창하여 전에는 “연기는 봉암으로 꾸려간다”는 말이 있었다.
봉암 동쪽에 있는 산이다. 봉바위가 있다 해서 봉황산(鳳凰山)이라 부른다. 여기서 상고시대(上古時代)의 동검(銅劍)'동시(銅矢)'동창이 나왔으며 마을이 매우 유복하게 번성하는 이유를 봉황산 때문이라고 한다.
서면 봉암리에 기양학교 라는 사립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농촌의 청소년을 깨우쳐 민족의 이념을 배워서 나라의 큰 일꾼이 되겠다는 청소년들이 위대한 꿈과 긍지를 높이기 위해 설립을 본 학교로서 서면 봉암리 이락당(二樂堂)에 있었다. 설립(設立)은 1904년 4월이었고 설립자는 민족애가 뚜렷한 윤준식(尹浚植)과 한일동(韓日東) 두 사람이 있고 초대교장은 윤준식이었다. 몇 년만에 폐교(廢校)했지만 많은 인재(人材)를 배출하였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지형(地形)이 용(龍)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그 뜻을 따서 기룡(起龍)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기룡리라 하고 연기군 서면(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동막골'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요화방(堯化坊)'이었다 하여 요화리라 부른다.
'망골'입구에 있는 비(碑)다. 효자(孝子) 홍연경(洪延慶)과 그 아들 홍연설(洪延卨),손자 홍우적(洪禹績), 홍우평(洪禹平), 증손 우방(禹防), 현손 홍득일(洪得一), 오세손 홍상덕(洪相悳)의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오세칠효(五世七孝)가 됨으로 영조(英祖)가 그 사는 마을의 이름을 '효교(孝橋)'라 고쳐 줄 만큼 홍씨(洪氏)들의 가문(家門)을 빛낸 효행비(孝行碑)다.
'망골'앞에 있는 골짜기를 시묘동(侍墓洞)이라 부른다.
기룡리(起龍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이 곳에는 홍씨가내(洪氏家內)에 일곱 효자가 났으므로 영조(英祖)가 마을 이름을 '효교'라 고쳐 주기도 하여 '효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전 평택임씨(平澤林氏)의 일가(一家)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 임순우(林舜宇)란 사람이 공주(公州)에서 이곳으로 이사와서 정착(定着)하면서부터 임씨(林氏)들이 이룩한 마을인데 그 당시 새로 임씨(林氏)들이 이룩하는 마을이란 뜻에서 신림(新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분청사기를 구웠던 골을 지칭한다. 예전에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워 나라에 진상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국화(菊花)가 많이 펴서 국화향기의 마을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그래서 국촌이라 불렀었다. 서기 1914년에 행정 개혁 때 이웃의 독동리'대박리'후덕리를 병합하여 국촌리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편입(編入)되었다.
마을 뒤에 기계유씨(兪氏) 묘(墓)가 있는데 그는 천성(天性)이 착실하여 어느 날 우연히 큰 고을에 갔다가 고아(孤兒)가 된 정동(鄭童)을 주워 다가 키웠다. 그는 머리가 좋고 글도 잘 읽고 해서 10여 년을 공부한 끝에 크게 성공(成功)하여 전라도(全羅道)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헌데 세월이 흘러서 자기를 키우고 크게 성공시킨 유씨(兪氏)가 죽자 그는 전라도에서 여기를 찾아와 은덕에 보답하는 뜻에서 묘지(墓地)를 정해서 유씨(兪氏)를 안장하고 유씨(兪氏)가 살던 이 마을을 후한 인덕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후덕동(厚德洞)이라 부르게 하였다. 후덕골 이라고도 부르며, 기계유씨(兪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 부락은 지형(地形)이 가늘고 긴 협곡(峽谷)으로 되어 있어서 마을을 가느실 또는 세곡(細谷)이라 부른다. 기계유씨(兪氏)가 많이 살고 있다.
'국말'동쪽에 있는 마을을 '독골'이라 한다.
'독골'아래에 있는 마을을 '대박(大朴)'이라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북일면(北一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창녕성씨들이 많이 살았으며, 그 후 결성장씨들이 살면서 '봉서재'라는 서당을 개설하였다. 마을 뒷산을 고산(高山)이라 불렀으며, 이곳에 고산사(高山寺)란 절이 있었다. 지금은 산을 '비룡산'이라 부르고, 고산사는 절터만이 그 흔적을 알아 볼 수 있으며, 또한 아래 부분에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이 곳은 '복골'이라 불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개혁시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고복리(高福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서고(西高)'뒤에 있는 산을 비룡산이라 부른다. 사람이 소리를 치면, 이 산에서 울려 퍼지는데 돌을 떼어낸 후부터는 잘 울리지 아니한다고 전한다. 산삼이 있으므로 용이 승천(昇天)하기 위해선 산삼을 먹으려고 이곳에 심었으며 용이 승천(昇天)하는 산이라 해서 비룡산(飛龍山)이라 부르며 산삼이 있으므로 산아래 물줄기에는 잉어가 올라오지 못한다.
봉서재는 고복리 서고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옹(鳳翁) 장원주(張元胄,1634-1700)가 만년에 후진 양성을 위해 창건한 서당이다. 320여 년 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근대교육의 모체인 동광학교가 설립된 크고 작은 역사를 창조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동고와 서고를 통털어 '고산골'이라 부른다.
동고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면]
남면은 연기군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금강은 금남면과 경계를 이루고, 또 금강을 따라 선사유적이 분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아왔던 곳이다.
월산리의 고인돌과 진의리 상모골의 청동기 유적은 선사시대 중 청동기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54개국 중 하나였으며 천안지역의 목지국(目支國)과 공주지역의 불운국(不雲國)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백제 때에는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에 연기(燕岐)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에 속했으며 고려 현종9년(1018)에는 청주에 속했으며 명종2년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4년에 전의현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1416년 다시 연기현으로 환원하였다.
조선말기인 고종32년 1895년에 연기현이 연기군으로 바뀌어 연기군청을 연기현에서 관아로 쓰던 건물에 연기군청을 만들고 업무를 보다가 1911년 연기군청을 조치원으로 옮기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전의군과 합하여 연기군(燕岐郡)이라 하였다. 그때부터 이곳은 연기군의 남쪽에 위치한다하여 남면(南面)이라 불렀으며 관아로 쓰던 건물은 연남초등학교의 전신인 배달학교가 되었다. 지금은 남면의 연기리가 과거 연기현의 중심도시로 연기향교가 있으며, 관아 흔적은 연남초등학교 교정에 남아있는 초석들이다.
남면 양화리에 가면 부안임씨(扶安林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600여년 동안 그 터전을 지켜온 것은 입향조 임난수(林蘭秀)가 이곳에 정착하여 자손을 퍼트린 것이다. 임난수는 고려의 충신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 아래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면서 모든 벼슬을 버리고 금강변에 은거하였는데 이곳에 정착하게 된 동기가 전월산을 바라보니 산이 마치 수풀림(林)자와 같아 자신의 성과 비슷하므로 이곳에 터를 잡는다. 그리고 매일 전월산에 올라 고려의 서울인 개성을 향하여 절을 하고 묵상에 잠겼는데 그곳을 상려암(想麗岩)이라 부르고 그가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마을 가운데에 있다. 은행나무가 있는 곳을 숭모각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임난수가 살던 곳으로 그가 죽자 그의 손자인 임중이 이곳에 사당을 지은 것이 오늘날 숭모각으로 변하고 임난수의 사당은 독락정으로 옮겼다.
5강 8정 중 강이름이 다섯인데 오강(吳江-동진 하류), 초강(楚江-부강 하류), 금강, 백강(백마강), 청강(백마강 하류)이며, 8정은 8개의 정자로 합강정(合江亭), 독락정(獨樂亭), 한림정(翰林亭), 탁금정(濯錦亭), 금벽정(錦壁亭), 사송정(四松亭), 청풍정(淸風亭), 수북정(水北亭) 이다. 옛날에는 논산과 강경의 상선들이 이들 8정을 지날 때에는 나루세를 물어야 했다고 한다.
진의리, 양화리, 방축리, 갈운리 뒷산에 원수산(元帥山)이 있다. 산 모양이 붓의 끝과 같이 뾰족하여 문필봉이라고도 불렀고 봉우리가 큰 것 작은 것 두 개라 형제봉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원수산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연기대첩에서 제1차 전투는 서면 쌍전리에서 공주금강까지 30여리간 시체가 즐비하도록 승리를 거두었고 이때 살아난 합단군이 다시 정비하여 원수산에 진을 치고있던 고려 군사와 싸워 승리를 거두어 이곳을 2차 전투지로 부른다. 이때 높은 장수가 지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원수산”이며 산의 동쪽 중턱에는 수백년 동안 지내오고 있는 원수산제가 해마다 십일월 초하루 자시(子時)를 기하여 지내고 있다.
각지명유래
조선말엽부터 연기군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여기에 있는 금병산(金甁山)이 수려(秀麗)하므로 수산(秀山)이라 부르다가 수산(水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국사리?대천리를 병합하여 수산리(水山里)라 부르게 되었다.
'수산'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대천(臺川)이라고도 한다. 강진이씨(李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 곱고 깨끗하여 단단한 토지 위에 튼튼한 인물(人物)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태천이라 부른다.
'수산'동남쪽 둔덕에 있는 마을이다. 국사봉(國士峰) 아래가 되는데 순흥안씨(順興安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둔덕(屯德)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둔더기라 부르며 '둔덕''국사봉''국사리(國士里)?라고도 한다.
'둔더기'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있는 금병산(金甁山)이 수려하여 수산(秀山)이라 부른다 하는데 변하여 수산(水山)이라 부른다.
조선 태종(太宗)때에는 공주(公州)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公州郡) 삼기면의 지역이었다. 이 지대 앞을 흐르는 '금강의 여울이 길다'해서 '긴여울''진탄(眞灘)''진의(眞儀)?라 불려 왔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창동(倉洞)''덕성동''가정리''성전리''송현리'와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 '복룡리'를 병합하여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어 진의리(眞儀里)가 되었다.
구리(舊里)에 있는 장군봉(將軍峰)이 마치 장군들이 대좌하고 원수가 출진(出陣)하는 형상이라 해서 진탄이라 하였다. 진탄(陣灘)이 곧 '진여울'과 통하는데 '진여울'이란 여울이 길다는 뜻에서 금강변(錦江邊)의 진여울이라 부른다.
진여울 옆에 있는 마을이다. 창동(倉洞), 모창골 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창말'이라 부른다.
진여울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백동(白洞)또는, 백야동(白也洞)이라고도 부르는데 '희여울'이란데서 연유한 지명(地名)이며, 지금은 변해서 '흰여울'이라 부른다.
약수터로 통하는 찬샘이 하나 있으며, 그 샘물이 피부병과 속병에 효력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이 이 샘물에 찾아온다.
'진여울'동쪽에 있는 마을로 철종(哲宗)때의 학자 전재(全齊) 임헌회(任憲晦)가 꿈을 꾸는데 꿈에 갈매기떼가 별 밭에 서있는 것을 보고 이 마을을 성전이라고 지었다 한다.
부하를 통솔하는 형상의 바위로 고려 충렬왕 때 연기대첩시 장군이 이곳에 올라 지휘했다고 한다.
조선 태종(太宗)때에는 공주(公州)로 합쳐지기도 했었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삼기면의 지역이었었다. 지대가 낮은 산등성이에 있으므로 일찍부터 개화(開化)한 지역이다.낮은 산등성이에 있다 해서 '밀마루''종촌(宗村)'이라 부르다가 '장터'로 통칭하기도 했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종촌리(宗村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었다. '밀마루'가 종촌(宗村)이라 부름은 종(宗)은'밀종', 촌(村)은 '마루촌'이란 이치에서 그리된 것이라 한다. ‘장대(場垈)'라고도 부른다. 전에는 '도리미'라 불렀다.
'밀마루'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외딴 산에 있는데 이 곳에 도학군자(道學君子)의 묘지(墓地)가 있고, 선비가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다 하여 '도산(道山)''도림(道林)'또는 '도리미'라 부른다. '도리미'란 편안한 마을의 속칭인데 방우간도림(放牛干桃林)의 평화촌(平和村)이란 뜻도 된다.
'뽕나무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토지가 비옥해서 논 한 마지기에 벼가 석 섬씩 난다 하는데 삼대군수가 나온 마을이라 해서 '셋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샛골?이라 부르게 되었다.'화옥동(禾玉洞)''옥동(玉洞)''싯골'이라고도 부른다.
이초려(李草廬)선생이 옻이 옮아 고통을 겪다가 옻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기를 지나다가 잡간 쉬게 되어 마침 곁에 있는 샘물을 떠서 세수를 하고 물을 마셨더니 병이 완쾌되어 유명하게 되었다. 옻병을 고친 우물이 있다 해서 옥정(玉井)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촌리에서 지내는 사당제다. 조선말엽에 이곳을 지나던 황씨(黃氏) 한 사람이 아주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그 후 세상을 떠났다.그 후 황씨(黃氏)들의 제자들이 스승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는 뜻에서 사당에 재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던 것이 이 곳 사당제(祠堂祭)의 처음이라 하는데 이 곳에 재물을 차려 놓고 정성을 드리면 복(福)을 받는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당제를 지낼 때 모여든다. 사당제는 일제 말에 소멸되었다.
마을에서 서쪽의 골이다. 현재 골프장이 들어섰는데 골이 길어서 거지가 이곳에 왔다가 골은 깊고 집이 보이지 않아 울고 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십리고랑이라고도 부른다.
조선말기인 1895년에 전의군이 신설되어 원성리는 전의군 대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원당과 삼성당의 이름을 따서 원성리라 하고 전의면에 편입되었다. 원성리는 풍수(風水)로 보아 용의 형국을 한 대나무(竹)의 뿌리처럼 생겼다 하는데 청룡(靑龍)의 모양으로 마디가 고르게 되어 있어 대뿌리(竹根)라 하여 끈기 있는 선비의 안식처로 통하는 지역이다.
대뿌리 앞에 있는 정문으로 조백련(趙百連)의 아내 열녀 경주김씨와 효자 조명빈(趙命彬), 조수빈(趙秀彬)의 정문을 한데 모아 세 칸을 세우고 효열문이라 한다.
마을뒷산이 성을 둘러쌓은 것 같다하여 고성산 이라 부른다.
뒤산의 모양이 노루처럼 생겼다하여 '노루목'이라 부른다. 옛날 포수들이 여기에서 노루를 잡으면 천벌을 받는다 하여 사냥을 하지 못한 구역으로 노루가 많이 살았다.
원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청룡꼬리가 대나무의 뿌리처럼 마디지고 길게 뻗어 있다 하여'대허리','죽근(竹根)'이라고도 한다.
삼성당 위쪽에 있는 마을로 파평윤씨 들이 많이 살았다. 옛날엔 제당이었던 곳이라 원당이라 부르며 현재는 군부대가 들어와 마을이 없어졌다.
옛날 어느 스님이 바랭이를 짊어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곳의 형국을 보고 세 번 보고 갔다하여 삼성당이라 부르고 양택(良宅)으로는 좋은 지형으로 인정하고 있다.
옛 면사무소 앞의 들을 말하고 구한국시대에 이곳에 감옥이 있었다 한다.
남면 연기리에서 월산리(月山里)를 돌아가다 보면, 산기슭 약(約) 5리(里) 정도에 연(連)한 곳을 화석소(花碩沼)라 부른다. 봄에는 꽃을 보고, 여름에는 녹음을,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설송(雪松)이 가경(佳景)을 이루는 여기는 더구나 한암(恨岩)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일품(一品)이라는 풍류인들의 말이다. 시객(詩客)들이 작시(作詩)하는데 벼룻물이 마를 새가 없다 해서 화석소(花碩沼)라 부른다.
연기리 서부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 조선 때에 이 곳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동헌터가 있는 마을이므로 '위사터'라 부른다.
연기리 일부에 위치한 마을이다. 예전부터 고을원이 여기에 있을 때 관청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서부(西部)라 부른다.
연기리(燕岐里) 동부(東部)에 위치(位置)한 마을이다. 이 곳에 향교(鄕校)가 옮겨와서 지여 짐에 따라'교촌', 즉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교촌'이라 부른다.
연기리(燕岐里)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고려 때에는 보통리(洑通里)에 읍(邑)이 있었으나, 조선초엽에 읍(邑)을 연기에 환도하여 연기현(燕岐縣)이라 하였으며, '환재골'은 그 당시 나라의 한재 창고가 있다하여 '환재골'이라 하였다.환재(換財)란 옛날 춘궁기에 나라의 양곡을 백성이 빌려서 봄의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가 가을 추수기에 상환하는 제도를 '환재(換財)'라고 말한다.
연기 1리 서부(西部)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금은 교촌(校村)으로 향교가 이주하였지만 예전에는 향교가 있었다 하여 '구향교말'이라 부른다. 조선중엽(朝鮮中葉)에 이 곳의 현감(縣監) 박현감(朴縣監)이 자기(自己)의 선영(先塋)을 여기에 묘(墓)로 모시기 위해 향교를 다른 곳으로 이사시켰다.
연기리 북쪽에 있는 고개다. 조선 때에는 병기창고(兵器倉庫)가 있었던 곳으로 상당히 중요하게 간직했던 고개다.
연기리에 있는 연기현 객사가 있었던 곳이다.
연기리 서쪽에 있는 연기현 동헌의 터로 현재 느티나무가 무성하게 서 있어서 옛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아사터 서쪽에 있는 길로 옥(獄)이 있어서 붙여졌지만 지금은 없다.
일제시대 때까지 장이 섰으나, 1950년대 없어졌다.
옥거리가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 얼음을 보관했던 곳이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公州郡) 장원면(長元面)의 지역으로서 원래 여기에는 산과 계곡(溪谷)에 소나무가 많았고 서원(書院)이 즐비하게 많아서 송원리(松院里)라 하였다.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공주군 장기면에 편입(編入)되었다가 서기 1973년 7월 1일에 연기군 남면(南面)에 편입되었다.
'원촌'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큰 소나무가 많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송계동(松溪洞), 송계(松溪)라 부른다.
골말이라고도 하며, 송계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느티나무, 정려가 있는 곳이다.
효(孝)마을이라고도 불렀다.'머레'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금호서원(錦湖書院)의 터가 있다 하여 '원터'라 부르며 '새터''원촌(院村)'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조선시대 때 전라도 사람들이 한양(漢陽)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다가 서원(書院)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여기가 한양이냐고 물을 정도로 서원이 많이 있다 하여 '원촌(院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터에 있는 광해군 때 명나라를 위하여 출전하였다가 전사한 유지걸(柳智傑)의 충신정문이다. 후에 공주시 의당면 송학리로 옮겼다.
'송대'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있다 해서 '대소골'이라 부른다.
'대소골'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이 곳엔 암자(庵子)가 있었다.여기 있는 암자(庵子)에서 불공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마을이다. 많은 자식을 얻어 나가는 '암자(庵子)'가 있다 해서 '만자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만자골''만자동(滿子洞)'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머레라고 부르다가 후에 원호(遠湖)라 불렀다. 송원리(松院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수원박씨(水原朴氏)와 유씨(柳氏)가 많이 살고 있다.'원터'에서 멀리 떨어져 금강(錦江)가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이 마치 먼 곳에 보이는 호수(湖水)가의 마을이라 해서 원호(遠湖)라 부르며, '머레'라고도 부른다.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옻, 피부병 등과 특히 미친 사람이 이 샘물을 먹고 나았다고 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현(燕岐縣)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남면(南面)의 원암리(元岩里),학천리,월룡리,내산리,평촌리와 그리고 공주군(公州郡)의 이웃마을의 일부(一部)를 병합하여 양화부곡(良化部曲)의 이름을 따서 양화리(陽化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었다.
예전 이곳에 '앵청이'라는 아가씨가 주막을 하고 있었는데, 뭇 사내들이 이 곳에서 쉬어가곤 하다가 나루터 이름도 그 아가씨 이름을 따서 '앵청이나루'라고 부르게 되었다.앵청이 나루는 강 건너 반곡과 연결되어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앵청이라는 처녀가 우연히 알게 된 새우젖 장사 총각과 만나 백년가약을 약속하였는데 그 총각이 새우젖을 가지러 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갔다가 약속된 날짜에 돌아오지 않자 그곳에 주막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매일같이 기다렸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여인은 남자를 기다리다 뭇 사내의 유혹을 모두 물리치고 처녀로 늙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갈 수 있는 세 갈래의 길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화리와 진의리를 통털어 이르는 마을 지명이다.
세거리 서쪽마을로 현재 숭모각이 있는 곳이다. 고려 때 전서공 임난수의 은거지이며 예전에 정자가 있던 곳이라 정자동이라 부른다. 30여호가 살고 있다.
전월산에 있는 바위이다. 이곳에 정착한 고려장군 임난수가 매일 이곳에 올라 고려조정을 생각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세거리 아래편에 있는 마을이다. 가라지(강아지풀)가 많았으며 지형(地形)이 학(鶴)의 형국(形局)이라 해서 '가학이'라 부른다.
세거리 바깥편에 있는 마을이다. '굴말''구을촌(仇乙村)''곡촌(谷村)''바깥세거리''외삼(外三)'이라고도 부른다. 상고시대에는 청류부곡(淸流部曲)이 있었다.
전월산 정상부에 있는 우물로 용천(龍泉) 또는 영천(靈泉)이라 부른다.
남면 양화리, 진의리에 있는 산이다.
양화리에 있는 은행나무를 압각(鴨脚)이라고도 부른다.이 고목(古木)은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에 심어진 나무로 고려충신 전서공 임난수(林蘭秀)가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지절(不事二君之節)로 이곳에 은거하면서 집 주변에 은행나무 2그루와 백자나무 1그루를 심은 것인데 백자나무는 일제시대에 고사(枯死)하고 은행나무 2 그루만 살아서 오늘에 전하고 있다.
양화리 북쪽에 있는 꽃나무를 임흥(林興)의 회화나무라고 말한다.
양화리(陽化里) 월용곡 뒤편에 있었던 소(沼)를 열녀소(烈女沼)라 한다.인조(仁祖) 병자호란 때 생원(生員) 임상(林尙)의 처(妻)인 한산이씨(韓山李氏)가 난리 속에 참살소(慘殺沼)한 곳이라 해서 열녀소(烈女沼)라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公州郡) 삼기면(三岐面)인 지역으로서 마을이 소나무가 무성할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마을 한 가운데에 못이 있었고 그 못 안에 섬이 있었는데, 그 섬에 우거진 소나무가 풍류여서 여기를 '송담(松潭)'이라 불렀다.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노은리''나성리'의 일부(一部)를 병합하여 송담리(松潭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南面)에 편입(編入)되었다.연못을 '방죽'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도랑으로 경지개량 되었다.
'송담리(松潭里)'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마을 뒤에 묘한 산이 있으며, 고려말엽에 이 곳을 지나던 임포장군(林圃將軍)이 말하기를 '여기 지형(地形)은 갈만형(葛蔓形)이라 깊은 갈대밭이 장차 변해서 곡식을 생산하는 들이 될 것'이라 하여 갈미(葛米)라 부르게 되었다. '갈산(葛山)'이라고도 부르며 부안임씨(扶安林氏)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또 다른 설은, 산들이 칡넝쿨처럼 뻗어 있다 해서 갈산(葛山)이라 부른다 한다.소갈산(小葛山), 대갈산(大葛山) 등으로 부른다.
조선 고종때 효자 임명즙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로, 순종 때 세웠다. 표석(標石)골, 윗뜸, 골뜸, 궝말뜸, 송담 뒷산, 서원재, 북망산, 방죽산, 방아마루, 생마루, 됨선뜰, 무수밭들, 산곳배미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군내면의 지역(地域)이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보통리(洑通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南面)에 편입(編入)되었다.일제시대 때는 각 마을마다 '연성(燕城)부락'이라고 불렀다.'연기(燕岐)'와 '연남(燕南) 초등학교'의 연(燕)자는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물이 헛 데로 빠졌다고 해서 붙여졌다. 현 비행장 자리이며, 비행장은 1970년대에 생겼고 현재 헬기훈련장으로 활용 중이다.
백제 때 큰절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 금불상 2개가 출토되었다.1개는 일본으로 반출되려다가 되돌아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이곳은 50여 년 전까지 연기군수 주관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었다.
진주정(鄭)씨의 묘가 있는 곳으로, 옛날 정씨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머슴살이를 하다 어머니가 죽자, 가마니에 싸서 달밤에 이곳에 묘를 썼다. 이때,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쫓겨오면서 살려달라고 하자 산발을 시켜 묘 앞에서 울게 하여 위기를 모면케 해 주었다. 목숨을 건진 여자와 정씨는 부부가 되어 그 후, 부자가 되었다.
예전에 연기리가 큰 고을이었을 때 이 곳은 큰 장터였었다. 물건 중에서 제일 잘 팔리는 것이'새우젓'이었다 하는데 그 새우젓을 싣고 배가 금강(錦江)따라 올라와선 여기에서 거래가 되었다.
문화류(柳)씨 비석으로 위에 다리가 세워져 절반 이상 덮여져 있는 상태이다.
'잣띠'재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연기리로부터 보(洑)로 통해 본다 해서 '보통이'라 부른다 한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제주고씨(濟州高氏), 진주강씨(晋州姜氏)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두메에선 큰 마을이다.
'성산'북쪽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백자목(柏子木, 잣나무)이 있었다. 잣띠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듯 하다.
'방축(方丑)'은 조선말엽 '도선'이란 도사(道師)가 이 곳을 지나다가 마을을 본 즉, 마을의 지형(地形)이 방에 든 소같이 생겼다 하여 '방축골''방축'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제(百濟)때는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남면의 일부(一部)였었다. 서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방축리(方丑里)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에 속했다. 그전에는 '관대마을'이라 불렀다. 도선국사가 황우(黃牛)가 외양간에 갇혀 있는 형국이라 하여 '방축리'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방죽이 있었으므로 방축이라고도 한다.
도래마을이라고도 하고, 방축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지형(地形)이 황소의 도래(뚜레 ; 고삐의 일종)처럼 생겼다 하여 이 마을을 '도램말'이라 부른다. '근곡(根谷)'이라고도 부른다.
임헌회(林憲晦)외에 6인을 모신 서원이다.
'눌왕리'군자(君子)라는 옛말에서 유래(由來)된 지역(地域)으로 '군자림(君子林)'이라고 부르던 지역이기도 하다. 눌왕산(訥旺山)아래 위치(位置)하므로 '느랑이'라 불렸던 곳이다. 본래(本來) 연기군 남면(南面)의 일부(一部)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눌왕리(訥旺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南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청룡'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에 기묘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그 바위를 ?왕바위?라 부르며 여기 마을도 그 바위 따라 '왕바위'라 부른다. '왕암(旺岩)'이라고도 부른다.
'눌왕리'에 있는 마을이다. 영조(英祖) 4년(1728년)때 신천영(申天永)이 난(亂)을 일으켰을 때 연기의 원님이 이곳에서 피난하였다. '원곡(元谷)'이라고도 부르며 강진이씨(李氏)들이 많이 산다. 큰느랑이(元旺)라고도 불렀다.
'새터말'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마주보는 왕자봉(旺子峯)이 이 마을에서 바라보면 왕자(王子)가 스승 앞에서 글을 배우는 형상(形象)이라 하여 '문암(文岩)'이라 부르며, 또한 '무남골'이라고도 부른다.
'느랑이'동쪽에 있는 고개를 '느랑이'고개라 부른다. 조치원에서 대전(大田)과 공주(公州)로 통하는 고개인데, 고려 충렬왕 17년(1291년)에 한희유(韓希愈), 김흔(金?)등이 원(元)나라 장수 설도간(薛?干), 나만알대왕(那蠻?大王)과 함께 '원수봉'과 정좌산(正左山)에 웅거하였다가 크게 침입하는 거란군사들을 맞아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이기고 이 고개에서 또 크게 이겨 공주(公州) 고마나루까지 추격 섬멸하였는데, 적의 시체가 30여리에 널려 있었다. '의랑티(儀浪峙)'라고도 부르는 고려 때의 격전지이다.
백제시대 웅진성을 방어하는 성(城)이 있다 해서, 나성(羅城), 나리재라 부르다가 서기 1913년에는 공주군 요당면에 속했고, 서기 1914년 행정구혁 개혁 때 이웃 구역(區域)을 병합하여 나성리(羅城里)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옛날에는 나루재라 불렀는데 그 후, 성(城)이 있어 나성(羅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독락정(獨樂亭)위에 있는 성이 토성(土城)이어서 나리재와 토성을 합쳐 '나성'이라고 불렀다. 수로가 발달했고 나루터에서 나리재로 변형되었다고 본다.
나성(羅城)있는 전(前) 기호서사(岐湖書社)의 터로서, 서하(西河) 임춘(林春), 전서(典書) 임난수(林蘭秀), 부사(府使) 임목(林穆), 위의장군(威毅將軍) 임흥(林興) 등 삼대(三代)의 네 위를 배양하였던 곳이다. 고종(高宗)5년(1868)에 헐리고 현재 임씨가묘(林氏家廟)가 되었다.
나성(羅城)앞 금강(錦江)에 있는 나루터로, 나성(羅城)에서 금남면 대평리(大平里)로 건너가는 나루터를 '나성나루터'라 부른다.
조선 초에 양양부사(襄陽府使) 임목(林穆)이 이 곳에 독락정을 짓고 한가히 남은 해를 보냈으며 경제(敬齊) 남수문(南秀文)이 글을 짓고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시(詩)를 지어 찬양한 정자(亭子)다.
연기군 남면의 지역(地域)으로서 '높은 정이''고정(高亭'이라 불렀는데, 서기(西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고정리(高亭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었다.
'향교말''아랫말'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학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어서 많은 인재(人才)를 배출함으로 '향교말'이라 부른다.
고정리 뒤에 있는 산이다. 고려말엽에 어지러운 국운(國運)을 바로 잡기 위해 당시 3정승(三政承)이 국론(國論)을 협의(協議)한 산이라 하여 국사봉(國士峰)이라 했다.
조선말엽에 곽정승(郭政丞)이 이 곳에 선친(先親)의 묘(墓)를 마련하고 집에 돌아갈 때 그 때 따라오던 스님이 말하기를 지금 곽정승이 끼고 있는 은가락지를 부처님께 시주하면 자손대대(子孫代代)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것이라 하여 그 은가락지를 스님께 시주를 하고 선친(先親)의 묘(墓)를 여기에 썼더니, 그 후 자손(子孫)이 후하게 영화를 누렸다 하는데, 그래서 이 고개를 '은(銀)고개''시주고개'라 부른다.
'높은 정이'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 모양이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형국(形局)이라 한다. 예전에 범이 산 속에 있는 마을에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므로 포수(砲手)들이 몰려 들어와선 여기에서 여장을 하고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하는데 그래서 범을 지키는 곳'범지기'또는 호준(虎?)이라 부른다.
'반월터'라고도 하며 마을 형태가 반달 같은 지형이다.
높은정이에 있으며 이성계(태조), 정조, 태종 3왕의 친필이 모셔져 있다하여 어서각이라 했다.
'높은 정이'남서쪽 산 속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소학(巢鶴)이란 학자가 있어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여기로부터 많은 인재(人才)가 배출되었다 하는데 그 학자와 연유한 마을이라 해서 '소학당'을 약(略)해서 '소학'이라고 부르다가 변해서 '소지(小地)'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남면(南面)에 속하였으며 산이 칡넝쿨처럼 엉키어 얼기설기 서려있고 여기에서 물이 귀해 구름을 봐도 물을 보는 것처럼 반가워해야 할 지역이라 하여 갈운(葛雲)이라 하였다.
'갈운리'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연기읍에서 5리(里)가 되는데 여기에는 부안임씨(扶安林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갈운리'위쪽에 있다하여 '윗갈운리'라 부르며 '갈운리' 아래에 있는 마을을 '아랫갈운리'라 부른다.
개발터 뒷산에 모정(茅亭)이 있었는데 6.25 때 없어졌다. 이 모정은 마을 서당(書堂)으로도 사용되었다. 일제시대 때 이 모정에서 임정철 씨가 서당 훈장을 하였다.
'원수봉'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검새울''검사'라고도 부른다. 고려말 김씨(金氏) 한 사람이 이 곳을 지나다가 산세(山勢)를 본 즉, 산에 금줄기가 뻗었다 하여 이 곳 지명(地名)을 금사(金砂)라 지었다. 문사(文士) 임낙용(林樂龍)의 호(號)도 금사(金砂)라 한다.
금사(金砂) 서쪽 길가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때 '금사역'이 있었다 하여 그때부터 금사역(金砂驛)이라 부르던 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400여년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음지말 할머니 미륵'과 '양지말 할아범 미륵'이 마을입구에 서 있다. 6.25 때부터 '미륵계'를 해왔으며 논일을 해서 쌀을 걷어 정월 열나흘에 해마다 정성껏 미령님제를 지내는데 재앙을 막고 풍년농사와 주민이 평탄대로 한다는 믿음으로 주민 전원에게 소지를 올리며 소원성취하기를 빌어오고 있다. 그 덕인지 오늘날까지 마을은 무탈하게 지내고 있으며 6.25동란 때 마을의 젊은이 6~7명이 참전했을 때,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주민들은 미륵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제를 올리는 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으며, 제관들은 살생을 하지 말며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말고 부정에 관한 모든 일을 삼가야 한다.
갈운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앞산의 모양이 복호형(伏虎形)이고, 이 마을은 '엎드린 개발'과 같다 한다.
자지동(紫芝洞)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 근처엔 자지(紫芝)란 약초가 있어서 약초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자지턱골'이라 부른다.
[금남면]
금남면은 연기군에서 가장 큰 면으로 금강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금남면(錦南面)이라 하였다. 모든 문명이 강을 끼고 일어나듯 금강 중류에 위치한 금남면에도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 예로 금강 상류 지역인 청원군 비루봉 동굴과 하류인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금남면 지역에도 고인돌과 선돌 등 청동기시대 유적들이 많이 산재하여 있다. 박산에서 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2기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1기는 도로공사 중 없어지고 다른 한기는 농부가 나무아래 옮겨 놓아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봉기리에는 3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마을 동쪽인 허무니 고개 너머에 금강을 바라보고 1기가 있고 마을 서쪽으로는 새여울 고개에 2기가 있다.
장재리 마을에도 3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1기는 도로공사 중 파손하려는 것을 안승주 교수가 공주대학교로 이전하였고 2기는 마을에 남아 있다. 신촌리 금남 초등학교 남쪽에 1기의 고인돌이 있고, 석교리에는 마을 서북쪽에 2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용포리에도 가동 넘어가는 고개 입구에 1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처럼 연기군 내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산재해 있는 금남면 일대는 연기군에서 사람이 살았던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다.
금남지역은 현재 연기군에 속해있지만 과거 조선시대까지는 공주지역이었다. 백제 때에는 소비포현(所比浦縣) 이라 불렀고,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왕도를 옮긴 후에는 웅진(熊津)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공주의 명탄면(鳴?面), 양야리면(陽也里面)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연기군에 편입시키면서 금남면이라 불리었다.
산 너머 달전리에는 문절사(文節祠)가 있다. 문절사는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삼족이 화를 당한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성삼문(成三問)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 성삼문 선생의 영정을 모시게된 것은 이곳에 창녕성씨가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성삼문의 당숙인 성희가 귀양살이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가자 세조는 ‘꼴도 보기 싫다’며 한양에서 300리 밖에 나가 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린 성희는 처음에 신탄진쪽에 자리 잡았다가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남면 양화리에 터를 잡으려 했으나 그곳에 이미 터를 잡고있던 부안임씨에게 밀려 현재의 달전리에 터를 잡고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수백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성삼문 선생의 사당은 본래 그가 태어난 홍성에서 외손 박호가 봉양하다 1903년 고종의 어명으로 족후손인 성주영이 봉사손으로 결정되면서 연기군 금남면에 사우를 건립하였고, 1967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로 ‘문절사(文節祠)’라고 써주었다. 문절사에서 가까운 대박리에는 초정약수가 있다. 초정(椒井)이란 후추처럼 톡 쏘는 맛을 내는 약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탄산수라고도 한다. 이 물은 위장병과 피부병, 당뇨, 등 속병을 낫게 하는 신비의 물이다.
또 영대리에는 밤절이라는 절터가 있는데, 옛날 이곳에는 청룡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 주변에는 밤나무가 많았지만 신기하게 밤은 열지 않아 그저 화초처럼 자랐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밤나무에 주렁주렁 가지가 휘어지도록 밤이 열렸다. 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떨어진 밤을 주워 몇 가마를 쌓아 놓았는데, 그 해 이괄이 난을 일으켜 이를 피해 공주로 가던 인조 임금이 이 절에 머무르게 되었다. 왕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밥을 가져오라 했지만 절에는 쌀이 없어 대신 수확한 밤을 찌고 굽고 하여 진상하니 임금과 신하가 모두 맛있게 먹고 또 몇 가마니를 가져갔다. 훗날 이괄의 난이 평정되고 인조는 이곳에서 얻어먹은 밤이 생각나 이 절을 밤절[栗寺]이라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금남면>각지명유래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연기군에 속하여 금강의 남쪽에 있는 곳이라 금남면이라 했다. 용포리는 계룡산의 용(龍)자와 금강포구의 포(浦)자로 이루어져 금남면에 속하였고, 1946년 큰 장마로 인하여 대평리(大平里)가 강으로 변하자 그 주민들이 이곳 용포리로 옮겨오는 동시에 시장도 함께 옮겨져서 그대로 대평장(大平場)이란 시장이 서고, 금남면의 행정 중심마을이다.
금남지서에서 동쪽마을을 '쑥티'라고 한다. 오랜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이 왕명을 어겼다하여 마을을 모두 불태워 버렸는데 그 불탄 자리에 이상하게도 쑥이 나오기 시작하여 쑥밭을 이루었다 한다. 쑥이 많은 곳이라 하여'쑥티'라고 부른다. 쑥애(艾)자를 써서 애티라고도 한다.
예전에 탑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쑥티에서 남쪽마을을 지칭한다.
쑥티의 동쪽 산을 지칭한다. 예전에 이곳에 성이 있었는데 토성과 석축이 혼합하여 조성되었다. 성재 안에는 강기호 씨가 자리 잡아 살고 있으며, 집을 지을 때 그곳 성재에서 나온 돌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
현 대평감리교회와 버스 정류장 사이를 구렁목이라 한다. 아홉 마리의 용이 있는 형국의 명당을 지칭하며 좁은 길목에 사람이 많이 다닌다는 뜻도 있다.
용포 3리 삼거리 중심지에 큰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를 잉어바위라 하는데 예전에 금강이 이곳으로 흘러서 가동 앞으로 해서 성덕으로 흘러 내려갈 때 이곳 바위에는 잉어가 많이 살았다. 바위의 생김새 또한 잉어처럼 생겼지만 워낙 많은 잉어를 이 바위에서 잡았기 때문에 이 바위를 잉어바위라 한다. 현재 금남면 장터마을이다.
뒷골에서 동남쪽으로 신촌가는 골을 꽃절골 즉, 꼬초골이라 한다. 이곳 너머에 '꽃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포리에서 서쪽 산을 가리킨다. 강씨들의 강당(제실)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에는 소 멍에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것을 아름답다는 뜻으로 바꾸어서 부르게 됐다. 또한 참나무가 많아서 참나무가 자(字)를 썼다고도 한다. 200여년 전에는 한 채의 집이 있었는데 현재는 많은 집이 들어섰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었다. 1910년 감성(柑城)에 있는 시장을 이곳으로 옮기어 대평장이라 했고 1914년에 이웃 '삼거리' '하거리' '고사동'을 병합하여 대평리라 했다. 1946년 큰 장마로 동네 360호가 모두 유실되어 강으로 변하고 그 이재민이 거의 용포리로 옮기는 동시에 시장도 그 쪽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새로 지은 집 10여호가 있고 대평리는 폐리(廢里)가 되어 행정 구역상 용포리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구대평리라 부른다. (지적상에는 대평리로 존재)
매년 겪는 물난리지만 1946년 6월에 많은 양(800㎜)의 비가 내렸다. 금강제방이 위험수위까지 강물이 불자, 금남 소방대원들은 경보 싸이렌을 울리며 집집마다 돌면서 모두 피신하기를 권했다. 제방을 통하여 용포리, 이암리와 강당산으로 사람들이 피하자 둑이 터져 마을과 대평들이 삽시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대평리 사람들은 강당산에 올라가 가재도구와 집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조선초엽 태종(太宗)에 의한 태자(太子)의 난(亂)때 신천강씨인 신덕왕후 강씨(康氏)의 일족이 화를 입게 되어 이곳으로 피난하여 숨어 살았는데 그후 송시열(宋時烈) 등 많은 학자들의 탄원에 의해 관원(官員)의 등용(登用)이 허락되었다. 그때 영조조(英祖朝)의 후손인 강씨부자(康氏父子)가 거듭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어 뒷산을 '중광사(重光寺)'란 절을 세우게 하였다 한다. 중광사를 세운 산의 산세(山勢)가 마치 주발을 엎어 놓은 형국이라 하여 '바리미 발(鉢)'과 같은 산이 있다 해서 '발산리(鉢山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발산리의 옛이름이다. 마을서편의 산이 주발을 엎어놓은 형국이라 하여 '바리미' 또는 '발산(鉢山)'이라 부른다 한다. 가운데 있는 마을을 '가운데 바리미'라고 부른다.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산(山)이 마치 성(城)처럼 둘러싸여 있고 소나무가 밀집되어 있다. 감나무가 마치 성을 쌓은 것처럼 빙 둘러 쌓였다고 해서 감성(柑城)이라 불렀으며 백제때에 이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었다. 현재 산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백로 수 천마리가 늘 안식하고 있으며,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1910년 전(前)까지 장이 크게 섰던 지역이다. '장대리'라고도 불렀으며 대평리가 생기기 이전에는 금남에서 제일 컸던 장터이다. 일본사람이 들어와 대평리를 만들고 시장을 만들어 감성에 서던 2일, 7일장이 대평리로 서서히 이전하면서 이제는 장터였던 터만 남았다.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동' 과 공주군 반포면의 '용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두만리(斗滿里)'라 했다. 두만리라 한 것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대(地帶)라 해서 옛날엔 두메안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두만리의 원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 부락이 생길 때 처음 생겼고 두만리의 산골 마을에선 가장 처음 있었던 마을이라 해서 '원두만'이라 부른다. 제주고씨(濟州高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두만리는 부자가 많이 산다는 뜻으로 두만(斗滿)이라 쓰며 두뫼(산골)안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었는데 일제시대 두만(斗滿)으로 와전하여 표기했다 한다.
'장터거리'라고도 하는데, 두만과 감성 경계에 있는 들이다. (감성과 두만에 반씩 들어가 있음)
감성리와 두만리의 경계에 있는 논이다. 작은 거친목과 큰 거친목은 남북방향으로 길게 걸쳐져(이어져) 있다. 거친목 고개 너머에 천수답이란 논이 있었는데 삼남의 원님이 이곳을 지나(거쳐) 이·취임해오면 임금님은 그 논에 모를 심었느냐고 물어 보았다. 모를 심었으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들었다. 즉, 천수답으로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아보는 것이었다.
조선말엽에 공주군 반포면(公州郡 反浦面)으로 변경되었다. 용(龍)이 하늘로 올라간 큰 연못이 있다하여 '비룡소(飛龍沼)'라 하였고 일제시대에 '용담(龍潭)'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에 맹사성이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하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비룡소'라 지었다 한다.
용담 1리 동쪽마을을 한옥골이라 한다. 예전에는 이곳 마을의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고을원님까지 살았다.
마을 북쪽 밭기슭에는 마을 입구라는 표시로 백산(白山)이라 쓰인 1m50cm 크기의 돌이 세워져 있는데 한옥골에도 이와 같은 바위가 있었으나 현재는 가자골에만 남아 있다.
성재 밑에 있는 큰 바위로 공주군 반포면에서 금남면 용담리로 들어오거나 용담리에서 반포면으로 지날 때면 으레 이곳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치 대문을 들어서고 나가는 듯 하다 하여 문바위라 부른다.
1998년도부터 지내기 시작한 이 제는 유성구, 공주시, 연기군이 돌아가면서 매년 3월 1일 제를 지낸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의 명당이 있다해서 풍수설(風水說)에 따라 '동고지' 둥그지'는 '황용(黃龍)'이라 불렀다 한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때 연소동·서북리·원각리·대지리를 병합하여 황용리(黃龍里)라고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동네뒷산(마을서쪽)이 용처럼 굽이굽이 내려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리가 원황용이고 2리가 황용이다.
마을 남쪽에 있는 들이다. 전하는 말로는 어덕미들 옆에 큰 둥구나무가 있어 거기에 어린아이 시체를 매달아 짐승(새)등이 먹게 하였다. 옛날에는 돌림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아 죽은 아이의 병이, 새가 쪼아 먹고 멀리 날아가면 없어진다고 믿었으며 이것을 '덕대'라 했다.
산의 모양이 닭 같다하여?닭미?라고 부른다. 또한 '서북'이라고도 부르는데 부락 서산이 고형(鼓形)이어서 고(鼓)자를 복(卜)자로 해서 서복(西卜)이라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에 속했었다. 동네가 10리가 넘도록 길다고 하여 영대(永垈)라고 불렀으며 길이 빛날 터라하여 영대리(永垈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연기군 금남면에 속했다.
양둔대는 영대국교에서 남쪽으로 오르면 두 갈래 길이 있다. 두 길에서 밤절쪽이 음지라 하여 음둔대라 하고, 그 건너편 마을이 양둔대라고 한다.고려때 거란의 군사들이 침입하여, 진을 쳤던 곳이다. 군사들이 진을 쳤던 자리라하여 '둔대(屯垈)'라 부르며 '우려울'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영대리에서 가장 큰 마을에 영대초등학교가 있다. 마을 옆의 시냇물이 여울진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하여 '우려울'이라 부른다. '명탄' '명촌'이라고도 부르는데 전에 공주군 명탄면의 소재지였기 때문이다.
검배 위쪽에 바위가 여러개 있는데 모두 검은 색이다. 바위가 검다 해서 '검바위'라 부르며 검은 바위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하여 '검배' '검암'이라고도 부른다.
옛날부터 삼을 많이 심었다하여 처음엔 '삼밭골'이라 부르다가 '삼마곡' '신대'라고 바꿔 부르다가 '삼박골'이라 고정되었다.
삼박골 위에 있는 마을로, 이 곳에서 계자(芥子)가 많이 나왔다하여 '계량이'라 불렀는데 '지랭이' '계랭이'라고도 부른다.
영대초교에서 남쪽으로 오르면 가장 끝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형국이 풍수에서 청룡자리이며 청룡이 누운 형국이라 한다. 여섯 채의 민가가 있다.
음달둔디 안쪽 금병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옛날에 절이 있었다. 또 산에 밤나무가 무성하나 열매가 열지 않다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로 갈 때 이곳에서 묵었는데 당시 탕기만큼 큰 밤이 열어 진상했더니 인조가 맛있게 먹고 밤절이라 하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 절 이름은 청림사(靑林寺)였다.
조선시대 많은 풍류객(風流客)들이 쉬어갔던 곳이다. 산막(山幕)이 많았었다 한다. 마을 앞산이 반달같이 생겼다하여 '달밭' 또는 '월전(月田)'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달전리(達田里)'라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鳴灘面)의 지역이었다.
달전리의 마을이 12개마을로 형성됐다는 뜻이다. 12달전은 원달전, 닭재, 성동, 지루고개, 원당이, 흥개터골, 망골, 신기, 광중터, 안산, 욧골, 샴넘어를 말한다.
마을회관 있는 곳을 지칭한다. 마을 뒷산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금계포란)의 명당자리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밭 위쪽에 있는 마을을 성동(聖洞)이라 부른다. 예전에 성대감이 이 곳에서 살았는데 성인(聖人)처럼 성품이 고와서 성동이라 불렀다. '승동'이라고도 한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鳴灘面)에 속해 있었다가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박리(大朴里)라고 하여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이 곳 산의 모양이 함박꽃과 같다하여 '함박금이' 즉, 큰 마을이란 뜻에서 '대박'이라 부르다가 '대박리(大朴里)'라 부르게 되었다.
'초정골' '초정장터' '신촌'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북쪽에 있으며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초정이 있어 음력 8월이 되면 물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줄을 섰다고 한다.
'초정골' 냇가에 있는 새 우물을 초정약수터라 부른다. 물맛이 쏴아 하고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하여 물을 마시러 오는 사람이 많다.
마을 뒷산을 지칭한다. 좌측은 꽃산, 우측은 샴방들이라 부르는데 이 산을 대박산 혹은 함박산이라 한다.
뒷산에 박참판(朴參判)의 묘소(墓所)가 있어서 박산(朴山)이라 불리워왔고 또한 산모양이 작약과 같이 생겼다하여 '작약골'이라 불렀었다. 1914년 행정 개편에 따라 회덕군 구즉면의'신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박산리(朴山里)'라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현 박산리에서 동쪽에 있는 마을을 장동이라 하는데 이곳 사람들이 살다가 지금의 박산리로 한집 이사 오더니 현재는 장동에 인가가 없고 박산리에 현 마을이 형성되어 번창했다.
예전에 이 곳을 공주군 탄천면 작약동이라 했다. 작약은 함박꽃을 지칭하는 말로 마을 뒷산의 형국이 함박꽃이 필려고 몽우리진 형국에서 나온 말이다.
마을앞의 들판을 지칭한다.
조선말엽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하였다가 이곳엔 '추리산'이 있으므로 한자(漢字)로 옮겨 '추산'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축산'이 되고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축산리'라 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예전에는 독수리 축자를 써서'축산'이라 하다가, 일제시대부터 소축자를 써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리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축산 건너 구석에 있는 마을이다. 구룡정주형(九龍淨珠形)의 명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국이다.
축산리에서 금천리 금강대도 입구 남쪽 산중턱에 있는 마을이다. 법성암과 용바위가 있다.
바깥 봉천에서 동쪽으로 골을 따라가면 대광사 못 미쳐에 서너 채의 민가가 있다. 이곳을 안봉천이라 한다. 황새미 아래쪽에 마을이 위치한다 해서 봉천(鳳川)이라 했다.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다가 서기 1914년에 청사동·학봉리를 병합하여 '금천리(金川里)'라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 지대는 소가 누운 형국(形局)의 명당이라 하여 옛날엔 소내, 우계(牛系)라 부르던 곳인데 변하여 '쇠내' '금천(金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천리의 옛 이름이다.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의 명당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 금천 2리 중방 부근에서 일제시대때 금을 캤다고 하여 '소내가' '쇠내' '금천(金川)'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금천리 남쪽에서 남서쪽까지 뻗어있는 산을 금병산이라 하는데 금으로 만든 병풍이 쳐져있는 형국이다. 금병산 앞산을 고깔봉이라 하기도 하고 소가 끄는 극징이라 하기도 한다. 금병산은 써레를 상징한다. 대전이 한밭이며 큰밭을 소가 극징이로 갈고 써레질 한다는 형국이다.
금병산 앞에 뾰족한 산이 꼬갈처럼 생겼다 하여 고깔봉이라 하고, 일명 '극징이'라고도 한다. 금강대도가 이 곳에 터를 잡기 이전에는 '메봉재'라고 불렀다.
원금천리에 있는 금강대도 도주 사택의 동쪽에 대형 비석이 있고 그 앞의 우물에서 물이 나오며 그 앞에 송아지 형국의 바위가 젖을 먹는 형국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우복동'이라하여 몇 채의 민가가 있었는데 금강대도의 대형 비를 세우면서 이주하였다. 원래는 앞의 향나무에서 물이 나오고 그 물을 이곳으로 나오게 했다.
조선말엽까지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었다. 영재라는 고개가 있으므로 '영재' 또는 '영티'라 부르다가 '영치리(永峙里)'가 되었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영치리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절이 있었다하여 '부처골'이라 부른다. '불곡(佛谷)'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5층석탑이 있다.
부처골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양야리면 이었으나 명탄면과 횡사지점(橫斜地鮎)에 있었으므로 사양(斜陽)이라 불렀다 한다.'사양' '사양골'이라 불렀으며 일제시대에는 '사양(砂陽)'이라고도 불렀다.
원래는 길옆에 집이 띄엄띄엄 있어서 도독동(道獨洞)이라고 불렀으며 길가에 외롭게 산다는 뜻이다. 물이 남쪽 골짜기에서 흘러오므로 남곡(南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公州郡 鳴灘面)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백정 3, 4호가 살았는데 그들을 가르켜 '남산백정'이라 불렀었다.
동네 남쪽을 가리킨다. 현재 열여섯 채의 민가가 있다. 예전에 마을 입구에 양야리면의 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명탄면이라 했다.
뭇중골이라 하기 전에는 수락동이라 했는데 그 이유는 물이 떨어지는 폭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중들이 살았다하여 뭇중골로 변하였다.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을 지칭한다. 금남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이 산을 중심으로 남곡, 황룡, 금천, 영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동네에서 서남쪽을 가리키며 이곳을 넘으면 신촌과 영티리가 나온다. 주위에 와골, 부처당, 바랑골이 있고 고수미재를 회심재라고도 한다. 와골에는 옹기 굽던 가마터가 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초오개동' 과 '봉기리' 일부를 병합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의 연화정수형(蓮花淨水形)의 명당(名堂)이 있는 부용봉(芙蓉峰)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화정수형(蓮花淨水形)의 명당(名堂)이 있고 해발 222m의 산이다. 부용리 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서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의 명당이라 해서 명산(名山)으로 꼽힌다. 부용봉 주위에 묘를 쓸 때는 비석이라든지 석물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연꽃의 형국인 부용봉이 가라 앉는다하여 전해오는 풍습이다.
부용리의 옛 이름이다. 이곳은 산이 깊어서 약초가 많이 난다. 특히 다섯가지 약초가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부용 1리의 옛 이름이다. 부강과 부용리를 잇는 나루를 새오개나루라고 한다.
봉기리에서 부용 1리로 들어오는 곳을 지칭한다. 옛날 파리를 쫓던 대감이 이곳에 와서 놓치자, 자신의 행동이 허무하다면서 한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부용 2리 앞의 나루를 용댕이나루라고 불렀다. 누런 소가 강을 건너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음력 정월 14일에 어두울 때 제를 지낸다.
금남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6km 지점에 있는 곳이 석교리(石橋里)이다. 옛날에 돌로 놓은 다리가 있다하여?돌다리?라 하였는데 변하여 '석교리(石橋里)'라 하였다. 백제(百濟)때는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공주목에 속해 있다가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 지역이었다. 현재는 금남면 석교리라고 부른다.
돌다리 앞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새말'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뒤편(서남쪽)에 있는 산이다. 이 산의 형국 때문에 무인이 많이 배출된다.
돼지가 드러누워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형국으로 돼지가 젖먹이는 자리를 금석초등학교(돼지새끼들이 노는 곳)로 보고 있다.
옛날 스님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동네를 살펴보니 마을사람들에게 이 동네는 탑을 쌓아야 인물도 나오고 잘 될거라 이야기를 해 그때 동네 곳곳에 3개의 돌탑을 쌓아 놓았으며 음력 정월 보름날 탑제를 지낸다.
마을에 2개의 고인돌이 있다. 남방식 고인돌이며 성혈이 있다. 고인돌은 땅속에 묻혀 있으며 위의 돌 끝부분만 보인다.
조선말엽에는 공주목 명탄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반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기리'라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이 지역은 뒷산에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의 명당(名當)이 있다하여 풍수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며 또한 여기에 연유해서 지명을 봉기(鳳起)라 부르기도 하였고 앞에 새여울이 있으므로 새여울이라 불렀으며 변하여 '사려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제시대에는 공주군 명탄면 전탄리였다가 금남면으로 편입되면서 '봉기리'라 하였고 '전탄리'라는 지명은 여울이 있어 물살이 화살같이 빠르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봉기리는 계룡산 가장 끝에 있는 맥(하맥)으로 지관들이 봉황귀소형 명당터가 있다하나 아직 찾지 못했다. 봉기리는 지세가 앞산은 높고 뒷산은 낮아서 자손들이 이곳을 나가야 잘산다는 말이 있다.
금남면 반곡리, 석삼리, 장재리, 석교리 경계에 있는 산을 괴화산 이라 부른다. 산의 높이가 200m되는데, 꼭대기에 느티나무가 있다. 이 산에 괘등형(掛燈形)의 명당이 있어서 삼거리에서 바라보면 환하게 불이 켜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한다.
세워져 있는데 넘어지면 넘어진 쪽의 처녀들이 미친다.
뒷산으로 성이 있어 성재라 하며 산에 올라가면 그 흔적으로 돌무더기들이 곳곳에 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의 지역으로서 남면의 전월산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지형이 소반과 같으므로 '반곡(盤谷)'이라 불러 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반곡리라 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반봉포란형(班鳳抱卵形)의 명당(名當)이 있다.
장승배기 옆에 있으며 강가에 있는 논을 지칭한다.
공주군 명탄면의 지역으로서 오랫동안 선비들이 많이 머무르다 간 곳이기도 하다. 이곳엔 돌로 만든 장승이 있어 석삼동(石三洞)으로 부르다가 석삼리(石三里)가 되었다 한다. 연기군 금남면에 속해있다.
석삼의 원 마을을 '원석삼'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 해서 '원석삼'이라 부른다.
안골 밖에 있는 마을이다. 돌로 만든 장승이 셋 있다하여 '돌삼골' '석삼(石三)'이라 부른다.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여기에 서 있는 돌장승은 각각 다르다. 서쪽의 것은 흰 바위, 남쪽의 장승은 수리바위, 뒷산에 있는 장승은 말 바위라 부른다.
1리와 2리 마을 입구에 세 개의 길쭉한 바위가 있었고 그 위에 가로의 돌을 각각 올려놓았는데 이 바위를 장승바위라고 했다. 그런데 위에 올려놓은 바위 때문에 2리에서는 처녀가 집을 나가고 동네가 좋지 않다고 해서 2리에서 밤에 몰래 돌을 내려놓으면 1리에서 다시 쌓고 또 내려놓으면 다시 쌓고 해서 이 마을 농지정리 할 때 2리에서 바위를 몰래 묻어버렸다.
옛날 이곳에 홍판사 라는 벼슬을 한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자기 눈에 보이는 지역 모두를 자기 소유로 했으며 그래서 그 골짜기를 자기것 이라고 하고 이름을 홍골이라 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 지역으로서 뒷산에 장절(長寺)이 있어서 '장재골' 또는 '장재'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산리와 석삼동 일부를 병합해서 장재리라 하고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동네가 길쭉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마을은 장수하는 마을이다.
마을의 남쪽 산을 지칭하며 예전에 큰절이 있어서 장사곡(長寺谷)이라고도 했다. 현재는 산으로 되어 있으며 터만 전한다.
조선말엽까지 공주군 이었다. 마을 앞의 금강이 여울져 흐르므로 호여울이라 했고, 조선시대 창고가 있어 '동창'이라 부르기도 하다가 1914년 행정 개편 때 호탄리(湖灘里)라 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호(壺)자를 쓰는 것은 마을입구의 형태가 병의 목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탄(灘)자는 예전에 금강이 마을입구로 흘렀는데 여울져 흘렀다하여 '호여울' '호탄'이 되었다 한다.
마을에 사창이 있다해서 사창(社倉)이라 불렀다 한다. 대평리의 동쪽에 있는 창고라 하여 동창이라 불렀으며 일제시대에는 이곳 사창을 정리하여 임시 면사무소로 쓰기도 했다.
예전부터 이곳의 지명을 '호여울' '우래올'이라 했다. 고려 충렬왕 17년 몽고합단이 연기 정좌산으로 쳐 내려왔을 때 삼 장군(한희유, 김흔, 인후)에게 패하여 공주로 도망갔는데 다시 몽고로 가려고 강을 건너기 위해 얕은 곳을 찾는 도중 이곳이 여울져 흐르므로 건너 양화리 부근으로 가다가 원수산에서 진을 치고 있던 삼 장군에 패하여 섬멸되었다.
현재 금호중학교 있는 곳을 안터 라 한다. 예전에 이곳에 처음 안씨들이 정착하여 살았다하여 안터 라고 한다.
마을 들어가는 입구가 둘이다. 그중 우측의 큰길가에 돌탑이 세워져 있고 이것을 할아버지 탑이라 한다.
좌측 입구에 돌탑이 있는데 그곳을 할머니 탑이라 한다.
옛날부터 마을이 있었던 곳이 아니고 조선시대부터 마을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옛날은 이곳에 꽃이 많이 피는 지대였고 꽃절 이라 불리 우는 절이 있었다. 새로 마을이 생긴 구역이라 하여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화사(花寺)라 한다. 마을에서 동남쪽 가장 깊은 골에 있다. 예전에 꽃이 많은 절이 있다하여 꽃절 이라 부르다가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을 비우고 현재에는 절터만 남아 있으며 주위에 기와편이 발견된다.
중광사(발산), 동산절(용포), 꽃절(신촌) 세 절을 가리켜 삼절이라 부른다.
마을에서 동남쪽 웃말 동네 앞에 고양이 바위가 있었다. 고양이 바위 옆에 촛대바위 2개가 있었는데 이것이 남근석이다. 현재에는 고양이 바위와 촛대바위(남근석) 모두 없어졌다.
현 금남초교 자리를 지칭하며 이곳이 매화처럼 낮에는 환하게 피었다가 밤에는 지는 형국이라 한다.
현 마을 동쪽 금호중학교로 가는 공동묘지를 지칭한다. 비단천금이란 죽은 사람을 많이 묻어 억 금이 묻힌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촌리 뒤에 있는 산을 비학산 이라 부른다. 산의 모양이 학이 날아오르는 형국이라 하는데 여기에 명약(名藥)이 있다하여 지관(地官)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다.
조선말엽에는 반포면(反浦面)에 속했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도동' 과 '명암리'두 마을을 합쳐서 '도암리'(道岩里)라 하여 1973년 7월 1일 대통령(大統領) 제6542호에 의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에 구멍이 있어서 소리를 지르면 울려 나오는 바위 아래 마을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독골의 서쪽에 있는 골을 이야기한다. 예전에 이곳에 정자가 있었고 그 정자를 '모정'이라 불렀다. 그곳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60여 년 전에 없어졌다. 금남국교가 생기면서 이곳에서 배우던 학동들이 금남국교로 입학했다.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반포면(反浦面)에 속해 있다가 1914년에 행정 개편 때 '성덕리(聖德里)'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옛날부터 덕을 쌓아서 많은 사람을 깨우치게 했는데 그러한 사람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서 동쪽에 있는 산이 소머리형국이라 '두우봉'이라 부르는데 두우봉 밑에 예전에 큰 호수가 있었다 한다. 이 호수를 지칭하여 동쪽에 있는 호수, 즉 동호리(東湖里)라 한다.
동호리 부근의 마을을 성덕이라 부르는데 옛날부터 덕을 쌓아서 남을 깨우치는 사람이 살며 그 덕을 이곳까지 번지게 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성덕이라 부르고 마을 앞의 들판을 '성덕들'이라고 부르며 덕을 쌓는 사람들이 먹는 곡식을 키우는 들이라 그렇게 되었다.
마을 서쪽에 위치하며 말이 금강을 향해 물을 먹고 있는 형태라 하여 갈마(馬)라고 하였는데 그곳의 고개를 가마고개라고 한다.
마을입구 우측에 있는 산을 청룡산 이라 하고 그곳에 있는 재를 청룡재라 부른다. 마을에서 바라보면 풍수지리상 좌청룡의 자리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말엽엔 공주군 반포면에 속하였다. 이 곳 지형이 산신령(호랑이)이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영곡(靈谷)'이라 지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곡리'가 되었다가 1972년 7월 1일 대통령에 의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이 서 있다.
군사를 소집하여 싸움터에 나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랑이가 앉아있는 형국이다. 예전에 돌림병이 많이 돌아 병이 든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영곡 1리에는 둥구나무가 네 개 있었다. 그것을 일컬어 일명 '상다리'라고 하는 데 그 이유는 영곡리가 금남에서 지대가 가장 높고 높은 지대에 수령이 몇 백년 되는 둥구나무가 네 개가 있어 상을 놓은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형국을 보고 예전에 이곳으로 부자들이 많이 몰락하여 결국은 빈털터리로 마을을 뜨곤 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부러진 상다리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성덕교의 남쪽에 있는 바위로 예전엔 이곳의 물깊이가 6자나 되었다 한다. 또한 금강이 이곳에까지 닿아 이 소에서부터 육지의 시작이란 뜻도 있다. 여섯 개의 큰 바위로 이루어졌다.
한양에서 살던 사람이 여기에 살았다 해서 한양공이라 불렀다.
한림정에 있는 고개로 넘어가면 공주가 나온다.
[전의면]
전의면은 백제때 구지현(仇知縣)이라 불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금지현(金池縣)이라 고쳐 부르다가 고려 때부터 전의(全義)라 불렀다. 전의라 불리게 된 것은 백제시대 이곳에서 전씨(全氏)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전의 다방리 비암사에서 발견된 석불비상에 새겨진 ‘전씨’라는 명문과 이 일대의 지명이 전의(全義)·전동(全東)이라 한 것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조선시대인 1414년에는 연기현과 전의현이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라 했다가 1416년에 각각 환원하여 다시 전의현(全義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전의군이 되어 7개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기군에 흡수되어 현재는 연기군 전의면이 되었다.
전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비암사(碑岩寺)이다. 과거 비암사는 “뱀절”이라 불렀다. 옛날에 비암사에는 비구니(여승)들이 기거하였는데, 어느 날인가 웬 낯선 남자가 해가 질 무렵에 나타나 밤새도록 탑돌이를 하기에 여승은 법당에서 눈치만 살피다 다음날 아침에 남자가 사라진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그 후 이 남자는 계속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밤마다 나타나 탑돌이를 하였고, 궁금해진 스님은 남자에게 물을 떠주면서 그 연유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직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때가 아니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님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남자는 탑돌이를 마치고 사찰 동쪽 산 정상으로 올라가 산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바위 밑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남자가 굴에 들어가자 궁금해진 스님도 따라 들어갔는데, 스님은 커다란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구렁이가 하는 말이 “내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늘에 기도를 하니 비암사 삼층석탑에서 백일동안 탑돌이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탑돌이를 하였다. 백일동안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는데, 하루를 남겨 놓고 너에게 들켜버렸으니 이제 다시는 사람이 될 수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더란다. 스님은 자신의 잘못으로 구렁이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곳에서 구렁이의 수발을 들며 일생을 보냈다. 이와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오기에 비암사는 뱀절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비암사의 원 뜻은 사뭇 다르다. 1959년 발견된 불상이 마치 비석처럼 생겼고 이 불상을 비상(碑像)이라 부르는데, 비상이 있는 절이란 뜻으로 비암사(碑岩寺)라 불렀던 것이다. 이 비상이 제작된 연도는 673년이다. 비상에는 「전씨(全氏)가 주동이 되어 계유년(673년)에 백제의 역대 국왕과 대신, 발원자의 7세 부모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어 시납하고 매년 4월 15일에 제를 올렸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근거로 비암사에서는 매년 4월 15일 백제대제를 지내고 있다. 비암사는 연기군 전의면에 있는 사찰이지만 백제권에서는 유일하게 백제왕들에게 제를 지내는 사찰로 나라에서 관리해야할 중요한 사찰이다.
전의면에는 산마다 산성이 쌓여져 있다. 운주산성(雲住山城)이라 부르는 산성은 원이름이 고산산성(高山山城)이다. 전의의 형국이 솥모양으로 생겼는데, 증산·고산·운주산이 솥의 발처럼 전의를 받치고 있다. 증산은 전의 북쪽에 있고 고산은 전의동쪽에 있으며 지금의 운주산을 가리킨다. 원래의 운주산은 전의남쪽 이성, 금이성, 비암사가 있는 산을 지칭하며 이성은 전의 이씨 시조인 이도(李棹)가 이곳에서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도의 본래 이름은 이치(李齒)였다. 그는 대대로 공주 금강변에서 살면서 나룻배로 금강을 건네주는 일을 하는 집안에서 자랐다. 고려 초기에 왕건이 견훤과 싸움을 하기 위하여 금강변까지 내려왔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있을 때 이치가 어려움을 잊고 건네주어 승리하였으므로 왕건은 이치에게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전성군(全城君)에 봉하니, 이때부터 이도(李棹)라 하고 전의이씨 시조가 되었다.
전의면 각지명유래
읍내리는 전의면의 중심마을로 1895년 전의군이 선설 될 때 읍내면 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전의군이 연기군에 편입되어 전의면이 되었으며 장터, 북동네, 서동네, 남동네, 덕현을 병합하여 읍내리라 정하고 전의면에 편입하였다. 전의면의 중심으로 행정, 금융, 치안, 교육 등 각 영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경부선 철도와 1번 국도가 마을 중심을 관통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옛날 전의군의 토호로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전의군 곳곳에 땅이 많이 있었고 집도 중앙지(북부)에 크게 위치하고 있었으나 그 아들 이진사대에 와서 조금씩 몰락하여 현재는 모두 떠나버렸다
전의초등학교 자리가 객사터이다. 조선세조 10년(1464) 2월 30일에 왕이 속리산 구경하고 온양온천으로 가는 길에 여기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으며,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공주 쌍수정으로 잠시 피난 갔다가 이괄의 난이 평정되매 한양으로 올라갈 때 여기에서 자고 갔다는 객사이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드나드는 많은 군인들이 묵고 가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마을 평안과 풍년을 기약하기 위하여 춘추 중월(仲月) 상술일(上戌日)에 제사를 드리는 풍습에 따라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사직단은 옛날에 전의현 동헌 서쪽 지금의 읍내리 남쪽산 중턱에 있었고 최근까지 기우제를 지냈었다.
북숲나무 밑에 옛날에는 나무로 장승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콘크리트로 장승을 만들어 세웠으며 제사는 10여년 전부터 중지하였다.
전의현 청사 서북쪽에 99칸짜리 구옥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신대옹이 살다가 전의초등학교 관사로 사용했으며 1994년도에 헐어 현재는 밭으로 변하였다.
동교리 교동에서 현재의 향교자리로 이동하여 왔다.
옛날 이곳에 향교가 있었다 하여 동쪽마을과 구교동의 이름을 따서 동촌리(東村里)라 부르다가 동교리(東校里)가 되었다.
동네 북쪽의 산을 말한다.
마을 북쪽 비듬나무 있는 곳에 옛날 돌무더기가 있어 정월 14일날 제사를 지냈는데 도로 확장시 없어졌다.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 예전에 향교가 있었다하여 동교리라고 한다. 동교 1리 동촌, 동교 2리 도랏말, 하교동, 동교 3리 상교동, 동교 4리 교동의 4개 리로 나뉘어져 있다.
조선시대 1895년에 군을 신설할 때 전의군의 대서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천서'와 '관정동'의 이름을 따서 서정리라 하고 전의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서쪽에 내가 흐르는데 서부천이라 하고 서쪽의 냇가라 하여 천서라고 하며 동력, 곤말, 감바위 등이 있다.
일명 '시루성' 또는 '증산성'이라 하며 마을동쪽에 있다.
비룡천 아래가 되는데 처음엔 '감실' 또는 '강실'이라 하다가 마을 앞에 느티나무가 여러주 서 있으므로 감정골 또는 관정골로 변하여 부른다.
서정리와 유천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가 249m이고 봉우리가 뾰족하여 비룡산천형(飛龍山天形)의 명당이 있는 산으로 옛날에는 중계소가 설치되었다가 개인에게 불하하여 현재는 도서 연수원이 들어있다. 옛날 박정희 전대통령이 헬리콥터로 이곳에 온 적이 있어 용이 올라간 것을 박 전대통령에 비유하기도 한다.
마을에서 서쪽의 골이다. 현재 골프장이 들어섰는데 골이 길어서 거지가 이곳에 왔다가 골은 깊고 집이 보이지 않아 울고 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십리고랑이라고도 부른다.
조선말기인 1895년에 전의군이 신설되어 원성리는 전의군 대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원당과 삼성당의 이름을 따서 원성리라 하고 전의면에 편입되었다. 원성리는 풍수(風水)로 보아 용의 형국을 한 대나무(竹)의 뿌리처럼 생겼다 하는데 청룡(靑龍)의 모양으로 마디가 고르게 되어 있어 대뿌리(竹根)라 하여 끈기 있는 선비의 안식처로 통하는 지역이다.
대뿌리 앞에 있는 정문으로 조백련(趙百連)의 아내 열녀 경주김씨와 효자 조명빈(趙命彬), 조수빈(趙秀彬)의 정문을 한데 모아 세 칸을 세우고 효열문이라 한다.
마을뒷산이 성을 둘러쌓은 것 같다하여 고성산 이라 부른다.
뒤산의 모양이 노루처럼 생겼다하여 '노루목'이라 부른다. 옛날 포수들이 여기에서 노루를 잡으면 천벌을 받는다 하여 사냥을 하지 못한 구역으로 노루가 많이 살았다.
원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청룡꼬리가 대나무의 뿌리처럼 마디지고 길게 뻗어 있다 하여'대허리','죽근(竹根)'이라고도 한다.
삼성당 위쪽에 있는 마을로 파평윤씨 들이 많이 살았다. 옛날엔 제당이었던 곳이라 원당이라 부르며 현재는 군부대가 들어와 마을이 없어졌다.
옛날 어느 스님이 바랭이를 짊어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곳의 형국을 보고 세 번 보고 갔다하여 삼성당이라 부르고 양택(良宅)으로는 좋은 지형으로 인정하고 있다.
옛 면사무소 앞의 들을 말하고 구한국시대에 이곳에 감옥이 있었다 한다.
삼성부락에서 고성부락으로 가는 뒷산을 말한다.
6?25때 포탄껍질로 만든 종으로 동네모임이 있을 때나 마을의 급한 일을 알릴 때 사용하는 종이며, 죽근에 있다.
1895년 전의군이 신설될 때에는 대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사리','생송리'를 병합하여 송사리로 하였다가 1929년 새롭게 흥하는 지역이라 하여 신흥리라 고쳐 부르고 전의면에 편성되었다.
모래 많은 마을이라 하여 사토(沙土)라고 부르며 신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너멍골에 있는 바위로 이성산과 금이성에서 장수들이 바위를 가지고 공놀이를 하다가 던진 것이 이곳에 내려앉아서 바위로 변한 것을 장수바위라 말한다.
옛날 큰 소나무가 하나 유창하게 서 있었다 하여 생송이라 불렀다.
마을서쪽 가장 높은 봉우리를 말하고 그 밑에 복치형(꿩이 엎드려있는 형국)의 명당자리가 있다 한다.
마을 앞 내 건너 산 정상에 돌로 쌓은 산성이 있는데 전의이씨의 시조인 이도(李悼)가 살아서 이성산성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생송 마을과 이성산 정상간에 긴 줄을 매달아 놓고 서로 당기어 의사소통을 했다 한다.
생송 마을 초입에 있는 돌로 음력 10월이면 동네사람들이 떡을 해놓고 소원을 빌었다.
절골고개에 있었으며 벚나무와 돌무더기였는데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사방공사를 한다며 헐었다.
1895년 전의군이 신설될 때 대서면 지역이었다. 버드나무가 냇가에 많이 서 있어 오류(五柳)라 하였고 물이 귀한 탓으로 오행설(五行說)에 의하여 유천리라 하였으며, 1914년에 각 리를 정리할 때 '오류동'과 '다운천리'의 이름을 따서 유천리라 하였다. 유천 1리는 오류골(외오류)과 양안이로 구성되었다.
전의이씨 시조의 묘이며 양안이 마을남동쪽에 있고 복호형(伏虎形)의 명당이라 하며 그 앞 철길 옆에 개바위가 있고 마을건너에는 창날이 있으나, 현재는 민석아파트 공사시 상당부분 없어졌다.
이태사묘 북쪽 양안리에 1996년도 6월 23일 준공식을 가졌고 총 3100평에 사업비 15억을 들여 위패를 모신 경원사(景遠祠)에는 내사문, 숭의당, 운서제, 예동제, 일월당,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오류, 중오류, 외오류로 나누는데 현재 상오류,중오류는 군 탄약창이 들어서면서 모두 떠나갔으므로 1991년에 마을이 없어졌다.
오류골 동쪽에 있는 골로 옛날에는 하씨들이 살았으며 개울 건너에 있다.
오류골 들어오는 입구이며 골의 형국이 개목 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무더기가 열 두개 있었고 이곳에 금으로 만든 닭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전해왔는데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제시에 철로 개설할 때, 복선 공사할 때, 1991년 군부대가 들어올 때 이 개바위를 없애기로 설계하였는데 전의이씨들의 강력한 항의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개울에 대추나무가 있고 여러 작은 내가 마을 앞에서 넓어졌다 하여 어천이라 부른다.
뒷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그지울?남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에서 흐르는 작은 시내가 마을 앞으로 흘러와서 꺽이어 서쪽으로 흘러가는 위쪽에 있으며 옛날에는 다운사 라는 절의 이름을 빌어 다운리라고 하였다가 다우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전동면]
전동면은 전의의 동쪽에 있는 면이란 뜻이다. 과거 전동면은 전의지역이었으므로 원삼국시대에는 마한(馬韓)의 54개국 중 하나였고 백제시대에는 구지현(九知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지현(金池縣)이라 하여 대록군(大麓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전의현(全義縣)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1414년 연기현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1416년 다시 전의현이 되었으며 1895년 전의현이 전의군이 되었을 때 전의군 동쪽 지역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전동면이 되었다. 1995년 3월 1일부로 동면의 갈산리를 청원군에 떼어주고 청원군의 심중리를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하여 청원군과의 경계가 동림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어졌다.
동림산은 동림산성(東林山城)과 송천사지(松泉寺址), 백자가마터 등 유적이 많은 곳이다. 전동면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은 이웃마을과 경계를 이루다 보니 그 산의 주인이 자신있게 ‘우리 땅이다’ 라고 주장하기가 곤란할 때가 있다. 운주산이 그 대표적인 예다. 지적 상 엄연히 산 정상의 2/3가 전동지역인데, 1/3을 차지하고 있는 전의면이 운주산과 관련된 모든 행사를 주관해 오고 있다. 그 예로 정초에 하는 해맞이 행사도 전의면 주관이다. 금이성이 있는 금이산(원이름 : 운주산) 또한 산정상을 기준으로 전의, 전동이 나누어져있고 남쪽에 있는 오봉산도 조치원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 산에는 산성이 쌓여져 있어 고대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쟁터였음을 알 수 있다. 청원군에서는 병마산과 동림산에서 강감찬 장군이 군대를 훈련하였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동림산의 작은 암자에서는 강감찬 장군을 산신으로 모시고 있으니 우연이 아닌 듯 하다.
운주산 남쪽의 청송리에는 배일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안동권씨가 집성을 이루어 살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권주(權柱)가 의병 300명 군량 450석을 지원하려고 금산싸움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안동권씨들은 일본을 배척한다는 뜻으로 배일(排日)이라 부르다 정조 때의 학자 권복(權復)은 자신의 호를 이원(李遠)이라 짓고 마을 입구에 이원동천(李遠洞天)이라 새겨 세웠는데 원 뜻은 ‘일본을 배척하는 마을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 비로 인하여 일제시대 일본인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다.
전동면에는 개미고개가 있다. 개미고개는 운주산의 남쪽 줄기로 전의에서 조치원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고 그 아래에는 경부선 철로가 놓여져 있으며 고개 아래로는 터널이다. 6.25때 이곳에서 미군과 북괴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죽은 시체가 개미떼 같이 쌓여 있었다 한다.
1950년 7월 9일 벌어진 전투에서 당시 이곳을 지키던 사람은 미24사단 병력들이다. 이들은 길가에 호를 파고 개미처럼 밀려오는 북괴군과 전투를 하는데 처음에는 안개가 끼어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서 북괴군이 쏜 총에 대응하여 발포하였다가 위치가 탄로나 많은 피해를 보았고, 북괴군은 우회하여 앞뒤에서 공격하는가 하면 주무기가 소련제 탱크로 밀고 왔다. 미군의 주무기는 공중에서 공격하는 제트기였는데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아군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져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조치원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몇 일 뒤 미군은 한강 다음으로 금강선을 제2 방어지역으로 설정하고 다리를 폭파한 후 방어를 하였으나 조명탄을 조정하는 병사가 실수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쏘자 이때를 놓칠세라 북괴군이 금강을 건너는 바람에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전동면 각지명유래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地域)인데, 이 곳에 예전부터 세 그루의 노송(老松)이 이곳 사람들의 신앙(信仰) 대상(對像)으로 모셨으므로 '청송(靑松)'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청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編入)되었다
전동면과 서면(西面) 경계에 있는 산이다. 곧 까치성 위에 있는 산성인데 높이가 383m이며 돌로 쌓은 성(城)이 견고하여 철옹성과 같다 한다. 단단한 산성(山城)이라 하여 '쇠성'이라 부른다.
운주산 남쪽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학자 권주(權柱)가 임진왜란 때 의병 300명, 군량(軍糧) 450입(?)으로 금산(錦山) 싸움에 이르렀다가 별세(別世)하였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일본(日本)을 배척하는 의미(意味)에서 배일(排日)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지었다 한다. 뒷산이 높고 골이 아늑하므로 '배일'을 '이곡(梨谷)'이라 하였는데 정조(正祖)때 학자 권복(權復)이 살면서 호(號)를 이일(梨逸)이라 고쳤다. '이곡(梨谷)'즉, 배나무가 많은 골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권복은 일본을 배이(梨)로 비유하여 일본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이일(梨逸)이라 하였다.
'아래배일' 입구에 있는 비(碑)를 이일동천비(梨逸洞天碑)라 부른다. 정조(正祖)때 학자 권복(權復)의 호(號)를 이일(梨逸)이라 하고 마을 앞에 비(碑)를 세웠다.
'배일'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엔 소나무 정자가 세 그루 있다 해서 '삼송정(三松亭)'이라 부른다.
'삼송정' 남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다. 전의이씨(全義李氏)와 거창(居昌)신씨가 살면서 서로 의좋게 모이는 도회청을 두었으므로 도청(都廳)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 쉬운 글자를 취하여 도청(都靑)으로 변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남면(南面)의 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동막리.상남포리.하남포리.청산리를 병합하여 '청산'과 '남포'의 이름을 따서 '청람리(靑藍里)'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증미'밑에 있는 마을이다. '증미'라 하던 것이 변하여 '청미'또는'청산(靑山)'이라고 부른다.
'시루봉'꼭대기에 있는 마을이다. 큰 바위가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시루와 같다 하여 '시루바위'라 부르며 '중암?'이라고도 부른다.
'버드나무말'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처음 여기에 마을이 형성(形成)될 때 움막을 짓고 살던 것이 점점 큰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동막, 또는 동막골 이라고도 부른다.
'청산'에서 전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개미기'고개라고 부른다. 고개가 잘룩하여 개미허리와 비슷하다 하여 '개미기'고개라 부른다 한다. '의현(蟻峴)'이라고도 부른다.
청람리 중 제일 윗동네로 이곳에 경주김씨가 동막을 짓고 오랫동안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동막골 이라 한다.
쪽개 라고도 불리우며 큰말, 도라말, 양지말, 버드나무말이 이에 속하며 이곳이 옛날에 뻘이었다 하여 남포라 한다.
연수봉 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동막골 뒷산을 가리킨다. 이 산에는 큰 광산 1개와 작은 광산 1개가 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조선 숙종(肅宗)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선비 한 사람이 만년(晩年)에 그 선영(先塋)을 따라 이 곳에 은거하면서 솔밭부근(附近)에 정자(亭子)를 짓고 소요하였다 하여 송정(松亭)이라 불렀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송동'과 '사정'그리고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송정리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송정리에 있는 마을이다. 소나무가 있는 고개마을이라 해서 '솔재'라 부른다.
연수봉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안터?라고 부른다. 새터 안쪽에 위치하는데 내기(內基)라고도 부른다.
'구리골'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때 사기점이 있었던 곳이다. '사장동(沙場洞)''사정리(沙亭里)'라고도 부른다. '사장골'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사장골'이라 부르고 바깥 편에 있는 마을을 또한 '바깥사장골'이라 부른다.
'송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송곡리 '소골'위쪽에 있다. '상송동(上松洞)''상송곡(上松谷)'이라고도 부른다.
연수봉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예전에 연수암(延壽岩)이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절텃골'이라 부른다.
'상소골'앞 냇가에 있던 독송정의 터로, 지금은 예전의 독송정이 없어졌지만 숙종(肅宗)때 좌의정(左議政) 조사석(趙師錫)이 만년(晩年)에 그 선영(先塋)을 따라 이 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짓고 소요하였다 하는데 그 정자(亭子)가 독송정(獨松亭)이라고 한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원래가 백제 때부터 솔이 울창했고 또한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이 활발했던 송성(松城)'금성(金城)'이 여기에 있어 여기를 '솔티'와 '성곡'의 이름을 따서 송성리(松城里)라 하여 이웃마을을 병합하고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가 되었다.
예전에 이 마을에 한 가구가 살 때 어느 해에 산사태가 나서 집이 흔적도 없이 없어지자 그 곳에 요란스럽게 흐르는 물을 보고, 지나던 한 선비가 말하기를 요곡(물댈 요(堯), 골 곡(谷))이라 말한 것이 그렇게 전해 내려오다가 '요골'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예산이씨(李氏)들이 집을 짓고 많이 살고 있다.
예전 전의군(全義郡)당시 남면을 거쳐 서면으로 가는 길목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주막이 있어서 마을을 '주막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잿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물이 흐르면 뱅글뱅글 돌아 때로는 강바닥까지 보였다 하여 '물도래''무도리'라 부르다가 '무드리'라 부르게 되었다. 물이 뱅글뱅글 돈다해서 수전(水田), 수전리(水田里), 수회(水回), 수회리(水回里)라고도 부른다.
'중말'남서쪽에 있는 고개를 '솔티'라 하고 그 아래 마을도 솔티고개 아래에 있다 해서 솔티라 부른다. 솔티고개는 고개가 길고 험하여서 도둑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솔티'마을은 조선시대 때 사기소가 있었으며 김해김씨(金海金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솔티동'이라고도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보평'안쪽 골짜기에 자리함으로 '속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소골'또는 '송곡(松谷)'이라 불렀다. 1914年 행정구역 개혁시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송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송곡리에 있는 마을로 꽃이 잘 어울려 피는 마을이라 해서 '꽃밭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꽃짝골'이라 부른다.
'보령'안쪽 골짜기에 있으므로 속골, 즉, 산 속에 있는 마을로 '속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소골이라 부른다. 송곡(松谷)이라고도 한다.
'모시티'에서 조치원읍 둥이로 넘어가는 고개를 '모시티'라 부르고, 그 아래 마을을 '모시티'고개 아래에 있다 해서 역시 '모시티'라 부른다.
'하소골'동북쪽 송곡리 산26번지에 있는 낮은 토성(土城)이다. 토성이 아래 위 두 층으로 되어 있는데 삼한(三韓)때의 농성(農城)이다.
'모시티'동쪽에 '모시티'에서 300m거리에 '옥자리터'가 있다. 예전 삼한시대에 농성(農城)인 토성(土城)을 쌓을 때 부역자를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진 옥자리인데, 한 번은 애를 밴 여인을 가두어 두었더니 쌍둥이를 분만하여 그 때부터 옥자리를 옮겼다 한다. 지금은 일명 쌍둥이 자리라 하여 집을 짓지 않고 전답(田畓)으로 사용한다. '쌍둥이 자리'라고도 부른다. 송곡리 38번지에 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마을 앞에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배기''돌꽂이'로 불리우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석곡리'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선돌이 서 있었다 하여 '선돌배기''돌곶이''석곡(石谷)'이라 부른다. 예전에 한 장수가 한 길이 넘는 돌을 지팡이로 짚고 다니다가, 지금의 109번지에 꽂아 놓았는데 그 돌을 선돌이라 부른다. 선돌이 병오년(丙午年) 장마에 넘어져 지금은 그 자취가 없어졌는데 선돌이 있던 마을은 '선돌배기'의 '하석곡'이며, 이 선돌을 주축으로 웃말은'위선돌', 가운데는'중석곡'이라 부른다. '중석곡'은 '온고비골'이라고도 부른다.
'돌꽃이'남서쪽에 있는 산을 '국사봉(國士峰)'이라 부른다. 높이가 267m되는 산인데, 산에 돌산과 청마가 있고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고려 때부터 산봉(山峰)에서 국사에 큰 도움을 주었던 곳이며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다. 또한 서민(庶民)들이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는 제단(祭壇)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돌단과 철마가 있고, 산제당이 있다.
국사봉 동쪽에 있는 산이다.
안말 안쪽의 골짜기로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 사기점골이 되었고 이곳에 사기 굽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태종(太宗)때에 전의현(全義縣)에 속했다가 다음에 전기현(全岐縣)에 속했으며 다시 전의현에 속했었다. 이 지역에는 넓은 들과 큰 보(寶)가 있어서 농사가 잘 된다 하여 '보덕(寶德)'이라 부르는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보평(寶坪)의 '보(寶)'자와 덕소의 '덕(德)'자를 따서 보덕리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속하게 되었다.
보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붓들'이라고도 부르는데, 사실은'붓들'즉, 말해서 보(洑)가 있는 들이라는 뜻이 변해서 '붓들'이라 부른다. 앞들이 넓고 보(洑)가 있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어 붙여진 명칭(名稱)인데, 그래서 보물 같은 들이라 하여 '보평(寶坪)'이라 부른다.
'지프네'위쪽에 있는 마을을 덕소(德沼)라 부른다. 예전에는 냇물이 흘러와서 고여 '덕소'라 부르고 선녀(仙女)들이 노는 신선지(神仙池)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래가 쌓여서 소(沼)는 없어졌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고이는 소(沼)가 있다 해서 이 마을을 '덕소'라 부른다.
연수봉 남동쪽에 300m정도의 계곡(溪谷)이 있는데 이 계곡을 '절터골'이라 부른다. 예전에 연수봉 기슭에 '연수사'란 절이 있었다.
'보평(寶坪)'북쪽 냇가 산기슭에 있는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부른다. 또한 '장군암''석정(石亭)'이라고도 부르는데 큰 바위가 넓은 바위 위에 얹혀 있고 그 밑에 큰 내가 흐르는데 명종 때 학자 박곤(朴坤)이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을 맞아 바위 위에서 이학(理學)을 담론하였던 바위라 한다.
'보평(寶坪)'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깊은 내가 있다 해서 '심천'이라 부른다. 또한 '지프내'라고도 부르는데, 처음은 '깊은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지프내'라 부르게 되었다. 심천(深川)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은 조천(鳥川)으로서 소(沼)가 있었다 한다. 여기는 깨끗한 물이 고여서 선녀(仙女)들이 가끔 하늘에서 내려와 놀고 가는 곳이라 전해 내려왔는데, 지금은 소(沼)자리에 깊은 못은 없어졌으며 그냥 통칭 심천(深川)으로 부르고 있다.
원래 이 지역은 계곡(溪谷)에 풍류(風流)가 있어서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미곡(美谷)'이란 시조(時調)와 학이 있듯이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곳으로 통칭(通稱)되어 왔으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미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구역이었다.
전동면(全東面) 미곡리(美谷里)에 운주산정(雲住山頂)에 있는 산성을 운주산성 이라 부른다. 예전에 전성부사(全城府使)가 있을 때 목민(牧民)을 다스렸다.
'학당이'앞에 있는 비(碑)를 '안렴사유허비'라 부른다. 이 비(碑)는 안렴사(按廉使)였던 김휴의 사적을 기록한 유허비(遺墟碑)다.
'운주산'중턱에 있는 바위를 삼천암(三千岩)이라 부른다. 바위 밑에 크고 깊은 굴이 있어서 목천(木川) 수신(修身)으로 통하였다 하는데 임진왜란때 이 바위에 3,000명이 피난하였다가 왜적이 여기를 지날 때 바위에 숨어있던 3,000명 가운데 어린 아이가 우는 바람에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 발각되어 모두 피살되었다.
'미륵당이'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임진왜란때 이 곳에 피난하였던 수 백명이 왜적에게 피살되어 피가 내를 이루었으므로 피숫골 또는 피수동 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흉하여 '수구동(水口洞)'으로 고쳤다 한다.
'미륵당이'동북쪽 산 속에 있는 마을을 '학당리'라 부른다. 고려말엽 안렴사(按廉使) 김휴가 여기에 살면서 학당을 세우고 후진들을 양성한 마을이라 해서 학당리 또는 학당이 라 부른다.
미륵당이 모퉁이에 있는 미륵으로 남녀 두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 3척(尺) 5촌, 넓이 1척(尺) 8촌이 된다.
조선말엽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엔 갈대가 무성하여 '갈가리'라 불렀었고 임진왜란 때 학자 권주(權柱)가 이 곳에 살면서 갈대의 덕을 입어 무난히 그 왜란(倭亂)을 피한 후 마을을 그가 '노장(蘆長)'이라 하였다 한다.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노장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중로장(中蘆長)'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양지말'이라 부른다. 양지촌(陽地村) 이라고도 한다.
'원지기'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배나무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이목동(梨木洞)이라 부른다. 경주김씨(慶州金氏)가 많이 살고 있다
'원지기'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주겹니'라고도 부르는데, 대나무골 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대나무가 무성했던 마을로 여기에서 나오는 대나무는 나라에서 군기를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하여 상당히 아꼈던 대나무밭 이라 한다. '대나무밭'이 있다 해서 '죽엽리'라 부른다.
노장리(蘆長里)에 '하노장''중노장''상노장'의 세 마을이 있는데 모두가 갈대와 연유한 마을 명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학자인 권주(權柱)가 이 곳에 살면서 왜군(倭軍)이 쳐들어 왔을 때 갈대가 길게 늘어져 무사히 난(亂)을 피할 수 있었다 하여 갈대를 칭찬하기를 '노장(蘆長)'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노장'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마을이 갈대숲 아래 위로 생기면서부터 위쪽은'상노장(上蘆長)'또는 '상로정(上蘆汀)', 아래는 '하노장(下蘆長)', 가운데는 '중노장(中蘆長)'또는'중로정(中蘆汀)'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장(蘆長)'을 '갈가리'라고도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고소상리(古所峠里),서방동(西方洞),대동(垈洞)등을 병합하여 서봉과 만경대의 이름을 따서 봉대리(鳳臺里)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編入)되었다.
'고삿재'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사태말, 대동(垈洞) 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는 사태가 많이 나온 마을이라 하여 '사태말'이라 불렀다.
'고삿재'서북쪽에 있는 마을을 서봉동(棲鳳洞)이라 부른다. 토형(土形)이 봉(鳳)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는데, 예전에 봉(鳳)이 날아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서봉동(棲鳳洞)이라 부른다. 또한 '고삿재'서쪽에 마을이 자리하였다 하여 '서방(西方)골'이라고도 부른다.
봉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전동면에서 천원군(天原郡) 수신면(修身面)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고삿재'라 부르며 이 재는 운주산과 망경대 중간 허리가 잘룩하게 되어 있는 고개다. 이 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해서 '고삿재'라 부른다. '고소티(古所峙)''고소티리(古所峙里)'라고도 부른다.
서봉동(棲鳳洞) 북쪽 산기슭에 있는 터다. 산기슭에 약 3ha가량 되는 평지(平地)가 있는데 예전 조선중엽에 이 곳에서 목축(牧畜)을 많이 하였던 곳이라 하여 '목우장(木牛場)'으로 불리우고 있다.
심중리(深中里)는 본래 청주군 서강외 일하면 지역으로 강외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은 공북리(拱北里), 서는 연기군 전동면 노장리와 접하고 있다. 조선영조 후반 (1750-1776)에는 심천리(深川里)라 불렀으나, 정조13년(1785)경 한때 없어졌다가 헌종때(1895) 다시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10년경 경술국치 직전 상심동(上深洞), 하심동(下深洞), 심남리(深南里), 심서리(深西里), 갈거리(葛巨里), 조광동(早光洞), 태고동(太古洞)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심동과 하심동의 각 일부를 상봉리(上鳳里)로 넘겨주고 미원동(彌院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심중리라 하여 강외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부로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자연부락으로는 갈거리(葛巨里), 불근덕(丹悳), 덕룡굴(德龍堀), 민태절, 사기소(砂器所), 소죽골, 중지프내(中深里), 지프내(深川)로 나뉘어진다.
심중 2리 마을로 연기군 전동면과 청원군 동림리와의 경계지역이다. 예전에는 청원군 강외면 심중 2리였던 것을 1995년 3월 1일 연기군 전동면으로 편입되었으며 민태산 이란 이름은 마을 뒷산 동림산 중턱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이름이 민태절 이라 부른데서 연유했고, 절이 폐사 되면서 절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된 것 같다. 민태절 절터는 크게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었다. 돌축대를 쌓는 곳과 그곳에서 산 정상 쪽에 계단식 건물지가 보이고 동쪽으로 험준한 벽을 오르니 기와편이 무더기로 산재한 건물지가 있었다.
민태절에서 옥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한다. 이곳을 넘어가면 충청북도 옥산면 상동림 마을이 나온다.
마을 뒤 동림산 밑을 지칭한다. 그릇편이 많이 출토되어 예전에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웠던 자리라고 전해 온다.
동림산 정상에 동림산성이 있는데 남쪽 봉우리 가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이를 농바위라 부른다.
절터 아래에 그릇을 구웠던 곳을 지칭한다.
민태절 아래에 있는 굿당이다.
민태절이 있던 곳을 지칭한다.
마을에서 서남쪽 높은 봉우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범바위라 부른다.
범바위 아래에 있으며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데 이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을 다 고쳤다고 한다. 가뭄에도 물이 끊이지 않았는데 양쪽 옆에 묘를 쓰는 바람에 그때부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붉은덕 위쪽 마을이다.
땅이 황토 흙이라 하여 붉은덕 이라고 한다.
깊은 냇가가 있어 깊은내 라고 한다. 냇가는 상심천, 하심천으로 부르며 깊은내가 상심천, 보덕리가 하심천이 된다.
깊은내에서 앞에 있는 산을 너덜봉 이라고 한다. 너덜봉 아래로 흐르는 내가 넓은 바다와 같은데 지관이 보기에는 이 봉이 넓은 바다 위에 떠있는 배의 형국이라 하여 너른 바다 가운데의 봉이라 하여 너덜봉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너덜봉의 제일 꼭대기는 학봉 이라고 한다.
너덜봉 옆 우측으로 나 있는 골로, 이 골 밭 가운데에서 물이 나는데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자가 되는데 이곳에 도깨비가 많고 운이 맞지 않아 사람들이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북절골에서 보면 너덜봉이 염해놓은 송장 같다 하여 기가 센 땅이라, 이곳에 절을 지어 나쁜 기운을 눌러야 하므로 북쪽의 절골이라 하여 북절골 이라 했다.
제일 위쪽의 마을로 동림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 고려시대에 미타사 라는 절이 있어서 미타절 이라 불렀다.
마한의 54개국 중 충남에는 15개국이 있었는데, 연기군과 인접한 곳에는 월지국(月支國 혹은 目支國-직산)·신운신국(臣雲新國-천안)·불운국(不雲國-공주 서부)이다. 이 중 연기군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이들에 흡수되어 행정력을 행사하는 영역에 속한 것은 사실이다.
백제시대 연기군은 백제의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긴 475년을 전후하여 연씨(燕氏)와 백제말기 전씨(全氏)가 활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훗날 두잉지현이 연기현으로, 구지현이 금지현으로 변했다가 전의현으로 불리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연기는 연씨들 즉 웅진초기에 활약했던 연신(燕信)과 연돌(燕突)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근거지로 추측할 수 있다. 연신과 연돌은 벼슬이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이르러 오늘날 국방장관에 올랐다. 비암사에서 출토된 백제말기 유물인 석불비상(石佛碑像)에 전씨가 주동이 되어 제작되었음이 명기되었고, 이는 계유년(673)에 제작된 것으로 백제유민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과 그곳의 지명이 전의?전동이란 것으로 보아 전씨 근거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지금의 전의(全義)는 서원경(西原京)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대록군(大麓郡, 지금의 천안)의 영현(領縣)이었다. 대록군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한 것이다. 대록군의 영현으로는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순치현(馴雉縣)으로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을 경덕왕때 개명한 곳이며 지금의 천안지방에 해당한다. 또 하나의 영현은 금지현(金池縣)으로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을 경덕왕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전의(全義)에 해당한다.
연기(燕岐)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이었다. 연산군은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한 것이다. 연산군의 영현은 두 개 현인데, 하나는 연기현으로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을 경덕왕때 연기현으로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연기에 해당하며, 다른 하나는 매곡현(昧谷縣)을 경덕왕 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회인(懷仁) 지방에 해당된다. 지금의 금남지역은 웅천주(熊川州)였는데, 757년(경덕왕 16) 웅주(熊州)로 개명하였다. 웅주는 오늘의 공주를 지칭하는 것이며, 금남은 그 일부이다.
연기군은 성종때 10도제가 실시되었을 때는 중원도(中原道), 지금의 충청북도에 속하였다. 5도양계(五道兩界)의 제도가 실시되면서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와 충청)에 속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연기군은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청주(淸州)의 속현이었다.
연기현은 고려 현종(縣宗) 9년에 청주의 속현이 되었고 명종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뒤에는 목천(木川) 감무가 겸하였다. 전의현은 신라 경덕왕때 금지현(金池縣)으로 개명한 것을 고려 때 전의로 고친 것이다. 금남은 통일신라시대 웅주(熊州)였다가 고려시대 공주(公州)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공주의 동쪽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연기군은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금남지역은 공주로 연기군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연기현(燕岐縣)은 태종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태종 14년(1414년) 전의에 합쳐져서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다시 태종 16년(1416년) 연기현으로 복설(復設)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전의현은 태조 4년에 감무를 두었고 태종 13년에 현감을 두었으며 다음해에는 연기현을 합하여 전기현이 되었다가 태종 16년(1416년)에 연기현이 복설(復設)되면서 전의현이 되어서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금남지역은 공주의 일부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공주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의 지방제도는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종래의 8도를 23부의 행정구역으로 개편하였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의 개편은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한성부(漢城府) 이외의 지역을 13도로 개편하고 그 밑에 7부(府), 1목(牧), 231군(郡)을 두었다. 이와 같은 제도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일합병 후에 일제는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행정·군사·입법·사법권을 행사하였다. 중앙행정조직의 개편과 아울러 지방행정조직도 개편하였는데, 지방은 다음의 표와 같이 3단계로 조직되었다.
즉 전국을 13도로 나누었으며, 도(道)에는 지사(知事), 부(府)에는 부윤(府尹), 군(郡)에는 군수(郡守), 도(島)에는 도사(島司)가 도장관(道長官)의 지도 감독 아래 행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부(府)·군(郡)·도(島)의 행정기구도 도(道)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구성되었다.
또한 도(道)와 부(府)에는 도회(道會)와 부회(府會) 등의 의결기관이 있었으나, 이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서 형식상 내세운 어용의 지방자치 기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의장은 지사(知事)와 부윤(府尹)이 맡고 있었고, 이들은 총독에 예속되어 행정, 일부의 사법권, 그리고 일본군의 지방분견대장(地方分遣隊長)에게 요청하여 한국인을 탄압하기 위한 분대(分隊)를 사용할 수 있는 등의 막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읍과 면은 1940년에 전국에 76읍, 2262면이 있었다. 이때에 일본인은 대부분 부(府)에 거주하였던데 반하여 한국인은 읍?면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였다. 그리고 읍장(邑長)은 대부분 일본인이 맡았으며, 면장(面長)은 대부분 한국인이 맡았다. 읍과 면에도 도회 및 부회와 같은 읍회(邑會)와 면협의회(面協議會)를 두었으나 이 기구 역시 어용단체였다.
[조치원읍]
조치원읍(鳥致院邑)은 연기군의 중심도시로, 일제시대 경부선 철로의 개통과 더불어 이곳에 역이 들어서고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면서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조치원은 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이곳에 살면서 시장을 개설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생긴 곳이라 하나 이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백제시대 연기군은 구지현(仇知縣 : 전의)과 두잉지현(豆仍只縣 : 연기)으로 불리었는데, 당시 조치원은 연기와 전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면서 청주지역과 경계를 이룬 곳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던 벌판이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이다.
조선시대 조치원은 연기현의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북일면(北一面) 지역이었는데, 당시 연기현감으로 부임해온 허만석(許萬石)은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는 이곳을 보고 보를 쌓아 물길을 잡도록 하여 많은 농토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동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으며, 둑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처음에는 둑내동이라 부르다 죽안동, 죽림동으로 변하여 불리었다.그래서 조치원을“새내”라 불렸는데 갈대, 억새풀과 새들이 많은 냇가라는 뜻이다.
그러니 구전으로 전해오는 최치원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다만 최치원이란 이름이 나오게 된 동기는 일본인이 조천원을 조치원으로 개명 할 때 이곳에 살고있는 조선사람들이 반대할 것을 두려워하여 조선사람이 존경하고 좋아하는 신라학자 최치원 선생을 끌어들여 전설을 만들어 퍼트린 후 조치원이라 개명한 것이다.
그래서 조치원이란 말은 일제시대 초에 쓰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조치원리(鳥致院里)라 부르다가 1917년 10월 조치원면(鳥致院面)이 신설되고 1931년 4월1일 조치원읍(鳥致院邑)으로 승격되었다. 1940년 리(里)를 정(町)으로 고쳤다가 1947년 동(洞)으로 고쳤으며, 1988년 다시 리(里)로 고쳤다. 조치원이 읍으로 승격된 것은 70여 년 전으로 당시 같이 읍으로 승격하였던 대전은 광역시로 엄청난 발전을 보였지만, 조치원은 아직도 그대로 조치원읍이다.
이 때문에 조치원이 새 조(鳥)자를 써서 새처럼 새가 먹이를 배불리 먹으면 날아간다는 것처럼 연기군에서 돈을 많이 벌면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오히려 연기군을 상징하는 제비는 겨울을 나기 위해 따듯한 강남으로 갔다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고향을 찾아오는 길조이다. 그리고 제비는 복을 가지고 들어오는 새이므로 제비의 상징인 연기군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과거 일제는 조치원읍 침산리에 신사를 건립하였다. 일제가 물러나자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 바친 애국지사와 6.25 전쟁 때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신 곳이 바로 충령탑이다.
조치원은 교육의 중심도시이기도 하다. 고려대학교와 홍익대학교가 있으며 조치원고등학교, 조치원여자고등학교, 조치원중학교, 조치원여자중학교 등 초등교육에서 대학교까지 많은 학교가 있으며 이들은 근대에 신설된 것이다. 그러기에 반면 오래된 문화 유적은 적다. 이는 과거 이 지역의 여건 때문이다. 실제로 조치원의 경우 조선시대 향교, 서원이 없고 봉산리에 있는 강화 최씨 최용소의 영당인 봉산영당(鳳山影堂)과 정려 두 개가 전부이다.
봉산동은 오봉산 아래 자리한 마을로 오래 전부터 강화최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강화 최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인 봉산 향나무가 있고, 아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지 않으면 이 바위에 올라 종아리를 때리면서 가르쳤다는 ‘자교암(恣敎岩)’이 있다.
조치원읍지명유래
조선말엽엔 충북(忠北) 청주군(淸州郡) 서강외(西江外) 일하면(一下面)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다. 그래서 '벌말' 또는'평리'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북면에 편입되어 조치원리가 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1940년에 '소화정'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평동(平洞)으로 고쳐, 조치원읍 평리(平里)가 되었다.
조치원읍 앞들에 있는 보를 '곤두기보'라고 부른다. 일명'보은덕보'라고도 부르는데 이 보는 조선 초에 허만석(許萬石)이 연기현감이 되어 큰 내에 둑을 막고 보를 내어 전답(田畓) 천 여(千餘)마지기에 물을 대게 하는데 그때 둑을 쌓을 때 그 보가 청주 땅에 있다하여 청주 사람들이 수 천명 몰려들어 허만석이 친히 감독하는 걸상을 부수므로 허만석이 크게 노하여 활을 당기어 쏘려고 하니, 청주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서 감히 범하지 못하므로 그 보를 완성하여 농민들에게 크게 도움을 줌으로 그 지방 사람들이 허만석의 은덕(恩德)을 갚겠다는 뜻으로 보은덕비(報恩德碑)를 평리 앞에 세웠으므로, '보은덕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곤두기보'가 되었는데 그 수 백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비석이 전복되어 땅에 묻혔으므로 현재 묻힌 비(碑)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 벌말'앞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이 방아의 다리와 같이 되었다 해서 '방아다리'라 부른다.
'방아다리'에 묻혀 있는 비를 '묻힌 비'라 한다. 조치원의 사적을 적은 비(碑)인데, 이 비(碑)가 나오면 조치원이 망한다는 설(說)이 있다 한다.
평리에 있는 옛 장터마을을 지칭한다.
저수지로서, 평리에 있는 조치원읍의 상수도의 수원지로서 1935년에 시설되었다.예전에는 주변이 커다란 나무가 있고 늪지대였는데 지금은 흙을 메워 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평리를 예전에는 뒷말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빈촌으로 거의 초가집이었다.
수원지가 예전에는 뽕나무밭이었다. 연기도서관 뒤쪽으로 애장골이 있어, 죽은 아이들을 나무에 걸쳐놓았다고 해 무서워서 이곳을 지나기를 꺼려하였다.
평리와 원리, 상리, 교리 사이의 경계지점에 나무전이 있었다 .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방아미산'이 있으므로 '방아미' 또는'침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신대리' 백관리' 내창리' 평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침산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1940년 왜식동명(倭式洞名) 변경에 따라 일인(日人)의 신궁 아래에 있다하여 궁하정 이라 했다가 해방 후 다시'침산리'로 고쳐졌다.
마을회관 앞에 연자방앗간이 있었는데 방앗간이 있어서 방아미라 했다.일제시대 때 미야시다조 라고도 했다. 집궁(宮), 아래하자를 써서 궁하(下) 라고도 했으며 신사 아래에 있었다고 해서 궁하라 했다.
최치원이라는 분이 침산리 윗산이 일야통곡지지라고 했는데 침산리의 강둑이 터져서 하룻밤만에 통곡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동일면(東一面)의 지역으로서'조천'뚝 안쪽에 있으므로 '둑안'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죽안'또는 '죽내'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죽내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읍에 편입되어 '죽림정(竹林町)'이라 하다가 1947년에 해방과 더불어 '죽림리'라 하였다.
'분퇴머리'에 있는 옛 무덤이다. 그 무덤 속에서 무늬 없는 토기와 동띠 모양의 청동띠 갈구리가 나왔다.
'분퇴거리'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솥 공장이 있었다 하여 '솥전거리'라 부른다.
'솥전거리'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산기슭에다 막을 짓고 살다가, 마을이 되었다. 옛날에 이곳에 산막이 많았다 하여 '산막'?이라 부른다.
죽림리의 '죽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분퇴머리에 있는 마을을 지칭하는 것이다.
솥전거리에 있는 마을을 지칭한다.
죽내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 무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도장말, 원마루 라고도 한다 . 죽림리 서쪽 끝 부분으로 황새가 많아서 황새울이라 불렀다. 예전에 그곳에 주막이 있었다.
황새울 밑에 위치하며, 안동네 바로 위에 있다 하여 윗뜸 이라고 한다.
안동네 남쪽마을로 볕이 들지 않고 음지이므로 음지짝 이라고 불렀다. 겨울에는 다른 곳보다 유난히 추운 곳이다.
죽림리 마을의 중앙으로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다. 사람도 제일 많이 살았으며 현재 죽림동 12반 자리이다. 대나무 밭이 있는 안동네라 하여 죽안 이라고도 불렀다.
안동네 북쪽에 위치한다. 이곳에 연자방아가 있었다. 이 연자방아는 일제시대 때까지 사용하였으며 6·25 이후 발동기가 나오고 나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새로 생긴 마을을 칭한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이전해 온 마을이다. 안동네 하고 음지짝 가운데에 위치한다.
기독교학교로서 죽림리 병막에 위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를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다녔으며, 일제시대 창고를 이용하여 운영을 했다. 이 학교 선생님들은 봉급을 받지 않고 가르쳤다고 하며, 6?25사변이후 생겼다가 20여년 만인 1970년대에 사라졌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北一面)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치원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에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역이 생기면서부터 이 지방(地方)이 번창해지자 1940년 왜식 이름으로 '영정'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정리(貞里)'로 고쳤다.
일제시대 때 정리를 영정이라 불렀는데 다른 곳보다 번화하였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지금의 고추전서는 곳이 예전에 싸전거리라 하였다. 이곳에서 쌀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지금 서는 마늘전 있는 곳이 예전부터 마늘을 사고 파는 마늘전 이었다. 장터 안에 있는 새우젓 가게이다.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새우젓 가게로 이곳에 어물전이 형성되어 있었다.
시장농협 뒷골목으로 유기그릇도 만들고 놋쇠그릇을 팔던 골목이다.
축협 있는 곳에서 가구거리 쪽의 골목을 말하며 그 골목에 예전에 포목점들이 있었다.
지금의 순대골목이 예전에는 체소전 이었다.
지금의 시장농협 자리가 일제시대 때 국옥(기꾸노야)이라는 일본사람이 운영했던 큰 술집이었다. 해방이 된 후, 우리나라 사람이 인수하여 상춘관이라는 술집을 하다가, 6?25이후에는 경찰서, 천주교회였다가, 농협으로 바뀐 것이다.
마늘전에 중국학교가 있다가 현 남리(영락교회 자리)로 이전한 후, 중국인들을 가르치던 중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였다. 그리고 이곳에 소 서방이라는 사람이 약방을 하였고 중국영사였다.
원리와 정리사이의 길로 건어물, 수산물 등 어물가게가 많아 어물전이라고 하며 1960년경 대운상회가 이곳에서 크게 어물장사를 해 돈을 많이 벌었다. 처음 주인은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이 운영한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에 속했었다. 벌판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조치원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갑자기 번창하여짐에 따라 1940년에 왜인들이 많이 살게 됨으로 '본정이정목(本町二丁目)'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원리(元里)로 고쳤다.
장터에 있는 둠벙을 오구미둠벙 이라고 부른다. 둠벙의 면적이 3,000여 평이나 되었는데 둠벙 가운데 중교 다리가 있었으며 낚시터로도 유명한 둠벙이었다.
곤디기보 밑에 있는 보를 지칭한다. 교리, 남리 일대의 논에 물 대기를 위한 보이다.
오구미둠병 가운데에 놓은 다리로서 조치원에서 청주시로 통하는 길이다.
청과상회 골목의 주력상품은 복숭아와 참외였다.청과상회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 지역은 벌판에 역이 있고, 역 주변에 식당만 몇 곳 있었다.이 곳에 상가들이 하나 둘씩 본격적으로 모인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예전에는 이 곳에 목재소가 있었는데, 이곳 역시 1960년대 즈음에 가게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장이 선지는 아주 오래되었고, 4일과 9일 장이다.1950년대쯤에 가게가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 한 것이 본격적인 상설시장을 이루었으며, 중앙시장이라는 간판을 붙인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예전에는 상리 주변으로 해서 장이 섰는데, 현재는 원리를 중심으로 장이 서고 있으며, 이 장에는 육전, 채소전, 생선전, 쌀전, 고추전등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큰 장이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조치원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이 지방이 역의 신설에 따라 갑자기 번성해지자 1940년 신흥정(新興町)이라 하고 1947년엔 해방과 더불어 신흥리가 되면서 연기군 조치원읍에 편입되었다.
'새터'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홉 갈래의 길이 있다해서 '아홉거리'라 부르며 '구거리'라고도 부른다. 지금의 연기체육관 앞길 근방의 길이다.
신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처음에는 외딴 곳에다 새터를 잡았는데 지금은 큰 마을이 되었다. 새로 이룩된 마을이라 해서 '새터'라 부른다. 또한 '큰말’ '외딴말' '신대(新垈)'라고도 부른다.
새터 서남쪽에 있는 큰 마을이다. 옛날에 벼슬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해서'백관'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지금의 아홉거리 남쪽이다.
백관 위쪽의 동네를 말한다.
지금 군청이 있는 곳으로 마을 앞의 산이라 하여 안산이라 하였다.
1차 주공아파트 있는 곳을 큰배미라 불렀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큰샘 앞의 논이어서 큰배미라 불렀다.
안산 밑에 있던 샘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겼던 샘이다. 칠월 칠석에 샘 청소도 하고 풍장을 치며 고사도 지냈다. 이 샘은 물의 양도 많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서 유명한 샘이다.
새터에 있는 나무로 몇 백년 정도 된 것이라 추정하며 단오날 그네도 뛰었다.
아홉 거리 꼭대기로 체육관 있는 쪽의 산을 말하는데 위쪽에 있다하여 상봉이라 한다.
체육관 옆으로 내려가면 있는 골로 이곳에 풍년이 들면 다른 곳도 풍년이 들어 물가 시세를 알 수 있는 골이라 하여 시개골 이라 한다.
문예회관에서 봉산리로 넘어가는 길 중간으로(새태고개) 이곳에 화장터가 있었는데 한국인 화장터와 일본인 화장터가 있었다. 일제시대 때의 놀음은 큰 죄였는데 그때 이곳 화장터에서 놀음을 벌여 화장터를 뒷말로 놀음터 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면 불빛이 새어나와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귀신이 있다고 했다는 말도 있다. 또 이곳 고개를 마지막고개라고 했는데 사람이 죽어 마지막으로 온다 해서 마지막고개라고 한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北一面의) 지역이었다. 숲이 무성하므로 '섶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석골' 또는 '신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충북 청원군 서강외 일하면의 옥동'정중리'장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동리'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을 신설함에 따라 조치원면이 되었다가 1931년 읍으로 편입되어 '신동'과 '안터'의 이름을 따서 '신안정'이라 하였다가 해방 후 현재까지 신안리라 부른다.
숲이 무성한 그 안에 마을이 있는데, 옛날에는 여기 마을 사람들이 숯을 구우러 산 속에 들어가곤 하였다 하여 숯을 싸놓은 마을이라 해서 섭골(薪洞)이라 불렀다. 섭골, 석골 이라고도 부른다.
섭골 북서쪽 안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내가 흐르고 그 냇물 안으로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다 하여 안골 또는 안대(安垈)라 부른다.
300여m의 높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은덕산 이라 부른다. 산에 올라가면 집채만한 바위가 덩그렇게 솟아 있는데 이 바위를 ?은덕바위?라 부른다. 매년 정월 보름날이나, 사월 초파일 또는 팔월 보름 때 마을 아낙들이 제가끔 떡시루를 이고 와서, 이 바위 위에 놓고 충원을 하면 반드시 은혜가 온다고 하여 지금도 명절날이면 아낙네들이 모여들곤 하는 산이다.
'석곡(石谷)' 마을 뒤편을 '서당골'이라 부른다. 옛날 분묘(墳墓)가 없었을 때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나무에 걸어놓고 할 때, 여기에 시체를 놓은 자리로서 '시(屍)당골'이라 부르던 곳인데 변하여 '서당골'이 되었다.
마지산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말을 탄 군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여기서 쉬어 갔다 하며 마을 뒷산 모양이 말굽과 같다 해서 머지미, 마정리(馬廷里)라 부른다.
'구락말'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엔 이 마을에 돌이 많음으로 석곡(石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성이씨(固城李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머지미 동남 편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뒷산이 높아서 옛날에 적이 쳐들어 올 때에도 많이 적을 무찌른 곳으로 '톡골'또는 '토옥동(土玉洞)' '옥동'이라 부른다. 또한 여기는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된다 해서 '토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톡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톡골 뒤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300m로 그 모양이 노적가리 같다.
현 마을회관에서 마을로 가로질러 가는 길로 국도로 연결되었으며 그곳에 고성이씨 정문이 있었으며 정문이 있었다 해서 정문거리이며 현재는 집들이 생겼고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른다.
구렁말 가는 곳(언덕)에 있었는데 홍대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사창(社倉)이 있었으므로 '내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서곡리 낙은리 일부와 충북 청원군 서강외 일하면리'장대리'평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내창리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을 신설할 때 서면(西面)에 편입되고 1936년 조치원읍 확정에 의하여 조치원읍에 편입되어 '서곡' 과 '내창'의 이름을 따서 '서창정(西倉町)'이라 하였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왜식(倭式) 동명(洞名) 변경에 따라 서창리(瑞倉里)가 되었다.
서창리 261, 즉 돌마리 뒷산 기슭에 있는 바위를 '장춘바위'라 부른다. 좁은 바위 면에다 '장춘장(藏春場)'이라고 석자를 새겼는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며 숙종(肅宗)때의 경성판윤(鏡城判尹) 최훤(崔煊)의 집터자리이다.
'모가나무골'에서 봉산동을 가다가 봉산 영당 사이에 새 길이 있는데 그 길로 올라가면 산기슭에 빙고(氷庫)가 옛날에 있었다 하여 '빙고개'라 부른다.
'내창리' 남동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주막이 생겨서 길가는 행인들이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새주막거리'라 부른다.
'내창'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시대 때 행인의 편리를 도와주는'원(院)'이 있었다 하여'원마루'라 부른다.
'돌마루'옆 동북쪽에 있는 옛 옥(獄)터를 '옥터골'이라 부른다. 토흥부곡(土興部曲)의 옥(獄)이 있었다 하며, 또는 숙종때 경성판윤(京城判尹) 최훤(崔煊)이 돌마루에 살면서 근처의 죄인을 가두던 터라고도 한다.
'내창'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모과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모과나뭇골'이라 부르며 서곡(瑞谷)이라고도 한다.
'내창리'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 백호부리에 돌이 박혀 있다는데 내창리 서쪽에 있다 해서 석우(石隅) 또는 돌마루 라 부른다.
지금의 서창 2리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곡식을 이 장소에 두었다 하여 그때부터 내창이라 불렀다.
내창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고대 올라가는 쪽에 있으며 가마같이 생겨서 가마바위라 부른다.이곳은 아낙들이 치성을 드리고, 남자들이 산제를 지내던 곳이다.
가마바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초상상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다. 이 초상상봉에 묘를 쓰면 서창리가 가물고 벼농사가 안 된다고 해서 묘 쓰는 것을 반대했다
조선 태종 때엔 전기현(全岐縣)에서 다시 연기현에 속했고 본래(本來)가 토흥부곡(土興部曲)의 소재지였다. 이 곳은 '둥이' '둥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저촌리'낙원리'은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동리(東里)'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고, 1917년 조치원면 신설에 따라 서면(西面)에 편입되고, 1931년 조치원읍 확정됨에 따라 조치원읍에 편입되어 오봉산(五鳳山)의 이름을 따서 봉산정(鳳山町)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봉산동으로 고쳤다.
조치원읍·서면·전동면에 있는 산이다. 산의 높이는 262m인데 산이 다섯 봉우리로 되어 있어서 오봉산이라 했으며, 산봉(山峯)에 기우제단(祈雨祭壇)과 산제당(山祭堂)이 있어서 영험한 산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일선원이 있으며 강화최씨 숭모단이 있다.
'둥이'뒤에 있는 골짜기를 '참샛골'이라 부른다. 찬샘이 있어 '천곡(泉谷)'이라 부르고 또 숙종때 효자(孝子) 최진원(崔進源)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봉산동 빙고개 밑 아주 낮은 위치에 고랑으로 이룩된 밭이 있는데 이 밭을 희밭 이라고 부른다. 옛날 여기에서 희를 구었었고 최송경(崔松景) 묘비(墓碑)가 있는 산모퉁이가 또한 희밭 이었다 한다.
'둥이'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띠가 많은 재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띠재골'이라 불렀다 한다. ‘저촌(苧村)'이라고도 불렀다.
'둥이'에서 서창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도장고개'라 한다. 토향부곡시대(土鄕部曲時代)에 도장을 열었던 곳이다.
둥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전에 방죽이 있었다.
봉산리에 있는 태종(太宗)때 형조판서 최용소(崔龍蘇)의 영당이다.
봉산리 128번지에 있는 향나무로서 명종 때 효자 최중용(崔重龍)이 심었는데, 몸이 용 틀림으로 올라가서 위가 우산처럼 퍼졌으며, 봉산향(鳳山香)나무라고도 한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이었다. 뒷산에 반석이 있으므로 번암(磻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번암리라 하여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 신설에 따라 서면(西面)에 편입되고 1939년 12월에 조치원읍에 편입되어 번암정 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번암동이 되었고, 현재는 번암리(磻岩里)라 부른다.
'번암리'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상절'이란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번암리'에 있는 마을이다. 일제시대 양(羊)을 많이 기르던 마을이라 해서 '양뜸'이라 부른다.
'산정말' 옆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한양(漢陽)을 오고 갈 때 행인들이 여기를 지나가는데 여기에 주막이 있어서 쉬어 가곤 하였다.
번암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산지기 집이 있었다 하여 '산직말'이라 부르는데 '산정말' '산정촌(山頂村)'이라고도 부른다.
번암 뒷산에 있는 바위가 번암 이라 부르는 바위다. 큰 바위가 판판하여 반석으로 되어 있어서 번암 이라 부른다.
세거(世居)하는 최씨문중(崔氏門中)에서 대과급제(大科及第)하는 자가 배출(輩出)되었는데 서울에서 희보(喜報)가 오거나 당자(當者)가 집에 도달 또는 임관부임(任官赴任)할 때 그 소식을 부근(附近)에 알리기 위하여 긴 쇠장대를 꽂고 북과 징을 달아 난타(亂打)하였다 하여 재 이름을 쇠때백이라 불렀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이었다. 벌판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조치원리라 하여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읍에 편입되고 1940년 해방과 더불어 위쪽에 있다 해서 상리(上里)가 되었다.
상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는 이 지대가 벌판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이 뗏집으로 움막같이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뗏집거리'라 부른다.
조천에 놓은 다리로서 조치원에서 충북으로 통하는 다리이다.
상리를 포함하는 사거리에 나무전이 있었다.이곳에는 나무를 쌓은 지게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나무 한 지게를 팔면 쌀 한 되도 못 샀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北一面)의 지역으로서 벌판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조치원리가 되어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철도 개설에 따라 역(驛)이 생기면서부터 갑자기 번창하자 왜식(倭式)으로 바뀌어 욱정(旭町)이라고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명리(明里)라 하였는데, 여기에 빛을 주는 발전소가 있으므로 '명리(明里)'라 부르게 되었다.
' 명리' 동쪽에 새로 된 마을을 '새뜸'이라 한다.
명리와 상리 경계부근에 있던 양조장으로 조치원에 처음 들어선 양조장이었다. 이것이 조치원 양조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0년쯤 없어졌다.
현 명동초등학교 남쪽 제방 밑으로 일제시대 때 변전소가 생겼고, 이 변전소가 생기면서 전기가 들어왔다. 6·25이후에 이 변전소가 서면으로 옮겨갔다.
조치원에서 처음 들어온 방앗간이 명리에 있었다. 처음에 조석환 씨가 하다가 주인이 바뀌었고 지금은 없어지고 집을 지었으며, 1973년쯤 없어졌다.
학교가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송탄유를 뽑았던 곳이었으며 해방 후 송탄유 뽑던 곳을 싸이클 경기장으로 사용했다. 이 싸이클 경기장은 컸기 때문에 국제적인 경기장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기석이라는 유명한 싸이클 선수가 나왔다. 이 싸이클장이 사라지고 일제시대 때 명동초등학교가 생겼으며 처음 생길 당시에는 4급 학교로 영창학원 또는 청년학교로 불린 간이학교였다.
일제시대 때부터 거리가 있었으며 1960년경에 소전이었다가 소전이 남리로 이전을 하였고 이곳에는 어물도매상이 크게 있었는데 그 자리를 가구상점으로 바꾸고 돈을 벌자 가구상점이 많이 들어섰다.또 장날이 되면 이곳에서 가축을 많이 팔았는데 닭이 많아 닭전이라고도 했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조치원리가 되어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갑자기 번창하여 1917년 면이 되었고 왜식(倭式)으로 적송정(赤松町)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조치원 남쪽에 위치함으로 '남리(南里)'라 부르게 되었다.
조치원읍에 남리 남동쪽에 있는 경부선 철로의 다리로 미호천 하류에 있는데 다리가 스물 네개가 있다 하여 '스물네강다리'라 부른다.
명리(군수관사 옆, 현 복지회관)에 우시장이 성시를 이루었는데 주택이 들어서며 남리 사거리 근방으로 이전하였다가 구획 정리 후 없어졌다.
조선말엽에 연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다.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조치원리가 되어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어 갑자기 번창하여짐에 따라 1940년에 조치원을 잘라서 '길야정'이라 하였다가 1947년 학교의 중심지이므로 '교리(校里)'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시대 때 불리던 이름으로 길야학교가 있어 길야동으로 불렀다.현 교동초등학교를 전에는 일인(日人)만 교육하는 길야국민학교라 불렀다.
지금의 군민회관 가는 코너 쪽에 있었다.이곳은 일본사람이 운영하던 극장으로 다다미방이었다.해방 후 우리나라 사람이 인수해서 했는데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아서 보았으며 추운 겨울이면 극장 앞에서 화로를 팔아 이 화로를 사서 앞에 두고 앉아 보았다. 상영물들은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이었다.그런데, 6·25때 이 극장이 폭격을 맞아 없어지고 후에 왕성극장이 되었다가 몇 년 전쯤 없어졌다.
현재 원리에 새로 크게 지어진 여관자리로 옛날 이곳에 크게 웅덩이가 있었다. 또 이 탬비툼벙을 도깨비툼벙이라고도 했는데, 이유는 물이 많을 때 낚시를 하면 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물을 품어내고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거의 없어 도깨비가 잡아갔다고 도깨비툼벙이라고 했다.
[동면]
동면은 연기군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치원 남면간에는 미호천을 중심으로, 금남면과는 금강을 중심으로, 충북과는 아미산을 중심으로 경계를 이룬다. 송용리에 고인돌이 있었는데 도로공사 중 파손되어 없어졌다. 그곳에서는 토기와 돌칼, 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동면에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백제 때에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연기현(燕岐縣)이 되어 연산군(燕山郡)의 영현(領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 연기현이라 불렀고 조선시대 1414년에는 연기와 전의현이 합하여 전기현이라 불렀으며 1416년 다시 환원되어 연기현이 되었을 때 동면은 연기현의 동진나루 건너편에 있었다. 조선말엽 연기군과 전의군이 신설되었을 때는 연기군의 동이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일면을 병합하여 연기군 동면이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호(號)를 회헌(晦軒)이라 하는데, 이는 그가 말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菴)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다. 그는 국학생(國學生)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하여 조성된 일종의 장학기금인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는 등 고려말기 유학진흥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가 죽자 왕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원나라 화가에게 명하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그 초상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1716년(숙종 42) 에 후손들이 합강리에 영당을 창건하여 그의 영정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사지내다 순조 때 후손과 유림들이 서원으로 창건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합호사(合湖祠)를 건립하고 안향의 영정만 봉안해오다 1949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하나 동면입구인 예양리에는 오충신정려(五忠臣旌閭)가 있다. 정려의 주인공은 밀양박씨 박천붕과 그의 네 아들들이다. 박천붕은 연기군 서면에서 태어나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헌 선생의 격문을 보고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는 싸움에 임하기 전에 사당에 고하고 아들들을 불러 “오늘날 신하된 자는 적을 토벌하여 나라에 보답하되 싸움터에서 죽어서 돌아옴이 절의를 떳떳이 지키는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가정을 보호하여 추하고 더러운 적의 무리로 하여금 가정을 범하지 못하게 힘을 쓰라!”고 훈계하고 전장으로 떠났다.
조헌은 운집한 의병을 거느리고 7월 4일 하늘에 제사를 드린 후 8월 1일 드디어 청주성 탈환을 위하여 진군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이 전력을 다하여 싸운 결과 청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박천붕은 장렬히 싸우다 적이 쏜 화살에 맞아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박천붕의 네 아들인 원겸, 인겸, 예겸, 의겸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의병으로써 죽산산성 전투에 참여하여 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나라에서는 이 오부자의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충신정려를 내렸고 이 정문은 현재 예양리 산 21번지에 건립되어 있다.
동면에는 유난히 정려가 많이 있다. 용호리에는 아버지의 병에 산삼이 특효라는 이야기를 듣고 엄동설한에 산을 뒤져 산삼을 구해다 아버지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또 돌아가신 후에는 3년 간 시묘살이를 한 효자 임양문의 정려가 있다. 내판 2리에는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가 곶감이 먹고 싶다고 하여 이를 구해다 드리자 차도가 있어 병이 완쾌되었다는 효자 김백열 정려가 있으며, 동면 송용리에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붙잡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녀 장응헌처 언양김씨 정려가 있다. 또 응암리 노곡마을에는 열녀 박기정처 광산 김씨 정려가 있고, 노송리에는 효열부 장이상처 한양조씨 정문이 있으며, 내판 3리에는 고부간인 열녀 김기철 처 밀양손씨와 김성흠 처 창녕성씨의 양세 정려가 있다.
동면>각지명유래
조선말엽엔 충북(忠北) 청주군(淸州郡) 서강외(西江外) 일하면(一下面)의 지역으로서 벌판이었다. 그래서 '벌말' 또는'평리'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북면에 편입되어 조치원리가 되었다가, 1917년 조치원면에 편입되고 1940년에 '소화정'이라 하다가, 1947년 해방과 더불어 평동(平洞)으로 고쳐, 조치원읍 평리(平里)가 되었다.
'거름뜸'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쇠줄'이라 부른다. '소지울' '소지'라고도 부르는데 농사짓는데 필요한 소를 키우기가 으뜸인 마을이라 해서 '소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쇠줄''소지울'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소지(沼地)가 있는데 연꽃이 만발한 소지였다 한다.
'거랑뜸'에 있는 서원이다. 주자학을 들여온 '회헌'안유(安裕)선생의 서원이다.
'보습골'너머에 있는 골짜기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황룡사(黃龍寺)라는 유명한 절이 있는 골짜기 부근의 마을이라 해서 없어진 절 부근에 마을이 있다해서 '잿절'이라고 한다
'합강(合江)'의 원마을이다.
소지울 앞산 너머의 마을이다. 생(生)지초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생지울이라 했다.
소지울 북쪽에 있는 산으로 용호리에서 봤을 때 동쪽에서 동이 튼다하여 출동산이라 하였다.
소지울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 누런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서 황우산이라 부른다.
보속골 이라고도 불리우며 봉이 날아든다 하여 봉수동이라 이름지어졌다.
보수골에 있는 샘 이름으로 정월 14일(음력 1월 14일)에 제를 지냈다.
조선 말엽엔 연기군 동일면(東一面)의 지역이었다. 매바위가 있고 매가 많이 서식하는가 하면 큰바위가 많이 있으므로 매바위, 응암(鷹岩)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서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응암리'라 하고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매바위'서남쪽에 있는 마을을 '가마골'이라 부른다. 마을이 마치 가마의 치알처럼 서방(西方)의 야산(野山)으로 둘러싸고 있어'가마골'이라 부른다 하며 또한 '부동(釜洞)''산수(山水)'라고도 부른다.
'높은정이' 남쪽에 있는 마을을 '매바위'라 부른다.
' 매바위'북쪽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이라 고정(高亭) 또는 '높은정이'라 부른다. 예전엔 노목(老木)이 울창하게 있어서 노수정(老樹亭)이라 하였다가 노목이 모두 없어지자 '고정(高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동이면(東二面)의 지역이었다. 옛부터 충신(忠臣)이 많이 배출되고 오부자(五父子)가 충신이었던 박천붕(朴天鵬)과 그 아들들의 충신문(忠臣門)이 있어 예(禮)를 기르고 배우는 곳이라 하여 예양리(禮養里)라 하였다 한다. 서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때 인근의 마을과 청원군(淸原郡)의 일부(一部)를 병합하여 예양리라 하고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하였다.
'양골'북쪽 산 속에 있는 마을이다. 아늑한 곳에 자리한 마을로 예전엔 출세를 등진 사람들이 많이 은거했던 마을이다. 마을 뒤편에 해평윤씨의 오래된 산소가 있어 일명 산소골, 산소동이라 부른다.
예양리의 중심 마을이다. 덕(德)을 기르고 배우는 곳이라 하여 '양곡(養谷)''인동(仁洞)''양골''예양'이라고도 부른다. 하루 종일 볕이 든다하여 양동(陽洞)이라 했는데 변하여 양인동(養仁洞)이라고도 했다. 선조(宣祖)때의 충신 박천붕(朴天鵬)과 그 아들들의 거룩한 가(家)를 모신 곳이기도 하다.
충신문(忠臣門)이 있어 '정문(正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곳에서 어진 이, 글 많은 이를 길러냈다 한다.'양인(養仁)'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엔 주로 밀양박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또한 아미산의 끝자락이란 뜻에서 미꾸지라 불렀다.
미호진 재 예양리전(美湖津 在 禮養里前) 이것이 미꾸지 나루로서 예양리의 미꾸지 앞에서 미호천을 건너 조치원으로 가던 나루이다.
'미꾸리내'옆에 있는 마을이다. 8.15 해방과 더불어 생긴 마을로 만주에 이주 같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이룩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동진평야(東津平野)를 끼고 뒤에는 미호천(美湖川) 금강(錦江) 줄기가 흐르고 있어 강(江) 옆에 위치한 부락이라 하여 강촌(江村)이라 부른다.
양골에서 아미산 쪽의 깊은 곳을 지칭한다. 이곳의 논에 벼를 심으면 가재눈처럼 잘 영근다하여 붙여진 가재가 많은 곳이다.
양골에서 절골 가는 고개이다. 예전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를 방아다리라 부른데서 연유하여 방아달 고개라 한다.
예양리에서 송용리 가는 커브지역을 지칭한다. 들판이 낮은 지역이라 비만 오면 물이 흥건하게 고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동이면(東二面)의 지역이었다. 지금의 미호천(美湖川)이 강줄기를 돌리기 전에 이 지역 앞을 흐르는 강(江)줄기가 '갈'자(字)로 흐르고 있어 많은 늪과 연못을 형성(形成)하고 있어서 이곳에서 많은 이무기가 서식하며 승천(昇天)했다 하여 용에 대한 신앙(信仰)이 두터운 지역이며 뒷산에 많은 노송(老松)이 있어 그 인연(因緣)을 따서 송용리(松龍里)라 하였다. 1914년에 행정개혁때 이웃마을 송산리와 용곡리를 병합하여 송용리로서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송용리(松龍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솔이 무성하다 하여 송용(松龍)이라 불렀다 한다. 옛날 여기엔 이랑청이란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송산'옆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地形)이 도룡과 같이 생겼다 하여 '도룡골'이라 부른다. 결성장씨(結城張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도룡골'옆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오래된 석불(石佛)이 있어서 '석가동(石加洞)'이라고 불렸다 한다. 마을 지형(地形)이 꼭 나비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나비마을'이라 부르다가 '나븐마을?이 되었다 한다.'나동(羅洞)'이라고도 부른다.
동면 송용리(松龍里)에 있는 석불이다. 석불의 높이는 190cm, 폭은 110cm로서 고려 때의 석불이다.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옮겨왔다. 예전에 이 석불은 온전했었는데 어느 날 구렁이가 머리 있는 곳까지 오르자 번개가 쳐서 구렁이를 죽이고 조금 깨졌다고 한다.
결성장씨의 서당이다. 장훈(張訓) 3형제가 약 300년 전에 건립한 것이라며 처음의 건립지는 서당말의 서당자리(송용리 254-1)였다고 한다. 1876년에 지금의 장소로 이건하여 그 동안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장씨 일문에서만도 6진사를 배출하였다. 1921년에 기성학교(期宬學校)를 개설하여 초중교의 과정을 교육하다 1926년에 연동 공립보통학교가 창립되면서 학생들을 인도하고 폐교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결성장씨 문중에서 서당계를 조직 운영하고 있으며 약간의 전답과 건물이 남아있다.
송용리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팔봉산(八峰山)의 내맥이다.
조선말엽엔 연기군(燕岐郡) 동이면(東二面)에 속했었다. 내판(內板)들의 모든 물이 이 지역 앞을 지나가고 이곳의 산이 문설주처럼 되어 있다 해서 '문주(文舟)'라 하였고, 미호천(美湖川)이 마을 앞을 청초하게 흐름으로 마치 문관(文官)이 배를 타고 떠나듯 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하여 ‘문주’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문주리(文舟里)로서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갈말'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산다 하여 널리 알려졌던 마을이다.
곡촌(谷村)이라고도 부른다. '갈말'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깊은 골에 마을이 위치한다 해서'골말''곡촌(谷村)'이라 부른다.
갈말 뒤에 있는 산이다. 이곳엔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해서 당산(堂山)이라 부른다.
'갈말'서쪽 강가에 있는 산부리를 '용머리'라 부른다. 산부리가 용의 머리 또는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머리'또는 '누에머리'라 부르는데 이곳 사람들이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머리이다.
'갈말'뒤에 있는 당산 중허리에 있는 바위를 치마바위라 부른다. 모양이 치마를 두른 것 같은 형태인데 이곳에 와서 홀아비가 백일(百日)동안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면 홀아비를 면한다 한다
문주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예전엔 갈대가 앞에 많아서 '갈말'이라 불렀던 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여기엔 연기의 태산(太山)이 있는데 태산서원(太山書院)이 있는가 하면 선비들의 상징(象徵)인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形局)이며 학이 많이 서식하며 알을 낳는 지대라 하여 '명학(鳴鶴)'이라 불렀다 한다. 본래(本來)는 조선말엽엔 연기군 동일면(東一面)의 지역이나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신촌리,내대리를 병합하여 명학리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동면(東面)에 편입되었다.
집둥바위 아래에 있는 소(沼)를 '용당'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금강(錦江)물이 질러서 흘러 여기에 소(沼)가 생겼는데 소(沼)의 깊이가 수 십길이나 되어 이무기가 승천(昇天)하는 소(沼)로 불려졌었다. 지금은 모래가 점점 밀려들어 소(沼)가 없어졌다.
'용암'위에 있는 바위다. 큰 바위가 집채처럼 생겼다 하여 '집둥바위'라 부른다. 이 바위에서 그 해 비가 오지 않고 가물 때는 이 곳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 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용당(龍塘)'과 '집둥바위'근방에 세워진 정자(亭子)이다. 지금은 철거해서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모여서 글을 짓고 그 글을 현판(縣板)에 새겨서 보관하기도 하였다. 부강(芙江)에 사는 부자(富者) 김학현이 세운 정자인데 황우치(黃牛峙)를 와우형(臥牛形)의 명당(名堂)으로 정자를 황소의 머리부분에 세웠기 때문에 가운(家運)이 기울었다 하여 정자를 철거하였는데 여기에서 철거한 목재(木材)는 절을 짓는데 희사하였다.
황우산(黃牛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황우산이 와우형(臥牛形)과 황우도강형(黃牛渡江形)의 명당이 있어 만대향(萬代香) 화문지(火文地)로 풍수(風水)풀이를 하는 명당이 있어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증손인 황접(黃蝶)이가 이곳에 부강(芙江)에서 이사와서 처음 살기 시작하였다 하는데 지금까지 600년 가까이 자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황우산 아래에 있다 해서 마을을 황우치(黃牛峙)로 부른다.
명학리 황우치 고개에 성황당(城惶堂)이 있고 이 성황당에선 매년 성황제(城?祭)를 지냈다.
'용당'부근에 있는 주막이다.
'황우치'바깥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소정이'에서 '부암'으로 가는 낮은 고개를 '진고개'라고 부른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우리나라 군사들이 왜병(倭兵)과 싸우다가 싸움에 진 곳이라 하여 '진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이현(梨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호리(龍湖里) 중앙(中央)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중용이라 부른다. 용의 허리 부분을 차지해서 언젠가는 용호리에서 으뜸 되는 일을 많이 하는 인물이 나올 마을이란 풍수적(風水的)인 해석을 하는 마을인데, 부안임씨(扶安林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금 아파트가 있는 곳으로 예전에는 황우재라 하였는데 그곳에 사신 분들이 잘 되어서 훌륭한 사람들이 살아 왕촌이라 하였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동일면(東一面)에 속했었다. 마을을 끼고 있는 산세(山勢)가 호수 속에서 용이 노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용호리라 하고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마을뒷산의 형국이 용(龍)과 같이 생겼고 그 용산(龍山)을 미호천이 감싸고 있어 호수호(湖)자를 넣어 용호(龍湖)라 하였다.
구대라고도 한다. 용호리에서 가장 먼저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사람들이 떠나자 예전에 큰 마을이었는데 현재는 비어있다 라는 뜻이다.
날은터를 양지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날은터 뒷산을 벼락산, 벼락골이라 부른다.
날은터에서 문주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언고개라 한다.
벼락산 건너 동쪽의 산을 백수봉이라 한다. 백수산발형(하얀 머리를 풀어헤친 형국)의 명당이라 한다.
하룡 마을 남쪽 산 중턱을 가리킨다.
예전에는 소를 잡아서 제물로 쓰다가 돼지(교미하지 않은 검은 수퇘지)로 바꿔 지내다가 요즈음에는 소머리를 쓴다.
용호(龍湖)의 맨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호리(龍湖里)는 지형(地形)이 하나의 용형(龍形)이라 하는데 실지로 용(龍)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용의 머리 부분에 마을이 있다 하여 '상용(上龍)'이라 부른다. 진주강씨(姜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중용(中龍)뒤에 있는 산을 '물봉재'라 부른다. 이 재는 모양이 꼭 용과 같다 해서 '미리재''미리峯'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지금은'물봉재'라 부른다.
노적산(露積山)동쪽에 있는 마을을 불암(佛岩)이라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부안임씨(扶安林氏) 임장군의 8대손(代孫)인 한 사람이 이 곳 노적산 아래에 적산(積山) 산봉(山峰)에 있고 여기를 불암(佛岩)이라 부른다 한다. 그 아래 마을이라 해서 '불암(佛岩)'이라 부른다. '부래미'라고도 부르며 진주강씨(姜氏), 부안임씨(林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용호(龍湖) 서쪽에 있는 나루를 동진(東津)나루라 부른다.
중용에 있는 비로 모양은 호패형이다. 1731년(영조7년) 임광후가 세웠다.
이곳을 부암이라고도 부른다. 부자가 많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부래미 북서쪽 마을 뒤에 있는 산이다.
예전부터 노송(老松)이 많아서 조선시대에는 '놀뫼'로 부르기도 하였다가 일제 때에 '노산(老山)'이라 고쳐 부르기도 한 지역이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동이면(東二面)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시 노산리,상송리,웅동,송담리,송리 일부를 병합하여 노송리(老松里)라 하여 동면(東面)에 편입하였다.
'민마루'들 남쪽에 있는 들이다. 들에 물이 많아서 비가 오면 진구렁이 된다 하여 '진구렁'이라 부른다. 임진왜란때 왜병(倭兵)들이 이 곳에서 몰사하였다는 곳이다.
조선초엽 이곳에 마을이 없을 때 사람들이 여기로 옮겨와서 처음 움막을 짓고 살았다 하는데 그 후 마을이 형성(形成)되었다 한다. 처음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다 하여 움골 또는 웅동(雄洞) 이라 부른다.
마근터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장산''노루미''노산리(老山里)'라고도 부르는데 노산(老山) 앞에 있으며 마을 뒷산의 모양이 노루와 같다하여 노루미, 당산 이라 부른다. 노루미가 변해서'노리미'라 부른다.
마을동쪽 옻샘 위골을 지칭한다. 임진왜란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 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옻샘과 웅동에서 충북 사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한다.
웅동의 옻샘이 있는 곳으로 예전에 이곳의 샘물이 널리 알려졌을 때 가마를 타고 와서 마시고 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 남쪽으로 큰길가를 지칭한다. 예전에 이곳에 나무장승이 양쪽에 세워져 있었다. 6.25사변과 1960년대까지 세워져 있었는데 장승제를 중단하면서 세우지 않았다.
노리미에서 충북의 당곡리 경계지역 삼거리를 지칭한다.
'노루미'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서당(書堂)이 있어 '강당(講堂)'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여기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근처 약수터 부근에 사는 과부들이 옛날 남편과 살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슬픈 세월을 뼈아프게 생각한다 하여 강당을 아주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이다.
노송리(老松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 앞에 못을 파고 소나무를 심어서 마을 밖에서 보이지 않게 한 신선의 마을이다.
강당에서 아미산 쪽 도솔사 뒤편 골짜기에 있는 샘이다. 예전에 피부병 환자가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하면 나았다고 한다.
'너더리'안쪽이 되므로 '안너더리'또는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는 곳이라 하여 판교(板橋), 내판(內板) 이라 불렀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의 상판리'외판리'외송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판리(內板里)'라 하였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동이면(東二面)의 지역이었으나 '내판리'가 되면서부터 연기군 동면(東面)에 편입(編入)하게 되었다.
'새말'동쪽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연못이 있었다 하여 '연못골'이라 부른다.
내판리 상판(上板)에 있는 동산이다. 예전에 이곳은 군 부자(君富者)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약 300평 건평(建坪)에 남향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지금으로부터 70년전만 해도 흑색(黑色)황새가 날아와서 수 백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 부자집의 대대(代代)가 망하고 동산의 노송(老松)이 베어지자 어디론가 흑색 황새들은 날아갔다 한다. 황새 놀던 동산이라 하여 황새미골이라 부른다.
내판리와 명학리 사이에 있는 철로의 터널을 수청굴이라 부른다. 1908년 경부선 철도를 놓을 때 완성한 굴로서 굴속에서 맑은 물이 나온다 한다.
'너더리'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가장골'앞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중심에 조그만 내가 있었는데, 달이 이 내를 따라서 뜨고 짐으로 달이 밝은 곳이라 하여 '달박골'이라 부른다 한다.
가장골 옆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내판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예전에 마을 앞에 나무로 된 넓고 좋은 다리가 있었다 하여 '너더리'라 부른다.
내판(內板)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웃너더리로 너더리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회관 뒤편에 보이는 산을 말하는데 예전에 볏단으로 만들어 묶어 털었는데 그때 나락을 모아서 쌓아 놓은 모습이 묘 같다 하여 묘쌀미 또는 모살미라고 불렀다.
여자의 기가 세었는지 불행히도 남편과 계속 사별하고 또 사별해서 9번씩이나 시집을 갔다 한다.
[서면]
서면은 연기군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제때에는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연기현(燕岐縣)이라 하여 연산군(燕山郡)의 영현(領縣)에 속했다.
1414년에는 연기와 전의를 합하여 전기현이라 하였다가 1416년 다시 환원하여 연기현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연기군의 서면이 되었고 1917년 조치원면이 신설될 때 북면의 9개 리를 편입하여 18개 리를 관할 하다가 1939년 조치원읍이 생기면서 5개 리를 넘겨주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이유는 위양의 위(渭)자가 ‘밭(田)이 물(水)에 잠기니 그 속에 달(月)이 뜬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저수지가 생긴다는 뜻이란다. 실제로 1983년에 이곳에다 저수지를 만들었으니 지금의 고복저수지이다. 고복저수지에는 연기대첩공원이 있다.
연기대첩은 1291년 원나라에 반기를 든 몽고 합단적이 고려로 침입한 것을 무찌른 것으로 원 전투지는 서면 쌍전리이다. 합단적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이들이 지나간 마을은 폐허로 변하는데 집은 불지르고 짐승은 양식으로 약탈하여가고 어린이와 노인은 살해하고 아녀자는 강간을 한 후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다. 당시 충렬왕은 합단적이 쳐들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며 합단적은 결국 연기군 서면 쌍전리에까지 쳐들어 왔다.
그때 우리나라 삼장군인 한희유, 김흔이 선봉이 되어 목천에서 한밤중에 출발하여 정좌산 앞 대박산에서 군대를 정비한 후 동이 틀 무렵 기습공격을 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합단군은 십만이 넘는 병사이고 고려군은 삼만이 전투를 벌이니 처음에는 고려군사가 밀리자 김흔 장군이 칼을 빼들고 후퇴하는 자는 뒤에서 목을 베겠다고 하자 모두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죽은 시체가 공주금강까지 30리간 널려있어 전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후에 윤기가 쓴 시를 보면 그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서면 쌍전리 부근에는 큰창고개, 작은창고개, 군량골, 승적골, 전당골 등 전투와 관련지은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서면 와촌리에는 예전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많았었다 한다. 이곳을 와촌(瓦村)이라 부른 연유가 바로 기와를 굽는 곳이 많았기 때문인데, 1998년도에 고려시대 기와를 구웠던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여러 기의 가마터가 발굴되었고 명문기와도 출토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우수한 기와를 구웠던 곳으로 학계에 주목받기도 하였다.
서면에도 도자기를 구웠던 도요지 또한 많은 곳이다. 청라리는 고려말기 청자를 구웠기에 청자의 청(靑)자를 넣고 나주라씨들이 살다나갔다 하여 나발터라 부른 글자를 합하여 청라리(靑羅里)라 불렸다.
청라리에는 불당골, 병목안, 뒤죽골, 양대 등에 분청사기 도요지가 다섯 군데 있고 백자 도요지도 있다. 특히 연기향토사료관이 설립되어 있는 곳도 조선시대 우수한 분청사기를 구웠던 곳으로 박물관이 설립된 동기 또한 이들 도요지를 연구하다 모은 유물로 박물관이 설립된 것이다. 신대리 불당골 에서는 김(金)자와 천(天)자의 도공이름이 쓰여진 분청사기가 출토되었고 기룡리 진상동에서는 우수한 분청사기가 출토되어 지명처럼 임금에게 진상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 외로 용암리에도 분청사기요지가 두 군데 있다. 서면 쌍류리에 송암사란 절이 있다. 이곳 스님은 매일 돌탑을 쌓아 현재 5백여 개의 돌탑이 쌓아져 있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燕岐郡)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이 곳은 지형(地形)이 나발 같다 하여 '나발터'또는 '청라(靑羅)'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시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청라리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편입되었다.
예전에 나주나씨(羅州羅氏)의 거주지로 처음에는 나발지(羅發址)라 불리웠다. 나씨(羅氏)들이 떠난 마을이란 뜻에서 '나발(羅發)터'라 부른다.
'나발터'양달쪽에 있는 마을이다. 은행(銀杏)나무가 크게 서 있는 마을이다. '양진(良津)터''행정(杏亭)'이라고도 부르는데 좋은 밭과 기름진 옥답(玉沓)이 많아 양지바른 곳에서 살기가 좋은 곳이라 '양대(良垈)'라 부른다. 전의이씨(全義李氏)들의 거주지로 알려져 있다.
양진터 맞은 편 응달쪽에 있는 마을이다. 음진터 라고도 부르는데 북쪽이 트여서 환히 들여다 보인다 한다. 원 마을명은 북향촌(北向村)으로 '망북(望北)'이라 불렀다 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효자(孝子)인 홍우구(洪禹九)가 이 곳에 살면서 촌속(村俗)에 익숙하고 예의(禮義)가 뚜렷해서 이웃사람들이 그 곳이 배울만한 분이 거주(居住)하는 곳이라고 '헌대(獻垈)'라고 불렀다.
헌터 뒤에 있는 산이다. 청라 1리 나발터 앞산의 줄기이다.
예전에 청자를 구워 청(靑)자를 쓰고, 나주나(羅)씨가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청(靑)자와 나(羅)자를 합해 청라리(靑羅里)라고 부른다.
마을입구에 있는 정자로 연기에서 숨어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기은정 주위의 느티나무가 8개라서 팔고이정이라 하였다.
마을입구에 위치한 강릉김씨 김련의 효자문이다.
마을 뒤 우측 연기향토박물관 뒤에 있는 산으로 왕이 나올 곳이라 하여 왕재라 하는 말이 있고 이 산에는 전의이씨 묘가 많이 있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예전에 월하방이 있었으므로 '가레리'또는 '월하''월동'이라 하였다.조선말엽에 정치에 환멸을 느낀 민씨(閔氏)중의 한 세도가(勢道家)인 민후건(閔候騫)이 한양을 버리고 초야(草野)에 묻히기 위해 이 곳에 내려와 마을을 만들고 풍류(風流)를 벗삼아 살았다 하여 세월 좋은 마을이란 뜻에서 '월동(月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민후건의 호가 월하(月河)이다.
월하리에 있는 인조(仁祖)때의 효자 민후건(閔後蹇)의 정문(旌門)이다.
창고개 위쪽에 있는 마을을 '전동(典洞)'이라 부른다. 조선 인조(仁祖)때 인조가 이괄의 난(亂)을 피하여 공주(公州)로 피난할 때에 난을 피해 피난 온다는 말을 듣고 마을사람들이 공주 금강(錦江)까지 가서 왕(王)을 영접(迎接)하였었다.여기 사람들이 자기를 환대하여 주는 것에 놀란 인조는 여기 사는 사람들이 예전(禮典)에 바른 사람들이라 하여 그들의 마을을 '전동(典洞)'이라 부를 수 있게 하사하셨다.'작은 창고개''새터말'이라고도 부른다.
'월하'아랫편을 월계라 부른다. 마을 앞에 시냇물이 흐르고 예전에 서원(書院)이 있었던 마을이다.예전에는 장이 서는 청거리 시장이었는데 조치원 시장이 번성함에 따라 자연 여기 시장은 없어졌다. 예전에 서원이 있었던 마을이라 해서 '구서원'이라고도 부른다.창녕조씨(昌寧曺氏)의 집거지(集居地)이기도 하다.
월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부곡사(富谷寺)라는 절이 있었다.
'월계(月溪)'동쪽 냇가에 있는 모퉁이를 베루뱅이 라 부른다.
전동 서쪽에 떨어진 마을이다.
밀양박씨 박천붕의 오충신 정문으로 1900년도에 자손들이 이곳에서 살다 동면 예양리로 이전하여 살면서 이곳의 정려를 예양리로 이전했다.
가리란, 병아리를 가두어 놓는 싸릿대로 엮어서 만든 것인데 월하 3리의 모양이 가리와 비슷하고 뒤의 매봉산이 있으므로 매가 채가지 못하게 병아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리를 친 형상이다.발음을 편안하게 하다보니, '가래터'라 부르기도 하며, '닭계'자를 써서 월계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금당산(金唐山)에 용거(龍居)하는 설산(雪山)이 있고 용바위가 있으므로 용암(龍岩)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용암리(龍岩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위양골 서쪽에 있는 굴이다. 바위에 굴이 뚫렸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옛날에 용(龍)이 여기에서 승천(昇天)하였다 하여 큰 가뭄이 있으면 여기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한다. 용(龍)이 나온 굴이라 하여 용굴이라 부른다.
용암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때 '위양역(渭陽驛)'이 있었던 곳으로 역졸(驛卒)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그래서 '역말'이라고도 부른다.
용암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의 마을이름은 금당(琴堂)이었다 한다.
강다리는 집집마다 짚단을 세단씩 걷어서 모아놓고 마을사람들이 모여 동아줄을 꼬았다. 동아줄을 길게 해서 강다리(줄다리기)를 했다. 여자가 이겨야지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여자편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 온 1,000명이 살았다하여 ‘생천’이라 한다.
위양골 북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西面)에 속했었다. 이 지역엔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기와집이 많은 곳으로 와촌(瓦村)이라 불렀다 하는데 또한 기와를 굽던 곳이기도 하다.1914년 행정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와촌리(瓦村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전당골 앞들 가운데 있던 작은 산을 통뫼라 부른다.
효방동(孝坊洞)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대실(大室)의 부가(富家)와 함께 기와집이 많이 섰던 마을이라 해서 '기와말'이라 불렀다.기와말이 변해서 지와말로 부르게 되었다. 세조(世祖)때 화를 입은 충신 성삼문(忠臣 成三門)의 성씨(成氏)들이 숨어살기 위해 이곳에 정착하였다는데 지금은 16대(代)에 이른다.성삼문은 우계 자손(파)이고 이곳 성씨(成氏)는 동고 자손(파)인데 성삼문이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죽는 바람에 손(孫)을 잇기 위해 동고 파에서 양자를 보내 대를 이었다.지와말은 기와를 굽는 마을에서 연유하였다. 고려시대 이곳은 기와를 굽는 가마터였다.
호랑이가 살고 있었다. 밤이나 낮이나 마을을 바라보고 울었다 하는데, 호랑이가 궁해서 우는 고을이라 하여 마을을 '궁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욧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바위의 한 부분이 불쑥불쑥 튀어 나와 있어 바위가 전체를 숨기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은암(隱岩)'이라 부른다.
지아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400여년 전 창녕성씨 가문의 정착지로서 성씨의 종가(宗家)이며 부자로 살았다해서 대실(大室)이라 부르고 서계(西溪)라는 학자가 살았다.
와촌 1리 5반이며 대실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장수바위가 마을 북쪽 저수지위에 있다 해서 번암터(磻岩垈)라 부른다. 조선 초에는 흥덕장씨(興德張氏)들이 살기 시작하여 지금은 장씨촌(張氏村)으로 되었다.
대실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밤나무가 많다 해서 밤나무골이라 부르고 진원박씨(辰原朴氏)들이 5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이 곳은 산세(山勢)가 수려(秀麗)해서 마치 중국(中國)에서 경치(景致)가 으뜸인 전당(錢唐)과 흡사하다 하여 '전당(錢唐)'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쌍괴리, 전당리를 병합하여 쌍전리(雙錢里)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서면에 편입되었다.
전성말 서쪽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을 '전당골'이라 부른다.마을 뒤에 있는 정좌산(正左山)에서 고려와 원나라 장수가 몽고족 합단을 무찔러 섬멸하였다 하여 이곳을 진선동(鎭善洞)이라 불렀었다. 그 후 서기 1400년경 남양홍씨(南陽洪氏)와 강(康).유(兪)씨가 이 곳에 정착(定着)하여 산명(山明)이 수려(水麗)한 것이 중국의 전당(錢唐)과 흡사하다 하여 마을을 '전당(錢唐)'이라 부르고 '전당(錢唐)''전당골'로 불리운다.
전당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쌍괴'라 부른다. 마을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고개와 전당골 사이에 있는 마을로 상고(上古)때 군량을 쌓아 두었었다 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의 지역이 되었다. 초당산(草堂山)을 중간에 두고 양계곡(兩溪谷)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마을 아래서 합하므로 쌍류(雙流)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쌍류리(雙流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권텃골 뒷산에 있는 바위를 '일곱길바위'라고 부른다. 일명 장수바위라고도 부르는데, 바위길이가 일곱길 이나 된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
쌍류리에서 전동면 송정리로 넘어 가는 고개를 '솔티'라 하고 그 아래 마을도 솔티라 부른다.솔티 고개는 소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고 솔티 마을엔 예전에는 송현원(松峴院)을 두어서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마을이었다.
벌말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는 원래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재실(齋室)이 있는 곳이라 '송재실(宋齋室)'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전판서(前判書) 이승순(李承純)이 이 마을로 낙향(落鄕)한 후 부터는 그의 호(號) 월정(月亭)을 따서 그대로 '월정'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월정(月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권터골 뒤에 있는 골짜기를 성당(聖堂)절터라 부른다. 예전에 성당사(聖堂寺)란 절이 있었다 하여 '성당(聖堂)절터?'라 부른다.
벌말 북쪽 큰 산 속에 있는 마을이다. 큰 길가이면서도 피난처로 알려져 있다.임진왜란 때 이 곳에 천명이 피난하여 무사했다 한다. 그래서 천명의 목숨이 살아났다 하여 '생천(生千)'이라 부른다. 주거 성씨(姓氏)는 이(李), 서(徐)씨이다.
쌍류리 앞 벌판에 있는 마을을 벌말이라 부른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80여년 전에 가선홍씨(嘉善洪氏)가 여기에 정착(定着)하면서 새터를 잡아 홍씨(洪氏)들 40여호(戶)가 마을을 이루면서 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1914년 행정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행정구역상 신대리(新垈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불당골 서쪽 큰 골짜기 입구에 있는 마을을 '강골'또는 강동리(江東里)라 부른다.마을이 강의 동쪽에 위치한다 해서 그리 부른다.
신대리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300년간이나 남양홍씨(南陽洪氏)들의 집거지(集居地)였고 또한 그 후 거유(巨儒)박당 정용몽 등이 학자들을 영입(迎入)하여 송정(松亭)을 설립하고 유(兪),홍(洪) 양대성(兩大姓)의 젊은이들을 훈도(訓導)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마을 앞에 소나무 정자가 있다해서 송정(松亭)이라 부른다.
새터말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살구나무가 많아서 '살구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새터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울 뒤의 산을 지칭한다. 전씨네 산이라서 전주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말도 있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 뒷산이 성(城)처럼 되어 있으므로 '성재'또는 '성작골'그리고 '도맥(道脈)'이라고도 불려왔는데 남양홍씨(南陽洪氏)의 학자가 당호(堂號)를 성제(性劑)라 한 이가 있어 '성재'로 많이 불려 왔었다.1914년 행정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성제리(性劑里)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에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연기군 서면(西面)에 편입되었다.
과성(菓城) 앞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효종(孝宗)때 공판(工判) 홍우표(洪禹杓) 부자(父子)와 세문당(歲文堂) 홍우채(洪禹采)가 서당을 짓고 서생(書生)을 가르친 곳이라 하여 '서당골'이라 부른다
고려 충렬왕 17년 원나라에 반기를 들은 합단이 쳐들어오자 고려와 원나라 장수의 연합으로 크게 승리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제리에 있는 마을이다. 명거(名巨) 홍이경(洪履慶)의 손자(孫子)인 홍우(洪禹)가 그 당시 명유(名儒)로서 호(號)가 성제(性齊)였으므로 그가 있던 이 마을을 원성제(原性齊)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남양홍씨(南陽洪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군내면(郡內面)의 지역이었다. 예전에 기와를 구웠던 자리가 있다하여 '가마골''부동(釜洞)'으로 불려지던 곳으로 1914년에 행정개혁 때 치암리와 서면의 오룡리, 산숫골, 방죽안, 홍촉골을 병합하여 '부동리'라 하고 서면(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부동(釜洞)의 원 마을이다. 부동리에서 가장 빨리 마을이 형성(形成)되었던 곳으로 가마솥과 인연이 있는 원마을이라 해서 '원부동'이라 부른다. 가마자리 라는 곳이 밭 가운데에 있었는데 겨울에 눈이 아무리 많이 와도 눈이 쌓이지 않고 녹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가 집터가 좋다고 해 집을 지어서 없어졌다.
부동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꿩처럼 생긴 꿩바위가 있다해서 마을을'치암'또는 '꿩바위'라 부른다.
부동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충렬왕 17년에 쌍전리(雙錢里) 정좌산(正左山) 전투에서 고려와 원나라에 반기를 들은 합단을 무찌르기 위해 큰 가마를 설치하고 군병(軍兵)에게 식사(食事)를 먹였다 하는데 그 때 큰 가마를 설치(設置)했던 마을이라 하여 '가마골''부동(釜洞)'이라 부른다.
꿩바위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부근에 오룡주형(五龍珠形)의 명당(名堂)이 있고 지형(地形)이 오룡(五龍)처럼 되어 있다하여 '오룡동'또는'오룡골'이라 부른다.
오룡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서면(西面) 북쪽에 관불산(冠佛山)이 있고 봉산(峰山)이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미호천(美湖川) 동강(桐江)이 유유히 흐르고 산수(山水)가 수려(秀麗)한 환경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동네라 하여 산수동(山水洞)이라 부른다.옛 산소(山所)가 있다하여 산숫골, 산덕(山德)이라고도 부르며 200여년 전부터 기계유씨들이 거주하던 터전이다.
가마골 너머 동북쪽 산을 말하는데 동그랗게 함박같이 생겼다 하여 함박산이라 한다.
조선말엽엔 연기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봉(鳳)바위가 있어서 '봉(鳳)바위''부엉바위''봉암(鳳岩)'이라 불렀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군내면의 봉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봉암리라 하여 연기군 서면에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상고시대의 구리칼(銅劍), 구리창(銅戈)이 나왔으며, 마을이 매우 번창하여 전에는 “연기는 봉암으로 꾸려간다”는 말이 있었다.
봉암 동쪽에 있는 산이다. 봉바위가 있다 해서 봉황산(鳳凰山)이라 부른다. 여기서 상고시대(上古時代)의 동검(銅劍)'동시(銅矢)'동창이 나왔으며 마을이 매우 유복하게 번성하는 이유를 봉황산 때문이라고 한다.
서면 봉암리에 기양학교 라는 사립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농촌의 청소년을 깨우쳐 민족의 이념을 배워서 나라의 큰 일꾼이 되겠다는 청소년들이 위대한 꿈과 긍지를 높이기 위해 설립을 본 학교로서 서면 봉암리 이락당(二樂堂)에 있었다. 설립(設立)은 1904년 4월이었고 설립자는 민족애가 뚜렷한 윤준식(尹浚植)과 한일동(韓日東) 두 사람이 있고 초대교장은 윤준식이었다. 몇 년만에 폐교(廢校)했지만 많은 인재(人材)를 배출하였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지형(地形)이 용(龍)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그 뜻을 따서 기룡(起龍)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기룡리라 하고 연기군 서면(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동막골'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요화방(堯化坊)'이었다 하여 요화리라 부른다.
'망골'입구에 있는 비(碑)다. 효자(孝子) 홍연경(洪延慶)과 그 아들 홍연설(洪延卨),손자 홍우적(洪禹績), 홍우평(洪禹平), 증손 우방(禹防), 현손 홍득일(洪得一), 오세손 홍상덕(洪相悳)의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오세칠효(五世七孝)가 됨으로 영조(英祖)가 그 사는 마을의 이름을 '효교(孝橋)'라 고쳐 줄 만큼 홍씨(洪氏)들의 가문(家門)을 빛낸 효행비(孝行碑)다.
'망골'앞에 있는 골짜기를 시묘동(侍墓洞)이라 부른다.
기룡리(起龍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이 곳에는 홍씨가내(洪氏家內)에 일곱 효자가 났으므로 영조(英祖)가 마을 이름을 '효교'라 고쳐 주기도 하여 '효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전 평택임씨(平澤林氏)의 일가(一家)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 임순우(林舜宇)란 사람이 공주(公州)에서 이곳으로 이사와서 정착(定着)하면서부터 임씨(林氏)들이 이룩한 마을인데 그 당시 새로 임씨(林氏)들이 이룩하는 마을이란 뜻에서 신림(新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분청사기를 구웠던 골을 지칭한다. 예전에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워 나라에 진상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국화(菊花)가 많이 펴서 국화향기의 마을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그래서 국촌이라 불렀었다. 서기 1914년에 행정 개혁 때 이웃의 독동리'대박리'후덕리를 병합하여 국촌리라 하고 연기군 서면에 편입(編入)되었다.
마을 뒤에 기계유씨(兪氏) 묘(墓)가 있는데 그는 천성(天性)이 착실하여 어느 날 우연히 큰 고을에 갔다가 고아(孤兒)가 된 정동(鄭童)을 주워 다가 키웠다. 그는 머리가 좋고 글도 잘 읽고 해서 10여 년을 공부한 끝에 크게 성공(成功)하여 전라도(全羅道)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헌데 세월이 흘러서 자기를 키우고 크게 성공시킨 유씨(兪氏)가 죽자 그는 전라도에서 여기를 찾아와 은덕에 보답하는 뜻에서 묘지(墓地)를 정해서 유씨(兪氏)를 안장하고 유씨(兪氏)가 살던 이 마을을 후한 인덕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후덕동(厚德洞)이라 부르게 하였다. 후덕골 이라고도 부르며, 기계유씨(兪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 부락은 지형(地形)이 가늘고 긴 협곡(峽谷)으로 되어 있어서 마을을 가느실 또는 세곡(細谷)이라 부른다. 기계유씨(兪氏)가 많이 살고 있다.
'국말'동쪽에 있는 마을을 '독골'이라 한다.
'독골'아래에 있는 마을을 '대박(大朴)'이라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북일면(北一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창녕성씨들이 많이 살았으며, 그 후 결성장씨들이 살면서 '봉서재'라는 서당을 개설하였다. 마을 뒷산을 고산(高山)이라 불렀으며, 이곳에 고산사(高山寺)란 절이 있었다. 지금은 산을 '비룡산'이라 부르고, 고산사는 절터만이 그 흔적을 알아 볼 수 있으며, 또한 아래 부분에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이 곳은 '복골'이라 불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개혁시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고복리(高福里)라 하고 연기군 서면(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서고(西高)'뒤에 있는 산을 비룡산이라 부른다. 사람이 소리를 치면, 이 산에서 울려 퍼지는데 돌을 떼어낸 후부터는 잘 울리지 아니한다고 전한다. 산삼이 있으므로 용이 승천(昇天)하기 위해선 산삼을 먹으려고 이곳에 심었으며 용이 승천(昇天)하는 산이라 해서 비룡산(飛龍山)이라 부르며 산삼이 있으므로 산아래 물줄기에는 잉어가 올라오지 못한다.
봉서재는 고복리 서고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옹(鳳翁) 장원주(張元胄,1634-1700)가 만년에 후진 양성을 위해 창건한 서당이다. 320여 년 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근대교육의 모체인 동광학교가 설립된 크고 작은 역사를 창조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동고와 서고를 통털어 '고산골'이라 부른다.
동고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면]
남면은 연기군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금강은 금남면과 경계를 이루고, 또 금강을 따라 선사유적이 분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아왔던 곳이다.
월산리의 고인돌과 진의리 상모골의 청동기 유적은 선사시대 중 청동기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54개국 중 하나였으며 천안지역의 목지국(目支國)과 공주지역의 불운국(不雲國)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백제 때에는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에 연기(燕岐)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에 속했으며 고려 현종9년(1018)에는 청주에 속했으며 명종2년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4년에 전의현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1416년 다시 연기현으로 환원하였다.
조선말기인 고종32년 1895년에 연기현이 연기군으로 바뀌어 연기군청을 연기현에서 관아로 쓰던 건물에 연기군청을 만들고 업무를 보다가 1911년 연기군청을 조치원으로 옮기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전의군과 합하여 연기군(燕岐郡)이라 하였다. 그때부터 이곳은 연기군의 남쪽에 위치한다하여 남면(南面)이라 불렀으며 관아로 쓰던 건물은 연남초등학교의 전신인 배달학교가 되었다. 지금은 남면의 연기리가 과거 연기현의 중심도시로 연기향교가 있으며, 관아 흔적은 연남초등학교 교정에 남아있는 초석들이다.
남면 양화리에 가면 부안임씨(扶安林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600여년 동안 그 터전을 지켜온 것은 입향조 임난수(林蘭秀)가 이곳에 정착하여 자손을 퍼트린 것이다. 임난수는 고려의 충신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 아래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면서 모든 벼슬을 버리고 금강변에 은거하였는데 이곳에 정착하게 된 동기가 전월산을 바라보니 산이 마치 수풀림(林)자와 같아 자신의 성과 비슷하므로 이곳에 터를 잡는다. 그리고 매일 전월산에 올라 고려의 서울인 개성을 향하여 절을 하고 묵상에 잠겼는데 그곳을 상려암(想麗岩)이라 부르고 그가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마을 가운데에 있다. 은행나무가 있는 곳을 숭모각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임난수가 살던 곳으로 그가 죽자 그의 손자인 임중이 이곳에 사당을 지은 것이 오늘날 숭모각으로 변하고 임난수의 사당은 독락정으로 옮겼다.
5강 8정 중 강이름이 다섯인데 오강(吳江-동진 하류), 초강(楚江-부강 하류), 금강, 백강(백마강), 청강(백마강 하류)이며, 8정은 8개의 정자로 합강정(合江亭), 독락정(獨樂亭), 한림정(翰林亭), 탁금정(濯錦亭), 금벽정(錦壁亭), 사송정(四松亭), 청풍정(淸風亭), 수북정(水北亭) 이다. 옛날에는 논산과 강경의 상선들이 이들 8정을 지날 때에는 나루세를 물어야 했다고 한다.
진의리, 양화리, 방축리, 갈운리 뒷산에 원수산(元帥山)이 있다. 산 모양이 붓의 끝과 같이 뾰족하여 문필봉이라고도 불렀고 봉우리가 큰 것 작은 것 두 개라 형제봉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원수산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연기대첩에서 제1차 전투는 서면 쌍전리에서 공주금강까지 30여리간 시체가 즐비하도록 승리를 거두었고 이때 살아난 합단군이 다시 정비하여 원수산에 진을 치고있던 고려 군사와 싸워 승리를 거두어 이곳을 2차 전투지로 부른다. 이때 높은 장수가 지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원수산”이며 산의 동쪽 중턱에는 수백년 동안 지내오고 있는 원수산제가 해마다 십일월 초하루 자시(子時)를 기하여 지내고 있다.
각지명유래
조선말엽부터 연기군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여기에 있는 금병산(金甁山)이 수려(秀麗)하므로 수산(秀山)이라 부르다가 수산(水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국사리?대천리를 병합하여 수산리(水山里)라 부르게 되었다.
'수산'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대천(臺川)이라고도 한다. 강진이씨(李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 곱고 깨끗하여 단단한 토지 위에 튼튼한 인물(人物)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태천이라 부른다.
'수산'동남쪽 둔덕에 있는 마을이다. 국사봉(國士峰) 아래가 되는데 순흥안씨(順興安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둔덕(屯德)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둔더기라 부르며 '둔덕''국사봉''국사리(國士里)?라고도 한다.
'둔더기'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있는 금병산(金甁山)이 수려하여 수산(秀山)이라 부른다 하는데 변하여 수산(水山)이라 부른다.
조선 태종(太宗)때에는 공주(公州)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公州郡) 삼기면의 지역이었다. 이 지대 앞을 흐르는 '금강의 여울이 길다'해서 '긴여울''진탄(眞灘)''진의(眞儀)?라 불려 왔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창동(倉洞)''덕성동''가정리''성전리''송현리'와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 '복룡리'를 병합하여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어 진의리(眞儀里)가 되었다.
구리(舊里)에 있는 장군봉(將軍峰)이 마치 장군들이 대좌하고 원수가 출진(出陣)하는 형상이라 해서 진탄이라 하였다. 진탄(陣灘)이 곧 '진여울'과 통하는데 '진여울'이란 여울이 길다는 뜻에서 금강변(錦江邊)의 진여울이라 부른다.
진여울 옆에 있는 마을이다. 창동(倉洞), 모창골 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창말'이라 부른다.
진여울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백동(白洞)또는, 백야동(白也洞)이라고도 부르는데 '희여울'이란데서 연유한 지명(地名)이며, 지금은 변해서 '흰여울'이라 부른다.
약수터로 통하는 찬샘이 하나 있으며, 그 샘물이 피부병과 속병에 효력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이 이 샘물에 찾아온다.
'진여울'동쪽에 있는 마을로 철종(哲宗)때의 학자 전재(全齊) 임헌회(任憲晦)가 꿈을 꾸는데 꿈에 갈매기떼가 별 밭에 서있는 것을 보고 이 마을을 성전이라고 지었다 한다.
부하를 통솔하는 형상의 바위로 고려 충렬왕 때 연기대첩시 장군이 이곳에 올라 지휘했다고 한다.
조선 태종(太宗)때에는 공주(公州)로 합쳐지기도 했었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삼기면의 지역이었었다. 지대가 낮은 산등성이에 있으므로 일찍부터 개화(開化)한 지역이다.낮은 산등성이에 있다 해서 '밀마루''종촌(宗村)'이라 부르다가 '장터'로 통칭하기도 했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종촌리(宗村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었다. '밀마루'가 종촌(宗村)이라 부름은 종(宗)은'밀종', 촌(村)은 '마루촌'이란 이치에서 그리된 것이라 한다. ‘장대(場垈)'라고도 부른다. 전에는 '도리미'라 불렀다.
'밀마루'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외딴 산에 있는데 이 곳에 도학군자(道學君子)의 묘지(墓地)가 있고, 선비가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다 하여 '도산(道山)''도림(道林)'또는 '도리미'라 부른다. '도리미'란 편안한 마을의 속칭인데 방우간도림(放牛干桃林)의 평화촌(平和村)이란 뜻도 된다.
'뽕나무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토지가 비옥해서 논 한 마지기에 벼가 석 섬씩 난다 하는데 삼대군수가 나온 마을이라 해서 '셋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샛골?이라 부르게 되었다.'화옥동(禾玉洞)''옥동(玉洞)''싯골'이라고도 부른다.
이초려(李草廬)선생이 옻이 옮아 고통을 겪다가 옻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기를 지나다가 잡간 쉬게 되어 마침 곁에 있는 샘물을 떠서 세수를 하고 물을 마셨더니 병이 완쾌되어 유명하게 되었다. 옻병을 고친 우물이 있다 해서 옥정(玉井)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촌리에서 지내는 사당제다. 조선말엽에 이곳을 지나던 황씨(黃氏) 한 사람이 아주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그 후 세상을 떠났다.그 후 황씨(黃氏)들의 제자들이 스승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는 뜻에서 사당에 재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던 것이 이 곳 사당제(祠堂祭)의 처음이라 하는데 이 곳에 재물을 차려 놓고 정성을 드리면 복(福)을 받는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당제를 지낼 때 모여든다. 사당제는 일제 말에 소멸되었다.
마을에서 서쪽의 골이다. 현재 골프장이 들어섰는데 골이 길어서 거지가 이곳에 왔다가 골은 깊고 집이 보이지 않아 울고 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십리고랑이라고도 부른다.
조선말기인 1895년에 전의군이 신설되어 원성리는 전의군 대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원당과 삼성당의 이름을 따서 원성리라 하고 전의면에 편입되었다. 원성리는 풍수(風水)로 보아 용의 형국을 한 대나무(竹)의 뿌리처럼 생겼다 하는데 청룡(靑龍)의 모양으로 마디가 고르게 되어 있어 대뿌리(竹根)라 하여 끈기 있는 선비의 안식처로 통하는 지역이다.
대뿌리 앞에 있는 정문으로 조백련(趙百連)의 아내 열녀 경주김씨와 효자 조명빈(趙命彬), 조수빈(趙秀彬)의 정문을 한데 모아 세 칸을 세우고 효열문이라 한다.
마을뒷산이 성을 둘러쌓은 것 같다하여 고성산 이라 부른다.
뒤산의 모양이 노루처럼 생겼다하여 '노루목'이라 부른다. 옛날 포수들이 여기에서 노루를 잡으면 천벌을 받는다 하여 사냥을 하지 못한 구역으로 노루가 많이 살았다.
원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청룡꼬리가 대나무의 뿌리처럼 마디지고 길게 뻗어 있다 하여'대허리','죽근(竹根)'이라고도 한다.
삼성당 위쪽에 있는 마을로 파평윤씨 들이 많이 살았다. 옛날엔 제당이었던 곳이라 원당이라 부르며 현재는 군부대가 들어와 마을이 없어졌다.
옛날 어느 스님이 바랭이를 짊어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곳의 형국을 보고 세 번 보고 갔다하여 삼성당이라 부르고 양택(良宅)으로는 좋은 지형으로 인정하고 있다.
옛 면사무소 앞의 들을 말하고 구한국시대에 이곳에 감옥이 있었다 한다.
남면 연기리에서 월산리(月山里)를 돌아가다 보면, 산기슭 약(約) 5리(里) 정도에 연(連)한 곳을 화석소(花碩沼)라 부른다. 봄에는 꽃을 보고, 여름에는 녹음을,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설송(雪松)이 가경(佳景)을 이루는 여기는 더구나 한암(恨岩)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일품(一品)이라는 풍류인들의 말이다. 시객(詩客)들이 작시(作詩)하는데 벼룻물이 마를 새가 없다 해서 화석소(花碩沼)라 부른다.
연기리 서부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 조선 때에 이 곳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동헌터가 있는 마을이므로 '위사터'라 부른다.
연기리 일부에 위치한 마을이다. 예전부터 고을원이 여기에 있을 때 관청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서부(西部)라 부른다.
연기리(燕岐里) 동부(東部)에 위치(位置)한 마을이다. 이 곳에 향교(鄕校)가 옮겨와서 지여 짐에 따라'교촌', 즉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교촌'이라 부른다.
연기리(燕岐里)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고려 때에는 보통리(洑通里)에 읍(邑)이 있었으나, 조선초엽에 읍(邑)을 연기에 환도하여 연기현(燕岐縣)이라 하였으며, '환재골'은 그 당시 나라의 한재 창고가 있다하여 '환재골'이라 하였다.환재(換財)란 옛날 춘궁기에 나라의 양곡을 백성이 빌려서 봄의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가 가을 추수기에 상환하는 제도를 '환재(換財)'라고 말한다.
연기 1리 서부(西部)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금은 교촌(校村)으로 향교가 이주하였지만 예전에는 향교가 있었다 하여 '구향교말'이라 부른다. 조선중엽(朝鮮中葉)에 이 곳의 현감(縣監) 박현감(朴縣監)이 자기(自己)의 선영(先塋)을 여기에 묘(墓)로 모시기 위해 향교를 다른 곳으로 이사시켰다.
연기리 북쪽에 있는 고개다. 조선 때에는 병기창고(兵器倉庫)가 있었던 곳으로 상당히 중요하게 간직했던 고개다.
연기리에 있는 연기현 객사가 있었던 곳이다.
연기리 서쪽에 있는 연기현 동헌의 터로 현재 느티나무가 무성하게 서 있어서 옛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아사터 서쪽에 있는 길로 옥(獄)이 있어서 붙여졌지만 지금은 없다.
일제시대 때까지 장이 섰으나, 1950년대 없어졌다.
옥거리가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 얼음을 보관했던 곳이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公州郡) 장원면(長元面)의 지역으로서 원래 여기에는 산과 계곡(溪谷)에 소나무가 많았고 서원(書院)이 즐비하게 많아서 송원리(松院里)라 하였다.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공주군 장기면에 편입(編入)되었다가 서기 1973년 7월 1일에 연기군 남면(南面)에 편입되었다.
'원촌'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큰 소나무가 많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송계동(松溪洞), 송계(松溪)라 부른다.
골말이라고도 하며, 송계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느티나무, 정려가 있는 곳이다.
효(孝)마을이라고도 불렀다.'머레'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금호서원(錦湖書院)의 터가 있다 하여 '원터'라 부르며 '새터''원촌(院村)'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조선시대 때 전라도 사람들이 한양(漢陽)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다가 서원(書院)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여기가 한양이냐고 물을 정도로 서원이 많이 있다 하여 '원촌(院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터에 있는 광해군 때 명나라를 위하여 출전하였다가 전사한 유지걸(柳智傑)의 충신정문이다. 후에 공주시 의당면 송학리로 옮겼다.
'송대'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있다 해서 '대소골'이라 부른다.
'대소골'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이 곳엔 암자(庵子)가 있었다.여기 있는 암자(庵子)에서 불공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마을이다. 많은 자식을 얻어 나가는 '암자(庵子)'가 있다 해서 '만자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만자골''만자동(滿子洞)'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머레라고 부르다가 후에 원호(遠湖)라 불렀다. 송원리(松院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수원박씨(水原朴氏)와 유씨(柳氏)가 많이 살고 있다.'원터'에서 멀리 떨어져 금강(錦江)가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이 마치 먼 곳에 보이는 호수(湖水)가의 마을이라 해서 원호(遠湖)라 부르며, '머레'라고도 부른다.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옻, 피부병 등과 특히 미친 사람이 이 샘물을 먹고 나았다고 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현(燕岐縣)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남면(南面)의 원암리(元岩里),학천리,월룡리,내산리,평촌리와 그리고 공주군(公州郡)의 이웃마을의 일부(一部)를 병합하여 양화부곡(良化部曲)의 이름을 따서 양화리(陽化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었다.
예전 이곳에 '앵청이'라는 아가씨가 주막을 하고 있었는데, 뭇 사내들이 이 곳에서 쉬어가곤 하다가 나루터 이름도 그 아가씨 이름을 따서 '앵청이나루'라고 부르게 되었다.앵청이 나루는 강 건너 반곡과 연결되어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앵청이라는 처녀가 우연히 알게 된 새우젖 장사 총각과 만나 백년가약을 약속하였는데 그 총각이 새우젖을 가지러 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갔다가 약속된 날짜에 돌아오지 않자 그곳에 주막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매일같이 기다렸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여인은 남자를 기다리다 뭇 사내의 유혹을 모두 물리치고 처녀로 늙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갈 수 있는 세 갈래의 길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화리와 진의리를 통털어 이르는 마을 지명이다.
세거리 서쪽마을로 현재 숭모각이 있는 곳이다. 고려 때 전서공 임난수의 은거지이며 예전에 정자가 있던 곳이라 정자동이라 부른다. 30여호가 살고 있다.
전월산에 있는 바위이다. 이곳에 정착한 고려장군 임난수가 매일 이곳에 올라 고려조정을 생각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세거리 아래편에 있는 마을이다. 가라지(강아지풀)가 많았으며 지형(地形)이 학(鶴)의 형국(形局)이라 해서 '가학이'라 부른다.
세거리 바깥편에 있는 마을이다. '굴말''구을촌(仇乙村)''곡촌(谷村)''바깥세거리''외삼(外三)'이라고도 부른다. 상고시대에는 청류부곡(淸流部曲)이 있었다.
전월산 정상부에 있는 우물로 용천(龍泉) 또는 영천(靈泉)이라 부른다.
남면 양화리, 진의리에 있는 산이다.
양화리에 있는 은행나무를 압각(鴨脚)이라고도 부른다.이 고목(古木)은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에 심어진 나무로 고려충신 전서공 임난수(林蘭秀)가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지절(不事二君之節)로 이곳에 은거하면서 집 주변에 은행나무 2그루와 백자나무 1그루를 심은 것인데 백자나무는 일제시대에 고사(枯死)하고 은행나무 2 그루만 살아서 오늘에 전하고 있다.
양화리 북쪽에 있는 꽃나무를 임흥(林興)의 회화나무라고 말한다.
양화리(陽化里) 월용곡 뒤편에 있었던 소(沼)를 열녀소(烈女沼)라 한다.인조(仁祖) 병자호란 때 생원(生員) 임상(林尙)의 처(妻)인 한산이씨(韓山李氏)가 난리 속에 참살소(慘殺沼)한 곳이라 해서 열녀소(烈女沼)라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公州郡) 삼기면(三岐面)인 지역으로서 마을이 소나무가 무성할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마을 한 가운데에 못이 있었고 그 못 안에 섬이 있었는데, 그 섬에 우거진 소나무가 풍류여서 여기를 '송담(松潭)'이라 불렀다.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노은리''나성리'의 일부(一部)를 병합하여 송담리(松潭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南面)에 편입(編入)되었다.연못을 '방죽'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도랑으로 경지개량 되었다.
'송담리(松潭里)'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마을 뒤에 묘한 산이 있으며, 고려말엽에 이 곳을 지나던 임포장군(林圃將軍)이 말하기를 '여기 지형(地形)은 갈만형(葛蔓形)이라 깊은 갈대밭이 장차 변해서 곡식을 생산하는 들이 될 것'이라 하여 갈미(葛米)라 부르게 되었다. '갈산(葛山)'이라고도 부르며 부안임씨(扶安林氏)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또 다른 설은, 산들이 칡넝쿨처럼 뻗어 있다 해서 갈산(葛山)이라 부른다 한다.소갈산(小葛山), 대갈산(大葛山) 등으로 부른다.
조선 고종때 효자 임명즙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로, 순종 때 세웠다. 표석(標石)골, 윗뜸, 골뜸, 궝말뜸, 송담 뒷산, 서원재, 북망산, 방죽산, 방아마루, 생마루, 됨선뜰, 무수밭들, 산곳배미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군내면의 지역(地域)이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보통리(洑通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南面)에 편입(編入)되었다.일제시대 때는 각 마을마다 '연성(燕城)부락'이라고 불렀다.'연기(燕岐)'와 '연남(燕南) 초등학교'의 연(燕)자는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물이 헛 데로 빠졌다고 해서 붙여졌다. 현 비행장 자리이며, 비행장은 1970년대에 생겼고 현재 헬기훈련장으로 활용 중이다.
백제 때 큰절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 금불상 2개가 출토되었다.1개는 일본으로 반출되려다가 되돌아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이곳은 50여 년 전까지 연기군수 주관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었다.
진주정(鄭)씨의 묘가 있는 곳으로, 옛날 정씨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머슴살이를 하다 어머니가 죽자, 가마니에 싸서 달밤에 이곳에 묘를 썼다. 이때,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쫓겨오면서 살려달라고 하자 산발을 시켜 묘 앞에서 울게 하여 위기를 모면케 해 주었다. 목숨을 건진 여자와 정씨는 부부가 되어 그 후, 부자가 되었다.
예전에 연기리가 큰 고을이었을 때 이 곳은 큰 장터였었다. 물건 중에서 제일 잘 팔리는 것이'새우젓'이었다 하는데 그 새우젓을 싣고 배가 금강(錦江)따라 올라와선 여기에서 거래가 되었다.
문화류(柳)씨 비석으로 위에 다리가 세워져 절반 이상 덮여져 있는 상태이다.
'잣띠'재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연기리로부터 보(洑)로 통해 본다 해서 '보통이'라 부른다 한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제주고씨(濟州高氏), 진주강씨(晋州姜氏)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두메에선 큰 마을이다.
'성산'북쪽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백자목(柏子木, 잣나무)이 있었다. 잣띠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듯 하다.
'방축(方丑)'은 조선말엽 '도선'이란 도사(道師)가 이 곳을 지나다가 마을을 본 즉, 마을의 지형(地形)이 방에 든 소같이 생겼다 하여 '방축골''방축'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제(百濟)때는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남면의 일부(一部)였었다. 서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방축리(方丑里)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에 속했다. 그전에는 '관대마을'이라 불렀다. 도선국사가 황우(黃牛)가 외양간에 갇혀 있는 형국이라 하여 '방축리'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방죽이 있었으므로 방축이라고도 한다.
도래마을이라고도 하고, 방축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지형(地形)이 황소의 도래(뚜레 ; 고삐의 일종)처럼 생겼다 하여 이 마을을 '도램말'이라 부른다. '근곡(根谷)'이라고도 부른다.
임헌회(林憲晦)외에 6인을 모신 서원이다.
'눌왕리'군자(君子)라는 옛말에서 유래(由來)된 지역(地域)으로 '군자림(君子林)'이라고 부르던 지역이기도 하다. 눌왕산(訥旺山)아래 위치(位置)하므로 '느랑이'라 불렸던 곳이다. 본래(本來) 연기군 남면(南面)의 일부(一部)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눌왕리(訥旺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南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청룡'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에 기묘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그 바위를 ?왕바위?라 부르며 여기 마을도 그 바위 따라 '왕바위'라 부른다. '왕암(旺岩)'이라고도 부른다.
'눌왕리'에 있는 마을이다. 영조(英祖) 4년(1728년)때 신천영(申天永)이 난(亂)을 일으켰을 때 연기의 원님이 이곳에서 피난하였다. '원곡(元谷)'이라고도 부르며 강진이씨(李氏)들이 많이 산다. 큰느랑이(元旺)라고도 불렀다.
'새터말'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마주보는 왕자봉(旺子峯)이 이 마을에서 바라보면 왕자(王子)가 스승 앞에서 글을 배우는 형상(形象)이라 하여 '문암(文岩)'이라 부르며, 또한 '무남골'이라고도 부른다.
'느랑이'동쪽에 있는 고개를 '느랑이'고개라 부른다. 조치원에서 대전(大田)과 공주(公州)로 통하는 고개인데, 고려 충렬왕 17년(1291년)에 한희유(韓希愈), 김흔(金?)등이 원(元)나라 장수 설도간(薛?干), 나만알대왕(那蠻?大王)과 함께 '원수봉'과 정좌산(正左山)에 웅거하였다가 크게 침입하는 거란군사들을 맞아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이기고 이 고개에서 또 크게 이겨 공주(公州) 고마나루까지 추격 섬멸하였는데, 적의 시체가 30여리에 널려 있었다. '의랑티(儀浪峙)'라고도 부르는 고려 때의 격전지이다.
백제시대 웅진성을 방어하는 성(城)이 있다 해서, 나성(羅城), 나리재라 부르다가 서기 1913년에는 공주군 요당면에 속했고, 서기 1914년 행정구혁 개혁 때 이웃 구역(區域)을 병합하여 나성리(羅城里)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옛날에는 나루재라 불렀는데 그 후, 성(城)이 있어 나성(羅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독락정(獨樂亭)위에 있는 성이 토성(土城)이어서 나리재와 토성을 합쳐 '나성'이라고 불렀다. 수로가 발달했고 나루터에서 나리재로 변형되었다고 본다.
나성(羅城)있는 전(前) 기호서사(岐湖書社)의 터로서, 서하(西河) 임춘(林春), 전서(典書) 임난수(林蘭秀), 부사(府使) 임목(林穆), 위의장군(威毅將軍) 임흥(林興) 등 삼대(三代)의 네 위를 배양하였던 곳이다. 고종(高宗)5년(1868)에 헐리고 현재 임씨가묘(林氏家廟)가 되었다.
나성(羅城)앞 금강(錦江)에 있는 나루터로, 나성(羅城)에서 금남면 대평리(大平里)로 건너가는 나루터를 '나성나루터'라 부른다.
조선 초에 양양부사(襄陽府使) 임목(林穆)이 이 곳에 독락정을 짓고 한가히 남은 해를 보냈으며 경제(敬齊) 남수문(南秀文)이 글을 짓고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시(詩)를 지어 찬양한 정자(亭子)다.
연기군 남면의 지역(地域)으로서 '높은 정이''고정(高亭'이라 불렀는데, 서기(西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고정리(高亭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었다.
'향교말''아랫말'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학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어서 많은 인재(人才)를 배출함으로 '향교말'이라 부른다.
고정리 뒤에 있는 산이다. 고려말엽에 어지러운 국운(國運)을 바로 잡기 위해 당시 3정승(三政承)이 국론(國論)을 협의(協議)한 산이라 하여 국사봉(國士峰)이라 했다.
조선말엽에 곽정승(郭政丞)이 이 곳에 선친(先親)의 묘(墓)를 마련하고 집에 돌아갈 때 그 때 따라오던 스님이 말하기를 지금 곽정승이 끼고 있는 은가락지를 부처님께 시주하면 자손대대(子孫代代)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것이라 하여 그 은가락지를 스님께 시주를 하고 선친(先親)의 묘(墓)를 여기에 썼더니, 그 후 자손(子孫)이 후하게 영화를 누렸다 하는데, 그래서 이 고개를 '은(銀)고개''시주고개'라 부른다.
'높은 정이'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 모양이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형국(形局)이라 한다. 예전에 범이 산 속에 있는 마을에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므로 포수(砲手)들이 몰려 들어와선 여기에서 여장을 하고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하는데 그래서 범을 지키는 곳'범지기'또는 호준(虎?)이라 부른다.
'반월터'라고도 하며 마을 형태가 반달 같은 지형이다.
높은정이에 있으며 이성계(태조), 정조, 태종 3왕의 친필이 모셔져 있다하여 어서각이라 했다.
'높은 정이'남서쪽 산 속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소학(巢鶴)이란 학자가 있어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여기로부터 많은 인재(人才)가 배출되었다 하는데 그 학자와 연유한 마을이라 해서 '소학당'을 약(略)해서 '소학'이라고 부르다가 변해서 '소지(小地)'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남면(南面)에 속하였으며 산이 칡넝쿨처럼 엉키어 얼기설기 서려있고 여기에서 물이 귀해 구름을 봐도 물을 보는 것처럼 반가워해야 할 지역이라 하여 갈운(葛雲)이라 하였다.
'갈운리'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연기읍에서 5리(里)가 되는데 여기에는 부안임씨(扶安林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갈운리'위쪽에 있다하여 '윗갈운리'라 부르며 '갈운리' 아래에 있는 마을을 '아랫갈운리'라 부른다.
개발터 뒷산에 모정(茅亭)이 있었는데 6.25 때 없어졌다. 이 모정은 마을 서당(書堂)으로도 사용되었다. 일제시대 때 이 모정에서 임정철 씨가 서당 훈장을 하였다.
'원수봉'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검새울''검사'라고도 부른다. 고려말 김씨(金氏) 한 사람이 이 곳을 지나다가 산세(山勢)를 본 즉, 산에 금줄기가 뻗었다 하여 이 곳 지명(地名)을 금사(金砂)라 지었다. 문사(文士) 임낙용(林樂龍)의 호(號)도 금사(金砂)라 한다.
금사(金砂) 서쪽 길가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때 '금사역'이 있었다 하여 그때부터 금사역(金砂驛)이라 부르던 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400여년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음지말 할머니 미륵'과 '양지말 할아범 미륵'이 마을입구에 서 있다. 6.25 때부터 '미륵계'를 해왔으며 논일을 해서 쌀을 걷어 정월 열나흘에 해마다 정성껏 미령님제를 지내는데 재앙을 막고 풍년농사와 주민이 평탄대로 한다는 믿음으로 주민 전원에게 소지를 올리며 소원성취하기를 빌어오고 있다. 그 덕인지 오늘날까지 마을은 무탈하게 지내고 있으며 6.25동란 때 마을의 젊은이 6~7명이 참전했을 때,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주민들은 미륵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제를 올리는 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으며, 제관들은 살생을 하지 말며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말고 부정에 관한 모든 일을 삼가야 한다.
갈운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앞산의 모양이 복호형(伏虎形)이고, 이 마을은 '엎드린 개발'과 같다 한다.
자지동(紫芝洞)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 근처엔 자지(紫芝)란 약초가 있어서 약초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자지턱골'이라 부른다.
[금남면]
금남면은 연기군에서 가장 큰 면으로 금강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금남면(錦南面)이라 하였다. 모든 문명이 강을 끼고 일어나듯 금강 중류에 위치한 금남면에도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 예로 금강 상류 지역인 청원군 비루봉 동굴과 하류인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금남면 지역에도 고인돌과 선돌 등 청동기시대 유적들이 많이 산재하여 있다. 박산에서 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2기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1기는 도로공사 중 없어지고 다른 한기는 농부가 나무아래 옮겨 놓아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봉기리에는 3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마을 동쪽인 허무니 고개 너머에 금강을 바라보고 1기가 있고 마을 서쪽으로는 새여울 고개에 2기가 있다.
장재리 마을에도 3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1기는 도로공사 중 파손하려는 것을 안승주 교수가 공주대학교로 이전하였고 2기는 마을에 남아 있다. 신촌리 금남 초등학교 남쪽에 1기의 고인돌이 있고, 석교리에는 마을 서북쪽에 2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용포리에도 가동 넘어가는 고개 입구에 1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처럼 연기군 내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산재해 있는 금남면 일대는 연기군에서 사람이 살았던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다.
금남지역은 현재 연기군에 속해있지만 과거 조선시대까지는 공주지역이었다. 백제 때에는 소비포현(所比浦縣) 이라 불렀고,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왕도를 옮긴 후에는 웅진(熊津)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공주의 명탄면(鳴?面), 양야리면(陽也里面)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연기군에 편입시키면서 금남면이라 불리었다.
산 너머 달전리에는 문절사(文節祠)가 있다. 문절사는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삼족이 화를 당한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성삼문(成三問)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 성삼문 선생의 영정을 모시게된 것은 이곳에 창녕성씨가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성삼문의 당숙인 성희가 귀양살이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가자 세조는 ‘꼴도 보기 싫다’며 한양에서 300리 밖에 나가 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린 성희는 처음에 신탄진쪽에 자리 잡았다가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남면 양화리에 터를 잡으려 했으나 그곳에 이미 터를 잡고있던 부안임씨에게 밀려 현재의 달전리에 터를 잡고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수백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성삼문 선생의 사당은 본래 그가 태어난 홍성에서 외손 박호가 봉양하다 1903년 고종의 어명으로 족후손인 성주영이 봉사손으로 결정되면서 연기군 금남면에 사우를 건립하였고, 1967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로 ‘문절사(文節祠)’라고 써주었다. 문절사에서 가까운 대박리에는 초정약수가 있다. 초정(椒井)이란 후추처럼 톡 쏘는 맛을 내는 약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탄산수라고도 한다. 이 물은 위장병과 피부병, 당뇨, 등 속병을 낫게 하는 신비의 물이다.
또 영대리에는 밤절이라는 절터가 있는데, 옛날 이곳에는 청룡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 주변에는 밤나무가 많았지만 신기하게 밤은 열지 않아 그저 화초처럼 자랐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밤나무에 주렁주렁 가지가 휘어지도록 밤이 열렸다. 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떨어진 밤을 주워 몇 가마를 쌓아 놓았는데, 그 해 이괄이 난을 일으켜 이를 피해 공주로 가던 인조 임금이 이 절에 머무르게 되었다. 왕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밥을 가져오라 했지만 절에는 쌀이 없어 대신 수확한 밤을 찌고 굽고 하여 진상하니 임금과 신하가 모두 맛있게 먹고 또 몇 가마니를 가져갔다. 훗날 이괄의 난이 평정되고 인조는 이곳에서 얻어먹은 밤이 생각나 이 절을 밤절[栗寺]이라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금남면>각지명유래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연기군에 속하여 금강의 남쪽에 있는 곳이라 금남면이라 했다. 용포리는 계룡산의 용(龍)자와 금강포구의 포(浦)자로 이루어져 금남면에 속하였고, 1946년 큰 장마로 인하여 대평리(大平里)가 강으로 변하자 그 주민들이 이곳 용포리로 옮겨오는 동시에 시장도 함께 옮겨져서 그대로 대평장(大平場)이란 시장이 서고, 금남면의 행정 중심마을이다.
금남지서에서 동쪽마을을 '쑥티'라고 한다. 오랜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이 왕명을 어겼다하여 마을을 모두 불태워 버렸는데 그 불탄 자리에 이상하게도 쑥이 나오기 시작하여 쑥밭을 이루었다 한다. 쑥이 많은 곳이라 하여'쑥티'라고 부른다. 쑥애(艾)자를 써서 애티라고도 한다.
예전에 탑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쑥티에서 남쪽마을을 지칭한다.
쑥티의 동쪽 산을 지칭한다. 예전에 이곳에 성이 있었는데 토성과 석축이 혼합하여 조성되었다. 성재 안에는 강기호 씨가 자리 잡아 살고 있으며, 집을 지을 때 그곳 성재에서 나온 돌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
현 대평감리교회와 버스 정류장 사이를 구렁목이라 한다. 아홉 마리의 용이 있는 형국의 명당을 지칭하며 좁은 길목에 사람이 많이 다닌다는 뜻도 있다.
용포 3리 삼거리 중심지에 큰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를 잉어바위라 하는데 예전에 금강이 이곳으로 흘러서 가동 앞으로 해서 성덕으로 흘러 내려갈 때 이곳 바위에는 잉어가 많이 살았다. 바위의 생김새 또한 잉어처럼 생겼지만 워낙 많은 잉어를 이 바위에서 잡았기 때문에 이 바위를 잉어바위라 한다. 현재 금남면 장터마을이다.
뒷골에서 동남쪽으로 신촌가는 골을 꽃절골 즉, 꼬초골이라 한다. 이곳 너머에 '꽃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포리에서 서쪽 산을 가리킨다. 강씨들의 강당(제실)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에는 소 멍에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것을 아름답다는 뜻으로 바꾸어서 부르게 됐다. 또한 참나무가 많아서 참나무가 자(字)를 썼다고도 한다. 200여년 전에는 한 채의 집이 있었는데 현재는 많은 집이 들어섰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었다. 1910년 감성(柑城)에 있는 시장을 이곳으로 옮기어 대평장이라 했고 1914년에 이웃 '삼거리' '하거리' '고사동'을 병합하여 대평리라 했다. 1946년 큰 장마로 동네 360호가 모두 유실되어 강으로 변하고 그 이재민이 거의 용포리로 옮기는 동시에 시장도 그 쪽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새로 지은 집 10여호가 있고 대평리는 폐리(廢里)가 되어 행정 구역상 용포리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구대평리라 부른다. (지적상에는 대평리로 존재)
매년 겪는 물난리지만 1946년 6월에 많은 양(800㎜)의 비가 내렸다. 금강제방이 위험수위까지 강물이 불자, 금남 소방대원들은 경보 싸이렌을 울리며 집집마다 돌면서 모두 피신하기를 권했다. 제방을 통하여 용포리, 이암리와 강당산으로 사람들이 피하자 둑이 터져 마을과 대평들이 삽시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대평리 사람들은 강당산에 올라가 가재도구와 집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조선초엽 태종(太宗)에 의한 태자(太子)의 난(亂)때 신천강씨인 신덕왕후 강씨(康氏)의 일족이 화를 입게 되어 이곳으로 피난하여 숨어 살았는데 그후 송시열(宋時烈) 등 많은 학자들의 탄원에 의해 관원(官員)의 등용(登用)이 허락되었다. 그때 영조조(英祖朝)의 후손인 강씨부자(康氏父子)가 거듭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어 뒷산을 '중광사(重光寺)'란 절을 세우게 하였다 한다. 중광사를 세운 산의 산세(山勢)가 마치 주발을 엎어 놓은 형국이라 하여 '바리미 발(鉢)'과 같은 산이 있다 해서 '발산리(鉢山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발산리의 옛이름이다. 마을서편의 산이 주발을 엎어놓은 형국이라 하여 '바리미' 또는 '발산(鉢山)'이라 부른다 한다. 가운데 있는 마을을 '가운데 바리미'라고 부른다.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산(山)이 마치 성(城)처럼 둘러싸여 있고 소나무가 밀집되어 있다. 감나무가 마치 성을 쌓은 것처럼 빙 둘러 쌓였다고 해서 감성(柑城)이라 불렀으며 백제때에 이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었다. 현재 산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백로 수 천마리가 늘 안식하고 있으며,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1910년 전(前)까지 장이 크게 섰던 지역이다. '장대리'라고도 불렀으며 대평리가 생기기 이전에는 금남에서 제일 컸던 장터이다. 일본사람이 들어와 대평리를 만들고 시장을 만들어 감성에 서던 2일, 7일장이 대평리로 서서히 이전하면서 이제는 장터였던 터만 남았다.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동' 과 공주군 반포면의 '용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두만리(斗滿里)'라 했다. 두만리라 한 것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대(地帶)라 해서 옛날엔 두메안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두만리의 원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 부락이 생길 때 처음 생겼고 두만리의 산골 마을에선 가장 처음 있었던 마을이라 해서 '원두만'이라 부른다. 제주고씨(濟州高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두만리는 부자가 많이 산다는 뜻으로 두만(斗滿)이라 쓰며 두뫼(산골)안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었는데 일제시대 두만(斗滿)으로 와전하여 표기했다 한다.
'장터거리'라고도 하는데, 두만과 감성 경계에 있는 들이다. (감성과 두만에 반씩 들어가 있음)
감성리와 두만리의 경계에 있는 논이다. 작은 거친목과 큰 거친목은 남북방향으로 길게 걸쳐져(이어져) 있다. 거친목 고개 너머에 천수답이란 논이 있었는데 삼남의 원님이 이곳을 지나(거쳐) 이·취임해오면 임금님은 그 논에 모를 심었느냐고 물어 보았다. 모를 심었으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들었다. 즉, 천수답으로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아보는 것이었다.
조선말엽에 공주군 반포면(公州郡 反浦面)으로 변경되었다. 용(龍)이 하늘로 올라간 큰 연못이 있다하여 '비룡소(飛龍沼)'라 하였고 일제시대에 '용담(龍潭)'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에 맹사성이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하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비룡소'라 지었다 한다.
용담 1리 동쪽마을을 한옥골이라 한다. 예전에는 이곳 마을의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고을원님까지 살았다.
마을 북쪽 밭기슭에는 마을 입구라는 표시로 백산(白山)이라 쓰인 1m50cm 크기의 돌이 세워져 있는데 한옥골에도 이와 같은 바위가 있었으나 현재는 가자골에만 남아 있다.
성재 밑에 있는 큰 바위로 공주군 반포면에서 금남면 용담리로 들어오거나 용담리에서 반포면으로 지날 때면 으레 이곳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치 대문을 들어서고 나가는 듯 하다 하여 문바위라 부른다.
1998년도부터 지내기 시작한 이 제는 유성구, 공주시, 연기군이 돌아가면서 매년 3월 1일 제를 지낸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의 명당이 있다해서 풍수설(風水說)에 따라 '동고지' 둥그지'는 '황용(黃龍)'이라 불렀다 한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때 연소동·서북리·원각리·대지리를 병합하여 황용리(黃龍里)라고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동네뒷산(마을서쪽)이 용처럼 굽이굽이 내려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리가 원황용이고 2리가 황용이다.
마을 남쪽에 있는 들이다. 전하는 말로는 어덕미들 옆에 큰 둥구나무가 있어 거기에 어린아이 시체를 매달아 짐승(새)등이 먹게 하였다. 옛날에는 돌림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아 죽은 아이의 병이, 새가 쪼아 먹고 멀리 날아가면 없어진다고 믿었으며 이것을 '덕대'라 했다.
산의 모양이 닭 같다하여?닭미?라고 부른다. 또한 '서북'이라고도 부르는데 부락 서산이 고형(鼓形)이어서 고(鼓)자를 복(卜)자로 해서 서복(西卜)이라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에 속했었다. 동네가 10리가 넘도록 길다고 하여 영대(永垈)라고 불렀으며 길이 빛날 터라하여 영대리(永垈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연기군 금남면에 속했다.
양둔대는 영대국교에서 남쪽으로 오르면 두 갈래 길이 있다. 두 길에서 밤절쪽이 음지라 하여 음둔대라 하고, 그 건너편 마을이 양둔대라고 한다.고려때 거란의 군사들이 침입하여, 진을 쳤던 곳이다. 군사들이 진을 쳤던 자리라하여 '둔대(屯垈)'라 부르며 '우려울'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영대리에서 가장 큰 마을에 영대초등학교가 있다. 마을 옆의 시냇물이 여울진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하여 '우려울'이라 부른다. '명탄' '명촌'이라고도 부르는데 전에 공주군 명탄면의 소재지였기 때문이다.
검배 위쪽에 바위가 여러개 있는데 모두 검은 색이다. 바위가 검다 해서 '검바위'라 부르며 검은 바위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하여 '검배' '검암'이라고도 부른다.
옛날부터 삼을 많이 심었다하여 처음엔 '삼밭골'이라 부르다가 '삼마곡' '신대'라고 바꿔 부르다가 '삼박골'이라 고정되었다.
삼박골 위에 있는 마을로, 이 곳에서 계자(芥子)가 많이 나왔다하여 '계량이'라 불렀는데 '지랭이' '계랭이'라고도 부른다.
영대초교에서 남쪽으로 오르면 가장 끝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형국이 풍수에서 청룡자리이며 청룡이 누운 형국이라 한다. 여섯 채의 민가가 있다.
음달둔디 안쪽 금병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옛날에 절이 있었다. 또 산에 밤나무가 무성하나 열매가 열지 않다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로 갈 때 이곳에서 묵었는데 당시 탕기만큼 큰 밤이 열어 진상했더니 인조가 맛있게 먹고 밤절이라 하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 절 이름은 청림사(靑林寺)였다.
조선시대 많은 풍류객(風流客)들이 쉬어갔던 곳이다. 산막(山幕)이 많았었다 한다. 마을 앞산이 반달같이 생겼다하여 '달밭' 또는 '월전(月田)'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달전리(達田里)'라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鳴灘面)의 지역이었다.
달전리의 마을이 12개마을로 형성됐다는 뜻이다. 12달전은 원달전, 닭재, 성동, 지루고개, 원당이, 흥개터골, 망골, 신기, 광중터, 안산, 욧골, 샴넘어를 말한다.
마을회관 있는 곳을 지칭한다. 마을 뒷산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금계포란)의 명당자리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밭 위쪽에 있는 마을을 성동(聖洞)이라 부른다. 예전에 성대감이 이 곳에서 살았는데 성인(聖人)처럼 성품이 고와서 성동이라 불렀다. '승동'이라고도 한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鳴灘面)에 속해 있었다가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박리(大朴里)라고 하여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이 곳 산의 모양이 함박꽃과 같다하여 '함박금이' 즉, 큰 마을이란 뜻에서 '대박'이라 부르다가 '대박리(大朴里)'라 부르게 되었다.
'초정골' '초정장터' '신촌'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북쪽에 있으며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초정이 있어 음력 8월이 되면 물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줄을 섰다고 한다.
'초정골' 냇가에 있는 새 우물을 초정약수터라 부른다. 물맛이 쏴아 하고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하여 물을 마시러 오는 사람이 많다.
마을 뒷산을 지칭한다. 좌측은 꽃산, 우측은 샴방들이라 부르는데 이 산을 대박산 혹은 함박산이라 한다.
뒷산에 박참판(朴參判)의 묘소(墓所)가 있어서 박산(朴山)이라 불리워왔고 또한 산모양이 작약과 같이 생겼다하여 '작약골'이라 불렀었다. 1914년 행정 개편에 따라 회덕군 구즉면의'신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박산리(朴山里)'라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현 박산리에서 동쪽에 있는 마을을 장동이라 하는데 이곳 사람들이 살다가 지금의 박산리로 한집 이사 오더니 현재는 장동에 인가가 없고 박산리에 현 마을이 형성되어 번창했다.
예전에 이 곳을 공주군 탄천면 작약동이라 했다. 작약은 함박꽃을 지칭하는 말로 마을 뒷산의 형국이 함박꽃이 필려고 몽우리진 형국에서 나온 말이다.
마을앞의 들판을 지칭한다.
조선말엽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하였다가 이곳엔 '추리산'이 있으므로 한자(漢字)로 옮겨 '추산'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축산'이 되고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축산리'라 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예전에는 독수리 축자를 써서'축산'이라 하다가, 일제시대부터 소축자를 써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리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축산 건너 구석에 있는 마을이다. 구룡정주형(九龍淨珠形)의 명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국이다.
축산리에서 금천리 금강대도 입구 남쪽 산중턱에 있는 마을이다. 법성암과 용바위가 있다.
바깥 봉천에서 동쪽으로 골을 따라가면 대광사 못 미쳐에 서너 채의 민가가 있다. 이곳을 안봉천이라 한다. 황새미 아래쪽에 마을이 위치한다 해서 봉천(鳳川)이라 했다.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다가 서기 1914년에 청사동·학봉리를 병합하여 '금천리(金川里)'라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 지대는 소가 누운 형국(形局)의 명당이라 하여 옛날엔 소내, 우계(牛系)라 부르던 곳인데 변하여 '쇠내' '금천(金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천리의 옛 이름이다.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의 명당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 금천 2리 중방 부근에서 일제시대때 금을 캤다고 하여 '소내가' '쇠내' '금천(金川)'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금천리 남쪽에서 남서쪽까지 뻗어있는 산을 금병산이라 하는데 금으로 만든 병풍이 쳐져있는 형국이다. 금병산 앞산을 고깔봉이라 하기도 하고 소가 끄는 극징이라 하기도 한다. 금병산은 써레를 상징한다. 대전이 한밭이며 큰밭을 소가 극징이로 갈고 써레질 한다는 형국이다.
금병산 앞에 뾰족한 산이 꼬갈처럼 생겼다 하여 고깔봉이라 하고, 일명 '극징이'라고도 한다. 금강대도가 이 곳에 터를 잡기 이전에는 '메봉재'라고 불렀다.
원금천리에 있는 금강대도 도주 사택의 동쪽에 대형 비석이 있고 그 앞의 우물에서 물이 나오며 그 앞에 송아지 형국의 바위가 젖을 먹는 형국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우복동'이라하여 몇 채의 민가가 있었는데 금강대도의 대형 비를 세우면서 이주하였다. 원래는 앞의 향나무에서 물이 나오고 그 물을 이곳으로 나오게 했다.
조선말엽까지 공주군 양야리면에 속했었다. 영재라는 고개가 있으므로 '영재' 또는 '영티'라 부르다가 '영치리(永峙里)'가 되었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영치리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절이 있었다하여 '부처골'이라 부른다. '불곡(佛谷)'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5층석탑이 있다.
부처골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양야리면 이었으나 명탄면과 횡사지점(橫斜地鮎)에 있었으므로 사양(斜陽)이라 불렀다 한다.'사양' '사양골'이라 불렀으며 일제시대에는 '사양(砂陽)'이라고도 불렀다.
원래는 길옆에 집이 띄엄띄엄 있어서 도독동(道獨洞)이라고 불렀으며 길가에 외롭게 산다는 뜻이다. 물이 남쪽 골짜기에서 흘러오므로 남곡(南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公州郡 鳴灘面)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백정 3, 4호가 살았는데 그들을 가르켜 '남산백정'이라 불렀었다.
동네 남쪽을 가리킨다. 현재 열여섯 채의 민가가 있다. 예전에 마을 입구에 양야리면의 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명탄면이라 했다.
뭇중골이라 하기 전에는 수락동이라 했는데 그 이유는 물이 떨어지는 폭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중들이 살았다하여 뭇중골로 변하였다.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을 지칭한다. 금남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이 산을 중심으로 남곡, 황룡, 금천, 영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동네에서 서남쪽을 가리키며 이곳을 넘으면 신촌과 영티리가 나온다. 주위에 와골, 부처당, 바랑골이 있고 고수미재를 회심재라고도 한다. 와골에는 옹기 굽던 가마터가 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초오개동' 과 '봉기리' 일부를 병합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의 연화정수형(蓮花淨水形)의 명당(名堂)이 있는 부용봉(芙蓉峰)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화정수형(蓮花淨水形)의 명당(名堂)이 있고 해발 222m의 산이다. 부용리 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서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의 명당이라 해서 명산(名山)으로 꼽힌다. 부용봉 주위에 묘를 쓸 때는 비석이라든지 석물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연꽃의 형국인 부용봉이 가라 앉는다하여 전해오는 풍습이다.
부용리의 옛 이름이다. 이곳은 산이 깊어서 약초가 많이 난다. 특히 다섯가지 약초가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부용 1리의 옛 이름이다. 부강과 부용리를 잇는 나루를 새오개나루라고 한다.
봉기리에서 부용 1리로 들어오는 곳을 지칭한다. 옛날 파리를 쫓던 대감이 이곳에 와서 놓치자, 자신의 행동이 허무하다면서 한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부용 2리 앞의 나루를 용댕이나루라고 불렀다. 누런 소가 강을 건너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음력 정월 14일에 어두울 때 제를 지낸다.
금남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6km 지점에 있는 곳이 석교리(石橋里)이다. 옛날에 돌로 놓은 다리가 있다하여?돌다리?라 하였는데 변하여 '석교리(石橋里)'라 하였다. 백제(百濟)때는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공주목에 속해 있다가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 지역이었다. 현재는 금남면 석교리라고 부른다.
돌다리 앞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새말'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뒤편(서남쪽)에 있는 산이다. 이 산의 형국 때문에 무인이 많이 배출된다.
돼지가 드러누워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형국으로 돼지가 젖먹이는 자리를 금석초등학교(돼지새끼들이 노는 곳)로 보고 있다.
옛날 스님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동네를 살펴보니 마을사람들에게 이 동네는 탑을 쌓아야 인물도 나오고 잘 될거라 이야기를 해 그때 동네 곳곳에 3개의 돌탑을 쌓아 놓았으며 음력 정월 보름날 탑제를 지낸다.
마을에 2개의 고인돌이 있다. 남방식 고인돌이며 성혈이 있다. 고인돌은 땅속에 묻혀 있으며 위의 돌 끝부분만 보인다.
조선말엽에는 공주목 명탄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반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기리'라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이 지역은 뒷산에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의 명당(名當)이 있다하여 풍수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며 또한 여기에 연유해서 지명을 봉기(鳳起)라 부르기도 하였고 앞에 새여울이 있으므로 새여울이라 불렀으며 변하여 '사려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제시대에는 공주군 명탄면 전탄리였다가 금남면으로 편입되면서 '봉기리'라 하였고 '전탄리'라는 지명은 여울이 있어 물살이 화살같이 빠르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봉기리는 계룡산 가장 끝에 있는 맥(하맥)으로 지관들이 봉황귀소형 명당터가 있다하나 아직 찾지 못했다. 봉기리는 지세가 앞산은 높고 뒷산은 낮아서 자손들이 이곳을 나가야 잘산다는 말이 있다.
금남면 반곡리, 석삼리, 장재리, 석교리 경계에 있는 산을 괴화산 이라 부른다. 산의 높이가 200m되는데, 꼭대기에 느티나무가 있다. 이 산에 괘등형(掛燈形)의 명당이 있어서 삼거리에서 바라보면 환하게 불이 켜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한다.
세워져 있는데 넘어지면 넘어진 쪽의 처녀들이 미친다.
뒷산으로 성이 있어 성재라 하며 산에 올라가면 그 흔적으로 돌무더기들이 곳곳에 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의 지역으로서 남면의 전월산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지형이 소반과 같으므로 '반곡(盤谷)'이라 불러 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반곡리라 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반봉포란형(班鳳抱卵形)의 명당(名當)이 있다.
장승배기 옆에 있으며 강가에 있는 논을 지칭한다.
공주군 명탄면의 지역으로서 오랫동안 선비들이 많이 머무르다 간 곳이기도 하다. 이곳엔 돌로 만든 장승이 있어 석삼동(石三洞)으로 부르다가 석삼리(石三里)가 되었다 한다. 연기군 금남면에 속해있다.
석삼의 원 마을을 '원석삼'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 해서 '원석삼'이라 부른다.
안골 밖에 있는 마을이다. 돌로 만든 장승이 셋 있다하여 '돌삼골' '석삼(石三)'이라 부른다.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여기에 서 있는 돌장승은 각각 다르다. 서쪽의 것은 흰 바위, 남쪽의 장승은 수리바위, 뒷산에 있는 장승은 말 바위라 부른다.
1리와 2리 마을 입구에 세 개의 길쭉한 바위가 있었고 그 위에 가로의 돌을 각각 올려놓았는데 이 바위를 장승바위라고 했다. 그런데 위에 올려놓은 바위 때문에 2리에서는 처녀가 집을 나가고 동네가 좋지 않다고 해서 2리에서 밤에 몰래 돌을 내려놓으면 1리에서 다시 쌓고 또 내려놓으면 다시 쌓고 해서 이 마을 농지정리 할 때 2리에서 바위를 몰래 묻어버렸다.
옛날 이곳에 홍판사 라는 벼슬을 한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자기 눈에 보이는 지역 모두를 자기 소유로 했으며 그래서 그 골짜기를 자기것 이라고 하고 이름을 홍골이라 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양야리면 지역으로서 뒷산에 장절(長寺)이 있어서 '장재골' 또는 '장재'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산리와 석삼동 일부를 병합해서 장재리라 하고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동네가 길쭉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마을은 장수하는 마을이다.
마을의 남쪽 산을 지칭하며 예전에 큰절이 있어서 장사곡(長寺谷)이라고도 했다. 현재는 산으로 되어 있으며 터만 전한다.
조선말엽까지 공주군 이었다. 마을 앞의 금강이 여울져 흐르므로 호여울이라 했고, 조선시대 창고가 있어 '동창'이라 부르기도 하다가 1914년 행정 개편 때 호탄리(湖灘里)라 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호(壺)자를 쓰는 것은 마을입구의 형태가 병의 목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탄(灘)자는 예전에 금강이 마을입구로 흘렀는데 여울져 흘렀다하여 '호여울' '호탄'이 되었다 한다.
마을에 사창이 있다해서 사창(社倉)이라 불렀다 한다. 대평리의 동쪽에 있는 창고라 하여 동창이라 불렀으며 일제시대에는 이곳 사창을 정리하여 임시 면사무소로 쓰기도 했다.
예전부터 이곳의 지명을 '호여울' '우래올'이라 했다. 고려 충렬왕 17년 몽고합단이 연기 정좌산으로 쳐 내려왔을 때 삼 장군(한희유, 김흔, 인후)에게 패하여 공주로 도망갔는데 다시 몽고로 가려고 강을 건너기 위해 얕은 곳을 찾는 도중 이곳이 여울져 흐르므로 건너 양화리 부근으로 가다가 원수산에서 진을 치고 있던 삼 장군에 패하여 섬멸되었다.
현재 금호중학교 있는 곳을 안터 라 한다. 예전에 이곳에 처음 안씨들이 정착하여 살았다하여 안터 라고 한다.
마을 들어가는 입구가 둘이다. 그중 우측의 큰길가에 돌탑이 세워져 있고 이것을 할아버지 탑이라 한다.
좌측 입구에 돌탑이 있는데 그곳을 할머니 탑이라 한다.
옛날부터 마을이 있었던 곳이 아니고 조선시대부터 마을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옛날은 이곳에 꽃이 많이 피는 지대였고 꽃절 이라 불리 우는 절이 있었다. 새로 마을이 생긴 구역이라 하여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화사(花寺)라 한다. 마을에서 동남쪽 가장 깊은 골에 있다. 예전에 꽃이 많은 절이 있다하여 꽃절 이라 부르다가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을 비우고 현재에는 절터만 남아 있으며 주위에 기와편이 발견된다.
중광사(발산), 동산절(용포), 꽃절(신촌) 세 절을 가리켜 삼절이라 부른다.
마을에서 동남쪽 웃말 동네 앞에 고양이 바위가 있었다. 고양이 바위 옆에 촛대바위 2개가 있었는데 이것이 남근석이다. 현재에는 고양이 바위와 촛대바위(남근석) 모두 없어졌다.
현 금남초교 자리를 지칭하며 이곳이 매화처럼 낮에는 환하게 피었다가 밤에는 지는 형국이라 한다.
현 마을 동쪽 금호중학교로 가는 공동묘지를 지칭한다. 비단천금이란 죽은 사람을 많이 묻어 억 금이 묻힌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촌리 뒤에 있는 산을 비학산 이라 부른다. 산의 모양이 학이 날아오르는 형국이라 하는데 여기에 명약(名藥)이 있다하여 지관(地官)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다.
조선말엽에는 반포면(反浦面)에 속했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도동' 과 '명암리'두 마을을 합쳐서 '도암리'(道岩里)라 하여 1973년 7월 1일 대통령(大統領) 제6542호에 의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에 구멍이 있어서 소리를 지르면 울려 나오는 바위 아래 마을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독골의 서쪽에 있는 골을 이야기한다. 예전에 이곳에 정자가 있었고 그 정자를 '모정'이라 불렀다. 그곳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60여 년 전에 없어졌다. 금남국교가 생기면서 이곳에서 배우던 학동들이 금남국교로 입학했다.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반포면(反浦面)에 속해 있다가 1914년에 행정 개편 때 '성덕리(聖德里)'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옛날부터 덕을 쌓아서 많은 사람을 깨우치게 했는데 그러한 사람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서 동쪽에 있는 산이 소머리형국이라 '두우봉'이라 부르는데 두우봉 밑에 예전에 큰 호수가 있었다 한다. 이 호수를 지칭하여 동쪽에 있는 호수, 즉 동호리(東湖里)라 한다.
동호리 부근의 마을을 성덕이라 부르는데 옛날부터 덕을 쌓아서 남을 깨우치는 사람이 살며 그 덕을 이곳까지 번지게 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성덕이라 부르고 마을 앞의 들판을 '성덕들'이라고 부르며 덕을 쌓는 사람들이 먹는 곡식을 키우는 들이라 그렇게 되었다.
마을 서쪽에 위치하며 말이 금강을 향해 물을 먹고 있는 형태라 하여 갈마(馬)라고 하였는데 그곳의 고개를 가마고개라고 한다.
마을입구 우측에 있는 산을 청룡산 이라 하고 그곳에 있는 재를 청룡재라 부른다. 마을에서 바라보면 풍수지리상 좌청룡의 자리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말엽엔 공주군 반포면에 속하였다. 이 곳 지형이 산신령(호랑이)이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영곡(靈谷)'이라 지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곡리'가 되었다가 1972년 7월 1일 대통령에 의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이 서 있다.
군사를 소집하여 싸움터에 나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랑이가 앉아있는 형국이다. 예전에 돌림병이 많이 돌아 병이 든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영곡 1리에는 둥구나무가 네 개 있었다. 그것을 일컬어 일명 '상다리'라고 하는 데 그 이유는 영곡리가 금남에서 지대가 가장 높고 높은 지대에 수령이 몇 백년 되는 둥구나무가 네 개가 있어 상을 놓은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형국을 보고 예전에 이곳으로 부자들이 많이 몰락하여 결국은 빈털터리로 마을을 뜨곤 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부러진 상다리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성덕교의 남쪽에 있는 바위로 예전엔 이곳의 물깊이가 6자나 되었다 한다. 또한 금강이 이곳에까지 닿아 이 소에서부터 육지의 시작이란 뜻도 있다. 여섯 개의 큰 바위로 이루어졌다.
한양에서 살던 사람이 여기에 살았다 해서 한양공이라 불렀다.
한림정에 있는 고개로 넘어가면 공주가 나온다.
[전의면]
전의면은 백제때 구지현(仇知縣)이라 불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금지현(金池縣)이라 고쳐 부르다가 고려 때부터 전의(全義)라 불렀다. 전의라 불리게 된 것은 백제시대 이곳에서 전씨(全氏)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전의 다방리 비암사에서 발견된 석불비상에 새겨진 ‘전씨’라는 명문과 이 일대의 지명이 전의(全義)·전동(全東)이라 한 것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조선시대인 1414년에는 연기현과 전의현이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라 했다가 1416년에 각각 환원하여 다시 전의현(全義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전의군이 되어 7개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기군에 흡수되어 현재는 연기군 전의면이 되었다.
전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비암사(碑岩寺)이다. 과거 비암사는 “뱀절”이라 불렀다. 옛날에 비암사에는 비구니(여승)들이 기거하였는데, 어느 날인가 웬 낯선 남자가 해가 질 무렵에 나타나 밤새도록 탑돌이를 하기에 여승은 법당에서 눈치만 살피다 다음날 아침에 남자가 사라진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그 후 이 남자는 계속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밤마다 나타나 탑돌이를 하였고, 궁금해진 스님은 남자에게 물을 떠주면서 그 연유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직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때가 아니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님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남자는 탑돌이를 마치고 사찰 동쪽 산 정상으로 올라가 산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바위 밑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남자가 굴에 들어가자 궁금해진 스님도 따라 들어갔는데, 스님은 커다란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구렁이가 하는 말이 “내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늘에 기도를 하니 비암사 삼층석탑에서 백일동안 탑돌이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탑돌이를 하였다. 백일동안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는데, 하루를 남겨 놓고 너에게 들켜버렸으니 이제 다시는 사람이 될 수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더란다. 스님은 자신의 잘못으로 구렁이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곳에서 구렁이의 수발을 들며 일생을 보냈다. 이와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오기에 비암사는 뱀절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비암사의 원 뜻은 사뭇 다르다. 1959년 발견된 불상이 마치 비석처럼 생겼고 이 불상을 비상(碑像)이라 부르는데, 비상이 있는 절이란 뜻으로 비암사(碑岩寺)라 불렀던 것이다. 이 비상이 제작된 연도는 673년이다. 비상에는 「전씨(全氏)가 주동이 되어 계유년(673년)에 백제의 역대 국왕과 대신, 발원자의 7세 부모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어 시납하고 매년 4월 15일에 제를 올렸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근거로 비암사에서는 매년 4월 15일 백제대제를 지내고 있다. 비암사는 연기군 전의면에 있는 사찰이지만 백제권에서는 유일하게 백제왕들에게 제를 지내는 사찰로 나라에서 관리해야할 중요한 사찰이다.
전의면에는 산마다 산성이 쌓여져 있다. 운주산성(雲住山城)이라 부르는 산성은 원이름이 고산산성(高山山城)이다. 전의의 형국이 솥모양으로 생겼는데, 증산·고산·운주산이 솥의 발처럼 전의를 받치고 있다. 증산은 전의 북쪽에 있고 고산은 전의동쪽에 있으며 지금의 운주산을 가리킨다. 원래의 운주산은 전의남쪽 이성, 금이성, 비암사가 있는 산을 지칭하며 이성은 전의 이씨 시조인 이도(李棹)가 이곳에서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도의 본래 이름은 이치(李齒)였다. 그는 대대로 공주 금강변에서 살면서 나룻배로 금강을 건네주는 일을 하는 집안에서 자랐다. 고려 초기에 왕건이 견훤과 싸움을 하기 위하여 금강변까지 내려왔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있을 때 이치가 어려움을 잊고 건네주어 승리하였으므로 왕건은 이치에게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전성군(全城君)에 봉하니, 이때부터 이도(李棹)라 하고 전의이씨 시조가 되었다.
전의면 각지명유래
읍내리는 전의면의 중심마을로 1895년 전의군이 선설 될 때 읍내면 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전의군이 연기군에 편입되어 전의면이 되었으며 장터, 북동네, 서동네, 남동네, 덕현을 병합하여 읍내리라 정하고 전의면에 편입하였다. 전의면의 중심으로 행정, 금융, 치안, 교육 등 각 영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경부선 철도와 1번 국도가 마을 중심을 관통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옛날 전의군의 토호로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전의군 곳곳에 땅이 많이 있었고 집도 중앙지(북부)에 크게 위치하고 있었으나 그 아들 이진사대에 와서 조금씩 몰락하여 현재는 모두 떠나버렸다
전의초등학교 자리가 객사터이다. 조선세조 10년(1464) 2월 30일에 왕이 속리산 구경하고 온양온천으로 가는 길에 여기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으며,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공주 쌍수정으로 잠시 피난 갔다가 이괄의 난이 평정되매 한양으로 올라갈 때 여기에서 자고 갔다는 객사이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드나드는 많은 군인들이 묵고 가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마을 평안과 풍년을 기약하기 위하여 춘추 중월(仲月) 상술일(上戌日)에 제사를 드리는 풍습에 따라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사직단은 옛날에 전의현 동헌 서쪽 지금의 읍내리 남쪽산 중턱에 있었고 최근까지 기우제를 지냈었다.
북숲나무 밑에 옛날에는 나무로 장승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콘크리트로 장승을 만들어 세웠으며 제사는 10여년 전부터 중지하였다.
전의현 청사 서북쪽에 99칸짜리 구옥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신대옹이 살다가 전의초등학교 관사로 사용했으며 1994년도에 헐어 현재는 밭으로 변하였다.
동교리 교동에서 현재의 향교자리로 이동하여 왔다.
옛날 이곳에 향교가 있었다 하여 동쪽마을과 구교동의 이름을 따서 동촌리(東村里)라 부르다가 동교리(東校里)가 되었다.
동네 북쪽의 산을 말한다.
마을 북쪽 비듬나무 있는 곳에 옛날 돌무더기가 있어 정월 14일날 제사를 지냈는데 도로 확장시 없어졌다.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 예전에 향교가 있었다하여 동교리라고 한다. 동교 1리 동촌, 동교 2리 도랏말, 하교동, 동교 3리 상교동, 동교 4리 교동의 4개 리로 나뉘어져 있다.
조선시대 1895년에 군을 신설할 때 전의군의 대서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천서'와 '관정동'의 이름을 따서 서정리라 하고 전의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서쪽에 내가 흐르는데 서부천이라 하고 서쪽의 냇가라 하여 천서라고 하며 동력, 곤말, 감바위 등이 있다.
일명 '시루성' 또는 '증산성'이라 하며 마을동쪽에 있다.
비룡천 아래가 되는데 처음엔 '감실' 또는 '강실'이라 하다가 마을 앞에 느티나무가 여러주 서 있으므로 감정골 또는 관정골로 변하여 부른다.
서정리와 유천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가 249m이고 봉우리가 뾰족하여 비룡산천형(飛龍山天形)의 명당이 있는 산으로 옛날에는 중계소가 설치되었다가 개인에게 불하하여 현재는 도서 연수원이 들어있다. 옛날 박정희 전대통령이 헬리콥터로 이곳에 온 적이 있어 용이 올라간 것을 박 전대통령에 비유하기도 한다.
마을에서 서쪽의 골이다. 현재 골프장이 들어섰는데 골이 길어서 거지가 이곳에 왔다가 골은 깊고 집이 보이지 않아 울고 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십리고랑이라고도 부른다.
조선말기인 1895년에 전의군이 신설되어 원성리는 전의군 대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원당과 삼성당의 이름을 따서 원성리라 하고 전의면에 편입되었다. 원성리는 풍수(風水)로 보아 용의 형국을 한 대나무(竹)의 뿌리처럼 생겼다 하는데 청룡(靑龍)의 모양으로 마디가 고르게 되어 있어 대뿌리(竹根)라 하여 끈기 있는 선비의 안식처로 통하는 지역이다.
대뿌리 앞에 있는 정문으로 조백련(趙百連)의 아내 열녀 경주김씨와 효자 조명빈(趙命彬), 조수빈(趙秀彬)의 정문을 한데 모아 세 칸을 세우고 효열문이라 한다.
마을뒷산이 성을 둘러쌓은 것 같다하여 고성산 이라 부른다.
뒤산의 모양이 노루처럼 생겼다하여 '노루목'이라 부른다. 옛날 포수들이 여기에서 노루를 잡으면 천벌을 받는다 하여 사냥을 하지 못한 구역으로 노루가 많이 살았다.
원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청룡꼬리가 대나무의 뿌리처럼 마디지고 길게 뻗어 있다 하여'대허리','죽근(竹根)'이라고도 한다.
삼성당 위쪽에 있는 마을로 파평윤씨 들이 많이 살았다. 옛날엔 제당이었던 곳이라 원당이라 부르며 현재는 군부대가 들어와 마을이 없어졌다.
옛날 어느 스님이 바랭이를 짊어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곳의 형국을 보고 세 번 보고 갔다하여 삼성당이라 부르고 양택(良宅)으로는 좋은 지형으로 인정하고 있다.
옛 면사무소 앞의 들을 말하고 구한국시대에 이곳에 감옥이 있었다 한다.
삼성부락에서 고성부락으로 가는 뒷산을 말한다.
6?25때 포탄껍질로 만든 종으로 동네모임이 있을 때나 마을의 급한 일을 알릴 때 사용하는 종이며, 죽근에 있다.
1895년 전의군이 신설될 때에는 대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사리','생송리'를 병합하여 송사리로 하였다가 1929년 새롭게 흥하는 지역이라 하여 신흥리라 고쳐 부르고 전의면에 편성되었다.
모래 많은 마을이라 하여 사토(沙土)라고 부르며 신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너멍골에 있는 바위로 이성산과 금이성에서 장수들이 바위를 가지고 공놀이를 하다가 던진 것이 이곳에 내려앉아서 바위로 변한 것을 장수바위라 말한다.
옛날 큰 소나무가 하나 유창하게 서 있었다 하여 생송이라 불렀다.
마을서쪽 가장 높은 봉우리를 말하고 그 밑에 복치형(꿩이 엎드려있는 형국)의 명당자리가 있다 한다.
마을 앞 내 건너 산 정상에 돌로 쌓은 산성이 있는데 전의이씨의 시조인 이도(李悼)가 살아서 이성산성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생송 마을과 이성산 정상간에 긴 줄을 매달아 놓고 서로 당기어 의사소통을 했다 한다.
생송 마을 초입에 있는 돌로 음력 10월이면 동네사람들이 떡을 해놓고 소원을 빌었다.
절골고개에 있었으며 벚나무와 돌무더기였는데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사방공사를 한다며 헐었다.
1895년 전의군이 신설될 때 대서면 지역이었다. 버드나무가 냇가에 많이 서 있어 오류(五柳)라 하였고 물이 귀한 탓으로 오행설(五行說)에 의하여 유천리라 하였으며, 1914년에 각 리를 정리할 때 '오류동'과 '다운천리'의 이름을 따서 유천리라 하였다. 유천 1리는 오류골(외오류)과 양안이로 구성되었다.
전의이씨 시조의 묘이며 양안이 마을남동쪽에 있고 복호형(伏虎形)의 명당이라 하며 그 앞 철길 옆에 개바위가 있고 마을건너에는 창날이 있으나, 현재는 민석아파트 공사시 상당부분 없어졌다.
이태사묘 북쪽 양안리에 1996년도 6월 23일 준공식을 가졌고 총 3100평에 사업비 15억을 들여 위패를 모신 경원사(景遠祠)에는 내사문, 숭의당, 운서제, 예동제, 일월당,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오류, 중오류, 외오류로 나누는데 현재 상오류,중오류는 군 탄약창이 들어서면서 모두 떠나갔으므로 1991년에 마을이 없어졌다.
오류골 동쪽에 있는 골로 옛날에는 하씨들이 살았으며 개울 건너에 있다.
오류골 들어오는 입구이며 골의 형국이 개목 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무더기가 열 두개 있었고 이곳에 금으로 만든 닭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전해왔는데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제시에 철로 개설할 때, 복선 공사할 때, 1991년 군부대가 들어올 때 이 개바위를 없애기로 설계하였는데 전의이씨들의 강력한 항의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개울에 대추나무가 있고 여러 작은 내가 마을 앞에서 넓어졌다 하여 어천이라 부른다.
뒷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그지울?남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에서 흐르는 작은 시내가 마을 앞으로 흘러와서 꺽이어 서쪽으로 흘러가는 위쪽에 있으며 옛날에는 다운사 라는 절의 이름을 빌어 다운리라고 하였다가 다우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전동면]
전동면은 전의의 동쪽에 있는 면이란 뜻이다. 과거 전동면은 전의지역이었으므로 원삼국시대에는 마한(馬韓)의 54개국 중 하나였고 백제시대에는 구지현(九知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지현(金池縣)이라 하여 대록군(大麓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전의현(全義縣)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1414년 연기현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1416년 다시 전의현이 되었으며 1895년 전의현이 전의군이 되었을 때 전의군 동쪽 지역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전동면이 되었다. 1995년 3월 1일부로 동면의 갈산리를 청원군에 떼어주고 청원군의 심중리를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하여 청원군과의 경계가 동림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어졌다.
동림산은 동림산성(東林山城)과 송천사지(松泉寺址), 백자가마터 등 유적이 많은 곳이다. 전동면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은 이웃마을과 경계를 이루다 보니 그 산의 주인이 자신있게 ‘우리 땅이다’ 라고 주장하기가 곤란할 때가 있다. 운주산이 그 대표적인 예다. 지적 상 엄연히 산 정상의 2/3가 전동지역인데, 1/3을 차지하고 있는 전의면이 운주산과 관련된 모든 행사를 주관해 오고 있다. 그 예로 정초에 하는 해맞이 행사도 전의면 주관이다. 금이성이 있는 금이산(원이름 : 운주산) 또한 산정상을 기준으로 전의, 전동이 나누어져있고 남쪽에 있는 오봉산도 조치원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 산에는 산성이 쌓여져 있어 고대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쟁터였음을 알 수 있다. 청원군에서는 병마산과 동림산에서 강감찬 장군이 군대를 훈련하였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동림산의 작은 암자에서는 강감찬 장군을 산신으로 모시고 있으니 우연이 아닌 듯 하다.
운주산 남쪽의 청송리에는 배일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안동권씨가 집성을 이루어 살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권주(權柱)가 의병 300명 군량 450석을 지원하려고 금산싸움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안동권씨들은 일본을 배척한다는 뜻으로 배일(排日)이라 부르다 정조 때의 학자 권복(權復)은 자신의 호를 이원(李遠)이라 짓고 마을 입구에 이원동천(李遠洞天)이라 새겨 세웠는데 원 뜻은 ‘일본을 배척하는 마을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 비로 인하여 일제시대 일본인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다.
전동면에는 개미고개가 있다. 개미고개는 운주산의 남쪽 줄기로 전의에서 조치원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고 그 아래에는 경부선 철로가 놓여져 있으며 고개 아래로는 터널이다. 6.25때 이곳에서 미군과 북괴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죽은 시체가 개미떼 같이 쌓여 있었다 한다.
1950년 7월 9일 벌어진 전투에서 당시 이곳을 지키던 사람은 미24사단 병력들이다. 이들은 길가에 호를 파고 개미처럼 밀려오는 북괴군과 전투를 하는데 처음에는 안개가 끼어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서 북괴군이 쏜 총에 대응하여 발포하였다가 위치가 탄로나 많은 피해를 보았고, 북괴군은 우회하여 앞뒤에서 공격하는가 하면 주무기가 소련제 탱크로 밀고 왔다. 미군의 주무기는 공중에서 공격하는 제트기였는데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아군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져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조치원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몇 일 뒤 미군은 한강 다음으로 금강선을 제2 방어지역으로 설정하고 다리를 폭파한 후 방어를 하였으나 조명탄을 조정하는 병사가 실수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쏘자 이때를 놓칠세라 북괴군이 금강을 건너는 바람에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전동면 각지명유래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地域)인데, 이 곳에 예전부터 세 그루의 노송(老松)이 이곳 사람들의 신앙(信仰) 대상(對像)으로 모셨으므로 '청송(靑松)'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청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編入)되었다
전동면과 서면(西面) 경계에 있는 산이다. 곧 까치성 위에 있는 산성인데 높이가 383m이며 돌로 쌓은 성(城)이 견고하여 철옹성과 같다 한다. 단단한 산성(山城)이라 하여 '쇠성'이라 부른다.
운주산 남쪽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학자 권주(權柱)가 임진왜란 때 의병 300명, 군량(軍糧) 450입(?)으로 금산(錦山) 싸움에 이르렀다가 별세(別世)하였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일본(日本)을 배척하는 의미(意味)에서 배일(排日)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지었다 한다. 뒷산이 높고 골이 아늑하므로 '배일'을 '이곡(梨谷)'이라 하였는데 정조(正祖)때 학자 권복(權復)이 살면서 호(號)를 이일(梨逸)이라 고쳤다. '이곡(梨谷)'즉, 배나무가 많은 골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권복은 일본을 배이(梨)로 비유하여 일본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이일(梨逸)이라 하였다.
'아래배일' 입구에 있는 비(碑)를 이일동천비(梨逸洞天碑)라 부른다. 정조(正祖)때 학자 권복(權復)의 호(號)를 이일(梨逸)이라 하고 마을 앞에 비(碑)를 세웠다.
'배일'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엔 소나무 정자가 세 그루 있다 해서 '삼송정(三松亭)'이라 부른다.
'삼송정' 남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다. 전의이씨(全義李氏)와 거창(居昌)신씨가 살면서 서로 의좋게 모이는 도회청을 두었으므로 도청(都廳)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 쉬운 글자를 취하여 도청(都靑)으로 변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남면(南面)의 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동막리.상남포리.하남포리.청산리를 병합하여 '청산'과 '남포'의 이름을 따서 '청람리(靑藍里)'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증미'밑에 있는 마을이다. '증미'라 하던 것이 변하여 '청미'또는'청산(靑山)'이라고 부른다.
'시루봉'꼭대기에 있는 마을이다. 큰 바위가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시루와 같다 하여 '시루바위'라 부르며 '중암?'이라고도 부른다.
'버드나무말'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처음 여기에 마을이 형성(形成)될 때 움막을 짓고 살던 것이 점점 큰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동막, 또는 동막골 이라고도 부른다.
'청산'에서 전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개미기'고개라고 부른다. 고개가 잘룩하여 개미허리와 비슷하다 하여 '개미기'고개라 부른다 한다. '의현(蟻峴)'이라고도 부른다.
청람리 중 제일 윗동네로 이곳에 경주김씨가 동막을 짓고 오랫동안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동막골 이라 한다.
쪽개 라고도 불리우며 큰말, 도라말, 양지말, 버드나무말이 이에 속하며 이곳이 옛날에 뻘이었다 하여 남포라 한다.
연수봉 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동막골 뒷산을 가리킨다. 이 산에는 큰 광산 1개와 작은 광산 1개가 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조선 숙종(肅宗)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선비 한 사람이 만년(晩年)에 그 선영(先塋)을 따라 이 곳에 은거하면서 솔밭부근(附近)에 정자(亭子)를 짓고 소요하였다 하여 송정(松亭)이라 불렀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송동'과 '사정'그리고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송정리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송정리에 있는 마을이다. 소나무가 있는 고개마을이라 해서 '솔재'라 부른다.
연수봉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안터?라고 부른다. 새터 안쪽에 위치하는데 내기(內基)라고도 부른다.
'구리골'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때 사기점이 있었던 곳이다. '사장동(沙場洞)''사정리(沙亭里)'라고도 부른다. '사장골'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사장골'이라 부르고 바깥 편에 있는 마을을 또한 '바깥사장골'이라 부른다.
'송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송곡리 '소골'위쪽에 있다. '상송동(上松洞)''상송곡(上松谷)'이라고도 부른다.
연수봉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예전에 연수암(延壽岩)이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절텃골'이라 부른다.
'상소골'앞 냇가에 있던 독송정의 터로, 지금은 예전의 독송정이 없어졌지만 숙종(肅宗)때 좌의정(左議政) 조사석(趙師錫)이 만년(晩年)에 그 선영(先塋)을 따라 이 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짓고 소요하였다 하는데 그 정자(亭子)가 독송정(獨松亭)이라고 한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원래가 백제 때부터 솔이 울창했고 또한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이 활발했던 송성(松城)'금성(金城)'이 여기에 있어 여기를 '솔티'와 '성곡'의 이름을 따서 송성리(松城里)라 하여 이웃마을을 병합하고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가 되었다.
예전에 이 마을에 한 가구가 살 때 어느 해에 산사태가 나서 집이 흔적도 없이 없어지자 그 곳에 요란스럽게 흐르는 물을 보고, 지나던 한 선비가 말하기를 요곡(물댈 요(堯), 골 곡(谷))이라 말한 것이 그렇게 전해 내려오다가 '요골'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예산이씨(李氏)들이 집을 짓고 많이 살고 있다.
예전 전의군(全義郡)당시 남면을 거쳐 서면으로 가는 길목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주막이 있어서 마을을 '주막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잿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물이 흐르면 뱅글뱅글 돌아 때로는 강바닥까지 보였다 하여 '물도래''무도리'라 부르다가 '무드리'라 부르게 되었다. 물이 뱅글뱅글 돈다해서 수전(水田), 수전리(水田里), 수회(水回), 수회리(水回里)라고도 부른다.
'중말'남서쪽에 있는 고개를 '솔티'라 하고 그 아래 마을도 솔티고개 아래에 있다 해서 솔티라 부른다. 솔티고개는 고개가 길고 험하여서 도둑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솔티'마을은 조선시대 때 사기소가 있었으며 김해김씨(金海金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솔티동'이라고도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보평'안쪽 골짜기에 자리함으로 '속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소골'또는 '송곡(松谷)'이라 불렀다. 1914年 행정구역 개혁시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송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송곡리에 있는 마을로 꽃이 잘 어울려 피는 마을이라 해서 '꽃밭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꽃짝골'이라 부른다.
'보령'안쪽 골짜기에 있으므로 속골, 즉, 산 속에 있는 마을로 '속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소골이라 부른다. 송곡(松谷)이라고도 한다.
'모시티'에서 조치원읍 둥이로 넘어가는 고개를 '모시티'라 부르고, 그 아래 마을을 '모시티'고개 아래에 있다 해서 역시 '모시티'라 부른다.
'하소골'동북쪽 송곡리 산26번지에 있는 낮은 토성(土城)이다. 토성이 아래 위 두 층으로 되어 있는데 삼한(三韓)때의 농성(農城)이다.
'모시티'동쪽에 '모시티'에서 300m거리에 '옥자리터'가 있다. 예전 삼한시대에 농성(農城)인 토성(土城)을 쌓을 때 부역자를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진 옥자리인데, 한 번은 애를 밴 여인을 가두어 두었더니 쌍둥이를 분만하여 그 때부터 옥자리를 옮겼다 한다. 지금은 일명 쌍둥이 자리라 하여 집을 짓지 않고 전답(田畓)으로 사용한다. '쌍둥이 자리'라고도 부른다. 송곡리 38번지에 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마을 앞에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배기''돌꽂이'로 불리우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석곡리'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선돌이 서 있었다 하여 '선돌배기''돌곶이''석곡(石谷)'이라 부른다. 예전에 한 장수가 한 길이 넘는 돌을 지팡이로 짚고 다니다가, 지금의 109번지에 꽂아 놓았는데 그 돌을 선돌이라 부른다. 선돌이 병오년(丙午年) 장마에 넘어져 지금은 그 자취가 없어졌는데 선돌이 있던 마을은 '선돌배기'의 '하석곡'이며, 이 선돌을 주축으로 웃말은'위선돌', 가운데는'중석곡'이라 부른다. '중석곡'은 '온고비골'이라고도 부른다.
'돌꽃이'남서쪽에 있는 산을 '국사봉(國士峰)'이라 부른다. 높이가 267m되는 산인데, 산에 돌산과 청마가 있고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고려 때부터 산봉(山峰)에서 국사에 큰 도움을 주었던 곳이며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다. 또한 서민(庶民)들이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는 제단(祭壇)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돌단과 철마가 있고, 산제당이 있다.
국사봉 동쪽에 있는 산이다.
안말 안쪽의 골짜기로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 사기점골이 되었고 이곳에 사기 굽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태종(太宗)때에 전의현(全義縣)에 속했다가 다음에 전기현(全岐縣)에 속했으며 다시 전의현에 속했었다. 이 지역에는 넓은 들과 큰 보(寶)가 있어서 농사가 잘 된다 하여 '보덕(寶德)'이라 부르는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보평(寶坪)의 '보(寶)'자와 덕소의 '덕(德)'자를 따서 보덕리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속하게 되었다.
보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붓들'이라고도 부르는데, 사실은'붓들'즉, 말해서 보(洑)가 있는 들이라는 뜻이 변해서 '붓들'이라 부른다. 앞들이 넓고 보(洑)가 있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어 붙여진 명칭(名稱)인데, 그래서 보물 같은 들이라 하여 '보평(寶坪)'이라 부른다.
'지프네'위쪽에 있는 마을을 덕소(德沼)라 부른다. 예전에는 냇물이 흘러와서 고여 '덕소'라 부르고 선녀(仙女)들이 노는 신선지(神仙池)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래가 쌓여서 소(沼)는 없어졌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고이는 소(沼)가 있다 해서 이 마을을 '덕소'라 부른다.
연수봉 남동쪽에 300m정도의 계곡(溪谷)이 있는데 이 계곡을 '절터골'이라 부른다. 예전에 연수봉 기슭에 '연수사'란 절이 있었다.
'보평(寶坪)'북쪽 냇가 산기슭에 있는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부른다. 또한 '장군암''석정(石亭)'이라고도 부르는데 큰 바위가 넓은 바위 위에 얹혀 있고 그 밑에 큰 내가 흐르는데 명종 때 학자 박곤(朴坤)이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을 맞아 바위 위에서 이학(理學)을 담론하였던 바위라 한다.
'보평(寶坪)'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깊은 내가 있다 해서 '심천'이라 부른다. 또한 '지프내'라고도 부르는데, 처음은 '깊은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지프내'라 부르게 되었다. 심천(深川)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은 조천(鳥川)으로서 소(沼)가 있었다 한다. 여기는 깨끗한 물이 고여서 선녀(仙女)들이 가끔 하늘에서 내려와 놀고 가는 곳이라 전해 내려왔는데, 지금은 소(沼)자리에 깊은 못은 없어졌으며 그냥 통칭 심천(深川)으로 부르고 있다.
원래 이 지역은 계곡(溪谷)에 풍류(風流)가 있어서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미곡(美谷)'이란 시조(時調)와 학이 있듯이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곳으로 통칭(通稱)되어 왔으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미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구역이었다.
전동면(全東面) 미곡리(美谷里)에 운주산정(雲住山頂)에 있는 산성을 운주산성 이라 부른다. 예전에 전성부사(全城府使)가 있을 때 목민(牧民)을 다스렸다.
'학당이'앞에 있는 비(碑)를 '안렴사유허비'라 부른다. 이 비(碑)는 안렴사(按廉使)였던 김휴의 사적을 기록한 유허비(遺墟碑)다.
'운주산'중턱에 있는 바위를 삼천암(三千岩)이라 부른다. 바위 밑에 크고 깊은 굴이 있어서 목천(木川) 수신(修身)으로 통하였다 하는데 임진왜란때 이 바위에 3,000명이 피난하였다가 왜적이 여기를 지날 때 바위에 숨어있던 3,000명 가운데 어린 아이가 우는 바람에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 발각되어 모두 피살되었다.
'미륵당이'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임진왜란때 이 곳에 피난하였던 수 백명이 왜적에게 피살되어 피가 내를 이루었으므로 피숫골 또는 피수동 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흉하여 '수구동(水口洞)'으로 고쳤다 한다.
'미륵당이'동북쪽 산 속에 있는 마을을 '학당리'라 부른다. 고려말엽 안렴사(按廉使) 김휴가 여기에 살면서 학당을 세우고 후진들을 양성한 마을이라 해서 학당리 또는 학당이 라 부른다.
미륵당이 모퉁이에 있는 미륵으로 남녀 두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 3척(尺) 5촌, 넓이 1척(尺) 8촌이 된다.
조선말엽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엔 갈대가 무성하여 '갈가리'라 불렀었고 임진왜란 때 학자 권주(權柱)가 이 곳에 살면서 갈대의 덕을 입어 무난히 그 왜란(倭亂)을 피한 후 마을을 그가 '노장(蘆長)'이라 하였다 한다.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노장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중로장(中蘆長)'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양지말'이라 부른다. 양지촌(陽地村) 이라고도 한다.
'원지기'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배나무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이목동(梨木洞)이라 부른다. 경주김씨(慶州金氏)가 많이 살고 있다
'원지기'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주겹니'라고도 부르는데, 대나무골 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대나무가 무성했던 마을로 여기에서 나오는 대나무는 나라에서 군기를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하여 상당히 아꼈던 대나무밭 이라 한다. '대나무밭'이 있다 해서 '죽엽리'라 부른다.
노장리(蘆長里)에 '하노장''중노장''상노장'의 세 마을이 있는데 모두가 갈대와 연유한 마을 명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학자인 권주(權柱)가 이 곳에 살면서 왜군(倭軍)이 쳐들어 왔을 때 갈대가 길게 늘어져 무사히 난(亂)을 피할 수 있었다 하여 갈대를 칭찬하기를 '노장(蘆長)'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노장'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마을이 갈대숲 아래 위로 생기면서부터 위쪽은'상노장(上蘆長)'또는 '상로정(上蘆汀)', 아래는 '하노장(下蘆長)', 가운데는 '중노장(中蘆長)'또는'중로정(中蘆汀)'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장(蘆長)'을 '갈가리'라고도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고소상리(古所峠里),서방동(西方洞),대동(垈洞)등을 병합하여 서봉과 만경대의 이름을 따서 봉대리(鳳臺里)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編入)되었다.
'고삿재'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사태말, 대동(垈洞) 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는 사태가 많이 나온 마을이라 하여 '사태말'이라 불렀다.
'고삿재'서북쪽에 있는 마을을 서봉동(棲鳳洞)이라 부른다. 토형(土形)이 봉(鳳)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는데, 예전에 봉(鳳)이 날아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서봉동(棲鳳洞)이라 부른다. 또한 '고삿재'서쪽에 마을이 자리하였다 하여 '서방(西方)골'이라고도 부른다.
봉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전동면에서 천원군(天原郡) 수신면(修身面)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고삿재'라 부르며 이 재는 운주산과 망경대 중간 허리가 잘룩하게 되어 있는 고개다. 이 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해서 '고삿재'라 부른다. '고소티(古所峙)''고소티리(古所峙里)'라고도 부른다.
서봉동(棲鳳洞) 북쪽 산기슭에 있는 터다. 산기슭에 약 3ha가량 되는 평지(平地)가 있는데 예전 조선중엽에 이 곳에서 목축(牧畜)을 많이 하였던 곳이라 하여 '목우장(木牛場)'으로 불리우고 있다.
심중리(深中里)는 본래 청주군 서강외 일하면 지역으로 강외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은 공북리(拱北里), 서는 연기군 전동면 노장리와 접하고 있다. 조선영조 후반 (1750-1776)에는 심천리(深川里)라 불렀으나, 정조13년(1785)경 한때 없어졌다가 헌종때(1895) 다시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10년경 경술국치 직전 상심동(上深洞), 하심동(下深洞), 심남리(深南里), 심서리(深西里), 갈거리(葛巨里), 조광동(早光洞), 태고동(太古洞)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심동과 하심동의 각 일부를 상봉리(上鳳里)로 넘겨주고 미원동(彌院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심중리라 하여 강외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부로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자연부락으로는 갈거리(葛巨里), 불근덕(丹悳), 덕룡굴(德龍堀), 민태절, 사기소(砂器所), 소죽골, 중지프내(中深里), 지프내(深川)로 나뉘어진다.
심중 2리 마을로 연기군 전동면과 청원군 동림리와의 경계지역이다. 예전에는 청원군 강외면 심중 2리였던 것을 1995년 3월 1일 연기군 전동면으로 편입되었으며 민태산 이란 이름은 마을 뒷산 동림산 중턱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이름이 민태절 이라 부른데서 연유했고, 절이 폐사 되면서 절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된 것 같다. 민태절 절터는 크게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었다. 돌축대를 쌓는 곳과 그곳에서 산 정상 쪽에 계단식 건물지가 보이고 동쪽으로 험준한 벽을 오르니 기와편이 무더기로 산재한 건물지가 있었다.
민태절에서 옥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한다. 이곳을 넘어가면 충청북도 옥산면 상동림 마을이 나온다.
마을 뒤 동림산 밑을 지칭한다. 그릇편이 많이 출토되어 예전에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웠던 자리라고 전해 온다.
동림산 정상에 동림산성이 있는데 남쪽 봉우리 가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이를 농바위라 부른다.
절터 아래에 그릇을 구웠던 곳을 지칭한다.
민태절 아래에 있는 굿당이다.
민태절이 있던 곳을 지칭한다.
마을에서 서남쪽 높은 봉우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범바위라 부른다.
범바위 아래에 있으며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데 이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을 다 고쳤다고 한다. 가뭄에도 물이 끊이지 않았는데 양쪽 옆에 묘를 쓰는 바람에 그때부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붉은덕 위쪽 마을이다.
땅이 황토 흙이라 하여 붉은덕 이라고 한다.
깊은 냇가가 있어 깊은내 라고 한다. 냇가는 상심천, 하심천으로 부르며 깊은내가 상심천, 보덕리가 하심천이 된다.
깊은내에서 앞에 있는 산을 너덜봉 이라고 한다. 너덜봉 아래로 흐르는 내가 넓은 바다와 같은데 지관이 보기에는 이 봉이 넓은 바다 위에 떠있는 배의 형국이라 하여 너른 바다 가운데의 봉이라 하여 너덜봉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너덜봉의 제일 꼭대기는 학봉 이라고 한다.
너덜봉 옆 우측으로 나 있는 골로, 이 골 밭 가운데에서 물이 나는데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자가 되는데 이곳에 도깨비가 많고 운이 맞지 않아 사람들이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북절골에서 보면 너덜봉이 염해놓은 송장 같다 하여 기가 센 땅이라, 이곳에 절을 지어 나쁜 기운을 눌러야 하므로 북쪽의 절골이라 하여 북절골 이라 했다.
제일 위쪽의 마을로 동림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 고려시대에 미타사 라는 절이 있어서 미타절 이라 불렀다.
첫댓글 세종시 건설과 함께 잊혀지지 않도록 지켜야 할 역사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