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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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배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 이 이야기는 자료를 바탕으로 쓴 전기가 아니라 본인과의 방담을 기억나는 대로 기술한 개인적 회상록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내가 조교하고 있을 때 이 선배가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하다 특별 사면으로 출소해서 복학했거든. 비는 시간에 내 방에 와서 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듣게 된 경험담이니 벌써 40년 가까이 지난 기억이야. 그러니 많이 편집되고 각색되어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겠지. 그래도 그냥 재미로 들어주면 좋겠어.
1.
이○○ 선배는 ○○ 국문과 재학시절에 문리과대학 학생회장을 지냈어. 특별히 학생운동에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워낙 성실하다 보니 학생들이 등을 떠밀어 그렇게 되었다고 해. 하필이면 그 시기가 1974년이었던 것이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았던 게지. 당시 전국 동시 시위를 계획 중이던 학생운동권에서 이○○ 선배를 주목했던가 봐. 같은 과 선배였던 김○○이 추천했겠지.
1974년 4월 8일 거사하기로 한 전국 동시 시위는 사전에 들통나 실패로 끝났어. 박정희는 4월 3일 관련자 전원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다는 특별 조치를 발표했잖아. 그날 영어 수업시간에 영문과 배영남 교수가 긴급조치 4호 포고문을 손에 들고 낭독할 듯하다가 겁난다고 손에서 떨어뜨리던 일이 눈에 선하구만. 어찌 되었든 ○○의 주도자들은 사전 검거되고 일부는 검거를 피해 피신하여 계획대로 4월 9일 시위를 준비했다고 해.
4월 9일 두 세명의 선배들이 ○○동 오거리에서 스쿨버스에 올라타 유인물을 뿌렸다고 하더라고. 나도 그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목격했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배는 국문과 전○○ 선배였어. 저번에 잠깐 이야기한 농대 박○○ 선배는 그 전날 밤 상대 올라가는 길에 자갈과 벽돌을 쌓아 놓았다고 하더구만. 실제로 시위를 시도했지만, 교수들과 직원들의 만류로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 같아. 이○○ 선배는 문리대 학생회장이라 4월 8일 사전 검거돼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던 가 봐.
좌우지간에 민청 선배들은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해. 박정희 엄명으로 전국 시위를 준비했던 학생들에게는 주로 대구지역의 혁신계 인사들의 사주를 받아 좌익혁명을 일으키려 반국가 단체를 구성했다는 어마어마한 혐의가 씌워졌지. 대구지역 혁신계 인사들 8명은 사형 확정판결이 나기도 전에 사형집행 명령이 하달되고 판결이 내려진 다음 날 새벽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이야. 국제사법학회에서 이 날을 암흑의 날로 지정해서 지금도 추념할 정도로 세계적인 인권 유린 사건이지. 이 여덟 분 중에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은 경북대 총학생회장 여정남이야. 이 사람을 연결고리로 시위 준비 학생들과 엮은 거지. 여정남과 친분을 맺고 있던 다른 지역 학생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았겠어?
여덟 분 중에 김수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일어 강사를 하면서 혁명을 일으켜야만 박정희 독재를 끝낼 수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다녔다는구만. 그리고 대구지역 혁신계 인사들을 스스로 찾아가서 지도 편달을 간청했다는 설이 있어. 나는 이 분들이 혁명을 위해 내란을 일으킬 의도가 정말 있었는지, 실제로 시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해. 더구나 이 사람들이 전국 시위 준비 학생들을 사주했다는 혐의는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봐. 다만 이 분들이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졌을 개연성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해. 내가 79년 광주교도소에 잠깐 있을 때 이 분들과 함께 인혁당으로 엮인 인사 중 한 사람에게 유물사관을 처음 접했거든. 중요한 것은 사상과 이념이 그 사회의 주류와 다르다고 해서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지. 각설하고 이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은 이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 이 분들 중 대부분이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호형호제하던 동지들이었다니 좀 아이러니하지. 암튼 이 사건에 막내뻘로 불려갔다 풀려난 사람이 한 분 있었어. 이재문이라는 민족일보 기자 출신이야. 우리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니 기억해 두길 바라.(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