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만에 시작한 운동이라 그런지 몸이 좀 둔한 느낌이 들었다. 몸무게를 재 보니 90kg이었다. 이런 몸으로 액션연기를 잘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고 정확한 동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주먹계의 보스가 배가 나온 채 어딘가 어색한 몸매를 보인다는 것은 난센스이기 때문이다. 우선 감량작전에 돌입했다. 몸무게를 줄인다는 것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모르리라. 그 피를 말리는 고통을. 체급경기를 하는 운동선수들은 저간의 사정을 알 것이다. 복싱 세계타이틀전을 TV중계를 통해 보신 시청자들도 혹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이틀전이 열리는 당일 1차체계량에 통과하지 못한 선수가 2차체계량 시간까지 사우나에 들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수건을 뒤집어 쓰고 '살이 빠져라'하는 인상으로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먹는 것을 줄여야 했다. 운동도 규칙적으로 병행해야 했다. 아침 일찍 성수동 집 주위를 크게 도는 조깅코스 약 6km를 달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오후에는 압구정동에 선배가 운영하는 '거산'체육관을 찾아 태권도 연습에 몰입했다. <적색지대> 첫 촬영이 92년 10월 20일 이었으니 정확히 13일간 똑같은 운동을 반복했다. 단식도 물론 계속했다.
주로 점심을 굶거나 적게 먹는 형식이었다. 아침. 저녁의 식사량도 줄였다.
날로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체중계에 올라보니 10kg이 줄어 있었다. 목표치가 달성됐다. 운동을 다시한다,
단식을 한다고 야단법석을 떤 보람이 있었다. 첫 촬영부터 연기약점으로 지적되던 대사처리도 자연스러웠다. 몸과 마음이 일치된 경지라고나 할까. 작품이 끝날때 까지 날렵한 체중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에 단식은 한동안 계속했다. 먹고 싶은 것을 못 먹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한번은 스튜디오 녹화를 할때다. 오전중 모여서 대사연습을 마치고 점심식사 시간이 됐다. 이전까지는 동료들이 식사하는 것이 별스럽게 보이지 않았었다. 내 계획대로 단식을 하기 위해 식사량을 적게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이날따라 출연진 전원이 식사를 하기 위해 갈비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옆자리에 '점박이'로 나오는 정동남씨가 앉았는데 어찌나 맛있게도 갈비를 뜯는지 얄미운 생각마저 들었다. 당장이라도 갈비를 들고 '와작와작' 뼈가지 씹어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어쩌랴 참을 수밖에... 드라마 <적색지대>에 대한 나의 집착은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한 열정이었다. 단식과 7년 만의 운동 재개로 10kg 감량한 것 말고도 또하나, 뒤늦게 밝히는 것이지만 드라마 연습을 위해 부랴부랴 집을 여의도 KBS방송국과 가까운 쪽으로 옮겼던 것이다. 수, 목요일에만 방영되는 드라마였지만 연습과 촬영에 일주일을 고스란히 투자해야 했고 매일같이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자정이 넘어 새벽 2~3시에 귀가하는 게 다반사였다. 연예인이란 직업을 이해하는 아내조차 핀잔투로 "집이 무슨 여관인줄 아느냐"며 투덜댈 정도였으니. 그렇다고 절대 가정생활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밤 늦게 돌아와 피곤해 하는 나를 위해 아내는 따끈한 차를 준비하고 안쓰러워하는 눈길을 보내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게 느끼고 있음을 꼭 전하고 싶다. 밤 늦게 돌아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음날 연습을 위해 또다시 방송국을 오가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길에서 뿌리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수동 집에서 방송국까지 가는데 족히 1시간이 넘는 것이였다. 아까웠다. 그 시간을 드라마 연습에 좀더 투자하고 싶었다. 운전하면서 오는 피곤도 덜고 싶었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교통물결을 헤엄쳐 넘으며 방송국에 도착할라치면 맥이 쭉 빠졌다. 여의도와 가까운 쪽으로 집을 옮기고 싶었다. 좀 심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당시엔 <적색지대>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아내에게 넌지시 운을 떼 봤다.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아내도 반대하지 않았다. 다음날로 집을 물색하기 시작해 지금의 동작구 사당동 우성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갑자기 집을 옮기다 보니 성수동 집은 처분하지 못한 채 아직도 빈 상태로 있다. 이사한 곳에서 방송국까지는 아무리 늦어도 20분이면 충분했다. 돌이켜 보면 경솔한 행동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꼭 해야겠다는 판단이 서면 작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밀고 나가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못한 성격이니 다른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