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
정푸른
내 몸에 니스를 칠해요
상처에 휘발성 알데히드가 스며들면
쓰리고 아파요 어차피 마데카솔을 바른다고
낫는 것도 아니잖아요 썩어가는 건
방부제 같은 니스로 딱지를 앉히는 거죠
유성페인트는 칠하지 않을래요 덧난 피부 위에
화사한 핑크슬립을 걸치고 있으면
토할지도 모르잖아요 패이고 짓무른
물밑으로 나의 결을 들여다보며 견디는 게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죠
당분간은 비 와도 걱정 없어요
싸구려 니스라도 방수가 되니까요
진한 립스틱으로 창을 뻥 내겠어요
벽이었던 그곳에 둥근 숨통을 트는 거죠 언젠가
푸른 이파리가 자라서 나올지도 모르죠
아마 헷갈릴 거예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뻣뻣하게 굳어서 번질거리는 얼굴이
나의 문패가 될테니까요
그래도 아직 나는 보일러도 돌지 않는 냉골이에요
당신이 내 아랫목을 더듬는 건 싫어요
Russi
정푸른
느끼한 숲, 어디에도 잎의 내음은 사라지고 없지요
싱그러움이 넘치는 곳이 한때 나의 거처였지만
후다닥 떨어진 우박처럼 잎을 흔들고 간
생의 허름한 뒷골목에서
팬티를 내리듯 머금고 있던 푸르름을 벗어버렸지요
스타킹 올이 나이테처럼 풀릴 때면 가끔
나의 태생, 숲을 떠올리곤 하지만 물기 마른 웃음으로
이내 활짝 발자국 소릴 기다리지요
아, 이제 구역질도 말라버렸어요 빗방울 소리 어디 없나요
눈가에 구겨진 올이 늘어날수록 고사목의 껍질을 닮아가는
나는 Russi
758-6969
전화벨 소리에 나의 잎은 바스락거리지요
향비파 표주박
정푸른
그대의 소릴 담고 싶은 소리의 빈 방 같다
깊이 파인 아무도 발 들여놓은 적 없는 유적지
메마른 입술이다
이름 알 수 없는 신라 장정의 근육들
박물관 진열장에 신화처럼 일어섰다 가라앉는 음이 되어
울림통에 잠들어 있다
그대의 힘줄에 오래된 먼지들이 가늘게 떨린다
옷고름이 하나 둘 풀리는 듯하다
볼록하게 부푼 몸 위로 짧지 않은 대나무 술대*가
비단 그림자에 맞춰 연신 내려치고, 올려 뜯고
색다른 음계 헤쳐 들어간다 관능이다
그대의 연주에 각기 다른 음색으로 올라온 낮은 신음들
오무라졌다 펼쳐지는 잘게 그어진 현들이 일순간 떨리면서
소리의 향연들 진열대에 울린다
나는 한껏 젖어있다
빈 방에 색다른 음색이 환청으로 와 닿아 내 입술,
돋은 입술은,
* 향비파를 연주할 때 줄을 퉁기는 막대
당선 소감
항아리는 늘 숨쉬고 있었습니다.
장독대에 앉은 고추잠자리의 한 철 무게를 느끼며, 그렇게 안으로 그늘을 재우고 있었습니다
항아리의 뚜껑이 열리던 날, 오래 묵은 그늘은 차마 눈뜨지 못했습니다. 비스듬히 열린 뚜껑 사이로 비춰오는 햇살이 눈부셔 깜빡이다 겨우 실눈을 떴습니다. 거친 호흡을 기꺼이 삭여주던 질그릇 안에서 맑게 숙성된 언어의 맛을 찾기 위해 가라앉혔지만 여전히 탁하고 어둡습니다. 햇살이 어둠을 뚫고 저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소금기 가득한 내 안을 가만히 익혀줍니다. 아직 설익은 맛이지만 내안에 있는 떫은 맛, 신맛, 짠맛 다 우려내고 푹 익혀지고 나면 맑은 시의 맛이 나겠지요.
덜 익은 제 詩의 하얀 꽃가지 걷어주시고 손가락 끝으로 맛보시며 고개 끄덕여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약 력 : 진주 출생, 남가람 문학회 회원
심사평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쓰는 시
본선에 올라온 신인 후보는 6사람이다. 그중 정푸른의 <리모델링> 외2편과 지하선의 <미스터리 셋팅>외 2편을 당선작으로 올린다. 당선작들은 어깨에 크게 힘이 들어가지 않은, 비교적 투명하고 비교적 체험의 변방 가까이에 놓이는 것들이다.
정푸른은 <리모델링>과 <Russi>에서 상처받은 현대인의 아픔을 지나친 의식의 외도로 가지 않고 구도의 단순성과 집중도로써 형상화해 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리모델링>은 집에 대한 리모델링이면서 화자의 리모델링으로 나아간다. 니스를 칠하는 리모델링은 지극히 자조적이다. 그 자조가 스스로의 내면을 드러내는, 지극히 솔직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고삐를 놓지 않고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지하선은 <미스터리 셋팅>과 <부엌문>에서 각각 시적 제재를 그녀라 부르고 화자와 오버랩시키는 기법을 보여준다.<미스터리 셋팅>은 쥬얼리(장신구) 셋팅의 기법을 드러내는 것인데 피가 흐르는 생명체에 닿아 있는 것으로서의 탈기법까지 가는 것에 대한 이해이다. 현대는 모두가 비생명, 비진실이라는 것인데 텃치가 그런 증세를 보기 좋게 극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미당이 '시적 자인의 퍼센티쥐'라 한 바 있는데 지하선은 이 작품 밖에서도 그 퍼센티쥐가 높은 시, 말하자면 그가 체험해 놓은 것에서의 이미지 또는 정서라는 데에 충실하고 있는 시를 보여주고 있어 든든하다.
선에서 제외된 배옥주나 김진기, 정광주, 황은화의 시들도 각기 개성을 잘 드러내는 가편들을 보여준다.배옥주의 투명한 이미지 전개,김진기의 앞뒤 구성력, 정광주의 언어의 숙련도, 황은화의 내면의 탐색 등이 그것이다.응모자들은 전반적으로 오늘의 현대시가 가는 주류에 편입되는 시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 시에서 빠진 부분들이 무엇인가, 스스로의 값이 어디에 놓이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한 번쯤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강 희 근, 노 향 림
첫댓글 정푸른님도 산청문인협회 회원이거든요. 산청문인협회 회원으로 있다가 신인상을 받고 공식데뷰를 하는 것이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정푸른님 신인공모전에 당선되시어 신인상을 받고 공식데뷰를 하심 추카추카 또 추카 드립니다...