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재위654~661)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무왕1년(661)에 세운 비석(국보 25호)이 있는 곳
현재 비석돌(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귀부,龜趺)과 용을 새긴 머릿돌(이수,離首)만 남아있다
높이가 110Cm인 머릿돌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다
머릿돌 중앙 깨진 부위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라는
여덟 글자가 두줄로 돋을 새김되어 있다
길이 333Cm, 너비 254Cm, 높이 86Cm 이며 거기에 조각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신라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북이가 힘을 줄 때 턱밑이 붉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석의 붉은 부분을 거북이의 턱으로
삼은 신라인의 치밀한 계산을 볼 수 있다
거북이의 앞발가락이 다섯이고 뒷발가락은 넷인데, 이는 거북이가 힘차게 나갈 때 뒷발의 엄지 발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고 힘을 주어 전진하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거북이 등에 새겨진 구름무늬와 당초문, 보상화문, 머리와 목의 주름 그리고 입가에 입김과 콧김까지
새겨둔 조각의 치밀함이 신라 예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전진하는 거북이(귀부)의 모습이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친다
머릿돌(이수) 뒷면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54~661) 릉
무열왕(김춘추)은 신라 중대의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려고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 대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 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속에 묻혀 있다 (사적 제20호)
무열왕릉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김춘추는 미남이고 능변이어서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당나라에도 그의 인품과 수완으로 외교가 성공되어 왕에 오른지 7년(660) 군사의 지원을 받아 백제를 멸하였다
무열왕릉 뒤편에 있으며 무열왕과 가까운 왕이나 왕족의 무덤일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이다
흙으로 원형이나 타원형이 되도록 둥글게 쌓아올린 봉분 높이는 15m 미만이지만 밑둘레가 110~140m나 된다
김인문(金仁問)을 기리기 위한 비석 받침돌(귀부)이 있는 비각
김인문 비석 받침돌 귀부
거북이 등 위의 선명한 조각과 비신을 올려 놓았던 곳이 잘 보존되어 있다
김인문 비석 받침돌 거북이의 뒷발가락은 다섯개 이다
귀부
머리를 들고 있는 거북이
무덤 밑둘레 82m 지름 29.9m 높이 6.5m 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의 김인문(629~694) 묘
김인문은 신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와 김유신장군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말년을 당나라에서 보내다가 효소왕때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태대각간이라는 관직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