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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 차원과 중심
여기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중심의 의미를 기의 차원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기의 차원은 고차원이라고 하더라도 인식주체와 그 대상과의 상호소통에 의한 공동의 장으로서 확인된다고 했다. 따라서 인식주체의 작용을 배제한 객관적 대상성으로서 고차원의 경지를 논의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한 이론은 이원론에 바탕을 둔 형이상학으로서 설사 그 이론이 논리적으로는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에 이르러야 할 인식주체의 작용을 배제한 만큼 죽은 관념으로서 인식주체 밖의 실체로서 군림하기 때문에 인식주체에게서 올바르게 해석되거나 수용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본다면 기의 고차원 상태는 바로 인식주체의 변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기의 고차원 상태는 인식주체가 중심을 형성할 때 체험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도는 현상세계를 불일불이不一不異한 것이라고 파악하는데 이것은 기존에 상식이 되었던 3, 4차원의 개념을 뛰어넘는 상태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중심의 형성은 이러한 중도적 판단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인식주체의 상태이다. 중심이 형성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의 이분법적 경계구분이 사라지고 이에 따라 몸 전체가 의식화되며 동시에 의식이 우주로 확장되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공동의 장을 형성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 중심은 인식주체에게 있어서 모든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해지는 것으로 이를 통해 대상과의 공동의 장을 형성하면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없어지고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사라져 모든 것이 우주의식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심이라는 것은 인식주체에게 내면과 외부세계를 조화시키는 문이며 동시에 우주로 열리는 창이며 고차원으로의 변신을 이루게 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경』『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참동계천유參同契闡幽』『대성첩경大成捷徑』등에 나타난 중심의 의미
중심 지점에 대한 언급은 여러 고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먼저 노자의 『도덕경』에서 중심의 상태에 대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第六章)
곡신은 죽지 않아 현빈이라고 한다. 현빈의 문, 이것은 천지의 뿌리라고 말한다. 면면히 이어져 아무리 사용해도 마르지 않는다.
『도덕경』은 중의적으로 쓰여져 있다. 특히 이 장은 1) 표면적인 의미 2) 내포적인 의미 3) 수련에서의 의미로 나누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표면적인 의미는 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형상화된 자연세계의 원리를 지적한 것으로 이해하는 데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곡신谷神을 골짜기 신으로, 빈牝을 암컷이라고 해석하여 골짜기의 텅 비어 있는 성질과 여성의 어머니로서의 창생력創生力을 영원불멸한 천지의 뿌리라고 본다. 김용옥은 현빈지문玄牝之門을 농경사회의 생산성 예찬의 제식과 관련된 어떤 상징일 수밖에 없다고 보면서 이를 우주적 암컷의 성기로 보고 ‘가믈한 암컷의 아랫문’이라고 해석한다.1)
둘째, 내포적인 의미는 이 장이 도의 모습과 운용원리를 묘사하고 있다는 해석에서 나타난다. 여배림은 곡谷과 신神은 두 가지 뜻이지 한 단어는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곡谷은 도의 허무虛無하고 정(靜寂함을 형용한 것이고 신神은 도의 미묘微妙하고 헤아릴 수 없음을 형용한 것이라고 한다.2) 임법융은 곡谷이란 비어 있다는 뜻이고 신神이란 변화의 묘용이라고 한다. 하늘은 허무의 체體이며 변화의 묘용은 확실히 생生하지도 멸滅하지도 않아 세월의 많고 적음으로 계산할 수 없으며, 영원히 묘용이 멈추지 않으므로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현玄이란 허무자연한 무극을 가리키며 빈牝이란 그 속에 은밀히 머금은 음양이기陰陽二氣의 태극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또한 천지만물이 무에서 유로 나가며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변화의 종적 체계를 가리킨다고 한다. 무극이 한 번 움직이면 변하여 태극이 되며 태극 속에는 음양의 두 기운을 머금고 있는데, 이 두 기운이 화합하면 만물이 화육된다는 것이다.3)
임법융은 이 장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지극히 허虛한 진공묘기眞空妙氣가 무한한 생기生機를 갈무리하고 있기에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여 사라지는 일이 없으므로 그것은 천지만물을 생육하는 위대한 어머니가 된다. 이같이 만물을 생성, 화육하는 하나의 어머니는 천지를 생겨나게 하는 우주의 근본이다. 그것이 비록 텅 비어서 훤히 트이고 어둡고 아득하여 형체와 모습이 없으나 그 묘용은 무궁무진하다.”
셋째, 수련에서의 의미는 곡신谷神과 현빈지문玄牝之門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난다. 즉 수련의 관점에서는 곡신谷神과 현빈지문玄牝之門을 중심에 이르렀을 때의 상태와 중심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이들 표현에는 중심에 이르렀을 때의 상태로서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곡신谷神과 현빈지문玄牝之門은 비어 있으면서 온갖 신묘한 작용이 생겨나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이는 달리 말해서 인식주체의 온갖 주관적 개념작용이 일어나지 않아 분별심과 경계가 사라지고 온 우주가 하나로 열리는 상태이다. 이것은 인식주체에게서 음양의 불균형, 부조화가 사라지고 중심이 형성되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러한 허虛의 상태는 인위적이고 의식적이며 채우는 유위有爲의 작용으로서는 이를 수 없는 것으로서 온 우주를 담을 수 있는 고차원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곡신谷神과 현빈지문玄牝之門에는 중심자리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곡谷자는 입을 중심으로 얼굴을 상형한 글자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곡신谷神이라는 것은 얼굴 부위에서 허정虛靜하면서도 온갖 묘용妙用을 낳을 수 있는 자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빈지문玄牝之門도 신령스러우면서도 허정虛靜한 자리에 이르는 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수련을 통해서 이러한 자리가 열릴 때 중심에 이를 수 있고 이때 비로소 인위적으로 구하지 않아도 얻어지며 행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도교의 비전으로 알려진『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4)에서는 수련을 오래 하다 보면, ‘신神이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는 상태神入谷中’에 들어가서 갖가지 효과를 보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 ‘곡중谷中’이란 기가 모여 영묘한 작용을 하는 자리를 가리킨다. 또한 이 책에서는 노자가 우리 몸을 걱정하시어 곡신谷神을 가르쳐 주셨지만 사람들이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에 대해 간략하게 노래하고 있다. 즉 내 몸에는 진리의 관문玄關이 있는데 빛이 있어서 태어난 뒤로 막혀 버린 그 구멍祖竅으로 돌아오면 온몸의 신神이 편안해지고 약藥이 몸에 흐르는 강물의 근원에서 생겨나니, 하나의 기氣가 솟아 나온다고 한다.
또한 가려진 막을 뚫으면 변화가 일어나서 금빛이 찬란하며 한 덩어리 둥그런 해가 변함없이 붉게 빛난다고 한다. 모든 연분萬緣을 내려놓고 털끝 하나도 일으키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태어나기 이전先天이요, 진리에 합하는 참된 무극無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태초같은 텅 빔太虛이 아름답도록 조용하여 어떠한 낌새도 녹아 들어가 버리고 성性과 명命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의식을 잊어버리며 의식을 잊은 뒤에야 본래의 참된 진리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도덕경』의 이 구절은 수련에서 핵심이 되는 중심자리와 그에 집중할 때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심자리와 그 역할은 『도덕경』의 제10장에서도 나타난다.
天門開闔 能爲雌乎(第十章)
하늘의 문을 열고 닫기에 암컷이 될 수 있는가
여기서 천문天門을 인간의 이목구비耳目口鼻로 보는 견해도 있고 심지어 여성의 성기를 뜻한다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이를 마음의 문, 즉 중심자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임법융은 천문天門)이란 사람 심성의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자雌란 유화柔和하고 청정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5)
또한 박 영호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천문天門은 무문無門이다. 하늘 문이 있다면 내 맘이다. 예수도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다’(루가 17:21)고 하였다. 하늘 문을 열고 닫는 데 제나自我가 죽으면 열리고 살면 닫힌다. 수컷이 아닌 암컷이 된다는 것은 탐貪 ・진瞋 ・치痴의 자아가 죽는 것이다.“6)
이 장은 천문天門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자雌가 상징하는 상태가 있기 때문에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를 중심자리에 이르는 문으로 본다는 것은 이 구절이 수련양생의 자세에 대한 언급일 뿐 아니라 나아가 수련에서 집중되어야 할 자리와 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수련에서 중요한 것은 중심 자리에 이르러 마치 암컷의 상태와 같이 허정虛靜하고 인위적인 행함이 없는 상태, 모든 분별적 개념을 떠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중심자리의 위치를 아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태에 이르러야 중심자리의 작용이 일어나는지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심자리를 의식하더라도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7)에서는 중심자리의 의미와 위치 등에 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늘의 중심天心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三才이 함께 타고난 심장에 해당하는 중심心이다. 단丹에 관한 책에서 말하고 있는 아득한 구멍玄竅이라는 것으로서,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열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닫는데, 그것을 열면 오래 살게 되고, 그것을 닫으면 일찍 죽는다.
하늘의 중심天心은 해(日: 단학의 용어로는 내단內丹을 가리킬 때도 있고 왼쪽 눈을 가리킬 때도 있다 - 역주)와 달(月: 단학의 용어로는 내단內丹, 오른쪽 눈, 또는 원신元神을 가리킨다 - 역주)의 가운데에 있는데, 『황정경黃庭經』에서는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편편한 곳이, 힘차게 살아 나오고 있는 참된 기眞氣를 다스릴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집이란 얼굴을 말하는 것이니, 얼굴 위에 있고 사방이 한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얼굴 위에 있고 사방이 한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 일반 경혈도 위의 산근혈山根穴에 해당한다. 미심眉心이라고도 한다 - 역주)이란 바로 하늘의 중심天心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사방 한 치 정도 되는 가운데에는, 약초들이 빽빽하게 널려 자라고 있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는 평탄한 공간이 높다랗게 걸려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라든가, 옥황상제께서 사시는 하늘나라 서울에 세워진 단청 입힌 궁궐이 보기에도 기묘한 모습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나아가서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신령한 (神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허중虛中’이라 하고, 불가佛家에서는 ‘영대靈臺’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조토祖土’ ‘황정黃庭’ ‘현관玄關’ ‘선천규先天竅’라고 한다.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치고止 비추어 살핀다觀”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인데, 원래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뜻을 부어가면서 두 눈으로 코끝을 살피듯이 보며, 몸을 바르게 하여 편안하게 앉아서, 마음을 이끌어서 연중緣中이라고 하는 곳에다가 매어 두는 것이다. 도가道家에서는 단전丹田 즉 중황中黃이라고 하는 것을 불가佛家에서는 연중이라고 하지만, 결국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머리의 가운데에다가 생각을 매어 두어야 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고, 다만 두 눈의 가운데로서 편편한 곳인 이른바 선천조규先天祖竅라는 곳에다가 생각을 매어 두면 되는 것이다.
빛은 살아서 펄펄 뛰는 듯이 힘찬 물건이라서, 생각을 두 눈 사이의 편편한 곳, 즉 조규祖竅에다가 매어 두면, 빛이 저절로 그 곳으로 뚫고 들어간다. 반드시 뜻을 머리의 한가운데인 어떤 장소에다가 달라붙어 있게 하지 아니하여도 된다.
연중緣中이라는 용어의 뜻이 지극히 묘하다.
중中이라는 뜻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 이 세계를 천곱에 천곱에 천곱을 한 그 많은 세계가 모두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 자연의 운행변화의 기틀造化之機이 이를 말미암아서 질서있게 제자리를 잡게 된다는 이치를 가르치는 용어인 것이다.
연緣이라는 용어는, 이로 말미암아서 무엇인가 이루어지게 되는 실마리 또는 인연이라는 뜻이며, 확실하게 어느 하나의 사실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중中이라는 용어와 연緣이라는 용어의 뜻은 매우 걷잡을 수 없도록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고, 매우 알아내기 힘드는 것이지만, 깨닫고 보면 참으로 훌륭하게 사용한 용어이다.
이 책에서 여동빈은 천심天心의 자리를 찾는 방법을 제시하기 전에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다. 즉 천심天心이라는 구멍은 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듬어 찾는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없이 조용히 보존하여서 기다리는 경우에만 열린다고 한다. 여기서 보존이라는 말의 뜻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이치와 같고 “그와 같으면是那麽 그와 같은 것이 아니고非那麽, 그와 같지 않으면非那麽 도리어 그와 같은 것이다劫那麽”라는 이치와 같다고 한다. 이렇게 된 뒤에야 비로소 모든 것, 모든 이치의 본바탕은 하나 같고 평등하다如如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중심이라는 것이 설사 일정한 자리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몸과 마음의 분별적 경계가 해소되고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긴장되거나 기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몸의 특정 부위를 중심자리라고 찾아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흔히 제3의 눈으로서 인당印堂혈의 위치를 말하고 맹목적으로 거기에 의식을 집중하도록 하는 수련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몸의 특정부위를 과도하게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이때 음양의 기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상기되기 쉽다. 기 수련이라는 것이 기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폐쇄적 경계와 분별을 떠나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는 것인데 수련에 임하여 이러한 상태에 머무르고 나아가 그러한 바탕 위에서 기를 제한하여 운용하면 심신의 조화에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수련에서 집중하고 있는 부위는 사실 중심자리가 아니다. 이것은 이 부위에 집중했을 때 일어나는 갖가지 작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흔히 이러한 수련을 하다 보면 이 부위로 환한 빛줄기가 흐르게 되고 이어서 앞이 환해지면서 여러 가지 영상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이를 통해 투시나 전생의 모습, 외계인과의 채널링, 기타 미래에 대한 영상을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종교인의 경우 그 종교의 창시자나 숭배 대상의 영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체험을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양 소개하고 있는 책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또한 눈을 가린 채 인당혈 집중으로 책을 읽거나 어떤 사물을 알아 맞추는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이 마치 수련의 목표인 것처럼 내세우고 이를 방송에서도 소개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방향의 수련이나 체험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사실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고 그러한 수련을 그대로 행하면 정도 차이가 있지만 그러한 결과가 나온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영상은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각종 정보들이 환영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는 선입관들에 의해서 각종 영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환영들을 사실로 믿고 그것에 얽매이게 되면 결국 귀신놀음에 빠지게 된다. 설사 이러한 집중을 통해서 투시가 이루어지고 보이지 않는 사실을 알아맞힌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를 반복할수록 기의 불균형이 심해져 심신의 건강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수련을 통해서 중심자리에 이를 때는 이러한 현상이 생기지 않는다.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에서는 이 중심자리는 무극無極이 이루어지는 곳, 으뜸된 신元神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이 다만 이 으뜸된 신만을 감싸서 지킬 수 있으면, 음陰과 양陽이 변화하는 굴레를 뛰어 넘어서 그 바깥에 태어날 수 있으며, 더 이상 길을 잃고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는 굴레 속을 윤회하지 아니하여도 된다고 한다. 이것이 선禪을 하는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리거나 크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가르침을 전할 때에 흔히 쓰는 “본성을 보아야지……”라는 가르침이다. 이른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는 본래의 모습本來面目”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본성을 본다는 것”을 본성의 빛性光과 의식의 빛識光의 차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중심자리에 기가 집중되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텅 빈 방에 흰 것이 생긴다虛室生白”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흰 것이란 바로 빛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직 빛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빛으로 인한 효험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여 빛이 나타났다고 여기고 그것에 뜻을 두어 집착하게 되면 그 자체로서 의식에 떨어지므로 본성의 빛性光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이 빛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생각없이無念 생각을 살려야生念 할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생각이 없다는無念 것은 모든 경우에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모든 경우를 저절로 깨달아 얻게 되는 것이라고千休千處得 한다. 또한 생각을 살린다生念는 것은 한평생 지킬 수 있는 하나의 생각一念을 한평생 지켜 나가는 것으로 이 생각은 빗나감이 없는 바른 생각正念이니 보통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다르다고 한다.
또한 알고 보면 마음이 생각으로 되는 것이니 생각은 나타나 있는 마음現在心이라고 한다. 이 마음은 그 자체가 빛이요, 황금꽃 가운데의 암꽃술(葯: 약藥이라는 글자와 통용되기도 한다. 단학의 용어로서는, 내단內丹의 자료, 곧 원신元神, 원기元氣, 원정元精을 가리킨다. - 역자 주)이라고 본다.
여기서 본성의 빛性光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이 물건을 볼 때 우선 눈으로 비추어 보게 되지만 처음에는 분별을 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지 못하는데 이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마치 거울이 아무런 마음 없이 비추는 것과 같고 물이 아무런 마음 없이 비추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 의식의 빛識光으로 되니 그것에 의해서 분별이 생긴다. 즉 거울에 그림이 비추어 나타나니 이미 거울은 없어진 것이고, 물에 모습이 비치어 나타나니 이미 물이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에 의식이 생기고 나면 이제는 빛이라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본성의 빛性光이었지만 그것이 생각으로 바뀌면 의식이 되는데, 의식이 일어나면 빛은 어두워져서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이는 빛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빛이 이미 의식으로 되어 버린 것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분별적 의식이라는 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어서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본성을 본다는 것見性’도 여기에는 이미 팔식八識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참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궁극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가장 마지막에 가서 이러한 상태조차도 한 번에 깨뜨려 버려야 ‘참다운 의미에서 본성을 깨달음眞見性’이 될 것이고 ‘참다운 의미에서 돌아 갈 곳이 없는眞不還’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빛을 돌린다고 할 경우 바로 가장 처음의 더 이상 돌아 갈 곳 없는 빛을 돌리는 것인 만큼 여기서는 털 한 오라기만한 의식과 생각도 이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의식에 의하여 빛을 돌리는 잘못에 떨어지지 않으면 감각기관根 가운데에 있는 근본적인 본성元性을 쓰는 것이고, 의식에 의하여 빛을 돌리면 감각기관 가운데에 있고 의식으로 변한 성識性을 쓰는 것이다. 털끝만한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를 가려내는 기준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마음을 쓰면 그 자체로서 의식에 떨어진 빛識光이 되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그대로 본성의 빛性光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털끝만한 차이가 천리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인 만큼 가려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식을 끊어 버리지 못하면 신神이 살아나지 못하고 마음이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도록 비어 있지空 못하면 단丹이 맺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하면 곧 단丹이 이루어지고, 마음이 그에 빌붙을 수 없도록 비어 있으면 그 자체로서 단丹을 이루는 원료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황금꽃의 암꽃술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의 사물도 붙여 두지 아니하는 것不著一物을 마음이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하다心靜고 부르고, 하나의 사물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을 마음이 그에 아무 것도 빌붙을 수 없도록 비어 있다心空고 부른다.
따라서 그에 아무 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空을 보되, 그에 아무 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空으로 보게 되면 그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空은 아직 참으로 비어 있음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未空.
아무 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되空, 그 아무 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空조차도 잊어버려야 참으로 아무 것도 그에 빌붙을 수 없는 비어 있음眞空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의 내용은 중심자리의 위치와 의미, 역할 그리고 그러한 수련에 임하는 태도에 대해서 도교와 불교의 교의를 통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거론하고 있는 중심 자리가 때로는 하단전을 때로는 머리 중심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몸과 마음에서 음양의 균형을 이루는 중심의 상태에 이른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단전의 역할도 체내의 기운 조화와 수화水火의 통일을 통해서 기의 새로운 차원으로의 변화를 일구어내는 데 있으며 특히 머리의 중심자리로의 집중은 성명性命을 조화시킴으로써 기의 궁극적인 경지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에서는 명상수련의 내재적 의미가 잘 밝혀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명상수련을 외부적인 방편에 얽매여 행하거나 명상수련을 통해서 도달하는 경지를 초월적인 것으로 형상화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수련에 관한 비전들이 상징적인 표현을 하거나 어떤 형상에 비유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본래적인 의미를 왜곡하여 적용해 온 데도 원인이 있다고 본다. 가령 옛날에는 수련의 과정이나 방편으로서 단丹이나 채약採藥, 연鉛, 홍汞, 금화金花 등의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것의 본뜻을 모르는 이들이 이것을 마치 체내 바깥에서 주입되는 약물이나 광물질로 알고 이를 만들어 먹기까지 했다. 또한 수련을 통해서 도달하는 높은 경지나 자리로 표현되고 있는 옥황상제나 용궁龍宮, 해저海底, 북두北斗, 십승지十勝地 등을, 비유하고 있는 실제 사물로 여기고 이를 찾아 헤매거나 숭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 경향은 여전하게 남아있어 수련에서 체험하는 상태를 나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존재나 경지로 인식하면서 환상의 세계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수련의 과정과 상태를 비교적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른바 비전들이 취하는 상징적 비유가 적고 중심의 의미나 중심 자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수련과정에서 어떤 환상이나 형상에 이끌리는 것을 마魔의 경계에 들어간 것으로 비판하며 일상의 직업활동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다만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그때 그때의 일에 빛을 돌이켜 내면의 세계를 비추어 보았을 때 털끝만큼이라도 나라든가 너라고 하는 유한한 모습에 집착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첫째가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화광동진和光同塵’과 같은 의미로서 빛을 회전하여 활용할 때 빛을 세속과 조화되게 하여 세속에 섞여 살아가야 한다는 경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중심에 대해서는 『참동계천유參同契闡幽』8)나 『대성첩경大成捷徑』9) 등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참동계천유參同契闡幽』에서는 수련의 근본이 중中을 지키고 하나를 품음守中抱一을 아는 데 있다고 한다. 즉 중심을 통하면 몸 속의 모든 기관과 맥, 뼈마디, 땀구멍이 일제히 터지고 뚫려서 자연히 빛이 젖어 들어 모든 변화를 다스릴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하나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가 『도덕경』에서 “그 하나를 얻으면 만사가 끝난다”하고 “곡신谷神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현빈玄牝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담겨 있는 뜻이라고 한다. 『대성첩경大成捷徑』에서도 상, 중, 하단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특히 상단전을 이환궁泥丸宮)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곳에 원신元神이 머무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으로 기운이 소통되면서 연허합도煉虛合道에 이르게 되는데 이 단계에 이르면 개체성의 한계를 벗어나고 원신元神의 본래 속성을 되찾아서 우주로 열린다고 한다.
다만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에 비해서 『참동계천유參同契闡幽』나 『대성첩경大成捷徑』은 소주천 수련을 통해서 척추 내부로 흐르는 독맥督脈의 소통을 기본으로 삼아 성명쌍수性命雙修를 이루는 것을 중심이 열리는 전제로 보고 있다. 또한 중심의 자리에 대해서도 책에 따라서 하단전이나 중단전, 상단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언급하면서 명확하게 지칭하지 않고 있다. 중심이라는 것 자체가 모든 신체 부위의 기운 조화를 이룰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부위들이 하나로 통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때는 이런 부위들마저 모두 소통되는 상태에 이르는 만큼 실제 수련에서는 자리의 위치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중심의 의미를 실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기의 운용이 이루어져야 하며 단순히 어느 부위라고 못박고 그 부위에만 긴장을 하여 집중하는 것은 도리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곽내혁 저, 내 안의 우주에 이르는 길, 266~282쪽)
첫댓글 이 책 안에서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잘 몰라도 그냥 보기만 하여도 좋아요~
<곡신谷神과 현빈지문玄牝之門은 비어 있으면서 온갖 신묘한 작용이 생겨나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이는 달리 말해서 인식주체의 온갖 주관적 개념작용이 일어나지 않아 분별심과 경계가 사라지고 온 우주가 하나로 열리는 상태이다. 이것은 인식주체에게서 음양의 불균형, 부조화가 사라지고 중심
이 형성되는 상태이기도 하다... 또한 가려진 막을 뚫으면 변화가 일어나서 금빛이 찬란하며 한 덩어리 둥그런 해가 변함없이 붉게 빛난다고 한다. 모든 연분萬緣을 내려놓고 털끝 하나도 일으키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태어나기 이전先天이요, 진리에 합하는 참된 무극無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태초같은 텅 빔太虛
이 아름답도록 조용하여 어떠한 낌새도 녹아 들어가 버리고 성性과 명命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의식을 잊어버리며 의식을 잊은 뒤에야 본래의 참된 진리가 나타난다고 한다... 아무 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되空, 그 아무 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空조차도 잊어버려야 참으로 아무 것도 그에 빌붙을 수 없는 비어
있음眞空이 된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그때 그때의 일에 빛을 돌이켜 내면의 세계를 비추어 보았을 때 털끝만큼이라도 나라든가 너라고 하는 유한한 모습에 집착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첫째가는 일이라고 한다... >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牝자가 원고에서는 그렇게 표현되었는데 편집과정에서 오류가 생겨 책에서는 다른 글자가 되어 버렸어요. 다른 책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는 걸로 봐서 아마 매켄토시로 전환하면서 생기는 문제인 듯 해요.
으악~ 牝자와 그 어려워 찾아지지도 않는 무자가 헷갈리면 어떻게 되남요? 뜻이 엉겨버리나요? 매킨토시가 엄청 잘못을 저질렀군요 쯔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