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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태복음 16장(2020.10.25.일)> 2020. 10. 25일- 마태복음 17장(현대어성경)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고 한적한 산으로 올라가셨다. 마태복음을 보면서 느낀점은 각 장마다 아들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점이다. 28장까지 숫자를 세 보니 '아들' 은 57번 나오고,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하거나 해석이 가능한 말은 15번이 등장한다. 마태는 예수님을 베드로의 고백처럼 "이 분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베드로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복음서의 곳곳에 예수는 자신을 구원했고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시요 현존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해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지난 장에 이어 17장에도 "인자는 멀지 않아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래서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존엄이 걸려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J.G Herder는 "인간성은 그리스도의 본질이요, 동시에 업적이다." 우리의 종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은 인간성에로의 형성이다." 라고 말했다. 삶과 죽음이야말로 사람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는 분이 여기 계신 그리스도다. 아들이 수난 당할 때 아버지 자신이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로 인하여 고통 당하신다. 아들의 죽음 속에서 죽음은 하나님 자신에게로 오며, 아버지는 버림받은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 가운데서 아들의 죽음을 고통당하신다. 우리가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같이죽으셨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아들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 되셨다. 위 그림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년~1520년)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 "그리스도의 변용Transfiguration" 이다. 라파엘로는 생의 마지막에 마태복음 17장 '갈릴리 저지 변화산(타보르산 588m)의 그리스도', 루가복음 24장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영감과 신앙으로 그려냈다. 어쩌면 그는 짧의 생의 절정에서 죽음에 두려움과 생의 애착이 커진 것은 아닐까? 그는 경전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하면서 죽음 앞에서 죽음을 넘어서고자 몸부림친 것은 아닐까? 결국 그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변용하는 구원의 하늘을 바라보며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그림 전체 화면의 상부에는 ‘그리스도의 변모’ 내용이, 하부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 가 그려져 있다. 라파엘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의 모습을 갑작스러운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대체했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던 산에서 내려온 직후, 어떤 아이의 더러운 영을 내쫓으셨다. 빛으로 가득한 흰 옷을 입은 예수님이 양팔을 펼치고 있는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장면과 동시에 ‘부활의 영광’을 연상케 한다. 위대한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시대를 뛰어 넘어 예수께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며, 고난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아래에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는 놀라움과 예수님의 찬란한 광채에 눈부셔 얼굴조차 들지 못하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초록색 옷을 입은 야고보는 신앙, 노랑색 옷을 입은 배드로는 희망, 붉은 옷을 입은 요한은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는데 가운데에 있는 베드로 만이 빛을 오른손으로 반쯤 가린 채 게슴츠레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예수님의 변모는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누리실 것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미리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예수님의 변모에서 보여준 빛과 영광은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그분을 믿는 모든 이에게 베푸실 영광의 표징이다.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편지에서 장엄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광을 본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 자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온전히 자신들의 시선을 주님께 두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다. 한쪽에서 이 장면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두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자들이 늘 존재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겸손한 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선한 예배자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신의 역사를 이뤄 가신다. 이들이 진정한 믿음의 통로가 된다. 바로 이들이 현실 안에서 온전히 부르심을 쫓아가는 자들이다. 그런데 하단에 병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유독 눈에 띄는 예쁜 사람은 누구인가? 어쩌면 사도 요한 속에 내재된 라파엘로 자신이 아닐까? 무엇을 찾고 있듯이 맑은 눈으로 간질 병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작가는 이 병자의 넋 나간 표정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본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위대한 사건을 바라보지 못한 채 그는 환자에만 집중하고 있다. 오히려 병자가 저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장면에 눈이 뒤집어지고 몰입하고 있는 듯하다.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제자들은 찰나의 눈부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위대한 장면을 애써 간과하거나 바라보지 못한다. 아래 병자를 둘러싼 가족과 군중 역시 제자들이 무슨 기적을 행하기라도 기다리는 양 삶의 순간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병자인 소년 만이 이 상황을 뛰어 넘어 시선을 들어 영광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 소년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젊은 제자는 마치 소년의 눈을 통하여 이 위대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 바로 이 속에 라파엘로의 가슴과 목소리가 녹아들고 있다. 라파엘로는 인간의 비참하고 참혹한 현실 속에서 이를 탈피할 전환의 기회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죽어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비극을 목전에 두고 마침내 그는 비정상적인 사람을 통하여 구원의 하늘, 영원의 하늘을 보게 된다. 신동엽 시인은 이 그림을 보고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라는 시를 짓게 된 것이 아닐까? 이처럼 우리는 지금 삶의 순간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가? 지금 당신은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를 바라 보아야 하는가? 라파엘로는 이 그림을 통해서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할 지를 깊이 묻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던 중 세상을 달리한 라파엘로. 한편 이 그림을 통해서 천재 화가를 잃은 당시 사람들의 슬픔과 연민을 느껴본다. 역대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작가들의 업적을 다룬 <미술가열전>의 작가이자 미술가인 미켈란젤로의 제자 조르조 바사리(1511~1574)는 라파엘로 그림을 '그림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불러야 한다' 고 할 정도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살아 움직인다는 표현은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 풍미했던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의심의 여지 없이 극찬이다. 플라톤의 이상적 이데아의 시작점은 현실이며 그림이나 조각 등의 예술 또한 이상의 시작인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이상에 도달하고자 했던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에 바사리의 찬사는 단순히 르네상스를 완성한 3대 거장에 대한 예의로서의화려한 수식어가 아님을 <그리스도의 변용>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라파엘로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린 최후의 작품이자 당시 작가 사망에 의한 미완성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했던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변용>에서 새로운 화풍을 예고한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역동 구조는 선배격인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장조 프레스코'에서의 근육질의 역동성을 받아드리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장엄하다. 그리스도와 대선지자 엘리야 그리고 모세는 신비하고 환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 아래 제자들의 경이에 가득찬 모습,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로 나뉘는데 아래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혼돈 속에 매몰되어 있다. 그의 사망 소식에 예술 애호가이었던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한없이 슬퍼했다고 전해지며 사망한 라파엘로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이자 조수로서 바티칸궁에서 활약하던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에 의해 나머지 부분이 완성되게 된다. 레오 10세 교황의 이전 교황인 율리우스 2세 때 부터 바티칸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던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인간적으로도 친근함을 가지기에 충분한 성격과 젊고 잘생긴 외모에 이르기까지 보기 드물게 가진 조건 또한 완벽한 천재 화가였고 권력의 비호 아래 마음껏 예술을 펼친 행복한 사나이였다. 그런 그의 위상은 그가 죽은 후 시신이 신들의 전당인 고대 유적 판테온에 안치되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짧은 생을 마감하기 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게 가져오라고 부탁한다. 자신이 그리다 더 이상 그릴 수 없었던 작품 속에서 혼탁하고 어지러운생을 멈추고 온갖 고난을 겪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해서 만날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평화로운 죽음 뒤의 삶을 그리워 것은 아닌가?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그의 후기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그가 생을 멈출 때까지 홀로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을 사랑해서일까? "그리스도의 변용"은 그가 죽은 뒤에 무덤 앞에 걸려 있었고 그후 성 베드로 성당으로 옮겨졌다. 서른 일곱 살 라파엘로는 머지않아 다가올 그의 죽음을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마치 그리스도가 "인자는 멀지 않아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연거푸 제자들에게 말을 꺼내 놓으신 것처럼 라파엘로는 이 그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사를 목도하고 그분의 가슴의 소리를 듣고 마침내 구원의 하늘, 부활의 세상을 그린 것은 아닐까?.그리고 안개처럼 한갓된 생의 회한을 내려 놓는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죽었으나 그리스도의 변용에서 그린 예수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영으로 부활하였다. 한번은 랍비 모르데차이가 민스크의 큰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대적이어서 그를 비웃기만 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아무런 경전에도 적혀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를 공격했다. 그러자 랍비 모르데차이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내가 지금 경전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경전에 적힌 말들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내 가슴에 적힌 귀절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라파엘로는 그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린 그리스도의 눈부신 부활을 그림으로써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삶이며, 죽음이란 그렇게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것이 아니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눈부시게 펼쳐 보이고 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