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 1
A .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 1
B . 연구방법 및 범위 ·················· 4
Ⅱ. 평화의 개념······················· 6
A . 일반적 개념····················· 7
B . 성서의 어의론적 개념 ················ 9
C . 성서의 평화사상···················12
Ⅲ. 평화론에 대한 성찰 ···················19
A . 로마의 평화(Pax Pomana)···············19
B . 정당전쟁론 ·····················21
C . 평화주의와 기독교 현실주의 ·············26
D . 평화의 역동성과 정의 ················30
Ⅳ. 평화를 위협하는 구조들 ·················34
A . 사회의 구조적 부정의 ················35
B . 전쟁과 핵의 위협 ··················38
C . 생태학적 위기····················42
D . 일반적 폭력·····················45
Ⅴ.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51
A . 평화와 정의의 계약신학 ···············51
B . 그리스도의 평화와 비폭력 ··············54
C . 평화와 시민적 저항 ·················59
Ⅵ. 결 론 ·························62
A . 요약 ························62
B . 평가 및 제언 ····················64
* 참 고 문 헌······················67
Ⅰ . 서 론
A .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개혁교회연맹 제1차 협의회는 1877년에 열렸고 회중교회 제1차 협의회는 1891년에 열렸는데 이 두 세계적인 교단은 1970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통합하여 그 이름을 세계개혁교회연맹 (WARC)이라 불렀다. ) 한국기독교학회, (편), 한반도의 평화신학 정착 , 신앙과 신학 6집 (서울:강남출판사, 1989), P.127.
1982년 카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제21차 WARC 총회는 정의, 평화,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교회가 이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 ) 세계개혁교회연맹, (편),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대한기독교서회, 1989), P.378. 이하 WARC로 함.
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오타와 총회는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오늘의 복음증언을 위한 소명
) Ibid., p.379.
이라고 하는 신학문서를 채택하고 이를 1983년 2월에 제1차로 모인 새로 선출된 WARC 중앙위원회로 하여금 집중적으로 연구케 하였다. 바로 이 연구의 결과로 나온 것이 WARC 중앙위원회의 계약명령 인 평화와 정의를 위한 계약 이었다. 곧 WARC는 이 문서를 WARC의 회원교회들과 WCC 본부에 발송하였고, 1983년 벵쿠버에서 열린 WCC는 회원교회들에게 정의, 평화, 환경 (JPIC) 문제에 상호 참여적인 협의적 과정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 Ibid., p.380.
정의, 평화, 환경 이 세 가지 문제는 오늘날 가장 긴급히 요청되는 삶의 문제이다.
이 중에서 특히 평화문제는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사이며 희망이다. 그러나 평화의 개념은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사회 단체들과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 그리스도 철학 연구소, (편), 현대사회와 평화 (서광사, 19
91), pp.254-255.
평화 개념은 인간의 삶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와 함께 발전하였으므로 이 개념은 항상 삶에 대한 완벽한 보장을 의미하고 있다. ) WARC, p.319.
그런데 서구 교회가 그래왔듯이,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 역시 평화의 가르침과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왜곡시켜 왔으며, 좁은 의미로만 해석해 왔다. 강력한 영성주의, 개인주의, 저세상적인 믿음 등은 평화의 개념을 역사적이고 사회구조적인 맥락에서 실현시키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평화는 기존 사회구조 내에서의 능동적인 사역이라기 보다는 수동적인 마음의 상태로 이해되어 왔다. 그들은 영원한 평화, 영적인 평화, 혹은 유토피아적인 평화를 강조해 왔으며, 이 평화는 인간행동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 Ibid., p.318.
그러나 예수가 가르친 평화는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으며 단순히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만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변화하는 역동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 이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라 (마5:9)는 말은 단순히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만드는 적극적인 창조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 Ibid.
창조세계의 무질서와 인간세계의 혼란은 평화 부재의 표현이다. 또한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불평등, 정치적인 억압과 다툼은 인류사회를 평화에 두려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억압에 의해 평화가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은 백성의 지도자들을 통해 노예 상태의 속박을 풀고 다시금 평화를 세우기 위해 싸우셨다. ) Susan Thistlethwaite, (편), 정의, 평화, 교회 , 박종화,서진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9), pp.38-39.
따라서 본 논고는 정의와 평화 간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전제한다. 평화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고 또한 정의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양자는 하나의 똑같은 기본현실을 두 방향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한 쪽이 완전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쪽도 완전하지 못하다. 정의와 평화가 없는 정의는 단지 복수일 뿐이며, 정의 없는 평화란 단지 억압일 뿐이다. ) WARC, pp,273-274.
그래서 평화는 정의와 뗄 수 없이 결합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세상의 화목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는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얻는 길을 보여 주셨으며, 그는 복음 안에 하나님의 정의를 계시하셨다. ) Ibid., p.263.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종(엡2:13-19)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분단과 갈등과 억압의 역사속에서 평화와 화해와 해방의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다(눅4:18; 요14:27). ) Ibid., p.317.
그러므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평화의 종교이며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어야 하는 사명을 띤 종교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평화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잘못된 평화이해는 사명의 본질과 수행을 변질시킬 우려가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본 논고는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평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는 것은 기독교의 사명을 이해하고 수행하는데 무엇보다도 요청되는 선결 문제인 것이다.
B . 연구방법 및 범위
본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 연구는 세계개혁교회연맹(The 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제22차 총회(1989년 8월 15일-17일) 자료집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이 총회의 분과 중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 분과를 위한 연구자료를 특히 중점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 주자료를 중심으로 하고 다른 자료를 보충논리로 이용하였다.
연구의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서론에 이어 제Ⅱ장에서는 평화의 개념을 일반적으로, 그리고 성서의 어의론적 의미와 평화사상을 통해 정리하고, 이어서 제Ⅲ장에서는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평화론에 대해 성찰을 하므로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위한 비판적 성찰을 얻어, 제Ⅳ장에서는 오늘날 평화를 위협하는 구조들을 구체적 사실에 입각하여 살펴서 이런 것을 종합하여, 제Ⅴ장에서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하였다. 제Ⅵ장에서는 결론적으로 요약과 함께 평가 및 제언을 하므로 모든 연구를 마치고자 한다.
Ⅱ . 평화의 개념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평화의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류 역사에 나타나면서 부터 역사의 흐름과 함께 하며 갈등, 미움, 전쟁이 있는 곳에 항상 평화를 가져다 주는 평화의 사자, 더 나아가서는 평화의 원천이라는 역할을 담당했다.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 평화 라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실 때마다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 하셨다. ) WARC, p.318.
한편 성경은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가는 곳마다 평화를 가져가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와같은 평화와 행복은 정의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 그리스도교 철학 연구소 (편), 현대사회와 평화 (서광사, 1
991), pp.27-28.
그래서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평화는 사색보다는 실천이 우위에 있다. ) Ibid.
그러나 이론없는 실천이란 맹목이므로 평화의 개념에 대한 이론적 정립이 필요하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평화의 개념을 일반적 개념과 성서의 평화개념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A . 일반적 개념
평화연구에 있어서 일반적인 평화의 개념은 노르웨이의 사회학자 갈퉁에 의해서 소극적 평화 (Negative Peace)와 적극적 평화 (P-
ositive Peace)로 구분되었다. ) J. Galtung, Peace Research : Past Experiences and Future Perspectives, in Essays in Peace Research, 제1권, p.244.
를 그리스도교 철학 연구소 (편), 현대사회와 평화 (서광사, 1991), p.198.에서 재인용.
소극적 개념에서는 평화란 단순한 전쟁의 회피라는 의미로 규정되는 것으로 ) Ibid.
평화란 어떠한 상태이다 라고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이 없는 상태 라고 부정적 개념 규정의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소극적 개념에서의 평화는 폭력, 궁핍, 부자유, 불안이 없는 상태로 정의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소극적 개념에서 말하는 평화이해는 20세기에 들어서서 겪은 세계대전의 엄청난 영향 속에서 또하나의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 전쟁의 위험을 내포하는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평화연구가 뿌리 내리기 시작한 것이므로 전쟁의 회피라는 좁은 의미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 Ibid., p.197.
이런 평화이해에서는 평화와 휴전을 혼동하게 된다. 이 개념의 취약점은 공공연한 집단적인 전쟁의 부재를 평화로 규정함으로써 모든 현상유지, 국가체제의 모든 상태를 긍정하여 준다는 것이다. ) 유석성, 기독교 평화론 , 화해 제8권 (부천:서울신학대학교지편집위원회, 1990), p.89.
즉 군사력 우위를 통한 평화요, 군사력 우세를 통한 전쟁방지 이다.
적극적 의미의 평화개념에서는 평화란 사회정의의 상태, 민주적 갈등의 조정, 국가간의 협력의 상태로 규정된다. ) 그리스도교 철학 연구소, (편), op.cit., p.181.
다시 말하여 사회정의가 행해지고 있는 상태, 삶을 위해 능력과 수단이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상태로 규정된다. 이런 입장에서 퇴트는 적극적인 평화는 인권의 보장 또는 사회정의, 경제발전 등의 평화의 적극적인 요건들이 충족되는 상태이다 ) Ibid.
라고 한다.
한편 여기에서 나아가 소극적 평화개념과 적극적 평화개념의 양자를 연결시킨 우주적 평화, 또는 궁극적 평화가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우주적 평화란 폭력, 슬픔, 불의의 부재이며 정의, 자유의 현존이다. 또한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친교 안에서의 삶이다. ) J. Moltmann, 예수 그리스도의 길 , 김균진, 김명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pp.196-201.
이 평화개념은 소극적 개념과 적극적 개념을 연결시키지만 정의(正義)의 강조를 통하여 평화의 적극적 개념을 우선시킨다. ) 유석성, op.cit., p.89.
따라서 우주적 평화는 정의로운 평화이다. 우주적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적 관계의 실현이다. 바로 이러한 개념이 기독교적 평화개념 이다.
그러면 기독교 평화개념이 우주적 평화, 정의로운 평화라는 성서적 근거는 무엇인가.
B . 성서의 어의론적 평화개념
1 . 구약성서에서의 샬롬(Shalom)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어로 평화의 의미로 쓰인 샬롬(Shalom)이라는 말은 포괄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명사 샬롬은 287회 사용되었고 여기서 파생한 동사는 샬람으로 평화롭게 하다 , 평화롭다 이며 ) C. L. Mitton,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Vol. IV. (New York : Abingdon Press, 1962), p.705.
명사 샬롬은 안전하게 하다 , 끝나게 하다 , 완전하게 하다 , 끝마치다 등의 여러 형태로 쓰이는 동사형 샬렘으로 부터 파생되었다. ) J. Macquarrie, 평화의 개념 , 조만 역 (대한기독교서회, 19
80), pp.27-28.
샬롬이란 말이 평화란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을 때 그 말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본래 바라보았던 것은 총체성, 연합, 완전성, 충만성이 가득한 세상 혹은 인간 사회의 상황이었다. ) Ibid.
그래서 샬롬의 일차적인 의미는 어떤 유기체나 인간 공동체, 민족, 가족 등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고 완전하며 안전하게 존재하는 것 을 뜻한다. 더 나아가 샬롬은 전쟁이 중단된 상태가 아니라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획득되고 유지되는 것으로서 전쟁에서의 승리 자체를 의미하였다. ) J. Pedersen, Israel It's Life and Culture I-II (London:O-xford University Press, 1959), p.312.
샬롬은 공동체적인 조화로운 삶을 즐겁고 효과있게 하는 모든 원천들과 요인들을 가리킨다. 샬롬은 위협의 한 가운데서 존재하는 평안이며, 전쟁과 한발과 맹수들 가운데서 누리는 평안이다. 그 평안은 행복한 날에 느끼는 목가적 평안이 아니다. 사람들이 불안에 항상 직면하고, 생존을 위한 투쟁과 시련을 겪는 가운데서 얻는 물질적, 육체적, 역사적 평안이며, 초목과 열매와 원수들 가운데서 체험되는 구원 ) W. Brueggemann, 기독교와 평화 , 홍철화 역 (대한기독교서회, 1988), p.19.
이다.
샬롬은 또한 연대적인 평안이다. 그 평안은 모든 공동체, 다시 말하면 소년이나 노인, 부자나 빈자, 힘있는 자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안전과 번영이다. 우리들은 샬롬 안에서 모두 하나이다. ) Ibid.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축복 앞에 함께 서 있으며 그 삶의 선물을 함께 받아야 한다. 샬롬은 단 한 사람도 결코 소외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을 감싸는 공동체에 존재하는 것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와 통일 ) 김이곤, 구약성서의 고난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1), p.
306.
이다.
2 . 신약성서에서의 에이레네(eirene)
신약성서에서는 평화라는 말이 희랍어 에이레네(eirene)라는 말로 사용 되었다. 에이레네는 본래 세속 그리스어로서는 전쟁의 반대상태 내지 전쟁의 종식을 뜻한다. 평화는 질서와 법이 유지되는 상태이며, 여기서 복지가 비롯된다. ) H. Beck, 평화 , 기독교사상 320호 (1985.2), p.78.
그래서 세속 그리스어로서의 에이레네 개념은 전쟁의 지속 상태에서 하나의 막간으로서 이해된 사건들의 상태로, 평화의 시간 혹은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이것은 본래 휴전을 뜻한다. ) Macquarrie, op,cit., p.29.
신약성서에서 에이레네는 모두 91회 나오는데 복음서에만 24회 사용되었다. ) Beck, op.cit., p.81.
그러나 에이레네는 신약성서에서 그 의미의 폭이 세속 그리스어 보다 더 광범위한데 그 이유는 그 단어가 기독교 신앙과 경험의 배경 속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히브리어 샬롬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 Mitton, op.cit., p.706.
그래서 신약성서의 에이레네 개념은 정리하기가 어렵다. 신약성서의 기록 자체가 거의 서기 50년에서 150년 사이에 기록되어졌는데 이때 기독교가 부딪쳐야 했던 정치적 상황이나 문제들에서 중요한 변화를 찾아 내기가 쉬운 것이 아니고 당시 로마제국 자체가 충돌이 없는 로마의 평화(Pax)가 이루어진 상태이며, 신약성서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고대 이스라엘과는 달리 그 스스로의 역사를 갖지 않았고 로마제국 안에서 유대교 내의 소수 종파주의자로 생각되어 정치적 힘도 없는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이었기 때문이다. ) V. P. Furnish, 신약성서에 나타난 전쟁과 평화 , 기독교사상 325호 (1985.7), pp.198-199.
따라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구약성서의 샬롬과는 달리 그 개념의 전승사적 고찰은 할 수 없으며, 신약성서의 에이레네 사용의 출발, 목표가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빛에서 부터 개념이 파악되어져야 한다.
C . 성서의 평화사상
1 . 구약성서의 평화사상
구약성서에서 평화는 일반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이 소유하는 총체의 상태 또는 완전함의 상태 로 개인의 건강으로 부터 시작해서 공동체의 경제적 번창과 정치적 안정까지도 포함하는 사회 지향적인 정치적 대망 ) 맹용길, 평화에 관한 기독교 윤리적 이해 , 기독교사상 (1985.7), p.111.
이었다. 그러나 구약의 샬롬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종교적, 전승사적으로 해석된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데 구약성서의 평화사상은 다음과 같이 고찰할 수 있다.
첫째, 샬롬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종교적 성격을 띤 것으로 히브리인들에게서 샬롬은 일종의 종교적 개념이었다. ) R. H. Baiton, 전쟁, 평화, 기독교 , 채수일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p.17.
샬롬은 결코 인간적 성취를 통하여 얻어지는 그 어떤 존재론적 상태가 아닌 야웨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의 현실 안에서 비로소 이해된 개념이었다. ) 김이곤, op.cit., p.307.
그래서 샬롬은 야웨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야웨는 평화이시다(삿6:24).
야웨가 평화의 창시자이시며 평화의 근원이다. 하나님이 샬롬을 주시며 완성하신다(시29:11; 35:27; 욥25:2; 민6:26). 샬롬은 야웨 하나님이 그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낸 구원사 속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하나님의 평화계획 이 무엇인지를 깨달음으로써 비로서 이스라엘 안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 Ibid.
그러므로 히브리인은 평화를 야웨의 선물로 이해하였다.
둘째, 평화는 정의와 연결되어 있다. 즉 정의로운 평화이다. 정의는 하나님의 평화의 전제이며 내용이다.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 유석성, op.cit. p.89.
시편 기자는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을 맞춘다는 시적 형식으로 정의와 평화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시85:10-13).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야웨께서 복을 내리시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주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시85:10-13)
예언자 이사야는 평화는 정의의 결과라고 말한다. 정의는 평화를 가져온다(사32:17).
이사야는 평화로 다스려지고 정의가 거닐며(사61:3),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 흐르고 정의가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는(사48:18)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정의와 공의가 실행될 때, 억눌리고 박탈당한 자들이 힘과 존엄성을 얻게되는 생명력 있는 공동체 즉 샬롬의 수립이 이루어진다. 공평과 의의 귀결이 샬롬이다. 곧, 기쁨과 평안의 안식이 지속된다. 그러나 불평등과 압제는 잠시도 평화로울 수 없는 혼란과 불안을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 Bruggemann, op.cit., pp.22-23.
그러므로 평화는 정의가 실현되는 것,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 빼앗긴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 유석성, op.cit., p.90.
세째, 평화는 관계적 개념이다. ) 김이곤, op.cit., p.322.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하나님과 자연이 바른 관계를 지키며 살아갈 때, 상호 친교속에서 지낼 때 평화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땅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통치자, 관리인이다. ) J. Moltmann, 창조안에 계신 하나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p.267.
인간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자연의 대리자이며, 자연의 관리자인 인간의 사명은 창조의 질서를 보존하고 유지시키는 것이다. ) Ibid.
그런데 창세기 2장에 의하면 이런 책임적 존재인 인간의 타락은 평화를 파괴시켰는데 그것은 곧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동물의 관계의 파괴이었다. ) 최종진, 이스라엘의 종교 (소망사, 1987), pp.48-50.
구약에서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는 계약의 관계이다. ) T. B. Maston, 성서윤리 , 고재식 역 (대한기독교출판사,19
82), pp.35-38.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의 샬롬이라는 윤리적 용어는 계약관계에서 유출된 것이다. 이 계약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평화의 계약 (겔34:25-31)이며 그 관계에서의 신실함, 곧 정의롭고 신실하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고 증진시키는 그런 사귐의 친구관계가 샬롬을 가져다 준다. ) S. Thistlethwaite, 정의, 평화, 교회 , 박종화, 서진학 역(한국신학연구소, 1989), p.54.
네째, 구약의 평화사상은 미래지향적 기다림이다. 이것은 메시야적인 기다림이며 평화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말한다 (사2:2-4; 미4:1-3). ) 유석성, op.cit., p.90.
미가는 하나님께서 민족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강대국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시리라. 그리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드는 일이 없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 (미4:3-4)고 했다. 그리고 메시야는 궁극적인 평화에 대한 보증이 된다(사9:1-6; 11:1; 미5:1). 이사야에 의하면 평화의 왕 메시야는 정의를 구현함으로서 평화를 성취한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매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 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사9:5-6).
다섯째, 구약의 평화사상은 실천적 개념이다. 평화의 현실은 야웨의 사랑과 진실이 평형을 이루어 구현되는 현실, 이른바 야웨의 임재와, 거주하심이 인간의 응답과 결단을 통하여 보유되는 그 현실이며 평화는 야웨의 사랑과 진실을 모방함으로써 카오스(무질서)와 소외를 근원적으로 해소해가는 실천이다. ) 김이곤, op.cit., pp.307-308.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직분과 창조의 질서속에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책임적 존재로 다른 생명체와 함께 동료로서 살아간다. ) K. Barth, Ethics, trans, G.W.Bromiley (Vail-Ballow Press,1981), pp.173-175.
그래서 이스라엘의 평화의 윤리는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의 체결되었던 평화의 계약 (겔37:26; 사54:10)을 지켜나가는 가운데 구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 김이곤, op.cit., p.308.
그러므로 구약의 샬롬은 갈등과 적대관계가 우리안에 생기지 않도록 야웨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을 확립해 가는 사회구조, 이른바 야웨의 평화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운동과 상응 한다. ) 이삼역, 그리스도와 평화운동 , 신학사상 48호 1985.봄,pp.5-35.
2 . 신약성서의 평화사상
신약성서에서 평화 사상은 그리스도의 평화(골3:15)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선물(롬1:7; 고전1:3)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대관계 속에서 획득되고 유지된다. ) Beck, op.cit., p.83.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평화요, 평화의 왕으로서 왔다(히7:2). 예수가 탄생하실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 (눅2:14)라고 천사들이 예수의 세상에 오심을 평화로서 규정했다.
신약성서에서 평화는 전쟁의 반대로 이해되고(눅14:32; 행12:20), 외적인 안전(눅11:21), 무질서의 반대상태(고전14:33), 사람들 사이의 화해(행7:26; 갈5:22; 엡4:2), 메시야적 구원 개념으로써 이해된다(눅1:79; 2:14: 19:42). ) Ibid. p.82.
그렇지만 핵심적으로 신약성서의 평화사상은 화해와 연관되는데 바로 그리스도는 화해의 사건이라는 점이다(엡2:14
). ) 이상훈, 바울의 신학 서울신학대학, pp.78-84.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헐고 평화를 가져온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롬5:1).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평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사이며,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을 의미한다. ) G.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II, tran, G. W. Bromiley (Michigan:Eerdmands Publishing, 1964), p. 413.
이런 인간과 세상의 구원 상태로서의 평화는 인간들의 상호관계의 새 질서를 포함한다. ) Beck, op.cit., p.83.
따라서 공동체는 평화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전7:15).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가 선포되게 하신 후, 인간은 평화의 수립자가 되었다(마5:9). 하나님의 통치는 의와 평화이며(롬4:17),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화해로서의 평화를 내포한다.
결론적으로 성서에서의 평화사상은 정의로운 평화이다. 이 정의로운 평화는 공동체 안에서 인간이 행해야하는 하나의 실천이다. 그리고 이 평화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물이며 구원임과 동시에 예수 자신이 평화이며, 평화의 수여자이고, 화해로서의 평화 이다.
Ⅲ . 평화론에 대한 성찰
평화란 낱말처럼 그 본래의 뜻에서 멀어지고 오해되고 오용되는 말은 많지 않을 것이다. ) H. Beck, 평화 , 기독교사상 320호 (1985.2), p.84.
그것은 우리가 평화를 자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참된 평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을 때, 거짓평화가 참된평화를 대신하여 평화요구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평화를 희망하지 않는 기만적이고 허구적인 평화가 현상을 지배하였다. ) 김이곤, 구약성서의 고난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1), pp.
319-320.
평화의 낱말은 모든 나라와 종교들 속에 계속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낱말만이 받아들여질 뿐 성서적 의미와는 다르게 변질되고 있다. ) Beck, op.cit., p.84.
성서적인 의미와 세속주의적인 의미 사이의 괴리는 평화란 낱말을 모호하고 이중적 의미를 가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기독교에서 평화추구의 노력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러나 평화를 추구한다고 할 때 어떤 평화의 개념이냐에 따라 평화의 성격은 다르게 나타났다. 본 장에서는 지금까지 추구되어온 평화론을 성찰하고자 한다.
A . 로마의 평화(Pax Romana)
예수 그리스도는 팔레스틴이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 탄생했다. 곧 로마가 지배하는 상황이었는데 유다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예수의 고향인 갈릴레이는 분봉왕을 통해서 지배되었다. 로마가 볼 때 그들의 지배는 평화의 지배-로마의 평화(Pax Romana)였다. ) U. Duchrow, G. Liedke, 샬롬 , 손규태, 김윤옥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9), p.130.
로마의 평화는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그 평화를 누렸던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을 지배했던 상류층들에 의해서 황금기로 구가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켰으며, 전쟁은 제국의 변방에서만 이따금 일어났다. 따라서 지배계층에게 있어서 이 시대는 국내 정치의 안정, 경제적 부흥, 로마시민을 위한 권리의 확보, 문화적 개화기였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에 있는 수혜자들은 로마의 평화를 위한 댓가로 지불되는 희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평화의 그 주된 댓가는 로마에 의해서 지배당하던 민족들에 대한 무자비한 군사적 탄압이었다. ) Ibid., p.131.
로마의 평화 (Pax Romana)는 로마 황제와 그 휘하에 있던 최고 관리들이 정치적으로 원했던 바이며 그의 여단의 성공적 작전을 통해서 군사적으로 성립되고 확고하게 된 평화이다. ) Ibid.
이것은 승리를 바탕으로 한 평화, 폭력에 의한 평화, 무력에 의한 평화질서 인 것이다.
예수는 평화세력인 로마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납세를 실제로 거부한 데서도 나타나 있다(막12:13-17). 예수는 불의하고 평화가 없는 세계의 현상유지를 축복하고 합리화하는 주장에 반대한다. 예수는 로마 총독의 눈에는 기존의 평화를 위협하는 반란자였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파괴하는 자는 합법적 방식으로 평화의 세력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당시의 정치적 억압의 평화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 Ibid., pp.131-132.
예수에 의하면 지배자들은 단지 지배자들로 행세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지배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지 로마에서 신으로 격상된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에게도 평화는 단순한 전쟁의 부재상태 그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 R. H. Baiton, 전쟁, 평화, 기독교 , 채수일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p.17.
Pax라는 단어는 계약, 즉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동의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Pax는 법적인 계약관계를 통해서 형성된 결과이며 ) 이양구, 샬롬-평화-화평 , 기독교사상 (1989.3), p.216.
이것은 평안뿐만 아니라 평정, 휴식, 안식 등과 연결될 수 있었다. ) Baiton, op.cit., p.17.
그러나 예수는 로마의 평화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를 지시 했으며, 폭력적 지배를 통해서 수립된 로마의 평화는 결코 성서의 평화개념이 아닌 것이다.
B . 정당전쟁론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를 영원한 삶으로 위대한 선으로 파악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평화이해는 그의 저서 신국론 (The City of God)의 제11-22권에서 나타난 두 도성 에서 자세하게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개의 나라가 있다고 한다. ) Augustine, The City of God, tran.Marcus Dods (New York:The Mordern Library, 1950), p.345. 제11권. 이하 De Civitate Dei로함.
지상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가 있다. 여기에는 지상의 평화와 하늘 나라의 평화가 있다. 평화는 모든 사람이 누리기를 원하며, 심지어 가장 원시적인 동물도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 이 지상의 평화는 하늘의 평화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지상의 평화가 하늘의 평화를 지지하게 함으로써만 하나님 안에 있는 다른 자들과의 완전한 질서와 조화를 이룬 기쁨 안에서 분별있는 피조물의 평화라고 불리우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W. Beach, H. R. Niebuhr, 기독교윤리학 , 김중기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pp.119-12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의 도성과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속하는 행복과 평화의 의미와 그것을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만들려는 철학자들의 헛된 노력을 말한다. ) P. Schaff, ed., 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Vol.II.(Michigan:WM.B.Ee-rdmans, 1979), p.397.
완전한 평화는 지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 De Civitate Dei, 17권 13장.
완전한 평화는 굶주림도 없고 목마름도 없고 적들의 도전도 없는 하늘에만 있다고 한다. ) Ibid., 19권 28장.
그는 우리는 고유한 평화를 지금은 믿음에 의하여(by faith)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워 한다. 그러나 장차로 평화를 쳐다봄으로써(by sight)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즐거워 할 것이다 ) Ibid., 19권 27장.
라고 말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를 세분하여 10개의 영역들로 정리하였다. ) Ibid., 19권 13장.
이는 다음과 같다.
① 몸과 지체의 질서와 같은 육체의 평화
② 충동과 감정들의 질서 같은 비이성적 영혼의 평화
③ 사유와 행위의 질서 같은 이성적 영혼의 질서
④ 삶의 질서 같은 육체와 영혼의 질서
⑤ 신앙과 순종의 질서 같은 육체와 영혼의 평화
⑥ 조화의 질서 같은 인간들 사이의 평화
⑦ 다스림과 순종의 질서 같은 가정의 평화
⑧ 의견일치의 질서 같은 국가의 평화
⑨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인간이 서로 나누는 기쁨 같은 하늘나
라의 평화
⑩ 안정된 질서 같은 만물의 평화.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평화이해의 중요사상을 볼 수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와 질서를 마치 동전의 앞뒤면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평화의 한면은 질서요, 질서의 한면은 평화로서 불행한 사람은 위의 두 가지, 곧 평화와 질서의 안정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 Beach, Niebuhr, op.cit., p.120.
그러므로 평화는 사물의 본래적 질서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얻어지는 평화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평화론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그의 전쟁에 관한 이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원수사랑이라는 예수의 계명이 외적행동이 아닌 심정적인 문제와 관련되었다. ) U. Duchrow, G. Liedke, op.cit., p.146.
그래서 그의 윤리적 내향성은 외적인 폭력을 정당화 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른바 정당전쟁, 의로운 전쟁론을 산출했다. 전쟁은 평화를 위해서 시행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 Beach, Niebuhr, op.cit., p.118.
그는 로마제국은 저급한 영역에서 지상평화를 갈망했다.
이것은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이루는 평화, 로마의 평화(Pax Romana) 이다. 이런 전쟁을 통한 승리는 반항하지 못하게 하므로 평화가 오는 것인데, 그것은 물론 선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 Augustine, 하나님의 도성 , 정정숙 역 (한국복음문서연구회, 1974), p.185.
라고 했다.
전쟁의 목적은 두 가지로 평화와 정의의 수립과 수호 ) Baiton, op.cit., pp.129-130.
이다. 전쟁은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시되어야 하며,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속박에서 구출하여 평화롭게 살게 한다는 목적에서만 시행되어야 한다. 평화가 전쟁을 선동하기 위하여 고려되어서는 안된다. 전쟁은 오직 평화를 얻기 위해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도 평화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 Ibid., p.129.
그리고 권리침해에 대한 복수로서 시행되는 전쟁은 정당하다 ) Ibid., p.130.
고 규정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당전쟁론은 전쟁을 정당화 하기보다는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들을 한정하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전쟁의 파괴성을 억제하려는 것이었다. ) S. Thistlethwaite, 정의, 평화, 교회 , 박종화, 서진한 역(한국신학연구소, 1989), p.20.
그래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기준을 세웠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Ibid., pp.20-21.
* 전쟁은 사회의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합
법적인 권위에 의해 포고되어야 한다.
* 전쟁은 선한 의도로 수행되어야 한다.
* 전쟁은 선한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즉 전쟁 이후의 상황은 전
쟁 이전의 상황보다 더 인도적인 것이어야 한다.
* 전쟁은 분쟁해결의 마지막 방책이어야 한다. 즉 모든 평화적
인 수단들이 다 강구되었어야만 한다.
* 전쟁은 방어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공격적 이유로 수행되어서
는 안된다.
또한 파괴를 제한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 Ibid., p.21.
* 전쟁의 수단은 그 목적에 부합되어야 한다. 그 도구들은 그들
이 대항하고자하는 악의 도구보다 나쁜 것 이어서는 안된다.
* 전투요원과 시민은 구분되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쟁이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기준들에 합치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당전쟁은 한쪽에서만 정당화 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 Ibid., p.133.
그 당시에 그에게는 로마가 정당하였고 이방인들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당전쟁론의 jus ad bellum과 jus in bello의 구분, 곧 전쟁을 하는 정당성과 전쟁을 하는 정당한 방법의 구분은 그렇지만 암시해 주는 바도 분명하다. 그것은 전쟁이 항상 최후의 수단은 아니며, 국제법은 무시될 수 있고, 성공도 항상 예상되는 것은 아니다 ) WARC, pp.275-276.
라는 점이다. 기독교 평화는 어떤 이름으로도의 전쟁도 인정하지 않으며 정당화 하지 않는다. 전쟁은 무조건 찬성되어서는 안되고, 항상 도덕적인 판단에 근거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 ) Ibid.
C . 평화주의와 기독교 현실주의
평화주의는 그 어떤 것이든간에 생명을 빼앗는 것에 반대하고 그리스도인들의 군복무와 참전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이 입장은 일반적으로 모든 형태의 폭력적 행동을 거부한다. 설혹 그것이 더큰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것일찌라도 말이다. 이들의 평화이해는 그래서 비폭력 무저항이다. 이것은 콘스탄틴 이전의 첫 삼 세기 동안 교회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 Thistlethwaite, op.cit., p.19.
평화주의는 종종, 악에게 저항하지 말며 악을 없애기 위한 악을 쓰지 말라는 예수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해 왔다. 이들은 대부분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평화주의는 콘스탄틴 이후 시민 의무의 불복종 이라는 비판아래 교회에서 주변으로 밀려 나거나 아예 교회에서 밀려나 이단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 U. Duchrow, G. Liedke, op.cit., p.145.
발덴시안, 아씨시의 프란시스, 위클리프파, 에라스무스, 슈벵크펠트, 톨스토이, 슈바이쳐, 여호와의 증인, 마틴 루터 킹, 마하트마 간디 등이 평화주의자이며 특히 재세례파, 퀘이커파, 형제단은 역사적 평화교회 라고 불린다.
평화주의는 입장과 태도가 다른점이 있으나 공통적으로 비폭력주의이며 대개는 무저항을 평화로 생각한다. 그러나 무저항이라 할 때 여기에는 정의가 결여된 개념이다.
평화주의자들에 대한 오류와 비판은 그 누구보다도 기독교 현실주의자인 라인홀드 니이버에 의해 이루워졌다.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톨스토이 식의 평화주의와 무저항주의자들이 사회는 강제력이 없는 무정부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조직될 수 있다는 확신을 환상으로 취급하며 ) R. Niebuhr,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이병섭 역 (현대사상사, 1977), p.89.
평화주의자들을 현대판 기독교 완전주의자들로 생각한다. ) R. Niebuhr, Christianity and Power Politics (Archon Books, 1969), p.4.
그에 의하면 평화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사랑과 법과 죄 사이에 있는 갈등에 관하여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인류 사회를 위한 영속적인 평화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가졌던 양심과 통찰력으로 촉직된 비전이었지 집합적 사람들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에게서 기대하는 것과 집단에서 기대하는 것 사이를 구별해야만 한다. ) R.Niebuhr,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op.cit., p.277.
왜냐하면 개인으로는 도덕적이나 집단적으로는 비도덕적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견지에서는 최고의 이상이 무사성(unselfishness)이나 사회의 관점에서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가 된다. ) Ibid., p.264.
이러한 니이버의 입장을 기독교 현실주의라 하는데 니이버에 있어서 현실주의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말하며 이상주의에 대조되는 말이다. ) 맹용길, 기독교 윤리사상 (대한기독교출판사,1987), p.256.
그에 의하면 현대의 평화는 현존하는 권력의 불균형 안에서의 휴전에 불과하다. ) R.Niebuhr,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op.cit., p.243.
평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사회적 평등의 정의이다. 평등한 정의가 사회의 가장 합리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다. ) Ibid., p.248.
왜냐하면 사회는 이기적이고 야수적 집단이기 때문에 사회 안에서는 평화수립 과정에서 강제적 요소들이 인간의 부정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망하는 미래 사회는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있는 이상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의는 있되 그의 공동사업이 전적인 불행으로 되지않도록 강제력이 십분 비폭력이 되는 그러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 Ibid., p.41.
그런데 권력은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위하여 정의를 희생시키고 또 공동체간의 평화를 파괴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평화와 정의수립은 사회전략에 의존해야 한다. ) Ibid., p.40.
이 전략 가운데 평화보장을 위해 불가피한 폭력사용을 인정하는데 이 방법은 또한 부정당한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 Ibid., p.26.
니이버의 평화이해는 이런 관계들로 인하여 개인적인 것에서 보지 않고 사회 안에서의 평화에 촛점을 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의 인간관에서도 기인한다. 인간은 먼저 죄인이라는 인간 본성의 낙관적 견해를 수정하고 ) 맹용길, op.cit., pp.230-235.
인간은 사회적인 피조물 ) R. Niebuhr, Man's Nature and It's Communities (London:Ge-offery Bles, 1966), p.21.
을 강조한 데서 나온 것이다.
사회의 궁극적 목적인 평등한 정의를 통한 균형된 힘에서 나온 평화는 또한 그 평등속에 사랑의 법이 반영되어 있어서 평등한 정의는 사랑과 변증법적으로 관계되어서 나타나야만 한다. ) 맹용길, op.cit., pp.251-255.
그러나 이 평등의 원리는 완전하게 실현되어야 하지만 실현될 수가 없고 다만 우리의 삶 속에 타당하고 실천적이며 실용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Ibid.
결론적으로 평화주의는 사회에서 중요한 정의개념을 소홀히 했다면 니이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현대적인 정당 전쟁론의 계승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평화론은 오늘날 같은 핵위협의 시대에서 핵의 비축과 개발을 정당화 시켜주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D . 평화의 역동성과 정의
바이젝커(Carl Friedrich von Weizsacker)는 평화는 사회적 안목에서 본다면 서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하는 ) C. F. V. Weizsacker, 시간이 촉박하다 , 이정배 역 (대한기독교서회, 1987), p.106.
이러한 평화개념은 유일한 절대적 평화 가 아니라 어떤 하나의 평화 에 대한 논술일 뿐이라고 한다. 바이젝커는 예수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라고 하신 말씀을 평화이해의 중심으로 한다.
그는 이 말씀을 해석하여 평화란 만들어지는 어떤 것이다 라고 한다. ) Ibid., p.107.
또한 평화란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온다. 그 때문에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평화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만들어가는 일이 공공연히 위임되어져 있다. 나의 평화를 너희들에게 주고자 한다 고 하신 예수가 주고자 하는 평화는 이미 공동체 속에 있다. 여기서의 평화의 내면성에로의 길은 무엇보다도 평화를 준비하는 마음 속에서 평화를 추구해야만 하는 사실을 정당화해 주고 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평화를 준비하는 사람은 평화를 실제로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감동은 동일한 감동을 각성시키고, 즉 사랑은 사랑을 미움은 미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Ibid., pp.107-108.
평화는 역동적인 것이다.
바이젝커는 오늘날에 있어서 평화의 사역에 중요한 것을 전쟁의 극복에 두고 있다. ) Ibid., p.46.
우선적으로 그는 정당전쟁론은 타당치 못하다고 한다. 오직 정당한 평화만이 인간의 과제요 사명이다. 또한 전쟁의 정치적 제정의 극복은 인간의 계속적 생존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이유는 현대 무기기술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에 직면하여서 이다. 전쟁은 하나의 정치적 제도이므로 영구히 존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도로서의 전쟁은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바이젝커의 평화는 세계적인 정치적 평화추구 이다. ) Ibid., p.57.
그런데 자연과의 평화가 없으면 인류간에 어떠한 평화도 있을 수 없으며 ) Ibid., p.61.
정의 없으면 평화도 없고, 평화 없이는 정의는 불가능 하다. ) Ibid., p.27.
바이젝커는 평화를 자연과 정의와 관련시켜서 이해하였다. 사회정의의 기준 없이는 인간 세계 내에서 어떤 지속적인 평화도 존재치 않는다. 인간이 자연의 자원들을 다 소모해 버리면 사회적 정의도 불가능한 것이다. 즉 자연과의 평화 없이는 인간 사이에 어떤 평화도 있을 수 없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 상호간의 평화가 성립되지 않을 때 자연과의 평화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리드케(Gehard Liedke)는 평화를 하나의 과정, 하나의 길 ) F. Alt, 산상설교의 정치학 , 남정우 역 (보리사, 1988), p.
137.
로 이해한다. 평화가 하나의 상태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평화는 우리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며, 축제를 벌이고, 유희하며, 춤추고 공들여 이룩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리드케는 평화는 사회를 정의로 지배하는 상태, 삶을 위한 능력과 수단이 공평하게 분배되는 상태 ) Ibid., p.138.
로 규정한다. 다시 학문적으로 공식화하자면, 갈등을 일으키는 파벌의 한 체제의 극복 상태, 따라서 상반되는 파벌의 이해가 지양되는 상태로 정의된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학이 이 세상의 평화를 항상 하나님의 평화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종말론은 평화를 하나의 과정, 곧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과정이란 목표를 향한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과정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차원과 영역들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평화라는 목표를 지향하려는 항상 새로운 시도를 의미하며, 변화작업도 함축한다. ) Ibid., p.139.
평화의 이러한 과정적 성격은 평화를 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진정한 인간됨에 모순되는 요소들의 극소화, 감소화, 축소화의 노력을 의미한다.
리드케는 하나님 나라에 모순되는, 따라서 극소화시켜야 하는 차원들을 폭력, 가난, 억압, 불안이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의 정황에서 성서가 죄라고 부르는 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비평화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폭력, 가난, 억압, 불안의 종말을 희망하며 하나님이 가져올 때까지 이것과 투쟁하는 정의를 요청한다. ) Ibid., pp.140-141.
결론적으로 바이젝커와 리드케의 평화론은 성서의 평화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 개념은 실천적이며 하나의 과정으로서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역동적 평화는 정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두 사람의 평화론은 이 시대에서 가장 적절한 성서적 평화론이라 할 수 있다.
Ⅳ . 평화를 위협하는 구조들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구조적으로 평화가 없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 비평화의 현상은 비단 우리 사회의 국부적 현상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이다. 그래서 인류가 초래한 범세계적 비평화의 구조를 폴레히트하임은 거대위기 ) 오인탁, 평화신학의 성립조건들 , 장신논단 6집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90), p.142.
라고 칭하면서
1) 군비경쟁과 핵을 포함한 전쟁의 위험,
2)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빈곤의 심화
3) 환경파괴와 환경위험
4) 경제위기와 부의 편중
5) 억압과 민주주의 결여
6) 문화의 위기
7) 가정의 위기와 개인의 자아정체획득의 위기
라는 일곱가지 실존적 도전들로 파악하였다. ) Ibid.
이러한 오늘날 현실의 비평화에 대한 구체적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은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도와준다. 왜냐하면 평화를 위한 일은 평화가 파괴되고 상실되는 곳, 바로 그곳이 평화를 위한 일을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A. 사회의 구조적 부정의
갈퉁은 1969년에 발표한 그의 글 폭력, 평화, 평화연구 에서 구조적 폭력 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 ) 그리스도교 철학 연구회 (편) 현대사회와 평화 (서광사, 1991) 그는 지금까지의 통합 또는 협조라는 뜻에서의 적극적 평화개념 대신에 사회적 불의 라는 의미의 구조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구조적 폭력이란은 사회에서의 정의의 결여, 불의를 지칭하는 것이다.
사회안에서 부정과 억압은 반드시 거부되고 중지 되어야 하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 WARC, p.219.
그런데 우리 현 세대는 전래없는 5가지의 부정과 억압의 상황에 있다.) Ibid., pp.220 - 222.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기근과 기아의 문제
국제연합 국제아동긴급기금(UNICEF)의 보고서에 따르면 매일 4만명의 아동들이 굶주림에서 비롯된 원인들로 죽어가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성인들도 영양실조로 죽음의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같은 비극적 재난의 화근은 가뭄, 전쟁, 강제추방, 절대빈곤, 정치적 억압등이다. 그런데 이들 중 누구도 먹을 것이 있고, 먹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의 손길이 못 미치는 사람은 없다.
2) 인권유린의 문제
국제연합의 인권위원회에 의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억압적인 정부들에 의하여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고 산화되고, 암살당하고, 여러 모양으로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다는 보고와 함께 이런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 35개의 정부들이 자기네 국민들에게 긴급조치 나 계엄령 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정권 밑에서 사는사람들이 자국의 국가차원의 결정과정에 전혀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계엄령이 선포된 나라들의 지도자나 군부는 결코 정의로운 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계엄령이 의미하는 바이다.
3) 정부의 권위의 정당성과 부당성 문제
정부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항상 합법적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국민이 민주적선거를 거부당하고, 집권정부가 국민들의 권리를 알게 모르게 짓밟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군사력에 의하여 안보를 유지하고 있고, 집권당국이 그 나라의 국민들의 이익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착취하는 외세에 의하여 조정받고 있을지라도, 각 나라의 집권정부들은 자신들의 정권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한다.
4) 국제적 부채 위기 문제
제 3 세계가 걸머진 빚은 미화로 1조 2천 5백억 불이다. 여기에 관련된 문제가 복잡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음의 4가지 잇슈가 주된 문제로 등장한다.
①이 위기를 압도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은 주로 남쪽이고, 어느정도는 북쪽에도 해당하고, 특히 가난한 계층과 가난한 여성과 아동들이 이 위기에 영향받고 있다. ②이 위기는 국제문제를 유발시킨다. 왜냐하면 남과 북의 경제는 상호의존되어 있고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③가난한 사람들에겐 이자의 비율이 엄청나게 중요하므로 이 차관이 초래하는 위기는 남쪽 사람들에겐 생사의 문제이다. ④이같은 차관의 위기 때문에 경제적 성장을 진보와 동일시하는 북쪽의 지배적인 발전 모델은 ) 고범서 외 공저, 기독교 윤리학 개론 (대한기독교출판사, 1990), PP.255 - 256.
문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남쪽에 서 전개되고 있는 경제정책은 진보 가 아니라, 탈발전 의 과정이요 남쪽으로 부터 북쪽으로의 자금유출의 과정이다.
5) 피난민 문제
오늘날 전세계에 1천 5백만의 피난민이 있다. 수단의 난민을 포함해서 어림잡아 4
백만 명이 아프리카에 있다. 중앙아메리카에는 거의 90만 명이 자기나라에서 쫓겨나서 살고 있으며, 그 밖의 곳에서 73 만 명에서 1백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이 살 곳을 찾고 있다. 전형적인 피난민은 어린아이가 딸린 여자이다. 피난민의 숫자가 불어남에 따라 비례해서 그들을 기꺼이 쉽게 받아들이는 정부는 줄어든다. 많은 나라가 피난민들에게 국경을 차단하고 있는데 반하여, 세계적인 인권선언과 그 밖의 다른 국제조약들이 이 피난민들을 원래의 그들 나라로 되돌려보내는 - 따라서 모종의 위험과 대개는 죽음이 뒤따르는 - 것을 막고 있다. 미국 내의 교회와 보호소가 벌이는 운동이나, 도망쳐 온 사람들을 보호하려다 제 3 세계의 교회들이 당하는 위험은 거류자나 피난민에게 안전하고 좋은 거주지를 마련하라는 하나님의 위임명령과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율법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런데 교회가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법적 결정을 무릅쓰는 것이다. 사실 어떤 교인은 세상에서 복음을 이런 형태로 증거하기 위해 그들의 자유뿐 아니라 때로는 그들의 목숨까지도 건다.
이상 5가지의 문제들이 현 세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정당한 통치에 대한 도전을 대표한다. 이것은 현대세계의 구조악, 구조적 폭력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불의의 예는 각 나라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 한국기독교학회 (편), 한반도의 평화신학 정착 , 신앙과 신학 6집 (강남출판사, 1989), P.135.
B. 전쟁과 핵의 위협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결코 평화로운 세계가 아니다. 역사가 기록된 이래 오늘날보다 더 전재이 창궐했던 때는 없었다. 이런 전쟁에서 죽는 사람의 80%가 시민이다. 1700년 이래 전쟁의 빈도와 그 파괴성은 계속 심해져 왔으며, 20세기에 와서는 극에 달해 전쟁으로 인한 사망 대부분이 20세기에 일어난 것이다(90%). 이제는 더이상 시민과 전투군을 구분할 수 없다. 현대전이란 기본적으로 무차별한 것이 되었다. ) WARC., p.271.
클라우제비츠에 의하면 전쟁에서는 힘의 극대사용과 폭력적용 때문에 도덕적 힘이 작용할 수 없으며 인도주의자들의 이상도 발효되기 힘들다고 한다. 따라서 정당전쟁론은 최후적 수단으로서 전쟁을 허용하지만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 그 자체로서 수행되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의 표준을 내세워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억제 하려는 것이며 전쟁을 하는 가운데 내세운 표준은 지켜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 한국기독교학회 (편), op.cit., p.25.
그러므로 전쟁이 있는 한 평화는 없다. 물론 평화는 전쟁이 없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에는 전쟁이 없어야 하며 바꿔 말하면 전쟁이 있는 곳에나 전쟁이 일어날 위험성이 있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평화를 추구하는 곳에서는 전쟁이 억제되어야 하고 가능하면 전쟁이 전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 Ibid., p.26.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불안들은 장차 있을지도 모를 원자전에 집중하고 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1945년 이래 1982년 12월까지 계속 실시된 핵 실험은 총 1375개에 달한다. 1200개는 미국과 소련이 한 것이고 나머지 175개는 불란서, 영국, 중국, 인도 등에 의한 것이었다. 1963년 이래 대기 중에서의 핵 실험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지하 핵 실험은 계속되었다. 이렇듯 모든 책임있는 사람들이 금지조항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 U. Dochrow, G.Liedke., p.26.
더 나아가 전면적인 핵전쟁이 가져올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 훑어보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남반구의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반구에서도 사실상 중요한 모든 도시가 파괴될 것이다. 수백만이 폭발과 화염폭풍으로 죽을 것이다. 방사능 낙진은 더 많은 사람을 서서히 죽게 할 것이다. 방대한 지역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며, 시체에 접촉했던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곤충들이 질병을 급속히 퍼뜨릴 것이다. 오존층 또한 심각한 파괴를 입을 것이며, 핵 겨울로 지구의 기온은 급격히 내려가고, 지구 전체 생물권이 붕괴될 것이다. 계속해서 엄청난 농작물이 수확에 실패할 것이고, 기근이 지구를 휩쓸 것이다. 오랜 기간 계속되는 생태계 변화의 영향으로 생활 상태는 영구히 바뀔지도 모른다. 이런 엄청난 상황을 완전히 표현해 줄 적당 한 단어가 없을 지경이다. 핵 전쟁은 일종의 마지막 사건이 될 것이다. ) WARC, PP.272 - 273.
오늘날 미-소간의 관계가 진전이 되고 핵무기의 일부가 소거되고, 다양한 지역분쟁이 다소 희망적인 분위기가 되는 등 최근 몇년 동안에 지리 - 정치적 상황에 있어서 뜻깊고도 희망적인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 상황은 훨씬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 Ibid., p.224.
현 핵무기 비축문제는 여전히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계속 폭탄이라는 유령과 아마겟돈 에서 피에 젖은 최후 전쟁이 있으리라는 망령에 시달리며 살게 한 다. 현재의 5만 5천개의 핵무기가 갖고 있는 파괴력이 1만 6천 메가톤(이는 TNT 160억 톤에 상당하는 것이다) 인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이제 막 자멸하려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게다가 1982년 이래 두 초강국은 이미 막대한 양의 핵무기를 비축해 왔으며, 일격에 이길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지금도 적극적으로 시험에 시험을 거듭하고 있다.
다른 핵무기 소유국들도 자기네 병기고에 넣을 새로운 무기들을 계속 생산하고 있다.
우연히 - 사람이 잘못하거나 기술적인 문제로 -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핵전쟁의 가능성도 간과될 수 없으며 어떠한 핵전쟁도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다.) Ibid., pp224 - 225.
그리고 또한 지역분쟁 문제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은 역사의 그 어떤 때보다 많은 전쟁이 창궐하고 있다. 이 분쟁들은 인종적, 종족적, 부족적, 종교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며, 단일민족국가들 내부에서나, 지역적으로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군대가 그 나라의 지배종족 출신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힘을 가진 정부가 그 나라안의 다른 종족들은 없애기 위해 이 군대를 이용한다. ) Ibid., p.225.
전쟁은 세계의 군비 문제가 심각하게 작용한다. 전쟁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인 군비는 우리 생각을 넘어서고 있다. 이 비용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이 비용은 정부와 직결되어 있는 강력한 군산업시설과 관련되어있다. 통계에 의하면 미화로 1백 80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돈이 매분마다 전세계의 군비로 쓰이고 있으며 이 수치는 최소한 지난 25년간 끊임없이 상승곡선을 그려왔다. 그에 더해서 막대한 양의 돈이 새로운 형태의 화학전 및 세균전 개발을 위해 투입되었다. 이 모든 비용은 단순히 어마어마한 재정의 낭비가 될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다수의 불평등 위에 세워진 제국적 구조를 지탱해 주고 있다. 이 구조 안에서 세계 인구 중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세계 총생산량 중 극히 일부를 나눠 가지려 서로 싸워야 하는 반면, 부유한 나라와 그 국민들은 더욱 더 부자가 된다. 한편 오늘날 제 3 세계의 국방 예산은 1960년보다 7배나 올랐다. ) Ibid.
결론적으로 이러한 전쟁과 핵 위협의 시대에서 전쟁이라는 말앞에 어떠한 미사여구를 붙인 전쟁도 비기독교적이다. 특히 핵시대의 오늘에는 더욱 그러하다. 전쟁은 그 자체가 평화를 깨는 폭력이다.
C. 생태학적 위기
오늘날 자연은 죽어가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생태학적 위기 라는 표현은 오늘의 사태를 나타내기에는 약하고 부적절하다.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 는 생태학적 위기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모든 삶의 체계의 위기 ) J.Moltmann, 창조안에 계신 하나님 , 김균진역 (한국신학연구소, 1986), p.38.
를 야기시키고 있다.
맥헤일은 생태학적 위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이 지구를 우주의 역사상 가장 위험스러운 유기체로 만든
것은 아주 최근에 발생한 일로서 극히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
났다. ) 그리스도교 철학 연구소,(편), op.cit., p.259.
또한 모리슨도 인류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그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자연이라는 선물을 이
용하며 변형시켜 왔는데 그것은 자연 환경에 많은 영향을 미쳤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발견, 기술 조직적 숙련의 수
준은 인간의 환경에 대한 요구와 인구수준에 맞추어 자연의 평
형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지난 몇 십 년 동
안 에너지, 물, 공기 및 그 밖의 원료 그리고 열려 있는 공간
을 필요에 따라 함부로 남용하였고 그 결과로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특히 폐기물 처리에서 그러
하다. ) Ibid.
이와 관련된 밀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인류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오늘날 생택학은 참으로 인
류가 생태학적 위기 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 Ibid., p.260.
한편 바우헤이는 생태학적 위기를 이렇게 관찰한다.
지난 20년 동안 계속 우리는 인구, 공해, 소비, 독소,
긴장 등을 너무나도 많이 만들어 냈다. 반면에 식량, 에너지,
주거, 교육, 건강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나도 부족한 상태
에 있다. 우리는 화석 연료, 광석, 농경지, 녹지, 야생 생물,
공기, 물, 처녀림 등의 자원을 낭비했다. 재난은 닥쳐왔다.
재난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생태계의 모든 지평
에 걸쳐 있다. ) Ibid., p.260.
또한 생태학적 위기를 WARC 보고서는 6가지 사실로 지적하고 있다. ) WARC, pp.229 - 231.
1) 온실효과 문제
앞으로 몇십년에 걸쳐 지구의 온도는 급격히 상승할 것이며,
과학자들은 이 현상이 핵전쟁 다음으로 지구를 파괴시킬 수 있
는 원인이 되리라 생각한다.
2) 산림파괴 문제
전세계적으로 열대림의 파괴는 피조질서와 온 인류에게, 특히
제 3 세계 국민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산림파괴는
가뭄과 사막화의 원인이 되며 생물의 종을 멸종시키는 주요한
원인이며, 또한 온실효과 를 심하게 만든다.
3) 산성비 문제
특히 화석연료의 연소로 인한 대기오염은 이미 북반구의 많은
산림과 호수를 파괴시켰을 뿐 아니라, 사람의 폐까지도 파괴시
켰다.
4) 인구팽창 문제
5) 무한한 경제성장 문제
산업사회는 자기들이 무한한 경제성장을 계속해서 할 수 있으
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경제발전에 따르는 지구자원에는 한계
가 있다.
6) 막을 수 없는 생물공학 문제
생물공학이 산업에 응용되며 전세계에 경제적인 압력을 줄
수 있다. 더 나아가 산업국가들은 이 유전공학기술을 군사적
인 목적에 이용하고자 한다.
이상과 같은 생태학적 위기들이 인간의 위기, 곧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D . 일반적 폭력
평화연구에 있어서 또 평화실현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폭력화의 문제이다.
평화운동은 그래서 육체적인 폭력만이 아니라 가난, 억압, 차별, 소외, 저개발 등을 포함한 구조적 폭력을 없애려는 노력이다. ) Ibid., p.320.
그래서 평화는 폭력으로부터 자유한 곳에서 얻어진다. 이것은 탈정치화나 권력에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J. Moltmann, 예수 그리스도의 길 , 김균진, 김명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p.191.
권력은 지배 내지는 통치권을 갖는 것이고 대상자에게 거기에 대한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힘이다.) 오재식, 권력과 폭력 , 기독교사상 제31권 (1987.5),p.35.
이 힘의 행사가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동의가 있는, 즉 정당한 절차를 거친 동의일 대 이것은 정당한 것이 되지만 이 권력의 행사가 공동의 합의를 배반하고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부당하게 행해지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 Ibid.
폭력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이다. 폭력이라는 말은 라틴어 비올라레(Violare)에서 왔고, 이것은 법을 위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폭력은 어떤 종류의 법을 전제하고 있고, 그 주어진 법이 옳은 법이냐, 틀린 법이냐를 물어야 한다. ) 노정선, 폭력에 대한 신학적 해석 , 기독교사상 제31권 (1987.5), pp.22-23.
폭력에 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개념은 대체로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 맹용길, 크리스챤의 사회의식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pp.140-141.
첫째, 폭력은 불법적 강제력(illegitimate force) 이다. 이 개념은 법률적인 것으로서 다른 사람의 의지나 욕망에 대항하여 결단의 효과를 내기 위하여 강제력을 불법적으로 또는 공인 받지 않고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살인은 폭력의 행위이지만 사형집행은 폭력의 행위가 아니다. 폭력은 단순히 물리적 강제력이 아니고 이 물리적 강제력을 불법적으로 또는 비도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상처를 입히는 물리적인 강제력(injurious physical force)이다. 즉 상처를 주거나 악용을 하기 위하여 물리적 강제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상처를 입히고 재산에 손해를 주도록 고안된 행위이다. 여기서의 촛점은 물리적 행위로 인하여 결과로 나타난 상처나 손해가 관찰할 수 있는 현상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강제력을 폭력으로 취급하지 않고 상처가 일어났을 때에만 폭력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물리적 강제력으로서 물리적 공격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 개념에서는 경제적 착취나 재산상의 피해나 심리적 공격이나 사회적 갈등은 폭력에 관련될 수는 있지만 폭력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상처가 있을 때에만 폭력으로 간주된다.
세째, 폭력은 피할수 있는 상처(avoidable injury) 이다. 즉 어떤 사람이 신체적 고통을 받고 병신이 되거나 죽는 것 뿐만 아니라 자유나 기회, 기쁨을 빼앗기고 고통을 당하는 것도 포함시키는 것이다. 여기서의 폭력은 어떤 사람이 폭력을 피하려는 합법적인 기능까지 방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경우 개인이나 제도상으로 드러나거나 숨겨질 수 있다. ) 맹용길, 폭력에 관한 신학적 이해 , 신학사상 제11집(1975.), p.801.
즉 개인의 경우 드러난 경우는 물리적으로, 강간이나 살인 등이며 숨겨진 폭력으로는 협박 같은 심리적 공격이다. 제도적이면서 드러난 경우는 폭동이나 혁명, 전쟁이며 숨겨진 폭력으로는 노예제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포괄적인 개념이다.
위의 것을 쉽게 정리하면 첫째의 개념은 구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폭력이고, 둘째 개념은 직접적인 폭력이며, 세째 개념은 잠재적인 폭력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 모든 개념들에는 공통적인 요인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공격 -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지 - 이라는 말과 그 공격에 의한 상처 이다. ) Ibid., p.802.
그러므로 폭력은 브라운의 말처럼 비인간화 시키는 행동은 폭력의 행동 ) 고재식, 사회문제와 기독교윤리 (대한기독교출판사, 1990), p.143.
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폭력은 순환적 성격이 있다. ) Ibid., pp.144-146.
폭력을 몇가지로 보느냐하는 것은 학자마다 다르겠으나 문동환 교수는 5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문동환, 인간사회와 폭력 , 기독교사상 제 31권 (1987.5), pp.15-16.
제1폭력은 체제적 부정으로서 모든 폭력의 원초적 요인이다. 이것은 기존체제가 가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부정의를 의미한다. 즉 사회체제가 인간을 비인간화 내지는 물화시켜 버릴 때 언제나 존재하는 폭력이다.
제2의 폭력은 집권자의 불의에 대항하여 기존체제의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폭력이다. 동맹휴업 혹은 동맹파업을 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단식을 한다든지 심지어는 분신자살을 하여 지배자들의 자세변화를 촉구하는 그것이다. 이것이 더 공격적으로 나갈때는 투석전을 벌인다거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요인을 암살한다는 극한적인 방법으로 까지 발전한다. 이 폭력은 어디까지나 제1폭력에 항거하는 폭력이요 시정을 촉구하되 몸으로 하는 언어이다.
제3의 폭력은 기존체제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기존질서를 부정하는 반역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으로 카마라는 이것을 진압 ) 고재식, op.cit., p.145.
이라고 한다. 기존세력이 법과 질서의 미명 하에서 더 큰 폭력을 휘둘러 항거자들을 억압하는 폭력이다. 불법연행, 고문, 투옥이 그것이다. 이런 폭력은 정부차원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 어디에 가도 이런 강자의 무자비한 보복적인 폭력은 자행된다.
제4의 폭력은 강자들에게 이미 의사를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 제도가 굳어져 갱신의 여지가 없게 될 때 나타나는 폭력으로 이것은 제도의 완전부정이다. 가정의 경우는 가정의 완전파괴요, 국가의 경우에는 혁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쌍방이 다 출혈을 해야 하는 대결이요 어떻게 보면 새 질서가 탄생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진통이기도 하다.
제5의 폭력은 어떤 제도를 장악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악한 제도에 항거하기 위한 것도 아닌 그냥 사회에 난무하는 폭행이다. 거리에 횡행하는 깡패들, 칼을 들고 담을 넘거나 총을 들고 은행에 쳐들어가는 강도들과 같은 무리들의 폭력이다. 이런 폭력들은 사회의 기강이 허술해지고 그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가 타락했을 때 난무하는 병적인 현상이다. 특히 지배층이 도덕적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리에 어긋나게 폭력으로 백성을 지배할 때 이와 같은 병적인 폭력이 더 횡행한다. 이와같이 폭력은 인간의 평화를 파괴하는 주요 요소이다.
Ⅴ .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
본 장에서는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로 기독교에서 평화를 이해하는 신학적 근거는 무엇이며, 평화를 저해하는 문제들의 극복을 위한 평화의 구원론적 기초와 방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윤리 차원에서의 평화수립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A . 평화와 정의의 계약신학
계약이라는 용어는 구약성서에서 거의 3백번이나 나온다. 계약이란 말은 히브리어 베리트 ) 고영민 편, 성서원어대전 (서울:기독교문사, 1973), p.58.
인데 이 말에 대한 한글 번역은 계약 , 맹약 , 동맹 , 약속 , 조약 , 규약 등이며 영어 표현으로는 언약 , 조약 , 결속 , 약속 , 약정 , 화해 , 협정 , 협약 , 서약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 R. B. Girdstone, Synonyms of the Old Testament (Michigan:Eerdmands Pub., 1981), p.213.
성서적인 의미에서 계약은 대등한 자간의 계약도 아니며 하나님과 그 백성이 함께 세우는 계약도 아니다. 오히려 성서에서 계약은 우선 편무적이며 은혜에 찬 선언이다.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시며, 세우시며, 보증하시는 계약이며, 그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살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는 특권 ) WARC, p.215.
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맺으신 계약은 전적으로 구원을 위한 구속의 계약 ) O. P. Robertson,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 김의원 역 (대한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p.97.
이다. 이런 하나님의 계약 목적에 대한 하나님의 변치않는 신실하심이 노아의 계약, 아브라함의 계약, 시내산 계약, 다윗 왕조 계약, 예레미아의 새 계약을 거쳐서 ) W. J. Dumbrell, 억약과 창조 , 최우성 역 (크리스챤서적, 1
990), pp.251-255.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 (고전11:23-26; 눅22:14) 안에서 곧 그의 죽음을 통해서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 W. G. Kummel, 신약성서신학 , 박창진 역 (성광문화사, 1991
), p.105.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과 사역에서 새 계약질서, 하나님 나라를 고지하셨고 세우셨다.
또한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반영된 계약정신에 따라 순종하고 행동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계약속에 담긴 이스라엘의 윤리는 철저하게 신학적인 것이다. ) C. J. H. Wright,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 정옥배 역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1), p.31.
그래서 계약의 하나님은 우리의 깨어지고 험악해진 세계가 계약을 맺으며, 정의를 행하고 평화를 세우고 이 땅을 돌보며 이 땅의 식구들을 존중하며, 그 산물을 똑같이 나누며, 강한 자와 약한 자가 같은 일, 같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신다. ) WARC, p.215,
성서에서 계약은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을 나타내며 이 계약은 일방적 계약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계약사상은 평화.정의.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계약에 대해 어떠한 불평도 각하시킨다. 성서의 계약사상은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이 의미하는 바를 새로이 인식해야 하며, 하나님의 계약을 인식하게 되면 반드시 평화.정의.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하게 된다 ) Ibid., p.382.
는 사실을 의미한다.
WARC가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 과정에 참여하는데 대한 신학적 근거가 바로 계약신학 이었다. ) Ibid.
실행위원회가 첫 모임을 1983년 2월에 가지면서 평화와 정의를 위한 계약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Ibid., p.379.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회가 평화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요구하시는 신앙의 명령이다. 각 교회는 핵무기가 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과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없으며, 결국 확실한 평화는 상호전쟁을 저지하는 전략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고 각 정부로 하여금 상호신뢰를 쌓는 방안을 간구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 ) Ibid., pp. 379-380.
이에 더해서, 위원회의 계약 선언서는 ) Ibid.
평화는 전쟁이 없다는 것 이상이다. 평화란 한 공동체가 서로를 존중하며 유대와 정의를 나누는 것이다 고 말하면서 평화와 정의의 관계를 지적하였다. 평화와 정의는 불가분적이며 , 정의의 실천없이 평화의 실천이란 없는 것 이라고 선언하였다.
계약신학은 구약에 뿌리내리고 있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신학으로서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동시에 계약공동체의 의무수행을 강조하는 바, 행위를 무시하는 반(反)율법주의를 극복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이 계약신학의 장점은 계약공동체의 의무 에 해당하는 내용을 구약에서 가져올 수 있는데도 있다. ) 한국기독교학회, (편), 한반도의 평화신학 정착 , 신앙과신학 제6집 (서울:강남출판사, 1989).
이같은 계약신학의 두 축은 복음과 율법, 신앙과 행위, 율법의 제3사용이라고 하는 개혁교회의 신학적 주제들과도 맞아 떨어진다. ) Ibid.
B . 그리스도의 평화와 비폭력
폭력으로 부터의 해방, 평화를 이룸으로써 가능한 적대관계의 극복이 산상설교의 중심을 형성한다. ) J. Moltmann, 예수 그리스도의 길 , 김균진, 김명용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0), p.189.
이것은 다음과 같은 표상을 전제하고 있다. 즉 인류의 본래적인 죄는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폭력의 행위이며, 따라서 인류의 구원은 공동의 삶에 봉사하는 평화에 있다 ) Ibid.
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제사장 문헌군(P문서)의 전승에 의하면 죄는 땅 위에서 폭력을 행하는 데에 있으며,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홍수를 내린다. 유대교의 해석들도 파라다이스의 이야기를 원죄론을 가지고 해석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아벨에 대한 가인의 형제살인과 함께 죄가 시작하였다고 본다. ) Ibid.
그리고 성서에 따르면 이 가인이 첫 도시 건설자였다(창4:17). 르네 지라르가 지적했듯이, 이 문헌들에서 사회건설과 폭력이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무릇 인간사회는 폭력에 바탕해 있다는 - 어느 경우에는 대개 몰락되고마는 - 인식을 엿보이게 한다. ) G. Lohfink, 산상설교는 누구에게 , 정한교 역 (분도출판사,1990), p.186.
지라르에 따르면 ) Ibid.
폭력의 혼돈을 억제하려는 바로 거기서 사회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 억제가 달성되는 것 자체도 또한 또다시 오직 폭력을 통해서 이다. 따라서 인간사회는 이미 그 뿌리에서부터 폭력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다.
또한 창세기 6장 13절에 의하면 땅 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 Moltmann, op.cit., p.189.
이 무법천지 는 무엇인가? 분명히 그것은 폭력의 행위와 압제의 확장에 있다. 창세기 6장은 인간과 신 사이의 교만한 중간존재를 낳기 위하여 천사들이 여자와 결합하였다는 고대의 신화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창세기 6장 4절에 의하면 세상에서 폭력적인 자들 , 독재자들 ) Ibid.
이었다. 이들은 바벨론과 에집트에 있는 실재적 지배자들인데, 이들은 자신을 종교적으로 신의 아들 로 숭배케 함으로써 그들의 폭력적 통치권을 정당화시키고 신들의 이름으로 그들의 백성을 복종시킨다. 하나님에 대립하며 삶을 폐기시키는 폭력의 행위는 창세기 6장에 의하면 인간의 세계를 넘어서 그 속에 살아 숨쉬는 모든 육 위에 엄습한다. 그것은 먹고 먹히는 법칙 속에 있는 동물의 세계 위에도 엄습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홍수가 모든 육 위에 내린다. ) Ibid., pp.189-190.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폭력행위의 제한을 설정하셨다. 첫째는, 인간은 무생물적인 자연에 이르기까지 생활계에 주어진 창조속성을 파괴하지 말며 ) Odil Hannes Steck, 세계와 환경 , 박영옥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0), p.183.
둘째는, 다른 모든 생명체에게도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생명과 그 나름대로의 생활권 안에 들어있는 생활 가능성이 보존되게 하며 ) Ibid.
세째는, 인간 이외의 생명살해는 기본적인 생활요구와 인간의 몸과 생명에 대한 모든 위험으로 부터의 탈피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Ibid.
그런데 이 모든 폭력의 행위뿐만 아니라 폭력적 제한도 극복하는 창조의 평화는 지혜의 메시야 가 비로소 가져온다. ) Moltmann, op.cit., p.190.
메시야에 의해악이 극복되어질 뿐 아니라 악으로 악을 보복하는 법칙이 극복될 것이며, 폭력의 행위가 극복되어질 뿐 아니라 폭력적 저항을 통한 그의 제한도 극복될 것이다(마5:46). ) Ibid.
그러므로 평화와 폭력문제는 메시야의 말씀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다른 어떤 규범이 있을 수 없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폭력의 악순환의 극복을 다음과 같은 산상설교에서 제시 해 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달라는 사람들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들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 (마5:39-42).
이 산상설교에 의하면 원수사랑 은 이웃사랑의 완전이며 하나님께 상응하는 형식이며 땅 위의 지속적 평화에 이르는 길이다.
다시말하면 원수를 극복하는 길은 그의 악을 묵살하는데 있다. 악은 상대자와 저항력을 잃을 때, 우리가 자진해서 악을 참고 악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서 참을 때 그 힘을 잃고 기진하게 된다. 이 때 악은 괴롭게 할 대상을 잃기 때문이다. ) D. Bonhoeffer, 나를 따르라 , 허혁 역 (대한기독교서회, 19
90), p.127.
제자는 악을 악으로 알아야 하고 예수가 한 것 같이 악은 악하다고 증거해야 한다. 그 까닭은 이렇게 하는 길만이 악한 자를 때리고 넘어뜨리는 유일한 방법인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맞서는 악 이것은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악인 때문에 제자는 오히려 맞서지 않고 참음으로 악이 끝나게 하는 것이다. ) Ibid., p.128.
이것이 폭력의 약함이요, 여기에서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 극복 ) H. D. Wendland, 신약성서의 윤리 , 전경연 역 (대한기돋교출판사, 1980), pp.92-99.
이 시작한다.
바울도 산상설교를 받아들여 악을 선으로 이겨내라 (롬12:21)고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이 되어사는 삶의 존재양태이며 사랑은 윤리의 최고 규범이다. ) J. Moltmann, op.cit., p.194.
원수사랑은 복수하는 사랑이 아니라 창조적 사랑이다. ) Moltmann, op.cit., p.191.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은 악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준다고 했다. 이것은 곧 원수사랑은 모든 차이, 불평등, 대립의 종식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U. Dochrow, G. Liedke, 샬롬 , 손규태, 김윤옥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9), p.141.
사랑이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살고 분열을 극복한 하나님의 행위인 것이며 이 행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혹은 화해인 것이다. ) D. Bonhoeffer, 기독교윤리 , 손규태 역 (대한기독교서회, 1
989), p.165.
그러므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가 우리의 평화이고, ) WARC, pp.50-54.
평화는 화해 곧 원수사랑으로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 극복이다.
C . 평화와 시민적 저항
R. 니버는 폭력은 악의지 의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표현이고 비폭력은 선의지 의 표현이라고 보는 신념은 큰 과오라고 한다. ) Niebuhr,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op.cit., p.184.
폭력과 비폭력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은 그것들이 일으키는 파괴의 정도에 있지 않고 공격적 성격과 소극적 성격의 차이라 한다. 비폭력은 본질적으로 비협력이다. 그것은 평범한 사회 과정 - 납세, 통상 등 - 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비폭력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형태의 저항 ) Ibid., pp.248-249.
이다. 그러므로 무저항과 비폭력적 저항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비폭력 자체도 강제와 파괴를 가져오기도 한다. 무저항과 비폭력적 저항을 혼동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간디이다. ) Ibid., pp.250-251.
한편 폭력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몰트만은 두 가지를 ) Moltmann, op.cit., p.192.
제시하고 있다. 첫째 형식은 권력의 행사를 법과 결부시키는 것이고, 두번째 형식은 폭력의 통치권을 거절하고 이 통치권과의 모든 협동을 거부하면서 형성하는 국민의 연대성에 있다. 그러므로 그는 적극적인 비폭력 행위만이 해방하는 능력을 가진다고 한다.
R. 니이버나 몰트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구조적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비폭력적 저항 정신이 필요함을 보게 된다.
그런데 교회는 그리스도가 이미 시작하신 새 창조의 증거요 표본으로서 부르심을 입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새 창조를 다시 보여 주는 대리 공동체이다. ) WARC, p.48.
교회는 단순히 구별된 개인이 아니라 다같이 협력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행14:22). 교회가 당하는 고난은 잘못된 행실 때문이 아니라 시민적인 저항을 포함한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 Ibid., p.281.
그것이 이 세대의 세력을 이기는 은혜의 승리에 교회가 들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도래할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쁘게 믿음을 의미한. ) Ibid.
예수의 원수사랑 의 말씀은 행동적 비폭력이었으며 이것은 평화에 대한 명령의 핵심이라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적 실현화는 작은 출발과 더불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즉 폭력의 최소화는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U. Duchrow, G.Liedke, op.cit., p.142.
피조물과 정의의 영역에서 폭력은 보다 큰 폭력의 발발을 방지하거나 제한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폭력의 최소화, 이것은 창조세계와 정의의 영역에서 도출되는 윤리적 요청을 실질적으로 요약한 것으로 권장되고 있다. 모든 폭력의 최소화에서는 이 지상에서의 삶의 육성 이 적극적으로 중요하다. ) Ibid.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예수가 그의 시대에서 행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서 샬롬, 즉 정의로운 평화의 약속에 대해 할 수 있는대로 분명히 하고, 또 평화와 정의를 위해 평화와 정의 안에서 행동해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 Thistlethwaite, op.cit., p.48.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실제적인 정치세계에만 속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을 다스리시는 부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에 기초되는, 영적인 실천의 문제로서 교회가 증언해야 할 문제이다. ) WARC, p.378.
그래서 교회는 불의에 대해 시민적 저항을 해야 한다.
Ⅵ . 결 론
A . 요 약
II장에서는 평화의 개념을 살펴 보았다. 평화는 일반적으로 소극적 의미와 적극적 의미의 개념이 있다. 소극적 의미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이다. 적극적 의미에서 평화는 사회 정의의 상태, 민주적 갈등의 조정, 국가간의 협력의 상태로 규정된다. 반면 기독교 평화개념은 이 둘의 의미를 연결시키지만 정의의 강조를 통하여 평화의 적극적 개념을 우선시키는 포괄적 의미의 우주적 평화이다.
평화는 구약성서에서는 샬롬, 신약성서에서는 에이레네 라는 낱말이다. 샬롬은 총체적인 완전성과 온전성의 의미로 하나님의 구원이며, 개인이나 공동체의 건강, 조화, 통일이다. 에이레네는 샬롬의 영향하에서 쓰여진 것으로 샬롬의 의미에 흡수된다. 성서에서 평화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종교적 개념이며, 정의와 연결되어 있고, 관계적 개념으로써 메시아적인 종말론적 희망이며 실천적 개념이다. 또한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로써 그리스도의 화해사건이면서 그리스도와의 연대관계 속에서 획득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Ⅲ장에서는 제 평화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로마의 평화는 힘의 지배애 의한 승리를 바탕으로 한 평화질서이다. 예수는 이것을 거부했다. 또한 평화론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정당전쟁론 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떠한 이름으로도 미화된 전쟁도 인정하지 않는다. 평화주의의 악과 불의에 대한 침묵적 평화나 현대적 정당전쟁론의 기독교 현실주의도 또한 기독교적 평화론에 대신할 수 없다. 평화는 역동적인 것이고 정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Ⅳ장에서는 평화를 위협하는 구조들을 구체적 사례들에서 살펴 보았다.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정치적, 경제적인 구조적 부정의가 있으며, 또한 전쟁과 핵의 위협은 더욱 가공할 만한 요소이다. 이와 더불어 심각한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폭력의 난무는 오늘날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들이다.
Ⅴ장에서는 이런 연구들을 바탕으로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위해 폭력을 단념하라고 하셨다. 원수사랑의 비폭력만이 기독교적 제자들의 행동규범이며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다. 또한 이것을 명령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평화의 주이며, 평화를 주시며, 평화를 이룩하신 화해 사건이다. 그의 전 사역은 평화를 위한 것이며 그래서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화가 본질적 사명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폭력의 최소화를 위해서 일하는 시민적 저항이 동반해서 이다.
성서는 세상의 불의에 대해 침묵이 아닌 비폭력적 저항의 항거를 말한다. 이러한 것의 신학적 근거는 계약신학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을 통해 사귐의 관계를 가지신다. 계약에 따라 인간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할 책임을 갖게 된다. 따라서 평화란 공동체가 서로를 존중하며 유대와 정의를 나누는 것으로 평화와 정의는 불가분적이며 정의의 실천 없이 평화의 실천이란 없는 것이다.
B . 평가 및 제언
평화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평화의 사역을 위한 선결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적 정리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보다 깊은 연구를 통해 수정 보완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한계점과 불완전성을 인식하면서 필자는 두 가지 면에서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대해 평가하고자 한다.
첫째로, 기독교 평화이해의 출발점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평화를 이야기 하는 것은 평화가 파괴되는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 해결책으로 내세워진 대안적 이념이 아니다. 또한 위대한 신학자나 사상가의 인생철학에서 비롯된 교훈에서도 아니다. 기독교가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케 하는 선교의 사명을 갖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 예수의 탄생이 평화이며(눅2:14), 예수의 전 사역이 그가 주시고 구현하신 평화의 맥락 안에 요약되어 있다. ) WARC, p.31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롬5: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를 주신다(요14:27).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평화를 말하는 출발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둘째로, 평화의 사역에서 그 평화가 미치는 범주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평화는 인간과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사회에서의 평화를 말한다. 그래서 평화는 전쟁의 부재, 인권의 보장 또는 사회정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적 평화이해는 모든 자연만물까지 포함하며 자연은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 형제와 자매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구원의 대상으로 본다. ) U. Duchrow, G. Liedke, op.cit., pp.48-50.
따라서 자연과의 평화없이는 인류간에 어떠한 평화도 있을 수 없다. ) Weizsacker, op.cit., p.65.
평화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우주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와 정의의 범주는 자연을 포함한다.
이상과 같은 평가와 함께 필자는 몇가지 제언을 하므로 본 논문을 끝맺으려 한다.
첫째, 평화에 대한 논의에 그 신학적 근거가 더욱 명료하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평화에 대한 이해를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성서적이며 신앙적인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
둘째, 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고 새롭게 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와같은 교회는 화해의 사역을 위탁받았다. ) WARC, p.151.
그러므로 평화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하나님의 위임사상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지고 연구되어져야 한다.
세째, 우리는 진정 평화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 Ibid.
그래서 평화의 위탁은 선교의 사역을 포함한다. 그래서 평화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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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사 의 글
지금까지 신학공부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사회윤리와 본회퍼의 신학을 가르쳐 주시고 논문을 마치기까지 지도 편달해 주신 유석성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논문이 나오기까지 지도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던 강근환 교수님, 전성용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공부하는 동안 항상 주위에서 충고와 용기를 주었던 김영암 목사님, 박문규 전도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시고 힘이 되어주신 부모님과 가족 모두에게 감사와 이 논문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