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580번지 내 위치한 고려동유적지는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곳이다.
이오는 이 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는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神主)를 이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 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고려전답, 자미단(紫薇壇), 고려전답 99,000㎡, 자미정(紫薇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亭)등이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이 곳을 1983년 8월 2일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화제 : 함안 고려동
경남 함안 고려동 글/ 하종갑/ 수필가/ 경남일보 논설주간 ********************************************************************
고려(高麗)가 숨을 쉰다. 고려가 이성계에 의해 멸망한 지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서 숨을 쉰다. TV연속극 속에서가 아니라 다섯 세기를 스쳐 갔고 조선 왕조시대도 막을 내린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 땅 어느 한 곳에서 아직도 고려는 죽지 않고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장내마을. 진입로 입구에서 바라본 마을은 설마 이곳에 마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야산에 가려져 잇어 마을이 숨어 있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옴팍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망르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고색 창연한 비석 하나.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글귀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이름하여 '고려동의 골짜기'란 뜻이다.
기와집이 즐비한 마을 앞에는 고려전(高麗田)으로 불리는 3,000여평의 옥토가 펼쳐져 있다. 굳이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마을 안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장내(牆內)라고 했던가. 이는 곧 담장 안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던 땅을 고려동이라 이름 짓고 평생 마을 밖으로 나가길 거부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고려의 신하로서 지조를 지켰던 모은(茅隱) 이오(李午)가 그 주인공이다. 만고의 고려 충신이 바로 그 아닐까. 모은은 재령 이씨로 일선(日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뛰어난 기개가 있었다고 전한다. 뒷날 유명해진 사람치고 어릴 때 신비한 성장기를 지니고 있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는 일찍이 당대 석학인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정진하여 여러 선비들의 인정을 받았으니 어린 시절 이야기가 헛말은 아닌 듯싶다.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그 무렵 고려의 국운이 쇠잔해짐을 느끼고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고려는 이성계에 의해 망하게 된다.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던 많은 선비들이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을 거부하고 낙향하여 절개를 지킨 사실을 우리는 사료(史料)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모은의 충절을 우리는 여태 모르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경남땅 한 곳에 고려동학이란 비석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살았으니 어떻게 역사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려동학의 주인공인 모은도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두문동에 머물던 모은은 뜻을 같이 하던 만은(晩隱) 홍재(洪載), 전서(典書) 조열(趙悅)과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한다. 두문동에서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한 모은은 모곡땅에 이르러 자미화(紫微花·일명 百日紅)가 만발한 것을 보고 평생 살 곳으로 정했다.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려동의 입구에는 자미화가 그대로다. 이 자미화는 모은의 후손들과 흥망을 같이한다는 속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모곡에 정착한 모은은 마을 둘레에 담장을 쌓았다. 담장 안을 고려땅이라고 여기고 고려동이란 표지석을 세웠다. 담장 밖은 조선땅이지만 담장 안은 여전히 고려땅임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손수 논과 같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했는데 담장 밖의 조선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모은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서책을 벗삼으며 고된 나날을 보냈다. 달 밝은 밤이면 망국의 신하로서 멀리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대신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훗날 태종 이방원은 모은을 여러 차레 불렀다. 흉흉하던 민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의 태조나 태종은 고려의 신하로서 절개를 지키던 선비들을 여러차례 회유하였다. 모은도 회유대상 인물이 되어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절개가 꺾일 모은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너 또한 고려 왕조의 유민이니 어찌 신왕조에서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이후에라도 절대 신왕조에서 내려 주는 관직명을 사용하지 말고 또 나의 신주도 이곳 고려동 담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역시 부친의 뜻을 따라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지금 고려동에는 600년 전 모은이 놓은 주춧돌을 그대로 사용한 종가가 보존되어 있다. 모은의 후손들이 조상의 유지를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은의 묘비에는 아무 글자도 없다. 나라 잃은 신하가 무슨 마을 남기겠냐는 유언에 따라 글자 한자 없는 백비를 세웠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 담장, 고려종택, 자미단, 자미정, 율간정, 복정 등이 있으며 기념물 제 56호로 지정되어 있다.
복정(鰒井)의 유래 고려동의 본채 오른쪽에는 복정(鰒井)이라는 글씨가 뚜렷한 우물이 하나 있다. 이 우물은 모은의 현손에 얽힌 효자상이 깃들어 있다. 현손인 이경성은 병조참판에 증직된 사람으로 현감을 지낸 사람이다. 남명 선생이 "어찌하여 벼슬을 더 하지 않는가"하고 물으니 "노모를 봉양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해 남명 선생으로부터 양지지효(養志之孝)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부인 여주 이씨도 효성이 지극하여 온갖 정성으로 시어머니를 모셨다. 시어머니가 병에 걸려 전복을 먹고 싶다고 했으나 산골지방이라 구할 수 가 없었다. 백방으로 전복을 구하러 다니게 되자 하늘이 감동했던지 옆에 있는 우물에서 전복이 나와 시어머니께 드릴 수가 있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같이 먹자고 했으나 그녀는 먹을 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부모를 속인 것이라는 자책감으로 여겨 평생 번민하였다고 전한다. 이 우물은 모은이 직접 판 것으로 6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맑은 물이 솟고 있으며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찾아가는길 ************************* 함안군청 소재지인 가야읍에서 마산 쪽 지방도를 따라 가다보면 '문암 초등학교'푯말이 나타난다. 남해고속도로 밑으로 난 이른바 굴다리를 지나면 산인면 소재지다. 이 길을 가는 동안 보기 드물게 왼쪽에는 고속도로가 지나고 오른 쪽에는 철도가 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주변에는 가든식당과 찜질방, 찻집들이 즐비하다. 산인에서 장내마을로 가는 표시를 따라 조금만 가면 제법 큰 동네가 나타난다.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고려동의 분위기에 맞게 기와집을 짓도록한게 지금의 한옥촌인데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양지 바른 마을인 고려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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